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0. 4. 17. 09:44

 

전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서 지난 1월부터 4월에 걸쳐서 한국에서 그리고 외국에서 벌어지는 코로나 상황을 관망하면서 나는 내가 일하고 있는 영어 교육 분야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된다.

 

 

 

1월에 코로나 문제가 시끄러워질때, 내가 미국집에서 한국으로 떠나려하자 아들이 깊은 시름에 잠겼다. 중국과 가까운 한국이 위험해보이는데 이 안전한 '미국'에 그냥 있지 왜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는가 하는 근심이었다.  내 입장은 - 나는 여태 고맙게 한 인생 잘 살아왔고, 설령 오래지 않아 죽어도 하느님께 감사한 편이다. 아무 유감없다. 물론 한국에 대한 믿음이 그 바탕에 있기도 했다.  '설령 아파도 그걸로 죽게 내버려두겠어? 한국에서 병원이 얼마나 가까운데. 미국보다 낫지.'  그런 믿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2월말에 개학을 했는데, 마침 대구에서 상황이 발생하고, 미국에서 왔던 교수 한두명이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자기는 호흡기 질환이 있어서 이곳이 위험해서 안되겠다고. 그런데 그리고 2-3주만에 교수회의에서 우리들은 킬킬댔다--"야 그 아무개 지금 후회 막급이겠다..."   남아있던 동료교수도 말했다, "뉴욕에 계신 아버지가 나보고 꼼짝말고 한국에 있으라고 당부를 하시더라"  그랬다, 한국의 상황 장악력이 미국보다 현실적으로 보였다.  지금 동료 미국인 교수들은 학기가 끝나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서 일 할 궁리들을 하고 있다.  한국의 안전망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말 안듣고 마스크도 안쓰고 돌아다니더니, 지금은 꼬박꼬박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고, 서로 마스크를 쓴채 안부를 묻는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 비교하면' 너무나 총명하게 코로나 상황에 대처하고 있다.  매일 아침 (미국의 저녁) 프레스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걸핏하면 '우리가 한국보다 더 잘한다'고 말을 하는데, 이는 열등감의 표현으로 읽힌다. 불안하다는 증거지. 그를 보면서 '한국 정말 잘 하고 있구나' 확인한다.  한국은 이제 열등감을 흐르는 강물에 흘려버리고 소신껏 잘 해 내면 될것도 같다.  우리 이제 더이상 가난뱅이, '한국전'의 아이들로만 살 이유가 없다. 우리는 잘 살아내고 있다. 

 

 

 

최근에 교사들을 위한 영어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컨설팅 제의가 들어왔다.  여름에 교원교육 목적의 프로그램을 진행해줄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전제'가 있었다.  강사진은 모두 '원어민'으로 해 달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는데, 실무담당자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이 제일 잘 가르치실텐데 그 사람들이 원어민만 강의해야 한대요."  나는 픽 웃었다. 늘 당해오던 일 아니었나.  20년전에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영어'를 원어민만 잘 가르칠수 있다고 믿고 있다. 교사를 교육하는 상급 교육기관에서도 똑같은 시선이다.   사실 이러한 한국 내부에 스며있는 '비원어민' 혹은 '한국인 영어교육자'에 대한 싸늘한 시선에 넌더리가 나서 몇해전 이곳으로 자리를 옮길때도 나는 고민을 했었다.  미국에서는 내가 원어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는데, 내 전문성을 인정해주고 드러나게 차별하는 일은 없는데 -- 한국 가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나를 '원어민'이 아니라며 무시하러 들겠지.  그걸 참아내야 하겠지.  그래도 가야 하는걸까?   뭐 그런 고민을 좀 했었다.  그래도 내 나라니까 내가 온 거지. 뭐 특별한 애국심 그런것도 아니다. 떠날때가 되면 휙 갈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도 바쁘니까 내가 강의를 할 수 있을지 말지 모르니까 나는 상관없는데 한가지 생각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내 제안은 이런 것이다.

 

 

 

한국의 영어교사들에게는 집단 트라우마 같은 - 가슴에 가시 같은 것이 박힌 것 같은 아픔이 있다. 그들이 토플 만점을 받아도 해결되지 않는 아픔. 그것은 그들이 절대 절대 절대 원어민이 될 수 없으며 -- 원어민이 아닌이상 절대 좋은 영어선생이 될수 없다는 확신 - 그 확신의 내면화 - 그 확신이 가슴에 가시처럼 콱 박혀있다는 것이다. 

 

 

 

왜 그러면 그들에게 그런 확신의 가시가 박혔을까?  아마도 그들이 대학을 다닐때, 사범대 교육을 받을때, 미국에서 박사하고 왔다는 교수님들이 영어로 강의도 못하고, 안하고, 자신없어하고 뭐,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들 머릿속에 '한국인 교수는 할수 없어'라는 인상의 박혔을 것이다.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런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스승들의 자신없음을 제자들이 그대로 본받아 '우리는 안돼'가 내면화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상상하는 큰 그림의 일부이다. 다른 문화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말을 안하겠다).  그래서 자신이 우수한 영어교사이면서도 선생님들 스스로 '나는 자신이 없어. 나는 안돼'라는 가시를 박은채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이분들이 방학기간중에 수십시간의 인텐시브 영어 프로그램에서 '원어민'강사에게서 영어 수업을 들으면 가슴의 가시가 빠질까? 천만에, 그들은 '원어민'에게서 영어를 배웠고, 여전히 '원어민'만이 최강의 영어선생이라는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 허경영같은 사기꾼의 사기놀음에 왜 사람들이 넘어가는가? -- 허경영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확신을 가지고 눈을 빛내며 떠들면 순진한 사람들은 그의 확신에 감염된다.  교육자도 마찬가지이다. 사기를 치라는 것이 아니다. 교육자가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눈을 빛내며 학생들을 가르치면 학생들은 눈을 빛내며 들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자 스스로 자기확신이 없고 '원어민이 아니라서 나는 안돼. 나는 가짜야'라는 신념을 가지고 서 있는데 학생이 뭘 배우겠는가.  '나는 가짜야'를 배우는거지. 

 

 

그런 분들이 현장으로 돌아가 영어를 가르칠때 -- 눈치빠르고 영리하고, 영혼이 투명한 학생들은 교사의 가슴에 박힌 가시의 정체를 읽는다. 그리고 역시 동일한 내면화 작업에 들어간다 --"원어민도 아니니, 저 선생님한테 배워봤자..." 

 

 

선생님이 자신이 없으면 학생은 그것을 영특하게 읽는다. 우리 뇌의 '미러셀 - 거울 세포'가 기가막히게 읽어낸다.  학생이 악해서가 아니다. 선생님의 마음이 학생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다. 

 

 

만약에 발음이 좀 엉성해도 선생님이 자부심을 가지고 태평하게 영어를 가르치면 - 학생들은 그 선생님의 자부심과 태평함을 그의 영어수업에서 배울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영어수업에 긍정적으로 다가설 것이다. 왜냐하면 선생님 스스로가 '내 영어가 이만하면 쓸만해. 나는 잘 가르칠수 있어. 원어민이 별건가, 영어만 잘 하면 되지' 그런 자부심이 있으므로 학생들이 그 자부심을 흡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선생님들이 정말로 만나야 할 사람은 '원어민'이 아니고 '나'다.  원어민이 아니면서 원어민과 문제없이 함께 일을 하고, 원어민보다 더 이론에 밝으며, 원어민들을 진두지휘하는 '나'같은 교육자에게서 교육을 받야야, 그 선생님들께서 '아, 영어는 그냥 하나의 도구인것이고, 내 발음이 원어민이 아니어도, 내가 영어를 잘 가르치는데는 문제가 안되는거구나'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 믿음으로 교단에 서야 학생들이 선생님의 그 자부심을 흡수하게 될 것이 아닌가?

 

 

왜 한국인 교수가 '원어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간단하게 강의에서 배제되어야 하는가?  코로나를 장악하듯, 내가 영어교육을 장악한 현장을 그들이 본다면, 그들의 시각이 바뀌지 않을까?  뭐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면서 --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  (하품).  아, 그래서, 나도 강의를 하기로 했다, 이 늙수그레한 반백의 할머니/아주머니 교수도 수려한 영어로 강의를 하는데 젊고 지혜로운 한국의 교사들이 왜 영어를 못하겠느냐구. 할수 있어. 할 수 있다구.  과연 여름방학 즈음에 캠퍼스가 개방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음, 코로나가 이제 좀 지는 꽃잎과 함께 떠나주었으면.  코로나야 벚꽃이 지듯 너도 이제 꽃잎처럼 가라.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