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구석에 내가 심심파적으로 일구어 놓은 작은 정원에 학교 정 반대 구석의 연구실에서 서식하는 동료가 종종 산책을 나온다. 나는 연구실에 앉아서도 멀리서부터 느릿느릿 들려오는 그의 발소리를 구별해 낼 수 있다. 하루에 한번은 내 연구실을 지나쳐 나의 정원으로 오니까. 언젠가 그의 발소리가 끊겼길래, 복도에서 만났을 때 "내 정원에 왜 안와?"하고 물어보니, "너에게 방해가 되는것 같아서"라고 했다. 참 사려깊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를 안심 시켰다. "나는 사람 지나치고 그러는거 별로 신경 안쓰여. 나 자체가 시끄러운 사람이고, 나는 길거리에서 공부를 해도 방해를 안 받아. 네가 안 오면 궁금해져. 어디가 아픈지." 그래서 그는 이제 안심하고 오고 싶을 때 오고 간다. 그렇게, 나의 정원을 보려고 산책을 나왔다가 내가 한가해보이면 열린 내 연구실 문앞 의자에 앉았다 가는 동료들이 하나, 둘, 조용히 늘고 있다. 나는 한가하지 않지만, 대체로 그들을 환대하는 편이다. (일은 늦어지지만, 죽고나면 다 소용 없는일. 사람이 올때 사람을 반기는게 남는 장사지. 그런 생각으로 조금씩 느릿느릿 해진다. 나이 먹어가는 자의 여유같은거다.)
곧 미국집으로 갈거라는 얘기를 하니, '걱정 안되나?' 묻는다. 2월에 돌아올때 내 아들이 물었던 똑같은 질문이다. (한국 가는것) 걱정 안되나? 아들이 물었었다. 이제 미국으로 간다니까 미국인 동료가 내게 묻는다. 미국 가는것 걱정 안되나? 걱정을 한들, 안한들 무슨 소용인가. 뭐 가서 할 일이 있으므로 갈 뿐이지. 지금 상황이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도 미국에 갈 생각을 안한다. 그런데 한국인이 미국에 간다니 놀라운가보다.
그 미국인 동료교수가 나의 정원에서 들려준 이야기.
버지니아의 친구들과 스카이프로 화상통화를 하던중, 그의 집 거실에 조롱조롱 빨아 널어 놓은 다섯장의 알록달록한 마스크를 발견한 버지니아 친구가 물었단다.
* 버지니아: 저기 뒤에 보이는것 저것이 다 마스크야?
* 한국: 응, 우리 딸이 사용하는거야.
* 버지니아: 네 딸거라고? 저렇게나 많아? 네것도 있어?
* 한국: 음..내것도 있지.
* 버지니아: 저걸 다 어디서 사지?
* 한국: ...음...아무데나 가면 있어. 온라인으로 주문해도 바로 오기도 하고.
* 버지니아: 바로 온다고? 일주일?
* 한국: 아니...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당일에 오기도 하고. 일주일씩 기다리지는 않지...
* 버지니아: 뭐라구? 당일 온다구? 일주일씩 기다릴 필요가 없다구? 정말이야?
* 한국: 응...
* 버지니아: 거짓말. 말도 안되는 소리! 그게 가능해? 너 지금 농담하는거지?
* 한국: 아닌데, 그냥 여기는 마스크 필요하면 나가서 그냥 사면 돼.
* 버지니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그러니까, 이 대화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미국인 내 동료가 내게 들려준 얘기 -- 이건뭐 SF소설의 평행이론 있쟎아. 어딘가에 동시에 존재하는 가상의 사회 같은거. 분명 동시에 동일한 공간에 존재하지만 감지하지 못하는 가상의 공간 말야. 버지니아에 있는 내 친구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나의 상황에 대해서 그런 '가상공간'처럼 인식을 하고 있어. 참 신기하지.
내 동료의 설명으로는 그 뭐 **94 인증받은 마스크는 미국인들에게는 자동차의 '람보르기니' 같은 호화 사치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미국 갈때 그냥 보통 마스크 사갖고 가서 길거리에서 하나에 오달러에 팔면 될까? 그랬더니, "그러면 너는 돌아올 때 람보르기니를 한대 사갖고 올수도 있을거야" 한다. (물론 농담이다. 나는 면마스크에 예쁜 실로 수를 놓아서 친구들에게 선물 할 생각을 하고 있다.)
(ㅋㅋㅋ, 어릴때 미국은 내가 상상하기도 힘든 '천국' 같은 곳이었지. 가상의 세계. 지금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서 그런 상상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얼마나 굉장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 타인의 시선을 빌려야 알 수 있게 된다.
그나저나, 이런 가상의 선진국 같은 나라에서 '물류창고 화재'로 수십명이 목숨을 잃는것 -- 여기서 나는 슬픔을 느낀다. 한국은 아직도 '가상의' 어딘가 '석연치 않은' 선진국일것이다. 한국의 선진성에는 정말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석연치 않음' 같은것이 있다. 돌아가신 분들께 참 미안하다.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왜 그렇게 실없는 사고로 내 이웃이 희생을 당해야 했는지. 어딘가 석연치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