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4. 10. 25. 16:33

중간고사를 마친 학생들에게 '선물'의 의미로 오전에 진행되는 한시간짜리 수업을 강의실이 아닌 구내 '카페'로 하기로 공지를 하였다. 학생수도 많지 않아 카페의 큼직한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수업을 진행해도 별 무리가 없어보였다. 처음에 학생들은 'You mean, there's no class?"하고 반문했는데 - 그에 대하여 "Of course, we have a class but not in the classroom but at a cafe! If you don't show up, I will mark it as absent"라고 분명히 말 해 줬다.  그래도 혹시 학생들이 헛갈려할까봐 두차례나 이메일로 공지를 해 줬다.  

 

내가 늘 수업을 하기 위해 모이는 강의실이 아닌 구내 카페로 장소를 일시적으로 옮긴 이유는, 우선 중간고사 기간동안 고생한 학생들의 노고에 대하여 내가 값을 치르는 따뜻한 차나 커피로 위로와 응원을 해 주고 싶었고 - 강의실이 아닌 카페에서 학생들이 좀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영어토론을 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씨가 화창한 시월의 어느 아침에, 나는 일찌감치 구내 카페로 가서 가장 큰 테이블을 '점거'해 놓고, 카페 직원들에게도 '여기서 오늘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할 것이다'라고 알렸다. 물론 카페 측에서는 한시간동안 테이블에서 수업이 진행된다는 것에 밝게 웃으며 환영의 표시를 하였다. 수업 시간에 맞추어 학생들이 차례차례 등장했고, 나는 학생들이 한명 한명 등장할때마다 카운터로 함께 가서 음료수를 사 주었다. 그리고 강의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듯, 카페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 준비한 '토론' 주제를 소개했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한가지씩 짧은 주제토론을 리드하다보면 수업시간이 채워질것이다.  토론 주제는 가령 '동물 상대 실험은 어디까지 용납될 것인가,' '노숙자에게 애완동물을 허용하는 것이 타당한가,' '운전면허 연령제한은 어떻게 할 것인가,' '늙으신 부모의 봉양 책임은 자식에게 있는가, 개인의 책임인가,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가' 뭐 이렇게 자연스럽게 여러가지 생각이 오고갈 만한 것으로 채워졌다. 

 

토론중에 학생들에게서 내가 예기치 못했던 이야기들도 나왔다. 어느 여학생은 '한국이 밤길 걸을때 미국보다 안전한 사회라고 알려져 있고, 밤길에 살해당할 걱정을 덜하는 사회라고 알려져있지만, 한국에서 사는 여성인 자신은 밤길에 살해당할 걱정보다 아무때나 강간당할까봐 더 두렵다'고 실토했다. 살해의 위협보다는 아무때나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성폭력, 강간'이 더 무섭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니까, '살해 당할 가능성'보다 '강간 당할 가능성'이 더 커보인다는 심리적 압박감의 토로였다. 

 

동일한 내용에 대해서 남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은 어때? 밤길 걸을때 살해당할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가?" 대체로 남학생들은 별로 그런 생각을 안해봤다고 답했는데 - 우리나라에서 제일 빡세다는 특수부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체력단련에 힘을 쓰고 있는 남학생 (그가 내게 전에 그의 계획을 얘기해 준 적이 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I feel the same anxiety when I walk around at night. It's scary walking alone at night." "체력 좋은 남학생인 너도?"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그는 수줍게 웃었다.  아, 아, 이 학생은 두려움이 많기 때문에 더욱더 특수부대쪽에 관심이 있는거구나, 두려움을 극복해내기 위하여...

 

카페에서의 수업을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어땠어? 강의실과 카페 두 장소중에서, 어디서 영어로 이야기를 나눌때 마음이 편해? 아니면 덜 긴장돼? What do you think between the classroom and the cafe? Which place do you feel more comfortable or less stressful speaking in English?" 나는 내심 '카페에서 영어로 토론하니 재미있어요' 뭐 이런 답이 나올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그자리에 참석한 '모든'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Classroom.  I feel more comfortable speaking in English in the classrooom."  모두가, 모두가 그렇게 답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Tell me more about it. What made it sort of stressful for you to discuss in English at a cafe? 카페에서 영어로 토론하는것이 뭐가 힘들었던거지? 난 교실보다 카페가 더 편할 것 같아서 일부러 이쪽에서 음료수를 사주면서 수업을 진행한것인데 말씀이야....." 

 

학생들은 뭔가 선명한 대답을 안했는데, 그 중 한학생이, "Because it's noisy here"라고 답했다. 카페는 시끄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에 카페는 시끄럽지 않았다. 이른 아침 수업이었고, 그러므로 이른 아침 시간이어서 카페가 방금 문을 열은 상태였고, 주로 테이크아웃으로 음료수를 사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카페는 한산했다. 시끄러울 정도의 소음은 없었다.  소음에 신경질적으로 민감한 나 조차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캠퍼스 구내에 있는 그 카페는 음악도 틀지 않는다. 어느때는 '적막강산'으로 변하기도 한다.  내가 느끼기에 조용하기만 한 카페 공간에 대하여 그 학생은 '카페라서 소음이 많아서, 영어토론 하기가 교실보다 불편했다'고 설명한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시월의 파란 하늘과 보석처럼 물들어 찰랑거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연구실로 향하던 중 나는 문득 떠올렸다. 오래전 내 박사학위 논문에 내가 적었던 현상. 그 부분에 대하여 심의하던 교수들께서 놀라운 발견이라며 높이 평가해줬던 것이 있다. 대체로 제2언어 습득 관련 분야에서는 언어발달의 순서가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시작해서 - 학문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통설인데 - 이 통설에 약간 예외적인 현상이 있다. 학교 영역에서는 고등학생이건 대학생, 대학원생이건 간에 학교 영역에서는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교실영어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영어)'가 유창한데 비해 '일상적인 대화'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니까, 학교나 교실에서는 그나마 숨이 붙어있어서 최소한의 필요한 영어(고급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학교 밖의 영역 (일상 영어)으로 가면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고,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현상이 보인다).   이들이 주로 '공부/추상/학문'영역에서만 영어를 활용했기 때문에 공부 영역에서의 영어는 그나마 '익숙'하지만 -- 대중적인 장소, 일상적인 장소, 영어 사용을 회피할수 있는 장소에서 일상적인 영어를 해야 할때 이들은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소음이 있지도 않는 상황에서 '소음때문에 힘들어'라고 무의식중에 설명하러 드는 것이다. 

 

이 친구들이 강의실을 벗어나 카페에서, 길에서, 시장에서, 파티장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하게 하려면 - 결국 그런 장소로 자꾸만 이끌어내야 한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걸까? (갸우뚱).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