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y Ossawa Tanner (1858-1937)
Christ and His Disciples on the Sea of Galilee (ca. 1910)
Oil on artist's canvas board
2010년 5월 1일 Virginia Museum of Fine Arts (버지니아 미술관)에서 촬영
크기는 대략 가로 20센티 세로 15 센티 정도로 추측됨 (작은 그림이었음)



버지니아 미술관이 대대적인 증축공사를 마치고 재 개관식을 하던날 (2010년 5월 1일) 미술관 방문을 하였다가 발견한 헨리 오사와 태너의 소형 작품. 갈릴리 바다의 예수와 그의 제자들. 성서적인 지식이 일천하므로 간단히 상식선에서 배경 설명을 하자면,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중, 스승께서 잠시 낮잠을 즐기고 계시는 와중에 풍랑이 몰아치는지라... 어리석은 제자들이 풍랑에 겁이나서 "스승님, 배가 뒤집힐 판국에 잠이 오십니까? (내식으로 대략)" 성화를 하니까,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나서 짐짓 짜증스러운 태도로 말씀하시다: "어리석은 제자들아, 내가 그동안 보여준 이적들을 보지 못했느냐?  내가 자는데 왜들 법석을 떠느냐.  풍랑이 그렇게 무섭다는 말이냐?"  예수께서 약간 성가신 표정으로 풍랑을 향하여, "시끄럽구나. 어리석은 내 제자들이 무섭댄다. 좀 조용히 해라" 하고 타이르시니 풍랑이 잠잠해지도다~

대략 이러한 일화가 전해지는 바, 그것을 태너가 화폭에 옮겼으리라 짐작된다.

헨리 오사와 태너는 유색인종이 인정을 못받는 미국의 풍토에서 흑인 화가로 성장한 사람인데, 종국에는 미국의 인종 차별에 진절머니가 난다며 유럽으로 건너가 버렸다 (1891년). 이 작품은 파리의 살롱전에서도 전시가 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던 빼어난 작품이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헨리 오사와 태너의 '수태고지'  대형작품이 걸려있는데... 오사와 태너의 미술세계를 종합적으로 정리할때 함께 소개하겠다.

이 작품은 딱히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 일화를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고해와 같은 삶을 헤쳐나갈때, 풍랑이 몰아치고 배가 위험에 빠질때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자세, 그런 성품을 키우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풍랑을 잠재우고 대양을 건너겠다는 자세로 하루 하루를 살아 나가고 싶은 것이다.








텍스트큐브가 '사실상' 서비스를 중단하겠다는 공지를 해서,
어떻게 할것인가 잠시 고민을 했다.
텍스트큐브를 블로그로 선택한 이유는,
조용하고, 눈에 안띄고, 그냥 조용히 혼자 놀기에 좋아보여서
그리고 구글이 관리한다니 데이타 잃어버릴 걱정을 안해도 될것 같아서.
지난해 5월에 만들어 놓고 있다가 8월부터 사용했으니까, 계정은 1년간 유지한 셈이다.

나는 이 블로그를 갖고 놀면서, 내 인생에서 힘든 오후의 한때를 무사히 건널수 있었다.
많이 아팠으나, 지금은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시간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주긴 하지만,
텍큐에서 블로그질하면서 스스로 정신상담을 주거니 받거니 한 것도 도움이 되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미국미술 프로젝트를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텍큐 쓰기가 애매해지고 말았다.
프로젝트를 마무리 할 때까지는 계속 작업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계정을 하나 만들어놓긴 했는데
이삿짐을 옮길지 말지는 좀더 두고 볼 것이다. 서두를 이유가 없으니까.
어디서 무엇을 하건, 그다지 미련을 느끼지 못한다. 아쉬움도 별로 없고.
완전 '유목민' 생활에 익숙해진 것도 같다.  :-)
어차피 나그네 아니던가.
아무튼, 시작한 일은 매듭을 지어놓고...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명색이 '미국 미술 블로그'인데, 그동안 미술 얘기가 뜸 했었지요. (-.-)

 

벚꽃놀이 구경 간 김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기념관에 설치된 George Segal (1924-2000)의 경제공황기 3부작 조형물을 사진기에 담아 왔습니다.  워싱턴 디씨를 관광할때, 아마도 디씨의 상징물처럼 화보에 소개가 되는 장소들로서는

 * 워싱턴 기념탑

 * 링컨 기념관

 * 호숫가의 흰 건물, 제퍼슨 기념관

 * 백악관

 * 국회의사당

뭐 이런 '하얀' 건물들일겁니다.

그런데,

호숫가의 제퍼슨 기념관, 그 눈에 띄는 하얀 기념관 건물에 가려진, 우중충한 색조의 '공원시설' 같은 장소가 있는데, 그곳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기념관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해서 제가 상세히 아는 것은 아니고, 그에 대해 얼핏 떠오르는 사항들은

 * 미국역사상 유일한 3선 대통령

 * 경제 대공황을 구제하기 위한 뉴딜정책

 * 미국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자'라고 알려진 대통령

이런 사항들입니다.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제퍼슨 대통령 기념관 인근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미국 미술사'책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시대적' 작품이 있습니다. 회화작업도 하고 현대적 개념의 조각 작업도 했던 George Segal 의 3부작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1) The Rural Couple : 시골 부부 : 경제공황때 고통받던 농민들

(2) The Breadline: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 경제공황때 고통받던 도시 빈민들

(3) The Fireside Chats: 노변정담 (난롯가의 대화) : 1933-4 년 사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30여차례에 걸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라디오 연설을 했던 일화를 이 작품에 실은듯 합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한 사나이를 주인공으로 했습니다.

 

 

...작가인 George Segal 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들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FDR (루즈벨트 대통령 머릿글자만 부르는 약칭) 기념관에 서있는 이 세가지 작품들을 감상해주세요 (미니 카메라로 대충 찍은 사진이라, 사진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요...)

 

 

(1) 시골부부

 

 

 

 

 

(2)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이 작품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유쾌하고 발랄하게 작품 사이사이에 줄을 서며 깔깔대는 학생들 (고등학생들로 보였습니다.)

 

 

 

 

(3) 난롯가의 대화 : 루즈벨트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에 귀를 기울이는 한 사람.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2. 11. 02:08

척 클로스 (Chuck Close, 1940년 출생)는 현재 생존하는 작가입니다.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면, 영문을 알수 없는 큼직한 초상화를 만나게 되는데, 그 들중에 척 클로스의 작품이 끼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략 아래와 같은 분위기의 작품들 입니다.

 

 

척 클소스는 미국대륙의 서쪽, 시애틀에서 태어나 워싱턴대학을 다녔고요, 후에 예일대학으로 옮겨 미술을 공부합니다. (예일 하니까, 가짜박사  파동을 일으켰던 신모씨가 그 이름을 팔았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1967년에 뉴욕에 입성한 클로스는 사진을 바탕으로 한 대형 초상화 작업으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이를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이라고 하는데, 사진을 바탕으로 뭔가 극대화 시키고 이를 회화에 옮기는 시도를 여러명의 현대 미국 미술가들이 했쟎아요. 리히텐스타인(Roy Lichtenstein) 도 그랬고, 로젠퀴스트 (Rosenquist) 도... 이 포토리얼리즘이 1970년대 미국미술에 선풍적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척 클로스의 경우에는 '모눈종이'같은 작업을 했지요. 대충 보자면 - 사진에 모눈종이처럼 줄을 긋고요, 캔바스에도 모눈종이처럼 줄을 그어서 그 모눈들을 일치시키는 식으로 작업을 한거지요. (또 어떤이 (Kline)는 이미지를 프로젝터로 비쳐가지고, 그 비쳐진것을 그리는 식으로 확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클로스의 경우에는 이 '모눈종이' 기법이 그의 시그니처가 되고 말았는데요.

 

 

그런데, 척 클로스는 그의 이 독특한 기법도 눈에 띄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것은 그 사람의 인생 그 자체입니다. (척 클로스에 대해서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제가 미술 전공도 아니고 예술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냥 어떤 사람의 아주 특별한 삶을 들여다보는 쪽이 저한테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요.)

 

 

척클로스의 이력을 보면 1988년의 '사건'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어느날 모 미술 시상식장에 시상자로 참석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나던 그는 그의 신체에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의 나이 48세이군요). 몸이 갑자기 이상해진겁니다. 그는 서둘러 그 미술 시상식장에 도착해서 자기 차례를 앞당겨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임무를 마치자마자, 단상을 간신히 내려와, 병원으로 실려갑니다. 그는 급작스럽게 경추 아래의 신경이 마비되어 꼼짝을 못하는 처지가 됩니다. 얼굴만 살아있고, 목 아래부터는 마비가 된 겁니다.  (재앙이죠). 아, 아마도 나였다면, 활발하게 잘 나가던 예술가가 어느날 이지경이 되었다면, 아마도 나라면, 그냥 콱 죽고 싶었을것 같아요... 그는 재활 훈련을 하여 가까스로 손을 조금 움직일정도로 회복했는데요, 그렇게 움직이게 된 손끝에 붓을 매달고, 고정시켜가지고는 회화 작업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1988년 이후, 제가 허시혼에서 본 1994년 작품이나, 최근에 본 2006년 클린턴 대통령의 초상화의 특징이, 조그마한 모듈 (세로와도 같은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척 클로스는 마비가 된 그의 손으로 그 작은 모듈들을 하나하나 완성시키는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해나간거요. 어찌보면, 불구가 된 후에 그의 아이디어는 더 미친듯이 자라난것 같기도 합니다.  거의 전신마비의 경지에 이른 화가가 만들어낸 초대형 초상화, 그 초상화속에 감춰진 세포막과도 같은 작은 모듈들. 그 단세포들이 만들어낸 '인물'의 초상.

 

 

허시혼 미술관의 Roy 라는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그 네모네모속에 다채롭게 그려진 것들을 보면서, 저는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으로 현미경속을 들여다보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현미경을 통해 '세포'를 구경한것은 분명 초등학교 5학년 과학시간에서였습니다. 세포중에서 가장 보기가 쉽다는 양파의 속살 껍데기, 그것을 화학약품으로 처리하여 현미경에 대 놓고,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차례차례 줄 서서 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현미경을 어떻게 들여다볼지 몰라서 당황하다가, 서서히 내 눈에 들어온 '세포'의 모양.  아, 세포라는 것이 이런 네모난 방 모양이구나.  이렇게 생긴거구나!  척 클로스의 '모듈'로 이루어진 초상화의 그 무수한 모듈들을 들여다보며 저는 '세포'들을 기억해냈지요.

 

 

 

척 클로스는 극히 제한된 그의 손끝의 작업으로 생명의 본질 혹은 우주의 본질에까지 다가가려 했던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작품들을 간단히 보실까요

 

 

 

 

 

 

 

1980년대: '그날' 이전의 작품들

 

 

 

Phil III, 1982, cast paper pulp

Chuck Close 1940-

2009년 12월 2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링컨 갤러리에서 촬영

작품사진 왼편에 알록달록하게 보이는 형광불빛은

백남준씨의 Electronic Highway (미국지도를 주제로 한 비디오작품)가 액자에 반사된것

사진 오른편의 알록달록하게 반사된 것은 Sean Scully의 작품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링컨 갤러리.

사진 가운데의 흑백액자가 위의 Cluck Close 의 작품 Phil III

가운데 파란 그림은 E.Kelly의 작품, 오른쪽의 대형 그림은 로젠퀴스트.

 

 

이 Phil III 이라는 작품을 저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과 크라이슬러 미술관 이렇게 두군데서 보았습니다. 동일한 제목의, 동일한 년도에 만들어진 작품들이죠. 척 클로스가 왜 동일한 작품을 이런식으로 제작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다 수작업한 것인데요. 흑색에서 백색에 이르기까지 채도가 다른 펄프 조각을 배열하여 만든 작품으로 보입니다.

 

 

Phil III, 1982, Handmade paper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아래 작품은,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 동관(East Building) 지하층의 전시실 입구 홀에 걸려있는 대형 작품입니다. 제가 적어놓았지만, 높이 260센티 폭 213센티의 초대형 얼굴이지요. 사진을 가지고 작업을 한 것이라는데, 이게 모두 척클로스가 손으로 물감을 찍어서 만든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그의 지문으로 이루어낸 대형 작품이라는것이지요. (사람이...참...별짓을 다해요~)

 

 

 

 

 

 

 

Fanny/Fingerpainting, 1885

oil on canvas

259.1 x 213.4 x 6.3 cm (대략 높이 260 센티, 너비 213 센티)

Chuck Close (1940-)

2010년 1월 16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1990년대- 현재, '그날' 이후의 작품들

 

 

Lucas/Woodcut, 1993

Color woodcut with stencil (pochoir)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촬영. 대여하여 특별전시중이므로 다른 곳으로 옮겨갈것임.

 

이것은 기존의 척 클로스가 제작한 Lucas 의 초상화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원작 초상화가 있습니다) 목판화 작업으로 옮긴 것입니다.

 

 

 

아래의 작품들은, 이제 척 클로스의 전형이 되어버린 세포모양의 모듈로 이루어진 초상화 작품들 입니다.

 

Roy II, 1994 Oil on canvas

259.1 X 213.4 CM

Chuck Close

2009년 9월 19일 Smithsonian Hirshhorn Museum of Art 허시혼미술관에서 촬영

 

 

 

 

 

 

 

William Jeffereson Clinton, 2006 (born 1946 )

oil on canvas

Chuck Close born 1940

http://americanart.textcube.com/348 해당 페이지

 

 

척 클로스는 아직 현역의 작가 입니다. 그의 미술 세계가 어디까지 갈지, 흥미진진하죠.

 

 

2010년 2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2. 10. 03:47

Mississippi Boatman 1850, oil on canvas

George Caleb Bingham (조지 케일럽 빙엄) 1811-1879

 

 

 

 

조지 케일럽 빙엄(1811-1879)는 버지니아주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지만 아버지의 투자 실패로 삶의 근거지를 중서부 미조리주로 옮기는데 성년이 되어 유럽을 여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미주리주에서 평생을 지내게 됩니다.  빙엄은 뒤셀도르프에서 미술 수업을 한적도 있지만, 이는 그가 성년이 된 후에 후원을 입고 뒤늦게 수업을 들은 셈이고, 미술사가들은 빙엄을 '독학 (self-taught)'하여 입신한 화가로 평가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어릴때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그림을 익혔는데, 그의 그림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고 그의 입지가 단단해질 무렵에 그에게 그림 수업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빙엄은 목공예 기술을 익힌적도 있는데 그러면서 회화에 눈을 떴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그보다 한세대 먼저 펜실베니아에서 활동했던 '평화의 왕국'의 화가 Edward HIcks 가 마차 장식이나 표시판 기술자로 일하면서 스스로의 화풍을 익히면서 퀘이커 교도로서 설교를 하러 다니기도 했었는데요, 빙엄 역시 목공예를 하면서 미술 작업을 하는 틈틈이 법률가가 될것인지  목사가 될것인지 고민을 하기도 했고요, 설교를 하러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변호사도 목사도 되지 않았고 초상화 주문을 받아 그려주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하게 되었는데요.  정작 그의 예술성이 인정을 받게 된 분야는 그가 미조리주, 미시시피강변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에서였습니다.

 

 

빙엄이 즐겨 그린 '미시시피강변의 사람들' 소재가 위의 그림에서도 나타나는데요.  미시시피강은 북미에서 가장 긴 강이지요. 미국의 중앙 북단에서 흘러내려 뉴올리안즈까지 이어지는 대동맥과도 같은 강입니다. 저는 뉴올리언즈에서 본 미시시피강 하구의 증기선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쓴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회고록 Life on the Mississippi (1883년 출판)을 대학 시절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마크 트웨인이 어린시절 증기선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리던 기억을 담은 이야기들인데요.  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에서도 뗏목을 타고 흑인노예 짐과 함께 강을 따라 이동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저에게 미시시피강은 '마크 트웨인'의 책속에 흐르는 강이지요. 그래서 빙엄의 미시시피강 연안의 풍경을 볼때도, 허클베리핀의 모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이들, 악당들, 우매한 군중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림속의 미시시피 보트맨은 아마도 그가 배로 운반한 물건들을 강변에 부려놓고 짐을 지키고 앉아있는 것 같죠. 그의 등뒤로 강가에 대어놓은 그의 납작한 배가 보입니다.  풀기라고는 없는 그의 옷처럼, 이제 젊음이 지나가버린 이 늙수그레한 사나이는 곰방대를 빨면서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데요. 이 사람이 앉아서 쳐다보는 방향은 강의 상류일까요, 하류 일까요? 

 

저는 이 그림속의 시각이 오후 네시쯤의 황혼이 다가오는 시각이라고 봅니다. 분위기상.  그런데 햇살이 이 사람의 오른쪽에서 비치지요. 해가 서쪽에 있고, 오른쪽이라면, 이 사람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미시시피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니까, 이 사람은 상류에서 내려와서 짐을 내리고 남쪽을 향해 한가롭게 앉아있다고 봐야겠지요.   내일쯤, 이 사람은 그의 자그마한 배에 새로운 짐을 싣고 북쪽으로 올가가겠지요. 이 사람의 그림에서 저는 왜 황혼을 읽는 것일까요?  빛의 분위기가 어쩐지 황혼을 닮았지요. 이울어져가는 태양의 기운 잃은 노란색, 그 노란 색조가 화면 전체를 압도하지요.  곰방대를 물고 있는 사나이의 표정도 기우는 해처럼 무심하죠. '노스탈지아 nostalgia'의 색은 무슨 색일까요?  빙엄의 그림을 보면 노스탈지아의 색은 '노란색'인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1850년에 그려졌는데요, 1850년 당시만해도 미시시피 강에 뗏목이나 자그마한 배들이 여전히 운행을 하긴 했지만, 강의 운송수단의 대세는 증기선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노를 저어 운송하는 수단은 이제 사양의 길로 접어들었거나, 혹은 찾아보기가 드물어졌다고 하지요.  빙엄은 말하자면, 사라져가는 혹은 사라진, 풍경을 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라지고 이울어져가는 풍경을 담았던 빙엄은 미국 미술사에 '오래' 남게 된 것이지요.

 

빙엄은 풍속화, 초상화, 그리고 몇점의 역사화들을 남겼는데, 기록에 따르면 빙엄의 작품은 '모두'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해외의 소장자가 없다고 해요.  해외에 안 알려진 화가라는 얘기죠.  워싱턴에서도 그의 작품의 수가 극히 미미하거니와 전시장에서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그의 활동 기반이 미조리주였기 때문에 미조리주에 그의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그의 걸작이 있다는데요, 가서 보고 와야지요.

 

 

 

 

아래의 그림은 버지니아 남단 해변도시에 있는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발견한 빙엄의 역사화입니다.  델러웨어강을 건너는 조지워싱턴을 그린것입니다. 뒤셀도르프에서 함께 수학하기도 했던 미국화가 Emmanuel Leutze 가 1851년에 그렸던 동명의 작품과 매우 흡사한 구도인데요,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1856-1871

oil on canvas, 146 x 93 cm

George Caleb Bingham 1811-1879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Emmanuel Leutze, Washington Corssing the Delaware 1851

 

 

이 그림의 제작년대가 1856-1871까지 표시가 되어있지요. 작품을 완성하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고요. 그 사연인즉, 빙엄이 이 그림의 초안을 잡아놓고 미조리주에서 이 그림을 사주기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문을 받아서 돈을 받고 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대요.  그래서 완성을 하지 않고 주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세월을 보낸 모양입니다. 결국 그는 주문도 받지 못하고 그림을 완성했다고 하는데요, 그가 죽을때까지 이 그림이 팔리지 않았대요. 나중에 빙엄의 유가족이 이 그림을 경매에 내놨을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그림입니다.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가 걸린 전시장 풍경,

(오른쪽 하단에 걸려있는 작품), 크라이슬러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바로위에 에드워드 힉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193 의 조지 워싱턴 그림이 보입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빙엄의 작품은  미국 바깥에는 한점도 없다고 합니다. 오직 '미국'에서만 만날수 있는 작가이지요.  미시시피 강변의 노란 노스탈지아의 풍속화가.  미국 미술관을 순례하시다가 노란 색조의 강풍경이나 배를 탄 사람들이 노를 젓거나 배위에서 춤을 추거나 하는 풍경이 보이시면 누가 그렸는지 화가 이름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그가 빙엄일지 모르니까요.

 

2010년 2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The Girl I Left behind Me, 1870-75, oil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2008년 5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처음 가본것은 2008년 5월의 일입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은 내셔널 몰 지역에서 조금 외떨어진 곳에 있지요.  메트로 스미소니안 역에서 내리면 양쪽에 줄줄이 서있는 스미소니안 박물관들과 국립 박물관, 그밖의 전시장들을 보는 것으로도 세월이 마냥 흘러가기 때문에, 신경써서 가지 않으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은 잊혀지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다른 미술관들에 비해서 한가한 편입니다. 출입구에서 안전검색도 하지 않고요.  저도 워싱턴으로 이사한지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갈때 그곳에 처음 가본 셈이지요.  그날 처음 '미국미술관'에 가서 반했던 작품중에 하나가 바로 이스트만 존슨의 이 그림입니다. The Girl I Left Behind Me 내가 뒤에 남겨두고 온 여인 (소녀 혹은 처녀).  내가 뒤에 남겨두고 온 여인이라... 그림도 심상치가 않거니와, 거기다 제목까지.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심상에 따라서 그림도 다르게 해석될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지 않나요?  아니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두고서 먼길을 떠나지 않나요?  나는, 떠나는 쪽이라기보다는 기다리는 쪽인것 같습니다.  내가 떠나기 보다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떠난것도 같고요 (혹은 이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그런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늘 제자리에 있는데,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났다는 이런 상실감을 갖고 사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볼때는, 관객 자신이 언덕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한없이 서서 기다리는 저 여인의 입장이 될 겁니다.  누군가를 버리고 떠난 사람은 돌아서서 이 여자를 쳐다보는 입장이 되겠지요. 나는 이 그림을 볼때, 내가 언덕위에 서서 바람을 맞고 서있는 입장이었던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 그림이 참 인상적이었던지라, 그림 앞에서 사진도 찍고, 미술관 책방에서 이 그림을 표지로 한 미국미술사책도 한권 사고 그랬지요. 2008년 5월 어느날.  그날의 내 그림자는 아직도 저 그림앞을 서성일지도 모르지요.

 

이 그림은 미국 남북전쟁 (Civil War: 1861-1865)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남자들은 전쟁터로 떠나고, 여인들은 남아서 사랑하는 남편이, 애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지요.  남자들이 전쟁터로 가건, 영장을 받고 입대를 하건, 사랑하는 남자를 보내야 하는 여성들 (애인, 아내, 어머니등) 역시 떠나는 사람 만큼이나 애절해집니다. 바람은 심상치 않게 불고, 백척간두같은 언덕위에 서 있는 여인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들고 있는것은 성경책이겠지요 아마도. 신념과 사랑에 의지하여 저 여인은 힘겨운 세월을 저렇게 고집스럽게 버틸것입니다.

 

이스트만 존슨은 실제로 1862년에 버지니아의 마나싸쓰 (Manassas)에서 전쟁을 치렀고, 당시의 전쟁의 경험과, 전쟁 당시 젊은이들이 부르던 아일랜드 민요에서 이 그림의 제목을 따왔다고 합니다:

My mind her full image retains

Whether asleep or awaken'd

I hope to see my jewel again

For her my heart is breaking

내 마음은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찼네

잠을 잘때나 깨어있을때나

보석과도 같은 내 사랑을 다시 볼수 있기를

그녀 생각에 가슴이 무너진다네

 

혹시나 싶어서 유튜브 뒤져보니 노래가 있군요...

 

 

 

 

이스트만 존슨 (1824-1906)은 우리가 이전 페이지들에서 살펴보았던 19세기의 대형 풍경화가들 Thomas Moran, Frederick Edwin Church, Albert Bierstadt 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활동했던 화가 입니다.  그런데 그는 장르가 달랐죠.  이스트만 존슨을 얘기할때는 그를 '장르 화가'로 칭하는 일이 많습니다. 장르 미술 (Genre Painting)은 한국어로 옮길때는 '풍속화'라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서민, 민중의 삶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 것을 말하지요.  인류의 역사에 '회화'가 등장한 이래로, 회화는 주로 귀족층들이 누리던 예술 분야였습니다. 특히 서양미술을 살펴보면 르네상스 이전이나 그 이후에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왕가의 인물들, 귀족들, 부유한 사람들 혹은 역사, 풍경등이었지요.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옮긴 화가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화가들은 대개 부유한 사람들의 '주문'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는데, 가난뱅이 서민이 화가에게 돈을 주고 그림을 주문을 할 일이 없었다고 봐야죠.  르네상스 이후에 서양 예술에서 서서히 민중의 삶에 눈을 돌린 화가들이 나타나는데  부르겔이나 베르미어등이 바로 그런 화가들이었습니다.  밀레의 저녁종이나 혹은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같은 빈농의 삶의 풍경, 그러한 것들이 바로 이런 '풍속화'의 범주에 들어가지요.

 

미국에도 이렇게 '풍속화'를 즐겨 그린 화가들이 존재하는데, 이스트만 존슨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풍속화의 얄궂은 운명이 뭔고하면,  풍속화의 소재는 '가난한 서민들'이쟎아요. 그런데 이런 그림을 향유한 층은 여전히 부유층이었다는 것이죠.  사람이 고기만 먹다보면 김치도 먹고 싶어지쟎아요.  말하자면, 고급 가구로 잘 차린 집의 거실이나 서재에 이런 풍속화를 한점 걸고, '소박하고,' '목가적인,' 삶을 찬미하는 취미를 가진 미술 애호가들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뭐 일부러 해진 옷 같은거 - 빈티지 스타일이라고, 돈 많이 주고 다 떨어진 옷 사입고 폼 잡는 것도 비슷한 행동이긴 하죠. 그것도 멋이고 자랑이다 이거죠.)  아무튼, 이런 풍속화는 돈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수집 취미의 대상이었다고도 합니다.

 

 

이스트만 존슨은 메인주의 유복한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6세가 되던 1840년에 보스톤의에서 리토그래프 판화를 배우고, 1849년에는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가서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습니다. 그후에 헤이그, 파리등지를 돌며 역시 유럽 미술을 배우게 됩니다.  1853년에는 그의 아버지가 워싱턴 디씨의 정부 고위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워싱턴으로 이주하여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게 됩니다. 1855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859년 뉴욕시에 작업실을 열고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는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당시의 서민들의 삶을 그리는가하면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1872년 2월 20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관할때 공동 설립자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헬렌 켈러가  '만약 내가 단 하루 시력을 갖게 된다면  보고 싶은 것'들중에 포함되기도 하는 미국 최대의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스트만 존슨이 이 미술관의 설립에 앞장을 섰던 인물이군요.

 

자 이제 그의 따뜻하고 정겨운 풍속화 작품들을 살펴볼까요.

 

이 수련따는 그림은,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과 비슷한 모티브로 보이죠?

Gathering Lilies (수련따기) 1865, oil on board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13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The Early Scholar, c1865, oil on academy board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2월 13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꼬마 학생에 대해서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210  이전에 관련 페이지를 적은 적이 있습니다.

 

 

 

Fiddling His Way, 1866, oil on canvas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은 1866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노예해방 이후에 자유민이 된 흑인이 악기 연주를 하며 떠도는 풍경을 그린것으로 보입니다.  백인의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는데요,  여인이 안고 있는 아기까지 포함하여 아이가 여섯이나 되는군요.  흑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턱을 받치고 있는 아이도 보입니다.  빗자루 막대기에 기댄채 잠시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여인의 모습도 편안해 보이지요.  비록 그림이지만, 그림 한구석에서 미국의 깽깽이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발견하여 사진을 찍은 것인데, 조명이 하도 어두워서 사진 상태가 흐릿합니다. 이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여러장 찍었는데 쓸만한 사진이 한장도 없더라구요. 아쉽습니다. 참 사랑스러운 그림인데요. 시골 농가의 헛간에 아이들이 한가롭게 앉아 있어요. 설령 이 가로대에서 떨어진다해도 아래에는 건초더미가 쌓여 있으므로 다칠 일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가로대에 나란히 앉아 종알거리고 노래를 부르거나, 그러다가 말다툼이 벌어져서 하나가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아기를 무릎에 안고 있는 언니도 보이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제비새끼들처럼 지지배배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화가도 이 그림의 제목을  '헛간의 제비들'이라고 붙였을겁니다.

 

 

Barn Swallows, 1878, oil on canvas

헛간의 제비들

Eastman Johnson 1824-1906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간단히 Eastman Johnson (1824-1906)의 풍속화들을 몇 점 살펴보았는데요,  이스트만 존슨에 대해서 요점정리를 해보자면

 

 1. 그는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서민들의 일상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2.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공동 설립자이다

 3. 그는 19세기 대형 풍경화가들이 활동하던 비슷한 시기에 풍속화를 그렸던 사람이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깐 퀴즈. 그런데...풍속화 (genre painting)가 뭐죠?  :)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뽀안 안개의 나이아가라가 내게 말을 걸다

 

 

 

Thomas Cole 과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1801-1848)를 엮다보니

 * Thomas Moran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1830-1902)

 * Frederick Edwin Church: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1826-1900)

 * Alber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1830-1902)

 

등과 같이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로 알려진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의 대가들을 살펴 보게 되었는데요.  이들과 더불어 George Inness (1825-1894)를 잠시 소개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제가 차례차례 화가들의 생몰년대를 명시 해 놨는데요 토마스 콜이 대략 한세대 이전의 대가이고  토마스 모란이나, 프레데릭 처치, 비어시타드는 나이도 몇살 차이 안나는 동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이 페이지의 주인공 조지 이니스도 이들과 동시대를 산 화가이고요.

 

19세기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대략 정리를 할 생각이라서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허드슨강변 화가들의 '대부'격인 토마스 콜이 미국 동부의 허드슨 강변에서 실제 풍경화를 그리거나 유럽 여행을 통해서 풍경화를 익히며 상상의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던 미국 풍경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1. 토마스 모란은 미 서부의 풍경을 동부의 사람들에게 전한, 옐로우 스톤의 화가라고 할수 있고요,

2.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및 남미, 유럽등을 돌면서 세계 여러나라의 자연 환경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긴이로, 훔볼트나 다윈의 과학적 자연 이해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던 미국의 화가였습니다.

3. 알버트 비어시타드는 미 서부를 돌며 미국의 대자연을 스케치하고 관찰했지만, 그가 그린 미국의 풍경은 유럽 알프스산의 풍경까지 뒤섞인, 이상화된 풍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던 화가였습니다.

 

그러면 비슷한 시기의 조지 이니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미술사가나 평자에 따라서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강 화파에 포함시키는이가 있는가하면, 그가 허드슨 화파와는 다른 풍경화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하는 이도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화가'라는 측면에서 그를 허드슨 풍경화파에 대충 때려 넣는 경우도 있고,  그를 좀더 세밀히 연구하는 사람이 볼때는 이런 '때려넣기'는 어불성성일수 있지요.  무슨 말씀인가하면, 어떤 역사를 단순하게 처리할때 - 이런 상반된 시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 자신 조지 이니스를 '허드슨 파'에 포함시킬것인가 말것인가 조금 고민을 했는데요,  저로서는 그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발견했고, 그의 그림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좋아하므로, 그를 별도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조지 이니스를 '발견'하게 된 그림은, 저 위에 올려 놓은 '나이아가라'라는 그림에서였습니다.  국립 미술관급의 미술관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보이는 것이 명작이요, 역사적인 기념비들인데,  명작 아닌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요.  풍경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 제 눈에 띄었던 것이 그의 1889년작 '나이아가라'였습니다.  나이아가라는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바와 같이 프레데릭 처치가 대형으로 그려서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아래에 프레데릭 처치의 나이아가라 그림을 옮겨다 놨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Frederick Church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물론 크기에서도 처치의 작품이 압도적이긴 한데요,  처치의 그림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줬다면,   그보다 32년후에 그려진 조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는 물안개가 걷히지 않는 나이아가라의 또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조지 이니스의 안개속의 나이아가라를 좋아했지요. 그런데요, 이 나아이가라를 발견했을때, 저는 조지 이니스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면서 떠올린 화가는 Thomas Wilmer Dewing 이었습니다. 저는 아슴푸레한 초록 안개속의 풍경과 여인들을 그린 미국 화가 Dewing 을 알고 있었거든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236 )    어떤가요. 저 초록 안개에 싸인 나이아가라 그림과, 아래의 듀잉의 그림의 분위기가 흡사하지 않은가요?

 

 

Before Sunrise (해뜨기 전) 1894-9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그래서 저는 '나이아가라'를 '듀잉'이 그렸을거라고 상상했는데, 다가가보니 '조지 이니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단 것이지요.   '두 사람 그림이 참 분위기가 비슷하다 ...'  혼자서 이런 생각을 가끔 했었는데요.  어느날 공부하다가 이 두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미국 회화사에 Tonalism (색조주의)이라는 미술 화법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잠시 떠오른 적이 있는데요,  회화의 구체적인 이미지보다는 회화가 전하는 '색조'와 '빛' '분위기'를 중시 여기는 화법입니다.  바로 그 Tonalism 의 주요 화가로 알려진 이들이

 1. George Inness (1825-1894)

 2.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3.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제가 이니스의 그림을 보면서 '듀잉'의 그림일거라고 짐작했던 이유는, 바로 이들의 '색조주의적' 개성 때문이었을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은 책상 앞에 앉아 슬슬 적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궁금해하거나 혹은 책을 찾아보고 뭔가 발견하고 그러면서 흘러간 세월은 두해쯤 되는거죠.  그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러간 것이지요....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지면서, 지금도 여전히 뭔가 새로 알아가고 있는 중이고요.)

 

 

 

여기까지는 제가 이니스를 처음 발견하던 일에 대해서 정리했고요,  이제부터는 제가 갖고 있는 그림 파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고 조지 이니스의 발자취와 미술의 흐름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국립 미술관 (NGA): 이니스의 초기 풍경화들

 

 

조지 이니스 (1825-1894)는 뉴욕주의 한 농부의 열세명의 아이들중에서 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납니다. 다섯살때 가족이 뉴저지의 뉴왁으로 이주하고요. 십대때 그는 뉴욕시에서 지도 판화 작업을 배우게 됩니다. 1940년대에는 National Academy of Design 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그당시 Thomas Cole, Asher Durand 등 당대의 쟁쟁한 화가의 지도를 받게 되지요.  1851년에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로마로 가서 미술 수업을 받게 되는데 로마에서 1년넘게 머무는 동안 Swedenborginism 이라는 스웨덴의 신흥 종교운동과 접하게 되어 정신적인 영향을 입게 됩니다. 로마에서 파리로 건너간 그는 이곳에서 '바르비종 (Barbizon)'화가들의 작업을 보게 됩니다.  '바르비종' 화가들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바르비종, 폰텐블루 숲에서 전원을 찬미하는 그림을 그렸었지요.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화가로는 장 프랑소와 밀레가 있지요. 밀레의 풍경화를 떠올리시면 바르비종 화파의 대강의 분위기를 짐작하실수 있을겁니다.

 

하여, 전체적으로 조지 이니스의 미술세계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로는

 1. 스승 토마스 콜의 허드슨강 화파의 풍경화

 2. 프랑스 바르비종 화파의 낭만적 풍경화

 3. 신성이 속세에도 반영될것이라고 봤던 스웨덴 신흥 종파의 세계관

등이라고 할 만 합니다.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온 이니스는 델라웨어 철도 부설 사업자로부터 철도 사업을 기록하고 홍보할만한 그림을 위탁받아 작업을 합니다. 아래의 라카와나 골짜기의 그림이 바로 당시 위탁받아 그린 작품중의 하나입니다. 언덕위에서 내려다보는 기찻길, 달리는 기차, 기차역은 우리에게 '그리운' 혹은 '아쉬운'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나요?  그 기차에서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내려주었으면 좋겠지요. 이런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달리, 이 그림은 기록성, 홍보성에 목적을 둔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가 주문자의 의도를 얼마나 반영했을지는 알수 없지만요.

 

 

The Lackawanna Valley 1855,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촬영

 

 

 

 

 

 

View of the Tiber Near Perugia 1874, oil on canvas

페루지아 인근에서 바라본 티버강 풍경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20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이탈리아 페루지아의 티버강 그림이군요. 그가 당시 여행을 가서 그린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며 그린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래, 갤러리 풍경 사진에서 프레데릭 처치의 대형 그림 옆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전시장. 왼편의 대형 그림이 Frederick Church 의 '빛의 강'

그 오른편에 조지 이니스의 풍경화가 보임.

2010년 1월 20일 NGA 에서 촬영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이니스의 완숙기의 풍경화들

 

 

 

September Afternoon 1887,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1층,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뒷쪽 갤러리 중앙에 걸려있음)

 

 

1885년에 조지 이니스는 뉴저지주의 Mont Claire 에 정착하게 됩니다.  완숙기에 들어선 그의 그림에서 선의 경계가 부드러워지거나 흐릿해지지요.  특히,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나이아가라' 그림에서 그의 선과 경게가 해체가 된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물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해체되고 오직 색감과 분위기만 안개 입자처럼 떠돌지요. 

 

그런데, 얼마전에 스미소니안에 갔을때, 안내인이었던 Judith 할머니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시는 겁니다. 그 할머니는 나이아가라 인근에서 태어나고 자랐기때문에 늘 나이아가라를 봤대요.  고향을 떠난 지금도 그의 귓가에는 나이아가라 폭포 소리가 들리겠지요.  사람들은 이니스의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 그림이 인상주의적인 그림이다, 이니스는 인상파였다' 뭐 이런 설명을 하는데 자신은 이 그림을 인상파 그림으로 보지 않는대요.  이 그림은 '인상'이 아니라는거죠.  저는 그 사람의 말귀를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죠:

 

 "You mean that, it's not the impression of Niagara, it's, the reality?"

 (이 그림은 나이아가라 '인상'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인가?)

 Judith: Yes, that's what I mean!

 (그래, 바로 그것이지!)

 

주디스 할머니의 예술관은 여기까지 이지요.  인상파 화가들은 '인상'을 스케치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인상파화가들은 현장에서 내 눈으로 직시하는 '바로 그 순간, 그 것'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이 그들에겐 Reality 였던 것인데...  주디스 할머니는 인상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던것도 같은데...하지만 그가 내게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이 나이아가라 그림은 '상상속의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사진'같이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나이아가라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디스 할머니에게 이 아슴푸레한 풍경은 더욱 생생한 사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Reality 란 무엇인가?  이 논의는 훗날로 미루기로 하지요, 저로서는 너무 어려운 주제이니까요.)

 

 

 

Niagara 1889,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여

(2층,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 근처 통로에 있음)

 

 

 

코코란, 델라웨어: 말년의 황혼

 

 

 

Early Autumn, Montclaire 1891, oil on canvas

George Inness 1825-1894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니스의 작품 사진들을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고 보니, 그의 그림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요. 그의 말기의 작품들은 경계의 해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빛과 어둠을 들여다보는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이전에 이니스가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했다면, 말기에 그는 빛의 세계로 나아가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코코란 미술관에 소장하는 '숲속의 황혼' 작품은 황혼이 내리는 숲속에 한줄이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나무 기둥에 신비할 정도로 환한 빛으로 어룽대지요.  가끔 이런 광경을 볼때가 있어요.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빛과 어둠의 대비. 이런 풍경을 대면할때, 우리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일지라도 어떤 신성, 초자연적인 숨결을 상상하게 됩니다. 

 

 

 

Sunset in the Woods, George Inness, 1891

출입문 왼편에 면한 벽에 Frederick Church 의 Niagara Falls, 그리고 Albert Bierstadt 의 '들소의 최후'가

나란히 걸려있다.

 

 

 

Sunset in the Woods 1891, oil on canvas

70 x 48 inches

George Inness 1825-1894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자, 조지 이니스의 미술 세계를 다시 한번 정리해볼까요?

 1. 토마스 콜에게서 사사 받았고, 혹자는 그를 허드슨 강 화파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2. 프랑스 바르비종 미술 운동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3. 스웨덴에서 일어난 새로운 종교운동의 영향으로 신성이 세속에 투영된다는 시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그는 미국의 Tonalist 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국 미술사에서 크게는 그를 허드슨 화파, 혹은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찌보면 그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010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역사를 만들어낸 한장의 그림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가면, 엄청시리 커다란 풍경화 그림이 여기~ 여기~ 걸려있는데요. 저로서는 뭐 엄청나게 큰, 그것도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풍경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므로, 막무가내로 통과~ 해버리는거죠. 이 엄청난 풍경화 앞을 지나면서 대략 '이름표'라도 볼라치면 Moran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띕니다. 

 

"모란?  이름이 모란이야?  성남의 모란 시장이 생각이 나는군. 거기 가면 강아지 팔고 그랬는데. 이름이 모란이면 모란꽃 뭐 그런거 그려야 하는거 아니야? 아 왜 바윗덩어리 산만 그려 놓은거냐구..."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나치는거죠. ㅎㅎㅎ.  그래가지고, 사실, 스미소니안을 라면집 드나들듯 드나든 저에게도 모란의 작품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관심 없으니까 대충 지나간거죠.  아, 다음에 가면 제대로 작품 좀 들여다봐야지...

 

Thomas Moran (1837-1926)은 영국태생으로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와서 펜실베니아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Hudson River School 의 원조 Thomas Cole 의 페이지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Thomas Moran 은 그가 미국의 자연 환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다는면에서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고, 혹은 토마스 모란이 특히 로키 산맥, 옐로우스톤의 풍경에 골몰한데서 Rocky Mountain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찍어온 그의 대형 그림 사진속의 풍경이 대개 '노리끼리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림이 '노리끼리'로 일관하는 이유는, 그가 Yellow Stone (노란 바위) 지역의 화가라서 그런것이지요 (알고보니 뭐 단순하군요.헤헤).

 

토마스 모란은  형제들도 그림을 그렸고요, 어릴때부터 목공, 판화 등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1862년에 영국으로 그림을 배우러 갔을때 그곳에서 터너 (Turner, 1775-1851)의 웅장하고 숭고한 풍경화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8년 여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 갔을때, 마침 터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지요.  스케일 큰 풍경화를 실컷 보기는 했는데, 저 자신이 사람 하나 안보이는 풍경화에 별 재미를 못느끼기는 했지요.  지금은, 풍경화를 보는 안목도 좀 생겨서, 코코란에서 현재 진행중인 터너에서 세잔까지의 기획전 http://www.corcoran.org/turnertocezanne/index.php 을  보러 갈 생각입니다.)

 

토마스 모란이 미 서부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871년 Hayden Geological Survey (헤이든 지리 연구) 팀에 초대되어 40일간 미 서부 옐로스톤 일대를 탐사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연구팀에는 사진가 Wiliam Henry Jackson도  있었는데, 토마스 모란과 잭슨이 현장 스케치를 남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흑백 사진만 가능했으므로 현장의 생생한 풍경은 화가가 담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그림은 아니지만, 같은 제목의, 비슷한 각도에서 본 그랜드 캐년 그림이 1872년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가 되는데 그 그림은 미 의사당의 상원에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옐로우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지요. 이를 시발점으로 미 의회는 1916년 정식으로  '국립공원 National Park System'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여름 휴가철에 '미서부 관광'이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을 관광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미국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Yellowstone National Park 이고요,  이곳이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게 되었을때, 그 배후에 토마스 모란의 그림 한장이 있었던 것이지요.  흑백사진 기술조차 미미하던 시절, 오로지 스케치나 수채화와 같은 것으로 시각자료가 전해지던 시절, 한장의 대형 풍경화가 전하는 미지의 세계는 보는이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선사했을 법 합니다.

 

 

토마스 모란은 때로 Thomas Yellowstone Moran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요, 이따금 그는 서명할때 Thomas Y. Moran 이라고 적기도 했답니다. 가운데의 Y 는 yellowstone 의 Y 이지요. 그리고 토마스 모란이 '미 국립공원'의 지정과 개발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여 http://en.wikipedia.org/wiki/Mount_Moran  모란 산 (Mount Moran)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고 합니다.  한장의 그림이 미국 역사에, 미국 국립공원의 산파 역할을 했다니, 그림을 만만히 보면 안될 일이군요.  다음에 스미소니안에 가면 그의 대형 그림 사진들을 모두 찍어와야 할것 같습니다. :)

 

 

화면 왼편 그림: The Cahsm of the Colorado, 1873-1874, oil on canvas mounted on aluminium

367.6 x 214.3 cm (대략 3.6 미터 x 2.1 미터)

Thomas Moran (1837 - 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아, 참고로, 저 전시실 가운데에 둥그런 평상같이 생긴 의자가 있는데요. 곰털 같은 털가죽이 덮여있습니다.  관객이 저기에 편히 앉아서 쉬면서 그림을 감상할수 있도록 설치 해 놓았는데요. 옐로우스톤에 가면 '곰'이 많이 나오지요.  옛날에 옛날에 1998년에, 제가 미국땅 처음 밟아본것이 '미서부 관광' 패키지 여행을 통해서였는데요, 그때 관광 안내원이 '곰'이 나올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당부하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러니까, 저 곰가죽같은 의자나 혹은 그림 옆에 세워 놓은 화분도, 이 전시장의 장치 입니다. 풍경화에 어울리는 소품을 제시하여, 관객이 '풍경'속에 들어와있는듯한 기분이 들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2009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앞서서 Albert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페이지를 열면서 코코란 미술관의 전시장을 보여드렸는데요.  오른쪽의 대형 그림이 비어시타드(1830-1902)의 '버팔로의 최후.' 왼편에 보이는 대형 그림이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의 나이아가라 입니다. 오늘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1826-1900)의 그림을 보기로 하지요. 제가 두 사람의 생몰 년대를 적어놨는데 처치가 4년 먼저 태어났지만, 형제들처럼 한 시대를 함께 활동한 화가들로 봐도 되겠지요.  (이래서, 미술관에서 비어시타드와 처치가 늘 함께 붙어다니거죠.)

 

 

나이아가라 폭포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라는 미국 화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작품이 바로 이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2008년 5월 이른 아침에 코코란 미술관에 혼자 가서 열시의 개관 시간을 기다리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 날 한가롭게 안내인의 안내를 받았는데, 이 그림 앞에 앉아서 제법 상세한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접 가서 본 것은 2005년 8월의 일이었는데요,  가서 보고 깜짝 놀랐었죠.  당시에 주변에 있던 유학생 가족들도 여름에 아이들과 미 동부 여행을 다녀오곤 했는데, 저는 돈도 없고 공부도 바빠서 여행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가 여행 다녀온 사람들을 붙잡고 묻곤 했습니다.  "어디가 제일 좋았나?"  어른들은 뉴욕과 워싱턴이 인상깊었다고 얘기하고, 청소년들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너무너무 근사했다고 대꾸들을 했지요.  나이아가라 폭포야 그냥 폭포인데 그게 근사할게 뭐가 있나?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막상 가보니 기가 막히더라구요.  나이아가라 관광하는 동안 정말 애들처럼 좋아 죽는줄 알았습니다. 신나서. 하하하

 

나이아가라는, 가서 봐야 하는거지, 영화 백날 봐 봤자, 현실감이 없죠. 

 

1700년대에 유럽인이 처음 나이아가라를 발견한 이래로,  유럽대륙에 나이아가라에 대한 환상이 자라났다고 합니다. 당시에 사진이 있었대도 흑백사진을 간신히 만들던 시절이라, 사진가지고 그 현장의 감동을 전하기는 어려웠을테고, 결국 그림이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었겠지요.  그래서 프레데릭 처치 외에도 여러명의 화가들이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그렸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이 처음 소개가 되었을때 유럽대륙에 없는, 오직 '신세계 New Worlld' 미국에만 있는 장관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나이아가라폭포는 제작년대를 보니 프레데릭 처치가 27세때 그린 작품이군요. 이 그림의 성공으로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의 풍경화가로서 탄탄 대로를 나아가게 됩니다.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은 커넥티컷주의 하트포드시에서 부유한 시계제조회사, 보험회사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선대가 부유하다보니 프레데릭 처치 자신은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그가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그는 일찌감치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 (Hudson River School)의 원조인 Thomas Cole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에게 연결되어 그의 제자가 됩니다.  그는 일찌감치 22세가 되던 해에 National Academy of Design 의 멤버가 되고 뉴욕에 정착하여 스케치 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일년의 봄, 여름, 가을에는 여행을 다니고, 겨울에는 뉴욕으로 돌아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것이지요. 그는 1853년과 1857년에 남미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남미의 숲이나 풍경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후에는 유럽과 중동등 세계 여러나라를 돌면서 현지의 풍광을 스케치하고 대형 풍경화 작업을 했지요.  후기에는 그의 스승 토마스 콜과 마찬가지로 허드슨 강변에 대 저택을 짓고 정착하게 되지요.

 

 

아,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특이하죠.  성이 Church 입니다. 예배당이 '처지' 쟎아요. 미루어 짐작컨대, 집안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거죠. 미술 비평가들중에는 처치의 풍경화에서 어떤 '정신적인 spiritual' 면을 해석해내기도 합니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자체가 숭고성을 전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에게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혹은 어떤 신앙이나 사상을 갖고 있거나 간에,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 풍경 앞에서는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풍경 너머의 어떤 의미를 사색하게 되쟎아요.  우리가 매일 보는 황혼이 어느날 유난히 붉을때, 혹은 달이 어느날 유난히 환할때, 별이 유난히 반짝일때도 우리는 그런 자연 현상에서 어떤 상징성을 찾고 싶어하지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프레데릭 처치는 박물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 (1769-1859) 의 저서인 Cosmos 를 탐독하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훔볼트는 남미 지역을 탐사하면서 식물 지리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했고,  다윈(1809-1882)은 비글호를 타고 남미를 탐험했지요.  처치 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눈을 돌리고,  그의 분야, 풍경화를 통해 그가 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재미있어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을 돌면서, 어떤 사람은 박물학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진화론'이라는 경천동지할 가설을 탄생시켜서 우리의 사고체계를 확 뒤집어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화폭으로 옮겼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누가 더 똑똑하고 잘났다는 얘기를 하기보다는,  사람마다 타고난 품성과 재능이 각자 다르므로 각자 자신의 재능과 취미대로 자신을 펼치면서 살면 인생이 재미있고 다채로워질거라는거죠.  우리 모두가 다윈이 될 필요도, 우리 모두가 화가가 될 필요도 없죠. (관객도 필요해요~ ).  그렇지만 우리 모두 각자 위대한 개인임은 분명하죠.

 

뉴포트 산 풍경

 

New Port Mountain, Mount Desert, 1851,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대형 작품은 아닙니다. (제가 게을러서 그림 사이즈를 정리를 안하고 이렇게 때우는군요.) 이 풍경은 뉴포트의 사실적인 풍경으로 보입니다.

 

 

 

오로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의 한 갤러리에 있는 작품인데요, 이 갤러리 앞을 지나갈때면, 어디선가에서 빛이 번쩍 나면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인상입니다.  이것이 오로라 인가봐요.  (저는 아직 오로라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극지방에 가면 하늘에 오로라가 보인다고 하쟎아요).  오른쪽의 오로라 그림도, 왼편의 풍경화도 모두 프레데릭 처치의 작품입니다.  여기 의자가 있다는 얘기는, 이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감상하시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거리와 각도에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왼편 아랫쪽에 배하고, 썰매 팀이 작게 보이는데요, 이들은 탐험가 Issac Hayes 탐험팀입니다. 이들은 1860년에 북극 탐사를 했습니다. 그는 탐험 기록으로 많은 스케치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미국에 돌아와보니 내전 (남북전쟁 1861-1865)으로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지요. 기가 막힌 상황이었죠. 프레데릭 처치는 북극 탐사팀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탐사팀이 가져온 스케치와 이야기를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1865년, 이 오로라 그림을 완성시켰는데요. 스미소니안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서 '암울한 국가적 갈등에 대한 불운한 전조'를 보여줬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요, 관객인 제가 볼때 이 그림은 오히려, 희망의 상징처럼 보이거든요. 오로라는 신화에서 '새벽'의 여신인데, 1865년의 미국사와 '오로라'를 연결지어 본다면,  내전이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동터오는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하는거죠.

 

 

Aurora Borealis, 186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e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분화구

 

Cotopaxi, 185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프레데릭 처치가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봤던 풍경인것 같죠.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산을 그린 것입니다.

 

 

 

 

 

빛의 강: 프레데릭 처치의 마지막 그림

 

 

 

기록에 의하면, 프레데릭 처치는 1877년 손 관절의 문제로 더이상 그림을 그릴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빛의 강'이 1877년에 제작된 것이므로 이 작품이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자료를 찾아보면 1877년 이후에 발표된 작품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왜 1900년까지 생존한 사람의 작품이 1980년대에 끝나는가 의문을 가졌었는데, 신병때문에 이후에 작품 활동이 불가능해졌던 것 같습니다. (아, 전에 소개드렸던 Grandma Moses 의 경우에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93  모세할머니가 수놓기를 즐기다가 눈이 어두워지고 손도 불편하여 수놓는걸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출세을 했다고 하지요.사람 일은 알수가 없는거죠.)

 

 

 

El Rio de Luz (The River of Light), 1877, Oil on Canvas

213.7 x 138.1 cm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작품은 1857년 그가 남미를 여행했던 당시의 스케치와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20년 후인 1877년에 그린  것입니다. 51세가 된 화가가 31세때 여행했던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렸다고 것이지요.  그림을 들여다보면, 남미 열대기후에서 볼 수 있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요 뽀얀 새벽안개 속의 물빛도 왠지 따뜻할것 같습니다.  '빛의 강'이라니 이 물에 잠겨 수영이라도 하면 극락일것 같지요.  이 그림을 보면, 처치의 세밀한 자연관찰력과,  자연과학 너머의 숭고한 정신세계 그 양면적인 것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제가 남미에는 아직 못가봤지만, 미국의 최 남단인 플로리다에서는 한 오년을 살았는데요, 바다에 가면, 바닷물이 따뜻해요. (겨울에도). 강이나 호수는 고요하고 역시 따뜻해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고, 악어, 도마뱀들이 태평하게 돌아다니고.  돌아보면, 참, 내가 낙원에서 일생의 오년을 보냈구나...이런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지금처럼 백년만의 폭설이라는 눈때문에 방에 갖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라치면, 내가 잃어버린 낙원이 미치도록 그리워지지요.

 

처치가 후년에 대지를 사들여 저택을 지은 뉴잉글랜드 지방 허드슨 강변은 사실  겨울이면 엄청 추운곳입니다. 겨울엔 그런데서 살기 싫죠. 그래서 동부의 돈많은 갑부들이 플로리다에 겨울 별장을 마련해 놓고 즐기는거죠.  자,  손에 류머티즘이 와서 손도 불편하고, 날도 춥고, 어디 나가기도 불편한 겨울날, 오십대의 화가가 작업실에 앉아서 이 그림을 그리는 광경을 상상해봅시다. 그의 추억속의 남미, 빛의 강이 얼마나 그리울지, 얼마나 미적지근하고 습기로 끈끈하며 그의 시린 어깨를 녹여줄지.

 

그의 연보를 살피다가, 이 그림이 아마도 공식적으로 공개된 그의 작품으로는 최후의 작품인것을 발견하니 새삼, 그림을 다시 보게 됩니다. 프레데릭 처치는, 아마도 온화한 말년을 보냈을것 같아요. 그의 마지막 그림이 빛과 따뜻함에 감싸인 새벽의 강인것을 보면 - 그가 돌아간 세상도 이와 비슷할지 모르죠.

 

 

2010년 2월 7일 일요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찌기 허드슨강변의 화가 Thomas Cole 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허드슨강변의 풍경화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이제 그들중에서 대표적인 몇사람을 소개할 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60 이전 페이지에서 알버트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를 소개했지요.  비어시타드도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코코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대형 그림인데요,  왼편에 보이는 것은 Frederick Edwin Church 라는 화가의 '나이아가라' 라는 작품이고요,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비어스타드의 '미국들소의 최후'라는 작품입니다.  프레데릭 처치 역시 허드슨 강변의 화가에 속하므로 비어스타드 페이지를 마치고나서  소개를 하겠습니다.  일단, 사진에서 보시듯이, 작품들이 크죠.

 

들소떼의 최후

 

 

(오른쪽 그림)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그림의 제목이 '버팔로 (미국들소)의 최후'입니다. 1888년 작품인데 화가가 58세때 그린 것이므로 그의 화풍이 충분히 완성된 시기의 작품으로 봐야겠지요.  제목이 이미 어떤 비극성을 띄고 있지요.  최후라...

 

역사적으로 보면 1870년대에 미국의 평원지대에 살던 들소떼가 거의 멸종 상태에 달 할 정도로 무차별 사냥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들소의 가죽 때문이었지요.  그러니까, 들소 가죽을 얻기 위해서 들소를 죽인거죠 (마치 코끼리의 상아를 얻기 위해 코끼리를 죽이듯).  이 들소떼의 사냥에 적극적이었던 집단은 평원의 인디언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 역시 살기 위해서, 백인들에게 들소 가죽을 넘기기 위해서 들소들을 몰살했겠지요.  그리고 그 인디언들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결국, 이 그림은 어떤 면에서 미국대륙의 '원주민들'이었던 아메리칸 들소떼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최후를 그린 셈이지요.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부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기개있게 피를 흘리며 싸우던 들소떼도

 

부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창을들고 들소와 대적하던 인디언들도

 

 

The Last of the Buffallo, 1888,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저 들판을 질주하던 들소떼들도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었을겁니다, 비어시타드가 이 그림을 완성하던 1888 무렵에는.  이 그림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 추억 같은 것이지요. 실재 상황을 실재 현장에 가서 스케치해서 그렸다기 보다는 비어시타드가 전에 본 일이 있던 풍경위에 그가 상상한 장면들을 덧입혀 그려낸 '상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어스타드가 그의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해서 탄생시킨 이 그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장의 역동성을, 우리가 약자들에게 자행한 살륙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지요.

 

 

이 그림 보면요, 어릴때 배운 미국 민요 '내집 가련다 들소들 거닐고~' 이 노래가 생각나요.

http://en.wikipedia.org/wiki/Home_on_the_Range 이 페이지에 여러가지 가사가 소개되는데요, 어쨌거나 이렇게 시작하죠

 

Oh, give me a home where the Buffalo roam
Where the Deer and the Antelope play;
Where seldom is heard a discouraging word,
And the sky is not cloudy all day
 

1870년대에 처음 불려진 기록이 있다는데요, 그때는 들소떼가 아직 남아 있었죠. 바로 그 1870년대에 들소 사냥의 열풍이 불어서 1880년대가 되었을때, 들소는 '추억'으로만 남게 된거죠.  사람들은 그가 지구의 어디에 있건 근본적으로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데요.  신생국 미국도 국가의 발전과 산업화와 함께, 이들이 잃어버린것이 많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것들은 그리움으로 남아서 울리게 되지요.  제가 지금 버팔로의 최후 그림을 보면서 떠올리는 것은 들소떼가 사라져버린 미국의 어느 평원이 아니지요. 제 머릿속에는  아파트 개발로 사라진 내 고향마을이지요.  들소떼도 사라지고, 내가 멱감던 실개천도 사라지고... 모두 죽거나 사라지거나, 그런거죠.

 

 

 

 

 

 

 

 

에메랄드 호수

 

 

The Emerald Pool, 1870,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들소떼의 최후나, 그 전 페이지에 소개가 되었던 시에라 네바다의 풍경이 '상상화'에 가깝다고 한다면, 이 풍경은 실재 풍경에 가깝다고 할 만 합니다.  1869년 뉴햄프셔주의 White Mountain 에 스케치 여행을 가서 습작을 그려 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Mount Washington 에서 동쪽으로 수마일 가면 에머랄드 호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 멀리 희게 보이는 산이 Mount Washington 이라고 합니다.  동부에 실재하는 자연 풍광을 그린 이 작품은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나 분위기를 여실히 전해주고 있지요.

 

 

The Emerald Pond, 1870, oil on canvas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1월 29일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루쩨른 호수, 스위스

 

 

 

Lake Lucerne, 1858

 

 

이 그림은 비어시타드가 28세때 그린, 청년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스위스의 루쩨른 호수를 담았습니다.  아마도 스위스 여행중에 보았던 풍경이었을거라 짐작합니다.  대형이지요.  비어시타드는 이미 청년기부터 초대형 풍경화를 그렸던 것 같습니다. 

 

비어시타드는 1830년 독일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3세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이 미국의 매사추세츠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23세가 되던 1853년부터 1857년까지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미술 지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859년 미국으로 돌아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그림 활동을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 루쩨른 호수 풍경은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기 직전의 유럽 풍경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Lake Lucerne, oil on canvas, 1858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1859년 그는 미국 정부의 후원을 받고 서부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화가로서 그가 할 일은 서부의 풍경을 담아 오는 일이었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미국 동부에서 볼때 서부는 아직 미개척의 땅이었고, 여러분야의 탐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풍경을 스케치 할 화가도 탐사팀에 필요했겠지요.  비어스타드는 그 후에도 여러차례 동부에서 서부로 향하는 스케치 여행에 올랐고, 게다가 그는 그의 그림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는 재주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형 미국의 풍경화는 그것이 진경이었건, 사실에 근거한 상상의 산물이었건 유럽 사람들의 신대륙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에 400점이 넘는 풍경화를 팔아 넘겼고, 그의 인기는 그의 사후에도 여전하다고 합니다.

 

비어시타드의 대형 풍경화가 저에게 그리 매력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갖는 역사성을 보면,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저는 학교에서 수업할때 'context' 읽기를 강조 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어떤 발언을 했을때, 그 발언의 'context'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책의 누가 한 말을 인용할  때 역시 그 말이 나온 앞뒤 전후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기자가 '잘못된 보도'를 해서 좀 시끄러웠는데요.  "자기 문제 자기가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 오라"고 어떤 사람이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말 한 어떤 사람이 졸지에 '죽일놈'이 되었다가, 며칠 지나자 그런 잘못된 보도를 한 기자가 '죽일놈'이 되었다가 이리저리 뒤집어지고 시끄러웠습니다. 아니 뭐 지진이 난것만도 재앙인데, 그런 일 가지고 서로 죽이네 살리네 한다는 말입니까.  서로 협동해서 잘 해도 어려운 판인데요.  서로간에 여유와 아량이 필요한데요. 보도를 접하는 우리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죠.  왜 며칠사이에 이사람, 저사람이 죽일놈이 되고 그러냐하면, 정확한 컨텍스트 없이 말이 이리저리 흘러서 그런 것이지요.

 

 

 

19세기 중반에 그려진, 지금으로부터 150여년전에 그려진 비어스타드의 대형 풍경화를 오늘날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사실 별것 아닙니다.  '좀 크군...' 하면 그만 입니다.  풍경이 뭐 스펙터클 하다 한들, 우리들은 이미 대형 스크린의 무지무지한 스펙터클에 익숙한 세대인걸요.  그런데요,  그 그림이 150년 전에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미지의 땅, 우리들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땅, 그 땅의 풍경을 실제크기처럼 어마어마하게 그린 그림.  말하자면, 비어스타드의 그림은 오늘날의 입체영화관에서 상영되는 3D 스펙터클 영화 만큼이나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경험이었을거란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시대의 그림이 아닌, 백년 혹은 이백년 혹은 수백년 이전의 작품들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볼때는,  현대적 안목으로 한번 살핀후에,  당시의 상황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시각도 필요합니다.  현대적 안목으로는 별 것 아니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아디디어였을수도 있고요, 또 당시에는 별것 아닌것처럼 보였을지라도, 현대인의 안목으로 봤을때, 시대를 초월하는 획기적인 무엇이 들어 있을수도 있고요.

 

그래서요. 제가 요새 미술관 돌아다니며 여러 시대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주루룩 살필 기회가 많은데요.  이렇게 한시대의 다양한 장르 혹은 여러시대의 명작들을 한꺼번에 훑다보니, 세상을 볼때도 조금 다른 시각이 자라나는 것을 느낍니다.  전후, 좌우를 살피는 습관이 들었지요.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본다거나,  특히 내가 짜증나는 일이 있을때, 그 사건을 나의 시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살펴본다거나 그런 시간이 많아졌지요.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그림'처럼 보면,  관조하는 여유가 생기는것도 같아요.  컨텍스트를 들여다보고, 컨텍스트 바깥에서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사물의 다양한 면을 보는 것이지요. 누가 실수 했을때,  너무 나무라지 말고,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주의 주고, 반성할 시간 주고 좀 여유있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하게 됩니다. 

 

비어스타드의 풍경화가 내 눈에는 뭐 '좀 크네' 하는 정도이지만, 그렇지만, 그 당시엔 정말 대단했겠다. 그랬겠다 하고 다시 생각해보는것.  미술감상하다가 생긴 안목이지요.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359  존 제임스 오드본의 페이지에서 잠시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2층의 입구 풍경을 보여드렸는데요.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 저 끝에, 커튼이 살짝 드리워진 방에 대형 풍경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기왕에 발길 닿는대로 가는 인생,  이번에는 그 커튼 속의 대형 풍경화 이야기를 마저 해 볼까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의 시대를 전체적으로 다뤄야 할 것같아 뜸을 들이고 있었는데, 뭐 차근차근 진도 나가보죠.)

 

자, 발길을 따라 저와 이동을 해 보는겁니다.  이 통로를 따라 슬슬 걷다 보면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자, 이런 방을 하나 만나는 겁니다. 이 방에는 기이하게도 커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풍경화가 있습니다.  방 가운데에 푹신한 벤치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벤치에 앉아서 그림을 보는겁니다.

 

 

 

2009년 1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러면, 도대체, 이 방 입구에는 왜 커튼을 쳐 놓은 것일까요?

 

사연을 이야기 하기 전에.

 

제가 딴소리의 대가라는 것은 익히 아시지요? 늘 허접한 주변 얘기 하다가 본론을 잊고 마는 고질병이 있는데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 아시지요?  저로서는 이세상에서 가장 슬픈 얘기, 너무 슬퍼서 심지어 테레비 어린이 만화 프로로 아로와와 네로가 행복하게 뛰어노는 장면이 보여도 그거 채널 돌리곤 했습니다. 결과를 다 아니까. 너무너무 슬픈 일이 결국 벌어질거니까. 절대 안본다 이거죠.  그렇지만, 줄거리 다 알거든요.  아무리 슬퍼도 몇번은 읽었으니까...  네로가 성당에 있는 그림을 무척 보고 싶어 하쟎아요.  이야기속에서는 그게 '루벤스'의 그림이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미술관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발견하면 엉뚱하게도 '플란다스의 개'를 떠올립니다.  "너 때문에 네로가 죽었단말야!"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심술을 루벤스의 그림을 향해 그려보는것입니다. 뭐 대단치도 않은 그림을 그리워하다가 네로가 죽고 말다니... 이런 심술도 나고요.  아무튼 네로때문에, 슬픈 이야기때문에, 저는 루벤스를 싫어합니다. (말 안되고 있죠?  루벤스는 억울하겠지만...)

 

그런데 그 플란더스의 개 이야기에 보면, 그 루벤스의 그림을 평소에 볼 수가 없쟎아요.  커튼으로 가려 놓아가지고, 특별한 행사때만, 혹은 돈을 내야만 그 그림을 볼수가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납득이 안가는데요, 그림에 커튼을 쳐 놓고 필요할때만 열어 보았다니요. 그런데 옛날엔 그랬다는군요.  그림에 먼지 탈까봐 그랬는지. 귀한거라 가려놓은것인지 알수 없지만.  아무래도 귀한것은 숨기고 싶은 법이라,  귀한 그림을 함부로 남이 볼수 없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요, 또 이것이 납득이 가기도 해요. 뭐냐하면, 우리가 어디서 전시회 한다고 하면 돈내고 가서 보쟎아요.  요즘 한국에서 앤디 와홀전 한다는데 얼마 내고 보시나요? 못잡아도 만원은 넘게 낼거라고 추측하는데요. 뉴욕의 현대 미술관 입장료가 20달러도 넘으니까, 그림 보려고 이만원도 넘게 내고 들어가서 보는거쟎아요. 돈 없으면 그림 구경 하고 싶어도 못하는거죠.  물론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명품들을 돈 일만원 이만원 내고 볼 수 있는것도 기쁜 일인데요, 하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 그 돈이 간단한 돈이 아니죠.  그러니까, 오늘날에 전시장에 돈 내고 들어가는 시스템이나, 옛날에 그림에 커튼 쳐 놓고 있다가 돈 받고 그림 구경 시켜준 시스템이나 뭐 큰 차이가 안나죠.  그렇게 생각하면 그림에 커튼치고 돈받고 구경시켜준 일도 납득이 간다는거죠.

 

 

 

 

 

 

 

미국이 18세기 중엽에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전쟁도 하고 그랬지만, 그 당시에도 그리고 19세기 중반까지도 미국은 유럽에서 볼때는 낯선 곳이었지요.  그리고 미국이 독립하던 당시에 동부의 13개주만 참여했을뿐 나머지 지역은 아직 미 합중국에 속하지도 않았거든요.  미국은 독립당시에도 광활한 미개척의 땅이었던 것이지요.

 

이 그림은 미국의 풍경화가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시타드)의 작품인데, 그는 미국의 서부를 직접 여행하며 스케치를 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가 이 그림을 그린곳은 이탈리아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완성하여 영국으로 보내 전시를 했지요.  전시장에 적절한 조명을 밝히고, 천막을 쳐서 그림을 가리고, 사람들에게서 입장료를 받은 후에 짜잔 하고 그림을 보여주는거죠. (서커스단에서 천막안에 진귀한것 갖다 놓고 돈받고 구경시켜주는것과 비슷했겠죠).  사진도, 인터넷도 없던시절,  유럽 사람들은 거대한 미국의 풍경화를 보면서 - 저곳은 신의 땅이 아닌가! 에덴동산이 아닌가!  경악하기도 하고, 이민의 꿈을 꾸기도 하고 그랬겠지요.

 

이 그림은 유럽을 돌며 돈을 긁어모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와 보스톤에서 전시가 되었는데, 당시에 이 그림을 뜯어본 비평가중에 이 그림이 실제 미국의 '진경 산수'가 아니라는것을 알아챈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 서부의 풍경이라고 했지만 사실 실제 이런 장소는 없었지요. 비어시타드가 서부를 돌면서 스케치했던 이곳 저곳의 풍경 중에서 근사했던 것을 총 집합시켜서 하나의 풍경화에 '때려 넣은'거죠.   하지만, 이것이 '진경산수'가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섞어서 만들어낸 가상의 풍경이라고 해도 미국의 장대한 자연을 제대로 연출해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독자중에 실제로 스미소니안에 가서 이 그림을 보게 되는 분들은,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저 의자가 괜히 저기 있는것이 아니고요.  저 의자가 놓여진 곳에 앉아서 이 풍경화를 볼때, 그때 화가가 의도한 가장 '완벽한' 각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도에서 흘끔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혹은 의자에 앉아도 되나 안되나 눈치 보지 마시고) 의자에 편히 앉아서 이 풍경속의 숲과, 동물과, 물과, 산 그런것들을 즐기시길. 

 

 

 

 

 

 

Among the Sierra Nevada, California, 1868, oil on canvas

183x305 cm

Albert Bierstadt, 1830-1902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내킨김에 19세기의 대형 풍경화와 풍경화가들을 시리즈로 적어볼까요.  ... 누굴 추리나...(부시럭 부시럭.)

 

 

2010년 2월 6일 RedFox

 

* 참고로 Albert Beirstadt 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인데요, 그 사람 이름을 독일식으로 읽으면 /알베르트 비어쉬타트/에 가깝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를 /비어시타드/라고 발음하는 편입니다. 저는 독일어도 배웠고, 현재는 미국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이경우 갈등이 좀 생겨요. 비어쉬타트라고 읽어야 할지 비어시타드로 표기를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는 비어쉬타트 라고 읽고, 정작 표기할때는 비어시타드라고 합니다. (어렵지요. 어차피 남의 나라말. 남의 나라 이름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편에서 계속...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면 오른편에는 초상화 갤러리가 시작되면서  장군시절의 조지 워싱턴이 서 있고요 (거기서 오른편으로 향하면 초상화 갤러리로 가는 것이고), 그 자리에 서서 왼쪽을 보면 이런 통로가 보입니다.  이 사진은 조지 워싱턴 초상화를 보다가 카메라를 왼편으로 돌려서 찍은 것입니다. 

 

자 머리위로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이라는 표시가 보이지요.  통로 가운데에 미니어쳐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고요, 그 뒤로 중앙에 새 그림이 붙어있습니다.  새 그림 뒤로 통로를 따라 가다 보면 저 뒤에 어두운 색조의 커튼이 드리워진 작은 방이 보이지요? 그 커튼이 있는 방에 풍경화가 한점 있습니다.  알버트 비어슈타드의 초대형 풍경화인데요.  이 통로를 따라서 전시실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곳을 따라 이동하다보면 미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미술사를 눈으로 훑을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 미국 미술사 전체를 보여주는 전시장 입구의 중앙을 장식하는 것이 John James Audubon 의 독수리 그림입니다.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Washington Sea Eagle c. 1836-39

Oil on Canvas

John James Audubon 1785-1851

Born Les Cayes, Haiti, Died New York City (아이티 출생, 뉴욕에서 사망)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미국에서 존 제임스 오드본 (1785-1851) 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Audubon 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미국의 아무 책방에나 가보면 아주 간단한 손바닥만한 책에서부터 두꺼운 하드커버 양장본 책에 이르기까지 '새 관찰'관련 책에 Audubon Society 라는 이름이 박히지 않은 책이 별로 없거든요.  Audubon 이 뭔지 알수 없으나 Audubon Society 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National Audubon Society 라는 이름에 등장하는 Audubon 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오늘 짧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북미 지역에서 '새 그림' 그린 사람 - 하면 그냥 자동으로 오드본을 떠올려도 될 정도로 오드본은 '새'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남미의 아이티 (Haiti)에 발생한 지진으로 아이티나 한국이나 시끌시끌한데요, 존 제임스 오드본은 그 아이티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시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지였지요.  존 제임스 오드본의 아버지는 이 아이티에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프랑스 출신의 선장이었는데요, 그와 아이티 원주민 여인과의 사이에서 존 제임스 오드본이 태어났습니다. 오드본의 생모는 출산 6개월 후에 사망하고, 오드본은 프랑스 낭트의 본가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사생아였죠.) 프랑스의 본가에서 기다리던 프랑스인 어머니와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고, 그는 비교적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어린시절을 보냈던것 같습니다. 그는 주로 들로 산으로 나 돌아다니며 자연 관찰 하는 일을 즐기며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18세 되던 1803년 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의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오드본을 미국으로 보냅니다.  (징집 기피이군요).   그는 필라델피아 인근에 있던 아버지의 농장에서 살다가 이웃 처녀와 결혼을 합니다.  비록 혼혈 사생아로 태어나긴 했으나 부유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사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1819년 그가 파산을 하여 알거지가 되자, 그는 미시시피 강 연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새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합니다. 북미의 모든 새를 다 그리겠다는 포부였지요. 중간에 그가 그린 새 그림을 모두 유실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지만, 그의 노력은 영국의 Ryoal Society in London 에서 인정을 받았고 1827년부터 1838년 사이에 북미의 새 435장을 출판해 냈습니다.   1840년대 초반부터는 북미의 포유류를 모두 그리겠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51년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는 그의 아들인 Victor Gifford Audubon 과 John Woodhouse Audubon 에 의해 완성 됩니다.

 

오드본의 새 그림의 특징은, 한정된 면 안에 새를 거의 실물 크기로 재현해 냈다는 것입니다.  새를 최대한 사실에 부합되도록 정확히, 생생하게 그려내기 위해서 오드번이 기울인 노력은,  한종류의 새를 다치지 않게 여러마리 사냥하여 그 새를 여러가지 각도로 핀으로 고정시켜놓고 스케치를 했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한장의 새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그는 여러마리의 동일한 종류의 새를 희생시켜야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치밀한 관찰을 통해 그려진 그의 새 그림은 아직까지도 북미 지역의 새들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고요, 그의 이러한 철저한 관찰정신을 높이 사서 National Audubon Society (http://www.audubon.org/) 에서도 그의 이름을 기렸고요, 관련단체에서 새 관찰 관련 안내서들도 많이 나옵니다.

 

 

아이티의 지진 사태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하필 이렇게 불행한 일로 인해 요즘 아이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요.  아이티에서 태어난 사람중에 미국의 대표적인 '새 그림 화가'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페이지를 만들어 봤습니다.  프랑스와 아이티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사생아 존 제임스 오드본.  그는 미국이 자랑하는 '새 그림 화가'로 성장하여 아직까지도 그의 독보적 미술세계와 시대를 앞서간 자연 관찰정신이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지요. 

 

혹시 나중에 책방에서 '북미의 새들, 오드본 소사이어티' 뭐 이런 책 표지를 발견하시면, 아이티에서 태어난 한 혼혈 소년을 떠올리시기를.

 

 

 

 

 

 

National Audubon Society Field Guide to North American Birds--E: Eastern Region - Revised Edition

 

 

 

 

National Audubon Society Field Guide to North American Birds--E: Eastern Region - Revised Edition

 

 

 

 

2010년 2월 6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Thomas Jefferson, oil on wood c. 1821

3대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Gilbert Stuart (1755-1828)

2010년 1월 20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길버트 스튜어트의 토마스 제퍼슨 원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2달러 지폐

 

 

 

 

일찌기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조슈아 존슨 Joshua Johnson  (1763-1832)

 

http://americanart.textcube.com/289  미국의 초기 일반인 초상화

페이지에서 미국의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57 페이지에서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이야기를 하면서 Gilbert Stuart (길버트 스튜어트 1755-1828) 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했으므로, 그에 대한 간단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길버트 스튜어트에 대한 이야기 전에 잠깐만 저 위의 조슈아 존슨 (1763-1832)과 길버트 스튜어트 (1755-1828)의 생몰년대에 주목해주시겠습니까?

 

길버트 스튜어트가 8년쯤 먼저 태어나긴 했는데요, 대략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던 두 사람입니다.  조쥬아 존슨은 자유민이 된 흑인 노예 출신이었고, 그러므로 그림 공부란것을 전문적으로 해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길버트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와 영국등지에서 제대로 미술 수업을 받은 사람입니다.  존슨은 스스로 그림을 익히다가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초상화를 그려주는 '민간 초상화가'였고,  스튜어트는 주로 미국의 상류층 (심지어 대통령)의 주문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서 떵떵거리고 살다 간 화가입니다. 

 

워싱턴의 National Gallery of Art (국립 미술관)의 미국미술 관련 갤러리에 가 보면요, 길버트 스튜어트가 제작한 대형 초상화들이며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들이 으리으리하게 진열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으리으리한 초상화 갤러리가 재미가 없어서 쓱! 휙! 보고, 갤러리 풍경조차 사진에 안담고 휙! 나가버리곤 했는데요.  길버트 스튜어트 관련 자료를 찾다보면, 그의 주요 작품들을 많이 볼수 있는 미술관 명단의 상위에 '국립미술관'이 있지요. 여기에 그의 주요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거죠 (물론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도 주요 미술관중의 하나 입니다.).  뭐 한시대에 미국의 대통령급만 (초대부터 6대까지 무려 여섯명의 미국 대통령 초상화를 그가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던 초상화가이니, 재주도 좋았을테고 명성도 높았을터이지요.

 

그런데요, 그보다는 뭐 눈에 잘 안띄지만요, 또다른 갤러리로 이동하면, 그쪽에, 스스로 그림을 익혀서 민간 초상화 업자로 돌아다니던 조슈아 존슨의 초상화 작품들도 번듯번듯하게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쩐지 제 발길은 거기서 맴맴 도는 형상이지요. 나는 왜, 서툰 민화 앞에서 맴맴도는것일까?  왜 잘 그려진 근사한 그림 앞을 쌩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일까?   저는 가끔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데, 저 자신도 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길버트 스튜어트의 그림은 제게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죠슈아 존슨의 초상화에는 뭔가 저를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한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미술사가들이나 미술관의 큐레이터들 역시 조슈아 존슨의 그림을 '걸어 놓을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를 한다는 것이지요.  걸릴만 하니까 걸린거고, 매력이 있으니까 제 발길을 잡아 끄는 것이겠지요.

 

길버트 스튜어트는 (1755-1828)는 로드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방앗간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가서 미술 수업을 받다가 귀국하는데 1775년에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건너가서 12년을 보냅니다.  영국에서 그는 Benjamin West (미국, 풍경화가) 등과 미술 수업을 받는데 이미 영국에서 그는 화가적 소질을 인정 받지요.  그런데 그는 그림재주는 있었으나 돈을 흥청망청 쓰는 버릇 때문에 파산을 맞이하고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1793년에 미국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1796년에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신세가 활짝 피게 된 것이지요.

 

아래 작품이, 꽤나 걸작이라고 하는데요, 화집에 보면 왜 이것이 걸작인지 설명도 구구한데, 사실 저는 이 그림에 특별한 관심도 없거니와, 왜 이것이 걸작인지에 대한 구구한 설명에 대해서도 관심이 안 생깁니다.  그래서, 재미가 안나서 못 쓰겠어요... 뭐 딱히 제 식으로 평가하자면, 이 부인이 머리에 쓴 모자의 레이스 주름이나 리본 혹은 모자의 주름부분이 아름답게 그려진것 같고요, 비단 옷감의 하일라이트 처리가 잘 되어서 비단이 스치는 고운 소리가 나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일단 쳐다보는 저 부인의 시선이 별로 제 맘에 안들어요...  맘에 안드니까, 재미가 없지요. (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 그래도 걸작이라고 하니까 독자들께서 눈요기라도 하시라고 사진을 올립니다.

 

그런데요,  장군시절의 조지 워싱턴을 그렸던 찰스 필은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인이었쟎아요.  길버트 스튜어트는 독립전쟁당시에 영국으로 '피난'을 가서 (말하자면) 적국인 '영국'에서 지내다가, 돈 떨어져서 미국으로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손으로 미국의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리고 떵떵거리고 살다 갔다하니, 뭐랄까, 기분이 명쾌하지가 않습니다. 저, 이 사람 별로 안좋아요.

 

 

 

아무래도, 길버트 스튜어트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조지 워싱턴이나 토마스 제퍼슨이나 죄다 '뽀샤시' 합성처리한 것 같아보여서... 아 당시의 사람들도 실물보다는 더 '환하고 부드럽고 보기 좋은' 초상화를 원했겠지요.  저 역시 누군가 제 초상화를 그린다면 얼굴의 주름도 좀 지워주시고, 뺨도 밝게 채색해주시고 뭐 그런걸 희망할것 같아요.  진실은 참혹하고, 뽀샤시만이 살 길 인거죠 헤헤헤.

 

 

 

아, 나가려다 말고,  미국출신 화가중에 John Singer Sargent  (존 싱어 싸전트)가 있는데요,  이 사람을 미국화가라고 불러야 할지 미국출신 화가라고 불어야 할지 애매합니다.  좀더 딴소리를 하자면, 미국 출신 화가중에 그를 '미국화가'라고 할지 '미국 출신 화가'라고 할지 애매한 사람들이 세사람이 있는데요

 1. John McNeill Whistler (휘슬러)

 2. Mary Cassatt (커셋)

 3. John Singer Sargetn (싸전트)

이렇습니다.

 

휘슬러는 미국태생인데 영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기사작위도 갖고 있습니다. 미국 태생, 영국으로 귀화한 화가를 우리는 미국화가로 불러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커셋은 미국인으로 태어나 성장했는데 유럽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가 유럽에서 죽었습니다.  존 싱어 싸전트는 미국인 부모님 슬하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에서 태어났고 유럽에서 성장했고, 유럽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호적상 미국인이었지만 삶의 근거지가 유럽이었습니다. 그런데 싸전트는 특이해요. 영국에서 기자작위를 주겠다고 영국인으로 등록을 하라고 할때 이를 거절합니다. 자신은 미국인이기때문에 영국의 기사작위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지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호적상 미국인이었던 싸전트는 결국 죽을때까지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킵니다.

 

자 우리는 이 사람들을 미국화가라고 해야 할까요 유럽화가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이 문제는 차차 의논하기로 하고요, 그 존 싱어 싸전트가 남긴 초상화가 아주 많습니다. 제가 보니까 유럽 화가들이요, 주로 부자들의 커미션(청탁)으로 초상화나 뭐 주문한 그림같은거 그려주고 그거 팔아서 연명을 했던것 같습니다.  부자들의 주문을 많이 받는 화가는 부유하게 살면서 조수까지 두고 '사장님' 노릇 하는거고 이런 주문 못받는 화가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 살다가, 나중에 죽은 다음에나 운좋으면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거고.  그런데 싸전트는 부자들의 초상화 주문을 많이 받은 화가였습니다. 그림이 좋으니까요.  그래서 싸전트도 초상화를 많이 그리긴 했는데, 그는 초상화 작업을 '너무 너무 너무' 싫어했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것을 뚜쟁이질(pimp)에 비유를 할 정도로 싫어했대요.  아주 지긋지긋해 했대요.  헤헤헤.

 

제가 뒤늦게 존 싱어 싸전트를 좋아하게 된 경위가 여기에 있지요

(1) 어? 기사작위를 주겠다는데도,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고국 미국을 버리지 않았다고?  사람 심지가 강하네...

(2) 어?  초상화질을 뚜쟁이질에 비유할 정도로 지긋지긋해 했다고?  그럼 그렇지. 초상화라는게 사실...그게..그렇지...(끄덕끄덕)

 

헤헤헤. 싸전트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하기로 하고요.  오죽 길버트 스튜어트 얘기를 쓰기가 싫었으면 엠한 딴소리로 페이지을 채울까요...

 

 

Mrs. Richard Yates, oil on canvas, 1793-1794

2010년 1월 20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2010년 2월 6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1. 11. 23:18

하워드 파일 전시실, 델러웨어 미술관, 2010년 1월 9일 사진 촬영

 

 

 

 

미국의 19세기 삽화가 (illustrator) 하워드 파일 (Howard Pyle 1853-1911)은 미국 델러웨어주의 주도(수도)인 윌밍턴 태생입니다.  델라웨어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288) 과 인근의 Brandywine River Museum (http://americanart.textcube.com/43 ) 에 하워드 파일의 전시관들이 있습니다.  브랜디와인 뮤지엄에서는 전시물 사진을 찍을수가 없어 자료 소개를 할수가 없고, 델라웨어 미술관에서는 영구 소장품에대한 사진 촬영이 허용이 되어 이곳에서 하워드 파일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사진에 담아올수 있었습니다.

 

 하워드 파일은 아직 사진이 보편화되지 않던 당시, 청소년을 위한 각종 이야기책의 일러스트레이션및 정기간행 인쇄매체를 위한 삽화가로 활동하던 화가입니다.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드를 소개할때, 그의 아버지가 미국 삽화계의 거물이었다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44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요, 그 N C Wyeth (1882-1945) 보다 더 큰 거물이 Howard Pyle 이었다고 할만합니다. 하워드 파일이 N C Wyeth 의 스승이었지요.  하워드 파일은 직접 미술학교를 열어 운영을 한 적도 있고요, 후에 N C Wyeth 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후진 양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하워드 파일과 N C 와이어드및 그 후학들을 일컬어 브랜디와인 리버 그룹 (Brandywine River School)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사진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영문자료 읽기 원하시면 두번클릭하여 큰화면으로 읽으시면 편안하실겁니다.

2010년 1월 9일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사진 촬영 (전시장 입구, 안내문)

 

 

 

하워드 파일은 '로빈후드'와 같은 이야기의 삽화뿐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짓고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워드 파일이 작업을 할때나 후진양성을 할때, 그가 역설한 '삽화의 원칙'은 -- "글에 씌어진 내용을 삽화로 재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책에 씌어진것은 이미 독자도 알고 있으므로 그림으로 반복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행간의 장면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말로 '행간을 읽으라'는 표현이 있고, 영어로 "Read between the lines"라고도 하는데요, 글에 명시되지 않은, 그러나 그 속에 간직된 것을 파악하고 포착하여 재현해 내라는 것이지요.  글에 씌어진 내용을 재현하기도 어려운데, 행간의 내용을 상상하여 그리기 위해서, 삽화가는 글을 철저히 이해하고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워드 파일에게 있어서 삽화는 단순히 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뛰어넘어 한단계 높여 놓는 완성작업이었겠지요.  삽화가에게 이정도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있어야 이야기의 삽화가 진정으로 살아서 독자에게 다가갈수 있을 것입니다.

 

 

 

 

 

인어공주

 

 

The Mermaid (인어공주)

 

하워드 파일은 1911년 이탈리아의 피렌체 (플로렌스)로 벽화 공부를 하러 갔다가, 그곳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중 신장병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플로렌스 작업실에 세워져 있었던 미완성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델라웨어 미술관이 파일 전시장 입구에 이 그림과, 이 그림이 세워져있던 그의 작업실 그림이 이젤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스 안델센의 '인어공주'이야기를 대개 알고 있지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이 인어공주 이야기를 '망쳐 놓아버려서, 어쩌면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엉뚱한' 인어공주 이야기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제가 어릴때 읽은 안델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는 가슴이 아파서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어릴때,  양장판, 일러스트레이션이 환상적인 동화책 (필시 일본책 번역한것)속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한 번 읽은후에, 그 이야기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일부러 그 부분을 얼른 지나치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 부분은 책을 절대 안 열어보는거죠. 왜냐하면, 가슴이 아프니까 피해가는거죠.  그렇게 가슴아파서 피해갔던 이야기가 인어공주 이야기하고, 플란더스의 개 마지막 장면.

 

돌아보면, 어릴땐 두가지를 무서워했어요.

 1. 영국 동화책에 나온 아일랜드의 '반시'라는 무서운 요정 -- 무섭게 생겼으니까

 2. 인어공주의 마지막 장면과 플란더스의 개 마지막 장면

저는 이 두가지 '공포'와 '슬픔'을 피해다니면서 책장을 넘겨야 했습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무섭습니다... 저에게는 삶이 아직도 어두운 숲처럼 무섭고, 이세상에 슬픈일이 일어나는것이 슬픕니다.

 

그림속의 장면은 인어공주가 인간세상을 구경하러 왔다가, 배가 난파되어 물에 빠진 왕자를 구해내는 장면인것 같죠. 왕자는 의식이 없고, 공주는 자신이 구해낸 그 인간의 왕자에게 반하고 말지요... 인어공주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절대 한마디 말도 해서는 안되고, 사랑하는 왕자를 찔러 죽일수도 없고, 결국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택할수밖에 없는데. 그 인어공주의 침묵을 생각하면, 어릴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가슴이 무너집니다. 이 세상에 여러가지 형벌이 있는데, 그중에 한가지가 침묵의 형벌일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그림 앞에 하염없이 서서,

내가 어릴때나, 성인이 된 지금이나, 인생은 여전히 무섭고 슬프고 고통스러운거구나, 그리고 아름답기도 한거구나 이런 생각을 두서없이 했겠지요.  이 그림앞에 서면 파도소리가 들리고요, 그리고, 한숨이 나옵니다. 한숨이...  말할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침묵해야 만 하는 것에 대하여.

 

 

 

카리브해의 해적

 

자, 독자 여러분

혹은,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이 그림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The Buccaneer was a Picturesque Fellow (그 해적은 특이한 친구였다) 1905

1905년 12월 월간지 Harpers Monthly Magazine 에 하워드 파일이 실은 '보물 마을의 운명' 삽화

Oil on Canvas

 

 

 

델라웨어 미술관에 '어린이' 관객들이 단체로 올때면 전문 안내인이 어린이들을 이끌고 이 해적 그림 전시실로 안내를 한다고 합니다. "뭐가 보이나요?"하고 물으면 꼬마들이 "조니 뎁!" 이라고 외친대요. 영화 카리브해의 해적에 Jack Sparrow 연기를 한 Johnny Depp 을 아이들이 떠올리는 것이지요.

 

 

영화 '카리브해의 해적'을 제작할때, 제작진은 당시의 해적의 복장이나 장면의 자료와 고증을 위하여 델러웨어 미술관을 찾아와 협조를 구했다고 합니다. 하워드 파일의 해적 그림들의 많은 부분이 영화에 등장하는 해적들의 복장이나 장면에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Delaware Art Museum 도 올라간다고 합니다.

 

 

 

 

 

 

 

 

Which Shall be Captain? (누가 캡틴이 될것인가?) 1911

Oil on Canvas

 

이 그림은 1911년 1월 Harper's Monthly Magazine 에 실린 작품으로 'The Baccuneers (해적)'라는 시의 삽화로 그려진 것입니다. (*참고로, Baccuneer는 해적중에서도 17세기 서인도 쪽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을 일컫습니다.)  그림 아랫쪽에 보시면 삽이 있고, 보물상자로 보이는 상자가 드러나있지요. 그리고 두명의 해적이 서로 맞장을 뜨고 있습니다. 결국 해적들중에서 가장 힘이 센 이 두명중에 이기는 사람이 캡틴이 되고 저 보물상자에서 나오는것중에서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하게 되겠지요.

 

당시 해적들은 마치 군대조직과 같이 '나름대로 법과 질서가 분명'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다투기는 하되 한사람이 죽을때까지 싸우는것은 아니고, 둘중에 하나가 항복하면 그것으로 게임 오버라고 합니다. 일단 캡틴이 정해지면 질서가 잡히는것이고요.  그 당시 해적선을 탔던 사람들은 일단 크게 한건 하면 그것을 서로 약속한대로 분배한 다음에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집사고 땅사서 살았다고 합니다. (물론 다시 해적질을 하러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겠지만요).  해적이 되기 위해서 배에 오를때, 이들은 계약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작업(?)' 도중에 팔을 하나 잃으면 얼마, 다리 한짝 잃으면 얼마, 눈을 하나 잃으면 얼마, 목숨을 잃으면 얼마 이런식으로 '보험' 들어두듯 보상금 계약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입'이 생겼을때 그런 보상 계약이 철저히 지켜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적을 연구한 사람들은, 해적의 시스템이 꽤나 계약적인, 그리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는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해적들이 해적질을 하긴 했지만, 그 조직이나 수익 분배구조는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투명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 이그림은 1911년에 그려진 것이쟎아요. 하워드 파일이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1911년에 사망하쟎아요.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해적 그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e Flying Dutchman (날으는 네덜란드인) 1900

Oil on Canvas

 

제 블로그 이웃친구인 나로 (http://wowchan.textcube.com/) 님이 설명을 덧붙여주셨습니다.
***

검색해보니


[음악에서 'Flying Dutchman'은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Der fliegende Holländer)'를 뜻합니다. 바그너가 작곡한 곡입니다.

폭풍우를 만나 난항 중에 있던 네덜란드인 선장이 구출된 뒤,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맹세를 저버리고 다시 바다로 나가 배를 타고 항해합니다. 신은 이렇게 맹세를 지키지 않은 벌로써, 그는 유령선을 타고 영원히 7대양을 헤매도록 합니다. 그러다가 만 7년째가 되자 단 한 번 상륙이 허용되지요. 그러다가 한 여성에 의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고, 북유럽에 떠돌고 있던 전설에 기초한 것입니다. 즉 한 네덜란드 선장이 신에게 저주를 받아 영원히 희망봉 근처를 맴돈다고 하는 것이지요.

Flying Dutchman은 이 전설 속의 유령선이나 그 유령선의 선장을 일컫는 말입니다.]

라고 돼 있네요! 이종격투기선수중에 플라잉 젠틀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레미본야스키 라는 네델란드 흑인이 있지요... 흠.

 

예 위의 그림은 1900년 12월 8일 Collier's Weekly 에 실린 전설의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위에 나로님이 옮겨주신대로, 동인도해를 항해하던 네덜란드 배의 선장이 희망봉 근처에서 풍랑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때 그 네덜란드인 선장이, 내가 설령 인류 최후의 날 (Judgement Day 죽을때까지)까지 항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곳을 통과하겠노라고 장담을 했답니다.  사탄이 이것을 듣고 그 선장과 선원들에게 저주를 내렸지요.  그래서 이들은 끝없이 영원히 항해를 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직 7년에 한번 뭍에 오를수 있는데, 이때 순정한 여인을 만나 영원한 사랑을 약속받으면 저주가 풀릴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 그림은 해적선이라기보다는 '유령선'이야기라고 할만하죠.  그런데 해적선과 유령선 이야기는 늘 함께 손잡고 다니죠. 유럽의, 항해를 많이 해야했던 해양국가들 문화에 이런 유령선이나 해적선 이야기가 많겠지요.

 

그런데, 저 선장님, 참 근사해보이지요. 아무리 풍랑이 쳐도 절대 무릎꿇지 않겠다는 자세이쟎아요. 허만 멜빌의 해양소설 'Moby Dick (백경)'에서 선장 Ahab (에이합)이 바로 그런 인물이지요. 절대 굴하지 않는.  그 캡틴 에이합의 이미지가 헤밍웨이의 The Old Man and the Sea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데요.  악마의 저주를 받을망정 절대 굴복하지 않는 그 자세에 우리는 매료되지요. (음,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굴종하고, 타협하고... 아마 그런 인간의 유약함때문에 이런 전설적인 인물에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Marooned (유배된 해적) 1909

OIl on Canvas

 

 

제목 그래도 유배된 해적입니다.  위에 적은바와같이 해적 사회가 조직과 질서가 잡혀 있었고, 나름대로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유지가 되었는데, 해적들 내부의 규칙을 어길경우, 이렇게 외딴곳에 버리거나 유배시키는 식으로 처벌을 했다고 합니다. 이 해적은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외딴섬에 버려졌는데요, 그림을 확대시켜서 자세히 보시면 물통 하나가 보입니다. 물 한통. 옷가지. 그리고 사방에서 넘실대는 파도와 물새들.  최소한 저 물새라도 잡아먹으면 며칠 연명할수 있겠네요.

 

이러고 있다가 해적선이 다시 돌아와 배에 실어주기도 하고, 혹은 운 좋으면 다른 지나가는 배를 얻어타고 뭍으로 갈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식의 처벌은 '잘못했으나 죽여버리겠다'는 식의 무법천지식 해법이 아니라 고립시켜서 고립감을 맛보게 하거나, 버리되 연명할 최소한의 물은 주고 가는 식으로 인정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해적의 세계가 도적놈들이 사회였을망정 무법천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아, 버려진 해적처럼 쓸쓸하구나~"  외로울땐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그림속의 파도소리를 떠올려도 좋겠네요.

 

 

 

 

 

 

세일럼의 늑대

 

 

A Wolf Had Not Been Seen in Salem for Thirty Years (세일럼에서는 30년간 늑대가 나타난적이 없었다) 1909

1909년 12월 하워드 파일 자신이 Harpers Monthly Magazine 에 실은 이야기,

The Salem Wolf (세일럼의 늑대)와 그 삽화

Oil on Canvas

 

 

이 늑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세일럼은 뉴잉글랜드 지방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보스톤 인근의 항구도시 입니다.  이곳에서 실제로 마녀사냥의 아픈 역사가 있었고, Arthur Miller 의 The Crucible 이라는 희곡도 그 마녀사냥의 일화를 그린 것인데요.  저는 2009년 8월에 그 세일럼이라는 도시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한여름이었는데도, 세일럼에 도착하자 도시 전체에 안개가 낮게 깔리고 으스스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지요 -- 아 하, 이런 자연환경이기때문에 세일럼에 마녀이야기가 많고, 사람들이 어떤 안개 자욱한 상상을 했겠구나.

 

 

이것은 그때 세일럼 시내에서 찍은 공동묘지 사진입니다. 마녀 박물관이라던가 해적 박물관도 있고요, 시내 전체가 마녀의 도시처럼 보이지요.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해서 관광도시로 먹고 사는것 같았습니다. 물론 항구도시이기도 하지만요.

 

 

자 이런 안개낀 으스스한 항구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 집사의 딸이었던 미리암은 마을 청년과 혼인을 하기로 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마녀 할멈의 마법에 걸려서 그만 늑대로 변하고 맙니다.

늑대로 변한 미리암은 자신의 가족들을 공격하게 됩니다.

미리암의 약혼자였던 청년이 그 늑대에게 상처를 입혀 몰아냅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인간으로 되돌아온 미리암에게 상처가 있는것이 발견됩니다.

청년은 자신이 늑대에게 입힌 상처와 미리암의 몸의 상처가 똑같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결국 미리암은 그 상처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하고, 미리암의 가족들은 저주에서 풀려납니다.

 

 

슬픈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 어디서 들어본것 같지 않은가요? 

 

제가 어릴때요, 아주 아주 어릴때요, 영화관에서 '나자리노'라는 영화를 했거든요. 그 나자리노라는 영화의 주제곡이 참 슬프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꽤 인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가수가 그 곡을 번안해서 불렀습니다. 제가 그 노래 가사를 기억해요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그대 음성 들릴듯한데

왠일인지 보이지 않은 그대모습 사랑합니다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

 

그 나자리노 영화를 제가 안봐서 모르지만, 대략 이야기는, 뭐 마을의 어떤 아이가 태어났는데, 늑대가 될 운명이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청년으로 성장한 후에 늑대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뭐 변신을 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니 비극적이었겠지요.  이 늑대 이야기를 만나니 그 나자리노라는 영화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여우'가 변신을 하는데 북미나 남미에서는 '늑대'가 인간으로 변신을 하거나 인간이 늑대로 변신을 하거나 그런것 같지요?  약혼한 청년한테 맞아 죽을 운명의 아가씨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죽게 만든 청년이나, 참 딱하군요.

 

 

달의 요정

 

 

달의 요정 삽화 1895

Oil on Board

 

 

 

 

그의 삽화가 담긴 책

 

 

 

하워드 파일의 주요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몇 가지 들여다 보는 것으로 미국의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에 남은  큰 별의 자취를 살펴봤습니다.  미국에서 일러스트레이션 대가들의 작품을 볼 기회가 많은데요, 그때마다 어릴적 생각이 나곤 합니다.  제가 성장할 당시에는 '전국민'이 모두 가난했으므로, 제가 가난하게 성장했다고해도 그게 특별히 고생스럽지는 않았는데요, 어린시절 딱 한자기 아쉬운것은 읽을 책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어쩌다 손에 들어오는 칼라 명작 동화집의 삽화들은 얼마나 근사하던지!  아, 온종일 그런 책들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었지요.  글씨와 그림과 이야기가 어우러진 그 환상의 세계에 아주 빠져서 현실로 돌아오기가 싫었지요.  그러나 읽을 책은 한정되어 있었고, 집에 있는 책이나 달달 외우는 수밖에...  아, 그 어린시절, 내가 이런 삽화의 원화들을 볼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 그 어린시절 내게 이런 삽화가 가득한 세계명작동화책이 많았다면 나는 얼마나 좋았을까, 뭐 그런 아쉬움이 든다는 것이지요.  책을 많이 안사주신 부모님에 대한 원망보다는, 어릴때 책이 보고 싶은데, 차마 부모님한테 책 사달라는 소리도 할수 없었던,  아무도 감히 부모님께 무엇을 사달라고 졸라본적이 없었던 그 어린시절의 풍경이,  정성들여 그려진 삽화위에 겹쳐지더란 것이지요.  가능하면, 시간을 조작할수 있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이런 대가가 정성껏 그린 삽화들을 -- 어린시절의 나에게 가져다 주고 싶어요.  그러면 어린 나는 얼마나 행복해할것인지...

 

아, 어린 내가 아닌, 오늘날의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와 책을 선사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동화의 삽화가들이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요. 아이들에게, 어른들에게, 우리들에게 꿈을 주쟎아요. 고맙습니다 삽화가님.

 

2010년 1월 10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1. 10. 22:07

 

델라웨어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288) 의 전문 안내인 (docent) 에게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미국이 영국이나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서 출발하여 1776년 독립선언을 하고 신생국으로 성장해 나가쟎아요.  그러니까 그 당시 미국의 문화는 척박했지요.  그야말로 근본은 유럽땅이고, 이들은 식민지의 주민들이니까요.  이 식민지에서 살던 부유층은 자녀들을 유럽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고,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미국땅에서 어떻게든 자력으로 살아나가야 했는데요, 유럽에서 교육받지도 못하고, 미국 내에서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도 못한, 스스로 기술을 연마한 '미술가'들도 있었겠지요. 

 

제가 소개한적이 있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활동했던 조슈아 존슨 (Joshua Johnson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역시 독학으로 그림을 익힌 초상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속의 아이들이 어쩐지 '어른의 이목구비'를 하고 있는 '대갈장군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서툴게 혼자 익힌 그림이므로 아이들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비례는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수 없었던 것이지요.  초기의 초상화가가 조슈아 존슨 뿐만은 아니었고요, 화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채 그냥 집안의 가보로 전해내려오던 초상화들도 많았지요.  그래서 미술관을 산책하다보면 미국 건국 초기의 민간 초상화중에서 '작자미상' 작품이 종종 보입니다.  서툴고, 어설픈.

 

델라웨어 미술관 전문 안내인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당시 (식민지시절과 건국 초기 당시)에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초상화 주문을 받았대요.  그래서 이들을 Tinker (땜쟁이)에 비유를 하더군요. 옛날에 제가 어릴때는 정말 솥단지 깨진고 그런것 땜질해주는 '땜쟁이'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냄비나 솥단지를 수리해줬거든요. 미국에서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초상화쟁이(?)들이 이집저집 다니며 초상화를 주문받을때, 이들이 주문받아 그린것은 오직 '얼굴과 머리통'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뭐 오늘날의 포토샵과 비슷하다고 할만한데요, 미리 화판에 몸과 배경을 다 그려가지고 다니는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신사가 초상화를 주문하면 '신사몸통'을 미리 그려놓은 화판을 꺼내어 거기다가 그 주문한 신사의 얼굴만 그려 넣는 겁니다. 결혼한 여자가 주문을 하면 결혼한 여자의 몸이 그려진 화판에다가 역시 주문자의 얼굴만 그려 넣고요, 아이의 초상화를 주문받으면, 아이의 몸통이 그려진 화판에다가 주문한 아이의 얼굴만 더 그리는겁니다.  그러니까 머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이미 기성품을 만들어서 가지고 다녔다는 것이지요.  사람 몸이야 사회적 신분에 따라서 의상만 다를뿐 비슷비슷 하니까 그냥 대충 몸과 배경을 완성해놓고, 거기다가 사람 얼굴만 비슷하게 맞춰서 그리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릴적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구식' 결혼식을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 친정집 마당에서 전통식으로 혼례를 치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 결혼 기념 사진은 우리가 폐백드릴때 맞춰 입는 그 전통복장의 흑백 사진입니다.  어머니는 또래 친구들중에서 '흰 웨딩드레스'을 입고 결혼 사진을 찍은 것을 무척 부러워하셨습니다. 엄마 소원이 그 흰 서양식 드레스를 입어보는 것이었지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때였나, 아직도 우리집이 셋방살이를 할때였는데,  어느날 우리집에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뒤집어 쓴 우리 엄니와, 양복을 입은 우리 아버지의 웨딩사진 액자'가 하나 생겼습니다.  어린 저는 잘 몰랐지만, 그당시에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아무거나 맘에드는 사진을 주면 그 사진을 서양식 웨딩 사진에 합성을 하여 액자를 만들어다 주는 서비스를 하는 사진쟁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엄마는 그렇게해서라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갖고 싶었었겠지요.  뭐, 얼굴은 우리 엄마, 우리 아빠이니까, 철없는 우리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신기해했습니다. 분명 우리 엄마, 우리 아빠이니까요.   하지만, 그날 저녁에 우리 엄니는 완고한 우리 아버지한테 무섭게 '야단'을 맞았죠 뭐. 하하하.  "결혼식을 번듯하게 잘 해놓고, 뭐가 답답해서 이따위 남의 몸뚱이에 얼굴을 붙여놓고 좋아하는건가. 이게 도대체 뭔가?  (뭐 애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기타등등)" 하하하. 

 

엄마는 단지...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이 한장 갖고 싶었을 뿐인데...

 

아무튼 그 사진은 그 이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민간 초상화쟁이들이 그런식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러 가가호호 돌아다녔다고 하는군요. 물론 이런식의 초상화일망정...가난뱅이는 아예 엄두도 못냈을것이고, 먹고살만한 부유층에서나 가질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따로따로 초상화를 주문할경우, 여자는 왼쪽을 보고있을것이고, 남자는 오른편을 보고 있겠지요. 몸뚱아리는 이미 기성품으로 만들어져있고, 거기에 얼굴만 새로 그렸겠지요.

 

 

 

 

덧붙여서. 미국의 국부로 알려진 조지 워싱턴. 이 사람 초상화도 여기저기 많이 있거든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작가로는 길버트 스튜어트가 가장 유명한데요, 그런데 길버트 스튜어트의 조지워싱턴 초상화 원본은 세가지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그 세가지를 '카피'한 것이라고 합니다. 

 

 

Anna Walraven (애나 워레븐)  c. 1850

작자 미상, Oil on Board

2010년 1월 9일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 소녀의 초상화 배경으로 테이블에 책이 널려있쟎아요. 저것은 그 소녀의 집안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뭐 일단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집안이라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책도 귀했으니까, 집에 책이 저렇게 널려있다는 것은 먹고살만하고 교육도 잘 받았다는 뜻이겠지요. :)

 

이 델라웨어의 소녀 애나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초기 '은판 사진' (daguerreotype - '다기어리어'는 프랑스의 사진술 발명가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입니다. 이 사진은 미국에서 1845년과 1855년 사이에 유행을 했고, 지금 남아있는 은판 사진들이 대개 그당시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이 작자미상이고 연대를 알수 없지만, 소녀가 들고 있는 은판사진을 보면, 그림의 제작년대가 대략 어느정도라고 짐작할만 한것이지요. 이 사진이 초기 은판사진임을 알수 있는 단서는, 당시 은판사진이 대개 이러한 프레임에 담겨 있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도상학'이라는 학문이 있고, '서양화 읽는법' 이라는 책도 한국에 소개된것이 있고, 미국의 미술책 코너에 가 봐도 여러권 발견할수 있는데요. 그림속에 그려진 대상들을 조합해서 그림을 해석해 나가는 것인데요.  가령 비너스가 보고있는 '거울'은 헛된 허상을 의미한다던가, 해골은 '메멘토 모리' 포도는 '풍요와 다산' '개'는 충성 뭐 이런식으로 풀어가는 것인데요.  이런 '상징적 의미'외에도 그림에 나타나는 어떤 역사적 단서를 통해 그림의 배경을 이해하는 방법도 있지요.  그래서, 심심할때 그림을 들여다보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것처럼 재미있기도 해요.  아마 그래서 제가 그림 들여다보는 것을 싫증을 안내고 계속하는 것이겠지요.

 

 

 

 

 

 

2010년 1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19세기 미국미술: 토마스 콜 과 허드슨강 미술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3  이전 페이지에서 토마스 콜의 '인생' 시리즈를 살펴 봤습니다.

 

 

19세기 미국 미술가인 Thomas Cole (1801-1848. 토마스 콜)은 미국의 풍경화가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그의 이름 옆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합니다. 오하이오에 정착했던 그는 후에 펜실베니아 미술 학교를 거쳐서 1825년에는 뉴욕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당시에 미국의 지식인들이나 꿈을 가진 화가들이 거쳤던 노선이기도 하지요. 펜실베니아를 거쳐 뉴욕으로 가는 노선.

 

당시 뉴욕주의 허드슨 밸리 (Hudson Valley)라는 지역이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이름이 있었고 그래서 토마스 콜을 위시한 '미술학도'들이 이곳에서 풍경화를 그리거나 익혔습니다.  미국 건국 초기의 미술이라야 '초상화' 아니면 '풍경화'였다고 할만하지요.  후에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허드슨 밸리의 Catskill 에서 결혼하여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콜을 위시하여 허드슨강 기슭에서 풍경화 작업을 하거나, 토마스 콜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국 풍경화가들을 일컬어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 칭하게 됩니다.

 

허드슨강 미술가들은, 대개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미국의 풍경들을 그렸고 (말하자면 진경산수라고 할만하죠),  때로는 이상화된 풍경들도 그렸습니다. 이 허드슨 미술가들에 의해 '거대한 미국의 풍경'들이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되기도 했고요.

 

허드슨강 미술가들중에 널리 알려진, 제가 장차 페이지를 열어 소개를 하고자 하는 화가들은

 1.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슈타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 Frederic Edwin Church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3. Thomas Moran (토마스 모란)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등인데요.

 

이 주요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장차 허드슨강 미술가들 특징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토마스 콜의 풍경화, 그 속에 담긴 우화들

 

 

토마스 콜은 풍경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풍경화속에 성서적 우화들을 담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은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인데요.  '노아의 홍수 뒤에 차분해진 물결'로 해석이 됩니다.  Deluge 는 홍수, 범람을 의미하는 어휘인데, 성서에서 the Deluge 라고 하면 노아의 홍수를 가리킵니다.  "After me, the deluge!"  나 이후에 홍수가 오건 말건 상관없다는 뜻이지요. 나 살아생전에만 무사하면 된다 이거죠. 좀 무책임한 발상이죠. (내가 알게 뭐람).

 

그림의 제목만 보면 토마스 콜은 성서에 담긴 노아의 홍수, 그 이후의 평화를 그린것으로 풀이됩니다만, 또다른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미술관의 그림 안내지에 담긴 내용을 옮기자면, 토마스 콜은 이 그림을 통해 신생국가 미국을 찬양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민자였던 토마스 콜 자신의 삶의 관점을 보여준것은 아니었을까요?)

 

노아의 홍수가 뜻하는 것은 묵은것의 청산, 죄악과 오류의 청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지요. 신생국 아메리카가 유럽의 영향권에서 독립을 하는것 역시 새로운 시작일수 있고, 유럽에서 이민 온 토마스 콜에게도 미국에서의 삶은 새로운 시작일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깊고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여 저 멀리 노오랗게 햇살이 비치는 평화의 바다로, 신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사진 사이즈를 줄여놔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사진 두번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사진 하단의 중앙의 바위 옆에 보시면 희끄무레한 조그만 것이 보이실겁니다. 해골바가지 입니다.  해골바가지.  이 해골바가지는 왜 그려넣은 것일까요?

 

 

노아의 홍수 이후, 새로운 에덴을 향하여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1829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서양 그림을 감상하실때, 서양 그림에 '해골바가지'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라를 막론하고 유럽 화가들은 '해골'을 그려넣기를 즐겼습니다. 이를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할 생명들이라는 것을 기억함) 이라는 용어로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Memento (Remember, 기억하라), Mori (mortal,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리따운 여인이 한손을 해골에 얹고 있는 그림은 어떤 식의 해석이 가능할까요?  인간은 유한하고, 처녀의 아름다움도 유한하다는 메시지이지요.  책상위에 모래시계와 해골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지지요. 시간은 흘러가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그림에 담긴 해골은 어떤 상징을 담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 죽을거다?  뭐 그보다는.... 어떤 것의 종말을 상징할수도 있지요.  구시대는 끝났다. 이 해골을 넘어서서 저 평화로운 신천지로 나아간다는 뜻일수 있지요. 신세계 미국은 New Eden 새로운 에덴동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콜에게.

 

2003년 겨울에 (아 벌써 아주 오래전의 일이구나, 어제 같은데...) 뉴올리안즈에 간적이 있습니다. 태풍 카트리나가 강타하기 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던 곳이었지요. 뉴올리언즈 시가지에 타로 점쟁이 할머니가 앉아있길래, 난생처음으로 길거리에서 타로점을 쳐봤습니다.  아, 제 일기에 그당시 사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그때 제가 고른 패중에 '해골'이 그려진 패가 있었거든요. 크리스마스 휴가로 간 여행이라 '신년운세'를 본것인데, 뭐 해골 패가 나왔던겁니다.  그런데 점쟁이 할머니가 제 패를 들여다보더니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음'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넌 새해에 큰 행운을 맞이할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고통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잘 해내길 바란다. (히히, 점쟁이가 아닌 나 라도 그런 설명은 하겠다) 아 뭐 점쾌가 하도 안좋아서 나를 위로하려고 이러시나 했지요.

 

 

 

2003년 12월 뉴올리언즈의 타로 점쟁이 할머니와 나.

 

그런데, 그 이듬해에 저로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왔지요. 아주 힘든 시험도 쳤고,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섰지요.  죽음은 곧 탄생이다. 새로운 탄생이다.  점쟁이 할머니의 아름다운 설명이 고마웠죠. 결국 인생 이리저리 해석하기 나름인데...

 

아, 예, 그래서 토마스 콜의 그림에 담긴 저 해골은, 죽음,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구시대, 구습의 죽음, 신생국가의 새로운 에덴동산을 희구하는.

 

 

 

아래의 두편의 그림들은 십자가의 순례라는 타이틀의, 기독교 우화 연작의 일부로 보입니다. 그가 1848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작품들이 1847년 1848년에 그려진 것이고보면 이것들이 토마스 콜의 최후의 작품들이었던것 같은데요. 그 자신이 생의 마지막에 다다랗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시작은 끝과 통하고, 끝은 새로운 시작과 닿아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요즈음, 묵은것들을 털어 내시고, 또 새로운 종말을 향해 여행을 떠나야할 때이지요.  올해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수 없으나, 길을 떠나보는거죠.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십자가의 순례, 그 여행의 끝 (십자가와 세상이라는 연작 시리즈를 위한 준비화)

(Study for the series; The Cross and the World) 1846-1848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about 1847)

십자가의 순례,그 여행의 끝.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날,  아름다운 한 해였노라...라고 술회 할수 있기를.

 

2010년 1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National Gallery of Art (워싱턴, 국립 미술관)의 미국미술전시장.

2009년 9월 11일 촬영

(사진들을 두번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실수 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기가 되면 삶에 대해서 이것저것 사색을 할 기회가 많지요.  우리는 인생을 봄-여름-가을-겨울에 비유 하기도 하는데요.  나는 지금 인생의 어디쯤에 있는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요. 옛날 어르신들 말씀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것에는 차례가 있어도, 돌아갈땐 차례가 없대요.  먼저 태어났다고 먼저 죽고, 나중 태어났다고 나중 죽고 그러는게 아니라는거죠.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각자 언제 죽을지 우리는 예측할수 없고, 어쩌면 운명 지어진대로 살아나가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미국화가 Thomas Cole (1801-1848)의 걸작중에 워싱턴 디씨의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미국미술 구역에 전시된 The Voyage of Life (인생의 항해길)이라는 연작품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들어 노년을 맞이하여 돌아갈때까지를 네편의 그림에 담아 놓은 것인데요.

 

각기

 1. The Voyage of Life: Childhood (어린시절)

 2. The Voyage of Life: Youth (청년시절)

 3. The Voyage of Life: Manhood (성년시절)

 4. The Voyage of Life: Old Age (노년기)

 

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네편의 작품을 차례차례 '전체크기'와 '부분화'를  함께 올려보겠습니다.  차례차례 그림을 보시면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림에 사람하나하고 또 다른 존재가 반드시 나옵니다)과 주변 풍경을 살펴보세요.  그러면 저절로 한가지 이야기가 나오게 되겠지요.  어린 꼬마들도 그림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겁니다. 저처럼 중년의 나이가 되거나 저보다 인생을 더 오래 사신 분들이 이 연작을 보면, 생각이 많아지지요.

 

사실 이 연작을 처음 본것은 2005년에 워싱턴을 처음 방문했을때였는데요.  아 벌써 그후로 5년이 더 흐른것이군요.  국립미술관에 갈때마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서 늘 비슷한, 그러나 양상이 조금 다른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아 5년전에 처음 이 작품을 발견하고는 - 국악인 김영임씨의 '회심곡'을 틀어놓으면 잘 어울리겠다 생각을 했었지요.  회심곡....  (서양판 회심곡이지요뭐...)

 

토마스 콜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요. 그림에 대한 이야기도 차차 하기로 하고요. 지금은 그냥, 그림들을 즐기시지요.... 할얘기가 아주 많은것도 같고, 뭐 따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것도 같고요.

 

 

 

 

어린시절

 

 

 

왼편, 동굴과 같은 어두운 곳으로부터 금빛 찬란한 배 한척이 나오고, 어린 아기가 타고 있지요. 아기의 뒷편에 천사같은 존재가 서서 배를 인도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강가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했고요.  먼 하늘은 장미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어린시절은 이렇게 느릿하고 명랑하게 흐르는 시간과, 신비감으로 가득차 있었지요.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갔어요. 제가 기억하는 인생 최초의 '먼 모험 여행'은 다섯살때, 이웃집의 나보다 한살 더 많았던 사내아이와 어른 걸음으로 20분쯤 가면 닿게 되는, 동네 초등학교까지의 길이었습니다.  그 학교에 나보다 대여섯살 많았던 고모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아침메 밥먹고나서 할일이 없고 심심했던 저는 이웃집 유순이와 함께 모의를 한거죠.

 

우리도 학교에 가보자. 유순아 너 학교가는길 알어?

응 알어. (유순이는 나보다 한살이나 더 많았고, 세상에 대해서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요)

학교에 가서 고모를 만나자.

그러자.

 

유순이의 부모님은 유순이가 어딜 돌아다니건 걱정을 하지 않았고 (유순이는 씩씩하고 똑똑하니까),  나의 부모님은 멀리 서울에 있었던거죠. 아무도 내가 어딜 돌아다니건 신경쓰지 않았던거고, 나는 나름대로 거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오전의 태양아래, 우리 동네 경계를 넘어서 한없이, 한없이 먼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우리집 마당에서서 돌아보면 보이는 마을의 집과, 산과, 개울과, 개울건너 앞마을의 집들뿐이었는데, 그 경계를 넘어서서, 내가 모르는 세상을 향해 유순이는 나를 이끌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계절이 가을이었던걸까요?  내가 마을을 벗어나서, 모르는 길을 걸으며 겁이 나서 칭칭대니까, 겨우 나보다 한살 더 많았던 유순이가 길가 밭에서 '무'를 하나 뽑아다가 이빨로 그 무 껍질을 벗겨서 우선 제가 몇입 먹고 나에게 주었지요. 이거 먹어라. 달다. 울지마. 내가 학교가는길 알어.

 

나는 정말, 온종일, 온종일, 영원처럼 오래오래 걸어서 초등학교에 도착했던것 같습니다.  학교 마당 구석에서 기가 죽어서 얌전히 있으려니, 마침 쉬는시간이었던지, 아니면 체육시간이었던지 양갈래로 길게 머리를 땋은, 까만 바지차림의 우리 막내고모가 학교 마당에 나왔다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달려왔지요.  "야! 니가 여기를 어떻게 왔니! 하하하. 여기를 왔구나!"  우리 막내고모는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했지요. (그래봤자, 우리 고모도 뭐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겠군요).

 

그날의 햇살이 생각납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햇살. 그 먼 여행. 그 멀고도 긴 하루.

 

우리의 시간은 느릿하게 반짝이며 흘러갔고, 세상은 신기함으로 가득차 있었지요.

 

 

 

 

제 학부시절 전공이 영어영문학이다보니, 운좋게도 대학시절에 영문학의 '기초 과정'들을 착실히 이수할수 있었는데요.  2학년이 되어 전공과목으로 처음 이수한 것이 '영시'였습니다. 중세 베오울프 맛보기를 거쳐 주로 낭만주의 영시를 강독했지요.  워즈워드의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어린시절의 기억을 통해 영생불멸을 깨닫고 부르는 노래)라는 시가 있는데요, 워즈워드는 어린 아이를 '보는자 Seer' '자연의 철학자 Philosopher'에 비유하여 인간이 태어날때부터 갖는 예지력, 천재성을 노래하지요.  인간이 천국에서 지상에 올때 천국의 광휘와 지혜를 갖고 오는데, 이승에서 살면서 그런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 빛이 돌려지지 않는다해도 서러워 말지니, 차라리 그 속깊이 간직된 빛을...' 이런 구절도 이 시의 일부이고요.

 

사실 이 '인생의 항로' 그림은 워즈워드의 '영생불사'시와 잘 어울리지요. (참고: http://www.bartleby.com/145/ww331.html )

 

전체 11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시인데 첫 두연만 읽으면서 음미해볼까요

 

 

                           http://www.bartleby.com/145/ww331.html )  

 

                    I

          THERE was a time when meadow, grove, and stream,
          The earth, and every common sight,
                    To me did seem
                  Apparelled in celestial light,
          The glory and the freshness of a dream.
          It is not now as it hath been of yore;--
                  Turn wheresoe'er I may,
                    By night or day,
          The things which I have seen I now can see no more.

 

풀밭, 언덕, 그리고 개울이

대지가, 그리고 일상의 평범한 것들이

천상의 빛에 둘러싸여 있는것처럼 보이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지.

그 시절의

빛나던 꿈과 그 꿈의 신선함은

이제 보이지 않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밤낮으로 보던 것들을

이제는 더이상 볼수 없어라

 


                                   II

                  The Rainbow comes and goes,
                  And lovely is the Rose,
                  The Moon doth with delight
            Look round her when the heavens are bare,
                  Waters on a starry night
                  Are beautiful and fair;
              The sunshine is a glorious birth;
              But yet I know, where'er I go,
          That there hath past away a glory from the earth.

 

무지개는 왔다가 사라지고

장미는 아름답구나

하늘이 개이면

달은 기쁨에차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별이 빛나는 밤

개울들은 아름답고도 고와라

햇살은 영광스런 탄생이라네

하지만 이제는 안다네

내가 어디엘 가도

그 광휘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다네

 

(번역; RedFox)

 

 

시인 워즈워드가 1803년에서 1806년사이에 쓴 시입니다.  나이가 들어 어린시절을 회고해보니 어린시절에는 모든것이 신기함, 빛으로 가득했었는데, 이제는 사물은 그대로 있어도 그 빛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지요... 워즈워드는 시를 풀어가면서 어린시절, 어린아이, 자연에 대한 '천국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그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냅니다.  그리고나서 그러면, 이제 그런것을 잃은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뭐 그런 이야기도 마지막에 나오는데요.  결론은 '기억'이죠.  우리에겐 회상할수 있는 능력이 아직 남아있고, 회상의 능력을 토대로 삶을 깊게 들여다볼수 있다는 위로를 하지요.

 

이 그림은 토마스콜 (1801-1849) 이 39세인 1840년에 그린것입니다. 그 8년후에 화가는 이른나이에 천국으로 가버렸는데요, 토마스콜의 성년기 작품입니다. 청년이 이런 그림들을 그리기는 어려울것 같고요. 당시에 나이 마흔이면 스스로도 자신의 '성년'으로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어린시절, 비가오면 폭우처럼, 눈이 오면 폭설처럼 여겨지던 시절, 세상은 놀라움으로 가득차있었지요.


 

 

 

청년시절

 

 

 

자, 이제 청년시절에 이르렀습니다.  멀린 (그림 왼편 상단) 하늘에 희게 빛나는 성이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 ).  청년은 여태까지 호위해주던 수호천사 따위 안중에 없다는 듯 그 하늘의 성을 향합니다. 수호천사는 배에서 내려 강 기슭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군요.

 

우리에게 저 하늘의 성은 무엇이었을까요?

 

희망과 기대에 찬 미래였을까요?

고시를 통과하여 출세를 해보겠다는 야망이었을까요?

군사정권을 몰아내고 진정한 민주화를 실현시키겠다는 이상 이었을까요?

남북통일이었나요?

아름다운 농장을 일구고 싶었나요?

착한 애인을 만나서 공중정원같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싶었나요?

먼나라로 유학을 하여 나도 알수없는 어떤 사람이 되어 살고 싶다는 것이었을까요?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던 시절 저의 꿈은 아마도 그것이었던것 같습니다. 멀리 떠나고 싶었고, 유학을 가고 싶었고, 현실은 멀리 떠나는것도 유학을 가는것도 불가능하다며 빙글거리며 발목을 잡았던것 같아요.) 아무튼 우리는 떠나고 싶어하죠. 부모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죠.

 

그런데 그 공중의 성으로 향한 물가에는 험준한 산이 기다리고 있고요, 그 물길을 계속따라가면, (수호천사 뒤로 보이는 협곡을 보십시오) 알수없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지요.

 

 

 

 

 

 

 

 

 

성년시절

 

 

저는 지금 '성년시절'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제가 판단을 해야하고, 저의 판단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내 삶보다는 내주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야하고, 고비고비마다 이것이 나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지 아닌지도 판단을 해야 합니다. 시간은 격류처럼 흐릅니다.

 

지난 연말에 오랫만에 지인을 만났는데, 그분이 "바쁘시죠?"하고 늘 인사로 묻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아이고, 한해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신이 없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냥 한해가 갔는데, 뭐 아무것도 한것이 없어요..."하고 대꾸를 했지요.  그분 말씀이, "나이만큼 세월의 속도가 빨라져요. 30대는 시속 30마일, 40대는 40마일이에요... 속도 초월하지 마시고 천천히 가세요."  그러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후딱후딱 지나간대요. 그 말씀이 맞는듯하여, 이것이 나만 느끼는 속도가 아니구나, 모두들 비슷하게 느끼는구나 했습니다. (그러면 또 위안이 되지요. 모두들 나와 비슷한거구나,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자, 아까 청춘시절의 강물을 따라 흘렀을때 맞닥뜨리게 되는 협곡의 정체가 여기서 드러나죠. 물살을 미친듯이 빠르게 흐르고, 배는 급물살과 바위사이를 통과해야만 하지요. 미친것은 물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죠. 미치겠는거죠.

 

 

 

 

 

그런데, 저 어두운 하늘구석에 희게 빛나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까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내버렸던 나의 수호천사인걸까요?  괴로움속을 서성일때, 단테를 돌봤던 베아트리체인걸까요?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있었는데, 지금 나에겐 무엇이, 누가 있을까?

 

 

 

 

미친 세월을, 급 물살을 견디며 바위틈을 통과해야 할때, 우리는 신앙을 가진사람이건 아니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토마스 콜은 기독교 바이블의 이야기를 많이 그린 화가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지처가 필요하죠.  대상이 누구이건간에 간절히 간절히 어떤 염원을 품게 되겠지요. 그러한 염원이 없이는 이런 물살을 타고 넘기가 힘이 들지요. 혹은 이 물살을 맞기 싫으니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을 할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 바위의 협곡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요? 저 너머에 대양이 보입니다. 그렇죠?

 

 

 

 

 

노년시절

 

 

자 이제 협곡을 통과하여 물결 잔잔한 바다에 다다랗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몸도 늙고 지쳤습니다. 성년시절까지는 뱃머리 장식이 붙어있더니, 이제 뱃머리 장식도 사라지고 없군요. 사람도, 배도 늙고 지치고 망가졌습니다. 망가진 뱃머리 장식대신에, 노인을 이끄는 빛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멀리에서 그를 맞이하는 또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어서 오라고 손짓 하고 있지요?

 

이렇게 우리의 삶은 '하루'와 같고, 하루는 '일생'과 같기도 합니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 마치 평생을 다시 시작하듯 그렇게 하루를 맞이하고, 마치 평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잠이 든다면 좋을것도 같습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살면서 힘이 들고 괴로울때, 그 물살너머에 평화로운 바다가 기다리고 있음을 상상하면 그런대로 다시 힘을 얻을수 있을것도 같고요.

 

저도 아직 노년을 살아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노년이 평화롭기를,  지상의 노인들이 평화로우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아, 토마스콜은 47세로 마감을 했는데요, 그는 노년이 오기전 지상에서 사라진것처럼 보이네요. (아니, 노년이 나이와 상관이 있는것은 아니지요. 혹자는 평생 청춘으로 혹자는 일찌감치 노년으로 살아갈지도 모르지요.)

 

 

 

 

 

 

 

 

 

세상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겪는 일들속에서 어떤 섭리를 발견하고자 노력한다면,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럭저럭 세상을 견뎌나갈수 있을것도 같군요.  사랑할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으며, 얻건 잃건 그 사이에 우리 삶의 강물은 흘러 흘러 가는 것이지요.

 

          The Clouds that gather round the setting sun
          Do take a sober colouring from an eye
          That hath kept watch o'er man's mortality;
          Another race hath been, and other palms are won.
          Thanks to the human heart by which we live,
          Thanks to its tenderness, its joys, and fears,
          To me the meanest flower that blows can give
          Thoughts that do often lie too deep for tears.
                                                        

지는 해의 주위로 모여드는 구름은

인간의 유한성을 지켜본 시선으로부터

근엄한 빛을 앗아간다

또하나의 경주는 끝났다. 월계관들이 주어졌다.

우리가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심성이 있어

그 심성의 부드러움과, 유쾌함과 두려움이 있어

아무리 보잘것없이 피어나는 꽃이라 할지라도

눈물조차 흘릴수 없도록 깊은 상념을 내게 선사할수 있게 되는 것이라.

 

(영생불사, 마지막 부분)

 

 

 

 

 

 

강물을 보러 나가고 싶은데, 날이 꽁꽁 얼어서 나갈수가 없어, 마음속의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늘 평안하시길. (협곡을 흐를때조차).

 

2010년 1월 3일 (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237  토마스 윌머 듀잉의 소개하는 페이지에서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백악관 피아노' 장식작품과 다른 그림들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사진 상태가 안좋아서 안타까웠죠. 옛날에 똑딱이 카메라로 대충 찍었던거라서.

 

그래서 일전에 (2009년 12월 29일) 미술관에 갔을때, 이 피아노실에 있는 '모든' 듀잉의 작품을 새로 사진기에 담아왔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제 독자들께, 아름다운 피아노와 선녀같이 평화로워 보이는 듀잉의 여신들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건, 늘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음을 지키고 간직하시길.  건강하시길. 

 

 

 

 

 

 

 

 

 

 

 

 

 

 

 

 

 

 

 

 

 

 

 

제목을 차차 달아 놓을게요.  우리가 듀잉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을 회상하시면서 감상하시면 좋을것 같죠. :)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들과 세계 정상급 국빈들을 위해 연주하던 피아노를 우리도 우리 삶에 들여놓고,  비록 가난하고 힘들어도, 마음은 재벌처럼 우아하게, 한번 폼잡고 살다 가는거죠. 뭐 삼시세끼 먹기는 재벌이나 나나 마찬가지고... 나도 내 한몸 잘 침대가 있고, 끼니 걱정이 없으니, 복되도다 복되도다.

 

 

2010년 1월 1일. 재벌같은 하루의 시작.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8. 12:31

워싱턴 디씨,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 미국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장이 몇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방이 보일겁니다.  창이 두개가 있고요, 그 창사이에 그림 한장이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방 가운데에 푹신한 벨벳 의자가 있습니다. 거기 앉으세요. 그 의자에 앉아서 이 그림을 바라보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귀가 안들리는것 같아요.

그림속의 정적이 그림 밖으로 나와서 내 귓가에 맴돌아요.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안들리고

뺨을 스치는 눈바람을 느낄 뿐이지요.

'정적'이 이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소음'이라고도 하지요

매일 포탄 터지고 총알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고통받던 사람이, 퇴역하여 고향에 돌아왔을때, 그 사람은 도통 무지무지한 소음때문에 귀가 아파서 견딜수 없었대요. 정적의 소리죠. Sound of Silence.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무지무지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고, 그 소리도 엄청나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귀가 청음가능한 음역대만 들을 뿐이죠.

 

이런 신비한 그림이 한 장 있어요.  여름에도 이 그림 앞에 앉으면 눈이 내리는 소리가 나요. 안믿겨지지요?  하지만, 한번 가보세요. 어쩌면 눈의 정적 뿐 아니라, 내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르죠. 안믿겨지죠?  후후.  믿어봐도 좋을텐데, 한번.  믿거나 말거나.

 

 

 

 

 

 

 

 

 

Round Hill Road (ca. 1890-1900)

John Henry Twachtman Born: Cincinnati, Ohio 1853 Died: Gloucester, Massachusetts 1902 oil on canvas 30 1/4 x 30 in. (76.8 x 76.2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William T. Evans 1909.7.64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2nd Floor, East Wing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8. 04:53

토마스 윌머 듀잉

 

 

토마스 윌머 듀잉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톤 태생의 화가 입니다.  1876년부터 1879년까지 (그의 나이 25세부터 29세까지) 파리와 뮌헨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Society of American Painters 그룹에 속하여 잡지 편집인이었던 Richard Watson Gilder의 살롱을 중심으로한 뉴욕 문화계에 어울리게 됩니다.  길더는 당시의 유명한 미술가, 작가, 재벌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이들과 '황금시대 Gilded Age'를 펼쳐 나갑니다.  미국미술사에서 '황금시대'는 말하자면 '돈'과 '예술'의 만남이었다고 할 만 하지요.

 

이곳에서 듀잉은 건축가이며 디자이너이기도 했던 Stanford White 와 친교를 맺게되는데 이들간의 돈독한 우정은 스탠포드 화이트가 죽을때까지 (1905년) 이어집니다. 스탠포드 화이트는 살해되었지요. 듀잉의 상심이 컸다고 합니다.  제가 듀잉 관련 페이지에 소개해드렸던 그의 작품들, 그 작품들이 '액자' 디자인은 모두 스탠포드 화이트의 작품입니다.

 

Gilder 의 살롱에서 듀잉은 그의 평생 아내가 되는 Maria Oakey (1845-1927)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듀잉보다 여섯살 연상이군요.  마리아 역시 화가였습니다. 마리아는 John La Farge 와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듀잉에게 화면을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조정해보라는 조언을 합니다.  듀잉이 Tonalist 로 나아간데는 아내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이지요.

 

1890년부터 듀잉은 뉴 햄프셔의 스튜디오에 머무르며 초록색 계열의 이상화된 자연속의 여성들을 창조해냅니다. 1897년 그는 Society of American Painters 에서 탈퇴하여 Ten American Painters 모임에 합류하여 20여년간 이들과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The Ten (미국 인상주의 화가들) 뒤에 서있는 사람들중에서 오른쪽에서 두번째 콧수염 신사가 듀잉

Seated, left to right:

(1) Edward Simmons,  (2) Willard L. Metcalf, (3) Childe Hassam, (4) J. Alden Weir, (5) Robert Reid
Standing, left to right:

(6) William Merritt Chase, (7) Frank W. Benson, (8) Edmund C. Tarbell, (9) Thomas Wilmer Dewing, (10) Joseph Rodefer De Camp

 

그리고 1905년부터는 그간의 야외 풍경에서 벗어나 실내 중심의 작품 활동을 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실내는 부드럽게 채색되고, 색조(tone)가 통일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은 하나 혹은 둘이 간결한, 대부분이 생략된 공간에 존재합니다.  남자를 찾아보기 힘든 그의 그림에서 여성 인물들은 손으로 다가가 잡을수 없는 거리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그리고 고요하게 존재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인물들의 숨소리나 체온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마치 숨쉬는 풀잎들처럼 그들은 존재합니다.

 

듀잉은 미국의 인상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10인회의 회원이었으므로 미국 인상파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지만,  좀더 국소적으로는 Tonalist (색조주의자) 군에 속합니다. Tonalism (색조주의)는 1880년경부터 1915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출신의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릴때 보였던 양상인데 George Inness 와 James McNeill Whister 가 그 대표적인 화가들입니다.  듀잉역시 화면의 전반적인 색조로서 화면의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공을 들였지요.  이 색조주의는 미국에서 인상파 화풍이 우세해지면서 그 명맥을 잃게 됩니다.

 

듀잉은 미술가로서는 매우 행운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술사에서 '당대'의 인정을 받고 영예를 누리다가 죽어서도 여전히 대가로 인정받은 화가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하게 살다가 인정도 못받고 죽은후에 사후에 인정받아 그림값만 하늘 높을줄 모르고 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하였고, 우리나라의 박수근 선생 역시 미군부대에서 양키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노동'으로 간신히 연명할수 있었으며...  그런데 듀잉은 일찌감치 뉴욕의 보험업자였던 John Galletly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철도차량 사업가였던 Freer (워싱턴의 프리어 갤러리를 기증한 사람)의 열렬한 애정과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립니다.  결국 Galletly 가 수집했던 작품들은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그리고 프리어가 수집한 작품들은 스미소니안 프리어 갤러리로 옮겨지게 됩니다.

 

 

초록 안개의 꿈

 

http://americanart.textcube.com/234 페이지에서 우리는 몇장의 그림을 보고 듀잉 작품세계의 어떤 특징을 꼽아본 적이 있습니다.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옮겨 보겠습니다.

 

(1) 그림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들입니다.  남자 안보이지요?  :)  '여름'과 '낭송'에서는 각각의 화면에 두명의 주인공들이 들어있습니다.  세폭 병풍같이 생긴 작품 속에는 한폭마다 한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지요.

 

(2) 모두 유화이군요.

 

(3) 배경이 모두 초록색 계열이지요.

 

(4) 그리고 배경이 모두 '자연'입니다.  인공적인 '건물' 같은것은 안보이지요?

 

(5) 안개가 낀듯 화면들이 대개 '아슴프레'하지요?  사진사가 사진 실력이 없긴 하지만, 원래 작품이 이래요. 촛점이 어긋난것처럼 아슴푸레한 것이 이 세작품의 공통점입니다.

 

(6)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팔은 가늘고 하체는 무척 길죠.  '이상화'된 여성의 체형인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단지 '몇 편'의 작품만으로도 듀잉의 이런 특징들을 발견해 낼수 있었는데요.  듀잉의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뭐가 새로 추가가 되었을까요?

 

(1) 그림하고는 상관이 없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의 '액자'가 모두 통일되어 있지요. 그것이 워싱턴에 있건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 있건 액자는 동일한 사람의 작품입니다. 그와 막역한 친구이기도 했던 건축가, 디자이너 Stanford White 가 디자인 한 것입니다.

 

(2) 일정한 색조를 유지하면서 그 색감 자체가 그림의 '주제'였다는 점에서 듀잉 활동당시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던 James McNeill Whistler (제임스 맥닐 휘슬러), George Inness (조지 이네스)의 Tonalism 을 그의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3) 그가 후에 십인회에 가입하게 되는데, 십인회의 주요 멤버들이 미국미술사에서 '미국 인상파 화가들'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4) 1905년 이후에는 실내에서 여인들이 악기를 들고 있는, 실내 중심의 그림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제가 소개드린 작품들을 찬찬히 보시면, 이 블로그에 소개된 작품들 만으로도 듀잉의 활동이 '야외'에서 '실내'로 옮겨가게 된 것을 파악할수 있습니다.

 

(5) 당시에 미국이나 유럽 화가들을 사로 잡았던 '일본화' '일본화풍'이 듀잉에게도 영향을 끼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6) 그는 당대에 '부자들의 후원'을 듬뿍 받은 운좋은 화가였지요. 그는 산업의 폭발적 발전으로 신흥대국이 된 미국의 재벌들의 '돈'과 유럽등지에서 예술 공부를 하고 돌아온 미국의 예술가들이 어울려 이뤄낸 '황금시대'의 아이였고, 수혜자였던 것이지요.  금박으로 떡칠을 하여 백악관에 기증한 스타인 피아노의 장식이나, 디트로이트 재벌 프리어의 실내 장식이나 장식용 그림을 제작해내면서, 그는 예술을 위해 배를 곯거나 화구를 사기위해 막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아름다운' 세월을 보낼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하여, 듀잉의 그림에서 우리는

'안개속을 걷는듯한 상쾌하고 촉촉한,'

'몽환적인,'

'어디선가 아름다운 멜로디가 들려오는 듯한,'

'사람의 숨소리나 땀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선녀들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가볍게 춤을 추는'

'연두색 물감이 이러저리 스며들다 내 영혼에까지도 스며들듯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프리어 갤러리의 듀잉 전시실에 가면 호흡도 고요해지고, 마음도 잠시 편안해집니다.

 

 

영혼의 부재

 

그렇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들이, 왜 미국 미술사 책에서, 미국 미술 비평 앤솔로지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듀잉의 이름이 세계적인 화가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미국 미술의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맴돌다 마는 것일까요?

 

이전페이지에서 저는 이를 간단히 '페이소스 (pathos)가 안보인다'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듀잉의 색조는 우리 영혼에까지도 스며들것같이 부드럽고 습기가 있으며 정제되어 있지만, 그토록이나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듀잉의 여인들에게서 우리는 영혼을 느낄수 없습니다. 사람의 숨소리나 땀냄새가 나지 않으므로 관객인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천상에만 존재하는 주인공들 곁에 우리는 다가갈수 없습니다.  다가갈수 없으므로 공감이 불가능해집니다.  저들은 관객인 나와 공감하지 않습니다. 나의 고통을 들어주지도 않고, 나의 신음소리를 듣지도 못합니다.  나는 그림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런 재미있는 설이 있는데요. 백화점 판매직원이 '너무나도 아름다우면' 오히려 매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수 있다고 하지요.  내가 물건 사는 사람이고 판매원은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너무 근사하고 잘생기면 오히려 손님인 내가 의기소침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잘난 판매원은 오히려 물건을 잘 못 판대요. (믿거나 말거나). 

 

듀잉의 그림속에는 '관객 (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 모두 포함)'들이 동감하거나 공감할 삶의 고통이 보지지 않습니다. 부조리함이나 비뚤어짐, 망가짐 같은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극복해야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팔자 늘어진 어떤 사람들이 식후에 페퍼민트 한잔으로 느끼함을 지우려하듯, 딱 고만큼의 아름다움만이 존재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리고 지워지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화가 듀잉의 몫인것 같습니다.

 

듀잉이 만약에 물감을 사기위해 막노동을 해야 했거나,  캔바스를 새로 장만할수 없어 그림위에 또다시 그림을 그려야 했던 상황속에서 고민하고 고통을 겪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선녀들은 우리에게 좀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줬을지도 모릅니다.  (미술가는 배부르면 안돼? 꼭 고생하다 죽어야 미술이 완성돼? 이렇게 반문하고 싶으시죠?  영화 누리면서 떵떵거리다가 세상 하직한 대가들도 여럿 있죠.  듀잉의 예술은 거기까지도 미치지 못했겠지요.)

 

저는 듀잉의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편안하고 좋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페이지를 여섯개씩이나 만들면서 상세하게 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동시에 안타까움도 느낀다는 것이지요...  안개처럼 희미하게 사라지고 만 그의 예술세계가 안타까운 것이지요.

 

인생은...고통스럽지만...고통을 견디면...나는 조금 더 사람 냄새를 풍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이유 같은것을 이렇게라도 찾게 되는군요.) 나를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수 없다해도, 죽는 순간까지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지요 뭐...

 

2009년 12월 27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 박물관, 듀잉의 작품 전시실 입니다. 2009년 7월 13일에 촬영한 것들인데요. 보시다시피...사진상태가 여엉 '아니올시다' 입니다. DSLR 갖고 다니기 전에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대충대충 찍었던 사진들이라서.  (조만간 다시 들러서 작품사진들을 담아 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 전시되고 있는 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피아노사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백악관에 기증할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인데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재임시 (1903) 듀잉이 '장식'을 담당한 것입니다.  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가 제작한 피아노중에서 십만번째 작품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도 이 피아노를 연주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피아노는 태프트, 윌슨, 하딩, 쿠어리지, 후버,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임기까지 백악관에 있었다고 합니다.

 

 

 

흰 바탕에 금박으로 장식을 하고, 뚜껑 안쪽에 열명의 고운 아가씨들이 있는데요, 맨 왼편의 아가씨는 의자에 앉아있고, 나머지 아홉명은 원무를 추듯 서있는데요. 스타인웨이가 듀잉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America Receiving the Nine Muses (아홉명의 뮤즈들을 맞이하는 아메리카)라는 고전적 주제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홉명의 뮤즈는 제우스와 네모신 (Mnemosyne) 의 아홉명의 딸들을 가리키는데 예술의 상징으로 서양 고전물에 많이 등장하지요.  듀잉은 뮤즈들을 그리면서 미국 건국 초기의 여성들의 옷차림을 한 여인들을 그려넣음으로써 서양 고전화에서 살찍 비껴갔다고 합니다. 뮤즈를 그리더라도 미국식으로 그리겠다는 자존감의 표현이었는지 알수 없으나 이를 애국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평자도 있습니다.

 

 

 

 

 

 

 

 

아래 작품은 In the Garden, 정원에서 (1892년) 작품입니다.

 

 

 

 

 

2009년 7월 13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redfox.

 

 

Posted by Lee Eunmee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