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3. 2. 22. 20:21

 

오늘은 일찍 퇴근하는 것을 포기하고, 반드시 해 치워야 하는 일에 몰두하기로 결심하고 [KBS 세상의 모든 음악]을 틀어놓고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조직에서 나만이 할 수있는, 내가 안하면 안 굴러가는 시스템이 있는데, 오늘 그것을 완성해놓고 퇴근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제때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까.

 

무슨 '미생' 드라마에 나오는 상사 말단 직원처럼 책상앞에 앉아서 머리를 쓰고 있다. 내 싸인으로 인턴을 열명이상  채용을 하는 판인데 나는 늘 내가 말단직원 신세다. 내가 일찌기 Servant Leadership 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뭐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엄마 리더십' 혹은 '며느리 리더십'이라고나 할까. 그냥 내가 다 책임지는 판이다. (내 리더십에 문제가 있어...)

 

그렇게 일에 파묻혀 있는데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을 한 청년 한명이 들어온다. 내 학생이다. 아니 몇년전에 내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대학 신입생때 내 수업을 들었고, (몇년전에 블로그 어딘가에도 썼던 것 같은데) 그는 심심하면 내 연구실 문에 머리를 디밀고 인사를 하거나 그냥 일없이 들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넉살좋게 하다 가곤 했다. 뭐 무슨 학교 써클을 만든다길래 내가 지도교수 노릇도 일년넘게 해준것 같다. 몇년간의 코로나 시절은 거의 모든 인간적 유대를 망가뜨린 것 같다. 3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학생들 이름을 잊었고, 학생들 얼굴을 몰랐다.  오히려 코로나 이전에 가르쳤던 학생들 이름이나 얼굴은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고, 코로나 시절의 학생들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 '줌'으로 만난 얼굴들은 휘발성이 강하다. 학기가 끝나자 마자 휘발되듯 기억에서 사라지고, 이름도 사라진다. 

 

어느날 이 친구가 내 연구실에 머리를 디밀었을때 - 나는 놀랍게도 이 친구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아! 너! 너! 아직 살아있었어? 졸업 안했어?"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군대'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복학생'이 되어 많이 초췌해진 표정으로 내 앞에 다시 섰다. 고민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그렇지 대학 신입생 시절에야 만사가 신이 났었지. 인생 즐거웠지. 그런데 군대를 다녀오고 보니 이제 슬슬 졸업이후의 생이 걱정이 되고 - 한마디로 철이 드셨군.  그의 고민 많은 표정이 오히려 듬직해보였다. 자네가 이제 인생에 대해서 들여다보기 시작하셨군. 

 

겨울방학 이전에 심각하게 상담을 좀 하고 싶다고 찾아 왔길래 두시간 넘게 그와 차를 내려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었다. 그리고 물론 나는 그것을 까맣게 잊었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얘기 할때는 그 얘기에 집중해서 정말 온힘을 다해서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그와 헤어져 돌아서면 아무 기억도 안한다. 그와 만났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나는 그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별로 기억나는게 없다. 이것이 나의 사람 만나는 패턴이다. 나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그 사람과 나눈 대화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다. 글 읽은것은 기억을 잘 하지만 - 이야기 나눈 것에 대해서는 뭐랄까 휘발성이 강하다고나 할까. 늙어간다는 증거다. 기억이 약해지는 것 같다. 옛날일이 더 선명하다니깐.) 그런데 그가 오늘 저녁에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을 다시 들이 밀었다. 정말로 그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하게 여겨졌다.

 

"어! 어! 너 *** 아무개지?" 하고 내가 자신없게 물으니 그렇단다. 다행이다 그의 이름을 제대로 맞췄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개강을 했고, 친구들과 저녁먹으러 나가다가 내 연구실에 불이 켜져 있어서 그냥 들러봤다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내가 노예처럼 일하는 중인데... 겨울 방학동안 자기가 뭘 했는지 '보고'를 드리러 왔다고 한다. "왜? 뭐 했는데?"  지난번에 나와 상담할때, 내가 그에게 '방학 끝나고 나한테 와서 뭐 했는지 보고해'라고 했단다. 그래서 보고하러 왔단다.  방학동안에 이것저것 해서 무슨 자격증도 땄고, 또 다른 - 미국가서 써먹을 자격증 시험을 지금 공부하는 중인데 곧 딸거란다. 장하네!  그런데 그걸 내가 따라고 코치를 했단다. 정말? 내가?  뭐 아버지도 기뻐하시고, 자기 자신도 뭔가 희망이 보인다고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들렀단다.  지금은 내가 너무 바쁘고 피곤하니까, 다음주에 오라고 했다. 다음주면 내가 좀 여유가 생길테니까 그 때 차도 마시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자고. 

 

친구들과 저녁먹으러 나가는 길이었고, 친구들이 복도 끝에서 기다리니 자기도 오늘은 그만 갈건데, 다음주에 꼭 다시 오겠단다.  그는 달처럼 환한 표정이었다. 더이상 초췌하거나 의기소침 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 꿈과 기대가 가득차 올라서 그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한 말을 기억도 못하는데, 저 친구는 내가 했던 말에 의지하여 스스로 뭔가 탐색하고, 행동하고, 성취하고, 그리고 내게 돌아왔구나, 나의 확인을 받고 또 방향을 잡기 위해서.  나는 언덕위의 '나무' 같은 거구나. 나무는 아무 말도 안해도 - 누군가는 그 나무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가끔 그 언덕위의 나무를 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지.  멀어지는 나무를 이따금 돌아보며. 

 

그래서 그 달처럼 환한 얼굴의 청년 덕분에 - 나도 내 존재의 어떤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앞으로도 주욱 이자리를 지키겠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고향 언덕의 나무 한그루'로 당분간 여기 더 있어도 되겠구나.  아무런 영예나 보상이 따르지 않아도 - 저 달처럼 환한 얼굴이 나의 영예이고 보상일지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