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2. 12. 9. 07:18

 

2022년 12월 8일.  날짜를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은 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헌혈을 한 날이다. 전날 밤에 불현듯 생각이 나서 웹으로 헌혈에 대하여 검색해보고, 근처 가까운 '헌혈할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검색해보고 '헌혈의 집'이 공식 명칭임을 배우고, 그야말로 '쓰레빠' 끌고 슬슬 걸어가도 5분 거리 안에 - 동네 편의점보다 더 가까운 곳에 '헌혈의 집'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바로 아침 10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가서 바로 하고 왔다. 

 

 

https://www.bloodinfo.net/main.do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오늘의 혈액보유량 (2022.12.09 기준) 전체5.7일

www.bloodinfo.net

 

헌혈에 뜻을 품었다면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서 제공하는 헌혈관련 정보를 살피고, 그 외에도 그냥 웹으로 몇가지 '후기'나 궁금한 사항을 검색해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  '레드커넥트'라는 앱을 다운받으라는 조언을 발견하고 나도 '레드커넥트' 앱을 다운받아서 전자문진도 사전에 마쳤다.  (헌혈의집 현장에 도착해도 전자문진 부쓰가 여러개 있어서 그냥 거기서 해도 되는데, 레드커넥트 앱이 내 손안에 있으면 편리하므로 앱을 추천한다). 

 

이 앱으로 헌혈 예약도 가능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예약을 하려고 했더니 '내일' 날짜부터만 예약이 가능했다. 예약없이 그냥 가기로 했다. 

 

 

 

 

 

 

 

아침에 문도 열기 전에 입구에 도착하니 안쪽에서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 곧바로 나를 안내하여 실내로 들어갔다.  예약인가 일반인가 묻고 '일반' 대기표를 뽑아 주었다. 그래도 내가 일찍 도착하여 1번이다. (내가 원래 기다리는거 싫어하고 성질이 급해서, 어딜 가건 꼭두새벽부터 가고 대체로 거의 1번 대기표를 받는다. 평소에 남보다 5분 먼저 서두르면 50분을 절약할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서 안내문도 읽어보고, 지시에 따라서 물도 몇 컵 마시고.  문진실로 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혈압 재고, 기초적인 문진을 다시 하는데, 헌혈전에 물을 충분히 마셨는가 확인한다.  아침에 밥도 잘 먹었는지 묻는다.  사실 나는 병원에서 채혈 검사할때, 종합검진을 위해서 피 뽑을때 대개 전날 밤부터 금식을 한다거나 최소 2시간 전부터 금식을 한다거나 이런 것에 익숙해 있어서 - 헌혈 할때도 피를 맑게 하기 위하여 밥을 안먹고 그냥 멀건 채소국만 따뜻하게 먹고 갔는데 - 기왕이면 깨끗한 피를 주고 싶어서 - 그 얘기를 했더니 문진 하던 간호사분이 웃으셨다. 그냥 밥 잘 먹고 오라고 한다. 간밤에 잠은 잘 잤는지, 아픈데는 없는지, 피로하지는 않은지 이런 일반적인 것을 묻는데 '피로하지 않으세요?' 하고 묻길래 내가 웃으면서 말해줬다, "제 나이쯤 되면 밤에 푹자고 아침에 일어나도 피곤하다고 느껴져요. 늘 피곤하죠. 하하하." 

 

치과 진료대같이 생긴 의자에 누워서 피를 320ml 뽑았다. 약 7분쯤 걸린것 같다. 피가 피주머니로 흘러가는 동안 그 피주머니를 보면서 가슴이 찡해진다. 사람마다 헌혈을 하게 되는 계기가 다 다를 것이다. 그냥 학교에서 단체로 하는 바람에 어떨결에 시작한 사람도 있을수 있고, 각기 계기가 다른데 -- 나의 경우는 내가 봄 여름 신촌살이를 하는 동안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긴급 수혈을 여러차례 받았던 것이 가장 큰 계기일 것이다. 그는 수혈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여러차례 '시커먼 피주머니'가 그에게 공급되었고, 시체같은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현장에서 목도하곤 했다. 피가 그냥 바로 생명 그 자체였다. 피가 그렇게 거룩한 것인지 그때 배웠다. 

 

내가 헌혈을 결심한다고 헌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헌혈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행운아'들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건강 문제로 헌혈을 해주고 싶어도 절대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다. 나 역시 아주 오랫동안 내가 헌혈을 하면 안되는 사람인줄 알고 살아왔다. 그래서 '어차피 나는 헌혈 할수도 없고' 해서 헌혈에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관심 가지면 뭣 하는가?  그런데 9월 10월 두달에 걸쳐서 나는 굉장히 세밀한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 특히 '헌혈'을 염두에 두고 의사선생님과 이런 저런 검사를 하며  우리끼리 긴밀한 대화를 주고 받은 결과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내가 헌혈을 하면 안되는 '조건'이 전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현재 사라지고 없다는 '신묘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신묘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불을 받으셨군요,'  '옛날에 오진을 받으셨군요' 등등 다양한 해석을 내 놓는데 나는 '하나님의 깜찍하신 손길'로 보는 편이다. 수십년간 오진이 되풀이 될수도 있는가? CT까지 찍으면서 심각하게 보던 그 모든 진단들이 모두 오진이었을까?  어쨌거나 나의 주치의께서 '헌혈 마음껏 하십시오'라고 선언을 해 주셨으므로 나는 헌혈을 하러 간거다. 

 

그러니까,

1) 헌혈은 거룩한 일이다.

2) 이세상에는 헌혈을 하고 싶어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 처한 선량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3) 헌혈 할 수 있는 조건의 몸을 갖고 있다면 감사 할 일이다. 

 

헌혈을 하고 나니 자동으로 앱에 헌혈 기록이 등재가 되고, 현장에서 스티커형 헌혈증서도 한장 준다. 첫 헌혈자에게는 이런저런 기념품도 준다.  레드커넥트 앱을 열어보니 헌혈 기록과 함께 다음에 헌혈 가능한 날짜까지 표시가 된다. 나같이 전혈 (그냥 피)을 제공한 사람은 2개월을 기다려야 헌혈이 가능하다 (1년 5회로 제한되어 있다). 전혈이 아니라 '혈장'과 같은 피의 일부 구성성분만 제공한 경우에는 2주 후에 다시 헌혈이 가능하다. 

 

위에 적은대로 누구나 다 헌혈을 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 헌혈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유행병 지역을 다녀왔다거나, 수술을 했다거나, 어떤 특정 약물을 처방받았다거나 이런 저런 경우에 일시적으로 헌혈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사전에 상세히 체크를 하여 내가 헌혈이 가능한가 살펴야 한다. 가령 나의 경우 내년 2월 2일에 다시 헌혈이 가능하지만 만약에 내가 해외를 다녀오고 뭐 감기약을 먹고 이런다면 그것도 고려하여 헌혈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상세한 사항은 웹에서 확인 가능하다) 

 

나의 계획은, 내 상황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한국은 만 69세로 한정되어있다, 나중에 변경될지도 모르지만), 헌혈이 허락되는한 나는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고 싶다. 

 

 

헌혈 마치고 약 15분간 쉬었다가 나오는데 간호사가 '어지럽지 않은지' '몸에 이상은 없는지' 다시 묻는다. 나는 '헌혈을 했다는 기쁨' 때문인지 오히려 몸과 머리가 가뿐하게 여겨지고 가슴에서 기쁨이 솟아서 상태가 아주 좋았다. 그리고 곧바로 '고기'집에 가서 스테이크를 300그램쯤 구워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아주 신나게 먹고 왔다. 하하하. 정기적으로 헌혈을 한다면 헌혈날이 내가 고기 왕창 먹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드러누워 피를 뽑는 아주 짧은 동안에 떠오른 아이디어인데 - 내년 봄학기에 내가 가르치는 'Research Writing' 수업의 여러가지 연구 주제중에 'Blood Donation' 을 포함시켜야겠다. 내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생활주변이나 사회생활 속에서 어떤 연구주제를 정하여 한학기간 관련 논문도 읽고, 연구 계획을 세우고, 연구활동을 하고, 형식을 갖춘 작은 논문을 써내야 한다. 학생들이 직접 헌혈의 집을 방문하여 헌혈도 해보고, 한국의 헌혈체계나 문제점등을 문헌과 실무자 인터뷰를 통하여 직접 알아보고, 헌혈캠페인까지 직접 실행해보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포스터를 제작하여 세상에 알리는 것 까지. 여러가지 토픽중에 이것도 포함시키기로 결정한다. 학생들은 이 작업을 통해서 연구방법론과 연구 글쓰기만 익히는게 아니라 몸과 머리를 바쳐 사회에 기여하고, 큰 기쁨을 얻게 될 지도 모른다. (희망사항)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