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6. 3. 31. 04:30

 

편지

이 인간이,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그가 이.겼.다. 

 

 

이 인간이, 이 한 장의 편지로 나를 결박지어 놓고, 옴짝달싹도 못하게 묶어 놓고 가버릴 줄 알았다. 

 

2026년 3월 24일 화요일.

이상학 선생은 그 날 오전 회진을 마치며 나를 입원실 밖으로 불렀다. "이번 주 안이 될겁니다..."  그는 간호사에게 지시했고, 6인실 규모의, 아직 아무도 사용한적이 없는, 그래서 방 호수도 정해지지 않은 방을 우리에게 내 주었다. "이곳이면 가족들이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내며 방문객들을 맞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입원실에서 넓다란 개인 공간으로 옮겼다는 소식에 소민엄마가 예쁜 풍선 장식들을 한아름 만들어가지고 왔다. 나는 아이패드를 꺼내어 유튜브에서 우리가 즐겨듣던 노래를 찾아서 그에게 들려주었다.  두어달 전쯤, 일요일 아침에 송도의 교회로 가던 길에 CBS에서 흘러나오던 '길병민'이 부른 '못잊어,' 그리고 '마중.'  두곡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그는 앉아서 그 앞의 테이블에 올려진 아이패드 화면을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두곡이 끝나자 그는 아이패드를 치우라고 손끝으로 말했다. 

 

나는 장난도 쳤다. 새로 옮긴 넓다란 방에는 아직 냉장고가 없었고, 미니 냉장고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었다. 딱 개집크기의 그 빈공간이 재미있어서 나는 강아지처럼 그 빈공간에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 '멍멍멍!'하면서 그를 불렀다. "멍멍멍! 여보! 여보!" 내가 시끄럽게 웃으며 그를 부르자 그가 피곤하다는 듯 힘겹게 외쳤다, "왜!"  내가 얼굴을 그의 얼굴 앞에 들이밀고 "웃어! 웃어"하고 웃으면, 그는 힘들어도 나를 위해서 웃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눈가에 주름이 가득 잡혔다. 

 

송도에서 목사님이 달려오셨다. 우리는 찬송가 두가지를 함께 불렀고, 목사님은 '에녹'에 대한 성경구절을 읽어주셨다. 에녹이 당시나이를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35세쯤 살다가 하느님 곁으로 갔다고 하는데, (남들이 구백살쯤 살때 그는 육백살쯤 살았다고 하던가) 그러나 그의 삶은 '완전한' 삶이었다는 그런 말씀이었다고 기억한다. 목사님은 간절히 간절히 기도해주셨고,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그리고 언제라도 계속해서 달려와서 기도하겠다고 하셨다. 그는 내내 울었다. 그는 나보다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간절하게 기도했다. 

 

오후에 이상학 선생이 다시 들렀다. "이제 마지막 시간이 올것 같습니다. 며칠이 될지, 얼마나 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의식을 잃을 것이고, 예상치 못한 여러가지 현상이 일어날것입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서 뭐랄까, 자기 자신이 우리의 자식인것 같은 그런 애정이 스며나왔다. 

 

이 상학 선생

3월 5일, 세브란스는 우리를 집근처 J병원으로 이전시켜주었다. 세브란스에서 할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오전에 퇴원하여 집에 들러서 샤워를 하고, 옷을 두꺼운 겨울코트에서 가벼운 간절기패딩으로 갈아입었다. 그것이 그가 이 지상의 집에서, 그의 의자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이었다. 조카들이 왔고, 잠시 웃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이상학 선생은 그의 의료기록을 살피고나서 말했다, "여기 계시다가 혹시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저희는 선생님을 세브란스 응급실로 이송하게 됩니다."  머릿속에 드라마 '폭삭속았수다'에서 보았던 양관식이 마지막에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다는건가?

 

간호사들은 첫날부터 기계적으로 물었다, "진통제가 필요하신가요?"  우리는 진통제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식사하기를 힘들어해서 '밥'을 대체하는 우윳빛 영양제를 맞고 있었다.  세브란스에서도 그랬으니까, 아마도 마지막 한달을 그 우윳빛 '밥영양제'로 살았던 것 같다.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일주일간 남편은 아침이면 말했다, "어서 힘을 내서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는 단호했다. 그는 물이라도 잘 삼키고 소화시키려고 애썼고, 캔서음료를 먹으려고 애썼다. 캔서음료는 결국 1/4쯤 먹어보고 포기했다. 속이 편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그의 미각을 즐겁게 해 준 것은 '포카리 스웨트'였다. 그 음료를 그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입을 축일정도로 마시곤 했다. 

 

12일이었다. 이상학선생이 별도로 면담을 하자고 했다. 그의 진료실에서 그는 내게 물었다. "자식이 있으신가요?" "예, 아들 둘이 있죠." "왜 아이들이 안보이나요?"  "미국에서 회사다니고 있어요."  "자식들 안옵니까?" "네?"



"지금 저분이 살아서 의식이 명료한채로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인데요. 이 모든 검사결과와 수치들이 - 저분이 지금 당장 돌아가셔도 전혀 이상할게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지금 저 상태에서 진통제도 없이 저렇게 명료하게 계신것이 저에게는 불가사의인데요. 자식들 안올겁니까?"  이상학선생은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것같았다. "남편은 멀쩡한데요. 힘들지만 통증은 아니고요, 그냥 좀 힘들뿐인데요....제가 곁에서 주물러주고 쓰다듬어주면 곧 괜챦아지는데요..." 내가 의아해져서 어물어물 대꾸하자 의사는 화가난듯 내게 말했다, "그게 저로서는 불가사의라는 겁니다. 저분은 지금 극심한 통증을 겪고 계신데, 어쩐 일인지, 스스로 통증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통증을 통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통증이라는것을 모르시는것 같아요. 아니면, 가족들을 위해서 참고 있던가요. 부인을 위해서 참고 있는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면, 신앙의 힘일지도 모르고요. 저분은 지금 극심하게 아프고, 지금 당장 돌아가셔도 이상할게 없어요.  당장 아들들을 부르세요! 벌써 늦었는지도 몰라요." 

 

이상학선생은 의사로서 이러한 환자의 상황을 환자 본인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걸 그이에게 말하면 우리 그이는 좌절할거에요. 오늘 아침에도 어서 힘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그 희망으로 버티고 있는데..."  "환자도 자신의 상태를 알 권리가 있어요. 스스로 인지하고 마지막을 맞이할 권리가 있어요. 저렇게 의식이 명료한 분의 경우 우리는 반드시 알려야해요."  그래서 나는 이상학 선생에게 말했다, "제가 전달할게요. 이 사실을 제가 - 그가 마음 다치지 않게 전달할게요. 아들들도 부를게요..." 

 

내가 그에게 의사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때 ("당신이 현재 이렇게 의식 명료한채로 정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기적적인 일이래. 아무래도 곧 하늘로 가게 될 것 같다고, 당신이 마지막 정리를 하는게 좋을것 같다네. 당신이 놀라운 사람이라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어.") 그는 크게 낙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았으나 우리 서로 알고 있었으리라 우리의 운명의 시간이 근처에 와 있다는 것을. 

그는 내게 나가서 글쓰기 좋은 공책과 필기구를 사오라 했다. 내가 늘 갖고 다니던 JP Morgan 다이어리를 꺼내자, 그건 스프링이 없어서 글쓰기에 불편하다고, 밖에 나가서 스프링노트와 그립감 좋은 펜을 사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그 공책의 첫장에 그는 내게 편지를 썼다. 

 

이상학 선생은 매일 아침 내게 물었다, "아들에게 연락 했나요?" "아들이 언제 온다고요?" "아들이 왔나요?" 아들들이 도착할때까지 그는 집요하게 물었다. 그는 내가 추측하기에 우리 큰아들 또래로 보였다. 그냥 딱 내 아들만한 젊은 의사였다. 마치 그가 우리집 큰아들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내 3월 18일 아이들이 도착하여 병실에서 큰아들과 맞닥뜨렸을때 그가 한 말은, "작은 아들은 어딨나요"였다. 이상학 선생이 왜 그렇게 우리 가족에 대하여 고심하였는지는 --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미스테리였다. 

 

진통제는 16일쯤부터 투여했던 것같다. 그가 힘들어하며 내게 주물러달라고, 쓸어달라고 하던 그런 현상들에 대하여 '진통제'가 답이 될수있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간호사에게 진통제를 부탁했는데 -- 그거였다. 진통제가 들어가자 그가 느끼던 '불편함'이 많이 해소되었고, 그가 좀더 긴 잠을 잘 수 있었다. 의사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 보통사람들이 '진통제'로 해결하던 '고통'을 그는 '고통'보다는 '불편함'으로 인지하고 이것과 진통제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가 수년간 고통을 참아내면서 고통을 참는데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고통으로 인지하지 못했을수도 있다.  진통제는 처음에는 하루에 2회, 며칠후부터는 하루에 3회, 그리고 마지막 2일간은 하루에 4회로 늘어났다. 진통제는 통증을 완화시켜주기도 했지만,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기도 해서, 그는 점점 몽롱해져갔다. 그렇지만 그가 의식을 놓은적은 없었다.

 

24일 오후에 들러서 -- "이제 긴 임종의 시간이 시작된 것같습니다, 며칠이 걸릴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우리에게 속삭이고 나갔던 이상학선생은 그후 2시간도 안되어 간호사들의 호출을 받아야 했다. 그는 오후 4시15분에 임종선언을 했다. (하지만 남편이 내 품에서 마지막 숨을 내쉰것은 오후 3시 50분이었다. ) 의사는 쉽게 우리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마음이 너무나 여린 그는 유족을 그가 온전히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제가 임종전의 환자들을 많이 만나왔지만, 이런 분은 저로서도 처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담담하게 자신의 마지막을 받아들이실수 있었는지, 어떻게 이렇게 끝까지 의연하셨던 것인지...오늘 아침까지도...마지막까지 침상에서 공책을 펼치고 펜을 들고 계셨지요?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요....가족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을까요? 아니면 신앙의 힘이었을까요?"

 

이상학 선생은 -- 남편의 마지막 여정에서 우리가 어둠속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을때 -- 계시를 주거나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도록 하느님이 보낸 천사 같았다. 그것이 그의 역할이었던것 같다. 그러지 않고는, 그가 왜 나보다 더 애절하게 자식들을 부르고, 임종한 환자곁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는지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오후 3시 50분에서 4시 15분 사이. 

 

아무래도 여기서 며칠간 밤샘을 하며 아빠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분의 침상이 필요하다고 -- 찬홍이 작은 엄마가 집에 캠핑용 침상이 있으니 그걸 가져오자고 했다. 찬홍이와 찬홍이 작은엄마가 병원 바로 근처에 있는 소민이네 집으로 향했다. 나는 남편의 침대옆에 앉아 성경책을 펼쳤다. 목사님도 다녀가셨고, 내일 또 오신다고 하셨고...며칠전부터 나는 그의 머리맡에서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소리내어 읽어주고 있었다. 그 시편은 그가 힘든시간에 혼자 읊곤 했었다. 산책할때도. 내가 학교에 수업을 하러 가고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낼때, 산책을 할때, 그는 그 시편을 기도하듯 외곤했다.  그걸 몇차례 읽자, 곁에 있던 지홍이가 말했다, "엄마 엄마, John 316이 뭐였죠?" John 316은, 미국에 가면 미국 사람들이 자기집 정원에 저런 작은 깃발이나 현수막이나 그런것으로 많이들 장식을 한다. 저게 뭔가 찾아보니 성경구절 요한복음 3장 16절인데 하도 유명하니까 미국사람들은 그냥 존316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으니... 이런 구절이다. 그래서 시편을 읽다말고 John 3:16을 찾아서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그때 지홍이가 저만치 (그 홀이 정말 컸다. 6인실 규모였다)에서 말했다, "엄마, 아빠가 숨을 안쉬시는것 같아요."

남편은 30분쯤 전부터 목을 왼쪽으로 기울인채로 잠들어 있었고, 나는 왼쪽으로 기울인 남편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받친채로 앉아서 왼손으로 성경책을 붙잡고 앉아 성경을 소리내어 읽고 있던 터였다. 나는 성경에서 눈을 떼어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편안하게 자는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내쪽으로 기울이고, 내 오른손에 그의 머리를 맡긴채로.  몸을 기울여 그의 얼굴에 내 귀를 대보았다. 숨을 쉬나 안쉬나 확인하려는 제스쳐였지만 잘 모르겠다... 맥박을 잡아보았다. 앙상한 그의 손목. 잡히는것은 따뜻한 내 손의 맥박이었다. 두근두근하는 나의 맥박. 나는 잠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지홍아, 아버지 하늘나라로 가신것 같아...."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 50분. (오후 3시 50분) 나는 몇차례 머릿속에 각인하듯이 되뇌었다. 오후 3시 50분.


지홍이가 간호사실로 가려고 했다. 나는 그를 제지했다. "지홍아, 가만있어. 조용히 해. 아무도 부르지마, 문 잠궈. 아무도 방해하면 안돼." 

 

남편은 평소에도 잠잘때 눈을 살짝 뜨는 증상이 있었다. 내가 눈을 꽉 감고 잔다면, 남편은 살짝 뜬채로 잤다. 그 상태로 잠든 남편의 눈을 내가 몇번 쓸어내리자 눈이 감겼다. 

 


"여보...당신...가..? 벌써 갔어? 아버지한테 간거야? 여보 잘가. 다행이다 여보. 당신이 힘들게 갈까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가볍게 갔네. 다행이다 여보. 나비처럼 가볍게 갔네. 꽃잎에 앉았던 나비가 날아가듯 그렇게 가볍게 갔네. 정말 잘했어. 여보." 나는 시편 23편을 다섯번쯤 더 그의 귀에 들려주었다. "여보, 수고했어.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내가 당신한테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죽을 죄를 졌어. 그것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사랑해. 잘가. 내 곧 따라갈게. 잘가. 왕눈이가 벌써 나와서 당신 반겼지? 하느님도 당신 데리러 오셨지? 하느님이 왕눈이 데리고 마중나오셨지? 잘가. 사랑해." 


4시.  찬홍이와 간이침대를 가지러 나간 소민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찬홍이하고 빨리 와, 큰아버지가 떠나셨어" 소민엄마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그날 길에서 엉엉울던 중년 아줌마. 그 사람이 소민엄마였다. 


4시. "지홍아, 가서 간호사들 불러라. 정리하자." 지홍이가 잠긴 문을 열고 바로 옆에 붙어있던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간호사들이 여러가지 도구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여러가지 도구들. 떠나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방해하는 장치들. 나는 그 장치들을 보면서 간호사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 내 표정이 되게 무서웠을 것이다. 나의 무서운 표정.) 


  "우리 남편을 흔들지도 말고, 뭘 찌르려고 하지도 말고, 심장충격이나 마사지도 하려고 하지 말고, 조용히 편안하게 떠나시게 하세요. 건드리면 안돼요." 

 

나와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헤드 간호사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압니다. 저희가 최소한의 검사를 한 후에 사망진단을 위해서 의사선생님 호출을 하게 됩니다. 최소한의 검사만 진행하겠습니다." 

 

그들은 심전도 검사 장비 (손발에 뭐 동그란거 붙이고 심전도 보는것)를 사용하고, 체온계를 사용하고나서 의사를 호출했고, 그 바이탈싸인 체크하는 기계에서 '고요한 수평선 같은'그의 바이탈싸인을 종이에 프린트 하였다 (영주증 프린터 같았다). 그 프린트한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의사는 우리곁에서 떠나기를 주저했다. 그의 그런 온정어린 제스쳐가 우리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날 새벽 1시에서 1시 30분 사이: 천사의 추락 

 

 

그날 밤, 애들을 집에 가서 자라고 이르고 둘이 남겨졌을때, 남편은 힘들어하며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몸에 열이나거나 몸살이 났을때 나도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자반뒤집기를 하는데, 남편이 그렇게 괴로워하는듯 했다. 그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댄채 몸을 조금씩 조금씩 뒤척였다. 나는 그의 침대아래에 가족용 보조침상을 잇대어 붙인채로 머리를 남편의 발치쪽으로 향한채 누워있었다. 그래야 누운채로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남편은 누워서도 내 얼굴이 모여야 안심했으니까. 내 얼굴은 마치 햇님처럼 늘 그의 시야에서 빛나야했다. 내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그는 불안해했다. 그 밤에도 나는 그렇게 비몽사몽하고 있었다. 조금 자다깨니 남편이 뒤척이면서 방향을 바꾸어 벽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뒤척이면서 몸의 방향을 바꿨구나....생각하며 다시 눈을 붙이다 떠보니 남편이 그 사이에 좀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앉아있었다. 내 머리쪽으로 온 것이다. 아이구, 진통제가 강한것이 들어갔는데도 힘드는구나...하면서 다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무언가 따뜻한 덩어리가 내 몸을 덮쳤다. 

잠결에 내 몸에 덮쳐진 '이것'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했고 (약 0.5초), 그리고 깨달았다. 몸을 뒤척이던 남편이 보조침상위의 내 위로 '추락'한거였다. 다행히 침상을 낮춰놓았고, 내가 보조침상을 잇대어서 붙여놓았으므로 남편이 균형을 잃고 그대로 추락할때 -- 자고있던 내 몸위로 엎어진 것이다. 나는 내 몸위로 떨어진 남편을 그대로 부둥켜 안았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렸다. 잠이들었거나 혼수상태 같았다. 남편을 부둥켜 안은채 어둠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여보, 그냥 여기서 내 품에서 당신이 떠났으면 좋겠다...더 고생하지 말고, 내 품에서 하늘나라 아버지께 가면 좋겠다..."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남편을 깨우려고 했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고, 흔들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나비처럼 가볍던 그가 울산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져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를 침상에 앉힐수 있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뭔가, 마지막이 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가서 자라고 보낸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의식이 없으셔. 지금 와라." 새벽 1시 30분. 그리고 10분쯤 후에 아들들이 들이닥쳤다.  아들들과 힘을 함쳐서 아빠를 침상에 다시 온전하게 눕히고, 옷을 정리해주고, 침상을 정리해주었다. 3시쯤 남편이 의식을 회복했고, 아이들을 보고 웃었다. 깨어났다!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가서 좀 더 자고 샤워하고 아침에 오너라." 

고통의 본질

남편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의지대로 행동하고 있었고, 의식이 명료했다. 24-5. 19일쯤이었다. 밤에 잠을 못자고 뒤척일때 휴게실에 나가서 쉬곤했는데, 그날 밤 휴게실에서 그가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했다.

"이 고통의 실체를 알 수가 없어..."

자기가 앓고 있는 질병과 그것이 야기하는 여러가지 신체적 고통에 대하여, 인간의 당면한 이 고통에 대하여 그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분석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그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힘들지? 아이구 힘들지? 내가 꼭 붙어 있을게 겁내지 말고 힘내. 응?"

 

다음날 밤에 다시 휴게실에 나갔을때 그는 말했다.

"이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수가 없어...

그런데 말이지...

나는 이 고통의 끝까지 갈거야.

그것이 나의 자유이고, 나의 해방이야.

다 내려놓고, 이 고통의 끝까지 갈 거야…

이것은 거룩한 사명이야.... 

그러니까, 이 길에 당신은 개입하지 말아…

누구도 개입할 수 없어. 나의 완성이니까. " 

 

 

생각에 잠긴 그의 곁에서 어릿광대처럼 나는 그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응, 그래, 다 내려놓고 가는게 그게 완전한 순종이지....

그 길 끝에서 하느님이 팔벌려 당신을 맞아주시지?...

그러니까... 그 상을 온전히 당신이 받는거지?...

나는 거기에 초대받지 않은거지?

응... 그러니까...내가 할 일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는거 밖에 없네...

그런거지? 응? ..."

 

 

나는 개혁자로 살았다.

 

 

어느날 새벽, 침상에 누운채로 그가 힘겹게 말했다.  이 때는, 진통제가 여러차례 수액으로 들어갔고, 진통제의 영향인지 그가 자주 몽롱해지곤 했으며, 부드럽던 그의 목소리 대신에 힘겨운채로 쥐어짜던 쇳소리로 간신히 말을 띄엄띄엄 하던 때였다. 아이들이 도착한 이후이니까 3월 18일에서 24일 사이이다. 

 

"나는....개혁자....개혁자...개혁자로 살았어." 

 

내가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귀에 담으며 확인했다. "개...혁...자?  개...척...자?"

"개...혁...자..."  그가 답했다.

 

내가 대꾸했다. "Reformer?  Innovator? 응. 그래. 당신은 늘, 바로잡으로 했지. 잘 못 된것들, 새로이 나아가야 할 방향들. 아주 작은것에서 큰 조직까지, 당신은 바로잡으려고 애썼어. 인정." 

 

마지막 댄스는 나와함께

 

 

3월 5일 J 병원으로 옮길때, 그는 자력으로 일어나 걷고, 의사를 만나고, 내게 이런 저런 지시를 했다. 가만히 누워있기보다는 일어나 병원 복도를 산책하거나, 앉아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최종 한두달은 그 좋아하던 책을 잡지 않았는데 - 극심하게 피로하여 활자를 읽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뉴스도, 음악도 피곤하다고 했다. 나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거나, 사색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그의 얼굴의 황달이 짙어졌다. 얼굴에 번지던 황달이, 가슴으로, 상체로, 전신으로 퍼졌다. 그리고 오렌지 쥬스 같던 노란빛이 주황색처럼 짙어졌다. 매일 매일 그의 기력이 떨어졌다. 어느날부터인가 혼자 화장실에 다니던 그를 부축하여 가게 되었고, 어느날부터인가 혼자 산책을 나가던 그를 내가 곁에서 따르게 되었으며, 아이들이 도착한 이후에는 부축하여 걷는것도 쉽지 않아서 내가 그를 부축하여 휠체어에 태워서 병원 복도를 산책하게 되었다. 그는 23일 (하루 전날)까지도 휠체어에 앉아 산책하고 싶어했다. 

그가 기운이 떨어져서 부축을 해야 일어서고 앉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때 - 내가 그를 가볍게 일으키고 앉히는 방법을 알아냈다. 일어나고 싶으면, 그는 침대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러면 나는 그의 발에 신발을 신기고, 나를 정면으로 보게 했다. 그가 두 팔로 내 목을 감싸안으면, 나는 두 팔로 그를 안아 두손을 그의 등뒤에 깍지끼고, 오른쪽 다리를 그의 다리 사이에 집어 넣고 '지렛대'의 원리로 그를 가뿐하게 세웠다.  신기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애써 힘을 주지 않아도 그가 가볍게 세워졌다. 그리고나서 그를 휠체어에 앉혔다. 침대에 다시 앉힐때도 동일한 방식이었다. 그가 내 목을 안으면, 나는 그를 안고 그의 등에 손깍지를 끼우고, 자물쇠를 채우듯 그를 안고 그를 살포시 내려 놓았다. 

황달과 함께 그의 몸의 붓기가 심해져서 이뇨제 처방을 받자, 한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을 가야 했는데, 그렇게 한시간 단위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나야 했을때,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일어나고 다시 앉을때, 그가 현기증을 느끼면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나를 안은채 내게 기대어 서있곤 했다. 그는 아기 같았고, 사랑에 빠진 젊은이 같았다. 그는 온전히 내 몸에 기댔고, 그는 따스했고, 나는 그런 지옥같은 고통의 시간에도 달콤함에 휩싸이곤 했다. 그는 온전히 자신을 내게 맡기고 있었다. 우리는 흡사 느릿느릿 춤을 추는것 같았다. 이런 동작을 그는 마지막까지 했다. 마지막날까지 그는 내게 의지한채 화장실에 갔으니까.  그랬다, 그는 마지막날까지 의식을 붙잡고, 스스로 화장실에 가서 극히 삿적인 영역의 일을 책임지고 싶어했고, 나는 그런 그를 도왔다. 느릿느릿 춤을 추듯. 

마지막 날에는 그렇게 힘겹게 화장실에 갔다가 -- "아빠가 도저히 화장실에 앉았다가 일어날것 같지가 않아." 아이들과 의논하고 다시 침상으로 돌아왔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화장실 출입이었다. (아이들이 도착한 이후에는 아이들도 아버지의 화장실 출입을 도왔다. 아버지가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면, 큰아들은 위생물휴지로 좌대를 소독하고 마른휴지로 깨끗이 닦아 놓았고, 뒷처리까지 말끔하게 해 놓았다. 아버지의 존엄을 아들은 지키고 싶어했다.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했다.) 

마지막 날 오전까지 당신과 나는 그렇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춤을 느릿느릿 추었다. 평소에 내가 춤을 추자고 하면 '됐다. 너나 춰라'하고 밀쳐내곤 하던 당신은 마지막 며칠, 나와 아주 느린 춤을 춰 주었다. 두 손으로 내 목을 감싸고, 내가 당신을 깍지끼어 안고 느릿느릿 춤추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사랑의 완성,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부활 하는가.

 

 

나는 매 순간 그와의 마지막을 떠올린다. 내가 오른손으로 왼쪽으로 기울어진 그의 머리를 받치고 앉아 왼손으로 성경책을 펼치고 시편을 읽던 장면을.

 

그리고 그의 정적을.

 

수숫대 위에 잠시 앉았던 잠자리가 훌쩍 떠나듯 

 

혹은 꽃잎위에 앉았던 나비가 날개짓하며 날아가듯

 

그가 훌쩍 우리곁을 떠난 순간을.

 

왜냐하면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내게 위로가 되는지, 나는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 그의 어머니는 나이 40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가 스무살때의 일이라고 한다. 돌아가시기 전 그의 어머니는 길음동 산동네와 주택가를 오가며 '아모레 화장품'을 판매했다고 한다. 속칭 '아무레 아줌마'였다. 그의 어머니는 성격이 좋고 싹싹해서 화장품 판매를 아주 잘 했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한량이었던 남편과 삼형제가 온전히 어머니의 책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 마흔에 '아모레아줌마'였던 분이 이 세상에서 떠났을때, 그 집의 생계는 아주 막막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 집 삼형제는 '거지 신세'를 간신히 면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그가 코리아 헤럴드에 공채로 들어가서 첫 월급을 탔을때에야 그 집은 '밥걱정'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것이 1985년의 일이다. (41년전의 일이다). 그해 9월 10일에 대학교 4학년이던 나는 코리아헤럴드 수습기자였던 그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가 말로만 듣던 '소년가장'이었다는 점에 꽤나 끌렸다. (멋있쟎아. 어린 나이에 가족을 책임진 가장이라니!) 그리고 내가 선망하던, 되고 싶었던, 코리아 헤럴드 기자라는 것도. 딱 이 두가지가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결혼'을 생각할 시점에서 나는 갈팡질팡했다.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한량인 아버지는 내가 보기에 멀쩡해보이는데 도통 돈을 안벌었고, 대학 학비를 대야 하는 막내도 있고, 없이 살다보니 일가친척의 도움을 많이 받아 그들 모두 어딘가 빚쟁이들처럼 삼형제를 업신여기는것도 같았는데, 게다가 종손집안이라 제사도 많고, 뭐 아무리 뜯어봐도 도통 요란스럽고 복잡하고 골치아픈 집안이었다. 그냥 평범하기만 해도 좋을것 같았다. 말하자면 '평균이하'의 환경이었다. 

 

그는 '평균이하'의 그의 가정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선포'를 하곤 했다. "지금은 내가 이렇지만, 그래도 언젠가 내가 미국유학시켜줄게. 박사까지 공부하게 해줄게. 나를 한번 믿어봐. 미국유학가는게 소원이라며? 내가 유학시켜준다니까!"

 

그렇다. 나는 그 당시 미국유학가는게 '소원'이었고,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하고, 결혼 따위는 생각도 없다고 말하곤 했고 -- 그는 결혼하고 나면 언젠가 내게 유학을 시켜줄거라고 사탕발림처럼 말했다.  갈팡질팡하던 나는 그렇게 '평균이하'의 집으로 '시집'을 갔고, 그 이후 몇년간 파란만장한 시집살이를 겪었다. 지금도 회상하기 싫을 정도로 구질구질하고 짜증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쨌거나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냥 가난한 그가 좋았다. 착한 그가 좋았다. 나를 하늘같이 위해주던 그가 좋았다. 1988년 가을 내가 시장에서 산 싸구려 임신복을 걸치고 역시 길거리에서 산 초록색 신발을 신고, 남산 드라마센터였던가 거기서 진행된 '칠수와 만수' (안성기씨 나온 영화)시사회를 간적이 있는데, 극장 앞에서 박중훈씨도 보았는데, 그때 남편이 내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옷도 못사주고...미안해.." 


그는 가난했지만 꽤나 당당했고, 내게 미안해하면서도 의연하고 당당했다. 가난한 주제에 의연한 그의 모습이 꽤나 낯설고, 특이하면서도, 그것이 그의 매력으로 여겨졌다. 가난따위 나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결국 그는 나의 미국 석사 박사 학비를 댔다. 그의 말대로 모든것이 이루어졌다. 정정한다. 그의 말대로 그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그는 젊은날  가난뱅이 청년시절 내게 했던 약속을 모두 지켰다. 그가 모든 약속을 지켰으므로, 나는....나는...음...뭔가 나도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았다.  박사학위를 마친 후에도 한동안 미국에서의 내 생활은 내가 희망한대로 펼쳐진 것은 아니었다. 영주권을 조건으로 M대학은 내게 충분한 월급을 주지 않았다. 영주권을 위해서 대략 5년간 나는 아파트 월세나 간신히 낼정도의 월급을 견뎌야 했다. 그 기간이 내 인생에서 '시집살이' 다음으로 우울한 시간이었으나, 경제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었고 - 내 삶은 유쾌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냥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았다는 정도였다.  내가 풀이 죽어 있으면 그는 나를 응원하며 말했다, "당신은 나의 벤쳐야. 조금만 기다려봐."  



그랬다. 지금은 'Start-up'이란 말이 유행이지만 30여년 전에는 'Venture' 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스타트업 기업'을 얘기하듯, 30년 전에는 '벤처 기업'을 얘기했었다. 30여년 전부터 남편은 나를 그의 '벤처'라고 했다. 나를 잘 키우면 내가 장차 크게 될 아이템이라고 그는 종종 말했다. 나는 그의 벤쳐였다. 나의 학비를 대면서 그는 벤처를 키우고 있었다. 그의 벤처가 영 신통치 않을때에도 그는 그의 벤처가 성장할것임을 의심치 않는 듯 했다. 나는 그의 벤쳐였다. 내가 마침내 영주권을 취득하고나서 노예살이하던 M 대학을 그만두고 조지메이슨에 '입성'했을때 그제서야 그의 '벤처'가 마침내 대박을 터뜨리기 시작한 거였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캠퍼스에서 근무를 하기 시작하면서 -- 그는 그의 벤처가 이루어낸것을 향유하며 즐거워하였다. 그는 가방을 들고 조지메이슨에서 내게 마련해준  교수숙소로 입성했다. 그 숙소에서 보내던 지난 십년동안, 나는 그의 벤처로 살았다. 우리 두사람의 생활비는 주로 내 카드에서 충당했다. 자동차도 100프로 내가 운전했다. 지난 4년간 지불된 각종 병원비도 모두 내 카드로 지불했다. (연세 세브란스는 카드 하나를 하이패스로 정해놓고, 간단히 빠져나가도록 했는데, 그것이 내 카드였다).  우리 둘이 함께 살면서 써야할 돈은 모두 나의 카드에서 지불되었다. 물론 그가 때때로 그의 카드로 뭔가를 사거나 외식비를 내거나 했지만, 주로 사용하는 카드가 내 카드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좋아했다. 내가 생활비를 내 카드로 쓰는 것을 보면서 그는 흡족해했다.  왜냐하면 그는 벤쳐를 키웠고, 그 벤처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벤쳐이고, 나의 생명보험이고, 그 모든 보험이야." 우리는 이 얘기를 하면서 함께 웃었다. 왜냐하면 - 그것이 내가 바라던 바였으니까. 나는 그의 '성공한' 벤쳐였다. 그래서 행복했다. 나는 그의 노후설계보험이었고, 생명보험이었고, 천국보험이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항암이 길어지면서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치료제가 늘어났고, 마지막 두달은 한달에 오백만원씩 약값이 나갔는데 -- 남편은 자기 카드로 약값을 내라고 했지마나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신 치료비는 내가 다 낼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어서 떨치고 일어나. 백살까지만 살아, 그때까지 내가 모든 약값을 다 내줄테니까. 당신 백살까지 내가 모든 약값을 다 대고 뭐든 다 할테니까. 응? 긴병에 효자는 없어도, 긴병에 효부는 있는거야. 나는 당신 벤처니까."  내가 이런 얘기를 종알종알 할때마다 그는 힘없이 빙긋 웃었다. 그가 내 말에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감지했다.  나는 당신의 벤처야. 아무 걱정 없어. 

 

 

그런데, 2025년 하반기부터 그 항암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우리는 병원에 갈때마다 좋지 않은 검사결과를 맞닥뜨려야 했고, 상황은 자꾸만 암담해져 갔다. 약은 더욱 독해졌고, 그는 쉽사리 회복되지 못하곤 했다.  2025년 8월, 의사는 항암치료가 제대로 듣지를 않는다며 '앞으로 4-6개월 남은것 같다'고 선포했다. 8-9-10-11-12-1 .....내년 1월까지 산다고?  그날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날.  그날은 8월 4일이었다. 그날 미국의 아이들에게 내가 보낸 문자에 나는 이렇게 썼다, "아빠가 앞으로 4-6개월 남으셨대... 새로운 치료제를 시작할거야."

 

돌아서 환산해보면, 그날 김현욱 교수가 말한 시간보다 남편이 54일을 더 살아냈다.  의사의 예측이 크게 빗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 54일의 시간은 당신이 의지력으로 버티고 살아낸 시간이었을 것이다.  

 

8월4일. 나는 가을학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가을학기를 내가 수업을 잘 해낼지, 다른 책임들을 다 제대로 완수할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심각하게 휴직을 고민했다. 남편은 24시간 나와 함께 있고 싶어했다. 그는 의사가 무슨 소리를 해도, 내가 곁에만 있으면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냥 내게 의지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될것 같은...나는 그에게 그런 안도감을 주는 존재였던것 같다.  김현욱교수는 새로운 항암제를 찾아냈고...우리는 그 약이 우리를 잘 지켜주기를 기대하며 가을을 맞았다. 

 

가을동안, 그 새로운 항암제가 4개월간 시도되었고...겨울이 오자 새로운 항암제로 넘어가야 했다. 이약도, 저약도 딱히 암세포의 성장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2026년 2월, 의사는 더이상 쓸 약이 없다고 선포했다. 더이상 치료 방법이 없다고. 암세포의 양상을 보여주는 CEA 수치는 연일 무서운 속도로 상승했다. 우리는 우박을  맞듯이 둘이 앉아 그 무서운 '뉴스'들을 견뎌야했다. 무서운 시간이었다.  "내가 휴직을 해야 할것 같아, 그렇지?"  남편에게 물었을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암담한 시간에 그를 위로할수 있는 빛은 '나'였다.  나는 학장님과 내 상황을 의논하였고 - 휴직이 결정되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달려갔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지상에서의 육신을 더 벗어버리고 천국의 문을 열고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남겨진 그의 육신을 안고 앉아 나는 깨달았다. 그는 1985년 나를 발견한 이래로 내게서 단 한순간도 눈을 뗀적이 없으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게 주었으며, 나를 전심으로 신뢰했으며, 그래서 내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시간을 자랑스러워했으며,  그렇게 아낀 자신의 전 재산을 내게 남기는 것을 자랑스럽게 했으며...그는 남겨진 껍데기까지 온전히 모-든-것-을-내게 주고 싶어했음을. 

 

한 남자가 그의 모든 것을 내게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 내 속에 있던 작은 불씨가 쑥쑥 자라나고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온전한 사랑을 받은 존재만 가질수 있는 불꽃.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꽃.  나는 사랑을 받은 자다 --라고 내 심장이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완성되었고. 남은 것은 영광 뿐이다.  이 남자는 사랑을 완성시킴으로써 온전하게 나를 소유한다. 나는 그의 사랑안에 갇혔다. 영광의 성안에서 나는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