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4. 1. 20. 23:05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아침 기도를 위하여 창가에 앉았는데, 바람이 불어서 창가의 나뭇가지에 소복히 쌓였던 눈이 흩날렸다.  다람쥐들이 담장위를 쏘다니며 담장위에 쌓인 눈을 이리저리 흩뿌리기도 한다.  이웃 아파트의 지붕에 쌓여있던 눈이 일제히 바람에 쓸리며 눈안개를 연출하기도 한다.  깊은 산속 눈에 갇힌 작은 오두막에 앉아있는 기분이 든다. '골짜기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던 황동규의 싯귀가 문득 어디선가에서 들려온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늙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사물들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황동규의 싯귀가 떠오르는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 시를 중얼거리는듯한 느낌이 든다.  나무가, 눈이, 다람쥐가 두런두런 내게 뭐라고 말을 건다는 것이다.

 

 

"할무니 제사를 지내고 새벽에 절골댁에 제삿떡을 돌리러 가는데 눈이 허리까지 차도록 쌓여서, 간신히 뚫고 갔더니 대문에 금줄이 쳐져있쟎아요.  저 애기씨가 난 날이지 뭐야. 눈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그날이 우리 할무니 제사지내고 다음 아침이라 내가 날짜를 잊어버릴수가 없어요" 

 

 

우리 큰댁 형님 (형님이지만 연배는 우리 엄마보다도 훨씬 많으신 분)이 겨울날 - 전설같은, 내가 태어난 날의 새벽을 또렷이 기억하고 서사시를 읆던 고대의 시인처럼 나의 탄생을 읊던 날이 있었다.  우리 엄마도 곧잘 '패쓰'하고 지나가던 나의 생일을 선지자같던 큰댁 형님은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날이 하필 '할무니 제사' 다음날이라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니까 - 연결되어 내 생일도 함께 기억되는 모양이었다. 몇해전에 그댁 조카들 (그 형님의 자식들)로부터 부고를 받고 수원 장례식장에 가서 모두를 뵈온적이 있다. 그 조카들이 나의 큰 오빠나 아저씨 정도의 나이였지만 항렬상 조카였기 때문에 꼬박꼬박 나를 '아줌마'라고 불렀었다. 그댁 막내아들이 우리 막내고모와 비슷한 또래였고, 지금 아이돌 뺩치는 꽃미남이었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안 농사를 지으며 유유자적, 겨울이면 장총 들고 토끼나 꿩을 사냥하러 선산을 오르내렸다.  어릴적 나도 그 조카가 꿩사냥 나갈때 따라나선적이 있었는데, 그날은 그냥 눈덮인 산만 돌아다니고 말았다.  그 꽃미남 조카는 나이가 칠순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꽃미모를 자랑하는 노인이 되었다.

 

 

 

눈이 밤새 허리까지 올라올 정도로 내리던 날 그 새벽에 내가 태어났기 때문일까, 나는 눈쌓인 풍경을 내다보는 것이 참 즐겁다. 눈이 쌓인 나뭇가지가 창가에 있을때는 그 나뭇가지들만 온종일 들여다봐도 여전히 즐겁다. 사랑에 빠진 연인의 얼굴을 하루종일 들여다봐도 즐거운것처럼.  당신은 하루종일 들여다봐도 여전히 보고 싶은 그런 사랑을 해 보았는가? 나의 사랑은 그러하였다.  다람쥐한마리가 아파트 나무 담장위를 달려간다. 눈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경쾌하다.  그런 사랑을 해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눈이 또 퍼부울것이다. 내가 태어났던 날 함박눈이 쌓였던 것처럼, 내가 죽는날에도 함박눈이 내린다면 좋겠다.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by Robert Frost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