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5. 09:45

http://www.claremontmckenna.edu/hist/jpetropoulos/arrow/holocaust/Franklin_Roosevelt.jpg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1882-1945)은 193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로, 죽을때까지 (1932-1945) 미국대통령직을 유지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일무이하게 4선 까지 이른 사람이며, 미국 대통령들중에서 3선 이상을 한 유일한 사람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로 대통령을 2선까지만 가능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국이 어떤 지도자의 '독재'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2년도 넘는 기간동안 미국을 통치하였는데, 경제 대공황때 그가 취한 경제정책 (소위 뉴 딜 정책으로 알려져 있음)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여러가지 국책사업을 펼치가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정책을 펼쳐서 경제난을 이겨내려 했다는 것은 중고등 학교 사회책이나 세계사책에도 소개되는 내용이다 (나는 중학교때 이런 내용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서는 Social Security (사회복지) 제도가 있는데 이 사회복지법 (social security act)을 최종 승인하고 시행한 대통령이 바로 이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기초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복지'의 초석이 마련되었다고 한다면,  '의료복지'의 초석을 만들고자 하는 이가 현재의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가 미국 역사상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인지...) 

 

 

 

바로 이러한 '국책사업,'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  사회복지 정책등을 이유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사회주의자'라 평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군에 속하는 '최장기 대통령직'을 수행한 대통령이 '사회주의자'라고?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수도 있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대략 간단하게는 사회 통치 시스템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사회주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수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동등하게 통치하는 시스템이 '민주주의'라면,  소수의 '통치집단'이 사회 운영을 관장하고 계획을 세우고 시민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분담시키는것이 '사회주의'적 통치체제라 할수 있다.  경제 구조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굴러가는데, 대개 민주주의적 방식과 자본주의 체제가 서로 궁합이 맞아보이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상통해보이므로 우리가 흔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뒤섞어서 인지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우는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 자유 경제와 자본주의의 꽃으로 알려진 미국땅에서 미국을 부흥시킨 존재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론되고, 하필 그의 정책과 관련하여 그를 '사회주의자라 부른다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는 이것이고 민주주의는 저것이다 라던가, 자본주의는 이것이고 공산주의는 저것이다라는 양분법식 생각에서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루즈벨트는 국가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노력했고,  사회주의적 방식이라  일컬어진 뉴딜정책은 소기의 효과를 발휘했으며, 뉴딜정책의 발판 위에서 미국은 다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 '자본주의'의 꽃을 활짝 피울수 있었던 것이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65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에 걸린 벤샨의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

 

 

 

(미국미술 공부하다 잠시 생각) 2009년 12월 4일 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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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1. 22. 04:05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이전 페이지에서 디트로이트 벽화를 그린 디에고 리베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디트로이트 벽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는 이 벽화가 있는 곳은 'Rivera Hall'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벽화가 그려지기 전 원래 이곳은 내부 정원 (가든 코트 Garden Court)이었습니다.  미국의 큼직한 미술관에 가면 대개 크고작은 이런 형식의 '정원'이 있습니다.  본래 정원이었던 곳인데, 미술관장인 발렌티노가 '벽화'를 설치한다고 했을때 건물 설계자는 자신의 전체적인 건물 구상을 망쳐놓는다고 반대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발렌티노의 벽화에 대한 의욕은 완고했고, 그는 어떠한 반대나 비난에도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벽화의 일부, 나무의 뿌리 부분 중심에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듯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이 4면 벽화의 동쪽면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4면 벽화중에서 동쪽과 서쪽에는 다른 홀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있으므로 온전한 큰 벽이 아닙니다.  남쪽과 서쪽벽은 온전한 벽입니다.  애초에 발렌티노가 리베라에게 주문한 것은 남쪽, 북쪽의 전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리베라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동쪽, 서쪽 벽 까지도 그림으로 채우고 싶어했고,  후원자였던 포드 (헨리 포드의 아들)도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4면 전체의 벽화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사진은 한번 클릭하시면 새창이 열리고, 그 상태에서 확장 표시를 클릭하시면 원래의 큰 사진이 열립니다.

 

 

벽화속에 내가 있다!

 

출입구로 들어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입니다. 마주 보이는 벽이 동벽. 오른쪽이 남벽, 왼쪽은 북벽.  천장부분에는 천창이 있어서 자연조명 역할을 합니다.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리베라는 포드 자동차 공장을 그의 벽화의 주요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1932년) 디트로이트 지역의 주요 산업은 자동차, 의약, 화학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드가에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그의 벽화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해 줬고, 리베라가 그림의 소재가 될만한 산업의 실재 현장을 확인해보고 싶어 했을때 이를 지원해준이도 포드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작업이 진행되는 11개월간, 이 작업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의 여론이 만만치 않았는데,  종교적 신성모독과 관련된 비난도 있었고, 사회주의 사상이 엿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또한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벽화를 왜 '포드' 공장으로 채우는가에 대한 불평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대한 미술관장 발렌티노의 변론이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관심도 없었고, 도와주지도 않았지 않은가. 오직 포드만 이 작업에 관심을 갖고 도와준것이 아닌가? 공장의 문을 열어 보여준것도 포드뿐이지 않았는가?  포드공장이 '주인공'으로 그려진 것에 대한 비난은 이런 논리로 잠재울수 있었다고 하는데,  단순히 짐작컨대 (1) 포드사의 재력이 다른 불만을 무마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했을 것 같고 (2) 포드 자동차관련 회사에 재직하는 디트로이트 시의 시민의 인구가 압도적이라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리베라는 밑그림 작업을 한달가까이 했는데, 전문 사진사와 다니며 포드 자동차를 비롯한 디트로이트 지역의 다른 공장들의 작업 광경을 세밀하게 사진에 담았다고 합니다.  사진도 세밀하게 찍고, 그의 예술가적인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공장의 분위기도 관찰하고, 거기에 그의 맑시즘까지 가세하여 노동자들이 힘차게 일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자동차 생산의 전 공정이 남쪽, 북쪽 벽화에 상세하게 실려있는데, 이 공정은 현장 실무자, 그리고 전문가들의 안목으로 봐도 정확하고, 사실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대충 상상해서 아무렇게나 그린것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한치의 틈도 보이지 않고 성실하게 현장을 벽에 옮겨 담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리베라가 이 벽화 제작을 할 당시는 미국은 '대 공황'의 초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황상태에서도 포드자동차 관련 공장에서 일하는 연인원이 십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리베라는 그의 그림속에 경제대공황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보다는,  공장에서 활기차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담는 것에 주력을 했지요. 그리고 단지 산업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농경에서 산업화로 이어지고 과학사회로 나아가는 인류의 역사를 모두 이 벽화에 담아내려 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천지창조의 대 서사시를 담아냈다면, 리베라는 디트로이트 벽화에 인류 문명의 발전사를 담아 내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벽화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을때 디트로이트의 시민들은 벽화속의 주인공들이 자기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인, 민중인 주인공인 프레스코화가 탄생한 것이지요.

 

 

 

동쪽벽화

 

동쪽 벽화의 상단에는 오른쪽에 과일을 안고 있는 여인, 왼쪽에 곡물을 감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인들의 아랫쪽에는 미시간주에서 생산과는 과일과 채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호박, 옥수수, 포도, 토마토, 배추, 가지, 버섯, 감자등이 소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두 여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왼쪽의 여인은 유럽계의 금발여인이고, 왼쪽은 남미계의 검은 머리 여인입니다. 몸집은 둥글둥글하니, 리베라가 즐겨그리는 풍만한 형태인데 풍요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중앙의 '태아' 가 그려진 그림을 살펴보면 태아를 중심으로 나무 뿌리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뿌리들은 여러겹의 지층들 위에 존재합니다. 화석이 보이기도 하고요. 오래된 지구의 세월을 느끼게 해줍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지구와 자연속에 잉태되고 보호받고 성장한다는 자연친화적인 리베라의 생명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태아 혹은 영아의 그림은 디에고와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의 개인사 때문에 더욱 유명해집니다.  이들 부부가 디트로이트에 11개월간 머물며 벽화 제작을 하던 당시,  멕시코 출신의 칼로는 원래 건강도 안좋은 상태에서 추운 지방에 있자니 아주 괴로웠을겁니다.  이곳에서 칼로는 유산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구의 몸이었는데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되었다가 유산이 되니 그 심정이 무척 괴로웠을겁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그들이 잃어버린 아이를 이 동벽에 그려서 영원히 기억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잃어버린 아이이니까, 디트로이트에 영원히 남기고 싶었을것 같습니다.

 

 

 

 

 

 

 

 

 

 

서쪽벽화

 

돌아서서, 좀전에 지나쳐온 입구쪽 벽을 보면 서쪽벽이 보입니다.  서쪽을 향해서 섰을때 왼쪽이 남쪽, 오른쪽이 북쪽 벽입니다.

 

서쪽 벽화에는 여덟장의 그림에 항공, 항만, 에너지 관련 산업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리베라는 이 산업들의 '평화적'인 면과 '파괴적'인 면을 대비시키려 했습니다.

 

 

 

 

 

 

 

 

북쪽벽화

 

서쪽을 향한 상태에서 왼편 벽이 북쪽입니다. 북쪽 벽화 입니다. 남쪽벽화와 북쪽 벽화 상단에는 각각 두명의 거대한 인물과 거대한 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랫쪽 큰 벽화에는 공장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이 손들은 각기 '광석'을 쥐고 있으며 이 광물들이 나오는 '지층'에 대한 묘사가 바로 아래의 판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북쪽벽화 오른편 구석쪽에 기묘한 그림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기독교의 예수 탄생 장면 같은데, 이 꼬마가 의학 연구실에서 주사를 맞고 있는듯한 광경입니다. 바로 아래에는 체내의 인간 태아의 생장 환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과학 혹은 생명과학이 인간의 생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그림 때문에 당시 기독교계의 반발이 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신성모독이라는 것이겠지요.  어떤 사안에 대하여 '신성모독'을 외치는 집단은 어디에나, 어떤 시기에나 있어왔습니다.  이들의 반발에 굴하지 않은 디트로이트 미술관측에 경의를 표합니다.

 

 

 

북쪽벽화의 왼쪽구석은 독가스 폭탄을 만들어내는 공장의 광경입니다.  과학기술이 생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을 하기도 하지만 동일한 지식이 생명 살상의 방향으로 나아갈수도 있음을 고발하거나 경계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쪽 벽화 중앙의 가장 큰 그림은 1932년 포드사의 자동차 공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제작 공정은 그림의 왼편에서 시작하여 차례차례 다음단계에 대한 묘사고 진행되고, 맨 오른쪽에는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저야 '기계'쪽에 문외한이고 '공장'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모르지만, 자동차 공장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 앞에서 리베라의 정확성에 감탄을 한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그는 공장의 전 공정을 세밀히 관찰했고,  사진 촬영도 세심하게 했고, 사실에 입각하여 그림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자동차 제작 관련 전문가가 이 그림을 본다면 저와는 다른 시각으로 관찰할것이고, 아마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쪽벽화에는 리베라 자신이 '까메오'로 출연을 하기도 했고요.  얼굴이 드러난 사람들중에 그의 조수라던가 실제 공장 노동자등 당시 리베라의 작업을 돕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남쪽벽화

 

 

북쪽과 마찬가지로, 남쪽 벽화의 상단에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연상케하는 두명의 거대한 사람이 그려져 있고, 이들의 중앙에 역시 거대한 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있거나, 무엇을 잡을듯 벌리과 있거나 혹은 광물을 쥐고 있는 손들입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Space Odyssey 라는 1968년 영화 (http://www.imdb.com/title/tt0062622/)를 보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제목의 음악과 함께 그 왜 침팬지 같이 생긴 원시 인류가 뼈다귀를 갖고 놀다가 문득, '문득' 이를 '도구'로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인류의 도약 장면이 나오쟎아요.  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북소리처럼 가슴이 쿵쿵 뛰는데요...이 손들을 보니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장면이 떠오르더라구요.  (아 생각난김에 그 영화나 빌려다 볼까....또다시 산만해지는....)  물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라거나 '도구'사용이 인류 문명의 시초라고 보는 시각은 이미 있어왔지만,  리베라의 벽화에서 그 '손'에 대한 해석은 시각적인 '절정'에 달했다고 봅니다.  이만큼 사람의 '손'을 위대하게 표현한 작가가 또 있었을까요? (과문한 탓인지 저로서는 다른 작품이나 작가를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남쪽 벽화 상단 왼쪽 구석에는 '제약'관련 그림이 있습니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시에 있는 어느 제약회사의 공정이 묘사된 것이라고 합니다.  오른쪽 구석에는 화학제품 공장이 그려져있습니다.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 때문인지 보호복을 입고 얼굴을 모두 가리고 일은 하는 노동자도 보입니다.

 

 

 

1933년 3월 21일 남쪽 벽화가 완성되어 공개되었을때, 이 그림에 묘사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벽화에 그려진 자신들을 발견하고 놀라워 했습니다. 누구도 이 미술관의 벽화속에서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될거라고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공장노동자로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고,  종교나 사상적으로 이 벽화들을 문제시 한 집단은 심한 반박에 나섰습니다. 1933년 3월 26일에는 일만 (10,000)명의 시민들이 이 벽화를 보기위해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벽화가 제작되고 있던 당시의 디트로이트의 분위기는 암담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1933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자동차 산업이 정지 상태였고, 2월에는 디트로이트의 금융계가 몰락했습니다. 미 전역이 대공황으로 접어드는 것과 맞물린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암담함 속에서 노동자를 중심에 세운 이 벽화는 당시의 노동자들에게는 작은 위안 혹은 희망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남쪽 벽화의 공장 노동자들 뒷편에 구경하는 무리들이 보입니다. 노동자복이 아닌 신사복을 입은 남자들,  정장 차림을 한 여성들이 보입니다.  그중에 두 여성은 가슴에 큼지막한 십자가 목걸이가 매달려있고, 손으로 네모난 물체를 안고 있지요.  손지갑이거나 성경책이거나...  이 귀부인들에 대한 리베라의 시각은 썩 유쾌해보이지 않습니다. 이 공장의 분위기와 안 어울리지요.  저는 이들을 '노동과 동떨어진 존재들'로 파악하는 편입니다. 

 

 

 

 

 

1933년 3월, 디트로이트 벽화를 완성한 리베라는 뉴욕의 록펠러 센터 벽화를 위해 디트로이트시를 떠나는데, 리베라가 록펠러 센터에 그린 벽화는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한채 완성직후 폐기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리베라가 자신의 사상적 색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텼고 (벽화에 그린 레닌을 절대 지울수 없다고 우겼고), 록펠러가문으로서는 뉴욕 한복판에 소련 지도자의 초상이 그려진 벽화를 모셔둘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니까요.  (그 십수년후에 몰아친 매카시즘이라는 빨갱이잡기 놀이의 폭풍을 회상해본다면 록펠러가는 현명했던 것이지요. 하하하.)  Bill Bryson 이 그의 성장기 이야기를 담은 책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http://americanart.textcube.com/166 )에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당시, 뭐든 금기시되는것, 안좋은것, 이상한것은 '빨갱이'라는 말로 대치될 정도로, 엉뚱하게 사람 때려 잡을때 쓰던 말이 '빨갱이(communist)'라는 내용이 아주 코믹하게 나옵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한 록펠러가문이 역시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마어마한 리베라의 벽화를 볼 기회를 영원히 잃고 말았지만요.)   그런데 이 벽화보다 록펠러 센터의 벽화가 더 규모가 큰것이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굉장한 그림이 그려졌을지,  무엇을 형상화 했을지, 그 묘사는 얼마나 사실적이고 치밀했을지 도대체 상상이 안가는데요.  아쉽군요. 파괴하기전에 상세한 화집이라도 ....남겨두시지... (웹이나 책을 뒤지면 부분적인 밑그림들이 나오긴 합니다.)

 

그리하여. 이 디트로이트 리베라 벽화가 미국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유일한 리베라의 벽화라고 합니다.  디트로이트를 지나치면서 한나절 시간이 되신다면 이곳을 구경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RedFox  November 2009  (2009년 10월 31일에 방문하고, 11월 21일에 글 정리를 마치다.)

 

 

 

참고문헌:

 

 

 1. Diego Rivera: The Detroit Industry Murals,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2006. Scala Publishers Ltd.

 2.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관련 페이지:

 

 1. http://americanart.textcube.com/94  Detroit Institute of Art 방문기

 2. http://americanart.textcube.com/149 Diego Rivera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1. 5. 05:10

 

 

 

Detroit Museum of Art (=Detroit Institute of Art = DIA = 디트로이트 미술관)는 미국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 (Detroit)시에 있는 미술관 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Enimem 의 8 Mile 이라는 노래로 더욱 친근하게 여겨질만한 도시인데, 자동차로 달려 디트로이트 구역으로 들어서니 도로의 표지판에 8 Mild Road, 7 Mild Road 라는 표시가 보였습니다.  에미넴의 노래 8마일은 정말로 디트로이트에 존재하는 거리의 이름이었습니다.  디트로이트는 한때 포드 자동차를 위시한 화학, 제약 산업이 활발하게 성장하던 곳이었는데, 현재는 미국 산업의 몰락과 함께 도시 자체도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최근에 마이클 무어가 발표한 영화 Capitalism, Love Story 라는 작품에도 미시건주의 자동차 산업의 몰락이 주민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디트로이트 미술관 (http://dia.org/) 은 1885년 설립된 이래 세계 여러나라의 명작을 비롯 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65,000 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규모는 작겠지만, 내용면에서는 파리의 루브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서 볼만한 세계 명작, 혹은 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골고루 다 갖추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제가 이 미술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멕시코의 작가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의 록펠러 건물 벽화사건이 하도 유명해서, 디트로이트에 가면 리베라의 벽화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을 볼 수 있다길래,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벽화가 보고 싶었거든요.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사실 웬만한 작품들은 이미 큼직큼직한 미술관에서 작가별로 주요 작품들을 본 후라서 크게 매력적이지는 않았고,  오직 그 벽화 때문에 디트로이트로 차를 돌렸다고 할 수 있지요.

 

 

디트로이트 시내를 달려 미술관에 도착하면 로댕의 생각하는 남자가 생각에 잠긴채 우리를 반깁니다. 미국에 이 생각하는 남자가 15점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제가 직접 만나본 남자는 (1) 워싱턴 국립 미술관 (2) 메릴랜드 볼티모어 미술관 (3)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 (4) 디트로이트 이렇게 넷입니다.  앞으로도 돌아다니며 이 남자가 잘 있는지 찾아 볼 생각압니다. 

 

 

 

 

 

 

건물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차비가 저렴한 편입니다. 온종일 5달러) 주차장 입구로 나오면 이렇게 정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미시간의 가을도 펼쳐져 있군요.

 

 

 

 

 

입구에서 표를 살 수 있습니다. 성인 8달러. 다른 대도시의 미술관 입장료에 비해서 저렴한 편입니다. 별 불만없이 입장표 값을 지불했습니다.

 

 

 

 

 

시대별로, 지역별로 세계 여러나라의 명품들이 골고루 전시가 되어 있었지만, 제 블로그의 독자들께서 이미 아시는대로 제가 '미국미술'쪽에 정신을 팔고 있는지라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건성으로 보게 되는편입니다.  사진도 주로 미국미술, 현대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찍게 되는군요. (물론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림은 시대를 불문하고 정신 놓고 보기는 합니다만.)  뭐, 와홀이 잘난척하는  초상화 작품이 보이는군요. 

 

 

 

 

예,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발견한 순간, 잠시 제가 저의 우울을 잊을수 있었습니다.  아주 잠시 환각현상처럼 삶의 고통이나, 좌절감, 실의, 자기 연민이나 자기 혐오까지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브르헬 (Pieter Bruegel the Elder)의 혼인잔치 (The Wedding Dance  1566년 추정)를 만났기 때문에.  한번 꼭 보고 싶었던 작품이, 갑자기, 예고없이 문득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 그림에서는 정말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떠드는 소리, 풍악소리, 바람소리 뭐 이런 소리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나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드는 그림이었습니다.

 

 

 

 

뉴욕 맨해턴의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 MoMA)에 가면 노란 바지를 입은 사나이라는 제목의 이탈리아 작가 작품이 있습니다. Michaelangelo Pistoletto (미켈란젤로 피스톨레또)라는 작가인데, 이 사람은 그의 그림을 거울같은 스텐레스 판에 작업을 합니다.  그림을 보면, 거울같은 그림판에 내 모습도 있으므로 나도 그림의 주인공이 된듯한 기분도 들고, 착시 효과도 있고 그렇습니다.  반가워서 그림속에 내가 들어있는 사진을 찍어보았습니다.

 

 

 

 

 

제가 브르헬의 그림에, 그리고 다른 명품들에 혼이 반쯤 나가긴 했지만, 정신을 수습하고,  본래  이곳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멕시코 출신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대형 벽화 였습니다.  마침내, 가서, 내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지요.

 

 

틈틈이, 이 벽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사진은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제가 서 있는 사진 뒷쪽의 벽화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왼쪽 상단에,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구경'하는 관객들이 보이는데 - 가슴에 큼지막한 십자가를 매달은 '귀부인'들과 신사들과 그 아이들이지요. 미국자본주의의 상징, 돈과 그들만의 신교도적(?) 신앙심이 결합된...  저는 특히 그 부분을 상세히 써보고 싶어집니다.

 

이 사회주의사상이 강하게 스며든 벽화가 '디트로이트'에서 뭉개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만으로도 저는 디트로이트 시가 좋아집니다. 디트로이트는 이 벽화를 살려놓기를 잘 한 겁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벽화'를 보기위해 이곳에 오니까.

 

방문: 2009년 10월 31일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23. 07:35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미국 사실주의 계보정리 페이지에서 대략  미국 회화에서의 사실주의를  (1) '사회적 사실주의'와 (2) '지역주의적 사실주의'의 두가지 부류로 나눠서 도표를 그려본 바 있습니다.  미국 회화에서 사회적사실주의 (social realism)를 논할때, 반드시 거론되는 사람이나 단체들로는 Henri (헨라이)를 중심으로 한 "Ash Can (쓰레기통)" 화가들, "The Eight (8인회)"등이 반드시 떠오르게 되는데,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Ash Can 이나 The Eight 멤버들이 조금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미국 사실주의 화풍을 논할때 이 두 그룹은 하나의 동일한 그룹으로 간단히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동일한 그룹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구성원들이 비슷한 사회적 안목을 가지고 사회성 있는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Ash Can 학파와 The Eight 구성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Ashcan 혹은 Ash Can 이라고 알려진 이 미술그룹을 우리는 Ashcan School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Robert Henri (로버트 헨라이)를 중심으로 그와 함께 그림 작업을 하거나, 혹은 그에게서 미술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이 헨라이의 영향으로 '사회성'있는 그림을 그리면서 정체성을 만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Henri 의 동료나 제자중에서 애시캔 학파로 알려진 인물들로는 Henri, Glackens, Hopper, Shinn, Sloan, Luks, Bellows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럽 인상파화법의 영향을 받은 미국인상파 그림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뉴욕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의 풍경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니까 ash can - 쓰레기통 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겠지요).

 

The Eight (8인회)는 사실 딱 한번, 1908년 뉴욕의 맥베쓰 갤러리 (Macbeth Gallery)에서 여덟명이 합동 전시회를 한것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이 8인회 전시회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2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http://americanart.textcube.com/281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The Eight Member가 아닌 Ahscan School 멤버였던

  *. George Bellows (1882-1925) 조지 벨로우즈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이상입니다. 이들중 다수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삽화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특히 The Masses 라는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잡지의 편집이나 삽화에 관여한 화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위에 올린 이미지는 John French Sloan 이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로 그린 작품입니다.  1914년 4월 20일에 미국 콜로라도주의 광산에서 광부들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자선가'로 널리 알려진 록펠러 (Rockefeller) 집안이 운영하던 광산이었습니다. 콜로라도 국방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하여 어린이 11명이 포함된 20여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잡지는 이 사건을 표지로 실은 것입니다.  표지 그림이 생경하고 과격해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처참하고 과격했겠지요.  (미국 구경을 하고 돌아간 내 조카아이들의 상상속의 미국사 속에  이런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록펠러는 하늘이 보낸 천사는 아니었겠지요).

 

물론 미국의 사회-사실주의 작가들이 모두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상상하시면 안됩니다.  이 표지화 작업을 한 존 슬로언 역시 '예술지상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성이 담긴 그림을 그리되, 사회적인 이념이 '예술'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지요. 그래서 과격한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부터는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한 편입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이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가운데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 여덟명의 미술가들중에서 슬로언에 관심이 많지만, 일단 이들의 '대장'격인 Robert Henri 부터 간단히 소개하고 그 뒤를 이을 생각입니다.  헨라이는 작품보다는 그가 이끌었던 애시캔, 8인회 때문에 미국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 '석자 (?)'를 박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Henri 는 '헨라이'라고 발음합니다.  Hopper 관련 책에서 읽었는데 그가 자기의 이름을 반드시 '헨라이'로 발음해줄것을 극구 강조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그러니 그의 희망에 따라서 '헨라이'로 소개합니다.  (제 글의 독자들이 막 - 무척 똑똑해지고 교양이 업그레이드 되는 소리가 들립니다 헤헤헤.  미술 관련 글중에 헨라이 이름을 제대로 표기한 한글 페이지 찾아보기가 힘드실걸요. 헤헤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걸어놓은 곳이다.

왼쪽 가까이에서부터: Henri, Kent, Luks 의 그림들이 차례대로 보이고

오른쪽 가까이에서부터: Everett Shinn, William Glackens 가 보인다

저 너머에 Benton 의 그림이 있다...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