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ism/Ashcan School2009. 12. 7. 23:22

소년가장 슬로언

 

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Henri 를 중심으로 모인 Ashcan (애시캔) 그룹과 The Eight (8인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존 슬로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고등학교 동창중에 후에 The Eight 의 멤버가 되는 William Glackens를 만나게 됩니다.

 

1888년 그가 16세 되던해에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슬로언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화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그림을 그리던중 정식으로 야간 미술 과정에 입문하게 되고 후에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Thomas Pollock Anschutz 의 지도를 받게되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Willaim Glackens 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1892년 Robert Henri 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슬로언는 The Philadelphia Press 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며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슬로언의 아내

 

슬로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설'적인데,  그의 아내 Anna Maria 를 술집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01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안나 마리아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만 매춘 경력이 있으며 음주벽이 있고, 아마도 이러한 전력을 거친 여성들이 보일법한 히스테리컬한 우울증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슬로언의 아내에 사랑은 지극정성이었고 한 의사의 제안으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매일 매일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일기를 쓰게 됩니다.  (이런 남자 또 한명 있죠, 삐에르 보나르... 삐에르 보나르는 수십년간 목욕탕에서만 지내는 특수한 병을 가진 여인을 돌보며 한세상을 보냈지요. 삐에르 보나르의 그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목욕하는 여자, 삐에르의 평생의 연인.)  그의 부인은 1943년에 죽고, 슬로언은 이듬해에 새장가를 갔으며 슬로언 자신은 1951년에 운명합니다.

 

슬로언의 사회주의 운동

 

 

1912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잡지 The Masses 에 미술 편집인으로 참가하며 다른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매체인 Call, Coming Nation 지를 위해서도 삽화를 그려줍니다.  특히나 그가 그린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가 지금도 자주 인용되거나 소개되곤 하는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페이지에 Ludlow 학살사건의 이야기가 잠깐 소개된바 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민중의 생존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 슬로언은 '선전 (propaganda)'의 '도구'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긍정하면서도 예술이 '극단적인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만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수 있을텐데...제가 추측하기에, 슬로언은 아마도 그 주위의 '사회주의자'들의 어떤 행동들에 거부감을 가졌을법 합니다.  그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만들기 싫었겠지요.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와 그가 속한 사회주의자의 무리들의 행동 양식이 일치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겁니다.  

 

서민속에 서있던 남자

 

존 프렌치 슬로언의 작품세계는 크게

 

(1) 뉴욕의 풍경

(2) 대중의 삶의 풍경

(3) 잡지,책의 삽화가로서 작업한 세밀한 판화 작품들

 

으로 정리 될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삽화가로 일했으므로 대중 생활 관련 묘사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성향은 이미 십대에서부터 생계형 청년 가장으로 세상에 나아갔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가 즐겨그린 도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가령 도심의 창가에서 빨래를 너는 여인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술집 풍경 역시 그의 삶과 밀착된 풍경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20세기초의 뉴욕의 전철과 천철 주변 풍경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요.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권투선수 그림을 즐겨그린 미국 화가가 누군가? 이런 퀴즈가 나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를 외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술관에서 '뉴욕 고가 기차' 풍경화가 멀리서 보일경우,  당신이 애인과 함께 미술관 구경중이라면 "저기 저 뉴욕 풍경속에 고가 기차 그림이 있는 저 그림 말야...저거 아마 존 슬로언이라는 화가의 그림일거야..." 하고 '아는체'를 해도 크게 실례가 안 될 것입니다.

 

 

 

뉴욕 고가 기차 (Elevated Train: EL)

 

The City from Greenwich Village (1922)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바라본 뉴욕
oil on canvas
overall: 66 x 85.7 cm (26 x 33 3/4 in.)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2009년 9월 촬영

이 그림은 비가 그친 겨울 저녁, 맨하탄 남단에서 바라본 맨하탄의 거리 풍경입니다. 고가기찻길 위로 기차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고 비에젖은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됩니다. 비가 갠것을 눈치채는 이유는 하늘이 부염하게 밝아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는 촉촉히 비에 젖어 있고 골목의 불빛은, 그것이 골목이라서 더욱 밝아 보입니다. 건물 옥상의 물탱크도 보이고, 다리미의 모서리같이 각진 고층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건물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옵니다. 일층의 모든 창문은 손님들을 기다리는듯 환하게 불이 켜져있습니다.  옹기종기 걸어가는 행인도 몇명 보이지요.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은 우리가 마치 몇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 합니다. 액자를 창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창밖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 그림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Six O'clock, Winter (1912) 라는 또다른 고가 기차 (EL) 풍경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사진 파일이 상태가 안좋아서 웹에서 얻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속의 여섯시의 풍경은 오전일까요 오후 일까요? (제가 볼때는 오후 여섯이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  이 작품이 1912년작이고, '그리니치 빌지지에서 바라본 뉴욕'이 1922년 작품이므로, 두 그림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면, 1912년 작품은 고가기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고, 1922년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이지요.

 

 

 

 

http://www.phillipscollection.org/research/american_art/learning/sloan-learning.htm

 

 

 

무료 커피

 

The Coffee Line (1905)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뉴욕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을 발견한 슬로언이 그려낸 겨울 저녁의 풍경입니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있지요. 슬로언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어둡고 긴 행렬을 묘사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The Masses 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비가 들이치는 페리선

 

Wake of the Ferry, No. 1 (1907)

페리선의 물길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지금도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중에 배(Water Taxi)로 강을 건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100여년전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페리선을  그린것은 당시로서는 '엉뚱한' 시선이었을겁니다.  비가 들이키고 물결이 거칠게 일고, 전체적으로 '내가 그 페리선을 탄듯' 심란한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여인도 그래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이 그림은 그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슬로언은 190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는데, 그의 알콜중독자 부인은 이후로도 걸핏하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기위해 이 페리호를 종종 이용했지요. 결국 이 그림속의 여인은 슬로언의 알콜중독자 아내의 뒷모습이었던 것인데요.  1907년에 슬로언이 그의 작업실에서 The Eight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을때 부인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남자 작업장에 여자가 허락도 안받고 나타난거죠, 아마 그렇겠죠.) 술도 몇잔 마셨겠다, 화딱지가 난 슬로언이 그 자리에서 의자를 집어던져가지고 이 그림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그림을 또다시 그리게 되는데 그 (2)번 그림은 필립스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이 (1)번 그림은 슬로언이 (2)번 그림 그린후에 손을 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Beal 2002).  아무래도 이런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페리선의 풍경이 슬로언과 그의 아내의 풍경이었다 싶기도 하지요.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대도시의 뒷골목의 삶의 풍경, 이런 풍경은 Henri 가 주도했던 Ashcan 일당들의 주요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한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1922년 미국 화단의 상황속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미술의 역사는 유럽에 비해서 '일천'할수밖에 없지요. 제가 에드워드 힉스나 조쥬아 존슨과 같은 초기의 '포크 아트' 작가들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소개를 한 이유가 있는데요, 미국은 초기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였고 유럽 문화권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자생의 문화가 없었다고 봐야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제외하면).  그래서...Henri 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탄생 이전의 미국 회화사는 '유럽 베끼기'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차는 미국의 인상주의나 그 이전의 풍광, 초상와 위주의 미술과 미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제가 왜 이들부터 시작을 안하고 풍속화가 잠깐 건드리다가 '사실주의'로 점프를 해버렸는가하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뭐 대략 사이비 유럽미술 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제가 감지하기에 미국의 사실주의 화파들부터, 미국의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슬슬 세워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부터 미국의 풍경이, 미국의 서민이 화면의 중심에 슬슬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로언의 전철 그림과 도심 그림이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어느 외국인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미국 미술을 보는 관점이긴 합니다.)

 

 

 

Yeats at Petitpas'

 

이 그림은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어느 하숙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입니다.  Petitpas 는 프랑스 출신의 두 자매가 경영한 하숙집 이었습니다. 

 

이곳에 영국의 철학자이며 예술가였던 John Butler Yeats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가 머물렀는데, 그는 영문학도들에게 (그리고 교양 차원에서 영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인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의 아버지입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는 69세 되던 해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애시캔'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결국 뉴욕에서 사망하여 뉴욕에 뼈를 묻었지요. 그러고보면, 그의 아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유럽'문화를 이상화 했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말년에 문화 불모지와 같은 뉴욕에 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갔군요.

 

흰 턱수염의 노인이 존 버틀러 예이츠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가 존 슬로언이군요. 음식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하숙집 주인이고요, 그이의 왼쪽에 모자를 쓴 여인이 슬로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이 하숙집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당시 미술,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Yeats at Petitpas' (1910)

Oil on Canvas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2009년 10월 3일 촬영

 

 

 

해부학교실

 

존 슬로언은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Anschutz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하는 안슈츠 선생을 에칭 판화로 묘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Anshutz on Anatomy (1912)

해부학 교실의 안슈츠 선생

Etching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19일 촬영

 

 

 

 

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웹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강단아래에 안슈츠 선생이 서서 강의를 하고 있고,  강단위에 인간 골격이 서있고, 그 옆에 성기만 가린 남자 누드 모델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둘러 앉거나 서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학생들중에 여학생도 보입니다.  아마도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남자 누드 모델이 성기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미국 미술 학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는 누드 모델이 성기를 드러내면 안되었다고 하지요.

 

 

슬로언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보긴 했는데, 막상 제가 가진 작품 사진 파일이 미미하여 그의 미술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소개할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화집이 아닌 '내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라도 슬로언 작품들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잘 갈무리하여 좀더 그에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화집에서 본,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로는 그의 '빨래'관련 그림들인데요. 슬로언이 도심에서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하는 여인들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래서 '빨래' 주제의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것 역시 훗날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52079

 2. Sherry Babbit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Philadelphia, PA.

 3. Graham W. J. Beal (2002) American Beauty: Paintings from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1770-1920. Scala Publishers Ltd. London, UK.

 

 

 

 

2009년 12월 6일 red 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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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m/Ashcan School2009. 12. 6. 02:41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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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료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2009.12.14 09:43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림 추가, 내용 추가 되었습니다.

    2010.01.30 09:09 [ ADDR : EDIT/ DEL : REPLY ]

Realism/Ashcan School2009. 12. 5. 13:24

 

Snow in New York  뉴욕의 눈 (雪),  1902년

Robert Henri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촬영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는 미국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미술가들의 스승으로 알려진 화가 입니다.  이 사람의 가족력이 좀 흥미로운데, 본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Cozad 였고 그래서 로버트 헨라이는 원래 Robert Henry Cozad 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웃 사람과 다투다가 총질을 하는 바람에 이웃사람게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야반도주를 하는 수 밖에요. 결국 가족들도 야반도주한 가장을 따라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훗날 새로운 삶을 위해 성씨를 바꿔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이름이 졸지에 로버트 헨라이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아, 그는 미국출신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 Mary Cassett (메리 커셋)과도 친척이라고 합니다.  메리 커셋에 대한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기고 하겠습니다.

 

헨라이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러하였듯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1891년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온 헨라이는 1892년부터 미술 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당시 인쇄매체의 삽화가로 활동하던

 * William Glackens

 * Goerge Luks

 * Everett Shinn

 * John French Sloan

 

등과 어울리며  Ralph Waldo Emerson,  Walt Whitman, Henry David Thoreau 의 사회사상 관련 글을 읽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였고, 월트 휘트만은 미국 최초의 산문시인으로 풀잎과도 같이 강인한 대중들을 노래한 시인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에게 월든호수 (Walden) 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역시 Self Reliance 정신의 신봉자였던 인물입니다.

 

이들은 이후에 활동의 본거지를 뉴욕으로 옮기게 됩니다. 헨라이는 뉴욕의 예술학교 (New York School of Art)에서 교편을 쥐게 되는데 이때 Edward Hopper, Rockwell Kent, George Bellow, Stuart Davis 등을 가르치게 되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상황은, 사회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작업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1904년에는 한해 동안 전국적으로 4,000 번의 파업이 진행되었다는 집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노동운동은 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뉴욕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의 고등학생등의 필독서중에 Upton Sinclair (업튼 싱클레어)의 The Jungle (정글, 1906)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고기 가공장에서 일하는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민자들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이들이 처한 노동 환경은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얘기지요.  미국의 Self Reliance 라는 정신적 미덕도 통하지 않는 현상을 싱클레어는 고발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소설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고,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심에 당시의 미술가들도 서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당시 미술가들은 사실적인 사회, 사람들의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흐름의 선두에 서 있던 집단이 헨라이를 위시한 애쉬캔 (Ashcan) 그룹이고, 이들이 후에 The Eight (8인회)로 거듭나게 되지요. 헨라이는 그의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주변의 사람과 삶의 풍경을 그리되, 이를 상대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잽싸게 그리라는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Do it all in one sitting if you can," he advisded them. "In one minute if you can."  (Pohl, 2008) 

(해석: "그자리에서 한번에 그려버리게나," 헨라이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가능하다면 일분 안에." )

 

1902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가진 후 그는 풍경화를 접고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맥베스 갤러리에서 "The Eight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사실 이 전시회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프랑스의 살롱전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에 홧김에 인상파의 세기를 열었던 것처럼, Ashcan 화가들이 미국의 전시장에서 푸대접을 받자 미술비평가들과 정면으로 한판 단단히 붙은 후에 이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인데, 그 결과는 대중적으로나 비평계 모두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헨라이는 사실 그의 미술 작품 보다는 그가 미국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의 지도자 역할을 잘 해냈고, 그리고 미술 교육에서 공로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술사적 인정을 받는 편입니다.

 

헨라이가 후기에 초상화로 돌아서긴 했는데, 그가 초상화 작업을 통해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초상화 작품들은 악사, 소년, 인디안 소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Gypsy with a Bandurria (1906)

반두리아를 들고 있는 짚시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헨라이가 그린 작품입니다. (제가 헨라이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사진 상태가 성의가 없어보이지요? 예... 그래도 정성껏 찍을걸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헨라이는 유럽의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소개가 되는데요, 이 그림 사진을 보니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과 비슷한 구도와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 창작 년도를 찾아보니 1866년이군요. 다리 모양 닮았죠?  전체적인 구도도...

 

 

Manet, The Fifer (1866)

 

 

 

 

 

 

The Beach Hat (1914)

비치 모자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Boy with Plaid Scarf (1916)

격자무늬 목도리를 한 소년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Indian Girl in White Ceremonial Blanket (1917)

제사용 담요를 휘감고 있는 인디안 소녀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은 헨라이가 뉴멕시코주의 산타페를 두번째 방문했을때 현지의 인디언소녀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Julianita 로 San Ildefonso Indian 종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마도 제 그림 사진 파일을 뒤져보면 어딘가에 헨라이의 초상화 사진이 몇장 더 있을것 같습니다.  때로는 미술관에서 헨라이의 작품이 보일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 매력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봤던것들을 한페이지에 시간순서대로 정리하다보니 제가 미술관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도 됩니다. 그냥 하나 하나 볼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 예를 들자면 헨라이의 초상화의 소재가 된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혹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면서도 모두 닮아보인다는 것 (이는 헨라이의 표현 스타일에 일관성이 있어서 그러할 것이겠지요) 뭐 이러한 것들 입니다.  짚시 악사 그림과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그림의 유사성도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쳐다보면서 생각한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에서 미술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후의 사색이나 반추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

 

돌아보면, 저는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지만, 후에 사진들을 다시 정리하거나 관련 페이지를 적으면서,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사실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미국 미술 이야기' 블로그 프로젝트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깨닫게 되는 것들이 페이지가 쌓일수록 늘어가니까요.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http://americanart.textcube.com/137

 

 

참고문헌:

 

1.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2. Suzanne Bailey (2001), Essential History of American Art, Parragon Publishing, Bath BA, UK

3. William G. Scheller (2008), America: A History in Art, The American journey told by painters, sculptors, photographers, and architects. Black Dog & Leventhal Publishers; New York, NY.

4. Marcha N. Hagood & Jefferson C. Harrison (2005)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Selected paintings, sculpture, and drawings. Chrysler Museum of Art: Norfolk, VA

 

 

 

Posted by Lee Eun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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