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혹은 열흘, 또는 이주일에 한번 - 나는 물 긷는 여인이 된다. 복도 끝에서 이웃 대학 건물로 이어지는 유리 통로에 형성된 나의 작은 정원. 그 정원의 식물에 물을 줘야 하는데, 물론 이곳에는 수도가 없다.
물을 뜨기 위해서는 건물의 중앙에 위치한 교수 휴게실 싱크대의 수도를 이용해야 한다. 튼튼한 대형 (일명 빠께쓰) 물통을 학생용 바퀴의자에 싣고 (바퀴의자가 나의 운송 수단이다. 어차피 바퀴이니까), 나는 복도를 가로질러 물을 뜨러 다닌다. 이 정원에 물을 흠뻑 뿌려주고 남기려면 최소한 세번을 교수 연구실이 늘어선 복도를 왕복해야 한다. 그러니까, 나의 동료들은 내가 의자에 파란 물통을 싣고 복도를 오가는 풍경을 정기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일주일, 열흘, 혹은 보름에 한번.
이 정원에 물을 뿌려주면서, 시든 잎을 따주거나, 마른 꽃을 정리해주거나, 난초의 꽃대가 올라오는 비밀스런 현장을 지켜보거나 하다보면 한시간이 휙 가버린다. 조금 한가로울때면, 꺽꽂이가 가능한 화초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화분을 만들기도 한다. 어차피 이 정원은 아주 작은 가지 하나에서 시작하여 - 그 가지가 새끼를 치고, 새끼가 새끼를 치고, 그렇게 숲을 이룬 것이므로, 정원의 확장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Gardener'로 통한다. 동료교수들은 내가 정원에서 노닥거리는것이 보일때, 다가와서 한담을 나누기도 하고, 갖고 있는 화초가 죽어가고 있다는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혹은 작은 모종을 얻어가기도 하고 그런다. 이곳은 나의 휴식처이면서, 사교장이기도 하고, 비즈니스 회담 장소이기도 하다. 이 정원에서 여러가지 프로젝트가 논의되거나 완성되기도 한다.
휴게실 싱크대에 물통을 올려놓고 물을 가득 담아서 그것을 운반용 바퀴의자로 옮길때, 그 때 나는 체육관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던 기억을 떠올리고 - 심호흡을 한 후에, 허리를 두드려 긴장을 풀고나서 '영차'하고 용을써서 무거운 물통을 바퀴의자에 안전하게 내려 놓는다. 그리고 조심조심 - 물통이 넘어지거나 물이 흘러 넘치지 않게 조심조심 바퀴의자를 끌고 복도를 가로질러 복도끝 나의 정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무거운' 물통을 옮기는 것을 휴게실에서 스치며 발견하는 교수들은 한결같이 "그 무거운 물통을 어떻게 드시는가?', '정원에 수도를 끌어다 놓아 달라고 학교에 요청을 해보시라' 뭐 이런 코멘트를 듣곤 한다.
그럴때 나는 빙긋 웃으며 말해준다.
"이 무거운 물통을 옮길때, 내게 아직 이것을 번쩍번쩍 들어 옮길수 있는 근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지요. 일종의 웨이트 트레이닝입니다."
"이 물통을 옮길때마다 생각하죠 - 옛날에 우리 할머니, 우리 엄마는 이 물을 무거운 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옮기셨겠지... 옛날에 우리 시골집에서도 집앞 도랑에서 물을 떠나 썼다고 해요. 저도 어릴때 도랑의 물이 참 맑고 시원해서 거기서 물을 먹곤 했었지요. 그래도 우리집 뒷곁에는 물이 펑펑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는데요, 거기에 사연이 있어요. 우리 엄마가 새색시이던 시절, 도랑에서 물을 퍼서 이고 대문을 들어서다가 그만 새색시가 넘어져서 물동이가 박살이 났다고 해요. 새색시도 어딘가 다쳤겠죠. 그것을 보고 우리 할아버지가 당장 그날 사람을 사다가 뒷마당에 펌포를 팠다는 거에요. 그 펌푸에 이웃 사람들이 드나들며 물도 퍼가고, 뭐 씻기도 하고 그러는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그 펌프가 우리 가까운 이웃들의 우물가 미팅 장소였던 셈이지요."
"제가 버지니아에 있을때인데요,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레퓨지 (난민)"들을 대상으로한 직업 영어를 가르쳤거든요. 주로 아프리카계 난민들이 많았어요. 그중에 탄자니아에서 온 수더분한 여인이 들려준 얘기가 선명하게 남아있어요 --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누군가가 아기를 낳으면 마을의 보건소에 가는데, 그러면 보건소의 의사와 간호사가 '가서 물을 떠오라'고 해요. 그러면 온 집안 식구들이 물통을 들고 저 멀리 들판을 건너 물을 뜨러가요. 물을 떠다 줘야 보건소에서 그 물을 데워서 산모나 아기를 씻기고 그러는거지요. 우리는 물을 뜨러 몇시간씩 걸어야 했어요."
정원에 물을 주기위해 복도를 가로질러 물통을 바퀴의자에 싣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 나는 탄자니아를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먹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탁한 물 한통을 구하기위해서 몇시간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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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귀냄이' 찬삐가 아내 그레이스와 보름간 다녀갔다. 그레이스는 멀리서 이 정원을 발견하고 "사진에서 봤던 어머니의 정원이다!"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제 나의 정원을 바라볼때 이곳을 다녀간 찬삐와 그레이스를 생각할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