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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02 [칼럼] 고갱, 이야기가 있는 워싱턴의 봄날
WednesdayColumn2011. 3. 2. 20:38
워싱턴 디씨 내셔널 몰에 위치한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2월 27일부터 6월 5일까지 ‘신화의 창조자, 고갱(Gauguin: Maker of Myth)’이라는 주제로 고갱 특별전을 열고 있다. 지난 개관 일에 고교생 아들 녀석과 함께 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전시회의 개장과 관련하여 큐레이터의 특강도 있었는데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의 큐레이터이며 에딘버러 대학의 교수이기도 한 벨린다 톰슨 (Belinda Thomson)이 본래 고갱 전시회를 기획한 의도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Why are you angry?

이 전시회는 고갱이 전 생애를 거쳐서 회화, 조각,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궈낸 예술세계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고갱은 스스로를 ‘이야기꾼(teller of tale)’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작품들 속에는 신화적인 모티브가 풍성하다. 이 기획전은 고갱 개인의 신화, 프랑스 브리타니 지방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신화적 작품들, 남태평양 타히티 섬 지역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신화적 풍경들, 그리고 남태평양의 원시 신앙적 모티브 이렇게 크게 네 가지로 구성되었다.

고갱은 십자가의 예수 그림 속에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음으로써 가난 속에서 고통 받으며 예술작업을 하는 자기 자신을 순교자처럼 묘사를 한다거나, 구약에 등장하는, 야곱이 밤새도록 대천사와 씨름하는 상징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원시림 속에서 살아가는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낙원의 이브처럼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시종교적인 소재와 기독교적인 요소들을 회화나 조각에서 접목시키기도 하였다.

고등학생인 아들 녀석은, 고갱이 자화상을 꽤 많이 그렸고, 혹은 그림 속의 등장인물 속에 자신의 얼굴을 많이 끼워 넣은 것으로 보아 꽤나 자기 현시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는 평을 하기도 했고, 고갱의 그림에는 여자들이 주로 그려져 있고, 어쩌다 남자가 나오면 그것은 고갱 얼굴 같다는 독특한 평을 하기도 했다.

이 전시회의 작품들의 제목을 읽어보는 일도 유쾌한 놀이가 될 듯 하다. 가령 시무룩한 표정의 처자 곁에 마을 여인들이 다가오는 그림에 ‘너 왜 골났니?(Why are you angry?)’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가 하면, 두 처녀가 앉아있는 그림의 제목은 ‘너 언제 시집 갈거니?(When will you marry?)’다.

원시림 속에서 태평하게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의 풍경을 보면서, 그들의 말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제목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천국과 같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고갱은 먼 남태평양 원시림 속의 주민들을 그렸지만, 내게는 그이들이 앞개울에서 빨래를 하며 깔깔대던 처녀시절의 내 고모들 같기도 하고, 내 이웃 아주머니 같기도 하다. 고갱이 타히티의 삶을 그릴 때, 이미 그곳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었고, 고갱은 그리운 전설처럼, 혹은 신화처럼 주민들을 그렸다. 나 역시 이제는 ‘신도시’가 되어 아파트 단지로 뒤덮인 내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채 잊혀진 전설 같은 고향을 그리워할 뿐이다.

먼 남태평양의 주민들의 풍경을 보면서, 내가 고향을 떠올리거나 그 아름다움에 감동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작품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정서에 있다. 단순화된 선, 면, 구도로 이루어진 고갱의 작품들 속에는 그 단순성을 뛰어넘는,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그리움이 있다. 그것을 이 전시회의 기획자는 ‘신화’라는 표현으로 풀어낸 듯 하다.

우리는 가끔 여행지의 미술관에서 띄엄띄엄 고갱을 만난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 덕분에 워싱턴에서 고갱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다. 미술책을 통해서 한 작가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필 수는 있지만, 실제로 전시장에서 한 작가의 전 생애를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아무쪼록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어느 봄날 소풍 삼아 국립 미술관에 들러서 잃어버린 전설 같은, 혹은 깊은 우물 속의 신화 같은, 옛 동무들의 말소리가 들릴 것 같은 고갱의 그림들을 만나보시길. 입장료는 무료이나 우리가 얻는 감동은 값을 헤아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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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페이지: 스미소니안 잡지 3월 호에 고갱 특집이 실렸다.  해당 웹페이지에서 전시회 작품의 일부를 감상할수 있다.
http://www.smithsonianmag.com/arts-culture/Gauguins-Bid-for-Glory.html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