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09. 10. 12. 03:36

 

 

 

 

해마다 가을이면 버지니아에서는 인근 과수원으로 소풍을 간다. 사과밭을 찾아가 실컷 사과를 따가지고 값을 치르고 오면 되는 것이다.  과수원도 제각각이라 '기업형'으로 크게 과수원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곳도 있고, 그냥 시골 과수원에서 광고도 없이, 동네 사람이 오면 사과를 파는 곳도 있고 그렇다.  전에 플로리다에서 살때는, 초가을에 포도를 따러 다녔고, 가을이 오면 시월이 되면 단감을 따러 가서 배가 터지도록 단감을 따 먹고 들통 가득 사가지고 오곤 했었다.  돈없는 유학생들에게도 그 단감이 가격이 매우 싸서, 주말에 감밭에 가면 인근의 학생들이 모두 모여 그자리에서 단합대회를 할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도 플로리다에 가면 학생들이 단감을 따며 깔깔 댈 것이다. 그 감밭이 그립지만, 버지니아에서는 감밭을 찾을 수가 없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남겨두고...우리는 흘러간다.

 

지난 두해 가을동안 나는 웨스트 버지니아의 큼직한 사과밭에 가서 사과를 따 왔었다. 사과알이 크고 탐스러웠고, 하루 소풍장소로 좋을 만큼 다른 오락시설을 갖춘 곳이기도 했다.  올해에는 학교에서 학생이 새로운 장소를 알려준다. 시골 할아버지네 과수원인데, 약도 안치고 비료도 안주고 그냥 자연상태에서 사과가 열리는 곳이라 알이 작지만 단단하고 그리고 아주 달다고 가르쳐준다.  사과 값도 한참 싸다고,  학생이 맛보라고 갖다준 사과가 하도 싱싱하고 달길래, 주소를 받아놨다가 오늘 가 보았다.  집에서 65마일 거리. 천천히 운전해도 한시간 반이면 되겠다.

 

 

주소지를 찾아가보니 별유천지 비인간 (別有天地非人間)이었다. 한마디로, 사람이 없었다.  일요일 오전이라 주인은 예배당에 갔는지 농장이 텅 비어있는채로 안채의 문이 잠겨있고, 창고문은 그대로 열려있다. 창고문에 사과따는 도구가 나란히 세워져있고, 볕이 가득한 창고 안에는 사과상자도 놓여있고.  내학생이 내게 이르기를 사과는 배가 터지게 먹어도 되고, 사과를 상자에 담아가면 되는데, 많건 적건 한상자에 14달러라고 했었다. 기웃거리며 주인을 기다리다가 도통 인적이 없길래, 차를 마당에 세운채로 작대기와 들통을 들고 사과밭에 가서 사과를 땄다.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 왜 푸른 산중에 사느냐고 물어봐도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대답없이 빙그레 웃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복숭아꽃 흐르는 물따라 묘연히 떠나가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에 있다네.

 

임자는 어디가고 창고 문만 환하게 열려있는 사과농장

 

 

(사진들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내집처럼 창고에서 들통 하나를 꺼내 들고, 사과 작대기 세워 놓은 것 하나 들고, 사과를 따러가세 사과를 따러 가세, 태초의 아담처럼 사과를 따러가세, 태초의 이브처럼 사과를 따러가세

 

 

 

 

사과나무들이 줄지어 선 언덕

 

 

뜰앞에는 코스모스도 피어있고요~

 

 

 

무농약, 무공해, 버지니아 사과를 팔아요, 사과를 팔아요~

An apple a day keeps a doctor away~

하루에 사과 한알을 먹으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요, 버지니아 사과를 사세요~

 

 

 

 

시월의 햇살아래 익다 지친 사과는 툭~ 툭~  떨어져 쌓이고

 

사과밭 할아버지는 언제쯤 돌아오시려는지

 

 

정원에 굴러다니는 바구니를 문간에 갖다 놓고, 거기에 10달러 지폐를 하나 눌러놓고 사과밭을 떠나다.  한상자 다 안채웠으니까, 10달러만 놓고 갈래요~

 

 

 

 

피천득 선생의 시에 '꽃씨와 도둑'이 있다.

 

꽃씨와 도둑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 가야지

 

아무도 없는 사과밭에서 사과를 따 먹고, 사과를 따 모으고 놀다가 역시 빈 사과밭을 떠나며 피천득 선생의 시를 혼자 중얼거렸다. 가을에 와서 사과나 가져가야지...

 

집에 도착하여 메모지에 적힌 사과밭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할머니가 받으신다.  "내가 사과밭에 갔더니 아무도 없길래 잘 놀고, 사과 따가지고 오면서 10달러를 놓고 왔는데 보셨나요?"  전화가 너머에서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나고, 뭐라뭐라 묻는다.  버지니아 농민들의 사투리가 들린다. 아, 이분들 평생 이곳에서 사셨구나.  할아버지가 "Ten dollar?" 하고 외치는 소리가 난다. "Yes! I found it!" 그가 저만치서 외치는 소리가 난다.

 

할머니는 내 예상대로 아침에 예배당에 갔다가 조금 전에 왔다고 집이 빈 사정을 설명하고, 나는 덕분에 잘 놀았다고 인사를 한다.  시월 어느 일요일, 버지니아 셰난도 골짜기의 그 사과밭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열어놓은 에덴동산이었다.

 

p.s. 셰난도 골짜기는 모세 할머니가 18년간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살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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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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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과... 가 떨어져있는 풍경.. 우후...

    2009.10.12 10:19 [ ADDR : EDIT/ DEL : REPLY ]
  2. 사과가 떨어진 풍경을 보면, 어떤 이는 뉴튼의 '사과'를 떠올릴지도 모르는데, 저는 '박목월'시인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며 적은 싯귀중에서, '이곳은 사과가 떨어지면 툭 소리가 나는...' 이렇게 적은 부분이 떠올라요. 나의 이승과 아버지가 가신 저승의 차이를 사과가 떨어질때 툭 소리가 나는가 안나는가로 대별했지요. 그래서 사과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요. 사과가 떨어지면 '툭' 소리가 정말 나더라구요.


    툭... (아 나는 아직 살아있음)

    2009.10.12 12:24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