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3. 2. 27. 15:27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 시작(詩作) 7, 1955. 10.)

 

위의 시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시 전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 학교에서 해마다 '가을 축제'를 개최했고, 각종 전시회가 열렸는데 미술 선생님의 추천으로 나는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시화전에 제출하였다.

 

내 인생 처음이지 마지막인 '시화전 작품'은 이렇게 탄생했다.  도화지 전지에 위의 시를 검정색 포스터칼라 물감으로 띄어쓰기도 없이 그냥 글자만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집에서 밀가루 거를때 사용하는 '체'를 이용하여 물감을 뿌리는 작업을 하였다. 여러가지 물감을 브러쉬과 체를 이용하여 뿌리기 (스프레이) 작업을 하면 물감이 안개처럼 내려 앉는다.  다양한 색감의 물감을 이런 방식으로 자꾸 자꾸 덧 입혀주다보면 뭔가 안개속에 새겨진 시 같은 느낌이 난다.  내가 이것을 어디서 배운것은 아니고, 혼자 앉아서 이런 저런 장난을 하다가 문득 '영감'이 발동하여 예술적인 작업을 했던 것인데 - 이 작품을 미술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시더니 "좋은데...여기에 물감을 좀 더 뿌려서 완성시키면 좋겠다."  그래서 선생님의 조언대로 그날 저녁에 또 몇시간 물감 뿌리기를 덧 입혀서 액자를 해서 제출했다.  

 

 

 

가을축제를 마치고 전시했던 작품을 집으로 갖고 와서 아무데나 처박아 뒀는데 우리집에는 진짜 유명한 화가 선생님의 그림이나, 뭐 진짜 그림 (돈이 되는 작품) 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따위 나의 습작 '따위'는 변소에도 걸릴 자격이 없는 하잘것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집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 내 '변소에도 걸릴 자격이 없어 보이던' 내 시화 작품이 우리집 현관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나로서는 놀랄만한 '사건'이었는데 - 왜냐하면 이'따위' 것을 우리 식구중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을거라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내 시화 작품을 현관에 걸은 사람은 우리 '엄마'였다.  엄마에게 내 시화 작품이 특별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우리집의 '분위기'가 그 시화작품에 대해서 뭐라고 평을 하는 그런 집구석은 아니었다. 그게 거기 걸려있으면 그냥 걸려있는거다. 아무도 그것이 좋네 마네 평을 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그게 거기 걸려서 뜨아하고 놀라웠다는 것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 아무도 그것을 떼어버리지 않아서, 우리집이 이사를 할 때까지 그 시화는 영원처럼 거기 걸려있었다는 것이다.

 

수십년이 지나서 (40년도 넘게 지나서) - 라디오의 음악방송에서 박인희 (가수, DJ, 박인환씨의 누이동생)씨가 낭송하는 '목마와 숙녀'를 들으며 고교시절 내가 만들었던 시화 작품을 떠올리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시는 고등학교 시화전에 걸면 안되는 것어다!'  내가 가만히 듣다 보니까, '한잔의 술을 마시고'  '술병이 쓰러지는..' '한잔의 술을...' '내 쓰러진 술병' 이런 '술타령'이 들어간 시를 고등학교 시화전에 내가 낼 생각을 했다니!  그것을 미술 선생님이 보시고 추천을 하셨다니!  그것을 우리집 현관에 걸었다니! (하하하하하하하 깔깔깔)   

 

 

우리집은 사실 '술'에 대하여 꽤나 관대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밥상머리에서 할아버지의 '반주'를 누가 딸아 드리는가로 형제들끼리 서로 경쟁을 할 정도로 술과 가까웠고,  할아버지는 초등생 어린 손자손녀들에게도 집에서 빚은 포도주+소주를 "너도 한번 먹어봐라"하고 권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시시철철이 생신 잔치며 여러가지 잔치마다 각종 술이 흘러넘쳤고, 여름에 막걸리 사오라는 심부름을 우리는 좋아했는데, 막걸리 사오는 길에 그걸 조금씩 맛볼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술의 제국에서 태어났으며 바쿠스의 후예로 성장했다고 해야 하려나. 그런고로 고등학교 때 '한잔의 술을 마시고'의 문제성을 자각할 수 없었던 것인데 - 그런데 미술선생님 역시 - 시화전을 준비하던 국어 선생님 역시 - 모두가 그런 것에서 문제성 따위를 인지 하지 못하는 사회 문화적 분위기 였던 모양이다.  지금 제법 철이 들어, 교육자의 입장에서 이 일을 돌아보니 그 당시의 이 사회가 술에 대하여 꽤나 관대했던 모양이다.  지금 그것을 '문제'로 보는 나는 술에 대하여 마냥 관대할수가 없어진 모양이다.

 

지금도 나는 생선회나 생선 매우탕 이런 것들 앞에서는 '아 소주 한잔이 있어야 하는데....'하고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술의 효용에 대하여 무조건 배타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술'에 대하여 나는 과거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고등학생들의 시화전에 '술'이 자유롭게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는 회의적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선생님이 술에 취한채 복도에서 쓰레빠로 여학생의 얼굴이며 아무데나 갈겨서 얼굴에 쓰레빠 자국이 벌겆게 부풀어 올라도, 원래 그래도 되는줄 알았었다.   영어 선생님이 영어 70점 이하 학생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손으로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내 손이 아프게 너희를 때린다. 이것은 사랑의 싸다구다'라 말씀하시면 그게 그런것인줄 알았었다.  선생님이 책상에 앉아서 자습시켜놓고 담배를 피워도 그래도 되는 것인줄 알았다.  선생님이 여름 체육복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앉아있는 내 허벅지를 만지거나 꼬집어도 으례 그래도 되는 것인줄 알았다.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은 안되는 일들이다. 그때는 그것이 잘 못 된 일인줄 몰랐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척 잘못된 일임을 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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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 박목월 선생의 '나그네' (1946, 상아탑)도 유려한 시이긴 하지만 과연 그것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었어야 했는가?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아무튼 우리들은 '술'에 대하여 꽤나 관대하거나 술의 위험성에 대하여 '둔감'하거나 했던것 같다. 나는 이 시를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것을 외워야 했던 세대이다. 현재 (2023) 기준으로 우리는 '술'에 대해서 좀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