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18. 11. 3. 00:00

자현 스님의 조금 특별한 불교이야기



자현스님이 인도에서 태생한 불교가 더운나라 인도라는 지리적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고타마 싯타르타가 어떻게 당시의 상업문화와 연결되는지, 책의 부제에서 보여주듯 '자본'과 종교 혹은 '권력과 종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 관계를 중심으로 불교사를 대충 정리해 주었다.  이 책에는 인도에서 서방으로 그리고 중국으로 불교가 전승되고 중국에서 불교가 어떤 양상으로 전파되었는지까지 대충 설명해준다. 한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간 불교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다. 쓰다가 만 책 같기도 하고....용두사미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는데, 뒤로 가면서 뭔가 저자가 쓰기가 귀챦아졌는지 허둥지둥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의 무식의 소치일수도 있다.) 게다가 결론 부분에 가서는 -- 아니 왜 이러시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한 느낌이 들고마는 성급하고도 거친 맺음이었다.  뭔가, 글로 써서 정리하고 설명하기보다는 강의를 더 잘하시는 분인지도 모르지. (강의는 잘 하신다.)




우선 불교와 상업자본이 당대의 한 흐름이었음을 설명하신 부분은 내게는 새로운 배움이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상업-교류의 가치나 효과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눈을 감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과문한 탓인지, 새로 배운것 또 한가지.  브라만교의 카스트제도. 그것을 단순히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의 4계급 정도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충 알고 있었는데, 이 표를 보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농경민-원주민-흑인등이 그들이 말하는 '불가촉 천민' 들이었다.


돌아보면 한국, 조선 땅에서도 '농자천하지대본야'라고 띄워주긴 했으나 정말로 농경민이 제대로 사람대접 받고, 사회의 지배계층이던 시기가 있었는가?  권력은 항상 '골품'에 기반한 귀족층과 무력을 가진자들, 그리고 돈을 가진자들이 나눠먹고 있었고 농민들은 늘 그들이 수탈해도 되는 만만한 개살구아니었던가.  나는 이런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고타마 싯타르타도 그것을 꿰뚫어보았다. 놀라운 혜안이다. 그가 신분제를 척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이 신분제도 자체를 타파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잘 알수 없다.  그는 일단 브라만교의 신분제도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은것 같은데,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그것을 타파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인으로서의 한계였을지도 모르지. 역시 잘 모르겠다. 




이 자명한 이치를,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도대체 세상을 어떻게 살아온건가? 어리둥절해진다. 


현대사회에 와서 '불교'만이 살아갈 해법이고, '순종'이나 '예속'을 표방하는 다른 종교 (기독교)는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안된다고 그는 책을 마치며 설파한다. 그 부분이 어딘가 책쓰다가 피곤해서 대충 쓰고 지나간 부분처럼 보인다. 


현대인인 나는 불교를 제법 많이 공부하고 그 쪽길을 가다가 기독교도로 전향을 했는데, 나는 기독교에서 그가 말하는 '해탈' '열반'의 실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빗방울'의 비유를 들어서 -- 하나의 빗방울이 대해에 들어가 '대해'가 되는가, 아니면 하나의 빗방울이 대해에 들어가 빗방울 가운데에 대해를 품는가하는 문제로 불교의 종파를 이렇게 저렇게 구분지었는데, 어쨌거나 빗방울이 대해에 스며들건 아니면 대해를 빗방울에 품건, 그러한 길로 가기위해 내가 선택한 것이 기독교라는 것이지. 


자현스님과 내가 생각을 달리 하는 부분은 근본적으로, 종교는 도구인가 목적인가 하는 점이다. 자현스님은 이 책에서 '종교'를 '행복하기 위한 도구'라고 정의했다. 내가 불교의 테두리 안에서 살때는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것 같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되었을때 종교는그것이 궁극적으로 내 삶의 목적인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내 삶의 도구는 아니더라는 것이다.  한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을' 말로 전하는 과정에서 그는 '도구'라는 용어를 취했을지 모른다. 


또 한가지, 자현스님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도는 '자아가 독립'적으로 열반을 향해 수행해 나가는데, 유일신교(예, 기독교)에서는 유일신에 '예속'되는 것이므로 자아가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구분을 한다. 이 때 나는 빙긋 웃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모르지 않는다. 기독교도 입장에서 설명을 하자면,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때,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예속된 것인가? 자식은 부모에게 예속된 것인가?  자식이 부모에게 예속 隷屬되었다면 그것이 노예 奴隸와 다를것이 무엇인가?  내가 일부러 한자표기도 했는데, 그 '예'자가 동일하다. 기독교에서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하하하. 어쨌거나 책의 서두에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 양상을 구약시대의 폭군적이고 무서운 하느님에서 -- 신약시대의 사랑의 하느님으로의 변모에 대한 설명은 놀라운 통찰이었다. 나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 


자현스님이 조금 더 정교하게 불교이야기를 마저 해주신다면 좋겠다. 중국불교까지 훑으셨으니 이제 한국과 일본에 어떻게 흘러갔는지 설명도 해주셔야.  아주 재미있는, (내게 새로운) 관점들을 많이 소개해주셨으므로 즐거운 책읽기였다.  그렇지, 불교에도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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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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