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18. 10. 18. 20:09



2013년 번역 초판 발행



1883년 발간된 Social Problems 의 한국어 번역판.



145년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인데, 밑 줄 친 부분을 읽어보면, '방금 어제 나온 책' 같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나는 요즘 배신감을 느낀다. 그 겨울에 촛불 들고 나가서 천식환자처럼 기침을 해 대면서도 뭔가 역사 발전에 필요한 '숙제'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대통령도 바뀌었는데 그 대통령 역시 이재*님을 모시고 북한에도 가고, 도대체 뭐가 바뀐것인지 알수가 없다.  바뀐것은 그냥 '대통령 얼굴'이라는 생각만 든다.  그리고 노회찬씨가 이 세상에 없다. 뭔가 세상이 이상해. 


"대중은 개혁을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나 정당을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헨리 조지는 말한다.  헨리 오빠, 그게 아니구요. 대중은 시스템 변화를 위해서 노력했는데요, 번번히 바뀌는 것은 '가오마담'일 뿐이더라구요.  마담 얼굴 바뀐다고 시스템이 바뀌는게 아니더라구요.





문재인 대통령, 섭섭하게 들리실지 모르겠는데요. 저도 섭섭해요. 도대체 이 사진들에 무슨 차이가 있는거죠?



제가 볼땐 똑같아요. 공주님은 철창안에 갇혀 지내시는데 무도회에서 함께 춤춘 젊은 왕자님은 남북한을 활보하며 여전히 파티중이시지요. 이 사진들을 보면 '진짜 권력'이 어디있는지 가늠을 해보게 되지요.  가오마담 뒤에는 진짜 물주가 있는거거등요. 그런건 학교 많이 안 다닌 사람들도 대충 다 알아요. 그죠 오빠. (참고로 가오마담의 파트너로는 '바지사장'도 있어요. 물주는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헤헤헤.) 오빠, 저 사람 근처에 계시면 위험해요. 공주님을 보면 알 수 있죠.  





나는 조국의 덕을 톡톡히 누리고 사는 사람이니 불만이 있을것이 없다. 그러나, 나만 잘 살면 남이 고통 받는 것은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 전역에 걸쳐 국민에 의한 정부는 강자와 악당에 의한 정부로 변질되어 왔으며 지금도 변질되고 있는 중이다' 라는 145년전 미국에 대한 평가가 왜 그것을 '현재 미국'으로 바꿔도, '현재 한국'으로 바꿔도 그럴듯 하게 여겨지는가?  이것이 이 책의 놀라운 점이다.  


예를들어서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는 수백년이 지나도 유효할 것이다. 우리의 보편적 감성을 만져주니까. 하지만 150년전의 과학기술은 어딘가 '사이비 과학'처럼 여겨질수 있다. 그 사이에 엄청난 발전과 변화가 따랐으니까. 150년전의 사회학책도 어딘가 '구태의연한' 냄새가 나는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헨지 조지의 사회학책은 방금 어제 시사프로에 나온 얘기 같다. 그가 '현상'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통해서 시스템을 바꿀수 있다는 환상을 이제 폐기해야 하는건가?  그럼 뭐지?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착하게 투표하고, 착하게 행동하면 세상이 개선될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데 어딘가가 '상한 생선'같은 냄새가 난다. 


***

pp68

기차가 출발해서 천천히 움직일 때는, 한 발짝만 내디뎌도 올라탈 수 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면 그 때 발을 내딛지 않은 사람들은 숨 가쁘게 달려도 그 기차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기차가 출발할 때는 탑승한 사람들이 쉽게 탔다고 해서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차에 올라 타는 것도 수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터무니없다. 


pp76

사람들이 불평등한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은 타고난 불평등, 즉 사람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힘과 역량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pp 84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적게 벌고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도 많이 버는 이유는 대개 전자가 만드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후자에게 흘러가서 그들의 소득을 부풀리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이 우스개소리로 '장래희망은 건물주'라고 한다.  그들의 일부는 이미 건물주이기도 하다. 그들이 노력해서  건물주가 된 것이 아니라 조상을 잘 만나서 그리 되었다. 그들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열심히 일해서 수입의 일부를 '월세'로 갖다 바칠때 그것을 받아서 쓰고, 남은돈으로 다시 건물을 살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가르친다.  자기계발서에서 부유롭게 사는 법에 대한 설명을 대개들 이렇게 한다, '네가 일해서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네 돈이 네가 자고 있을때도 스스로 알아서 돈을 벌어들이게 하라. 진짜 부자들은 그들이 해외여행을 즐기는 순간에도 여전히 재산이 쌓여가고 있음을 명심하라.'  내가 아직 철이 안들었을땐 그것이 맞는 말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이들이 젊은이들을 죄다 '도둑놈'으로 키우고 있는자들이었다. 


pp 85

만일 각 사람이 자신이 만든 것을 모두 자기 집으로 가져갈수 있다ㅕㄴ, 사람들은 더 근면하고 도덕적인 존재, 더 좋은 노동자, 더 좋은 시민이 될 것이다. 


pp89-90

정치란 누가 정권을 잡느냐의 문제일 뿐이고, 실제로 나라를 지배하는 건 기업들이며 이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기업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는 것이다. "국민들? 그들이 뭘 알고, 뭘 신경쓰겠습니까? 언론이 국민을 지배하고, 자본이 언론을 지배합니다. 토끼 편에 서서 사냥감이 되기보다는 개 편에 서서 사냥하는 게 낫습니다." 그의 말이다. 


pp 99.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사회적 질병이 있다. 범죄자, 빈민, 창녀, 자기 자식을 버리는 여자,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서 목숨을 끊는 사람, 거지와 도둑이 넘쳐나는 것은 아무리 일해도 정직하고 여유있게 살기가 힘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pp102

우리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인간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항상 존재할수밖에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시작하려고 한다. (----헨리 조지는 이러한 것이 잘못된 신화라고 설파한다)


pp103-105

우리는 일찍부터 1등은 잘 대우해서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또 가난하면 안된다는 것도 일찍부터 배운다. 빈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

그러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정신없이 벌이는 생존 경쟁은 끝날 것이다. 

....

누구든지 자기 주위를 돌아보기만 하면, 빈곤은 자연의 인색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역을 해도 간신히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는 것을 창조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 아니면 신성모독이다.


일부 사람들이 가진것이 충분치 않아서 품위있게 살 수 없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필요이상으로 많이 갖기 때문이 아닐까?



pp 121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정의가 도덕의 발달 단계에서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첫번째 가치라는 사실이다. 정의보다 높은 가치는 정의에 기초해야 하고, 정의를 포함해야하며, 정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pp124-125

억압당하는자, 몰락하는자, 짓밟히는 자들이 해방되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언제나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그들보다 형편이 좋았던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 때문이었다. 자연적 권리를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그것을 되찾을 수 있는 힘은 더 약해지기 때문이다. 도움이 많이 필요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돕기는 어렵다.

어떤 사회 정의 실현이나 개혁의 이면에는 그것의 이해당사자들뿐 아니라 주변의 선량한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음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노예해방도 노예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노예를 가질수도 있었던 사람들 (더 부유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의 노예들이 그들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여서가 아니다. 헨리 조지는, 억압당하는 자들은 저항의 '힘'마저 서서히 잃기 때문에, 억압당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협조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봐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갔던 사람이 '모세'였는데, 모세는 비록 이스라엘 족속이었지만 이집트의 왕자로 성장하였던 사람이다. 종살이로 큰 것이 아니라 왕자로 성장했으므로 그가 비록 이스라엘 족속이었으나 그의 비전이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서도 나는 비슷한 해석을 하는 편이다. 오바마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둘다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었다. 노예출신의 미국 흑인이 아니었다. 오바마의 유전자에는 '노예'의 기억조차 없다. 석가모니가 샤카족의 왕자 출신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민중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원동력 역시 '더 많이 가진자가  약자들을 돌아보는' 것와 상통한다. 나의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던가.  약자들이 손 놓고 앉아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요지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들의 현실에 짓눌려 꿈도 꾸지 못할때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그들을 돌보고 응원하고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선택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사회 상태를 개선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좀더 완전하고 고상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비교할만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pp 200

노예제도의 본질은 노동을 강탈하는데 있다. 즉, 사람들에게 일을 강요하고는 노동생산물 중에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만큼을 뺀 나머지를 모조리 빠앗는것이 노예제도의 본질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미국 시민들' 중에서 이미 많은 사람이 노예로 전락했다. 앞으로 그렇게 될 사람도 많다. 

내가 보기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노예인데도 스스로는 '중산층'이라고 착각을 하고 다른 노예들을 멸시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노예'로 사는 것에 대하여 그것을 당연시하거나 현대 사회에 노예는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헨리 조지는 얘기한다. 미국 노예해방 이후에 노예출신 사람들의 삶은 더 고통스러워졌는데 - 주인들이 노예가 늙어 죽을때까지 먹여주던 책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주인들은 이전에는 노예들의 여생을 먹여살렸는데, 해방 이후에 인부들을 돈주고 부리면서 오히려 경비가 절감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현대판 노예들에게 아무도 '노예'라고 부르지 않으니까, 세상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현대판 노예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진 것이다. 


pp248

우리의 근본 실수는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취급한데 있다.


pp 263

...불평등을 용인해야 하는걸까? 소수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공동유산을 독점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걸까? 결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pp 303-306

사회개혁은 고함과 아우성으로, 불평과 비난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당을 결성하고 혁명을 도모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각성과 사상의 진보를 통해 달성된다.  올바른 생각이 없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올수 없고, 올바른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올바른 행동이 나온다. 힘은 항상 대중의 손에 있다. 대중을 억압하는 것은 그 자신의 무지와 근시안적 이기심이다. 

...

누구든 자신이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어떤 처지에 있든 빛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다. 

...

인간이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개인이나 각 계급은 타인이나 다른 계급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누릴수 없다는 것이 사물의 이치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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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책을 마무리한 마지막 말: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배려해야 할 사람들, 투쟁을 통해 도와줘야만 할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를 돕고 스스로를 위해 투쟁할 힘이 가장 약한 사람들, 재산도 숙련도 지성도 전혀 갖지 못한 사람들, 사회의 계급 구조에서 제일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할 때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 


마치니가 말 한 것처럼 사람들은 인권을 쟁취하려고 할 때 이기심의 깃발이 꽂혀 있는 곳이 아니라 의무감 (원본을 찾아봐야겠다. 의무감이 아니라 책임감 혹은 소명의시이 아니었을까?)의 깃발이 꽂혀 있는 곳으로 모여든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하실 때 하나님이 품고 있었던 깊은 뜻을 발견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문명을 전진시킬 힘은 바로 그와 같은 정신에서 나온다. 




놀라운 책이었다. 우연히 만나서 읽게 되었는데, 내 삶은 어쩌면 이 책을 읽기 전과 후로 나뉘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주위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분배의 문제 정의의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등 술자리 안주같은 얘기를 할때 "넌 왜 늘 그따위 식으로 생각을 하느냐, 너나 잘 살면 되지 왜 다른 사람들 삶까지 들여다보느냐" 이런 지적에 대해서 내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들의 대답을 헨리 조지의 글에서 다 찾아 냈다.  사람이 왜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지,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정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막연하게 내가 '그것은 옳지않다,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던 사안들에 대하여 그것이 왜 온당치 않은 것인지 그가 설명해줬다. 그러므로 내 오래된 쳇증이 싹 내려간 기분이 든다.



내 주위에는 평생 나름대로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살아온 신사가 있다. 그의 삶은 저항과 투쟁으로 점철되었으며 한 때 정치인을 꿈꾸기도 해서 선거운동으로 알량한 재산마저 날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투사였고 나는 그의 삶이 어딘가 멋있어보였다. 나같은 버러지 같은 (딱 책벌레) 삶에 비해서 그의 삶은 혁혁해보였다. 그가 가난해도 그는 풍족해보였고, 그가 돈한푼 없는 개털이어도 그는 멋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는 어마어마한 갑부가 되어 나타났다. 머리를 써서 한채남은 경기도 변두리 집을 잡혀서 '투자'를 한 것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물론 수년간 그가 기업동향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판단한 결과이다. 그는 절친한 친구들을 초대하여 해외여행을 함께 떠나기도 하고 '선량하고 인정많은 부자' 놀이를 하며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가 부자가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그의 생계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한숨 짓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디오게네스'씨에게 말했다, "그 사람하고 너무 자주 어울리지 마시오. 어딘가 개운치가 않소. 나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과연 그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 그것도 헷갈리고, 전체적으로 헷갈리는 시추에이숑이라고 할 만하오."

이제 나는 내가 메우 헷갈려한 문제의 핵심을 알게 되었다. 그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적 상황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조현*이라는, 제 기분내키는대로 아무한테나 물벼락을 날리는 재벌집 따님이 최근에 '무죄'선고를 받았다. 왜 무죄선고를 받았냐하면, 피해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안난다거나 혹은 별로 피해를 입은적이 없다는 애매하고도 '가해자'를 기꺼이 사랑으로 감싸는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이름있는 광고회사에서 일하며 대기업 임원들과 회의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회에서도 엘리트에 속하고, 지금 일하는 회사가 아니라 다른데라도 얼마든지 가서 일할수 있을텐데... 꼭 그 직장이 아니어도 밥 굶지 않을텐데... 하지만 그들은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모욕을 감수했다.  이것은 스스로 선택한 '노예의 길'이다. '노예의 길.'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고, 재벌들의 왕국은 더욱 공공해진다. 내가 노예의 길을 선택하면 나로 끝나는게 아니다. 내 옆사람도 나를 따른다.  내가 노예의 길에서 벗어나면, 내 옆사람도 노예의 길을 벗어난다. 길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돈, 명예, 직위, 이런 '세상의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진리, 자유, 정의)을 경배하면 나는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헨리 조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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