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a Mary Robertson, Moses 할머니의 일생

 

모세 할머니는 1860년에 태어나 1961년에 사망했다. 1세기 한 바퀴를 돌고도 일년을 더 살은 셈이다.  결혼하기 전 이름은 안나 마리 로버트슨 (Anna Mary Robertson)이었고, Moses와 결혼하였으므로 남편의 성을 따라서 Moses 할머니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안나 마리를 씨씨하는 애칭으로 불렀다. 씨씨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 뉴욕주의 시골마을, 평범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이로 태어났다. 당시 농가의 아이들은 집안일을 거드느라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많지 않았다. , 가을에는 들판에 나가서 일을 거들어야 했고, 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어느 겨울날 아빠가 몸이 아파서 며칠간 일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지내게 된 적이 있었다.  아빠는 심심한 나머지 집안의 빈 벽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거실벽에 페인트로 호수의 풍경화를 그려넣었는데, 온가족이 이 그림을 보고 기뻐하였다. 어린 씨씨 역시 아빠의 그림이 좋아보여서 판자에다 숲과 호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대로 이것을 ‘lamb scape’ 라고 불렀다. (영어로 풍경화는 랜스케이프, landscape 인데, 어린아이가 이 단어를 잘 모르니까 lamb scape 라고 말 한 것이다.) 식구들은 씨씨가 램스케이프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깔깔 웃었다고 한다.

 

씨씨는 농가의 소녀들이 그러하듯 엄마가 단풍시럽을 만들거나, 우유로 버터를 만들 때 거들어야 했다. 씨씨는 양초를 만들고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세탁이나 다림질, 바느질 등 집안에서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배웠다. 그리고 열두살이 되던 해에, 다른 농가의 소녀들처럼 씨씨도 남의집 살이를 하기 위해 떠났다. 60년대, 70년대 농가의 소녀들이 서울이나 대도시에 식모아이로 들어간것과 마찬가지 풍경이었으리라.  당시에는 이러한 풍경이 낯설지 않았으므로 씨씨역시 이런 상황을 특별히 슬퍼하지는 않았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 명랑하게 성장했다.  씨씨는 일요일에 주인집 가족들과 다함께 교회당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사람들도 만나고 친구를 사귈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씨씨가 두번째로 옮겨간 집에서는 씨씨가 학교에 다닐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집안 일을 모두 마치고나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어느날 씨씨가 그린 마을 풍경화를 본 선생님이 그 솜씨에 감탄하여 그림을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씨씨에게는 잊을수 없는 기쁜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자신의 그림을 칭찬해주었으므로.

 

 

 

 

이렇게 남의집살이로 일을 하던 씨씨는 1986, 17세 되던 해에 토마스 솔로몬 모세 (Thomas Solomon Moses)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 역시 같은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둘은 결혼하여 버지니아의 섀난도 골짜기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이들은 열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에 다섯명의 아이를 골짜기에 묻어야 했다. (그림: 섀난도 골짜기 Shanandoh Vallery, 1938)

 

 

 

 

 

 

 

 

 

섀난도 골짜기의 농장에서 살던 이들은 다시 뉴욕주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이글 브리지 (Eagle Bridge) 근처에 농장을 장만하여 니보산 (Mr. Nebo)이라고 이름짓고 정착한다이곳에서 씨씨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농부인 남편을 거들면서, 집안 살림을 하면서 부지런하게 살아간다. 어느해에 도배를 하다가 도배지가 다 떨어지자 씨씨는 페인트로 난로 가림판에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가족들이 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녀가 최초로 그린 커다란 그림이었다고 모세 할머니는 술회한적이 있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여 집을 떠나고 난후, 1927 1, 모세 할머니가 67세 되던해에 남편 토마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녀들도, 남편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모세 할머니는 시름을 덜 겸, 털실로 헌 그림을 고치곤 했는데, 시력이 약해지고 류머티즘으로 바느질을 하기 어려워지자 그림붓을 들게 된다. 그렇게 십여년간 모세 할머니는 심심파적으로 싸구려 페인트와 붓을 이용하여 추억속의 풍경들을 그리게 된다. 그의 그림 속에는 링컨 대통령이 저격당하여 조기를 내 걸고 있는 마을이 들어있기도 하고, 새로운 자동차를 타고 소풍가는 가족의 풍경이 그려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뉴잉글랜드 지방 농촌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뉴잉글란드 지방이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이 길어서인지 특히나 눈 쌓인 겨울 풍경이 많이 보인다. 흰눈,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조각보를 만드는 장면도 보이고, 다 함께 단풍시럽을 만드는 장면도 보인다. 이는 모세 할머니가 평생 살아오면서 직접 경험한 삶을 풍경들이었고, 그이의 추억속에 생생하게 흐르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의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1938, 모세 할머니가 78세 되던 해에, 모세 할머니는 자신의 그림을 동네 상점 (Hoosick Falls drugstore)에 진열해 놓았다. 몇푼에라도 팔리면 용돈벌이를 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오랫동안 예정되어온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마침 이 상점을 지나던 뉴욕의 미술품 수집가 루이스 칼더 (Louis Caldor)가 시골 상점에 진열된 모세 할머니의 그림들을 발견하고, 이 그림에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낸 것이다. 그는 당장 상점에 진열된 작품들을 모두 사들여가지고 뉴욕으로 향한다. 처음에 뉴욕 화랑가의 반응은 냉담했다. 알수도 없는 무명, 노인 화가의 그림에 투자해봤자 별 볼일 없을거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무명 미국화가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모세 할머니의 그림 세점을 전시하게 된다. 이어서 1940 (모세 할머니 81) Galerie St. Etienne 에서 모세 할머니의 개인 전시회를 개최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보러왔고, 이들은 모세 할머니의 풍경화속에 담긴 추억을 읽으며 감동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1961년 모세 할머니가 사망할때까지 20여년간, 1,5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내면서, 모세 할머니는 그야말로, ‘국민 할머니로 통하게 된다. 트루만, 아이젠하워, 케네디 대통령이 모세 할머니에게 해마다 신년 카드를 보냈으며, 할머니의 작품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으로 판매되고 혹은 벽지나 직물에 박혀 대량으로 판매되어 나간다. 그녀의 일대기가 드라마가 되어 소개되기도 하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소개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어느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모세 할머니가 살던 시골에서는 그 방송이 잡히지 않아 정작 모세 할머니는 자신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후에 방송 기자가 다큐멘터리 테이프를 가져다가 틀어서 보여줬다고 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신을 본 할머니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무엇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을 만들어 냈는가?

 

미국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예술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편이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을 예술적인 회화로서 취급하기 보다는 풍속화 (folk art, primitive ar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오히려 모세 할머니의 풍속화들이 왜 그 시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지, 그 배경을 주로 논의 하는 편이다.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의 저자 Frances K. Pohl 이나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의 저자 Robert Hughes 는 모세 할머니가 발견 된 시점의 사회적 분위기에 주목한다.

 

모세 할머니가 뉴욕화단의 수집가에게 발견될 즈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공공미술정책의 영향으로,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중서부 출신의 화가 그랜트 우드 (Grant Wood)가 한편에서 미국인의 미국적인 것을 외치며, ‘미국의 풍경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거니와, 뉴딜정책의 공공미술프로젝트에서 요구된 것이 미국의 풍경이기도 했고, 여태까지 유럽문화에 의지하던 미국인들은 우리들만의 것에 서서히 눈을 돌리게 된다.  미국이 자랑하는 미국화가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가 너무나도 미국적인 풍경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등장한 것이 1930년대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경제 대공황이었던 1930년대에 미술가들도 역시 경제적 암흑기를 거치게 되었는데, 에드워드 호퍼는 이때부터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30년대에 서서히 우리 미국인들의 풍경에 눈을 뜨게 되는 미국의 대중들은 2차대전을 거치면서 1945년 전승국이 되어 경제적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자신이 소속한 국가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유럽으로 눈길을 돌리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 우리 할머니들의 것, 우리가 향유하던 것을 향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모세 할머니 외에도 1948년 크리스티나의 세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 청년 앤드루 와이어드가 있었고, 그리고 일관되게 미국의 얼굴, 미국의 풍경들을 밝은 색조로 그려낸 노만 로크웰 (Norman Rockwell)도 있었다.  미술 수업을 받지도 못 한 채로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역시 말년에 미술계에 데뷔한 호레이스 피핀 (Horace Pippin)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발굴해 낸 미국의 작가라고 할 만하다.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가 특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계기를 당시 눈을 뜨게 되는 텔레비전과 대량생산문화에서 찾기도 한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텔레비전은 대중문화 매체의 상징이고, 텔레비전에 소개되는 모세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이가 그려내는 작품의 예술성을 떠나서 그대로 소박한 인간의 승리를 전하는 드라마이기도 했을 것이다. 카드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이의 그림을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 직물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의 그림이 박힌 벽지나 테이블보는 모세 할머니를 더욱 대중에게 다가가게 해 주었다. 그이가 그린 그림들이 예술성이 어떠한지 이미 그것은 대중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모세 할머니는 예술성을 넘어서서, 비평가들의 회의적 시선을 넘어서서 이미 국민 할머니가 되었고, 대통령들이 앞다퉈 악수를 하고 싶어하는 미국 문화의 상징, 그리운 추억의 아이콘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제목: Christmas (1961)

                                                 Oil and Tempera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 풍속화 갤러리 2009년 9월 6일 촬영

 

모세할머니는 나이 80에 미술계에 정식 데뷔했지만 그 후로 20년이 넘도록 국민 할머니로 영예를 누리며 살아갔다. 그가 남긴 그림이 1,500점이 넘는다고 하는데, 꽤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이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그이의 그림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미술관 웹사이트를 뒤져보면 소장품 명단에 몇 편이 올라있지만, 전시장에 내 걸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한 모세 할머니의 작품은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 한 점,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 점, 이렇게 딱 두 점이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은 풍속화 (folk art)’ 갤러리에 걸려있다.  필립스 콜렉션에서도 한번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요즘은 전시되고 있는 작품이 없다. 

 

                                           2009년 7월 3일 촬영

 

 

 

전시장에서 그림을 볼 수 없다 해도 실망 할 필요는 없다. 해마다 달력업자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 열두 장을 담은 달력을 찍어내고, 우리는 일년 내내 그이가 그린, 행복한 그림을 보며 지낼 수 있으니까. 모세 할머니는 그이가 기억하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우리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 우리 이웃집 어르신들, 내 친척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찾아낼 수 있다. 미술 비평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회화사적 작품성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모세 할머니는 비평가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고 명랑하게 그림들을 그려나갔고, 그의 그림들은 지금도 나에게 노래, 행복한 어린 시절의 노래를 선사한다. 이 행복한 보편성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어떤 설명을 해 줄 것인가?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예술은 비평을 초월하는 곳에 있다고.

 

http://www.benningtonmuseum.com/index.aspx  이곳은 모세 할머니를 기념하는 미술관. 뉴잉글랜드 지역 버몬트주에 위치하고 있다. 2009년 8월에 매사추세츠를 방문하면서 이곳을 들러보려고 신경쓰고 있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가 볼 수 없었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는 모세 할머니가 젊은시절 20여년간 살았다는 셰난도 골짜기의 농가집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  소풍삼아 그 언덕에라도 가게 되면 그때 관련 페이지들을 업데이트 하겠다.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2  또다른 일러스트레이터, 여성 화가 Tasha Tudor 이야기.

 

 

참고자료:

 1. Grandma Moses, written and illustrated by Alexandra Wallner

 2.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by Robert Hughes

 3.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by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9. 28. 18:45

그동안 틈틈이 미국사와 미국미술의 발전사를 살폈는데, 이제 어떤 전체적인 '지도'가 필요한 시기인 듯 하다.  중구난방으로 기분 내키는대로 쓰고 있긴 하지만, 이제 골격은 잡아놓고 부분부분 그려나가는 식으로 정리를 하는것이 좋을 것이다. 이 문제로 고민을 좀 하고 있었는데, 뉴왁 미술관 미국미술 관련 페이지에서 대략의 뼈대를 잡을수 있었다.

 

뉴왁 미술관에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이 미술관은 분명히 시대적으로 어떤 개성을 정해놓고 전시품들을 진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립미술관도,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도 시대적인 개념을 정하여 소장품들을 전시하긴 했는데, 뉴왁이 이를 분명히 밝혀서 '안내'를 잘 하고 있다.  내가 읽고 있는 미국미술 안내서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긴 했는데 막상 차례를 살펴봐도 그렇고 '장황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확실한 '지도'를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미술의 흐름이란것이 자대고 줄긋듯 명확히 떨어져주는 개념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내 머릿속에도 장황한 개념만 열거될 뿐, 시대별로 똑 떨어지게 정리가 안된다.

 

아래의 연표를 바탕으로, 이를 응용하며 커다란 전지에 시대별 지도를 그려놓고, 해당 시기에 나를 '매혹'하는 작가들을 포스트잇으로 붙여나가는 식으로, 나만의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면 좋을 듯 하다. (누군지 정리 한번 잘 해 놓았다.)  왜 미술전문가들은 이런 시도를 안하거나 못하는걸까? 너무 아는게 많아서?  그런데 아는게 많아도 주워담지 못하면 그게 또 마냥 허무한거라... 왜 방대한 지식을 담은 책들이 이런 간단한 표 하나를 제시하지도 못하는가?  나는, 일단 누군가가 잘 정리해 놓은 표에 입각해서, 내식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지고, 그 틀안에 작가와 작품을 집어 넣는 식으로 모자이크 하여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겠다.

 

 

http://www.newarkmuseum.org/PicturingAmerica.html

1730 to 1900

The American Colonies, 1730 -1776
The Young Republic, 1790 -1860
Romantic Portraits for Eastern Cities, 1790-1860
Country Portraits, 1790 -1860
The Rise of Landscape Painting, 1825-1880
The Civil War and Its Aftermath, 1860-1900
The Lure of Europe, 1850-1900
The Gilded Age, 1875-1900


1900 to Present

Into the Modern Era, 1900-40
Far From the Modern World, 1900-25
A Modern Art For a Modern World, 1910-30
Faith, Fear and Failure in The Machine Age, 1920-40
In the Wake of the War, 1945-65
Surrealism and Abstract Expressionism, 1930-65
Challenging Conformity, 1955-65
Art Since 1965

 

이 표를 바탕으로 내 표를 만들어내면 된다.  이제 정리가 되었으니까, 두서없는 분류 시스템도 개편을 하고. 정진.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9. 28. 07:39

(그림 클릭하면 커집니다)

 

이 작품은, 미국의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 (Social Realist) 로 알려진 벤 샨 (Ben Shahn)의 '해방 (Liberation)' 이라는 구아시 화 이다.  뉴욕 맨하탄의 '현대 미술과 (Museum of Modern Art)' 소장품으로 마침 운좋게 관람이 가능했다.  미술관에 제공한, 작품 옆의 작은 '이름표'에 나온 정보에 의하면, 이 '해방'이라는 작품은 1945년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면, 이 작품을 읽는/보는 우리는 1945년이라는 해와, '해방'이라는 제목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1945년은 어떤 해인가?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광복의 해'가 된다. 1945년이 단지 한국인들에게만 광복의 해는 아니었다. 2차 대전이 1945년에 끝났을때, 지구상의 여기저기에서 식민지로 신음하던 약소국가들이 '조선'처럼 광복을 맞이하기도 했고,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는 상황 자체가 전쟁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계는 '전쟁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일단 해방을 맞이 한 것이다.

 

그림을 살펴보자. 전쟁의 폐허를 여실히 드러내는 폭격당한 건물이 있고, 그리고 광장에 '뺑뺑이' 기둥이 하나 서있다. 그 뺑뺑이에 아이들 셋이 매달려 있다. 아이들이 뺑뺑이를 타고 있는 배경은 황량하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쌓여있고, 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 듯한 붓의 터치가 느껴진다. 아이들은 창백해 보인다. 명랑하게 웃고 있는 표정도 아니다.

 

이 그림은 우울한가?

절망적인가?

희망적인가?

어떠한가?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건, 해석은 보는 사람의 자유이다.  우리도 작가의 의도로부터 '해방'될 권리는 있으니까.

 

요즘도 뺑뺑이가 있을까?  내가 어릴때, 당시에는 동네에 놀이터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그네나 미끄럼과 같은 '놀이시설'은 오직 학교 운동장에나 가야 구경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파트마다, 골목마다 놀이터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내가 어릴때는 시골에서는 아무데서나 놀면 되었고, 도시에서는 골목에서 놀았다. 학교에 가면 알량하게 서 있는 미끄럼, 그네에는 늘 아이들이 매달려 있어서 그네를 한번 타보기도 쉽지 않았다. 때로, 그네는 수리를 구실로 그냥 묶어 놓기도 했었다. 그리고 뺑뺑이가 있었다.  기둥에 최고리 줄이 몇가닥 매달려 있고, 그 쇠고리 줄을 잡고서 한 방향으로 내쳐 달리다가 발을 공중에 띄우면 원심력에 의해서 몸이 바깥으로, 허공으로 쌩 떳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아! 신나는 뺑뺑이였다!  지금도 학교 운동장에 그 뺑뺑이가 있을까?

 

화집에서 이 그림을 처음 발견 했을때, 나는 '뺑뺑이'를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  우리들은 전국민이 모두 가난했고, 그래서 가난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무수한 가난뱅이 아이들중의 하나였을 뿐.  우리들은 가난한 놀이 시설에도 기죽지 않았다. 우리는 뺑뺑이를 타면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쁨을 맛봤다. 

 

그림속의 아이들이 절망적인가?

우울한가?

 

아, 나는 이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리고 이런 풍경에서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대개 우등생 표시가 붙었지만, 건강상황에는 항상 '영양실조, 빈혈' 이라는 표시가 따라다녔고, '영양실조로 보이니 건강을 신경써주십사' 하는 선생님의 친절한 통신문이 덧붙기도 했었다.  나는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뜨고, 아파보이는 빈민가의 아이였으나, 나는 무럭무럭 자랐고, 새나라의 아이답게 꿈을 꾸며 살지 않았던가?

 

나는 이 그림을 보면 행복하다. 폐허가 된,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무늬는, 아마도 드러나는 벽지이리라. 각기 다른 벽지를 붙이고, 각기 다른 꿈을 갖고 살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다 사라졌고,  그러나 다시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알록달록한 벽은, 어찌보면, 내가 처음 본 서울의 골목골목의 풍경 같기도 하다. 볕이 놓은 날이면, 무허가 골목의 담벼락이나 빨래줄에 내 걸리던 알록달록한 나이롱 이불들.  그 나이롱 이불들은 햇살 아래서 뽀송뽀송 말라갔고, 그날밤 그 집 식구들은 신선한 햇살 냄새가 나는 나이롱 이불을 깔고 덮고 잠이 들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가난은 우리를 파괴하지 못했다. 전쟁도 인간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폭력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수는 있으나 인간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9. 19. 03:18

 

                        http://www.nga.gov/press/special/tower/guston09/index.shtm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http://americanart.textcube.com/41   ) 에서 2009년 1월부터 1년간 필립 거스톤 (Philip Guston (1913-1980)의 특별전을 열고 있다.  위치는 동관 (East Building)의 Tower Gallery. 

 

필립 거스톤은 Jackson Pollock, Willem De Kooning 과 더불어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 화풍의 기수였으며 후기에는 '신표현주의 (Neo-expressionism)'으로 선화하기도 하였다.  추상표현주의나 신표현주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뤄보기로 하겠다.

 

 

1913년 캐나다 몬트리올 태생의 필립 거스톤은 가족을 따라 어린 시절 캘리포니아의 로스 엔젤레스로 이주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1세이던 1924년 목을 매 자살을 하고, 어린 필립은 아버지의 자살 현장을 목격한다. 그가 14세 되던 1927년 Los Angeles Manual Arts High School 에 입학하여 Jackson Pollock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가 미술보다 스포츠를 더 많이 지원한다고 항의했다가 퇴학조치를 당하고 만다. 폴락은 그 후에 학교로 복귀했지만, 거스톤은 고등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후에 Otis Art Institute in L.A. 에서 1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미술 공부를 하게 된다. 그가 1년만에 오티스 미술 학교를 집어 치운 이유는 학교에서 석고상을 그리는 식으로 그림 공부를 하도록 지도하는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그는  왜 석고상만 그려야 하는가  반발하여 어느날 밤새도록 실기실에서 석고상을 스케치하여 실기실 바닥을 그의 습작으로 뒤덮어 버린후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이 그가 받은 미술 교육의 전부였다. 그후로 그는 스스로 그의 미술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비록 정규 미술 교육을 제대로 마치지 않았지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정규 미술 교육 과정의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University of Iowa (1941-1945)에서 교수를 했고, 미주리 주에 위치한 Washington University at St. Louis, New York University, Pratt Institute 에서도 후진을 양성했다.

 

본래 그의 부모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유태인이었고 유태인 탄압을 피해 북미 캐나다로, 그후에 캘리포니아로 이주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유태인에 대한 탄압을 피해 북미로 왔지만, 북미가 유태인들에게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소년시절 거스톤은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나는 Ku Klux Klan (일명 KKK단, 혹은 Klan)의 폭력에 노출되어  심리적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실제로 학교에서 미국태생의 학생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흔히 KKK단의 주요 공격대상이 '남부 흑인'인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KKK 관련 내용을 좀더 뒤져보거나 미국사 책을 뒤져보면 KKK단이 인종청소를 감행하려 했던 '나찌즘'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백인이 아닌 거의 '모든' 인종들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 주요 공격대상이 흑인들이었지만, 그 외에도 아시아계, 유태계, 히스패닉계 역시 이들의 공격 내지는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의 부모가 유태계였으며, 미국에서 KKK의 위협에 시달렸던 흔적이 그의 미술세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여기저기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KKK단 복장을 한 인간의 모습이 여기저기 나타나는가 하면 나찌의 유태인 학살장면을 연상케 하는 무수한 '신발들'이 포개진 그림들. 

 

국립 미술관에 모아진 필립 거스톤의 유화 대작들과, 리토그래프 작품들을 이리저리 감상하면서 얼핏 스치는 생각은, 어딘가 불안하고 우울하다는 것이다. 알수 없는 불안함. 편하지 않음.  그러나 한편 낙관적임.  뭐랄까 불안을 극복한 사람이 보이는 상처투성이의 미소라고 할까?  원래 그림 감상은 감상자의 투사에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정작 불안한 것은 그림들이 아니라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와 필립 거스톤과의 첫번째 만남이었다. 후에 공부를 하면서 그의 미술 세계에 대한 리뷰를 적어나가겠다.

 

이어지는 사진들은 전시회에 진열된 '전 작품' 그리고 전시실 구석에 마련된 필립 거스톤 관련 6분짜리 영상자료를 내가 사진으로 찍어본 것 들이다.  (아직 사진기술이 서툴러서 그림이 삐뚤어지고 그랬지만, 내 눈으로 본것을 블로그에 올린다.)

 

 

 

 

 

 

 

 

 

 

 

 

 

 

 

 

 

 

 

 

 

 

 

 

 

 

 

 

동영상 화면 사진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9. 17. 08:23









미국 미술의 이해를 위해서는 미국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안목도 필요하다.  요즘 미국사책을 읽고 있는데, 책 읽다 말고 문득,  브레히트의 시가 떠올랐다. 음, 30년대 빈민들의 참상을 그린 그림들을 스케치할때,  브레히트의 이 시를 인용하면 의미있을 것 같다.

 
임시 야간 숙소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야간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야간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 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야간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1931년 作)
Posted by Lee Eunmee

 

Joshua Johnson (artist)
American, born c. 1763, active 1796 - 1824
The Westwood Children, c. 1807
oil on canvas
overall: 104.5 x 117 cm (41 1/8 x 46 1/16 in.)
Gift of Edgar William and Bernice Chrysler Garbisch
1959.11.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45955

 

 

 

대갈장군 아이들: Joshua Johnson (c. 1763-1832)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그림을 보았는데요, 이상하게 아이들 머리가 커요. 왜 그런가요?” 워싱턴 디씨를 방문하여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의 미국 미술을 둘러본 친구가 물었다. “누구의 그림인가요?” 내가 물으니 Joshua Johnson 이라고 가르쳐준다.

 

Joshua Johnsonhttp://en.wikipedia.org/wiki/Joshua_Johnson 미국 흑인 중 최초로 그림을 그려서밥벌이를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조슈아의 아버지는 백인이었고, 어머니는 다른 사람의 노예였다. 따라서 조슈아는 노예로 태어났다. 후에 조슈아의 아버지가 조슈아를 사들인 후 노예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조슈아는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 지방에 살고 있던 부자들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하면 이를 그려주었다. 조슈아는 만 20세가 될 때까지 노예로 살았고, 전문적인 그림 공부를 할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Joshua Johnson 에게는 풍속화가 (folk artist)라는 이름표가 붙는다. 

 

그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저 1800년대 초반에 볼티모어에서 밥술이나 뜨던 사람들 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초상화나 가족화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큰 관심거리가 못 된다.  그의 독특한 화풍이 오히려 눈에 띄는데, 내 친구의 질문처럼 왜 아이들의 머리가 기이하게 큰가?” “왜 아이들 얼굴이 어른 얼굴하고 비슷한가?” 이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슈아 존슨이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하여, 그냥 자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수준에 머물렀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 아이의 얼굴을 어떻게 그리면 어린아이처럼 보일지 잘 몰랐을 수도 있다.  대충 우리의 눈 짐작으로 아이들은 몸집을 보면 머리와 몸통의 비례가 어른과는 차이가 있다. 어른에 비해서 어린이는 머리통이 몸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대로 머리는 크게 몸집은 작게 그린 것이다.  그러면 얼굴은 왜 천사 같은 동안 (童顔)’이 아니고 겉늙은 어른 같은 표정인가? 조슈아 존슨은 어린이의 얼굴의 특징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어른의 얼굴을 아이의 얼굴에 대입 시켰다.

 

미국 건국 초기, 1700년대 후반에서 1800년대 초반에 보이는 미국인들의 초상화를 보면, 작가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나 Joshua Johnson과 같이 전문적인 미술 수업을 받지 않은 작가들의 초상화를 보면, 대개 사람들이 모두 닮은꼴인 것을 볼 수 있다. 일례로, 애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의 모양이 다들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릴 줄 아는 코의 모양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여자를 그릴 때나, 남자를 그릴 때나, 애나, 어른이나 그냥 그 코를 갖다 붙여주는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도 어른 줄여 놓은 듯겉늙은 표정이 많은데, 어른 얼굴 그리는 솜씨로 아이들 얼굴도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초기의 이런 작품들을 보노라면, “미국 미술 별 것 아니네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나는 이런 서툰 그림들에 애정이 가는 편인데, 이 별것도 아니고 서툰 그림들은 유럽 화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고, 이런 원시적인 화풍에서 새로운 무엇이 자라날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700년 말 혹은 1800년 초, 미국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신생국가였다. 미국의 미술도 이제 막 눈을 뜨고 그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문화도 역사도 척박한 이 신생의 땅에 애정을 보내기보다는 유럽을 동경하고 유럽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유럽에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미국땅에서 독자적으로 서툰 걸음마를 계속 해 나갔다. 그리고 나는 이런 미술가들에 관심이 많다.

 

 

 Portrait of Adelia Ellender

ca. 1803-1805 Joshua Johnson oil on canvas 26 1/4 x 21 1/8 in. (66.7 x 53.7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Mr. and Mrs. Norman Robbins 1983.95.55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3rd Floor, Luce Foundation Center

 

 

조쥬아 존슨의 그림속의 아이들이 대갈장군인 것은 그의 눈에 아이들이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들 얼굴이 겉늙어 보이는 이유는 조슈아가 아이들 얼굴의 특징을 잘 살리지 못하고, 그냥 어른 얼굴 그리는 솜씨로 아이들 얼굴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그림의 가치가 일천하다고는 말 할 수 없다. 민화에는 민화만의 멋과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서 한국의 민화에 호랑이가 많이 등장하는데 민화의 호랑이와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을 비교하면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이 훨씬 사실적이고 힘이 넘치지만, 김홍도와 민화의 호랑이를 동일한 선상에서, 동일한 점수표를 가지고 비교 평가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September 7, 2009

RedFox

 

 

위에 소개했던 소녀의 초상화를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3층 루스센터에서 발견.  그림의 보관소와 같은 이곳에는 가격을 매길수도 없는 걸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잔

 

 

 

Little Girl in Pink with Goblet (분홍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잔) 1805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 (Detroit Institute of Art Museum) 에서 촬영

 

 

 

그외에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발견한 조슈아 존슨의  초상화 작품들

 

 

 

 

Portrait of Sea Captain John Murphy (선장 존 머피의 초상화) c. 1810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Portrait of Mrs. Barbara Baker Murphy (Wife of Sea Captain) c. 1810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에서 촬영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발견한 조슈아 존슨의 작품

 

 

Portrait of Edward Aisquith  (에드워드 애스퀴쓰의 초상 ) c. 1810

Oil on Canvas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Smithsonian Q and A: American Art and Artists 책에 따르면 조슈아 존슨의 작품중 현재 남겨진 것은 19점이라고 한다.  열아홉점 남아있는 것중에 내가 본 것들이 조슈아 존슨 페이지들에 담긴 것들이다.

 

2010년 1월 3일 내용 보충. redfox

 

http://americanart.textcube.com/195  : 페이지 연결.

 

 

Posted by Lee Eunmee

꿈의 세계

 

모세 할머니 (Moses 는 영어로는 모지스라고 발음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 Moses 모세라고 발음 하므로 우리말을 따라서 모세할머니라고 부르기로 한다)가 붓을 잡은 것은 그의 나이 76세였다. 앞서 밝힌 바 와 같이, 눈이 침침해져서 즐겨 하던 수놓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그림은, 그이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2년 후 요술처럼 팔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이는 101세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25년간 그이가 남긴 그림은 주로 그의 삶 속의 정경들이었다. 누군가가 성서 속의 이야기를 그려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을 때 모세 할머니는 담담하게 대꾸했다고 한다, ‘난 내가 본 적도 없는 것을 그릴 수가 없어요. 내가 보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그리나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일뿐 그의 눈으로 생생하게 보거나 경험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형상화 하는 일이 모세 할머니에게는 정직하지 못한, 혹은 자기로서는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여 졌을 것이다. 모세 할머니 그림 속의 깨알 같이 그려진 사람들과, 그 주변 풍경이 구체성을 띄고 생동하는 이유는, 그것이 비록 기억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생생한 경험에서 우러난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때로 어떤 장면을 극적으로 채색하기도 하고, 어떤 장면을 까맣게 지워버리기도 한다. 우리의 기억은 비논리적인 꿈과도 비슷하다. 그렇다고 기억이 허구는 아니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은 기억 속의 마을과, 들과, 집들, 그리고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데, 전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아서인지 원근법이 생략되거나 구도가 울퉁불퉁하기도 하다. 그의 그림 속 세계는 환상이다.  그러나 삶이 녹아있는 환상이다. 우리가 모세 할머니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그림 기교가 아니고, 그림 이론이 아니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갖는 꿈의 세계이다.  모세 할머니가 그린 마을은 아직도 이세상 어딘가에 존재할까? 그이가 즐겨 그린 뉴잉글랜드 지방의 마을 사람 풍경은 어쩌면 이제는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마을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상 어딘가 어떤 마을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서로 모여서 마을 일을 의논하고, 함께 곡식을 수확하고, 함께 바느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꿈의 세계를 보면서 비례나 원근법이나 구도를 따진다면, 그이야 말로 예술의 본질인 에 아직 다가서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의 엄마

 

 

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다. 45x60센티미터쯤 되는 크기의 유화이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물감이 떨어져나가고 그랬다. 멀리 산이 보이고, 꽃 길이 이어져 있고, 마당처럼 보이는 곳에 네모네모 있는데,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이것을 보고 멍석에 고추를 말리고 있는가 보다 하고 짐작을 할 만 하다. 왼쪽 구석에 두 소녀가 보인다.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좀더 키가 크고, 그 곁에 살구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다. 이 그림은 우리 엄마의 작품이다. 엄마는 6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와 사별하셨고,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그림 붓을 집어 들었다. 엄마는 왜정 때 (일제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고 자라났던 세대의 소녀들이 대개 그러하였듯 소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집에서 수놓고, 바느질하고 살림을 익히다가 중매로 번듯하고 훤칠한 신랑에게 시집을 갔다.  엄마는 층층 시하에서 시누이들과 아이들을 함께 키우며 나이를 먹어갔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품을 떠나고, 마침내 남편마저 그 곁을 떠났을 때, 엄마는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애써 그린 그림을 자식들, 친척들, 친지들에게 액자까지 만들어서 선물을 한다. 엄마는 그림 공부를 하겠다며 화실에도 다니고, 전문 화가에게서 지도도 받았다. 하지만 엄마는 서양식의 그림 공부 법을 제대로 따라 하지 않았다. 엄마의 데생은 자유분방했고, 비례도 안 맞고 멋대로였다. 엄마는 기존 화단이 요구하는 트레이닝을 소홀히 한 채 붓으로 마음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십 년 후, 칠순 때 엄마의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엄마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의 그림을 거저 달라는 사람은 많아도, 그것을 돈 주고 사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의 개인전 소식을 듣고 고향에서 마을 사람들이 관광 버스를 타고 단체로 구경을 오기도 하였다. 인근의 학교와 유치원에서도 학생들이 단체로 그림을 보러 왔다. 고향 마을 사람들이, 일가 친척들이 엄마의 개인전에서 기뻐하며 발견한 것은 바로 그들이 잃어버린 고향의 풍경이었다. 엄마의 그림 속에는 우물가 펌프에서 물을 푸는 소녀, 장독대에서 항아리를 닦는 여인, 고추가 널린 마당,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 밭을 매는 아낙네.  사람들은 듣기 좋은 경기도 사투리저게 누구여? 저건 정미 아니여? 나두 저깄네!” 하며 웃고 떠들었다. 나는 타국에서 공부하느라 엄마의 전시회에도 가보지 못했다. 나중에 엄마의 행복한 자랑을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 귓가에는 내 고향 마을 사람들, 이제는 머리가 허옇게 센 그 아재비들, 오라비들,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엄마의 그림 속에 그들이 살아 있으므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

 

 

 

 

그림 속의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엄마 환상 속의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어린 시절 꼭 입어보고 싶었던 드레스인지도 모른다. 혹은 엄마와 친구처럼 자라난 조카들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분명 어린 시절 친정 집 마당에서 놀던 것을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 속의 소녀는 엄마가 아니고 내 언니 인 것 같다. 언니는 늘 빨강 치마를 입었으니까.  그리고 언니 옆에 살구색 옷을 입고 있는 소녀가 나 일거라고 생각한다.  언니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하니까.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여성이라면 분명 그림 속에 자기 자신을 대입 시킬 것이다. 아니면 엄마나 이모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엄마의 그림은 원근법이나 비율도 맞지 않고, 제멋대로 그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졸음 같은 평화를 느끼고, 내 귓가에 나직한 언니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샘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샘물은 내게 속삭인다, “너도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리라…”

 

엄마의 그림과 모세 할머니의 '그림 이야기'속에 나오는 소녀들이 어쩐지 닮아 보인다. 초록색과 빨간색을 즐겨쓰는 모세 할머니 그림의 색감과도 비슷하고, 특히 빨간 드레스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비슷하다. 내가 모세 할머니의 달력 그림을 무심코 집어 들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이미 그런 그림에 친숙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방에서 모세 할머니의 책을 발견하고 덜컥 정가를 다 주고 샀을때도 나는 아마 어떤 '꿈'속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내 꿈은, 엄마의 그림속의 세계였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은 엄마의 꿈의 세계와 닿아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교육'에 물들지 않은 천진한 영혼들만 가질 수 있는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Lee Eunmee

 

 

Grandma Moses 모세 할머니: Anna Mary Robertson  (September 7, 1860 – December 13, 1961)

 

 

달력 속의 추억

 

 

 

내가 2008년에 내 연구실에 걸어놓고 내내 들여다보던 달력은 Grandma Moses 라는 화가의 민속화 (folk art)로 채워져 있었다. 이 달력을 살 때만 해도 나는 작가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단지 열 두 달 달력에 채워진 열 두 장의 그림들이 어쩐지 낯익고 정겨웠다. 분명 미국의 풍속화들인데 이상하게도 그 속에 채워진 사람들이 모두 내 가족, 내 형제, 내 고향 사람들처럼 보여졌으며, 그 그림들 역시 내 고모나 언니가, 혹은 내 친구들이 초등학교 시절 그림일기장에 그려 놓은 크레파스 그림들처럼 보였다. 그 정겨움 때문에 나는 달력을 골랐고, 그 달력은 그렇게 몇 달을 나와 함께 보냈다.

 

그 해 4, 나는 워싱턴 디씨 시내에 있는 국립 여성 미술관 (National Museum of Women in the Arts)에 들렀다가 그 곳 뮤지엄샵에서 아주 아름다운 미술책 한 권을 발견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친숙한 그림들. 그 책을 살 때 까지도 나는 그 책 속의 화가와 내 달력 속의 화가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 달력과 그 책에 소개된 그림의 화가가 모세 할머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 나의 무신경과 둔감함이라니. 매일 달력을 쳐다보면서 따뜻함을 느꼈던 내가, 정작 화집을 사놓고도 작가의 이름조차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니. 이런 사연으로 2008년 한 해를 나는 모세 할머니의 그림을 보며 살게 되었다. 

 

빨간 드레스의 추억

 

 

 

1864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이 국가적인 공휴일로 제정된 바로 이듬해, 소녀 씨씨(Sissy)에게 아버지는 약속한다, 마을에 가서 빨간 드레스를 사다 주겠다고. 어린 씨씨는 온종일 아버지가 돌아 오시기만을 기다렸으리라. 그런데 아버지가 마을에 나가보니 마침 휴일이라서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꼬맹이 딸을 위하여 조금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가서 약속한 대로 빨간 드레스를 한 벌 샀다. 정확히 빨강은 아니고, 벽돌 색이나 황토색에 가까웠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딸에게 한 약속을 성실히 지켰다. “결국 나는 내가 빨간 드레스라고 생각했던 그 옷을 입어보지 못했지 (So I never got what I call a red dress).” 이제 파파 할머니가 된 소녀 씨씨는 그렇게 그 빨간 드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소녀는 빨갛지 않은 빨간 드레스를 받으며 실망스러워도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리라. 우리 삶은 늘 그런 식이 아니던가?

 

 

내가 꼬맹이 이던 시절, 할머니는 늘 나를 남자아이 같은 상고머리로 만들어 놓았고, 내게 주어지는 옷은 늘 파란색 이었다. 내 바로 위의 언니는 늘 머리를 길게 기르고 곱다란 빨간 리본을 하고, 빨간 주름치마를 입고, 빨간 스타킹을 신고, 빨간 운동화를 신었다. 나는 늘 파란 옷을 입었는데, 심지어 내게 주름치마를 입힐 때 에도 그 주름치마 역시 파란색이었다. 지금도 언니와 내가 손을 잡고 고향의 연못 앞에서 나란히 서 있는 흑백 사진이 있는데, 그 흑백 사진 속의 언니와 나의 옷 색깔은 그저 짙은 회색처럼 보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옷들의 색깔을 기억한다. 나는 늘 파랑이었다. 혹은 남색이었다. 그것은 아들 욕심이 많았던 할머니가 첫째로 아들 손주를 맞이한 후에, 둘째로 손녀를 보고, 그리고 나서 셋째로 나온 것이 또다시 손녀딸이 되자 초조함을 느끼고는 다음엔 손자녀석을 볼 욕심으로 셋째인 나를 사내놈처럼 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나는 사내동생을 보았다. 사내동생을 본 후에도 나는 여전히 파랑이었다. 어느 해에 내가 부모님과 떨어져서 할머니 품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영문도 모르고 할머니 품에 맡겨진 나는 세상 근심 없이 뛰노는 듯 했으나, 해가 질 때마다 서럽고 그리운 마음에 집 뒤에 숨어서 혼자 울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에서 엄마가 다니러 오면서 내게 남색 스웨터를 하나 사다 주셨다. 엄마와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동네를 쏘다니다가 흙 강아지가 되어 나타난 나에게 그 남색 스웨터를 머리에 씌워 입혀주셨다.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입어도 맞을 정도로 아주, 아주 커다란, 짙은 하늘같이 푸르딩딩한 스웨터였다. 그리고 아주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진땀이 났다. “엄마, 나도 이제 서울 가는 거지?” 나는 엄마 품에 매달려 강아지처럼 꼬리를 치며 놀다가, 그 남색 스웨터를 동네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자랑을 하기 위해 마당 밖으로 나갔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내 또래 아이들에게 서울에서 엄마가 왔으며, 이렇게 좋은 스웨터를 엄마가 사왔으니 이제 나는 서울에 갈 거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가 으스대며 집 안 마당으로 들어서니 툇마루의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울고 떼를 쓸까 봐 나 몰래 혼자 서울로 가버리셨던 것이다. 나는 집 앞 한길 가, 흙먼지 날리는 그 길가에 앉아 해가 지도록 꽥꽥대며 울었다. 어린 시절에 여러 가지 가정 사정으로 식구들과 떨어져서 할머니 댁에서 얼마가 지내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는 성장의 과정일 것이다. 내 이웃에도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아이들이 있었고,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모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 이었으므로 대개들 큰 상처 없이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지나간다. 우리 엄마는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그 위로 세 명의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기가 힘이 들었으므로 할머니가 나를 그냥 좀 맡아서 돌봐 주신 것뿐, 그 속에 비극적 가정사가 숨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말없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하곤 한다.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해가 지도록 흙먼지 이는 길가에서 혼자 꽥꽥대고 울고 있던, 철 이른 털 스웨터를 입고 진땀을 내며 울고 있던 아이가 하나 살고 있다. 나는 그 아이를 달래 줄 방법을 잘 모른다.

 

모세할머니는 그이가 씨씨였던 시절, 그 소녀시절에 가져보기를 열망하였으나 영원히 가질 수 없었던 그 빨간 드레스를 죽을 때까지 기억에서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빨간 드레스, 빨간 코트를 입은 여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모세 할머니의 빨간색을 볼 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파란 멍처럼 각인된, 나의 파랑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주디스 아줌마가 오셔요

 

 

 

내가 갖고 있는 Designs on the Heart 표지 그림에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겨울 풍경이 담겨있다. 이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각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헤아려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이다. 물동이를 나르는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내가 어린 시절에 우리 집 뒷마당에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우물이 없는 집에서는 우리 집으로 물을 푸러 왔었다. 이웃집에는 앞마당에 우물이 있었지만 그 집 떠꺼머리 총각은 우물물을 푸는 대신에 벌컥벌컥 펌프질을 하여 물을 퍼다가 자기네 집 부엌 가마솥에 붓곤 했다. 그것이 한결 빠르고 속이 시원했기 때문 일 것이다.  눈썰매를 타는 사람도 있고, 눈 속에 뛰어다니는 개도 있다. 어디론가 바삐 가는 사람도 있고,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책 속에 특히 내 눈길을 끄는 그림이 있다. “주디스 아줌마가 오셔요Here comes aunt Judith” (1946)라는 제목이다. 아마도 모세 할머니는 그이가 씨씨로 통하던 어린 시절, 멀리서 찾아온 친척 아줌마, 이모, 혹은 고모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주디스 아줌마를 발견하고 달려갔을 것이고, 주디스 아줌마는 네가 씨씨로구나! 그 사이에 아주 많이 컸는걸!” 하며 반겼을 것 같다. 이 그림을 보면 그림 속의 아이는 씨씨가 아니라 나 자신인 것도 같다.  주디스 아줌마는 내 고모들이다. 우리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서 늘 큰언니처럼 우리와 함께 뛰놀며 우리를 감싸주던 작은 고모들 같다.

 

모세 할머니

 

 

 

모세 할머니는 1860년에 태어나 1961년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장장 101년을 이 지구별에 머무르다가 떠났다. 1세기를 넘게 산 모세 할머니. 그이의 본명은 Anna Mary Robertson 이다. 그는 뉴욕주 (New York) 의 농민의 딸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열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에 다섯 명의 자식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Anna Mary 를 씨씨(Sissy)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집에서 가사를 도우며 학교에 다니던 씨씨는 열 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큰 마을의 어느 집으로 일을 하러 떠난다. 말하자면 식모살이를 하러 떠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미국의 농촌에서는 아이들을 어디론가 일하러 보내는 것이 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나도 자라나면서 내 고모 또래의 마을 처녀들이 도시로 식모살이를 하러 야반도주 하거나, 혹은 결국 버스 차장이 되거나 (후에 안내양 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안내양 이후에는 버스 안내양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에 생긴 공장에 공원으로 취직하는 광경을 익히 보아왔다. 내 고모들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전자회사 공원으로 일을 하러 갔다. 그때는 공순이, 공돌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나와 함께 태어나 자라난 고향의 친구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보퉁이 하나를 챙겨가지고 엄마와 함께 상경했다. 그 모녀는 서울의 우리 집에서 하루를 지내야 했는데, 언니와 내가 함께 쓰던 방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그 친구는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하는 언니와 나를 열적게 쳐다봤다. 그 친구는 미아리 어느 약국 집에 식모살이를 하러 갔다. 그 친구는 한스러워 하거나 억울해 하지도 않았다. 그는 착실히 식모살이를 했고, 덕분에 시골집에서는 그 돈으로 오라비 고등학교에도 보내고, 송아지도 사서 키우고, 집안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들은 슬퍼도 슬픈 내색 없이 살기 위해 살아갔다.

 

씨씨는 성장하면서 이집 저집으로 흘러 다녔다. 어느 집에서는 씨씨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해주었고, 비록 일하는 아이였지만 가족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그렇게 흘러 다니며 살다가 역시 비슷한 환경에서 일을 하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청년의 성이 모세 (Moses)라서 결국 Anna Mary Robertson Moses 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모세 할머니라는 별명은 남편의 성 때문에 붙여지게 된 것이다.

 

결혼한 씨씨는 평생 동안 여염집 아낙처럼 부지런히 일하며 살았다. 그이는 근면한 사람이었다. 아이들도 무탈하게 착하게 자라났다. 남편도 착하고 성실했다. 씨씨는 집안에서 수놓기를 즐겨 했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어 팔십에 가까워지자 눈이 침침해서 바늘땀을 잘 볼 수가 없었다. 혼자서 바늘귀를 꿰기도 힘들었다. 평생 즐겨오던 일인데 할 수가 없다니! 낙담한 그에게 그의 여동생이 바느질 대신에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제안을 했다.  바느질을 할 수 없어 심심해하던 모세 할머니는 팔순이 다 되어 붓을 들었다. 그리고 나무 판이나 종이 위에 수를 놓듯, 마음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형상화 해 나갔다. 추억 속의 사람들이 모세 할머니에게 다가왔다.

 

 

  다음회에 계속 ...

 

설마 신종플루는 아니겠지, 고열을 동반한 감기 증상 때문에 스스로 가족들과 격리되어 방구석에서 약먹고 자고, 약먹고 자며 보내는 시간. 음 약기운에 잠이 들곤 했는데, 잠 오는 약을 먹어도 잠이 안와서 난감. (내참, 감기때문에 글을 쓰고 있다니.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후에 역사책을 일필휘지로 날렸다고 하던가.)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