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막내동서는 우리 막내시동생 (막내동서의 남편)과 내가 걱정스럽다고 한다. 왜냐하면, 남편을 잃은 나와 아버지보다도 소중했던 큰형을 잃은 막내시동생이 너무나 멀쩡해 보이기 때문이란다. 슬퍼해야 할 시간에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멀쩡하게 지내는 모습이 근심스럽다고 한다. 이러다가 뒤늦게 뭔가 '쓰나미' 같은 무시무시한 애도기간을 보내게 될까봐 불안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을 해 봤다.
뭔가 잠을 못이루다 새벽녘에 선잠이 들었을 때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내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가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슬프게 울다가 잠에서 깼다. 그 때 나는 문득 생각했다 -- 남편이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걸까? 맞다, 그는 어떤 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나의 아버지' 역할을 했었다. 남편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아버지'에 가까운 자애롭고 한없이 퍼부어주던 존재였으니까. 내 꿈속에서 나는 '남편'보다는 '아버지'를 잃은것에 통곡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혹시, 그게 아니면, 나는 무의식중에라도 남편의 떠남이나 죽음에 대하여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게 아닐까? 나는 정말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이 거대한 죽음의 슬픔이 쓰나미처럼 언젠가 내게 닥칠 것인가?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하늘로 떠나 보내게되면, 거기서 배우는게 있다. 혹은 내면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 힘이란 뭔가하면, '죽음'이 더이상 두렵지 않으며, 낯설지 않으며, 어딘가 친근하며, 겁날게 없으며, 그것이 내 코앞에 닥쳐와 나를 불러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당신이 간 그 세상에 내가 가는 것이 뭐가 그리 무섭게 낯설겠는가? 그래서 남은자는 담대해지고,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 수의를 얼마짜리를 할지, 관은 얼마짜리를 주문할지, 화장한 내 잿가루를 어디다 뿌릴지 스스로 정해서 자식들에게 정확하게 지시할수 있게 된다.
내게 얼마의 시간이 이 지상에 남아있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결국 나도 그리 갈것이다. 나는 그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당신이 그리 간 시각. 그리고 내가 그리 가게 될 시각. 그 시간의 두 점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런데 종이접기를 하듯, 당신이 그리 간 시간과,내가 그리 가는 시간의 두점을 포개면, 두 다른 시각이 동일한 점에서 만난다. 나는 두개의 시각이 만나는 그 점에 대하여 확신한다.
당신이 그리 간 시각과 내가 그리 가게될 시각 - 그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을 뿐이고, 그 간격을 나는 살아가는 것 뿐이다. 내게 슬픔의 쓰나미가 몰려올지, 이대로 나는 태평하게 살게 될지, 그것은 시간이 흘러가면 알게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