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a Mary Robertson, Moses 할머니의 일생

 

모세 할머니는 1860년에 태어나 1961년에 사망했다. 1세기 한 바퀴를 돌고도 일년을 더 살은 셈이다.  결혼하기 전 이름은 안나 마리 로버트슨 (Anna Mary Robertson)이었고, Moses와 결혼하였으므로 남편의 성을 따라서 Moses 할머니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안나 마리를 씨씨하는 애칭으로 불렀다. 씨씨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 뉴욕주의 시골마을, 평범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이로 태어났다. 당시 농가의 아이들은 집안일을 거드느라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많지 않았다. , 가을에는 들판에 나가서 일을 거들어야 했고, 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어느 겨울날 아빠가 몸이 아파서 며칠간 일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지내게 된 적이 있었다.  아빠는 심심한 나머지 집안의 빈 벽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거실벽에 페인트로 호수의 풍경화를 그려넣었는데, 온가족이 이 그림을 보고 기뻐하였다. 어린 씨씨 역시 아빠의 그림이 좋아보여서 판자에다 숲과 호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대로 이것을 ‘lamb scape’ 라고 불렀다. (영어로 풍경화는 랜스케이프, landscape 인데, 어린아이가 이 단어를 잘 모르니까 lamb scape 라고 말 한 것이다.) 식구들은 씨씨가 램스케이프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깔깔 웃었다고 한다.

 

씨씨는 농가의 소녀들이 그러하듯 엄마가 단풍시럽을 만들거나, 우유로 버터를 만들 때 거들어야 했다. 씨씨는 양초를 만들고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세탁이나 다림질, 바느질 등 집안에서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배웠다. 그리고 열두살이 되던 해에, 다른 농가의 소녀들처럼 씨씨도 남의집 살이를 하기 위해 떠났다. 60년대, 70년대 농가의 소녀들이 서울이나 대도시에 식모아이로 들어간것과 마찬가지 풍경이었으리라.  당시에는 이러한 풍경이 낯설지 않았으므로 씨씨역시 이런 상황을 특별히 슬퍼하지는 않았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 명랑하게 성장했다.  씨씨는 일요일에 주인집 가족들과 다함께 교회당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사람들도 만나고 친구를 사귈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씨씨가 두번째로 옮겨간 집에서는 씨씨가 학교에 다닐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집안 일을 모두 마치고나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어느날 씨씨가 그린 마을 풍경화를 본 선생님이 그 솜씨에 감탄하여 그림을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씨씨에게는 잊을수 없는 기쁜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자신의 그림을 칭찬해주었으므로.

 

 

 

 

이렇게 남의집살이로 일을 하던 씨씨는 1986, 17세 되던 해에 토마스 솔로몬 모세 (Thomas Solomon Moses)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 역시 같은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둘은 결혼하여 버지니아의 섀난도 골짜기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이들은 열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에 다섯명의 아이를 골짜기에 묻어야 했다. (그림: 섀난도 골짜기 Shanandoh Vallery, 1938)

 

 

 

 

 

 

 

 

 

섀난도 골짜기의 농장에서 살던 이들은 다시 뉴욕주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이글 브리지 (Eagle Bridge) 근처에 농장을 장만하여 니보산 (Mr. Nebo)이라고 이름짓고 정착한다이곳에서 씨씨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농부인 남편을 거들면서, 집안 살림을 하면서 부지런하게 살아간다. 어느해에 도배를 하다가 도배지가 다 떨어지자 씨씨는 페인트로 난로 가림판에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가족들이 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녀가 최초로 그린 커다란 그림이었다고 모세 할머니는 술회한적이 있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여 집을 떠나고 난후, 1927 1, 모세 할머니가 67세 되던해에 남편 토마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녀들도, 남편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모세 할머니는 시름을 덜 겸, 털실로 헌 그림을 고치곤 했는데, 시력이 약해지고 류머티즘으로 바느질을 하기 어려워지자 그림붓을 들게 된다. 그렇게 십여년간 모세 할머니는 심심파적으로 싸구려 페인트와 붓을 이용하여 추억속의 풍경들을 그리게 된다. 그의 그림 속에는 링컨 대통령이 저격당하여 조기를 내 걸고 있는 마을이 들어있기도 하고, 새로운 자동차를 타고 소풍가는 가족의 풍경이 그려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뉴잉글랜드 지방 농촌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뉴잉글란드 지방이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이 길어서인지 특히나 눈 쌓인 겨울 풍경이 많이 보인다. 흰눈,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조각보를 만드는 장면도 보이고, 다 함께 단풍시럽을 만드는 장면도 보인다. 이는 모세 할머니가 평생 살아오면서 직접 경험한 삶을 풍경들이었고, 그이의 추억속에 생생하게 흐르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의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1938, 모세 할머니가 78세 되던 해에, 모세 할머니는 자신의 그림을 동네 상점 (Hoosick Falls drugstore)에 진열해 놓았다. 몇푼에라도 팔리면 용돈벌이를 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오랫동안 예정되어온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마침 이 상점을 지나던 뉴욕의 미술품 수집가 루이스 칼더 (Louis Caldor)가 시골 상점에 진열된 모세 할머니의 그림들을 발견하고, 이 그림에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낸 것이다. 그는 당장 상점에 진열된 작품들을 모두 사들여가지고 뉴욕으로 향한다. 처음에 뉴욕 화랑가의 반응은 냉담했다. 알수도 없는 무명, 노인 화가의 그림에 투자해봤자 별 볼일 없을거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무명 미국화가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모세 할머니의 그림 세점을 전시하게 된다. 이어서 1940 (모세 할머니 81) Galerie St. Etienne 에서 모세 할머니의 개인 전시회를 개최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보러왔고, 이들은 모세 할머니의 풍경화속에 담긴 추억을 읽으며 감동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1961년 모세 할머니가 사망할때까지 20여년간, 1,5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내면서, 모세 할머니는 그야말로, ‘국민 할머니로 통하게 된다. 트루만, 아이젠하워, 케네디 대통령이 모세 할머니에게 해마다 신년 카드를 보냈으며, 할머니의 작품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으로 판매되고 혹은 벽지나 직물에 박혀 대량으로 판매되어 나간다. 그녀의 일대기가 드라마가 되어 소개되기도 하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소개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어느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모세 할머니가 살던 시골에서는 그 방송이 잡히지 않아 정작 모세 할머니는 자신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후에 방송 기자가 다큐멘터리 테이프를 가져다가 틀어서 보여줬다고 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신을 본 할머니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무엇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을 만들어 냈는가?

 

미국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예술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편이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을 예술적인 회화로서 취급하기 보다는 풍속화 (folk art, primitive ar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오히려 모세 할머니의 풍속화들이 왜 그 시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지, 그 배경을 주로 논의 하는 편이다.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의 저자 Frances K. Pohl 이나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의 저자 Robert Hughes 는 모세 할머니가 발견 된 시점의 사회적 분위기에 주목한다.

 

모세 할머니가 뉴욕화단의 수집가에게 발견될 즈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공공미술정책의 영향으로,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중서부 출신의 화가 그랜트 우드 (Grant Wood)가 한편에서 미국인의 미국적인 것을 외치며, ‘미국의 풍경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거니와, 뉴딜정책의 공공미술프로젝트에서 요구된 것이 미국의 풍경이기도 했고, 여태까지 유럽문화에 의지하던 미국인들은 우리들만의 것에 서서히 눈을 돌리게 된다.  미국이 자랑하는 미국화가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가 너무나도 미국적인 풍경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등장한 것이 1930년대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경제 대공황이었던 1930년대에 미술가들도 역시 경제적 암흑기를 거치게 되었는데, 에드워드 호퍼는 이때부터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30년대에 서서히 우리 미국인들의 풍경에 눈을 뜨게 되는 미국의 대중들은 2차대전을 거치면서 1945년 전승국이 되어 경제적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자신이 소속한 국가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유럽으로 눈길을 돌리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 우리 할머니들의 것, 우리가 향유하던 것을 향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모세 할머니 외에도 1948년 크리스티나의 세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 청년 앤드루 와이어드가 있었고, 그리고 일관되게 미국의 얼굴, 미국의 풍경들을 밝은 색조로 그려낸 노만 로크웰 (Norman Rockwell)도 있었다.  미술 수업을 받지도 못 한 채로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역시 말년에 미술계에 데뷔한 호레이스 피핀 (Horace Pippin)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발굴해 낸 미국의 작가라고 할 만하다.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가 특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계기를 당시 눈을 뜨게 되는 텔레비전과 대량생산문화에서 찾기도 한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텔레비전은 대중문화 매체의 상징이고, 텔레비전에 소개되는 모세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이가 그려내는 작품의 예술성을 떠나서 그대로 소박한 인간의 승리를 전하는 드라마이기도 했을 것이다. 카드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이의 그림을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 직물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의 그림이 박힌 벽지나 테이블보는 모세 할머니를 더욱 대중에게 다가가게 해 주었다. 그이가 그린 그림들이 예술성이 어떠한지 이미 그것은 대중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모세 할머니는 예술성을 넘어서서, 비평가들의 회의적 시선을 넘어서서 이미 국민 할머니가 되었고, 대통령들이 앞다퉈 악수를 하고 싶어하는 미국 문화의 상징, 그리운 추억의 아이콘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제목: Christmas (1961)

                                                 Oil and Tempera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 풍속화 갤러리 2009년 9월 6일 촬영

 

모세할머니는 나이 80에 미술계에 정식 데뷔했지만 그 후로 20년이 넘도록 국민 할머니로 영예를 누리며 살아갔다. 그가 남긴 그림이 1,500점이 넘는다고 하는데, 꽤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이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그이의 그림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미술관 웹사이트를 뒤져보면 소장품 명단에 몇 편이 올라있지만, 전시장에 내 걸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한 모세 할머니의 작품은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 한 점,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 점, 이렇게 딱 두 점이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은 풍속화 (folk art)’ 갤러리에 걸려있다.  필립스 콜렉션에서도 한번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요즘은 전시되고 있는 작품이 없다. 

 

                                           2009년 7월 3일 촬영

 

 

 

전시장에서 그림을 볼 수 없다 해도 실망 할 필요는 없다. 해마다 달력업자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 열두 장을 담은 달력을 찍어내고, 우리는 일년 내내 그이가 그린, 행복한 그림을 보며 지낼 수 있으니까. 모세 할머니는 그이가 기억하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우리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 우리 이웃집 어르신들, 내 친척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찾아낼 수 있다. 미술 비평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회화사적 작품성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모세 할머니는 비평가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고 명랑하게 그림들을 그려나갔고, 그의 그림들은 지금도 나에게 노래, 행복한 어린 시절의 노래를 선사한다. 이 행복한 보편성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어떤 설명을 해 줄 것인가?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예술은 비평을 초월하는 곳에 있다고.

 

http://www.benningtonmuseum.com/index.aspx  이곳은 모세 할머니를 기념하는 미술관. 뉴잉글랜드 지역 버몬트주에 위치하고 있다. 2009년 8월에 매사추세츠를 방문하면서 이곳을 들러보려고 신경쓰고 있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가 볼 수 없었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는 모세 할머니가 젊은시절 20여년간 살았다는 셰난도 골짜기의 농가집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  소풍삼아 그 언덕에라도 가게 되면 그때 관련 페이지들을 업데이트 하겠다.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2  또다른 일러스트레이터, 여성 화가 Tasha Tudor 이야기.

 

 

참고자료:

 1. Grandma Moses, written and illustrated by Alexandra Wallner

 2.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by Robert Hughes

 3.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by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Posted by Lee Eunmee

 

 

Grandma Moses 모세 할머니: Anna Mary Robertson  (September 7, 1860 – December 13, 1961)

 

 

달력 속의 추억

 

 

 

내가 2008년에 내 연구실에 걸어놓고 내내 들여다보던 달력은 Grandma Moses 라는 화가의 민속화 (folk art)로 채워져 있었다. 이 달력을 살 때만 해도 나는 작가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단지 열 두 달 달력에 채워진 열 두 장의 그림들이 어쩐지 낯익고 정겨웠다. 분명 미국의 풍속화들인데 이상하게도 그 속에 채워진 사람들이 모두 내 가족, 내 형제, 내 고향 사람들처럼 보여졌으며, 그 그림들 역시 내 고모나 언니가, 혹은 내 친구들이 초등학교 시절 그림일기장에 그려 놓은 크레파스 그림들처럼 보였다. 그 정겨움 때문에 나는 달력을 골랐고, 그 달력은 그렇게 몇 달을 나와 함께 보냈다.

 

그 해 4, 나는 워싱턴 디씨 시내에 있는 국립 여성 미술관 (National Museum of Women in the Arts)에 들렀다가 그 곳 뮤지엄샵에서 아주 아름다운 미술책 한 권을 발견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친숙한 그림들. 그 책을 살 때 까지도 나는 그 책 속의 화가와 내 달력 속의 화가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 달력과 그 책에 소개된 그림의 화가가 모세 할머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 나의 무신경과 둔감함이라니. 매일 달력을 쳐다보면서 따뜻함을 느꼈던 내가, 정작 화집을 사놓고도 작가의 이름조차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니. 이런 사연으로 2008년 한 해를 나는 모세 할머니의 그림을 보며 살게 되었다. 

 

빨간 드레스의 추억

 

 

 

1864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이 국가적인 공휴일로 제정된 바로 이듬해, 소녀 씨씨(Sissy)에게 아버지는 약속한다, 마을에 가서 빨간 드레스를 사다 주겠다고. 어린 씨씨는 온종일 아버지가 돌아 오시기만을 기다렸으리라. 그런데 아버지가 마을에 나가보니 마침 휴일이라서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꼬맹이 딸을 위하여 조금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가서 약속한 대로 빨간 드레스를 한 벌 샀다. 정확히 빨강은 아니고, 벽돌 색이나 황토색에 가까웠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딸에게 한 약속을 성실히 지켰다. “결국 나는 내가 빨간 드레스라고 생각했던 그 옷을 입어보지 못했지 (So I never got what I call a red dress).” 이제 파파 할머니가 된 소녀 씨씨는 그렇게 그 빨간 드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소녀는 빨갛지 않은 빨간 드레스를 받으며 실망스러워도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리라. 우리 삶은 늘 그런 식이 아니던가?

 

 

내가 꼬맹이 이던 시절, 할머니는 늘 나를 남자아이 같은 상고머리로 만들어 놓았고, 내게 주어지는 옷은 늘 파란색 이었다. 내 바로 위의 언니는 늘 머리를 길게 기르고 곱다란 빨간 리본을 하고, 빨간 주름치마를 입고, 빨간 스타킹을 신고, 빨간 운동화를 신었다. 나는 늘 파란 옷을 입었는데, 심지어 내게 주름치마를 입힐 때 에도 그 주름치마 역시 파란색이었다. 지금도 언니와 내가 손을 잡고 고향의 연못 앞에서 나란히 서 있는 흑백 사진이 있는데, 그 흑백 사진 속의 언니와 나의 옷 색깔은 그저 짙은 회색처럼 보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옷들의 색깔을 기억한다. 나는 늘 파랑이었다. 혹은 남색이었다. 그것은 아들 욕심이 많았던 할머니가 첫째로 아들 손주를 맞이한 후에, 둘째로 손녀를 보고, 그리고 나서 셋째로 나온 것이 또다시 손녀딸이 되자 초조함을 느끼고는 다음엔 손자녀석을 볼 욕심으로 셋째인 나를 사내놈처럼 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나는 사내동생을 보았다. 사내동생을 본 후에도 나는 여전히 파랑이었다. 어느 해에 내가 부모님과 떨어져서 할머니 품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영문도 모르고 할머니 품에 맡겨진 나는 세상 근심 없이 뛰노는 듯 했으나, 해가 질 때마다 서럽고 그리운 마음에 집 뒤에 숨어서 혼자 울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에서 엄마가 다니러 오면서 내게 남색 스웨터를 하나 사다 주셨다. 엄마와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동네를 쏘다니다가 흙 강아지가 되어 나타난 나에게 그 남색 스웨터를 머리에 씌워 입혀주셨다.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입어도 맞을 정도로 아주, 아주 커다란, 짙은 하늘같이 푸르딩딩한 스웨터였다. 그리고 아주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진땀이 났다. “엄마, 나도 이제 서울 가는 거지?” 나는 엄마 품에 매달려 강아지처럼 꼬리를 치며 놀다가, 그 남색 스웨터를 동네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자랑을 하기 위해 마당 밖으로 나갔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내 또래 아이들에게 서울에서 엄마가 왔으며, 이렇게 좋은 스웨터를 엄마가 사왔으니 이제 나는 서울에 갈 거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가 으스대며 집 안 마당으로 들어서니 툇마루의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울고 떼를 쓸까 봐 나 몰래 혼자 서울로 가버리셨던 것이다. 나는 집 앞 한길 가, 흙먼지 날리는 그 길가에 앉아 해가 지도록 꽥꽥대며 울었다. 어린 시절에 여러 가지 가정 사정으로 식구들과 떨어져서 할머니 댁에서 얼마가 지내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는 성장의 과정일 것이다. 내 이웃에도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아이들이 있었고,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모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 이었으므로 대개들 큰 상처 없이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지나간다. 우리 엄마는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그 위로 세 명의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기가 힘이 들었으므로 할머니가 나를 그냥 좀 맡아서 돌봐 주신 것뿐, 그 속에 비극적 가정사가 숨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말없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하곤 한다.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해가 지도록 흙먼지 이는 길가에서 혼자 꽥꽥대고 울고 있던, 철 이른 털 스웨터를 입고 진땀을 내며 울고 있던 아이가 하나 살고 있다. 나는 그 아이를 달래 줄 방법을 잘 모른다.

 

모세할머니는 그이가 씨씨였던 시절, 그 소녀시절에 가져보기를 열망하였으나 영원히 가질 수 없었던 그 빨간 드레스를 죽을 때까지 기억에서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빨간 드레스, 빨간 코트를 입은 여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모세 할머니의 빨간색을 볼 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파란 멍처럼 각인된, 나의 파랑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주디스 아줌마가 오셔요

 

 

 

내가 갖고 있는 Designs on the Heart 표지 그림에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겨울 풍경이 담겨있다. 이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각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헤아려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이다. 물동이를 나르는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내가 어린 시절에 우리 집 뒷마당에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우물이 없는 집에서는 우리 집으로 물을 푸러 왔었다. 이웃집에는 앞마당에 우물이 있었지만 그 집 떠꺼머리 총각은 우물물을 푸는 대신에 벌컥벌컥 펌프질을 하여 물을 퍼다가 자기네 집 부엌 가마솥에 붓곤 했다. 그것이 한결 빠르고 속이 시원했기 때문 일 것이다.  눈썰매를 타는 사람도 있고, 눈 속에 뛰어다니는 개도 있다. 어디론가 바삐 가는 사람도 있고,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책 속에 특히 내 눈길을 끄는 그림이 있다. “주디스 아줌마가 오셔요Here comes aunt Judith” (1946)라는 제목이다. 아마도 모세 할머니는 그이가 씨씨로 통하던 어린 시절, 멀리서 찾아온 친척 아줌마, 이모, 혹은 고모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주디스 아줌마를 발견하고 달려갔을 것이고, 주디스 아줌마는 네가 씨씨로구나! 그 사이에 아주 많이 컸는걸!” 하며 반겼을 것 같다. 이 그림을 보면 그림 속의 아이는 씨씨가 아니라 나 자신인 것도 같다.  주디스 아줌마는 내 고모들이다. 우리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서 늘 큰언니처럼 우리와 함께 뛰놀며 우리를 감싸주던 작은 고모들 같다.

 

모세 할머니

 

 

 

모세 할머니는 1860년에 태어나 1961년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장장 101년을 이 지구별에 머무르다가 떠났다. 1세기를 넘게 산 모세 할머니. 그이의 본명은 Anna Mary Robertson 이다. 그는 뉴욕주 (New York) 의 농민의 딸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열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에 다섯 명의 자식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Anna Mary 를 씨씨(Sissy)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집에서 가사를 도우며 학교에 다니던 씨씨는 열 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큰 마을의 어느 집으로 일을 하러 떠난다. 말하자면 식모살이를 하러 떠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미국의 농촌에서는 아이들을 어디론가 일하러 보내는 것이 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나도 자라나면서 내 고모 또래의 마을 처녀들이 도시로 식모살이를 하러 야반도주 하거나, 혹은 결국 버스 차장이 되거나 (후에 안내양 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안내양 이후에는 버스 안내양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에 생긴 공장에 공원으로 취직하는 광경을 익히 보아왔다. 내 고모들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전자회사 공원으로 일을 하러 갔다. 그때는 공순이, 공돌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나와 함께 태어나 자라난 고향의 친구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보퉁이 하나를 챙겨가지고 엄마와 함께 상경했다. 그 모녀는 서울의 우리 집에서 하루를 지내야 했는데, 언니와 내가 함께 쓰던 방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그 친구는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하는 언니와 나를 열적게 쳐다봤다. 그 친구는 미아리 어느 약국 집에 식모살이를 하러 갔다. 그 친구는 한스러워 하거나 억울해 하지도 않았다. 그는 착실히 식모살이를 했고, 덕분에 시골집에서는 그 돈으로 오라비 고등학교에도 보내고, 송아지도 사서 키우고, 집안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들은 슬퍼도 슬픈 내색 없이 살기 위해 살아갔다.

 

씨씨는 성장하면서 이집 저집으로 흘러 다녔다. 어느 집에서는 씨씨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해주었고, 비록 일하는 아이였지만 가족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그렇게 흘러 다니며 살다가 역시 비슷한 환경에서 일을 하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청년의 성이 모세 (Moses)라서 결국 Anna Mary Robertson Moses 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모세 할머니라는 별명은 남편의 성 때문에 붙여지게 된 것이다.

 

결혼한 씨씨는 평생 동안 여염집 아낙처럼 부지런히 일하며 살았다. 그이는 근면한 사람이었다. 아이들도 무탈하게 착하게 자라났다. 남편도 착하고 성실했다. 씨씨는 집안에서 수놓기를 즐겨 했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어 팔십에 가까워지자 눈이 침침해서 바늘땀을 잘 볼 수가 없었다. 혼자서 바늘귀를 꿰기도 힘들었다. 평생 즐겨오던 일인데 할 수가 없다니! 낙담한 그에게 그의 여동생이 바느질 대신에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제안을 했다.  바느질을 할 수 없어 심심해하던 모세 할머니는 팔순이 다 되어 붓을 들었다. 그리고 나무 판이나 종이 위에 수를 놓듯, 마음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형상화 해 나갔다. 추억 속의 사람들이 모세 할머니에게 다가왔다.

 

 

  다음회에 계속 ...

 

설마 신종플루는 아니겠지, 고열을 동반한 감기 증상 때문에 스스로 가족들과 격리되어 방구석에서 약먹고 자고, 약먹고 자며 보내는 시간. 음 약기운에 잠이 들곤 했는데, 잠 오는 약을 먹어도 잠이 안와서 난감. (내참, 감기때문에 글을 쓰고 있다니.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후에 역사책을 일필휘지로 날렸다고 하던가.)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