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Walking2011. 11. 25. 10:24

올가을 프로젝트,  장거리 여러번 해서 백마일 걸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을 오늘 마칠수 있었다.  원래는 20마일 걷기를 다섯번 해서 백마일 채우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렇게는 못했고, 20마일은 세번, 나머지는 10, 15 뭐 이런 식으로 했다.  오늘 찬홍이와 20마일 할 생각이었지만, 찬홍이가 학교에서 풋볼하다가 무릎을 다쳤다고 엄살을 떨어서,  그냥 무리하지 않고 15마일로 마무리 했다.

오늘 코스는 하퍼스 페리 시내에 차를 세워놓고, 다리 건너서 61마일 지점에서 68 마일 지점까지 왕복 (7x2=14)하고 다시 하퍼스 페리 시내로 돌아가는 15마일 거리였다.

이로써 나는 체사피크 오하이오 수로길을 워싱턴 디씨의 시작점에서부터 68마일 거리까지 내 두발로 걸은 셈이다. 지난 봄에 50킬로미터 걷기의 마지막 지점이 하퍼스 페리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길이 늘 궁금했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 '너머' '미지의 세계'를 가 볼수 있어서 소원 한가지를 풀은 기분이었다.  나는 여태 몰랐는데, 하퍼스 페리 너머, 북쪽으로 올라 갈수록 수로변 강의 풍경이 절경이 되더라....  기가 막히는 절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전 열시반에 하퍼스페리에 도착하여 걷기 시작.  오후 다섯시에 다시 차 세워 둔 곳에 돌아왔다.  중간에 앉아서 다리쉼도 하고, 여유있게 걸었다.



(아래)  셰난도어 강과 포토맥강이 만나는 지점 (하퍼스 페리가 두 강이 만다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오늘의 걷기 출발.



하퍼스페리의 상징과도 같은 철교를 지나 (저 건너 하퍼스페리 마을이 보인다)




반마일쯤 가다보면, 이런 수로변 마일 표시를 만나게 된다. 61마일.


지난 며칠간 날이 흐리고 비가 왔기 때문에 강에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파도소리같은 물소리가 났다.  흑탕물같은 강물이 거침없이 막 쏟아져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 아, 아이스 카페라테 같구나...했다.





62마일 포스트.



그런데 상류로 올라가면 강이 호수처럼 고요해진다.
내가 발견한 현상.  강이 호수처럼 고요해보이는데, 강물에 나무기둥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 내가 달리기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떠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물이 흐르는 속도가 엄청 빠른 것인데, 육안으로는 마치 고여있는 호수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고요해보이는 강을 한참 내려다보고 걸으며 생각했다. 

-- 정말 너르고 큰 강은, 물이 아무리 거칠고 세게 흘러도 저렇게 호수처럼 평온해보이는구나.  수로쪽 개울은 얕은데도 돌돌돌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데 저 큰강은 오히려 물이 깊고 넓고 빨리 흐르면서도 소리가 없구나.   저렇게 크게 움직이면서도 고요할수 있는 인품을 키운다면 좋겠다.  어떤 일에도 호수처럼 고요할수 있는 평정심을 키우면 좋겠다.







수문 근처에는 반드시 수문 관리인의 사택이 있는데, 물론 지금은 인적이 없는 기념물에 불과하다.  나는 이 빈집을 지나칠때면 늘 똑같은 생각을 한다: "저 집에서도 한때는 온가족이 모여서 웃고, 떠들고, 저 안에서 애도 태어나고, 누가 죽기도 하고 그랬을텐데...."  늘 같은 생각에 잠겨서 수문관리인 주택을 지나치게 된다.

수로 근처에는 이렇게 버려진, 혹은 허물어져가는 건물들이 남아있는데,  빈집이나 허물어져가는 건물의 흔적들이 보이면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한다.  나는 허물어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강박증적인 집착을 보이는것도 같다.  거기 살던 사람들이 웃음소리가 들리는것도 같고.  자꾸만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이다.






68마일 포스트에서 반환.




저기, 아직 내가 걷지 못한 길이 이어져 있고, 저기 길이 남아 있어서 나는 안심이 된다.



아까 지나쳤던 작은 집 앞 계단에서 쉬면서 뜨거운 커피.




물에 허리까지 잠긴 강변의 나무들.



오늘 나의 동행이 되어준 나의 귀냄이.




산골에는 저녁이 빨리 찾아온다. 저만치 철교가 보인다. 저 다리를 건너 다시 하퍼스페리 시내로



추수감사절 휴일이라,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아 텅빈 유령의 도시 같이 고요했던 하퍼스페리.



오늘 날씨가 참 화창하고 따뜻하고 좋았다.  그래서 얇은 겨울 잠바 입고 간것도 벗고 나중에는 그냥 스웨터만 입고 온종일 걸었다. 선물같은 아주 예쁜 하루였다.  :-)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23. 20:5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4740

내가 태어나 성장한 용인의 고향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일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 마을 사람들은 저녁이면 남포나 호롱에 불을 밝혔고, 불을 때서 밥을 짓고, 쇠죽을 끓이며 살았다. 이곳이 집성촌이었으므로, 마을 사람 대개가 일가붙이였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내게 ‘시누님, 우리 아기씨’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우리 바로 윗집에는 우리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이 마을에 시집와서 평생 자매처럼 지낸 할머니가 살았다. ‘응굴’에서 시집와서 ‘응굴댁’인 그 할머니는 어쩌다 댁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날이면, 새벽이거나 저녁이거나, ‘언제나’ 미역국 한 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우리 집 안채로 달려와서 할머니를 찾았다. “정렬이 할무니, 오늘 우리 막내 생일이라 고기 좀 넣고 미역국을 끓였어유. 이것 맛이나 보시라고.” 할머니가 어느 날 그 미역국의 사연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해, 만삭으로 돌아다니던 응굴댁이 며칠 보이지 않아 올라가 들여다보니, 며칠 굶은 산모는 혼자 애를 낳아 제 손으로 탯줄을 끊어 애를 안고 누워있는데, 먹을 것이 없어 다 죽어가는 얼굴이라. 내가 얼른 미역 한 꼬리를 갖다가 국을 끓이고, 쌀을 퍼다 쌀밥을 지어 뜨거운 국물에 먹이니 산모가 그제서야 살아나더라. 그 후로는 저이가 수 십 년을 미역국만 끓이면 이렇게 한 그릇 떠갖고 내려온다.” 지금은 내 할머니도, 응굴댁 할머니도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두 분은 천국에서도 서로 오가며 미역국을 나누실 것이다.

 1984년 겨울, 휴가를 나온 박 상병은 이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충치로 고생이었지만, 변변한 치과 치료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부대에서도 고통을 호소하면 진통제나 처방해 주는 정도였다. 너무나 괴로웠던 박상병은, 집 근처, 어느 치과에 들어섰다. 그는 무작정 충치 치료를 부탁하며, 자신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설명했다.

휴가 며칠간 그는 치과에 드나들며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충치 치료를 받았다. 휴가가 끝나갈 무렵 서둘러 치료를 마친 치과의사가 박상병에게 말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게. 내게 치료비 갚을 생각은 하지 말고, 나중에 어려운 사람 보이거든 도와주게.” 지금은 중년이 된 그 사람은, 가끔 그 치과 의사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진다. 이따금 듣는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도 모두 운다. 박 상병이었던 그 사람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나의 큰 시동생이다.
 
6년 전,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개미에게 발가락을 물렸는데, 물린지 30분도 안되어 얼굴과 몸이 붓고, 현기증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갑자기 죽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놀란 나의 아이들이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어느 한국인 아저씨 댁이었다. 아이들은 무작정 그 댁 문을 두드리고 “우리 엄마가 죽어요!” 하고 알렸고, 아이들의 설명을 들은 그는 한달음에 우리 집으로 왔다. 그의 손에 알러지 치료제가 한 뭉치 들려 있었다.

그는 약 한 움큼을 내게 먹이고, 급성 알러지 현상으로 보이니 이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면 계속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지 않으면 응급차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개미 독으로 죽은 사람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처치 약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기다려 내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 생명을 살렸고 졸지에 고아가 될뻔한 내 아이들과 가족을 살렸다. 그분은 자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지금 기억할까?

 내일은 ‘땡스기빙 데이 (Thanksgiving Day)’. 우리 주위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 내가 오늘 온전히 살아 있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베풂이 있어 가능한 것이리라.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내가 잊고 지내던 고마우신 분들께, 예쁜 꽃 카드라도 정성껏 만들어 부쳐드리리라 하고 다짐을 해본다.


2011,11,23 (수)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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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응굴댁 할머니와 관련된 에피소드 한가지 추가:

그 응굴댁 할머니는 평생동안 우리집을 자기집처럼 임의롭게 드나드셨는데,  웃기는 일이 뭔가하면, 우리집에서 기르는 개들이 응굴댁 할머니만 대문에 들어서면 으르렁대고 짖어댔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사랑채에 있는 바깥대문 앞 나뭇광이 침실이었다. 거기 짚을 쌓아주면 포근한 짚에서 지낼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놈들이 대문 앞을 지키고 살면서 응굴댁 할머니만 나타나면 사납게 으르렁댔다.  그러면 응굴댁 할머니는 개의 목줄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개를 피해서 지나곤 했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서울 식구가 어쩌다가 나타나도 좋아서 퍽펄 뛰곤 했다.  그러니까 일년에 서너차례 내가 나타나도 나를 보면 좋아서 이리뛰고 저리 뛰면서 나를 핥고 난리를 떨었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는 일년에 몇차례 나타났다 사라지는 '손님'이고, 응굴댁 할머니는 늘 그곳을 드다느는 식구같은 존재이건만.  개는 '내식구'와 '남의식구'를 정확히 구별해서 행동했다.

우리집 개들은 어떻게 그렇게 어쩌다 한번 오는 식구들을 알아서 반기고, 아웃사촌들을 '남'으로 규정을 하게 된 것일까?
Posted by Lee Eunmee
Diary/Walking2011. 11. 20. 06:00

어제는 내 친구와 만나서, 베데스다까지 걸어갔다 왔고 (거기 커피하고 베이글 샌드위치가 너무 너무 맛있어서, 다음에 내 친구하고 또 가서 그것 먹을거다.  가격은 저렴하고, 맛은 황제급이다.  한국의 김선배가 있었다면 너무 너무 좋아하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선배께서는 귀가 무척 근질거리셨을 것이다.)

어젯밤에, 찬홍이를 데리고 왔다. 찬홍이가 감기를 앓고, 뜨거운 밥에 김칫국 그런거 먹고 싶다길래, 다음주에 추수감사절 휴가때 어차피 올거지만, 주말에 데려다가 김칫국하고 밥 해먹이려고 데리고 왔다.

오전에 느지막히 일어나 찬홍이를 데리고 오랫만에 함께 조지타운에 나갔다.  우리는 조지타운에 브런치를 먹으러 가기 위해서 3.5마일을 걸어가고, 그거 한끼 먹고 다시 3.5 마일을 걸어온다.  찬홍이에게 조지타운 하버에 새로 열린 공원을 보여주었다.  날씨가 화창해서 걷기에 아주 좋았다.  조지타운 거리의 상점들을 기웃거리고 구경을 하고, 문구점에 들러서 카드용지를 사기도 했다.  카드용지가 다 떨어져서 카드를 못 만들고 있었는데, 이제 만들어서 소중한 분들께 카드를 보내드려야지.





키브리지 아래, 보트 하우스의 암초록색 나무 벽 앞에서.



조지타운 하버에 새로 개장한 공원이 참 아름답다. 내 친구가 아직 못 봤을거다. 함께 가서 보여줘야지.




저기 키브리지가 보이고, 다리 건너 알링턴 시내 고층 건물들이 보이고. 



강에 바로 이어지는 계단.  저 멀리 케네디 센터와 동그란 워터게이트 빌딩.




강물이 계단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사진 속에서는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 처럼 강물이 계단보다 높아보인다.  초현실적 조작된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카페에서 커피와 브런치를 먹었다.  오랫만에 찬홍이하고 얘기하면서 걷고, 먹고 그러니까 참 좋다. 난 내 아들이 아주 친한 친구같다. 말이 잘 통하는 친구.



Urban Outfitters 에 구경 갔다가 엘모 장갑을 발견하고, 끼고 놀아봤다. 그런데 한켤레에 40달러인가 해서, 비싸서 사지는 못했다. 참 예뻤다.



황금빛 나무 밑으로 내 친구 찬홍이가 걸어간다. 내 작은 백팩을 녀석이 매니까 정말 고목나무에 매미 매달린 꼴이다.  나 혼자 지내면서 심심하다거나 쓸쓸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는데, 찬홍이가 오니까 무척 재미있고 즐거워지면서, 내가 혼자 보낸 시간이 참 쓸쓸했던것 같다는 자각이 들었다.  혼자 있을땐 심심한걸 모르고 잘 놀고 잘 사는데, 찬홍이가 오니까 내 시간이 곱절로 빛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 어쩌면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모두 외롭다.)  이런 자각도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다음주, 추수감사절 휴가 기간에 좋은 날 하루를 잡아서, 하퍼스페리부터 20마일을 걷는 프로젝트를 찬홍이와 함께 하기로 했다.  찬홍이가 함께 걸어주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착하고 고마우신 나의 귀냄이.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17. 00:2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0295

강준만씨가 최근 펴낸 ‘강남좌파: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2011)’는 한국 사회에서 ‘강남 좌파’라는 신조어가 갖는 위상과 의의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며 조국,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을 그 대표적인 ‘왼편’에 그리고 소위 ‘강남 우파’라 할 만한 오세훈, 박근혜의 행보를 대별하여 스케치하고 있다. 올해 7월에 발간되어 인쇄를 거듭하고 있는 이 책이, 몇 달 후에 태어났더라면, 저자는 아마도 수 백 만원 월세를 내고서라도 셋방살이를 ‘강남’에 고집했던 박원순씨나 그를 지원했던 안철수씨를 왼편에, 강남의 고액 피부 클리닉을 드나들었던 나경원씨를 우편에 배치하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보게 된다.

 강씨의 해설에 의하면 ‘강남 좌파’란 ‘고학력, 전문직, 화이트 칼라 중산층이면서 진보적 발언을 하는 이들로 기존의 좌파가 노동자 단체를 주요 지지 세력으로 하는 것과 차이가 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더라도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하지 않고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강남 좌파’가 유독 21세기의 한국 사회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서, 다른 나라에도 명칭은 다르지만 비슷한 집단이 존재한다. 일단, 미국에는 ‘리무진 리버럴(limousine liberal)’이 있다. 리무진이나 개인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의 부유층이면서 진보적 발언을 하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보이되 소형차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공공교육을 주장하고 지원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은 사립학교에 보낸 민주당의 테드 케네디 같은 정치지도자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사실 나는 오바마 대통령의 팬이지만, 그가 워싱턴DC에 입성하면서 그의 두 딸을 공립학교가 아닌 상류층 자녀들만 다니는 사립학교에 보냈을 때 약간 실망했었다. 워싱턴DC의 공립 교육이 열악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대통령의 자녀가 다니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겠지만, 그가 공립학교 쪽으로 결단을 내려줬다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비슷한 개념으로 영국에는 ‘샴페인 사회주의자(Champagne Socialist)’가 있고, 러시아에 ‘샴페인 볼셰비키(Bollinger Bolshevik)’, 호주와 뉴질랜드에는 ‘샤도네이 사회주의자 (Chardonnay Socialist)’가 있다. 대략 빈민, 노동자 계급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고급 음료 ‘샴페인’이나 ‘샤도네이 백포도주’를 즐기는 것과 같은 모순점을 지적하는 별칭이다. 독일에는 ‘토스카나 파(Toskana Fraktion)’가 있다. 여름휴가를 토스카나에서 즐기는 좌파를 지칭하는 말이다. 프랑스에는 ‘캐비아 좌파(Gauche Caviar)’가 있다. 고급 상어 알 요리를 즐기는 좌파라고 비꼬는 표현이다. 네덜란드의 ‘살롱 사회주의자(Salon Socialist)’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고고한 나머지 주로 살롱에 앉아 사회주의를 논하는 데 그치고 만다는 것을 풍자한 것이고, 폴란드의 ‘커피숍 혁명가’는 사회주의를 논하긴 하지만 빈민층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중상류층 식자들을 비꼰 것이다.

 전체적으로 ‘강남 좌파’를 비롯하여,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표현들은 대개는 먹고 살만한 지식인들의 좌파적인 언행과 그에 부합하지 않는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냉소적인 표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남 좌파’는 이제 그 개념이 초기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서서히 중립적인 이미지로, 심지어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이미지로 진화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사회가 다양화되어 가고 있고,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닌 21세기에, 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사회에서 좌파에게만 순결주의적 자기희생이나 도덕성을 묻거나 요구하는 것 역시 모순 일 수 있다는 뜻이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좌파나 우파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 좌파적으로 혹은 우파적으로 판단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강준만씨는 이 책에서 좌파나 우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내게 보여준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내 오른손과 왼손이 아닌가?


2011,11,16 이은미


박원순씨 서울시장 취임식을 유튜브로 보면서, '아하!' 그 사람의 방법을 파악했다.  이분이 '뭐 공약이 뭐냐고 묻는데, 공약이 별건가요. 이렇게 서울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희망사항을 잘 꾸려나가면 되는거 아닌가요 (기억나는대로 정리)' 라는 대목이 있었다.  시장선거중 상대편이었던 나씨가 청사진을 제시하며 조목조목 따지고, 박씨한테 당신도 이런걸 제시하라고 몰아 붙일때, 박씨가 좀 어벙하게 대꾸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살림을 꾸려나가겠다 이거다.

가령 지도자가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제시하고 남들에게 따라오라고 제안하는 방식은 Top-down Process, 지도자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 나가는 방식을 Bottom-up Process 라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탑다운으로 리드를 하면서 자신의 시선을 낮추겠다고 말했고, 한 쪽에서는 큰 그림 제시 없이 밑바닥 정서부터 훑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 말하자면, Empowering Evaluation 기법이라는 것인데,  Fetterman 이라는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가 열정적으로 여러나라 지방도시에서 직접 실연을 하던 방법이기도 하다. 도시나 커뮤니티에서 뭔가 계획을 세울때, 구성원들이 모여서 가장 필요한 것을 정하고 순번을 정하고 실행 방법을 정하고...  왜 Empowering Model (Empowerment Evaluation)이라고 하는가 하면, 구성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구성원들이 주체가 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지.  박시장도 '여러분이 시장이고 제가 시민입니다'고 설명을 하는데, 바로 시민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법을 그가 서울에서 현재 실천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몇해전에 Empowerment model 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모델을 짜면서, Fetterman 교수에게 메시지를 보냈을때, 그는 동영상으로 즉시 답신을 보내 올 정도로 그가 하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이런 일이 열정 없이는 참 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이제 좌파니 우파니 하는 말은 어쩌면 걸핏하면 아무한테나  '빨갱이' 소리를 내지르는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언어가 될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WednesdayColumn2011. 11. 9. 22:1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95940

http://www.imdb.com/title/tt1268799/

지난 주말 우리의 친구 ‘해롤드와 쿠마’가 크리스마스 캐롤과 함께 우리 곁에 돌아왔다. 2004년 ‘해롤드와 쿠마, 화이트 캐슬에 가다(Harold and Kumar Go to White Castle)’에 힘입어 2008년에 나온 2편, ‘해롤드와 쿠마, 관타나모를 탈옥하다 (Harold and Kumar Escape from Guantanamo Bay)’에 이어 3년 만에 이들의 크리스마스 에피소드가 나온 것이다. 특히 이 영화에는 한국계 배우인 존 조 (John Cho)가 주인공 해롤드로 나와서 한국인에게는 더욱 친밀감을 준다.
 
3편에서 ‘엄친아’인 해롤드는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되어 있고, 쿠마는 여전히 사고를 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소동은 시작된다. 성인물답게 포르노그라피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도처에 깔려있고, 도저히 남녀노소 온 가족이 손잡고 영화관에 가서 볼 만한 작품은 아니다.

주말의 영화관에도 주로 20대 젊은이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영화의 1편, 2편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3편은 어쩌면 그저 황당한 얘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딱히 전작을 찾아 보지 않더라도, 3편 자체만으로 한나절 유쾌하게 웃고 지나갈 성인물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나는 사회언어학 수업이나, 문화 관련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해롤드와 쿠마’ 시리즈 1편, 2편을 보고 감상문을 작성하라는 숙제를 내주거나, 영화의 일부를 보고 함께 토론을 할 때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도계 미국인인 쿠마와 한국계 미국인인 해롤드이고, 영화에는 미국의 이민자 사회나 혹은 소수 문화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지뢰밭처럼 깔려 있다.
 
가령 2편에서는 해롤드와 쿠마가 관타나모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탈옥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때 미국 정보국에서 해롤드의 가족과 친지를 심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계 미국인인 해롤드의 부모에게 수사관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한다. 해롤드의 부모가 한국계이니 영어가 안 통할 거라고 미리 판단한 것이다. 해롤드의 아버지가 “나는 미국에서 수 십년간 살아온 미국인”이라고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해도 수사관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그가 ‘이상한 한국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계는 영어를 못 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고정관념, 영어로는 스테레오타입 (stereotype)이라고 한다.
 
이들이 유태계 미국인을 심문할 때는 동전이 가득 든 주머니를 잘랑잘랑 소리나게 흔들어댄다. 유태인들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 돈 소리를 내면 모든 것을 자백할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공항이나 비행기 안에서 쿠마는 필요 이상으로 의심을 받는다. 그가 유색인종이고, 아랍계 사람들과 비슷한 용모라서 무조건적인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3편에서는 쿠마가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성공한 해롤드의 집에 도착했을 때 해롤드를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쿠마의 친구가 말을 한다. “난 네 친구 해롤드가 백인일 거라고 상상했어.” 해롤드라는 이름, 그리고 성공한 비즈니스맨을 조합하면 백인이 어울리는 것이리라. 해롤드가 결혼한 남미계 부인의 가족이 등장할 때 한 마을 사람 모두가 온듯한 장면 역시 사실은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다문화 다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미국 사회에 뿌리깊게 깔려있는 인종, 문화에 대한 소소하고도 질긴 편견들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에 깔려 있는 이런 ‘편견 코드’를 얼마나 속속들이 읽어 내느냐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관건 일수도 있겠다.
 
이태 전, 학생들에게 이 영화 속에 깔려있는 편견들을 찾아보라는 숙제를 내 준 적이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현재 살고 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인의 삶 속에 스며있는 각종 편견의 요소뿐만 아니라, 자신이 안고 있는 편견의 덩어리들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으리라. 그런데 영화가 난잡해서 눈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는 평도 있었다. 성인물 코미디 해롤드와 쿠마, 그들이 있어 유쾌한 인생이다.

2011,11,9 이은미

아, 또 보고 싶다. 나중에 추수감사절에 찬삐 집에 오면 둘이 같이 가서 조조할인으로 또 봐야지~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