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들어낸 한장의 그림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가면, 엄청시리 커다란 풍경화 그림이 여기~ 여기~ 걸려있는데요. 저로서는 뭐 엄청나게 큰, 그것도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풍경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므로, 막무가내로 통과~ 해버리는거죠. 이 엄청난 풍경화 앞을 지나면서 대략 '이름표'라도 볼라치면 Moran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띕니다. 

 

"모란?  이름이 모란이야?  성남의 모란 시장이 생각이 나는군. 거기 가면 강아지 팔고 그랬는데. 이름이 모란이면 모란꽃 뭐 그런거 그려야 하는거 아니야? 아 왜 바윗덩어리 산만 그려 놓은거냐구..."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나치는거죠. ㅎㅎㅎ.  그래가지고, 사실, 스미소니안을 라면집 드나들듯 드나든 저에게도 모란의 작품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관심 없으니까 대충 지나간거죠.  아, 다음에 가면 제대로 작품 좀 들여다봐야지...

 

Thomas Moran (1837-1926)은 영국태생으로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와서 펜실베니아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 Hudson River School 의 원조 Thomas Cole 의 페이지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Thomas Moran 은 그가 미국의 자연 환경을 대형 화폭에 담았다는면에서 허드슨강변의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고, 혹은 토마스 모란이 특히 로키 산맥, 옐로우스톤의 풍경에 골몰한데서 Rocky Mountain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찍어온 그의 대형 그림 사진속의 풍경이 대개 '노리끼리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림이 '노리끼리'로 일관하는 이유는, 그가 Yellow Stone (노란 바위) 지역의 화가라서 그런것이지요 (알고보니 뭐 단순하군요.헤헤).

 

토마스 모란은  형제들도 그림을 그렸고요, 어릴때부터 목공, 판화 등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1862년에 영국으로 그림을 배우러 갔을때 그곳에서 터너 (Turner, 1775-1851)의 웅장하고 숭고한 풍경화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8년 여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 갔을때, 마침 터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지요.  스케일 큰 풍경화를 실컷 보기는 했는데, 저 자신이 사람 하나 안보이는 풍경화에 별 재미를 못느끼기는 했지요.  지금은, 풍경화를 보는 안목도 좀 생겨서, 코코란에서 현재 진행중인 터너에서 세잔까지의 기획전 http://www.corcoran.org/turnertocezanne/index.php 을  보러 갈 생각입니다.)

 

토마스 모란이 미 서부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871년 Hayden Geological Survey (헤이든 지리 연구) 팀에 초대되어 40일간 미 서부 옐로스톤 일대를 탐사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연구팀에는 사진가 Wiliam Henry Jackson도  있었는데, 토마스 모란과 잭슨이 현장 스케치를 남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흑백 사진만 가능했으므로 현장의 생생한 풍경은 화가가 담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The Grand Canyon of the Yellow Stone, 1893-1901, oil on canvas

427.8 x 245.1 cm (대략 4.3 미터 x 2.5 미터)

Thomas Moran (1837-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그림은 아니지만, 같은 제목의, 비슷한 각도에서 본 그랜드 캐년 그림이 1872년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가 되는데 그 그림은 미 의사당의 상원에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옐로우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지요. 이를 시발점으로 미 의회는 1916년 정식으로  '국립공원 National Park System'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여름 휴가철에 '미서부 관광'이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을 관광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미국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Yellowstone National Park 이고요,  이곳이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게 되었을때, 그 배후에 토마스 모란의 그림 한장이 있었던 것이지요.  흑백사진 기술조차 미미하던 시절, 오로지 스케치나 수채화와 같은 것으로 시각자료가 전해지던 시절, 한장의 대형 풍경화가 전하는 미지의 세계는 보는이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선사했을 법 합니다.

 

 

토마스 모란은 때로 Thomas Yellowstone Moran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요, 이따금 그는 서명할때 Thomas Y. Moran 이라고 적기도 했답니다. 가운데의 Y 는 yellowstone 의 Y 이지요. 그리고 토마스 모란이 '미 국립공원'의 지정과 개발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여 http://en.wikipedia.org/wiki/Mount_Moran  모란 산 (Mount Moran)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고 합니다.  한장의 그림이 미국 역사에, 미국 국립공원의 산파 역할을 했다니, 그림을 만만히 보면 안될 일이군요.  다음에 스미소니안에 가면 그의 대형 그림 사진들을 모두 찍어와야 할것 같습니다. :)

 

 

화면 왼편 그림: The Cahsm of the Colorado, 1873-1874, oil on canvas mounted on aluminium

367.6 x 214.3 cm (대략 3.6 미터 x 2.1 미터)

Thomas Moran (1837 - 1926)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아, 참고로, 저 전시실 가운데에 둥그런 평상같이 생긴 의자가 있는데요. 곰털 같은 털가죽이 덮여있습니다.  관객이 저기에 편히 앉아서 쉬면서 그림을 감상할수 있도록 설치 해 놓았는데요. 옐로우스톤에 가면 '곰'이 많이 나오지요.  옛날에 옛날에 1998년에, 제가 미국땅 처음 밟아본것이 '미서부 관광' 패키지 여행을 통해서였는데요, 그때 관광 안내원이 '곰'이 나올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당부하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러니까, 저 곰가죽같은 의자나 혹은 그림 옆에 세워 놓은 화분도, 이 전시장의 장치 입니다. 풍경화에 어울리는 소품을 제시하여, 관객이 '풍경'속에 들어와있는듯한 기분이 들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2009년 2월 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앞서서 Albert Bierstadt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페이지를 열면서 코코란 미술관의 전시장을 보여드렸는데요.  오른쪽의 대형 그림이 비어시타드(1830-1902)의 '버팔로의 최후.' 왼편에 보이는 대형 그림이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의 나이아가라 입니다. 오늘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1826-1900)의 그림을 보기로 하지요. 제가 두 사람의 생몰 년대를 적어놨는데 처치가 4년 먼저 태어났지만, 형제들처럼 한 시대를 함께 활동한 화가들로 봐도 되겠지요.  (이래서, 미술관에서 비어시타드와 처치가 늘 함께 붙어다니거죠.)

 

 

나이아가라 폭포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라는 미국 화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작품이 바로 이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2008년 5월 이른 아침에 코코란 미술관에 혼자 가서 열시의 개관 시간을 기다리던 일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 날 한가롭게 안내인의 안내를 받았는데, 이 그림 앞에 앉아서 제법 상세한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접 가서 본 것은 2005년 8월의 일이었는데요,  가서 보고 깜짝 놀랐었죠.  당시에 주변에 있던 유학생 가족들도 여름에 아이들과 미 동부 여행을 다녀오곤 했는데, 저는 돈도 없고 공부도 바빠서 여행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가 여행 다녀온 사람들을 붙잡고 묻곤 했습니다.  "어디가 제일 좋았나?"  어른들은 뉴욕과 워싱턴이 인상깊었다고 얘기하고, 청소년들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너무너무 근사했다고 대꾸들을 했지요.  나이아가라 폭포야 그냥 폭포인데 그게 근사할게 뭐가 있나?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막상 가보니 기가 막히더라구요.  나이아가라 관광하는 동안 정말 애들처럼 좋아 죽는줄 알았습니다. 신나서. 하하하

 

나이아가라는, 가서 봐야 하는거지, 영화 백날 봐 봤자, 현실감이 없죠. 

 

1700년대에 유럽인이 처음 나이아가라를 발견한 이래로,  유럽대륙에 나이아가라에 대한 환상이 자라났다고 합니다. 당시에 사진이 있었대도 흑백사진을 간신히 만들던 시절이라, 사진가지고 그 현장의 감동을 전하기는 어려웠을테고, 결국 그림이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었겠지요.  그래서 프레데릭 처치 외에도 여러명의 화가들이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을 그렸습니다.

 

Niagara Falls, 1857, Oil on Canvas (42 1/2 x 90 1/2 inches)

2009년 10월 3일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그림이 처음 소개가 되었을때 유럽대륙에 없는, 오직 '신세계 New Worlld' 미국에만 있는 장관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나이아가라폭포는 제작년대를 보니 프레데릭 처치가 27세때 그린 작품이군요. 이 그림의 성공으로 프레데릭 처치는 미국의 풍경화가로서 탄탄 대로를 나아가게 됩니다.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은 커넥티컷주의 하트포드시에서 부유한 시계제조회사, 보험회사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선대가 부유하다보니 프레데릭 처치 자신은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그가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그는 일찌감치 허드슨 강변의 화가들 (Hudson River School)의 원조인 Thomas Cole (http://americanart.textcube.com/267)에게 연결되어 그의 제자가 됩니다.  그는 일찌감치 22세가 되던 해에 National Academy of Design 의 멤버가 되고 뉴욕에 정착하여 스케치 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일년의 봄, 여름, 가을에는 여행을 다니고, 겨울에는 뉴욕으로 돌아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것이지요. 그는 1853년과 1857년에 남미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남미의 숲이나 풍경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후에는 유럽과 중동등 세계 여러나라를 돌면서 현지의 풍광을 스케치하고 대형 풍경화 작업을 했지요.  후기에는 그의 스승 토마스 콜과 마찬가지로 허드슨 강변에 대 저택을 짓고 정착하게 되지요.

 

 

아,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특이하죠.  성이 Church 입니다. 예배당이 '처지' 쟎아요. 미루어 짐작컨대, 집안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거죠. 미술 비평가들중에는 처치의 풍경화에서 어떤 '정신적인 spiritual' 면을 해석해내기도 합니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자체가 숭고성을 전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에게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혹은 어떤 신앙이나 사상을 갖고 있거나 간에,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 풍경 앞에서는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풍경 너머의 어떤 의미를 사색하게 되쟎아요.  우리가 매일 보는 황혼이 어느날 유난히 붉을때, 혹은 달이 어느날 유난히 환할때, 별이 유난히 반짝일때도 우리는 그런 자연 현상에서 어떤 상징성을 찾고 싶어하지요. 설령 우리가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프레데릭 처치는 박물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 (1769-1859) 의 저서인 Cosmos 를 탐독하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훔볼트는 남미 지역을 탐사하면서 식물 지리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했고,  다윈(1809-1882)은 비글호를 타고 남미를 탐험했지요.  처치 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눈을 돌리고,  그의 분야, 풍경화를 통해 그가 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재미있어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을 돌면서, 어떤 사람은 박물학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진화론'이라는 경천동지할 가설을 탄생시켜서 우리의 사고체계를 확 뒤집어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화폭으로 옮겼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누가 더 똑똑하고 잘났다는 얘기를 하기보다는,  사람마다 타고난 품성과 재능이 각자 다르므로 각자 자신의 재능과 취미대로 자신을 펼치면서 살면 인생이 재미있고 다채로워질거라는거죠.  우리 모두가 다윈이 될 필요도, 우리 모두가 화가가 될 필요도 없죠. (관객도 필요해요~ ).  그렇지만 우리 모두 각자 위대한 개인임은 분명하죠.

 

뉴포트 산 풍경

 

New Port Mountain, Mount Desert, 1851,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그림은 대형 작품은 아닙니다. (제가 게을러서 그림 사이즈를 정리를 안하고 이렇게 때우는군요.) 이 풍경은 뉴포트의 사실적인 풍경으로 보입니다.

 

 

 

오로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의 한 갤러리에 있는 작품인데요, 이 갤러리 앞을 지나갈때면, 어디선가에서 빛이 번쩍 나면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인상입니다.  이것이 오로라 인가봐요.  (저는 아직 오로라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극지방에 가면 하늘에 오로라가 보인다고 하쟎아요).  오른쪽의 오로라 그림도, 왼편의 풍경화도 모두 프레데릭 처치의 작품입니다.  여기 의자가 있다는 얘기는, 이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감상하시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거리와 각도에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왼편 아랫쪽에 배하고, 썰매 팀이 작게 보이는데요, 이들은 탐험가 Issac Hayes 탐험팀입니다. 이들은 1860년에 북극 탐사를 했습니다. 그는 탐험 기록으로 많은 스케치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미국에 돌아와보니 내전 (남북전쟁 1861-1865)으로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지요. 기가 막힌 상황이었죠. 프레데릭 처치는 북극 탐사팀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탐사팀이 가져온 스케치와 이야기를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1865년, 이 오로라 그림을 완성시켰는데요. 스미소니안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서 '암울한 국가적 갈등에 대한 불운한 전조'를 보여줬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요, 관객인 제가 볼때 이 그림은 오히려, 희망의 상징처럼 보이거든요. 오로라는 신화에서 '새벽'의 여신인데, 1865년의 미국사와 '오로라'를 연결지어 본다면,  내전이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동터오는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하는거죠.

 

 

Aurora Borealis, 186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e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분화구

 

Cotopaxi, 1855, oil on canvas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12월 29일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에서 촬영

 

프레데릭 처치가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봤던 풍경인것 같죠. 안데스 산맥의 코토팍시 산을 그린 것입니다.

 

 

 

 

 

빛의 강: 프레데릭 처치의 마지막 그림

 

 

 

기록에 의하면, 프레데릭 처치는 1877년 손 관절의 문제로 더이상 그림을 그릴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빛의 강'이 1877년에 제작된 것이므로 이 작품이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자료를 찾아보면 1877년 이후에 발표된 작품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왜 1900년까지 생존한 사람의 작품이 1980년대에 끝나는가 의문을 가졌었는데, 신병때문에 이후에 작품 활동이 불가능해졌던 것 같습니다. (아, 전에 소개드렸던 Grandma Moses 의 경우에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93  모세할머니가 수놓기를 즐기다가 눈이 어두워지고 손도 불편하여 수놓는걸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출세을 했다고 하지요.사람 일은 알수가 없는거죠.)

 

 

 

El Rio de Luz (The River of Light), 1877, Oil on Canvas

213.7 x 138.1 cm

Frederick Edwin Church 1826-1900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이 작품은 1857년 그가 남미를 여행했던 당시의 스케치와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20년 후인 1877년에 그린  것입니다. 51세가 된 화가가 31세때 여행했던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렸다고 것이지요.  그림을 들여다보면, 남미 열대기후에서 볼 수 있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요 뽀얀 새벽안개 속의 물빛도 왠지 따뜻할것 같습니다.  '빛의 강'이라니 이 물에 잠겨 수영이라도 하면 극락일것 같지요.  이 그림을 보면, 처치의 세밀한 자연관찰력과,  자연과학 너머의 숭고한 정신세계 그 양면적인 것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제가 남미에는 아직 못가봤지만, 미국의 최 남단인 플로리다에서는 한 오년을 살았는데요, 바다에 가면, 바닷물이 따뜻해요. (겨울에도). 강이나 호수는 고요하고 역시 따뜻해요. 열대 식물들이 빼곡하고, 악어, 도마뱀들이 태평하게 돌아다니고.  돌아보면, 참, 내가 낙원에서 일생의 오년을 보냈구나...이런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지금처럼 백년만의 폭설이라는 눈때문에 방에 갖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라치면, 내가 잃어버린 낙원이 미치도록 그리워지지요.

 

처치가 후년에 대지를 사들여 저택을 지은 뉴잉글랜드 지방 허드슨 강변은 사실  겨울이면 엄청 추운곳입니다. 겨울엔 그런데서 살기 싫죠. 그래서 동부의 돈많은 갑부들이 플로리다에 겨울 별장을 마련해 놓고 즐기는거죠.  자,  손에 류머티즘이 와서 손도 불편하고, 날도 춥고, 어디 나가기도 불편한 겨울날, 오십대의 화가가 작업실에 앉아서 이 그림을 그리는 광경을 상상해봅시다. 그의 추억속의 남미, 빛의 강이 얼마나 그리울지, 얼마나 미적지근하고 습기로 끈끈하며 그의 시린 어깨를 녹여줄지.

 

그의 연보를 살피다가, 이 그림이 아마도 공식적으로 공개된 그의 작품으로는 최후의 작품인것을 발견하니 새삼, 그림을 다시 보게 됩니다. 프레데릭 처치는, 아마도 온화한 말년을 보냈을것 같아요. 그의 마지막 그림이 빛과 따뜻함에 감싸인 새벽의 강인것을 보면 - 그가 돌아간 세상도 이와 비슷할지 모르죠.

 

 

2010년 2월 7일 일요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19세기 미국미술: 토마스 콜 과 허드슨강 미술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3  이전 페이지에서 토마스 콜의 '인생' 시리즈를 살펴 봤습니다.

 

 

19세기 미국 미술가인 Thomas Cole (1801-1848. 토마스 콜)은 미국의 풍경화가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그의 이름 옆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합니다. 오하이오에 정착했던 그는 후에 펜실베니아 미술 학교를 거쳐서 1825년에는 뉴욕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당시에 미국의 지식인들이나 꿈을 가진 화가들이 거쳤던 노선이기도 하지요. 펜실베니아를 거쳐 뉴욕으로 가는 노선.

 

당시 뉴욕주의 허드슨 밸리 (Hudson Valley)라는 지역이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이름이 있었고 그래서 토마스 콜을 위시한 '미술학도'들이 이곳에서 풍경화를 그리거나 익혔습니다.  미국 건국 초기의 미술이라야 '초상화' 아니면 '풍경화'였다고 할만하지요.  후에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허드슨 밸리의 Catskill 에서 결혼하여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콜을 위시하여 허드슨강 기슭에서 풍경화 작업을 하거나, 토마스 콜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국 풍경화가들을 일컬어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 칭하게 됩니다.

 

허드슨강 미술가들은, 대개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미국의 풍경들을 그렸고 (말하자면 진경산수라고 할만하죠),  때로는 이상화된 풍경들도 그렸습니다. 이 허드슨 미술가들에 의해 '거대한 미국의 풍경'들이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되기도 했고요.

 

허드슨강 미술가들중에 널리 알려진, 제가 장차 페이지를 열어 소개를 하고자 하는 화가들은

 1.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슈타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 Frederic Edwin Church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3. Thomas Moran (토마스 모란)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등인데요.

 

이 주요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장차 허드슨강 미술가들 특징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토마스 콜의 풍경화, 그 속에 담긴 우화들

 

 

토마스 콜은 풍경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풍경화속에 성서적 우화들을 담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은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인데요.  '노아의 홍수 뒤에 차분해진 물결'로 해석이 됩니다.  Deluge 는 홍수, 범람을 의미하는 어휘인데, 성서에서 the Deluge 라고 하면 노아의 홍수를 가리킵니다.  "After me, the deluge!"  나 이후에 홍수가 오건 말건 상관없다는 뜻이지요. 나 살아생전에만 무사하면 된다 이거죠. 좀 무책임한 발상이죠. (내가 알게 뭐람).

 

그림의 제목만 보면 토마스 콜은 성서에 담긴 노아의 홍수, 그 이후의 평화를 그린것으로 풀이됩니다만, 또다른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미술관의 그림 안내지에 담긴 내용을 옮기자면, 토마스 콜은 이 그림을 통해 신생국가 미국을 찬양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민자였던 토마스 콜 자신의 삶의 관점을 보여준것은 아니었을까요?)

 

노아의 홍수가 뜻하는 것은 묵은것의 청산, 죄악과 오류의 청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지요. 신생국 아메리카가 유럽의 영향권에서 독립을 하는것 역시 새로운 시작일수 있고, 유럽에서 이민 온 토마스 콜에게도 미국에서의 삶은 새로운 시작일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깊고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여 저 멀리 노오랗게 햇살이 비치는 평화의 바다로, 신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사진 사이즈를 줄여놔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사진 두번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사진 하단의 중앙의 바위 옆에 보시면 희끄무레한 조그만 것이 보이실겁니다. 해골바가지 입니다.  해골바가지.  이 해골바가지는 왜 그려넣은 것일까요?

 

 

노아의 홍수 이후, 새로운 에덴을 향하여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1829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서양 그림을 감상하실때, 서양 그림에 '해골바가지'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라를 막론하고 유럽 화가들은 '해골'을 그려넣기를 즐겼습니다. 이를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할 생명들이라는 것을 기억함) 이라는 용어로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Memento (Remember, 기억하라), Mori (mortal,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리따운 여인이 한손을 해골에 얹고 있는 그림은 어떤 식의 해석이 가능할까요?  인간은 유한하고, 처녀의 아름다움도 유한하다는 메시지이지요.  책상위에 모래시계와 해골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지지요. 시간은 흘러가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그림에 담긴 해골은 어떤 상징을 담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 죽을거다?  뭐 그보다는.... 어떤 것의 종말을 상징할수도 있지요.  구시대는 끝났다. 이 해골을 넘어서서 저 평화로운 신천지로 나아간다는 뜻일수 있지요. 신세계 미국은 New Eden 새로운 에덴동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콜에게.

 

2003년 겨울에 (아 벌써 아주 오래전의 일이구나, 어제 같은데...) 뉴올리안즈에 간적이 있습니다. 태풍 카트리나가 강타하기 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던 곳이었지요. 뉴올리언즈 시가지에 타로 점쟁이 할머니가 앉아있길래, 난생처음으로 길거리에서 타로점을 쳐봤습니다.  아, 제 일기에 그당시 사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그때 제가 고른 패중에 '해골'이 그려진 패가 있었거든요. 크리스마스 휴가로 간 여행이라 '신년운세'를 본것인데, 뭐 해골 패가 나왔던겁니다.  그런데 점쟁이 할머니가 제 패를 들여다보더니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음'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넌 새해에 큰 행운을 맞이할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고통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잘 해내길 바란다. (히히, 점쟁이가 아닌 나 라도 그런 설명은 하겠다) 아 뭐 점쾌가 하도 안좋아서 나를 위로하려고 이러시나 했지요.

 

 

 

2003년 12월 뉴올리언즈의 타로 점쟁이 할머니와 나.

 

그런데, 그 이듬해에 저로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왔지요. 아주 힘든 시험도 쳤고,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섰지요.  죽음은 곧 탄생이다. 새로운 탄생이다.  점쟁이 할머니의 아름다운 설명이 고마웠죠. 결국 인생 이리저리 해석하기 나름인데...

 

아, 예, 그래서 토마스 콜의 그림에 담긴 저 해골은, 죽음,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구시대, 구습의 죽음, 신생국가의 새로운 에덴동산을 희구하는.

 

 

 

아래의 두편의 그림들은 십자가의 순례라는 타이틀의, 기독교 우화 연작의 일부로 보입니다. 그가 1848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작품들이 1847년 1848년에 그려진 것이고보면 이것들이 토마스 콜의 최후의 작품들이었던것 같은데요. 그 자신이 생의 마지막에 다다랗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시작은 끝과 통하고, 끝은 새로운 시작과 닿아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요즈음, 묵은것들을 털어 내시고, 또 새로운 종말을 향해 여행을 떠나야할 때이지요.  올해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수 없으나, 길을 떠나보는거죠.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십자가의 순례, 그 여행의 끝 (십자가와 세상이라는 연작 시리즈를 위한 준비화)

(Study for the series; The Cross and the World) 1846-1848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about 1847)

십자가의 순례,그 여행의 끝.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날,  아름다운 한 해였노라...라고 술회 할수 있기를.

 

2010년 1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National Gallery of Art (워싱턴, 국립 미술관)의 미국미술전시장.

2009년 9월 11일 촬영

(사진들을 두번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실수 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기가 되면 삶에 대해서 이것저것 사색을 할 기회가 많지요.  우리는 인생을 봄-여름-가을-겨울에 비유 하기도 하는데요.  나는 지금 인생의 어디쯤에 있는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요. 옛날 어르신들 말씀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것에는 차례가 있어도, 돌아갈땐 차례가 없대요.  먼저 태어났다고 먼저 죽고, 나중 태어났다고 나중 죽고 그러는게 아니라는거죠.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각자 언제 죽을지 우리는 예측할수 없고, 어쩌면 운명 지어진대로 살아나가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미국화가 Thomas Cole (1801-1848)의 걸작중에 워싱턴 디씨의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미국미술 구역에 전시된 The Voyage of Life (인생의 항해길)이라는 연작품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들어 노년을 맞이하여 돌아갈때까지를 네편의 그림에 담아 놓은 것인데요.

 

각기

 1. The Voyage of Life: Childhood (어린시절)

 2. The Voyage of Life: Youth (청년시절)

 3. The Voyage of Life: Manhood (성년시절)

 4. The Voyage of Life: Old Age (노년기)

 

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네편의 작품을 차례차례 '전체크기'와 '부분화'를  함께 올려보겠습니다.  차례차례 그림을 보시면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림에 사람하나하고 또 다른 존재가 반드시 나옵니다)과 주변 풍경을 살펴보세요.  그러면 저절로 한가지 이야기가 나오게 되겠지요.  어린 꼬마들도 그림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겁니다. 저처럼 중년의 나이가 되거나 저보다 인생을 더 오래 사신 분들이 이 연작을 보면, 생각이 많아지지요.

 

사실 이 연작을 처음 본것은 2005년에 워싱턴을 처음 방문했을때였는데요.  아 벌써 그후로 5년이 더 흐른것이군요.  국립미술관에 갈때마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서 늘 비슷한, 그러나 양상이 조금 다른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아 5년전에 처음 이 작품을 발견하고는 - 국악인 김영임씨의 '회심곡'을 틀어놓으면 잘 어울리겠다 생각을 했었지요.  회심곡....  (서양판 회심곡이지요뭐...)

 

토마스 콜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요. 그림에 대한 이야기도 차차 하기로 하고요. 지금은 그냥, 그림들을 즐기시지요.... 할얘기가 아주 많은것도 같고, 뭐 따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것도 같고요.

 

 

 

 

어린시절

 

 

 

왼편, 동굴과 같은 어두운 곳으로부터 금빛 찬란한 배 한척이 나오고, 어린 아기가 타고 있지요. 아기의 뒷편에 천사같은 존재가 서서 배를 인도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강가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했고요.  먼 하늘은 장미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어린시절은 이렇게 느릿하고 명랑하게 흐르는 시간과, 신비감으로 가득차 있었지요.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갔어요. 제가 기억하는 인생 최초의 '먼 모험 여행'은 다섯살때, 이웃집의 나보다 한살 더 많았던 사내아이와 어른 걸음으로 20분쯤 가면 닿게 되는, 동네 초등학교까지의 길이었습니다.  그 학교에 나보다 대여섯살 많았던 고모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아침메 밥먹고나서 할일이 없고 심심했던 저는 이웃집 유순이와 함께 모의를 한거죠.

 

우리도 학교에 가보자. 유순아 너 학교가는길 알어?

응 알어. (유순이는 나보다 한살이나 더 많았고, 세상에 대해서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요)

학교에 가서 고모를 만나자.

그러자.

 

유순이의 부모님은 유순이가 어딜 돌아다니건 걱정을 하지 않았고 (유순이는 씩씩하고 똑똑하니까),  나의 부모님은 멀리 서울에 있었던거죠. 아무도 내가 어딜 돌아다니건 신경쓰지 않았던거고, 나는 나름대로 거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오전의 태양아래, 우리 동네 경계를 넘어서 한없이, 한없이 먼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우리집 마당에서서 돌아보면 보이는 마을의 집과, 산과, 개울과, 개울건너 앞마을의 집들뿐이었는데, 그 경계를 넘어서서, 내가 모르는 세상을 향해 유순이는 나를 이끌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계절이 가을이었던걸까요?  내가 마을을 벗어나서, 모르는 길을 걸으며 겁이 나서 칭칭대니까, 겨우 나보다 한살 더 많았던 유순이가 길가 밭에서 '무'를 하나 뽑아다가 이빨로 그 무 껍질을 벗겨서 우선 제가 몇입 먹고 나에게 주었지요. 이거 먹어라. 달다. 울지마. 내가 학교가는길 알어.

 

나는 정말, 온종일, 온종일, 영원처럼 오래오래 걸어서 초등학교에 도착했던것 같습니다.  학교 마당 구석에서 기가 죽어서 얌전히 있으려니, 마침 쉬는시간이었던지, 아니면 체육시간이었던지 양갈래로 길게 머리를 땋은, 까만 바지차림의 우리 막내고모가 학교 마당에 나왔다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달려왔지요.  "야! 니가 여기를 어떻게 왔니! 하하하. 여기를 왔구나!"  우리 막내고모는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했지요. (그래봤자, 우리 고모도 뭐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겠군요).

 

그날의 햇살이 생각납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햇살. 그 먼 여행. 그 멀고도 긴 하루.

 

우리의 시간은 느릿하게 반짝이며 흘러갔고, 세상은 신기함으로 가득차 있었지요.

 

 

 

 

제 학부시절 전공이 영어영문학이다보니, 운좋게도 대학시절에 영문학의 '기초 과정'들을 착실히 이수할수 있었는데요.  2학년이 되어 전공과목으로 처음 이수한 것이 '영시'였습니다. 중세 베오울프 맛보기를 거쳐 주로 낭만주의 영시를 강독했지요.  워즈워드의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어린시절의 기억을 통해 영생불멸을 깨닫고 부르는 노래)라는 시가 있는데요, 워즈워드는 어린 아이를 '보는자 Seer' '자연의 철학자 Philosopher'에 비유하여 인간이 태어날때부터 갖는 예지력, 천재성을 노래하지요.  인간이 천국에서 지상에 올때 천국의 광휘와 지혜를 갖고 오는데, 이승에서 살면서 그런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 빛이 돌려지지 않는다해도 서러워 말지니, 차라리 그 속깊이 간직된 빛을...' 이런 구절도 이 시의 일부이고요.

 

사실 이 '인생의 항로' 그림은 워즈워드의 '영생불사'시와 잘 어울리지요. (참고: http://www.bartleby.com/145/ww331.html )

 

전체 11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시인데 첫 두연만 읽으면서 음미해볼까요

 

 

                           http://www.bartleby.com/145/ww331.html )  

 

                    I

          THERE was a time when meadow, grove, and stream,
          The earth, and every common sight,
                    To me did seem
                  Apparelled in celestial light,
          The glory and the freshness of a dream.
          It is not now as it hath been of yore;--
                  Turn wheresoe'er I may,
                    By night or day,
          The things which I have seen I now can see no more.

 

풀밭, 언덕, 그리고 개울이

대지가, 그리고 일상의 평범한 것들이

천상의 빛에 둘러싸여 있는것처럼 보이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지.

그 시절의

빛나던 꿈과 그 꿈의 신선함은

이제 보이지 않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밤낮으로 보던 것들을

이제는 더이상 볼수 없어라

 


                                   II

                  The Rainbow comes and goes,
                  And lovely is the Rose,
                  The Moon doth with delight
            Look round her when the heavens are bare,
                  Waters on a starry night
                  Are beautiful and fair;
              The sunshine is a glorious birth;
              But yet I know, where'er I go,
          That there hath past away a glory from the earth.

 

무지개는 왔다가 사라지고

장미는 아름답구나

하늘이 개이면

달은 기쁨에차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별이 빛나는 밤

개울들은 아름답고도 고와라

햇살은 영광스런 탄생이라네

하지만 이제는 안다네

내가 어디엘 가도

그 광휘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다네

 

(번역; RedFox)

 

 

시인 워즈워드가 1803년에서 1806년사이에 쓴 시입니다.  나이가 들어 어린시절을 회고해보니 어린시절에는 모든것이 신기함, 빛으로 가득했었는데, 이제는 사물은 그대로 있어도 그 빛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지요... 워즈워드는 시를 풀어가면서 어린시절, 어린아이, 자연에 대한 '천국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그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냅니다.  그리고나서 그러면, 이제 그런것을 잃은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뭐 그런 이야기도 마지막에 나오는데요.  결론은 '기억'이죠.  우리에겐 회상할수 있는 능력이 아직 남아있고, 회상의 능력을 토대로 삶을 깊게 들여다볼수 있다는 위로를 하지요.

 

이 그림은 토마스콜 (1801-1849) 이 39세인 1840년에 그린것입니다. 그 8년후에 화가는 이른나이에 천국으로 가버렸는데요, 토마스콜의 성년기 작품입니다. 청년이 이런 그림들을 그리기는 어려울것 같고요. 당시에 나이 마흔이면 스스로도 자신의 '성년'으로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어린시절, 비가오면 폭우처럼, 눈이 오면 폭설처럼 여겨지던 시절, 세상은 놀라움으로 가득차있었지요.


 

 

 

청년시절

 

 

 

자, 이제 청년시절에 이르렀습니다.  멀린 (그림 왼편 상단) 하늘에 희게 빛나는 성이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 ).  청년은 여태까지 호위해주던 수호천사 따위 안중에 없다는 듯 그 하늘의 성을 향합니다. 수호천사는 배에서 내려 강 기슭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군요.

 

우리에게 저 하늘의 성은 무엇이었을까요?

 

희망과 기대에 찬 미래였을까요?

고시를 통과하여 출세를 해보겠다는 야망이었을까요?

군사정권을 몰아내고 진정한 민주화를 실현시키겠다는 이상 이었을까요?

남북통일이었나요?

아름다운 농장을 일구고 싶었나요?

착한 애인을 만나서 공중정원같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싶었나요?

먼나라로 유학을 하여 나도 알수없는 어떤 사람이 되어 살고 싶다는 것이었을까요?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던 시절 저의 꿈은 아마도 그것이었던것 같습니다. 멀리 떠나고 싶었고, 유학을 가고 싶었고, 현실은 멀리 떠나는것도 유학을 가는것도 불가능하다며 빙글거리며 발목을 잡았던것 같아요.) 아무튼 우리는 떠나고 싶어하죠. 부모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죠.

 

그런데 그 공중의 성으로 향한 물가에는 험준한 산이 기다리고 있고요, 그 물길을 계속따라가면, (수호천사 뒤로 보이는 협곡을 보십시오) 알수없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지요.

 

 

 

 

 

 

 

 

 

성년시절

 

 

저는 지금 '성년시절'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제가 판단을 해야하고, 저의 판단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내 삶보다는 내주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야하고, 고비고비마다 이것이 나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지 아닌지도 판단을 해야 합니다. 시간은 격류처럼 흐릅니다.

 

지난 연말에 오랫만에 지인을 만났는데, 그분이 "바쁘시죠?"하고 늘 인사로 묻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아이고, 한해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신이 없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냥 한해가 갔는데, 뭐 아무것도 한것이 없어요..."하고 대꾸를 했지요.  그분 말씀이, "나이만큼 세월의 속도가 빨라져요. 30대는 시속 30마일, 40대는 40마일이에요... 속도 초월하지 마시고 천천히 가세요."  그러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후딱후딱 지나간대요. 그 말씀이 맞는듯하여, 이것이 나만 느끼는 속도가 아니구나, 모두들 비슷하게 느끼는구나 했습니다. (그러면 또 위안이 되지요. 모두들 나와 비슷한거구나,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자, 아까 청춘시절의 강물을 따라 흘렀을때 맞닥뜨리게 되는 협곡의 정체가 여기서 드러나죠. 물살을 미친듯이 빠르게 흐르고, 배는 급물살과 바위사이를 통과해야만 하지요. 미친것은 물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죠. 미치겠는거죠.

 

 

 

 

 

그런데, 저 어두운 하늘구석에 희게 빛나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까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내버렸던 나의 수호천사인걸까요?  괴로움속을 서성일때, 단테를 돌봤던 베아트리체인걸까요?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있었는데, 지금 나에겐 무엇이, 누가 있을까?

 

 

 

 

미친 세월을, 급 물살을 견디며 바위틈을 통과해야 할때, 우리는 신앙을 가진사람이건 아니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토마스 콜은 기독교 바이블의 이야기를 많이 그린 화가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지처가 필요하죠.  대상이 누구이건간에 간절히 간절히 어떤 염원을 품게 되겠지요. 그러한 염원이 없이는 이런 물살을 타고 넘기가 힘이 들지요. 혹은 이 물살을 맞기 싫으니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을 할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 바위의 협곡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요? 저 너머에 대양이 보입니다. 그렇죠?

 

 

 

 

 

노년시절

 

 

자 이제 협곡을 통과하여 물결 잔잔한 바다에 다다랗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몸도 늙고 지쳤습니다. 성년시절까지는 뱃머리 장식이 붙어있더니, 이제 뱃머리 장식도 사라지고 없군요. 사람도, 배도 늙고 지치고 망가졌습니다. 망가진 뱃머리 장식대신에, 노인을 이끄는 빛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멀리에서 그를 맞이하는 또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어서 오라고 손짓 하고 있지요?

 

이렇게 우리의 삶은 '하루'와 같고, 하루는 '일생'과 같기도 합니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 마치 평생을 다시 시작하듯 그렇게 하루를 맞이하고, 마치 평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잠이 든다면 좋을것도 같습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살면서 힘이 들고 괴로울때, 그 물살너머에 평화로운 바다가 기다리고 있음을 상상하면 그런대로 다시 힘을 얻을수 있을것도 같고요.

 

저도 아직 노년을 살아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노년이 평화롭기를,  지상의 노인들이 평화로우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아, 토마스콜은 47세로 마감을 했는데요, 그는 노년이 오기전 지상에서 사라진것처럼 보이네요. (아니, 노년이 나이와 상관이 있는것은 아니지요. 혹자는 평생 청춘으로 혹자는 일찌감치 노년으로 살아갈지도 모르지요.)

 

 

 

 

 

 

 

 

 

세상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겪는 일들속에서 어떤 섭리를 발견하고자 노력한다면,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럭저럭 세상을 견뎌나갈수 있을것도 같군요.  사랑할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으며, 얻건 잃건 그 사이에 우리 삶의 강물은 흘러 흘러 가는 것이지요.

 

          The Clouds that gather round the setting sun
          Do take a sober colouring from an eye
          That hath kept watch o'er man's mortality;
          Another race hath been, and other palms are won.
          Thanks to the human heart by which we live,
          Thanks to its tenderness, its joys, and fears,
          To me the meanest flower that blows can give
          Thoughts that do often lie too deep for tears.
                                                        

지는 해의 주위로 모여드는 구름은

인간의 유한성을 지켜본 시선으로부터

근엄한 빛을 앗아간다

또하나의 경주는 끝났다. 월계관들이 주어졌다.

우리가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심성이 있어

그 심성의 부드러움과, 유쾌함과 두려움이 있어

아무리 보잘것없이 피어나는 꽃이라 할지라도

눈물조차 흘릴수 없도록 깊은 상념을 내게 선사할수 있게 되는 것이라.

 

(영생불사, 마지막 부분)

 

 

 

 

 

 

강물을 보러 나가고 싶은데, 날이 꽁꽁 얼어서 나갈수가 없어, 마음속의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늘 평안하시길. (협곡을 흐를때조차).

 

2010년 1월 3일 (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