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세계

 

모세 할머니 (Moses 는 영어로는 모지스라고 발음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 Moses 모세라고 발음 하므로 우리말을 따라서 모세할머니라고 부르기로 한다)가 붓을 잡은 것은 그의 나이 76세였다. 앞서 밝힌 바 와 같이, 눈이 침침해져서 즐겨 하던 수놓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그림은, 그이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2년 후 요술처럼 팔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이는 101세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25년간 그이가 남긴 그림은 주로 그의 삶 속의 정경들이었다. 누군가가 성서 속의 이야기를 그려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을 때 모세 할머니는 담담하게 대꾸했다고 한다, ‘난 내가 본 적도 없는 것을 그릴 수가 없어요. 내가 보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그리나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일뿐 그의 눈으로 생생하게 보거나 경험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형상화 하는 일이 모세 할머니에게는 정직하지 못한, 혹은 자기로서는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여 졌을 것이다. 모세 할머니 그림 속의 깨알 같이 그려진 사람들과, 그 주변 풍경이 구체성을 띄고 생동하는 이유는, 그것이 비록 기억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생생한 경험에서 우러난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때로 어떤 장면을 극적으로 채색하기도 하고, 어떤 장면을 까맣게 지워버리기도 한다. 우리의 기억은 비논리적인 꿈과도 비슷하다. 그렇다고 기억이 허구는 아니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은 기억 속의 마을과, 들과, 집들, 그리고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데, 전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아서인지 원근법이 생략되거나 구도가 울퉁불퉁하기도 하다. 그의 그림 속 세계는 환상이다.  그러나 삶이 녹아있는 환상이다. 우리가 모세 할머니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그림 기교가 아니고, 그림 이론이 아니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갖는 꿈의 세계이다.  모세 할머니가 그린 마을은 아직도 이세상 어딘가에 존재할까? 그이가 즐겨 그린 뉴잉글랜드 지방의 마을 사람 풍경은 어쩌면 이제는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마을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상 어딘가 어떤 마을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서로 모여서 마을 일을 의논하고, 함께 곡식을 수확하고, 함께 바느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꿈의 세계를 보면서 비례나 원근법이나 구도를 따진다면, 그이야 말로 예술의 본질인 에 아직 다가서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의 엄마

 

 

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다. 45x60센티미터쯤 되는 크기의 유화이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물감이 떨어져나가고 그랬다. 멀리 산이 보이고, 꽃 길이 이어져 있고, 마당처럼 보이는 곳에 네모네모 있는데,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이것을 보고 멍석에 고추를 말리고 있는가 보다 하고 짐작을 할 만 하다. 왼쪽 구석에 두 소녀가 보인다.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좀더 키가 크고, 그 곁에 살구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다. 이 그림은 우리 엄마의 작품이다. 엄마는 6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와 사별하셨고,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그림 붓을 집어 들었다. 엄마는 왜정 때 (일제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고 자라났던 세대의 소녀들이 대개 그러하였듯 소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집에서 수놓고, 바느질하고 살림을 익히다가 중매로 번듯하고 훤칠한 신랑에게 시집을 갔다.  엄마는 층층 시하에서 시누이들과 아이들을 함께 키우며 나이를 먹어갔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품을 떠나고, 마침내 남편마저 그 곁을 떠났을 때, 엄마는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애써 그린 그림을 자식들, 친척들, 친지들에게 액자까지 만들어서 선물을 한다. 엄마는 그림 공부를 하겠다며 화실에도 다니고, 전문 화가에게서 지도도 받았다. 하지만 엄마는 서양식의 그림 공부 법을 제대로 따라 하지 않았다. 엄마의 데생은 자유분방했고, 비례도 안 맞고 멋대로였다. 엄마는 기존 화단이 요구하는 트레이닝을 소홀히 한 채 붓으로 마음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십 년 후, 칠순 때 엄마의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엄마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의 그림을 거저 달라는 사람은 많아도, 그것을 돈 주고 사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의 개인전 소식을 듣고 고향에서 마을 사람들이 관광 버스를 타고 단체로 구경을 오기도 하였다. 인근의 학교와 유치원에서도 학생들이 단체로 그림을 보러 왔다. 고향 마을 사람들이, 일가 친척들이 엄마의 개인전에서 기뻐하며 발견한 것은 바로 그들이 잃어버린 고향의 풍경이었다. 엄마의 그림 속에는 우물가 펌프에서 물을 푸는 소녀, 장독대에서 항아리를 닦는 여인, 고추가 널린 마당,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 밭을 매는 아낙네.  사람들은 듣기 좋은 경기도 사투리저게 누구여? 저건 정미 아니여? 나두 저깄네!” 하며 웃고 떠들었다. 나는 타국에서 공부하느라 엄마의 전시회에도 가보지 못했다. 나중에 엄마의 행복한 자랑을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 귓가에는 내 고향 마을 사람들, 이제는 머리가 허옇게 센 그 아재비들, 오라비들,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엄마의 그림 속에 그들이 살아 있으므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

 

 

 

 

그림 속의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엄마 환상 속의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어린 시절 꼭 입어보고 싶었던 드레스인지도 모른다. 혹은 엄마와 친구처럼 자라난 조카들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분명 어린 시절 친정 집 마당에서 놀던 것을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 속의 소녀는 엄마가 아니고 내 언니 인 것 같다. 언니는 늘 빨강 치마를 입었으니까.  그리고 언니 옆에 살구색 옷을 입고 있는 소녀가 나 일거라고 생각한다.  언니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하니까.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여성이라면 분명 그림 속에 자기 자신을 대입 시킬 것이다. 아니면 엄마나 이모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엄마의 그림은 원근법이나 비율도 맞지 않고, 제멋대로 그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졸음 같은 평화를 느끼고, 내 귓가에 나직한 언니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샘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샘물은 내게 속삭인다, “너도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리라…”

 

엄마의 그림과 모세 할머니의 '그림 이야기'속에 나오는 소녀들이 어쩐지 닮아 보인다. 초록색과 빨간색을 즐겨쓰는 모세 할머니 그림의 색감과도 비슷하고, 특히 빨간 드레스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비슷하다. 내가 모세 할머니의 달력 그림을 무심코 집어 들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이미 그런 그림에 친숙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방에서 모세 할머니의 책을 발견하고 덜컥 정가를 다 주고 샀을때도 나는 아마 어떤 '꿈'속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내 꿈은, 엄마의 그림속의 세계였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은 엄마의 꿈의 세계와 닿아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교육'에 물들지 않은 천진한 영혼들만 가질 수 있는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Lee Eunmee

 

 

Grandma Moses 모세 할머니: Anna Mary Robertson  (September 7, 1860 – December 13, 1961)

 

 

달력 속의 추억

 

 

 

내가 2008년에 내 연구실에 걸어놓고 내내 들여다보던 달력은 Grandma Moses 라는 화가의 민속화 (folk art)로 채워져 있었다. 이 달력을 살 때만 해도 나는 작가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단지 열 두 달 달력에 채워진 열 두 장의 그림들이 어쩐지 낯익고 정겨웠다. 분명 미국의 풍속화들인데 이상하게도 그 속에 채워진 사람들이 모두 내 가족, 내 형제, 내 고향 사람들처럼 보여졌으며, 그 그림들 역시 내 고모나 언니가, 혹은 내 친구들이 초등학교 시절 그림일기장에 그려 놓은 크레파스 그림들처럼 보였다. 그 정겨움 때문에 나는 달력을 골랐고, 그 달력은 그렇게 몇 달을 나와 함께 보냈다.

 

그 해 4, 나는 워싱턴 디씨 시내에 있는 국립 여성 미술관 (National Museum of Women in the Arts)에 들렀다가 그 곳 뮤지엄샵에서 아주 아름다운 미술책 한 권을 발견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친숙한 그림들. 그 책을 살 때 까지도 나는 그 책 속의 화가와 내 달력 속의 화가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 달력과 그 책에 소개된 그림의 화가가 모세 할머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 나의 무신경과 둔감함이라니. 매일 달력을 쳐다보면서 따뜻함을 느꼈던 내가, 정작 화집을 사놓고도 작가의 이름조차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니. 이런 사연으로 2008년 한 해를 나는 모세 할머니의 그림을 보며 살게 되었다. 

 

빨간 드레스의 추억

 

 

 

1864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이 국가적인 공휴일로 제정된 바로 이듬해, 소녀 씨씨(Sissy)에게 아버지는 약속한다, 마을에 가서 빨간 드레스를 사다 주겠다고. 어린 씨씨는 온종일 아버지가 돌아 오시기만을 기다렸으리라. 그런데 아버지가 마을에 나가보니 마침 휴일이라서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꼬맹이 딸을 위하여 조금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가서 약속한 대로 빨간 드레스를 한 벌 샀다. 정확히 빨강은 아니고, 벽돌 색이나 황토색에 가까웠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딸에게 한 약속을 성실히 지켰다. “결국 나는 내가 빨간 드레스라고 생각했던 그 옷을 입어보지 못했지 (So I never got what I call a red dress).” 이제 파파 할머니가 된 소녀 씨씨는 그렇게 그 빨간 드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소녀는 빨갛지 않은 빨간 드레스를 받으며 실망스러워도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리라. 우리 삶은 늘 그런 식이 아니던가?

 

 

내가 꼬맹이 이던 시절, 할머니는 늘 나를 남자아이 같은 상고머리로 만들어 놓았고, 내게 주어지는 옷은 늘 파란색 이었다. 내 바로 위의 언니는 늘 머리를 길게 기르고 곱다란 빨간 리본을 하고, 빨간 주름치마를 입고, 빨간 스타킹을 신고, 빨간 운동화를 신었다. 나는 늘 파란 옷을 입었는데, 심지어 내게 주름치마를 입힐 때 에도 그 주름치마 역시 파란색이었다. 지금도 언니와 내가 손을 잡고 고향의 연못 앞에서 나란히 서 있는 흑백 사진이 있는데, 그 흑백 사진 속의 언니와 나의 옷 색깔은 그저 짙은 회색처럼 보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옷들의 색깔을 기억한다. 나는 늘 파랑이었다. 혹은 남색이었다. 그것은 아들 욕심이 많았던 할머니가 첫째로 아들 손주를 맞이한 후에, 둘째로 손녀를 보고, 그리고 나서 셋째로 나온 것이 또다시 손녀딸이 되자 초조함을 느끼고는 다음엔 손자녀석을 볼 욕심으로 셋째인 나를 사내놈처럼 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나는 사내동생을 보았다. 사내동생을 본 후에도 나는 여전히 파랑이었다. 어느 해에 내가 부모님과 떨어져서 할머니 품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영문도 모르고 할머니 품에 맡겨진 나는 세상 근심 없이 뛰노는 듯 했으나, 해가 질 때마다 서럽고 그리운 마음에 집 뒤에 숨어서 혼자 울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에서 엄마가 다니러 오면서 내게 남색 스웨터를 하나 사다 주셨다. 엄마와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동네를 쏘다니다가 흙 강아지가 되어 나타난 나에게 그 남색 스웨터를 머리에 씌워 입혀주셨다.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입어도 맞을 정도로 아주, 아주 커다란, 짙은 하늘같이 푸르딩딩한 스웨터였다. 그리고 아주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진땀이 났다. “엄마, 나도 이제 서울 가는 거지?” 나는 엄마 품에 매달려 강아지처럼 꼬리를 치며 놀다가, 그 남색 스웨터를 동네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자랑을 하기 위해 마당 밖으로 나갔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내 또래 아이들에게 서울에서 엄마가 왔으며, 이렇게 좋은 스웨터를 엄마가 사왔으니 이제 나는 서울에 갈 거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가 으스대며 집 안 마당으로 들어서니 툇마루의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울고 떼를 쓸까 봐 나 몰래 혼자 서울로 가버리셨던 것이다. 나는 집 앞 한길 가, 흙먼지 날리는 그 길가에 앉아 해가 지도록 꽥꽥대며 울었다. 어린 시절에 여러 가지 가정 사정으로 식구들과 떨어져서 할머니 댁에서 얼마가 지내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는 성장의 과정일 것이다. 내 이웃에도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아이들이 있었고,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모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 이었으므로 대개들 큰 상처 없이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지나간다. 우리 엄마는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그 위로 세 명의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기가 힘이 들었으므로 할머니가 나를 그냥 좀 맡아서 돌봐 주신 것뿐, 그 속에 비극적 가정사가 숨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말없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하곤 한다.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해가 지도록 흙먼지 이는 길가에서 혼자 꽥꽥대고 울고 있던, 철 이른 털 스웨터를 입고 진땀을 내며 울고 있던 아이가 하나 살고 있다. 나는 그 아이를 달래 줄 방법을 잘 모른다.

 

모세할머니는 그이가 씨씨였던 시절, 그 소녀시절에 가져보기를 열망하였으나 영원히 가질 수 없었던 그 빨간 드레스를 죽을 때까지 기억에서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빨간 드레스, 빨간 코트를 입은 여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모세 할머니의 빨간색을 볼 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파란 멍처럼 각인된, 나의 파랑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주디스 아줌마가 오셔요

 

 

 

내가 갖고 있는 Designs on the Heart 표지 그림에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겨울 풍경이 담겨있다. 이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각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헤아려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이다. 물동이를 나르는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내가 어린 시절에 우리 집 뒷마당에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우물이 없는 집에서는 우리 집으로 물을 푸러 왔었다. 이웃집에는 앞마당에 우물이 있었지만 그 집 떠꺼머리 총각은 우물물을 푸는 대신에 벌컥벌컥 펌프질을 하여 물을 퍼다가 자기네 집 부엌 가마솥에 붓곤 했다. 그것이 한결 빠르고 속이 시원했기 때문 일 것이다.  눈썰매를 타는 사람도 있고, 눈 속에 뛰어다니는 개도 있다. 어디론가 바삐 가는 사람도 있고,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책 속에 특히 내 눈길을 끄는 그림이 있다. “주디스 아줌마가 오셔요Here comes aunt Judith” (1946)라는 제목이다. 아마도 모세 할머니는 그이가 씨씨로 통하던 어린 시절, 멀리서 찾아온 친척 아줌마, 이모, 혹은 고모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주디스 아줌마를 발견하고 달려갔을 것이고, 주디스 아줌마는 네가 씨씨로구나! 그 사이에 아주 많이 컸는걸!” 하며 반겼을 것 같다. 이 그림을 보면 그림 속의 아이는 씨씨가 아니라 나 자신인 것도 같다.  주디스 아줌마는 내 고모들이다. 우리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서 늘 큰언니처럼 우리와 함께 뛰놀며 우리를 감싸주던 작은 고모들 같다.

 

모세 할머니

 

 

 

모세 할머니는 1860년에 태어나 1961년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장장 101년을 이 지구별에 머무르다가 떠났다. 1세기를 넘게 산 모세 할머니. 그이의 본명은 Anna Mary Robertson 이다. 그는 뉴욕주 (New York) 의 농민의 딸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열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에 다섯 명의 자식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Anna Mary 를 씨씨(Sissy)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집에서 가사를 도우며 학교에 다니던 씨씨는 열 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큰 마을의 어느 집으로 일을 하러 떠난다. 말하자면 식모살이를 하러 떠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미국의 농촌에서는 아이들을 어디론가 일하러 보내는 것이 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나도 자라나면서 내 고모 또래의 마을 처녀들이 도시로 식모살이를 하러 야반도주 하거나, 혹은 결국 버스 차장이 되거나 (후에 안내양 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안내양 이후에는 버스 안내양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에 생긴 공장에 공원으로 취직하는 광경을 익히 보아왔다. 내 고모들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전자회사 공원으로 일을 하러 갔다. 그때는 공순이, 공돌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나와 함께 태어나 자라난 고향의 친구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보퉁이 하나를 챙겨가지고 엄마와 함께 상경했다. 그 모녀는 서울의 우리 집에서 하루를 지내야 했는데, 언니와 내가 함께 쓰던 방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그 친구는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하는 언니와 나를 열적게 쳐다봤다. 그 친구는 미아리 어느 약국 집에 식모살이를 하러 갔다. 그 친구는 한스러워 하거나 억울해 하지도 않았다. 그는 착실히 식모살이를 했고, 덕분에 시골집에서는 그 돈으로 오라비 고등학교에도 보내고, 송아지도 사서 키우고, 집안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들은 슬퍼도 슬픈 내색 없이 살기 위해 살아갔다.

 

씨씨는 성장하면서 이집 저집으로 흘러 다녔다. 어느 집에서는 씨씨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해주었고, 비록 일하는 아이였지만 가족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그렇게 흘러 다니며 살다가 역시 비슷한 환경에서 일을 하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청년의 성이 모세 (Moses)라서 결국 Anna Mary Robertson Moses 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모세 할머니라는 별명은 남편의 성 때문에 붙여지게 된 것이다.

 

결혼한 씨씨는 평생 동안 여염집 아낙처럼 부지런히 일하며 살았다. 그이는 근면한 사람이었다. 아이들도 무탈하게 착하게 자라났다. 남편도 착하고 성실했다. 씨씨는 집안에서 수놓기를 즐겨 했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어 팔십에 가까워지자 눈이 침침해서 바늘땀을 잘 볼 수가 없었다. 혼자서 바늘귀를 꿰기도 힘들었다. 평생 즐겨오던 일인데 할 수가 없다니! 낙담한 그에게 그의 여동생이 바느질 대신에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제안을 했다.  바느질을 할 수 없어 심심해하던 모세 할머니는 팔순이 다 되어 붓을 들었다. 그리고 나무 판이나 종이 위에 수를 놓듯, 마음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형상화 해 나갔다. 추억 속의 사람들이 모세 할머니에게 다가왔다.

 

 

  다음회에 계속 ...

 

설마 신종플루는 아니겠지, 고열을 동반한 감기 증상 때문에 스스로 가족들과 격리되어 방구석에서 약먹고 자고, 약먹고 자며 보내는 시간. 음 약기운에 잠이 들곤 했는데, 잠 오는 약을 먹어도 잠이 안와서 난감. (내참, 감기때문에 글을 쓰고 있다니.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후에 역사책을 일필휘지로 날렸다고 하던가.)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