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8:19

 

 

Lady in Black and Rose (검정색과 장미색 드레스를 입은 숙녀) c. 1905-1909

Oil on Panel

44 x 55 cm (가로 세로)

2009년 11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Morning Glories (나팔꽃) c. 1900

Oil and Canvas on Three Panel Boards

183 x 164 cm (세폭 전체 크기)

2009년 11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이전 페이지, 디트로이트 미술관 ( http://americanart.textcube.com/234 )소장 듀잉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논의했던 듀잉 작품의 특징들이 이곳에서도 여전히 발견됩니다.

 

그런데, 이전 페이지에 이어서 뭔가 새로운것을 발견 하셨는지요?

 

음...'액자' 디자인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지요? 일단 금박이고, 액자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액자에 새겨진 무늬들이 일정합니다. 한 사람의 작품처럼 보이지요? 어쩐 일인지 알 수 없으나 듀잉의 작품들을 감싸고 있는 액자들은 모두 '동일범'(?)의 소행처럼 보입니다.

 

이 액자들을 디자인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퀴즈로 남겨 둬 볼까요?)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7:58

 

음, 제가 갖고 있는 토마스 윌머 듀잉의 작품 사진 파일이 많은 편입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다가,  미술관별로 그림 소개를 하고 그리고 전체적인 정리를 하는 것이 이 아름다운 그림들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듀잉의 그림은,  설명보다는, 그냥 그림이 전해주는 '느낌'을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듀잉의 그림속에 어떤 사회, 문화, 정치, 역사적인 '메시지'가 있는것도 아니고  화면가득한 '색채'와 색깔의 각기 다른 깊이 (tone)이 주는 것을 관조하는 것이 그림 감상의 포인트라고 봅니다.

 

습자지에 먹물이 번져가는 것을 지켜보듯, 그냥 편안하게요...  듀잉의 그림중에는 '악기'를 들고 있는 여인들, 혹은 악기 제목의 작품들도 많이 보이는데, 같은 맥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타줄이 퉁 하고 울릴때, 잔잔하고 길게 퍼지는 소리... 딩.....이런 소리는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소리가 스며들죠. 

 

 

Summer (여름) 1893

Oil on Canvas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1일 사진촬영

 

 

 

Classical Figures (고전적 형상) 1898

Oil on Panel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0일 촬영

 

 

 

 

The Recitation (낭송) 1891

Oil on Canvas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1일 촬영

 

 

 

 

자, 위의 세작품에 보이는 듀잉화의 공통점들을 찾아볼까요?  제가 미술 전문가가 아니고 그저 '교양인' 수준으로 미술품을 '구경'하는 차원이라서, 뭐랄까, 미학적 분석보다는...음...텍스트 분석하듯 하는 점이 있는데, 그냥 미술을 '읽는' 저의 개성이라고 해두지요. 네, 인정합니다. 저 미술가 아닙니다. 미술 비평가도 아닙니다. 저는 텍스트(언어)를 주로 분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텍스트 읽듯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이제 그림을 있는 그대로 그냥 들여다보는겁니다.

 

세 작품의 공통점으로 어떤것이 있을까요?

 

(1) 그림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들입니다.  남자 안보이지요?  :)  '여름'과 '낭송'에서는 각각의 화면에 두명의 주인공들이 들어있습니다.  세폭 병풍같이 생긴 작품 속에는 한폭마다 한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지요.

 

(2) 모두 유화이군요.

 

(3) 배경이 모두 초록색 계열이지요.

 

(4) 그리고 배경이 모두 '자연'입니다.  인공적인 '건물' 같은것은 안보이지요?

 

(5) 안개가 낀듯 화면들이 대개 '아슴프레'하지요?  사진사가 사진 실력이 없긴 하지만, 원래 작품이 이래요. 촛점이 어긋난것처럼 아슴푸레한 것이 이 세작품의 공통점입니다.

 

(6)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팔은 가늘고 하체는 무척 길죠.  '이상화'된 여성의 체형인것처럼 보입니다.

 

 

자 이런 공통점 외에 다른 특징을 혹시 찾아내셨는지요?  찾아내셨으면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

 

이 그림들을 보면 어떤 음악이 떠오르시나요? Secret Garden 의 몽환적인 음악이 잘 어울릴것 같지 않은가요?  (예...제가 꽤 촌스러운 사람이라서...헤헤.)

 

 

 

 

 

다음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2009년 12월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6:32

 

 

 

 

2007년 워싱턴 지역으로 이사온 후에 워싱턴의 각종 국립 미술관들을 들락거리는 동안, 제 눈에 띄면서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화가가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일것입니다.  듀잉의 작품을 자주 대하면서도 제가 관심있게 들여다보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제가 과문한 탓으로 이 작가의 이름이 낯설었고, 따라서 미술사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이름을 알고 있는 미국미술가가 별로 많지도 않았지요)

 

그리고, 제가 듀잉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제끼고' 지나치곤 했던 이유는, 이 작품들이 한편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너무나 '동화적'으로 아름답고, 풍경역시 동화책속의 풍경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져서, 어쩐지 '심각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듀잉의 초록색이 스며든 환상적인 작품들이 전시된 곳을 지나칠때면 저는 혼자서 '푸른 옷소매'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요.  푸른 옷소매 (Green Sleeves)라는 영국의 민요곡은 우리에게도 꽤나 친숙합니다.  많은 음악가들이 이 곡을 연주했고, 노래를 했지요. 유튜브를 검색해봐도 다양한 연주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신비한 민요의 '가사'를 정확히 알고, 노래부를수 있게 된것은 대략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에 클래식 기타를 처음으로 가슴에 안고, 대학에서 클래식기타를 가르치는 음악교수로부터 개인지도를 받기 시작했지요.  그해에, 그러니까, 제가 온갖 경제적 빈곤함을 벗어나 슬슬 용돈벌이를 시작했는데, 그렇게 용돈벌이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첫 월급으로는 뭐 싸구려 동남아산 독일제 오디오세트를 들여놨고, 그 다음으로 클래식 기타를 산 후에 한동네에 살고 있는 선생님을 만나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지요. 카르카시 기타곡집을 연습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부교재로 영화음악곡을..."하고 우물우물 제안을 하니까,  스승께서는, 아무거나 영화음악곡집을 가져 오라고 했지요. 서점에서 영화음악 기타곡집을 하나 샀는데, 그 책에 Green Sleeves 곡과 가사가 들어있었던 겁니다.  (무슨 영화에 나왔던 곡이었을까?)

 

물론 초보자용으로 편곡된 아주 간단한 곡이었기때문에 혼자서 독학으로 그 곡을 마스터했지요. 가사도 함께.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푸른 옷소매는...어떤 이름모를 아가씨가 입고 있었던 드레스의 옷소매가 아마도 초록색이었겠지.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그 아가씨를 '초록색 옷소매'라 부르는것이겠지.  혼자 상상하다보면 생전 가본적도 없는 영국의 초록색 초원과, 안개와, 신비한 물방울과, 뭐 그런 것들이 연상이 되곤 했지요.

 

10년도 전에 익힌 그 기타곡은 지금 손가락이 굳어 기억이 안나는데... (하지만 책을 꺼내서 악보를 보면 다시 칠수 있어요...)  노래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부를수가 있습니다.  정작 Dewing 의 그림속의 여인들은 대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초록색 옷소매는 보이지 않는데, 여인들이 담겨있는 풍경이 온통 초록색이라 이 여인들이 모두 초록 옷소매의 아가씨들처러 보이는데요. 미국미술사에서 토마스 윌머 듀잉의 존재는 '미미'합니다. 미국 미술사책을 여러권 갖고 있는데, 그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책도 있고요, 그의 이름이 등장한대도 수백페이지짜리 책에서 그저 한두줄 정도 입니다.  그렇지만, 워싱턴 디씨나 인근 대도시의 미술관에 가면 듀잉의 작품이 많이 걸려있지요.  아마도 그는 미술품 수집가들이나 대중들에게는 사랑을 받았지만, 미술 비평가들에게는 그리 인정을 못받은 그런 화가였던것 같습니다.

 

노래 '초록 옷소매' (우리나라에서는 푸른 옷소매로 널리 알려진 곳)의 가사는 헨리 8세가 앤 볼린을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화 '천일의앤'으로도 알려져 있는 앤 볼린. 헨리 8세는 앤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교회'를 선포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변덕이 많았던 헨리 8세는 앤 볼린 역시 사형장으로 보내버립니다. 그 앤볼린이 낳은 딸 하나가 살아남아서 엘리자베쓰 1세로 등극하지요.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 미국의 버지니아주는 그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된 이름입니다.

 

 

어쨌거나, 미국의 미술관을 헤메이다가 신비로운 초록색의 풍경속에 선녀같은, 혹은 요정같은 여인들이 긴 드레스 자락을 끌고 날아다니듯, 떠다니듯 서 있는 그림을 발견하신다면,  함께 간 친구에게 자신있게 말해줘도 됩니다. "음...듀잉의 그림이군..."  백발백중이죠. 잘난척 하셔도 됩니다.   :)

 

듀잉 페이지 이어지겠습니다.  december 2009 redfox.

 

 

 

 

 

 

 

 

 

(poss. Henry VIII of England, 1500's.)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For I have loved you well and long,
Delighting in your company.

아아, 내 사랑이여 나를 이렇게도 무참하게 버리다니

그대를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하였건만, 그대와 함께 있는것이 그토록이나 기뻤건만.


Chorus: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

초록색 옷소매는 나의 기쁨, 즐거움이었거늘.  초록색 옷소매는 내 순정, 오직 나만의 연인이었거늘.


Your vows you've broken, like my heart,
Oh, why did you so enrapture me?
Now I remain in a world apart
But my heart remains in captivity.

당신은 약속을 깨뜨려, 내 가슴도 무너졌다네. 오,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사로잡았는가?

나는 무너진 세상에 남겨졌지만 내 심장은 아직도 포로로 잡혀있다네


chorus

I have been ready at your hand,
To grant whatever you would crave,
I have both wagered life and land,
Your love and good-will for to have.

늘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기 위해 당신의 곁을 지켰거늘

당신의 사랑과 호의를 갖기 위해 내 목숨과 영토를 모두 걸었거늘


chorus

If you intend thus to disdain,
It does the more enrapture me,
And even so, I still remain
A lover in captivity.

당신이 나를 물리칠수록 나는 더욱이나 당신에게 빠져드네, 나는 여전히 당신의 포로라네


chorus

My men were clothed all in green,
And they did ever wait on thee;
All this was gallant to be seen,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나의 기사들도 당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 모두 초록색 옷을 입었는데 이토록이나 늠름하여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Thou couldst desire no earthly thing,
but still thou hadst it readily.
Thy music still to play and sing;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그대는 속세의 재물에 관심이 없으나 당신이 원한다면 모두 당신것

당신은 여전히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지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Well, I will pray to God on high,
that thou my constancy mayst see,
And that yet once before I die,
Thou wilt vouchsafe to love me.

신께 기도드리오니 내가 눈을 감기전에 그대가 나를 사랑하게 되기를

 


chorus

Ah, Greensleeves, now farewell, adieu,
To God I pray to prosper thee,
For I am still thy lover true,
Come once again and love me.

 

아, 초록 옷소매의 그대여 지금은 안녕, 안녕.

신께 기도드리오니 당신이 안녕하시길

나는 아직도 당신의 순정한 사랑이오니

내게 다시와 나를 사랑해주시길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23. 07:35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미국 사실주의 계보정리 페이지에서 대략  미국 회화에서의 사실주의를  (1) '사회적 사실주의'와 (2) '지역주의적 사실주의'의 두가지 부류로 나눠서 도표를 그려본 바 있습니다.  미국 회화에서 사회적사실주의 (social realism)를 논할때, 반드시 거론되는 사람이나 단체들로는 Henri (헨라이)를 중심으로 한 "Ash Can (쓰레기통)" 화가들, "The Eight (8인회)"등이 반드시 떠오르게 되는데,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Ash Can 이나 The Eight 멤버들이 조금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미국 사실주의 화풍을 논할때 이 두 그룹은 하나의 동일한 그룹으로 간단히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동일한 그룹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구성원들이 비슷한 사회적 안목을 가지고 사회성 있는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Ash Can 학파와 The Eight 구성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Ashcan 혹은 Ash Can 이라고 알려진 이 미술그룹을 우리는 Ashcan School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Robert Henri (로버트 헨라이)를 중심으로 그와 함께 그림 작업을 하거나, 혹은 그에게서 미술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이 헨라이의 영향으로 '사회성'있는 그림을 그리면서 정체성을 만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Henri 의 동료나 제자중에서 애시캔 학파로 알려진 인물들로는 Henri, Glackens, Hopper, Shinn, Sloan, Luks, Bellows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럽 인상파화법의 영향을 받은 미국인상파 그림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뉴욕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의 풍경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니까 ash can - 쓰레기통 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겠지요).

 

The Eight (8인회)는 사실 딱 한번, 1908년 뉴욕의 맥베쓰 갤러리 (Macbeth Gallery)에서 여덟명이 합동 전시회를 한것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이 8인회 전시회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2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http://americanart.textcube.com/281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The Eight Member가 아닌 Ahscan School 멤버였던

  *. George Bellows (1882-1925) 조지 벨로우즈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이상입니다. 이들중 다수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삽화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특히 The Masses 라는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잡지의 편집이나 삽화에 관여한 화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위에 올린 이미지는 John French Sloan 이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로 그린 작품입니다.  1914년 4월 20일에 미국 콜로라도주의 광산에서 광부들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자선가'로 널리 알려진 록펠러 (Rockefeller) 집안이 운영하던 광산이었습니다. 콜로라도 국방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하여 어린이 11명이 포함된 20여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잡지는 이 사건을 표지로 실은 것입니다.  표지 그림이 생경하고 과격해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처참하고 과격했겠지요.  (미국 구경을 하고 돌아간 내 조카아이들의 상상속의 미국사 속에  이런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록펠러는 하늘이 보낸 천사는 아니었겠지요).

 

물론 미국의 사회-사실주의 작가들이 모두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상상하시면 안됩니다.  이 표지화 작업을 한 존 슬로언 역시 '예술지상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성이 담긴 그림을 그리되, 사회적인 이념이 '예술'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지요. 그래서 과격한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부터는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한 편입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이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가운데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 여덟명의 미술가들중에서 슬로언에 관심이 많지만, 일단 이들의 '대장'격인 Robert Henri 부터 간단히 소개하고 그 뒤를 이을 생각입니다.  헨라이는 작품보다는 그가 이끌었던 애시캔, 8인회 때문에 미국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 '석자 (?)'를 박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Henri 는 '헨라이'라고 발음합니다.  Hopper 관련 책에서 읽었는데 그가 자기의 이름을 반드시 '헨라이'로 발음해줄것을 극구 강조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그러니 그의 희망에 따라서 '헨라이'로 소개합니다.  (제 글의 독자들이 막 - 무척 똑똑해지고 교양이 업그레이드 되는 소리가 들립니다 헤헤헤.  미술 관련 글중에 헨라이 이름을 제대로 표기한 한글 페이지 찾아보기가 힘드실걸요. 헤헤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걸어놓은 곳이다.

왼쪽 가까이에서부터: Henri, Kent, Luks 의 그림들이 차례대로 보이고

오른쪽 가까이에서부터: Everett Shinn, William Glackens 가 보인다

저 너머에 Benton 의 그림이 있다...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14. 02:53

 

 

Andrew Wyeth와 Edward Hopper 페이지들을 대략 마무리 짓고 나니,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의 계보가 대략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신생국가 미국의 미술은 유럽의 미술사와는 약간 시기적으로, 성격적으로 차이가 나게 진행되었다.  예컨대 유럽에서 19세기 중반, 후반에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적 색체가 강한, 혹은 사회 비판적인 사실주의 화풍이 휩쓸고나서 '인상파' 화가들이 새로운 작법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오히려 인상파 작법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속에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실주의적 작법이 공존하게 된다.  사회비판적인 사회 사실주의적 화풍은 오히려 미국의 인상파 화풍이 물러나면서 1930년대에 꽃피게 된다.

 

19세기말, 20세기초부터 진행되던 미국의 사실주의는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경제대공황으로 인한 빈민층 증가와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공공미술 프로젝트 등으로 사회성 메시지가 강한 미술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 사회성이 강한 미술의 일부는 '사회주의 사상'과 무관하다고 할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련의 공산주의를 지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미국적 토양위에서 자생한 미술사조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도시빈민의 문제, 혹은 노동의 문제등 사회 문제를 그림으로 옮긴 화가들의 모임중 '애시캔 (Ashcan)' 학파, 이들과 정체성에 차이가 없는 '8인회 (The Eight)'이 유명하다.   이들을 Social Realist (사회 사실주의자)라고 통칭한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역시 공공 미술 프로젝트의 영향권 안에서 '미국의 풍경'을 통해 미국의 '정체성'을 살리자는 취지의 회화운동이 미국의 중서부 화가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을 지역주의자 (Regionalist)라고 부른다. 위의 사회사실주의적 화가들이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었다면,  '미국의 풍경'에 역점을 둔 '지역주의 화가'들은 다소 보수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 Grand Wood, Benton 등이 있다.

 

Edward Hopper 는 사회사실주의의 기수라 할 수 있는 Henri (헨라이-로 발음한다)의 제자였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혹자는 Edward Hopper 를 애쉬캔 (Ashcan) 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에드워드 호퍼 자신이 이런식의 분류를 싫어했다. 호퍼는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상적 그룹에도 속하지 않으며 미술가로서 이런 사상적 색채를 띈다는 것 자체가 유치한 짓이라는 입장을 평생 관철했다.

 

Edward Hopper 보다 한세대 이후에 탄생한 Andrew Wyeth 를 '지역주의자' 무리에 포함시키는 미술사가도 가끔 보인다. 그런데 이또한 무리스러운 노릇이, Wyeth 역시 예술지상주의자인지라 어떤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그림을 연결짓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때문에, 나는 미국의 사실주의 미술가 계보에서 Edward Hopper 와 Andrew Wyeth 를 '외톨이'들로 분류하는 편이다. 나는 외톨이들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내가 미국미술사를 정리하면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앞부분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우선 할 일은, 사회 사실주의자들 중에서 내 맘에 다가오는 (혹은 잘생긴) 화가들을 정리하고, 그리고 지역주의자들을 정리하는 일 일 것이다. (물론 이러다 기분 내키면 식민시절의 풍속화가를 갑자기 소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결: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12. 12:05

Morning Sun
1952
Oil on canvas
28 1/8 x 40 1/8 inches
Columbus Museum of Art, Ohio

 

 

 

Edward Hopper 의 그림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은?

 

(1) 호퍼의 그림에는 아이가 안보인다. 성인 남자, 여자들이 존재하지만 아동이 보이지 않는다. 단란한 가족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것 과도 상통한다. 

 

(2) 호퍼의 그림에는 대화가 없다.  인물들이 여럿이 나와도 이들이 소통하는 것 같지가 않다. 각기 떠도는 별 들처럼 두사람이 서로 감정이 교류되거나 일치된 듯한 장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호퍼가 그린 인물들에 눈동자가 생략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관객들조차 호퍼 그림속의 인물들과 '소통'이 불가능하다.

 

호퍼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 될 수 있는데 (1)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세상과 같이 속도감 있게 보는 방식 (2)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 장면처럼 클로즈 업 하거나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조망하는 식으로 보는 방식이다. 이 자동차 유리를 통해 보거나 극장의 스크린에 비쳐지는 혹은 영상 카메라에 비쳐지는 것을 보거나, 에드워드 호퍼이 세상보는 방식은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자' 방식이라는 것이다.

 

대학원의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에서는 '연구방법론'을 듣게 된다. 그 연구방법론 시간에 여러가지 방법이 논의 되는데, 크게는 통계처리 중심의 양적 방법론, 그리고 장시간 관찰이나 면담등을 통한 질적 방법론이 논의된다. 실험실의 관찰이 아닌 사회현상, 교육 현장을 관찰할때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1) 관찰자가 관찰 대상과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고, 마치 벽에 붙은 파리 (Fly on the Wall)처럼 관찰하는 것이다.  범죄 영화 보면 수사관들이 피의자를 심문할때 심문실에 커다란 거울이 있고, 그 거울너머에서 수사관들이 관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아예 자신을 감추고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관찰하는 방법이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2) 그런하하면 관찰자가 관찰대상과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관찰 방법도 있다. 사회학 연구자가 어떤 현장에서 직접 봉사활동을 하거나,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서로 협력하면서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 하는 수도 있다. 교육현장에서 교사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변화를 관찰하는 식으로 연구를 할때, 관찰자는 참여자가 되기도 한다. 이를 참여적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림을 그릴때, 그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벽에 붙은 파리 같은 입장에서 사물을 관찰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을 '관찰자'로서 살폈다.  그는 소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런 소통단절은 그의 그림속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그보다 30여년 후에 태어난, 한세대 이후의 역히 외톨이 사실주의 화가라 할 수 있는 앤드루 와이어드 (Andrew Wyeth)는 호퍼와는 정반대의 관찰자였다. 그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그렸다. 그는 활발하게 소통하고, 친구가 된 후에야 대상을 그림에 옮겼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가 그가 잘 알고 지내는 마을 사람들, 혹은 십수년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림에 옮긴 사람들이다. 소통을 통해 그림의 대상에게 다가갔고, 그래서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이나 사람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속삭인다. 반면에 호퍼의 그림은 '접근'을 불허하고, '상상'을 정지시킨다.  앤드루 와이어드는 소통을 통해, 호퍼는 소통정지를 통해 '영원'으로 가려고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자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

 

이 그림은 1940년작 '주유소'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1940년이면 지금부터 대략 70년전의 그림이다. 1940년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식민지 시절을 견디고 있었고, 윤동주 시인이 아직 연희전문 (현재 연세대) 학생이던 시간이다. 나는 중학교때, 시간을 거꾸로 되짚어 올라가서 윤동주 시인이 살던 시절로 돌아가서 그의 애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연세대 문과대 왼편 언덕길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다. (지금 왜 갑자기 윤동주 얘기냐구, 이 천치야...) 지금도 거기 그것이 있을까?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이것이 70년전의 풍경 같지가 않다.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에서 보통 여행자가  집을 떠나 하이웨이를 타게 되면 누구나, 어디서나 이 그림속의 풍경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주유소의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차이는 있겠으나, 미국의 어느 주에 가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곳. 주유소. 그리고 주유소에 달려있는 가게. 그 가게에서 커피를 사고, 빵이나 과자를 사고, 생필품이 있나 기웃거리기도 하고, 화장실에 가서 급한 용무를 해결하고, 그리고 휙 떠나면 잊혀지는 곳.  어딜 가는 비슷한 하이웨이. 지역에 따라서 가로수의 품종이 달라지긴 하지만, 가장 흔한 것은 멋대라기 없이 키만 큰 소나무들.  그리하여. 지금도 미국의 하이웨이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길이 있고, 멋대가리 없는 가로수가 있고, 주유소가 있고, 주유소에 딸린 '공중변소'가 있고, 끝없이 이어진 길과 하늘이 있을 뿐이다.

 

 

 

 

Gas (1940)

66.7x`102.2 cm

Museum of Modern Art

 

 

호퍼의 풍경화를 보면 세밀한 묘사가 생략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 페이지에서 Andrew Wyeth 의 그림들을 살핀적이 있는데,  앤드루 와이어드가 사과 나무를 그릴때 직접 나무의 사과를 세어보고 그릴 정도로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면,  호퍼의 풍경화속의 나무나 숲, 길은 달리는 차창 밖으로 비쳐지는 것처럼 쓸려 지나가는 것 처럼 보인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의 일부같은 숲, 도로.  그 속에 '영원'처럼 혹은 '박제'처럼 서있는, 표정없는 인물들.  소통두절.

 

 

영화관 스크린에 비친듯 한 풍경

 

 

Nighthawks (1942)

84.1 x 152.4 cm (33 1/8 x 60 in.)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Museum

 

 

내가 에드워드 호퍼를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Nighthawks 였다. 대학교 1학년, 교양과목으로 '예술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할때,  교재에 실려있던 이 그림을 신기하게 들여다봤었다.  내 눈에는 이것이 '그림'으로 보인 것이 아니고 미국영화의 한 장면, 혹은 길거리 극장 영화간판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이런 그림도 '예술책'에 포함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아직 철없던 내게 '명화'란 르노아르나 고흐 뭐 그런 스타일의 유럽 그림들이었다.)  그림 설명으로 '도시인의 고독' '어쩌구' 뭐 이런 식이었는데,  내 눈에는 고독이고 뭐고 딱 영화 간판이구만... (그 후로 학년이 올라가면서 나는 한국미술의 이해, 동양 미술의 이해, 서양 미술사, 서양 미술의 이해등 미술 관련 교양과목들을 하나 하나 이수해 갔는데, 그 과목들을 이수한 주요 이유는, 미술대 교수들이 학점을 잘 줘서... 흐헤헤... 예술대 학생들이 주로 수강하던 과목들이었는데, 예술대 학생들은 너무나 예술 지상주의자들이라서 학점 따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학점에 신경을 바짝 쓰는 인문대생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술지상주의자들 속에서 '학점'에 신경을 쓴 소수가 점수를 잘 받지 않았겠는가.  (^^)

 

내가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알아본것은 극히 최근 2년 사이의 일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미국에서 약 5년간 사는 동안에도 미국은 낯 선 땅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로 왔을때, 그래서 미국미술 박물관들을 쏘다니면서 미국미술 작품들을 두루 섭렵한 후에나 나는 왜 '미국이 낯 선 땅'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미국은 나에게만 낯 선 땅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낯 선 땅이다.  미국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미국인에게도.

 

미국의 하이웨이를 달려보면, 차창밖에 휙휙 지나치는 풍경들은 모두 똑같아 보이면서도 동시에 모두 낯설어 보인다. 왜 모두 낯설어보일까?  그것은 도로의 폭이 넓고, 하이웨이의 폭이 넓고, 주변의 나무들이 모두 크고, 그리고 뭐든 크고 넓고 멀다. 쇼핑몰은 휑하니 크고, 진열품은 한산하다. 쇼핑몰의 주차장도 휑하다.  뭐든 크고 휑하다. 풍경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풍경이 휑하다. 작은 카메라 각도 안에 인물과 풍경이 적절히 조화롭게 들어가지를 못한다.  미국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자꾸만 zoom-in (줌-인)을 한다거나, 인물 표정 위주로 찍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풍경이 너무 한산하고 큼직해서 조화롭게 화면 안에 다 담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턴'에 가면 사람 많고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뉴욕이나 시카고, LA 등 극 소수의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휑하고, 썰렁하고, 도시를 제외한 지역은 사람도 많지 않고 한적하다. 맨해턴과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 웬만한 도시에서 한밤에 술한잔 걸치기도 쉽지 않다. 상점들은 저녁이면 문을 닫는다.  맥도널드가 24시간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심야 업소를 찾기는 쉽지 않다.  어딜가나 휑하고, 썰렁하고,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그리고 대개 한산하다.

 

이것은 나만 느끼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실내 인테리어 전문 케이블도 보이는데, 한때 심심풀이로 집 고치는 프로를 줄 창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실내 인테리어나 혹은 정원 설계 같은, 집 관련 디자이너들이 평을 할때, 가장 자주 던지는 영어가 'detail (세심한 부분처리)'이 살아있다는 말이었다.  디테일.  내가 내린 결론 - 미국 사람들 '디테일'이라고 하면 아주 넘어가는구나. 

 

미국문화가 유럽식에 비해 신생국가이고 건물들이며 생활속의 디자인이 단순하고 소박한 편이다. 공장에서 찍어나오는 트레일러 하우스들도 많고. 대체적으로 상자모양의 멋대가리 없는 건축물들. 휑한 공간.  이런 식이다보니까, 실내나 외벽에 뭔가 오밀조밀한 장식 한가지만 붙여도 '디테일'이 산다고 노래를 부른다.

 

Nighthawks의 그림을 살펴보자.  심야의 식당이나 바처럼 보인다. 창백한 형광등 불 빛 아래, 바텐더의 흰 옷이 춥고 스산해보인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기구는 커피 내리는 기구 같아보인다. 식당용 스툴 (둥근 높은 의자)이 일곱개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그중 하나를 양복입은 신사가 차지하고 앉아있다.  저만치 남자, 여자 한쌍이 앉아있다. 거리는 텅 비어있고, 그야말로 쥐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식당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유리창 너머의 보도가 희게 빛난다.  PHILLIES 라는 단어가 보이고 그 옆에 시가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필리스 시가 광고같기도 하고, 식당 이름 간판같기도 하고.  이 가게의 벽에 흔한 그림한장, 메뉴 설명서 한장 붙어 있지 않다. 꽤나 썰렁하다.

 

썰렁함.  내가 체감하는 미국은 바로 그 '썰렁함'이다. 나는 이 썰렁함을 '낯설음'으로 받아들였었다.  스산함. 새로 열었다는 커다란 식당에 기대에 차서 들어갔는데, 손님도 없고 종업원도 시들하고,  그럴때가 있다.  그럴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아차, 잘 못 들어왔다. 다른데로 갈것을' 이런 느낌이 들때가  가끔 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특히나 이리저리 떠돌며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는 이런 스산함, 휑함, 썰렁함과 익숙해지게 된다.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음악이 떠오르는가? 나에게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 재즈 트럽펫 연주의 낮고 음산한 음악이 떠오른다.  주인공들은 각자 상념에 잠겨 있고,  저 편에 앉아있는 남녀는 연인사이로 보이지 않는다.  좀 전에 바에서 만난 낯 선 타인들 같아보인다. 이들이 갈 곳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이 아니고, 인근의 모텔이 될 것 같아 보인다. 이 그림속에는 '드라마' 가 있는 것 같다.  하필 이 그림이 현재 시카고 미술대 미술관에 걸려있는 관계로, 혼자 앉아 있는 양복쟁이 남자는 '시카고 갱단'의 중간 보쓰쯤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이 그림의 본래 배경은 맨하탄이었다고 한다). 

 

평생 영화를 즐겨 본 호퍼는 그의 그림에서 영화속에서나 잡힐만한 구도의 그림들을 많이 선보였고, 또한, 영화계에서는 호퍼의 그림을 영화 속에서 다시 연출하는 일도 있었고, 호퍼와 영화는 이렇게 상호 교류하며 발전했다고 한다. 이 그림의 장면은 영화 Sting 에서 차용했다고도 하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39  페이지에 소개된 대로 House by Railroad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역시 히치코크 감독의 작품에서 응용되었다.

 

 

몰래카메라에 잡힌 사람들

 

밤의 사무실 풍경은 특히나 '성적인' 어떤 '드라마'를 암시하는 작품으로 논의가 되는 작품이다. 여성의 성적 매력은 '가슴'과 '엉덩이'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림속의 여성은  몸을 비틀어서 가슴과 엉덩이를 적절히 '관객'에게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마치 파리의 눈과 같이 작은 몰래카메라가 이쪽 천장이나 벽의 윗쪽에 달라붙어 실내를 내려다보는 형식이다. 아니면 건물의 이쪽 벽에 창문이 있고,  이 창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맞은편 창에서 내려다 보는 형국일지도 모른다.

 

 

 

 

 

Office at Night
1940
Oil on canvas
22 1/8 x 25 inches
Walker Art Center, Minneapolis, Minnesota

 

 

 

 

현대미술관 소장의 '밤의 창문들'에는 '훔쳐보기' 혹은 '몰래카메라'식으로 들여다보기 기법이 좀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열려진 창으로 커튼이 나부끼는데,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여성이 짧은 드레스 혹은 속은 차림으로 구부정하게 서있다. 여자의 머리는 보이지도 않아 통통한 뒷태가 더욱 두드러진다.

 

Night Windows

1928.

Museum of Modern Art

Oil on canvas, 29 x 34" (73.7 x 86.4 cm). Gift of John Hay Whitney

 

 

에드워드 호퍼는 이런 식으로 낯선사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물론 Jo와 결혼 한 이후 40년이 넘도록 그가 그림 작업을 하는 동안, 그의 그림에 그려진 '모든' 여성의 모델은 그의 아내 Jo 였다.  젊은 여성이거나 늙은 여성이거나, 뒷태가 예쁜 여성이거나, 창녀이거나, 시들은 여성이거나 '모두'가 그의 아내가 모델이었으므로 호퍼가 정말로 누군가를 '훔쳐봐 가면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속에는 이렇게 '훔쳐보기' 식으로 잡은 전라의 혹은 반라의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여성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남성도, 남자와 여자도 등장한다.

 

나는 이것을 '훔쳐보기'라고 말하지만,  호퍼가 정말로 대상을 '훔쳐봤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대상'을 관찰 했을 것이다. 창문이 보이면 창문을 관찰 했을것이고, 창밖에 풍경이 보이면 풍경을 관찰 했을 것이다.  열려진 창문으로 보이는 옷벗은 여자의 뒷태를 그는 그저 관찰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 그것이 거기에 있고, 내 눈에 보이니까.  이는 마치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어린 내가 혼자 유원지 숲속에서 놀다가, 나무 그늘 어둠침침한 곳에서 젊은 남녀가 아랫도리만을 내리고 뭔가 자신들만의 장난을 하는 장면을 그저 심심해서 무심코 관찰하던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훔쳐본것이 아니고 그냥 본 것이다. 하지만,  관찰되는 대상에게는 이것이 '훔쳐보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사실 호퍼의 그림에서 '훔쳐보기'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관객들의 몫일 것이다. 실은 우리들이 '훔쳐보기' 놀이를 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서.  호퍼는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그림을 던져주고, 우리는 열심히 그림을 훔쳐본다. 훔쳐보는 우리는 영원히 그림속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그것이 훔쳐보는 이들의 운명이다.

 

 

사물에 대한 그의 애정 표현의 방식

 

호퍼는 어릴때부터 수줍음을 많이 탔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그의 이러한 성품은 늙어 죽을때까지도 변치 않았다. 40년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그의 아내 Jo가 아마도 가장 가까운 친구였을 것이고, 그나마 호퍼가 가장 편안하게 대화 할 수 있는 존재 였을 것이다. 이들은 해로 했지만, 이들 결혼생활의 절반 이상은 싸움과 으르렁거리기 였다고도 한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상처주면서도 헤어지지는 않았던.  내가 생각하기에 호퍼가 아내 조와 허구헌날 으르렁대면서도 헤어지지 않았던 이유는...그의 일관된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을때까지 40년이 넘도록 서민 아파트를 떠나지 않고 살았던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아내와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호퍼를 만나서 별도로 인터뷰를 한 적이 없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한번 정하면 그냥 끝까지 가는거다.  뭐 자질구레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좋건 싫건 끝까지 가는거다. 

 

호퍼에게는 자신만의 애정 표현 방식이 있었다.  호퍼가 아내에게는 어떤 식으로 애정 표현을 했을지 잘 모르겠으나, 그가 세상에 애정표현을 하는 방식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드러내지 않고 애정 표현을 한다. 가령 이런식이다.

 

이 그림은 '일요일 이른 아침 (Early Sunday Morning)'이라는 1930년 작품이다. 뉴욕 휘트니 미국 미술관 소장품이다. 2008년 여름에 이 작품을 보고 참 반가웠었다.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작품들에서 자주 보이는  '휑하고' '썰렁한' '고립된'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제목이 '일요일 이른 아침'인데, 나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포토맥강을 건너 산책하다 보면 조지타운 거리가 나온다. 조지타운대학 인근의 거리인데 초기 미국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인 도시라서 나지막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곳에 토요일이나 일요일 이른아침에 산책을 나가면 길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안보인다. 적막감만이 감돈다. 그래도 그 거리를 산책하면서 쓸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게의 쇼윈도우마다 각기 다른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어 조용하고 한가로운 거리를 나 혼자 편안하게 걷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곧 이 적막한 거리가 주말 인파로 넘쳐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림속의 거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살던 뉴욕 맨해턴의 어디쯤, 낮은 건물들이 모여있는 어느 골목 일 것이다. 붉은 벽돌의 이층 건물. 1층에는 상점들이 있고, 2층은 주거지 일 것이다.  일층 상점들 중에서 두군데의 햇볓 가리개가 노란 색이다. 2층에는 열개의 창문이 보이는데, 그중 여섯개의 햇볕가리개가 노란색이다. 햇볕 가리개들의 높이가 제각기 다르다. 검정색 가리개도 있다. 커튼이 쳐진 곳도 있고, 창이 일부 열린 곳도 있다. 열개의 창문은 동일한 창문이면서도 커튼이나 볕가리개가 이 창문들에 각기 다른 개성을 부여한다.  이 창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볕가리개를 올리거나 내리거나, 커튼을 치거나, 창을 열거나 했을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디테일'을 대충 무시하고 선 굵게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무작정 '디테일'을 뭉개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테일'을  선사할 줄 알았다. 그는 각기 다른 창문의 풍경만으로도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삶의 방식, 개성, 삶의 이야기를 표현 할 줄 알았다.

 

 

Early Sunday Morning
1930
Oil on canvas
35 x 60 i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는 작품으로 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이야기를 마치기로 한다.  내가 이 작품을 마침표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 작품속에 그의 '개성'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시선에 무심히 스쳐 지나갈 '어느 거리'의 풍경이 될 것이다.  이 그림에는 사람 하나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각기 다른 창문들 속에 사람들이 여러가지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건물은 그 자체로 '우리 읍내 (Our Town)'가 될 수도 있고, 우리는 그 속의 마을 사람 갑, 을, 병이 되어 갑자기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대사를 날리게 될 지도 모른다.  이 풍경은 연극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영화의 세팅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은 상상속에서 무대위의 배우가 된다.  우리는 텅빈 거리를 걸으며 가게의 유리를 기웃거리거나 2층 창문 속에 어떤 이들이 있을까 상상하며 목을 빼고 열려진 커튼 너머를 유심히 살피기도 한다.  우리는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관객인 나 만 그 풍경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쩌면 이 햇살 가득한 텅빈 거리의 아무데나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다리 쉼을 할지도 모르겠다. 

 

풍경속에 아무도 없다.  이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최초의 어떤 사람

혹은 관객.

 

호퍼의 그림에는 '어린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장' '변화'의 상징일 것이다.  영원처럼 적막한 호퍼의 풍경은 '어린이'의 무궁한 변화와 성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호퍼 그림속의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과 대화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시간성을 뛰어 넘은 영원의 세계에서 이들은 숨을 쉰다.  그러므로 설령 호퍼의 그림을 보다가 내가 박제가 된다해도 슬퍼할 일은 아닐 것이다.

 

 

 

눈치 채셨는가?  이 페이지의 맨 위의 Morning Sun  창밖으로 벽돌 건물의 꼭대기가 보인다.  Nighthawks 의 이웃 건물이 낯익지 않은가?  혹은 Night Windows 의 차양이 노란색인 것이 눈에 띄지 않는가?  에드워드 호퍼가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사랑하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말없이, 그러나 늘 화폭 한켠에 담아 두는 것.  영원처럼.   그래서, 호퍼 그림 속의 주인공들  혹은 풍경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며, 미래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공감을 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을 그렸으므로. 그는 미국에서  미국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미국에만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상의 본질에 다가 섰으므로.  사물의 본질에 국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9. 05:03

에즈워드 호퍼는 (July 22, 1882 – May 15, 1967) 19세기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까지 85년을 살다간 미국 화가이다. 내가 가급적이면 작가들의 생몰 연대를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들의 활동과 그들이 살다간 지역사, 세계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살다 간 동안 한국에서는 한일합방이 일어나고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광복을 맞고, 그동안 세계사적으로는 세계 1차, 2차 대전이 지나가고, 한국에서는 육이오, 혹은 한국전쟁을 겪고, 419 혁명이 일어나고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우리 아빠 엄마가 결혼을 하고 우리 오빠가 태어나고, 언니가 태어나고...

 

85년을 살다간 이 화가에게 몇차례의 그림 매체의 변화가 있었다. 첫번째로, 그는 밥벌이를 위해 '삽화가'로 활동을 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예 삽화에 중요 도구가 되는 '에칭'기법을 스스로 익혀 '에칭'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고,  미술학교에서 만나 잠시 알던 여학생 Jo와 40대에 다시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수채화를 권유받아 수채화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Jo와 결혼하여 해로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유화작업에 주력하게 된다.

 

마침 내 사진파일에 내가 '사냥'한 (나는 이를 사냥이라 부른다. 어줍지 않은 사진이지만, 내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것들이므로) 작품들이 있어 이 세가지 매체의 작품들을 소개해본다.

 

(1) 삽화와 에칭판화 시절

(2) 수채화 시절

(3) 유화 시절

 

 

*** ***

 

 

(1) 에칭 판화: 1921년 Night Shadows (밤의 그림자).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찍은 사진이다.

 

 

 

 

 

(2) 수채화: White River at Sharon (샤론의 흰 강) 1937년 작품으로 그해 9월 버몬트 (Vermont)주의 친구를 방문했을 때 그 곳의 풍경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유화: 그리고,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국립 미술관, 허시혼 미술관, 코코란 미술관에서 '사냥'한 작품들

 

 

스미소니안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Art) 1층에 2009년에 걸린 호퍼의 작품들. 왼편은 Cape Cod Morning. 오른편은 Ryder's House

 

 

 

 

 

 

 

 

 

국립 미술관에 걸린 Cape Cod Evening.  위에 있는 것은 케이프 코드의 아침.  아래의 작품은 같은 장소의 저녁.

 

 

 

 

코코란 미술관에 걸린 Ground Swell (1939)

 

 

 

 

음...2008년 여름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서 찍은 Night Hawk 가 그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그 때 사진 상태가 비참하다...제대로 찍지 못했다...

 

Cape Cod Morning 이라는 작품으로 그의 작품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다음회에...)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9. 02:52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소장, 자화상




Edward Hopper 가 소년 시절에 습작으로 그린 바다 그림을 보면, 바다에 커다란 배가 한척 떠 있는데 그림 구석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Alone, alone, all, all alone,
Alone on a wide wide sea !

홀로, 홀로, 홀로 있다네
이 넓고 넓은 바다에 나 혼자 뿐이라네!

이것을 보고 그 부모님이 기겁을 했다고 하는데, 호퍼는 어릴때 갑자기 키가 훌쩍 커버리는 바람에 주위의 아이들과 동화를 못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혼자 그림이나 끄적이며 소일했다. 그가 어린 시절 그림 구석에 끄적여놓은 이 구절은 Samuel Taylor Coleridge 의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노 수부의 노래) 에 나오는 것이다. 대개 한국 대학의 영어영문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이라면  워즈워드와 쿠어리지의 '낭만주의'를 시작으로 영문학에 입문하게 될 것이다. Coleridge 는 워즈워드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의 문을 열어제낀 시인이었다.



어린시절 쿠어리지의 시를 베껴적던 소년 에드워드가 성인이 되어 즐겨읽던 작가들이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 (Henry David Thoreau)였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 철학자, 문인들이었다. 미국의 초절주의는 영국의 낭만주의 (Romanticism)와 칸트 철학을 배경으로 탄생한 철학으로  에머슨의 자기독립 (Self Reliance) 정신으로 꽃을 피우게 되는데, 에머슨의 Man is his own star (인간은 그 스스로 자신의 별이다) 라는 선언에서 보이는 '자아'를 주체로한 삶의 철학은 근대 미국의 정신적 근간이 되기도 한다.  그가 소년시절 쿠어리지의 시에서 성인이 되어 에머슨이나 써로우로 옮겨간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현상처럼 보인다. 그는 외톨이 소년이었고, 그러나 그는 혼자서 제발로 서기를 겁내지 않았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은 그것이 아무리 밝게 채색되어 있어도 어쩐지 스산하고 쓸쓸하다. 그런데 그 썰렁한 그림앞에 일단 서면 우리는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무언가 음산하고 스산한 바람이 우리 귓가와 뺨을 맴돌면서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잡는다.

에드워드 호퍼는 어린시절 습작에 써갈긴 싯귀처럼 평생, '외톨이'로 살아간 미국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에게는 절친한 친구들도 있었고, 결혼하여 평생 해로한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외톨이'라 부른다. 그는 평생 넓고 넓은 바다를 홀로 떠돌듯 자기만의 그림 세계를 개척해나갔고, 그의 신념을 지키다 여행자처럼 지상에서 사라져버렸으므로.

그런데, 우리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스산함이나 썰렁함, 고립감을 느끼면서도 그의 그림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공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이도 내가 느끼는 쓸쓸함을 느꼈구나. 나도 저이의 쓸쓸함을 느낀다. 우리는 공감한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이런 '공감'. 누군가 슬퍼서 울고 있으면 곁에서 함께 울어주는 것이 위안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쿠어리지의 고립감에 공감했고, 호퍼의 그림을 읽는 사람들은 호퍼의 고립감에 공감한다. 그 순간 만큼은 'alone, alone, all, all alone 이 '무효'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마술적 힘 일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세계,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0. 4. 11:37

(사진 클릭하면 커집니다)

 

Smithsonian Renwick Gallery 공식 홈페이지: http://americanart.si.edu/renwick/

 

 

지도에서 왼쪽 윗편 구석쪽에 렌윅 갤러리가 보인다.

 

 

렌윅 갤러리는 Smir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관에 속하지만 따로 떨어져있는 갤러리이다.  국립 미국미술관은 차이나타운에 인접한 갤러리 플래이스 지역에 있고, 렌윅 갤러리는 백악관 정문 앞에 있다. 이곳은 특히나 '미국 공예품' 전문 전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장은 1층 2층, 두개층인데, 1층에서는 특별기획 전시가 연중무휴로 이루어지고 있고, 2층에서는 미국미술관이 소장하는 소장품 중심의 상설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2층의 대형 중앙홀에서는 미국미술관이 자랑하는 회화 작품이 전시되는 편이다.  상설 전시장의 전시품들은 일년에 몇차례씩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가끔 가보면 새로운 전시작품들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의 렌윅 갤러리는 1972년 1월에 공개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이곳은 코코란 (Corcoran)이 '워싱턴 디씨'에 최초로 열은 미술관으로 기록된다. 윌리엄 윌슨 코코란 (William Wilson Corcoran)은 1858년, 스미소니안 캐슬 (현재의 스미소니안 인포메이션 센터)을 설계한 건축가 렌윅 (Renwick)에게 미술관을 설계해 줄 것을 부탁했고, 1859년과 1861년 사이에 코코란 미술관(Corcoran Museum of Art)이라는 이름으로 건축이 된다. 그런데 마침 남북전쟁 (1861-1865)이 일어나면서 이곳은 전쟁 참모본부 건물로 이용되게 된다.  코코란은 1969년에야 건물을 돌려받고, 1874년에야 본래 목적인 미술관을 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코코란의 수집품이 너무나 방대하여 이 건물이 비좁다고 여긴 그는, 인근에 새로운 스타일의 미술관을 짓고 1897년에 오늘날의 코코란 미술관 (Corcoran Museum of Art)로 소장품들을 모두 이동시킨다.  텅비어버린 본래의 미술관 건물은 그후 정부 건물로 사용되다가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이, 이 건물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리자는 제안을 하고, 1965년 스미소니안 재단의 리플리 (Ripley) 원장이 당신의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이 건물을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 접수하여 미국 미술품과 공예품을 소장할수 있도록 주선한다.  그 결과 1972년부터 건물 설계자 Renwick의 이름을 붙인 Renwick Gallery 로 우리 앞에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스미소니안 박물관들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곳은 국적 불문하고 무료 입장이다. 백악관 정문앞에 위치하고 있고, 인근에 (바로 두 블럭 건너에) 코코란 미술관이 있기 때문에, 백악관에 국빈급 손님들이 방문할 경우 대통령 부인은 귀빈 부인들을 렌윅과 코코란으로 안내하여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셔널 몰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수학여행'코스로 워싱턴 디씨 내셔널 몰 일대의 '스미소니안 박물관'을 찾는 관광객들의 시선에서 약간 비껴나 있어서 언제 가도 한가한 편이다. 물론 국립미술관이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규모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한가롭게 나들이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렇게 2층 홀로 올라가는 중앙 계단이 보인다.  입구 오른편에는 안내 데스크가 있고,  1층 전시실 입구가 양쪽에 있는데, 1층은 늘 특별 기획전시가 열리는 곳이고,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기 때문에 1층 사진은 생략하게 된다. 이 중앙계단을 올라가거나 내려갈때, 그야말로 레드 카펫(Red Carpet)을 밟게 되는데,  기분이 제법 근사해진다. 뭐 나같은 소시민도 무료로 드나들며 고급스런 카펫을 밟아볼 수 있으니. 잠시나마  이런것을 누려보는 것도 나쁜일은 아닐것이다.

(사진 클릭하면 커집니다)

 

 

마침 2층 중앙홀에서 미국 근대미술품 전시를 하고 있었다. (흐뭇). 왼쪽 구석의 그랜드 피아노와 비교하면 중앙의 둥근 소파의 크기나, 벽에 걸린 미술품들의 규모도 어림짐작이 가능해진다.

 

 

이 커다란 홀의 주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증명사진.

 

 

 

미국미술사를 정리하면서 언젠가 정리하게될 여성화가, 그녀의 자화상 앞에서.  (퀴즈 이 여성화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렌윅 미술관의 '상징'처럼 소개되는 '유령시계 (Ghost Clock).' 이 작품을 왜 '유령시계'라고 부르는 것일까? (퀴즈 2: 이 작품의 특이점을 찾아보세요).

 

 

렌윅 미술관이 자랑하는 또하나의 대표선수: Game Fish

 

 

 

2층 중앙계단 주변 홀의 풍경.  바로 발아래에 1층으로 내려가는 중앙계단이 있다.

 

 

 

미굴관 입구를 나서서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맞은편으로 보이는 백악관 정문과 울타리.

 

 

 

 

 

음...1층에 기념품샵이 있는데, 이곳이 '공예품' 전문 미술관이니까, 특히나 공예 기념품이 개성있는 것들이 있었다.  브로치중에서 오른쪽에 있는 것, 달을 보는 고양이. 그것 '참 예쁘다!' 하고 들여다봤는데 가격을 보니까 백달러 ($100). 음, 역시, 난 눈이 높군. 맘에 들면 일단 100달러는 기본으로 넘어 주시는군. 흐헤헤. 내 맘에 드는 것이 비쌀땐, 그냥 '난 눈이 높군'하고 스스로 칭찬해주면서 패쓰.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을 나 스스로 발견했는데, 이런 기념품샵에서 뭔가 사고 싶은 것이 있을때, 가격이 비쌀때, 그걸 사진을 찍으면, 내것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 카메라에 담았으니깐.  그래서 대개 '책'종류를 제외하고 기념품을 사는 일이 별로 없다. 특히나 요즘은, 뭐랄까 인생무상을 느끼면서, 살면 살수록, 뭘 사서 쌓아놓는 일이 무겁게 느껴지고, 그냥 이렇게 사진으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족하게 되는데... 이것도 건강한 패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욕망할줄 알고, 헛된것을 탐할줄도 알고 그런것이 삶이지. 난 어딘가가 고장이 난거야.  기계고장인거야. 기계고장. 난 너무 큰것을 탐했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지상에서 불가능한 너무 큰것을 욕심냈던 것이겠지.

 

 

 

 

 

Posted by Lee Eunmee

 

Anna Mary Robertson, Moses 할머니의 일생

 

모세 할머니는 1860년에 태어나 1961년에 사망했다. 1세기 한 바퀴를 돌고도 일년을 더 살은 셈이다.  결혼하기 전 이름은 안나 마리 로버트슨 (Anna Mary Robertson)이었고, Moses와 결혼하였으므로 남편의 성을 따라서 Moses 할머니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안나 마리를 씨씨하는 애칭으로 불렀다. 씨씨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 뉴욕주의 시골마을, 평범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이로 태어났다. 당시 농가의 아이들은 집안일을 거드느라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많지 않았다. , 가을에는 들판에 나가서 일을 거들어야 했고, 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어느 겨울날 아빠가 몸이 아파서 며칠간 일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지내게 된 적이 있었다.  아빠는 심심한 나머지 집안의 빈 벽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거실벽에 페인트로 호수의 풍경화를 그려넣었는데, 온가족이 이 그림을 보고 기뻐하였다. 어린 씨씨 역시 아빠의 그림이 좋아보여서 판자에다 숲과 호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대로 이것을 ‘lamb scape’ 라고 불렀다. (영어로 풍경화는 랜스케이프, landscape 인데, 어린아이가 이 단어를 잘 모르니까 lamb scape 라고 말 한 것이다.) 식구들은 씨씨가 램스케이프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깔깔 웃었다고 한다.

 

씨씨는 농가의 소녀들이 그러하듯 엄마가 단풍시럽을 만들거나, 우유로 버터를 만들 때 거들어야 했다. 씨씨는 양초를 만들고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세탁이나 다림질, 바느질 등 집안에서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배웠다. 그리고 열두살이 되던 해에, 다른 농가의 소녀들처럼 씨씨도 남의집 살이를 하기 위해 떠났다. 60년대, 70년대 농가의 소녀들이 서울이나 대도시에 식모아이로 들어간것과 마찬가지 풍경이었으리라.  당시에는 이러한 풍경이 낯설지 않았으므로 씨씨역시 이런 상황을 특별히 슬퍼하지는 않았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 명랑하게 성장했다.  씨씨는 일요일에 주인집 가족들과 다함께 교회당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사람들도 만나고 친구를 사귈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씨씨가 두번째로 옮겨간 집에서는 씨씨가 학교에 다닐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집안 일을 모두 마치고나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어느날 씨씨가 그린 마을 풍경화를 본 선생님이 그 솜씨에 감탄하여 그림을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씨씨에게는 잊을수 없는 기쁜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자신의 그림을 칭찬해주었으므로.

 

 

 

 

이렇게 남의집살이로 일을 하던 씨씨는 1986, 17세 되던 해에 토마스 솔로몬 모세 (Thomas Solomon Moses)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 역시 같은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둘은 결혼하여 버지니아의 섀난도 골짜기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이들은 열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에 다섯명의 아이를 골짜기에 묻어야 했다. (그림: 섀난도 골짜기 Shanandoh Vallery, 1938)

 

 

 

 

 

 

 

 

 

섀난도 골짜기의 농장에서 살던 이들은 다시 뉴욕주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이글 브리지 (Eagle Bridge) 근처에 농장을 장만하여 니보산 (Mr. Nebo)이라고 이름짓고 정착한다이곳에서 씨씨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농부인 남편을 거들면서, 집안 살림을 하면서 부지런하게 살아간다. 어느해에 도배를 하다가 도배지가 다 떨어지자 씨씨는 페인트로 난로 가림판에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가족들이 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녀가 최초로 그린 커다란 그림이었다고 모세 할머니는 술회한적이 있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여 집을 떠나고 난후, 1927 1, 모세 할머니가 67세 되던해에 남편 토마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녀들도, 남편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모세 할머니는 시름을 덜 겸, 털실로 헌 그림을 고치곤 했는데, 시력이 약해지고 류머티즘으로 바느질을 하기 어려워지자 그림붓을 들게 된다. 그렇게 십여년간 모세 할머니는 심심파적으로 싸구려 페인트와 붓을 이용하여 추억속의 풍경들을 그리게 된다. 그의 그림 속에는 링컨 대통령이 저격당하여 조기를 내 걸고 있는 마을이 들어있기도 하고, 새로운 자동차를 타고 소풍가는 가족의 풍경이 그려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뉴잉글랜드 지방 농촌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뉴잉글란드 지방이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이 길어서인지 특히나 눈 쌓인 겨울 풍경이 많이 보인다. 흰눈,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조각보를 만드는 장면도 보이고, 다 함께 단풍시럽을 만드는 장면도 보인다. 이는 모세 할머니가 평생 살아오면서 직접 경험한 삶을 풍경들이었고, 그이의 추억속에 생생하게 흐르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의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1938, 모세 할머니가 78세 되던 해에, 모세 할머니는 자신의 그림을 동네 상점 (Hoosick Falls drugstore)에 진열해 놓았다. 몇푼에라도 팔리면 용돈벌이를 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오랫동안 예정되어온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마침 이 상점을 지나던 뉴욕의 미술품 수집가 루이스 칼더 (Louis Caldor)가 시골 상점에 진열된 모세 할머니의 그림들을 발견하고, 이 그림에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낸 것이다. 그는 당장 상점에 진열된 작품들을 모두 사들여가지고 뉴욕으로 향한다. 처음에 뉴욕 화랑가의 반응은 냉담했다. 알수도 없는 무명, 노인 화가의 그림에 투자해봤자 별 볼일 없을거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무명 미국화가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모세 할머니의 그림 세점을 전시하게 된다. 이어서 1940 (모세 할머니 81) Galerie St. Etienne 에서 모세 할머니의 개인 전시회를 개최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보러왔고, 이들은 모세 할머니의 풍경화속에 담긴 추억을 읽으며 감동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1961년 모세 할머니가 사망할때까지 20여년간, 1,5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내면서, 모세 할머니는 그야말로, ‘국민 할머니로 통하게 된다. 트루만, 아이젠하워, 케네디 대통령이 모세 할머니에게 해마다 신년 카드를 보냈으며, 할머니의 작품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으로 판매되고 혹은 벽지나 직물에 박혀 대량으로 판매되어 나간다. 그녀의 일대기가 드라마가 되어 소개되기도 하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소개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어느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모세 할머니가 살던 시골에서는 그 방송이 잡히지 않아 정작 모세 할머니는 자신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후에 방송 기자가 다큐멘터리 테이프를 가져다가 틀어서 보여줬다고 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신을 본 할머니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무엇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을 만들어 냈는가?

 

미국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예술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편이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을 예술적인 회화로서 취급하기 보다는 풍속화 (folk art, primitive ar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오히려 모세 할머니의 풍속화들이 왜 그 시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지, 그 배경을 주로 논의 하는 편이다.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의 저자 Frances K. Pohl 이나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의 저자 Robert Hughes 는 모세 할머니가 발견 된 시점의 사회적 분위기에 주목한다.

 

모세 할머니가 뉴욕화단의 수집가에게 발견될 즈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공공미술정책의 영향으로,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중서부 출신의 화가 그랜트 우드 (Grant Wood)가 한편에서 미국인의 미국적인 것을 외치며, ‘미국의 풍경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거니와, 뉴딜정책의 공공미술프로젝트에서 요구된 것이 미국의 풍경이기도 했고, 여태까지 유럽문화에 의지하던 미국인들은 우리들만의 것에 서서히 눈을 돌리게 된다.  미국이 자랑하는 미국화가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가 너무나도 미국적인 풍경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등장한 것이 1930년대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경제 대공황이었던 1930년대에 미술가들도 역시 경제적 암흑기를 거치게 되었는데, 에드워드 호퍼는 이때부터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30년대에 서서히 우리 미국인들의 풍경에 눈을 뜨게 되는 미국의 대중들은 2차대전을 거치면서 1945년 전승국이 되어 경제적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자신이 소속한 국가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유럽으로 눈길을 돌리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 우리 할머니들의 것, 우리가 향유하던 것을 향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모세 할머니 외에도 1948년 크리스티나의 세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 청년 앤드루 와이어드가 있었고, 그리고 일관되게 미국의 얼굴, 미국의 풍경들을 밝은 색조로 그려낸 노만 로크웰 (Norman Rockwell)도 있었다.  미술 수업을 받지도 못 한 채로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역시 말년에 미술계에 데뷔한 호레이스 피핀 (Horace Pippin)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발굴해 낸 미국의 작가라고 할 만하다.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가 특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계기를 당시 눈을 뜨게 되는 텔레비전과 대량생산문화에서 찾기도 한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텔레비전은 대중문화 매체의 상징이고, 텔레비전에 소개되는 모세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이가 그려내는 작품의 예술성을 떠나서 그대로 소박한 인간의 승리를 전하는 드라마이기도 했을 것이다. 카드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이의 그림을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 직물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의 그림이 박힌 벽지나 테이블보는 모세 할머니를 더욱 대중에게 다가가게 해 주었다. 그이가 그린 그림들이 예술성이 어떠한지 이미 그것은 대중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모세 할머니는 예술성을 넘어서서, 비평가들의 회의적 시선을 넘어서서 이미 국민 할머니가 되었고, 대통령들이 앞다퉈 악수를 하고 싶어하는 미국 문화의 상징, 그리운 추억의 아이콘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제목: Christmas (1961)

                                                 Oil and Tempera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 풍속화 갤러리 2009년 9월 6일 촬영

 

모세할머니는 나이 80에 미술계에 정식 데뷔했지만 그 후로 20년이 넘도록 국민 할머니로 영예를 누리며 살아갔다. 그가 남긴 그림이 1,500점이 넘는다고 하는데, 꽤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이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그이의 그림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미술관 웹사이트를 뒤져보면 소장품 명단에 몇 편이 올라있지만, 전시장에 내 걸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한 모세 할머니의 작품은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 한 점,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 점, 이렇게 딱 두 점이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은 풍속화 (folk art)’ 갤러리에 걸려있다.  필립스 콜렉션에서도 한번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요즘은 전시되고 있는 작품이 없다. 

 

                                           2009년 7월 3일 촬영

 

 

 

전시장에서 그림을 볼 수 없다 해도 실망 할 필요는 없다. 해마다 달력업자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 열두 장을 담은 달력을 찍어내고, 우리는 일년 내내 그이가 그린, 행복한 그림을 보며 지낼 수 있으니까. 모세 할머니는 그이가 기억하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우리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 우리 이웃집 어르신들, 내 친척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찾아낼 수 있다. 미술 비평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회화사적 작품성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모세 할머니는 비평가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고 명랑하게 그림들을 그려나갔고, 그의 그림들은 지금도 나에게 노래, 행복한 어린 시절의 노래를 선사한다. 이 행복한 보편성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어떤 설명을 해 줄 것인가?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예술은 비평을 초월하는 곳에 있다고.

 

http://www.benningtonmuseum.com/index.aspx  이곳은 모세 할머니를 기념하는 미술관. 뉴잉글랜드 지역 버몬트주에 위치하고 있다. 2009년 8월에 매사추세츠를 방문하면서 이곳을 들러보려고 신경쓰고 있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가 볼 수 없었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는 모세 할머니가 젊은시절 20여년간 살았다는 셰난도 골짜기의 농가집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  소풍삼아 그 언덕에라도 가게 되면 그때 관련 페이지들을 업데이트 하겠다.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2  또다른 일러스트레이터, 여성 화가 Tasha Tudor 이야기.

 

 

참고자료:

 1. Grandma Moses, written and illustrated by Alexandra Wallner

 2.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by Robert Hughes

 3.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by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9. 28. 18:45

그동안 틈틈이 미국사와 미국미술의 발전사를 살폈는데, 이제 어떤 전체적인 '지도'가 필요한 시기인 듯 하다.  중구난방으로 기분 내키는대로 쓰고 있긴 하지만, 이제 골격은 잡아놓고 부분부분 그려나가는 식으로 정리를 하는것이 좋을 것이다. 이 문제로 고민을 좀 하고 있었는데, 뉴왁 미술관 미국미술 관련 페이지에서 대략의 뼈대를 잡을수 있었다.

 

뉴왁 미술관에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이 미술관은 분명히 시대적으로 어떤 개성을 정해놓고 전시품들을 진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립미술관도,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도 시대적인 개념을 정하여 소장품들을 전시하긴 했는데, 뉴왁이 이를 분명히 밝혀서 '안내'를 잘 하고 있다.  내가 읽고 있는 미국미술 안내서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긴 했는데 막상 차례를 살펴봐도 그렇고 '장황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확실한 '지도'를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미술의 흐름이란것이 자대고 줄긋듯 명확히 떨어져주는 개념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내 머릿속에도 장황한 개념만 열거될 뿐, 시대별로 똑 떨어지게 정리가 안된다.

 

아래의 연표를 바탕으로, 이를 응용하며 커다란 전지에 시대별 지도를 그려놓고, 해당 시기에 나를 '매혹'하는 작가들을 포스트잇으로 붙여나가는 식으로, 나만의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면 좋을 듯 하다. (누군지 정리 한번 잘 해 놓았다.)  왜 미술전문가들은 이런 시도를 안하거나 못하는걸까? 너무 아는게 많아서?  그런데 아는게 많아도 주워담지 못하면 그게 또 마냥 허무한거라... 왜 방대한 지식을 담은 책들이 이런 간단한 표 하나를 제시하지도 못하는가?  나는, 일단 누군가가 잘 정리해 놓은 표에 입각해서, 내식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지고, 그 틀안에 작가와 작품을 집어 넣는 식으로 모자이크 하여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겠다.

 

 

http://www.newarkmuseum.org/PicturingAmerica.html

1730 to 1900

The American Colonies, 1730 -1776
The Young Republic, 1790 -1860
Romantic Portraits for Eastern Cities, 1790-1860
Country Portraits, 1790 -1860
The Rise of Landscape Painting, 1825-1880
The Civil War and Its Aftermath, 1860-1900
The Lure of Europe, 1850-1900
The Gilded Age, 1875-1900


1900 to Present

Into the Modern Era, 1900-40
Far From the Modern World, 1900-25
A Modern Art For a Modern World, 1910-30
Faith, Fear and Failure in The Machine Age, 1920-40
In the Wake of the War, 1945-65
Surrealism and Abstract Expressionism, 1930-65
Challenging Conformity, 1955-65
Art Since 1965

 

이 표를 바탕으로 내 표를 만들어내면 된다.  이제 정리가 되었으니까, 두서없는 분류 시스템도 개편을 하고. 정진.

 

 

Posted by Lee Eunmee
Pop Art2009. 9. 19. 18:42

 

http://americanart.textcube.com/48 로이 리히텐시타인의 '집'에 이어

 

워싱턴 디씨의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 미술 박물관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Art and Portrait Gallery) 입구에 설치된 로이 리히텐스타인(1923-1997)의 작품, Modern Head (근대적 머리). 1974년에 디자인이 만들어졌고, 이 작품은 1989-1990 년에 제작된 것이다.

 

리히텐스타인은 1960년대 말 부터 이 모던헤드 시리즈를 시작하는데, 산업화가 가속되는 현대 문명 속에서 기계처럼 변화하는 인간을 묘사했다. 1930년대를 풍미했던 아르 데코 (Art Deco) 건축 디자인과도 맥이 통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원래 1996년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World Trade Center)에서 한블럭 떨어진 곳에 세워졌었다.  그런데 2001년에 911 참사가 터졌고, 무역센터 빌딩들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발생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한복판에 있었던 이 작품은 약간의 표면 상처만 입었을 뿐 멀쩡하게 그 재난을 버티고 서 있었던 것.  모던 헤드.  이는, 인간의 두뇌가 그 모든 재앙 속에서도 꿋꿋함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래서, 911참사 발생 직후, FBI 요원들이 이 지역을 조사하던 시절, 이 작품은 FBI 요원들의 '메모판'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작품 벽에 메모지들을 붙여놓고 정보 정리도 하고 연락도 취하고...  911참사 발생 2개월 후 2001년 11월 9일 모던헤드는 뉴욕에서 벗어나 워싱턴의 스미소니언으로 오게 되었다. 현재는 박물관 울타리 안쪽에 세워져 있으므로 다가가서 메모지를 붙여 놓을 수는 없지만, 멀리서도 이 파란 얼굴을 보면 반갑기도 하다. 재앙을 딛고 일어선채 우리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있는것 같아서.

 

september 18, 2009 rf.

 

 

그런데, 지금 사진을 들여다보니 울타리에 붙어있는 장애인 표시의 파랑색과 모던헤드의 파랑색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루는듯 하다.

 

 

 

Posted by Lee Eunmee
Pop Art2009. 9. 14. 08:36

 

 

미국 미술가들을 차례차례 정리하다보면 훗날 Roy Lichtenstein (로이 리히텐시타인)에 대한 챕터도 정리가 되겠지만, 오늘은 National Galler of Art (워싱턴 국립 미술관)의 조각공원 (Sculptor Garden)에 설치된 그의 작품 한가지를 소개한다.

 

사실, 이 작품은 워싱턴에 2년 넘게 드나들면서 자주 보던 것인데, 며칠 전에야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했던 것을 고백한다.

 

(사진감상)

 

 

 

'집'이라는 이 작품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 입체감을 달리한다. 귀여운 집이다. 어떻게 보면 공중에 떠있는것 같기도 하고.  언덕위의 집을 이각도 저 각도에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이곳은 평지이다. 평지인데 어떻게 언덕위의 집처럼 보이는가?

 

그 비밀은..

 

..

 

..

 

..

 

..

 

 

우리의 착시현상을 이용한 작품이다.  :)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