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3. 8. 29. 16:39

 

 

친척 오빠가 동네 이웃에서 살았었다.  체격이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얼굴이었고, 마음씨도 순하고 착했다. 그리고 몸이 약했다. 그 오빠는 원인 불명의 질환으로 서서히 몸이 약해져갔다.  그러니까 어릴때는 그냥 약해보이는 예쁘장하고 순한 오빠 였는데, 점점 자라면서 체격이 자라지도 못했고, 점점더 몸 움직임이 약해졌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딘가 대학을 다니던 오빠는 어느날부터 집에서만 생활하게 되었다.  오빠는 집에만 박혀 있기 답답해서인지, 집앞에 놓이 평상에 나와서 바람을 쐬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오빠는 평상에 앉은채 집 앞을 지나치는 동네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며 지냈다.  그의 머리위로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계절이 흘러갔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도 새벽에 집을 나섰다가 밤에 돌아오는 하루하루라서 집앞 평상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오빠와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오빠가 새벽부터 밤까지 평상을 지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의 일상이 훨씬 다채로워지면서 내가 대낮이나 오후 한나절에 집에 돌아올때도 있었고, 그럴때면 나는 반드시 평상을 지키는 오빠를 지나쳐야 했다. 그 댁을 지나쳐야 우리집이 나왔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그 순하고 착한 오빠가 대학생활도 못하고 앉은부처처럼 평상을 지키는 것이 슬프고 딱해서, 그를 지나칠때마다 살갑게 인사를 하곤 했다, "오빠, 날씨 좋네" 뭐 이런 가벼운 인사였다.  오빠는 사람좋은 미소를 보내며, "학교 갔다 오니? 넌 점점 더 예뻐진다" 뭐 이런 일상적인 인사를 보내곤 했다.  처음엔 그랬다. 처음엔 나도 살가웠고,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집에 가기 위해 오빠의 평상 앞을 지나칠때마다 그자리에 늘 오빠가 붙박이로 앉아서 저 멀리서부터 내가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반복되고 반복되자 나는 서서히 그 상황이 짜증스러워졌다.  그리고, 어느날부터인가 나는 앉은부처같이 평상을 지키는 그 오빠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고 지나쳤다. 그냥 생각에 잠긴듯 그 앞을 지나쳤다. 아마도 그렇게 지나치는 계기가 된것은 어느날 내가 너무나 우울하여 아무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그자리를 그냥 지나쳤을 것이고, 한번 그렇게 지나치자 그 다음에도 스스로 우울하기로 결심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그 앞을 지나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습관으로 굳어졌으리라.  그렇게 나는 평상에 앉아 바람을 쐬며 지나치는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오빠를 싹 무시하고 지나치게 되었다.  내가 인사를 하지 않았으므로 오빠도 내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지나치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으리라.   그러다가도 어쩌다가 내가 뭔가 기분이 좋아져서, 예외적으로 오빠에게 인사를 건네면, 오빠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내 인사에 화답을 해줬다, "야, 너 요즘 바쁜것 같다. 잘 지내지?" 그는 내가 모른체 지나가면 그대로 그자리에 돌부처처럼 있었고, 내가 어쩌다 기분이 좋아져서 인사라도 하면 우리가 항상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라는듯 다정하게 화답을 하곤 했다. 

 

그 오빠는 몸이 너무 약해져서 나중에는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매일 평상 앞에서 자리를 지키던 그는 어느날 그의 집 1층의 작은 가겟방에 비디오가게를 차리고 스스로 '사장님'이 되었다. 그는 이제 평상이 아닌, 비디오가게 사장의 자리를 지키며 날이면 날마다 일년삼색육십오일 하루 이십사시간 창밖으로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을 관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거동이 불편한것을 아는 동네 친구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자원봉사 '비디오가게 점원' 노릇을 해 주었던 것 같다. 진열장 높은 곳에 있는 비디오를 꺼낸다거나 아니면 회수된 비디오를 정리하여 제자리를 찾아 주는 일등은 그의 마을 친구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그가 집앞 평상에서 풍천노숙하는 동안 그는 헛짓을 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마음씨가 좋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비디오가게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그는 게다가 인정도 많아서,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그리고 결혼한 나에게 "야, 너 성인물 비디오 온것 있는데 빌려줄게 갖다 봐라"라며 으스대기도 했다.  물론 콧대가 하늘이었던 내가 오빠에게 성인물 비디오따위를 빌려다 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오빠는 우리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애엄마가 되는 그 시절에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어느날 우리 동네의 화제는, 강원도 어딘가에서 잘생긴 남매들이 비디오 가게에 들이닥쳐서 한바탕 눈물바다를 이뤘다는 것인데, 그 오빠가 비디오가게 운영해서 번 돈의 일부를, 그것도 꽤 많이, 어린이 보호단체에 정기적으로 보내서, 그와 여러명의 어린이들이 연결되어서, 결국 그가 많은 어린이들의 성장을 도와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후원해주던 어린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성인이 되어 동생들을 이끌고 크리스마스 즈음에 비디오가게에 선물을 갖고 쳐들어와서 한바탕 눈물 바다를 연출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빠는 그가 받은 선물의 몇배가 되는 많은 돈을 선물로 그 방문자에게 줬다고 한다. 어쨌거나, 애인도, 와이프도 없이 혼자 나이를 먹어가던 비디오가게 사장 오빠는 버는 돈을 쓸데도 별로 없었으므로 그렇게 많은 어린이들을 후원하면서 나이를 먹어갔다. 

 

오빠는 그렇게 늙어갔고, 회갑을 살지 못하고 몇해전에 운명했다. 나도 그의 장례식에 가서 자리를 지키며 그의 입관을 보았다. 그는 나비의 애벌레같이 곱디 곱게 싸여져 우리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입관을 마치고 난 후에 장례지도사가 입을 뗐다, "고인의 직계 가족 누군가 나와 주세요."  그 오빠의 동생이 나와 동갑이었는네 그가 가족을 대표하여 장례지도사의 부름에 응했다. 장례지도사는 뭔가 필기구를 동생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여기에  고인의 이름을 쓰세요" 아마도 입관을 마치고, 관에 고인의 이름표를 부착하는것 같았다. 다른 입관 된 고인과 헛갈리면 안되기에 그런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을 직접 직계가족이 쓰도록 하는 모양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이렇게 위중한 장례식에서 가족 대표가 되어버린 내 동갑짜리 - 그오빠의 동생은 저으기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는 평생을 조용히 살아온 사람이다. 수줍음도 많고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다. 절대 가족을 대표한다거나 어떤 작은 모임의 대표를 해본적이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 그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거느리고 있는 작금에도 그의 아내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본디부터 그는 권력이나 대표, 명예 이런것에는 뜻을 둔적이 없었던 터라서 가족 대표로 '이름'을 쓰라는 지시에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장례지도사가 가리키는 곳에 이름을 끄적거렸는데 - 잠시후 장례지도사가 그의 얼굴을 째려보듯 쏘아보듯 노려보는 것을 나는 감지했다. 그는 타박하듯 말했다, "이건 고인의 성함이 아닌데, 아니 이양반아 본인 이름을 쓰면 어떡해? 고인의 성함을 여기다 써야지. 당신이 죽었어?"

 

나는 웃지 않았다. 오빠의 누이 동생이며 내게는 언니인 그 언니가 자신의 오빠를 입관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장례지도사의 말씀에 빵 터졌다. 언니는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오빠의 입관식에서 웃으면 오빠에게 예의가 아니지 않는가.

 

내가 요즘 약간 '우울증'이다.  아마도 정신의학과에 가서 검사를 받고, 의사와 상담을 하면 그는 내게 '경미한 우울증 증세가 있으니 일단 약을...' 하며 아마도 뭔가 약을 처방해 줄것이다.  내 주위에 우울증 진단 받은 사람들로부터 대충 전해들은 프로세스가 그런 식이라 아마도 나도 그런 식을 처방을 받을 것 같다. 우울한 가운데, 나는 과거의 많은 나의 과오들을 하나 하나 꺼내어 조사하고, 들여다보고 그리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것이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중의 한가지이다).  오늘 나는 문득 평상에 앉아서 세월을 보내던 오빠, 그 오빠를 '사물'처럼 대하고 외면하던 나의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래선 안된다. 반성한다. 앞으로 사람을 항해 이런 무례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오빠 미안해.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