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0. 7. 6. 02:12

코로나는 우리의 삶의 풍경을 대폭적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나는 봄학기 내내 학생 얼굴도 못보고 화상으로만 수업을 해야 했고, 미국에 다녀온 나는 지은 죄도 없이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가 있다. 우리 생활의 깊고 얕은 모든 영역에 코비드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경조사 문화도 검토가 필요하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장성한 자녀를 가진 지인과 통화를 길게 하게 되었다.  코비드를 예방하기 위해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조심을 하고 있는지 마스크며 외출을 삼가는 것이며 그렇게 서로 자랑하듯 '조심' 얘기를 하다가 자녀의 '결혼식'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렀다. 

 

나의 의견:  이 '난리통'에 예전처럼 결혼식을 하려는 것은 타인에 대한 '폭력'과 마찬가지이다. 청첩장 받고 안가면 사람의 도리가 아닌것이 한국의 문화인데, 꾸역꾸역 청첩장 돌리면 마스크를 이중 삼중으로라도 하고 꾸역꾸역 가야 하는게 아닌가? 제발 예전같은 큰 결혼식 하지 말고, 직계 가족끼리 모여서 작게 결혼식 하되 -- 여태까지 남의 잔치에 축의금 낸거 본전 뽑아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성을 감안하여 -- 결혼 소식을 띄우며 은행계좌를 안내하라는 것이다. 

 

원리는 이렇다.

 

  1. 한국에서는 경조사에 돈봉투 갖고 가는것이 자리잡은 문화이고, 경조사 소식이 들려오면 가계부 들여다보고 '그 때 그 집에서 우리집에 얼마 보냈지?' 이런것 확인하여 액수 맞춰서 갚는 것이 일상이다.  좋게보면 상부상조, 그냥 중립적으로 보면 내가 낸 돈 내가 타먹는 형식. 
  2. 코비드 때문에 사람 청하는 것이  환영받지 못한다.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 할 수도 있다. 그래도 행사를 안하면 내가 낸 돈을 회수할 수가 없으므로 잔치를 해야만 한다.
  3. 돈의 회수를 위한 잔치라면 잔치 생략하고 그냥 은행계좌를 안내하면 된다. 그러면 축의금 갚아야 하는 사람은 흔쾌히 은행으로 축의금을 보낼 것이고, 위험한 잔치에 안가도 되니 안도할 것이다. 
  4. "그래도 어떻게 잔치도 안하고 돈만 받는가? " --> 이게 문제인데, 뿌린 돈 회수 (좋게 말해 상부상조) 차원의 불필요한 잔치 이벤트를 그냥 생략해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난리통이고 사람 부르는 것이 오히려 민폐이니까. 
  5. 그러니, 문구를 잘 만들어서 안내를 하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일 모시에 이러한 잔치가 있아오나 코비드로 인해 잔치는 생략하오니 멀리서 축하해 주시옵고 (zoom, youtube 와 같은 원거리 화상 진행으로 잔치 영상은 누구나 볼 수 있게 배려하고), 축하금을 보내주고 싶으시면 이 번호로 보내주시면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누군가 내게 이런 식으로 잔치 소식을 알리면 -- 나는 흔쾌히 -- 잔치 장소로 나를 불러내지 않는것에 감사하면서 진심으로 축하하며 축의금을 언라인으로 보낼것이다. 진심이다. 

 

장례식은?  장례식의 경우 나는 소식 받으면 '사람들 모이기 전에' 제일먼저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봉투' 내고 인사만 하고 현장을 떠난다.  슬픈 일에는 위로가 필요하고, 잠깐이라도 얼굴 마주하고 위로 하고 싶으니까.  그러나 위험을 최소화 한다.  물론 이것도 언라인으로 송금을 원칙으로 한다.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전쟁인데, 태평한 소리 하지 마시라. 결혼 호화롭게 했다고 다 잘사는것도 아니고, 결혼은 둘이 잘 살아내면 그만인거다. 결혼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것이 없다. 장례식도 이미 끝났으니 크게 의미 둘것 없는데, 위로 차원에서 내가 좀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나의 이런 태도에 대하여, "그건 네 삶의 기반이 미국으로 옮겨져 있고, 한국에서 사회생활 대충 해도 되니까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하는거지. 한국은 달라"로 대응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맞는 말씀이다. 각자의 생각은 각자 옳다.  나는 어느 사회에도 잘 안맞는 사람일지 모른다. 30여년전에 내가 결혼식을 할 때에도, 나는 평일 점심시간에 서울 변두리 허름한 결혼식장을 잡아서 신부 마사지니 뭐니 그런거 다 생략하고 싸구려 웨딩드레스 그 허름한 결혼식장에서 빌려서 입고 대충 결혼식을 했다. 평일 점심시간을 택한 이유는 남의 주말을 내 결혼식으로 망치기 싫어서였고, 저렴하고 허름하게 한 이유는 결혼식에 돈 쓰는게 합당치 않아 보여서 그랬다. 하객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와서 축복해주고 갔다.  그때 내 보스였던 독일인 사장도 와서 나하고 사진찍고 회의있다고 곧바로 갔다. 하하하.  그리고 우리는 30년 넘게 오르락 내리락 모험같은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 나는 신부가 다 갖는 '경대'라는 것도 없이 여태 살고 있는데, 그래서 경대위에 결혼 사진 올려 놓고 그런 것도 없었다.  결혼식이 내게 큰 의미가 없었듯, 결혼사진도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증명사진 같은 결혼사진들은 나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뻔한 것을 전시하고 매일 들여다본다는 것은 하품나는 일일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결혼생활이 여태까지는 제법 성공적으로 흘러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앞날에 대해서는 또 가봐야 아는거지만, 이제 남은 것은 남편이나 나나 둘중에 하나가 먼저 떠나고  - 남은 사람이 홀로 쓸쓸하게 끝까지 살아야 하는거겠지. 어찌됐건 내 일생에 결혼은 한번. 결혼식 재미없어서 두번다시 할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다.)  남편이 혹시 나보다 더 오래 산다면, 그 사람이 재혼을 하건 말건 그건 그 사람의 판단의 문제이지, 내 삶은 끝났으니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결혼식에 남에게 민폐 안끼치는것이 이미 30년전의 내 사고방식이었으므로 내 삶의 기반이 미국이건 한국이건 나의 태도는 마찬가지라는거다. 나도 사회생활 잘 하는 사람이다.  그까짓 경조사비 따위...거기에 목을 매지는 않는다. 그뿐이다.  (너는 경조사비 신경 안써도 되는 부자니까 그런거지...라는 오해는 마시길. 나는 한국의 평균적인 경제를 누리는 사람이다. 서울에 집한채 없다. 가난하지도 않지만 부자도 아니다. 그래도 경조사비, 그따위 우습다. 그게 내 삶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하니까.)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0. 7. 6. 01:45

평생 선거에서 '보수'의 반대편에 표를 던져 왔던 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이다.  운명적으로, 손금에 그어진 것처럼 나는 '보수'와 손을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진보인가?  나는 한때 내가 '진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더이상 진보가 아님을 안다. 혹은 나는 어디에도 안 맞는 사람일것이다.특히 한국에서 '진보'란 있는걸까? 그걸 의심한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한국의 '부동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서울과 충청도 두군데에 아파트를 한 채씩 갖고 있다가 출신지역인 충청도의 싸고 큰 아파트를 처분하고 전도유망하고 앞으로도 값이 오를 서울의 작고 비싼 아파트를 유지하는 식으로 '일가구 이주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 그에게 비판적인 각종 보도와 사람들의 댓글을 보면서 나는 탄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사람 뿐이 아니지. 조 아무개씨도 그랬고, 뭐 꼴랑 벌어 놓은 돈으로 시시한 건물 하나 샀다가 그 문제로 영광의 길에서 벗어난 김 아무개씨도 그렇고, 뭐 아무튼 현재 문대통령 근처에서 시시한 '개인적이고 소시민적인 욕망'을 드러내어 비판을 받고 있는 한때의 야권 인사들, 한때의 '진보'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저들은 대통령과 함께 일을 하면서, 그 자체를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를 포기할 의사가 없는걸까?" 

 

나는 생각해봤지. 아무것도 아닌 나는 생각해봤다.  내가 대통령과 함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는 처지라면 나는 그것을 내가 태어난 사명으로 인지하고 내 욕심을 다 내려 놓고 오직 우리가 쌓아올린 명분을 사회를 개선하는 것으로 결과를 보기 위해, 나중에 돌아보고 "그 때 우리는 위대했지"라고 자부심을 가질수 있기위해 하루하루 살아 갈 것 같은데 말이지. 그것 자체가 영광 아닌가?  그까짓 강남의 13평 아파트 한채 때문에 그 영광위에 똥을 싸대고 냄새를 풍기고 있는가?  (강남의 13평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명예와 자존심과 영광을 내려 놓는 소시민인 그대여 그냥 소시민으로 집앞의 개똥을 치우며 사시길. 강남의 13평이 무섭지? 그렇지 아니한가?  그런데 강남에 집이 없는 나는 강남이 안 무섭다. 이상하지 않은가?  강남하고 상관없이 사는 나는 강남이 우습다. 하하하.) 

 

*저들이 해 처 먹은 대규모 조직적 부패에 비해서 우리가 하는 짓거리는 소시민적인 작은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역설하고 싶지? 응? 그것이 바로 당신들을 필망, 필패로 이끄는 논리라는거지. 우리의 기대수준은 훨씬 높아졌어요. 똥걸레 빨아서 똥자욱 남은 누런 걸레 만들었다고 우리는 만족하지 않아요. 락스물에 팍팍 삶아서 희게 빛나는 걸레를 만들고 싶거든요. 

 

나는 대통령 근처에서 이렇게 시시하고 소시민적인 사고를 치고 있는 그의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은 대통령을 신뢰하지 못하는거야. 그러니까 13평 강남 아파트를 포기할 수 없는거지."라고 판단하게 된다.  함께 일하고 함께 몰락할 각오 따위는 없는거야. 그러므로 저들은 몰락하고야 말거야.  몰락한 이후에 말하겠지 "13평 아파트 안 팔길 정말 잘했어. 이거라도 남았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몰락 할 수밖에 없는거야. 세상 이치가 그래... 그래서 보수 정권에서 진보 정권으로 세상이 바뀐 듯 해도, 다방 인테리어 하나 안바뀌고 마담만 바뀌고 마는거지. 커피 맛도 그저 그렇고, 음악도 그저 그렇고, 칙칙한 지하실 곰팡이 냄새와 섞인 커피 냄새도 그저 그렇고, 바뀐것은 없이 쥐새끼 들끊고 커피값 50원 쯤 오른 다방은 그대로 거기 있는거야.  다방마담과 커피나르는 종업원 얼굴이 바뀐다고 다방이 달라질것은 없어요. 역전 다방.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0. 7. 6. 00:59

 

 

내 연구실 밖의 화초들을 내가 없는 동안 남편이 챙겨서 돌봐주고 있다. 어제 남편이 화초에 물 주고나서 '증명사진'들을 보내주었는데, 5월부터 피기 시작한 호접란이 점점 더 많은 꽃 송이들을 피워내고 있고,  동양란도 꽃대 여럿이 올라오고 있다.  미국에 있을때 남편에게 "꽃들은 잘 피고 있어?" 물었더니 '물 만 주고 꽃은 못 봤다'는 애매한 답을 하길래 "꽃이 피고 있는데 못 봤어?" 물었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꽃이 눈 앞에 있어도 꽃을 못 보는 사람도 있구나...

꽃이 피건, 안피건 소중한 내 친구들이지만 꽃이 필때는 더욱 칭찬을 해 줘야 하는거지.  그 후로는 꽃 사진도 보내준다.  나는 남편이 보내주는 화초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내 눈길로 그들을 하나 하나 만져주는 편이다. 어제 보낸 사진에서 동양란에 꽃대 올라오는것을 발견하여 "동양란 꽃대가 올라오네! 굉장하다!" 했더니 남편은 그걸 눈 앞에 놓고도 "어디? 어디?" 한다.  꽃이 있어도 꽃을 못 보는 사람.  사람의 시각적 인지 기능이 이런 식이다. 관심이 가야 보이는 법이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남편은 내가 "해당화가 피었네" 해야 해당화가 핀 것을 본다. 나는 그의 또다른 눈이다.  물론 남편 역시 내가 못 보는 것을 보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사람은 여럿이 어울려 살아야 한다.

 

언니는, "너는 도대체 어떻게 하길래 서양란, 동양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가?" 묻는다. 화초들을 햇살 좋은 동남향 창가에, 최대한 건강한 햇볕을 잘 받도록 배치하고 --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물을 흠뻑 주고 (한번만 준다. 흠뻑) -- 가끔 다이소에서 천원에 10개들이 주사기 모양 비료를 사다가 꽂아 주는 정도이다.  일년에 한번 정도는 분갈이도 대충 해 준다.  분갈이의 '분'자도 모르는 일자 무식이 대충 온라인으로 정보를 찾아보고 대충 재료 사다가 해 주는 정도이다. 그것이 전부다.  하루에도 여러차례 그 곁에서 들여다보고 예뻐해주는 것도 영향을 줄까?  학생들 숙제 채점하고 그러다가 지겨워지면 화초에게 가서 위로를 받는데 과연 그것도 영향을 끼칠까? (그건 검증이 안되므로 잘 모르겠다.) 

 

 

  ***   ***

 

어제 실내 운동을 너무 재미있게 한 것이 원인 이었을것이다.  밤에 잠을 푹 잤는데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졸음이 쏟아졌고, 온종일 비몽사몽의 연속이었다.  '이거 뭐지?  걸린건가?' 이런 의심도 들었으나 오전, 오후 두차례 체온 측정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이 들으니 평소에 안하던 운동을 하면 이런 식이다. 몸이 아프다.  그래서 오늘 종일 퍼 자느라 운동을 못했다. 성경 읽기도 못했다.  

 

 

오전에는 온라인으로 일요일 예배를 드렸고, 저녁 나절에 남편이 '송추갈비'에서 물냉면을 사다 주었다. 맛이 깔끔하고 속이 후련한 맛이었다.  감사하다. 이래서 배우자가 있어야 하는거다.  자가격리 할 때 냉면 사다주는 사람, 오직 '가족'만이 가능한 일이다. 

 

 

자정이 지났다.  성격읽기를 하며 이 밤을 보내야지.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0. 7. 4. 18:01

 

 

해외에서 입국한 사람들이 내국인 외국인 막론하고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자가격리자 앱이다.  이것을 전화기에 깔아야만 입국이 가능하다. 매일 이것을 열고 아침, 저녁 두차례 체온 기록과 유증상 여부를 기록한다.  내가 기록하면 누군가가 그것을 조회하는 모양이다. 

 

 

뭐,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생활에 규칙성을 주므로 나름 재미가 있다. 산사람은 뭐라도 해야 하는거니까. 

 

 

내가 그저께 입국하여 코로나 검사를 받고 자가격리를 시작했고, 어제 오전에 음성 판정이 나왔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는데, 오늘 오후에  담당공무원이라며 메시지를 보냈다 - '자가격리용 비상 식량'이 필요하면 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참 일찍도 왔다.)  오늘 신청하면 주말 건너서 한 사흘후에 비상식량을 받을거라는 메시지이다.  뭐 비상 식량 안줘도 내가 굶어죽을리는 없지만, 그래도 뭐가 오는지 궁금하여 신청을 하였다.  그런데, 나는 나 먹이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여기는 남편이 부지런히 먹이를 챙겨다 주므로 문제가 안되지만, 그런 가족이 없는 사람은 어쩌라는걸까?  뭔가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는 기분이 든다. 만약에 내게 식량 공급하는 가족이 없다면, 나는 자가격리 장소를 이탈하여 '식량 보급 투쟁'을 하러 나가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아예 보건소에서부터 준비하였다가 비상식량을 줘 보내야 격리소로 가서도 '이탈'을 안 할 것이 아닌가? 

 

"내가 아는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을 받았다는데 너는 왜 아무것도 못 받는거냐?" 

 

 

벌써 전화로 내게 이러저러한 코칭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던 중이었다.  아, 나는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을리는 없으므로 신경 쓰기도 싫었는데, 오히려 '자가격리' 상황에 대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더 호기심을 갖고 나를 전화상으로 관찰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뭐 지방자치단체 마다 혹은 담당 공무원마다 일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대충 이런 상상을 하고 접는다.  하긴, 만약에 내게 가족이 없고, 아무도 내 '먹이'를 갖다 주지 않으면 나는 15일간 수돗물로 연명하는 가운데 '체중조절' 에 성공하는 역사를 쓸지도 모르지.  하하하.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 상황이 아니면 남이 나를 신경을 안 써준다거나 나에 대한 서비스가 누락이 된다거나 해도 별로 개의치 않는 편이다. 세상이 늘 내게 친절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대체로 운명은 내게 가혹하지 않았고, 나는 잘 지내왔다. 그러므로 대체로 나의 현재에 고마운 편이다. 

 

 

아침에 유튜브를 열어서 '국민체조'를 꺼내어 동심으로 돌아가 '국민체조'를 신나게 했는데 -- 그 후에 유튜브에서 자동으로 뭔가가 흘러나왔다. "엄마 TV"의 김선생이란 분이 아주 쉬워 보이는 춤/운동 동작을 하면서 30분간 그걸 따라하면 3Km걷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슬슬 따라했다.  운동이 끝난후 내 애플워치로 확인해보니 정말로 3Km 걷기가 완성 되어 있었다.  "끼부리기" "트위스트" "수영하기" "스케이트" 뭐 이런 식으로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동작을 쉼 없이 이어서 하는 운동이었는데, 크게 힘들지 않으면서 땀이 쏟아졌다. 아주 좋은 운동이었다.  매일 이 운동을 해야지.  그러니까 매일 아침 '국민체조'를 두번 하고 '엄마 TV'의 30분 운동을 따라해야지. 

 

 

https://www.youtube.com/watch?v=3BEU86NQr6Y

아, 내가 국민체조 했다가 자동으로 연결되어서 따라하게 되었던 운동이 이것이다.  매일 들어가서 운동을 해야지.  조금씩 하다가 조금 강도 높은 운동으로 옮기고 해야지.  요가를  학교에서 제공해줘서  온라인으로 하다가 힘들고 재미없어서 그만 뒀는데 이분 운동은 힘도 안들고 따라 할만하다.  갇혀 지내는 동안 운동도 잘 해 봐야지. 하하. 

성경책 레위기에서 이상한 구절을 발견하여 '번역이 잘 못 된걸까?'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나의 무지를 깨우치고, 내 머리 위에서 지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새삼 발견했다. 처음에 나는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이 부분에서 언뜻 납득이 안 갔다.  그래서 영문 성경 여러가지 버전들을 살펴보면서 원뜻을 헤아려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깨달았다 - 아 우리는 보통 도의적으로 가난한 자의 편에 서고 힘있는 자에게 굴종하지 않는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지만, 어떤 법률적인 판단을 함에 있어 한 사람이 '가난하다'는 것이 과오나 잘못을 용서 받을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구나.  가난하거 부자이건 간에 도의적인 판단의 근거는 동등해야 한다. 만약에 동등하지 않다면  그거야 말로 가난한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법률 앞에서 우선은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이후에 인정이나 상황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속독을 하는 과정에서도 새로 깨닫고 각성할 기회가 많이 있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ㅣLeviticus 19:15
"'Do not pervert justice; do not show partiality to the poor or favoritism to the great, but judge your neighbor fairly.

너희는 재판 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 할 지며

 


New Living Translation
“Do not twist justice in legal matters by favoring the poor or being partial to the rich and powerful. Always judge people fairly.

English Standard Version
“You shall do no injustice in court. You shall not be partial to the poor or defer to the great, but in righteousness shall you judge your neighbor.

Berean Study Bible
You must not pervert justice; you must not show partiality to the poor or favoritism to the rich; you are to judge your neighbor fairly.

New American Standard Bible
'You shall do no injustice in judgment; you shall not be partial to the poor nor defer to the great, but you are to judge your neighbor fairly.

 

 

어제 남편이 사다 준 아이스 커피 (왼쪽), 오늘 좀더 큰 사이즈로 사다 준 아이스 커피 (오른쪽).   온종일 아껴서 먹고 있다.  슬리브의 빨강색이 강렬하고 매력적이라서 기분이 좋아진다. 나갈때까지 버리지 않고 모으면 몇개까지 모으게 될까?  착한 남편이 매일 아이스커피를 배달해 줄지도 모른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0. 7. 3. 20:56

 

 

낮밤이 뒤바뀌어, 오후에 남편이 사다 던져주고 가버린 아이스커피를 마시고나서 아주 푹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성경책을 열어서 구약이 1,331 페이지, 신약이 423 페이지까지 표시가 된 것을 확인했다. (성경의 페이지 개념은 일반책 페이지와 약간 다르다. 한페이지가 몇페이지로 이어지기도 한다. 원전의 페이지를 옮기기 때문에 그런듯 하다.)  어쨌거나, 전체 페이지와 내가 여기 갇혀 지낼 날짜를 따져보고 구약은 하루에 170페이지씩, 신약은 하루에 90페이지씩 읽어나가기로 계획은 세웠다.

 

성경을 그렇게 빨리 읽느냐고? 어떤 경우에는 성경읽기 일주일 프로젝트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캠프도 있다고 들었다). 시간을 정해놓고, 주어진 시간 안에 통독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피드 리딩인데 -- 그렇게 설렁설렁 대충대충 읽어나가면 뭣하느냐고 누군가가 물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Intensive reading vs. Extensive reading 의 문제이다. 빠르게 죽-죽-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것도, 한 줄 한 줄 사색하며 읽는 것도 모두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해마다 여름 방학때 성경 스피드 리딩을 몇 차례 했었다.  가가격리 기간을 '요나의 고래 뱃속 체험'으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나의 성격상, 이렇게 계획표를 만들어 놓으면 -- 여태까지의 경험상 -- 늘 계획표보다 먼저 숙제를 끝내는 편이었다.  이제는 나도 늙어가고 있고 전 같이 빠릿빠릿하지가 않으니 알 수 없는데. 해 보면 알겠지. 

 

그런데, 성경 읽기에는 어떤 신비한 무엇인가가 따른다.  그것은 말로 설명이 안되고. 그냥, 정말로 하느님이 나와 함께 앉아 계신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우선, 아까 잠시 창세기를 읽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하느님이 인류에게 던진 최초의 질문이 무엇일까? (나는 오늘에서야 그것을 자각했다.... 그렇게 수차례 읽었어도 그 점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