Diary/Life2018. 11. 5. 17:54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이중표 역해




이 책은 '법륜스님의 금강경'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위하여 내 귀한 친구가 일부러 비교해보며 읽어보라고 보내주신 책이다. 'Don't look a gift horse in the mouth' 라는 서양 격언이 있다. 선물받은 말의 이빨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직역할수 있는데, 말의 이빨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말의 이빨 상태를 점검해보면 나이나 건강상태 이런 것들을 확인할수 있기 때문이다. 남이 호의로 선물을 했으면 그 선물을 점검해보고 좋네 나쁘네 따지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내 소중한 친구가 선물을 보내 주셨으면 나는 그 선물에 대하여 무조건 감사해야 할 일이지 이렇네 저렇네 따지는 것은 참 오만방자하고 무례도 그런 무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나는 내 친구에게 무례를 저질러야 하는 운명인것을. 


뭐랄까, 이 책은 오랫동안 불교공부에 심취해 있는 내 친구가 선뜻 보내줄만큼 좋은 책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머릿말에서부터 돌에 걸려 넘어지는 형국이다. 





저자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 머릿말만 읽어보면, 나는 여기서 멈추고 더이상 이 책을 읽지 않을 것같은 분위기이다. 


저자는 과거에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던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나라가 되었고, 가장 염치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었고, 가장 고통스러운 땅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나도 모르게 '오 마이 갓' 탄식을 하게 된다.  만약에 저자가 정말로 오늘의 한국의 현실을, 한국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풀이한다면, 나는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이 설명한 '금강경'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 눈에 비친 이 나라는 역동적이고 잘 커나가고 있으며 이 땅의 사람들은 저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선량하기 때문이다. 


자살율이 세계 1위인 나라? Are you sure?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82%B4%EB%A5%A0%EC%97%90_%EB%94%B0%EB%A5%B8_%EB%82%98%EB%9D%BC_%EB%AA%A9%EB%A1%9D


자살율이 높지...하지만 세계 1위라고 하시면 그건 사실이 아니지.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 

https://ko.wikipedia.org/wiki/%EC%B6%9C%EC%82%B0%EC%9C%A8%EC%88%9C_%EB%82%98%EB%9D%BC_%EB%AA%A9%EB%A1%9D


과장하신것이지. 


청소년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

전세계 26개  OECD국가중에서 그나마 일본, 호주, 뉴질랜드, 아이슬란드 빼고, 22개국 중에서 최하위.  그런데 이 세상에는  OECD국가만 있는게 아니므로 이 역시 정확한 말씀이 아니고.


데이타를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의 세계관에 맞게 대충 편집하여 설명을 하신듯 한데... 만약에 금강경을 그런식으로 설명하신다면 나는 사실 확인도 할 수가 없고...



우리의 '삶과 전통'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고 그는 역설하나, 정말 우리의 과거가 현재보다 좋았는가? 조선 시대가 대한민국 시대보다 더 살기 좋았는가?  절대적 비교를 할수는 없지만, 지금이 훨씬 낫다. 여권 신장이나 인간 평등문제 이런 저런 것을 비교해봐도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곳에서 있었던 '억압'과 '구속'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살기 좋다. 


이분의 세계관이 이런 식이라면, 이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설명하는 '금강경'은 또 얼마나 한반향으로 치닫을 것이며, 금강경을 잘 모르는 나는 이 사람이 설명하는대로 끌려갈수밖에 없는게 아닌가?  이런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지.  한마디로...이분의 머릿말은 어딘가,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ㄲㄷ'를 연상시킨다. 음...법륜스님의 설명에서 내가 커다랗게 '물음표'를 달았던 곳은 없었다.... 전형적인 '곰방대' 물고 앉아서 '세상이 엉망이고, 모든것이 패륜이며, 말세가 왔다'고 떠들어대는 뒷방 어르신적 어투인데, 어딘가 복고적 유머는 될지언정 오늘날의 화법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다. 





이걸 어쩌나... 하지만 이 책은 내 친구가 선물한 책이니 나는 끝까지 읽을 것이다.  문제는 이미 내가 이 저자에 대해서 어떤 거부감이 슬슬 들고 있으므로 과연 그의 본의를 제대로 파악할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그건 그렇고,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인데, 그럼 '니까야'는 뭘까? 사실 책의 머리에 있는 설명을 읽어봐도, 심지어 구글 써치를 해봐도 '니까야'가 뭔지가 잘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추측컨대, 석가세존이 사용한 언어 (팔리어)로 정리된 불경. 그러니까 말하자면 '원전'인것 같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경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이런 것을 익혀서 원전에 다가가려고 애쓰듯이, 불교에서도 석가의 제자들이 직접 적었던 인도의 원전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있을 것인데, 이 책이 그 원전을 바탕으로 해석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자현'스님이라고, 불교사 강의를 잘 하시는 발랄한 스님이 있는데, 이분 설명에 의거하면, 불교의 발원지는 인도이지만, 불교를  성문화, 역사화한것이 '중국'이라는 평이다. 중국인들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문제는 인도어를 중국어로 정확히 옮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어느 언어든지 정확히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인들은 최선을 다해서 번역작업을 하되, 여전히 남아 있는 빈틈을 그대로 놓아두었다고 한다.  그 빈틈은 -- 불교적 상상력으로 각자 채워 넣을수 있도록.  그리고는 자신들이 번역한 불경에 의거하여 공부와 수행을 해 나갔다고 한다. 일단 번역을 마친 후에는 원전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불교'를 세계화 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중화사상'을 유지한 셈이다.  그래서, 불교를 알건 모르건 한국의 대중들도 대체로 한문으로 씌어진 불경에 익숙하고, 절에 가도 온통 한문으로 씌어진 글귀를 볼 수 있다.  이런 문화적인 이유로 내게 '니까야'라는 말 조차 생소했을 것이다. 역시 자현스님의 설명에 기대어 내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제 먹고 살 만해졌기 때문에 한문으로 씌어진 불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원전도 들여다보고 더 잘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 한국이 먹고 살만해져서 일반 대중이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도 접하고 그러는 것이다. 한국이 저자의 말대로 지상 최악의 망가진 나라라면 저자가 쓴 '니까야 금강경' 같은것을 들여다볼 사람도 없다. 현실 파악을 똑바로 하셔야 할 듯 하다.  (하지만, 내가 불교에 대해서 일자무식이니 그의 깊은 뜻을 어찌 알랴, 저렇게 말할땐 저럴만한 혜안이 있으실지도 모른다.)


나는 리차드 도킨스의 역저 '이기적유전자' 책을 굉장히 싫어한다.  굉장히 싫어하지만 그 책은 현대인이 반드시 읽어야하는 좋은 책이라고 믿는다. 책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별개이고 그 책이 인류사에 차지하는 비중만큼은 높이 사는 것이다. 내가 그 책을 굉장히 싫어하는 이유는, 그 책에 설명되는 유전자의 무한확장하고자 하는 무시무시한, 끝 모르는 욕망과 그 생존 원리에 수긍을 하면서도 그 생존원리에 강한 거부감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매우 정교하게 수립되었다는 것을 부정할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책을 싫어하지만 그 역저는 존경한다. 



이 책의 경우는...일단 머릿말이 이미 정나미가 떨어지는데, 과연 이것이 역저일지 긴가민가.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보고 손톱의 때만 들여다보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되니...그의 정수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겠지만, 이미 사고체계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니, 약간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긴 하다. 하지만 뭐, 내 친구가 좋다는 책이니까 읽으면 좋을것이다. 

October 24, 2018





1독후기 (November 5, 2018


글을 쓸때 주의 해야 할 사항: 자신이 전문적으로 잘 아는 것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이 유익하다. 내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내가 잘 아는 이것과 내가 피상적으로만 아는 '저것'을  논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하여 설득력있는 글을 쓰다가 자칫 실수하는 대목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벗어나서 비 전문 분야에 대한 평을 할때이다. 촘스키 선생도 그의 저작에서 아시아 혹은 한국 문제를 논할때 삑사리를 내셨고, 개미 선생 에드워드 윌슨도 그의 전공인 생물학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문화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역시 삑사리를 내곤 했다. 왜냐, 그쪽엔 또 그쪽 전문가가 있는 법이니까.


이중표 선생은 335페이지에서 '선법이란 법이 아닌것'을 논하면서 엉뚱하게 기독교에 대한 평을 한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평은 이러하다. 

기독교의 경우 선과 악은 모순 대립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을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다고 본다. 천사와 악마, 여호와와 사탄, 이 둘은 영원히 대립 투쟁하는 존재다. 천사는 악마가 될 수 없고, 악마는 천사가 될 수 없다. 악은 싸워서 없애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 선법은 신이 내린 율법이다. 십계명이 곧 선법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평화는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이 세상에서 몰아내고 기독교가 온 세상을 지배할 때 가능하다. 


 자, 내가 별로 깊게 공부하지 않은 예수쟁이인데, 그러니까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말이다.  내가 거의 십년 가까이 예배당 드나들면서 성경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공부했지만, 기독교에서 '선/악'의 모순 대립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성경의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다. 


천사는 악마가 될수 없고, 악마는 천사가 될수 없다고? 일단 '타락천사' Lucifer가 있다. 대천사 (하느님의 오른팔과 같은 큰 천사)였는데 타락을 해서 사탄이 되었다던가? 그러니까 일단 문서상으로 천사는 악마가 될 수 없다는 단언은 틀렸다. 악마가 천사가 된 케이스는 들어보지 못했다.  악을 싸워서 없애야 할 대상이라고 어디에 적혀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몇차례 통독한 성경 구약/신약을 통틀어서 하느님이나 예수님이나 '악'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으신듯하다.  하느님이 뭐가 답답해서 '악'과 싸우시는가?  여호와와 사탄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여호와하고 사탄이 동일 선상에서 경쟁하는 구도가 아니다. 욥기에 사탄이 등장하는데, 사탄이 욥을 상대로 내기를 거는 장면에서도 하느님은 태평이시다. 상대가 되어야 대립이 되는거지. 사람하고 개미하고 대립이 성립하는가?  이중표선생하고 구더기 한마리하고 대립이 성립되는가? (대립을 원하시면 그건 개인 취향의 문제이고)  사탄도 '불가식으로 표현하면 -- 방편'쯤으로 해석될만하다. 여호와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피조물이라는 얘기다. 


불교에서 선악에 대한 관념이 명확히 자대고 죽 그은 것이 아니라 연기의 법칙에 의거한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는 듣도 보도 못한 기독교의 어떤 '있지도 않는' 개념을 막 끌어다 대시면 안된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하여 논하지 않으셔도 된다. 그냥 아는 말씀만 하시라.


기독교에 십계명만 있는줄 아는가? 그거보다 더 높은 법이 있는데 (더 높다고 할 수는 없고...어우러지되 으뜸이 되는 법이 있는데) '사랑'이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내 놓고 세우신 '전 인류에 대한' 사랑. 그것이 법이다. 선법이고 악법이고 떠나서 절대법이다. 언제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몰아내야만 평화가 온다고 했는가? 예수님은 사람의 개별적인 가슴 가슴에 이미 천국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기독교다.  마치 불가에서 인생 인생에 불성이 심어져 있다고 설파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가슴 가슴에 천국이 왔다고 하셨다.  피상적인 기독교의 어떤 일면만 보고 '이것이 기독교다'라고 자신의 '불교'책에 막 써대는 것은 전문가의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제발, 자신이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논하시면 좋을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나는 기독교 목사님들이 불경공부 한번 제대로 하지도 않은 주제에 피상적으로 불교는 어떻고 저떻다. 그래서 기독교가 최고다라고 떠드는 걸 볼때 뒤통수를 한대 쥐어 박고 싶다. (그냥, 니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마....내가 챙피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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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깊이 사색하게 만든 대목은 두가지이다. (책을 읽고 났을때 내가 혼잣말로 정리한 것이 화엄경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체유심조'이고 금강경은 '무주상보시'  그리고 금강경에서 내게 다가온 두가지는 '무쟁'과 '업은 있되 사람은 없다'는 말.)


무쟁. 다툼이 없는 경지에 오를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무쟁, 그거 예수님도 설파하신거임...왜냐, 그분이 '사랑'인데 다툼이 있을수가 없지 않은가?), 업은 남되 사람은 남지 않는다는 논의는 내가 사회생활을 할 때, 어떤 사건이나 문제 상황에 대하여, 인간적인 변수를 가능하면 배제하고, 문제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도록 동기화 하는데도 좋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마 그 업은 남되 사람은 남지 않는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서 떠나지 않았던 근본적인 '고민' 혹은 '의문'이 따로 있다.  좋다. 무주상보시도 좋고, 뭐 나와 타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한 몸이고 뭐 다 좋다. 다 좋은 말씀이다. 그런데 내 근본적 의문은 이거다 -- 그런데 실제 삶에서 정말로 이대로 실천을 하는 이가 있는가?  소설 '겨울여자'에서 주인공 이화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가족 이기주의'가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내 가족 우선, 내 자식 우선 그런 인간적 이기심에서 그녀는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냥 구별하거나 차별하는 마음없이 사랑을 주고 싶은것이다.  이화의 태도가 좀더 보살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금강경을 읽고, 외고 가르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이런 보살도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선 나부터 좋은 옷 입고, 내 가족부터 좋은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내 아이들이 좋은 학군에 가야하고, 가능한 좋은 차 타고 가능한 폼나게 살면서 무주상보시를 행동화 할수 있는가?  무주상보시는 그냥 '이상'이고 그리 가려고 조금조금 노력하면 되는건가?  자기 잇속은 다 따지면서 무주상보시를 매일 왼다면 무주상보시는 악세사리인가?  내 삶을 좀더 우아하게 보이게 하는 치장물?  (기독교인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비싼 보석 십자가목걸이 같은것?)  뭐 이런 회의감이 자꾸만 들어서 생각이 분산되곤 했다.  그런데,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해를 읽을때는 이런 잡념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이가 좀더 설득력 있게 내게 설명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밑줄 긋고, 따로 적어 놓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말씀이 많이 있으니, 귀한 책이다. 


내가 이 책 읽으면서 새삼 발견한 사실. 챕터가 넘어갈수록 기시감이 들면서, 이거 아까 한 말씀 또하네. 비슷한 말씀 또하네...그러니까 어떤 '나선형'처럼 논의가 되풀이되면서 깊어지고, 다시 아까 그 얘기로 돌아갔다가 방향이 바뀌고 그런다. 성철스님이 자꾸만 반복하고 설명하고 반복하면서 조금 다른 얘기 하시고, 그러는 화법이 기이하게 여겨졌는데 금강경 인도어 원전에 바로 그런식으로 논의가 이어진다. 나선형 구조의 말씀집이다. 새로운 구조적 발견이랄까. (이런 구조로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기시감이 들긴 하는데 조금 다른 이야기, 조금 다른 전개, 그러면서 이야기는 이어지는). 


법륜스님과 이중표님의 금강경 해설집을 차례차례 읽고나서 두 책을 비교해보면 (이것은 무식한 독서가의 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평가인데), 법륜스님은 '승'으로서 그가 들여다 본 보통 사람들의 실질적인 삶과 금강경을 통찰하여 설명을 한것처럼 보이고, 이중표님은 불교 이론가로서 불경에 대하여 공부한 것을 설명한것처럼 보인다. 삶을 꿰뚤어보는 통찰력은  법륜스님쪽이 돋보이는것으로 평가된다 (극히 주관적인 평가이다). 학문적인 어프로치는 내가 어차피 학문적으로 불경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므로 잘 알 수 없다. 단 이중표님은 그냥 불경얘기만 하시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 그가 불경 외에 다른 것을 끌어올때 대개 삑사리가 난다.  그리고, 물리학 이론 함부로 종교경전에 갖다 붙이고 해설하러드는것 역시 위험해보인다. 안그래도 된다. 아는것만 말하는 것이 좋다. 말할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비트겐슈타인). 


김용옥선생의 금강경 강해는 어떨지 슬슬 호기심이 인다. 나중에 심심하면 그 때 읽어봐야지. 


그래서 내가 생각해 본 것인데, 금강경이라던가 불교라던가 혹은 다른 종교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컨대 동일한 '금강경'이라는 경에 대한 설명을 하는 자세 혹은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을 보면, '법륜'스님은 이걸 사골 우리듯이 푹 푹 우려서 진국을 충분히 끌어낸 후에, 적당히 소금 치고 후추치고 뭐 파송송 얹고 해서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과 더불어 상을 차려 허기진 사람에게 조촐한 한상을 내 주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참고로 나는 사골국 같은 고깃국 못 먹는다. 아주 타고난 중이지 ㅋㅋ_)  vs. 이중표교수님의 금강경은 어딘가 뭐랄까 사골을 비싼걸 사다 끓이긴 하는것 같은데, 요리에 정성도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어딘가 설 끓고, 후추 소금 이런 간도 잘 안 맞는데 거기다가 아스파라거스나 뭐 이런걸로 장식을 시도하기도 하고 뭔가 소문난 식당인데 맛은 그저그런.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은 '불교'라는 집에서 편안히 살면서 자유자재로 들락거리는데 (본래 집이란 거기서 살면서 들락거리는것이지 집 안에서만 지내라는게 아니지.), 어떤 사람은 '불교'라는 집에 갖혀 지내는 모양이라. 바깥세상이 어떠한지도 모르는 가운데 제 집이 최고라고 창밖에 소리를 지르는 형상이라. 집에 갖혀 지내는 그 사람이 그 집의 구조나 모양새 장판지 이음새나 벽지 무늬에 대해서 소상히 알수는 있을지언정 그이는 집의 지붕이나 집 주위의 나무나 지붕위에 내려 앉은 새나 이웃집 사람들이나 도통 알수 없는거라. 


극단적으로 종교에 갖혀 지내는 자들이 '사이비교'에 들어가 정신 못차리고 패가망신하거나 남을 패가망신 시키거나. 


종교는 갖혀지내는 교도소나 무덤이 아니라, 사람이 편안히 살도록 지어진 집이니 창문도 내고, 출입문도 내고, 이웃과 소통하는 오솔길도 내고, 시루떡도 노나먹고 그래야 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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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