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19. 1. 31. 23:44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식사자리. 날씨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 골프 얘기. 내가 골프 안 친다고 하자 골프 얘기는 중단되고, 다시 세상 돌아가는 얘기.  그러다가 강대국과의 외교 문제로 얘기가 돌아가면서, 한국은 왜 중국에 빌빌대고 미국에도 꼼짝 못 하면서 허구헌날 일본만 때리러 드냐고 묻는다.  


'한국이 일본을 때리기는 하는건가?' 의아해 하고 있는 사이에, 골프를 치지 않는 내가 별 말이 없자 그가 마저 이야기를 이어간다, "위안부 배상 문제가 벌써 언제 끝났는데 아직도 그거 가지고 일본을 물고 늘어지는건가, 외교고 뭐고 그냥 성질 내고 막 나가겠다는것이니 이런 무례가 또 어딨나!" 그는 제법 확신에 차 보인다.  나는 화장실에 가야 한다며 그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그날 저녁 식사 자리는 좋게 끝나기는 다 틀린거다.  초면에 얼굴 붉히고 사생결단으로 멱살잡이하기도 귀챦고. 내 역사 의식이 뭐 제대로 박힌것인지 자신하기도 어렵고.


나는 정치니 외교니 역사니 그런거 잘 모른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가지는 분명하게 말 할수 있다.  



내가 어느 집구석 딸이다. 그런데 우리집 아비 어미가 지지리도 못나다보니, 이웃 집 남자들이 우리집을 만만히 보고, 나도 만만히 보고, 나를 훤한 대낮에 사거리에 끌고 나가서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강간하고 윤간하고 폭행하고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고는 가버렸다.  마을에서 힘 좀 쓴다는 이웃들이 자기네들이 정의로운척 폼잡으며 뭐라뭐라 하니까, 그 이웃의 불한당이 내 아비 어미, 오래비와 협잡을 한다. 


"야, 불쌍해서 좀 만져준거야. 원래 먼저 꼬리친건 니네집 딸이야. 저도 좋아서 한거라구.  뭐 너네 신세가 딱한것 같아 보이니 내가 인정을 베풀어주마. 야 이거나 먹고 떨어져. 알았니? 잘 해 보자구. 좋은게 좋은거야."


그래서 그 아비 어미 오라비 놈이 불한당의 돈을 받아다가 썼다.  내 아비 어미 오라비 그 누구도 '당한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물론 이웃 놈들도 내게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는 가끔 돈 떨어지면 이웃에게 과거를 팔아 돈을 갖다 썼고, 그 때마다 번번이 나를 내세웠다.  하지만 누구도 내게 무엇이 잘못된것인지 말하지도, 사과하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나를 팔아 제 배를 불릴 뿐이었다.  내가 언제 저들에게 돈 달랬나? 내가 언제 내 아비 어미에게 배상해달랬나? 나는 제대로 된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이 일 자체를 강물에 흘려버리고 싶을 뿐이다. 내가 언제 돈 달랬냐구?




나는 이것이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위안부'라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이웃이고, 내 아비이고 어미이고 오라비이고 뭐든 사람을 믿지 않는 편이다. '위안부'라는 이름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위안'을 받을수 없다. 없을 것이다. 그저 한명 한명 한을 품은채 사라져 갈 뿐이다. 이웃에게서도 제집 식구들에게서도 제대로 존중 받지 못 한 채로. 너라면 네 여동생이 윤간당하고 버려졌는데, 네 동생은 여전히 길거리 매춘업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가해자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그럼 너는 더 나쁜 가해자지. (비굴하고 치사한 놈이지.)  이제와서 뭘 어쩌란 말이냐구?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새끼들아?"



그래도 정말 몰라서 묻는거면 최소한 한가지는 일러주마. 너희들 역사책에 태평양전쟁중 일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정확히 기술을 해. 한국및 다른 나라의 여성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성노예로 쓰고 버리고 죽이고 학대 했음을 반성하는 기술을 해. 너희들 미래세대가 더이상 이 일로 엮이지 않도록 하란 말이지. 과오에 대한 시인. 그것이 과오를 바로잡는 시작점이야. 그래야 제대로 털고 지나갈수 있는 거라구. 가해자에게도 이 일이 어려운데, 피해자가 그냥 넘어갈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힘으로 때리고 죽일수는 있어도, 힘으로 기억을 지울수는 없는거지. 안그래? 모두 죽어도 기억은 남는다구. 안그래?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1. 17. 01:50

내 '눈 먼 고양이 폴'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제 외출하여 돌아와 문밖을 내다보니 저녁 늦게 폴이 문 밖 고양이 타워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내가 돌아와 밥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른 고양이깡통과 마른먹이를 가져다 그릇에 담아주니 배가 고팠던 듯 허겁지겁 먹는다. 그 먹는 모습이 참 예뻤다. 눈 먼 고양이 폴이 문 밖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내가 주는 먹이를 먹는 모습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했고, 내 심장은 기쁘게 고동쳤다.


"나비야, 나비야, 너는 그냥 살아있기만 하면 돼.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 좋아!" 


밥을 먹고 있는 녀석의 잔등을 바라보며 나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생명가진 존재들, 내 가족이나 이웃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런 방식으로 대할 수 있는거구나. 


눈 먼 야생고양이의 삶은 고단하다. 그런데 '실용성' 면에서 보면 세상에 이렇게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도 없다. 눈이 멀었으니 간신히 인간이 제공하는 먹이나 먹으며 생존 할 뿐, 새나 다람쥐를 사냥하기도 어렵다. '실용성' 면에서 보면 도대체 이 동물이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먹이만 축 낼 뿐이다. 


나는 내가 후원하고 있는 지적장애 아이 (내 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 애는 아무리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잘 교육 시킨다고 해도 도대체 희망이란게 있을까? 평생을 건강하게 별 탈없이 살아온 내 입장에서 극한의 장애를 가진 아이에 대한 나의 시각이 이런 식이다. 그냥 하루하루 먹고, 배우고, 시간을 보내고 그냥 살아있을 뿐, 이 아이는 장래를 위해서 무얼 계획하고 실행할까?  나는 후원을 하면서도 난감한 편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하듯 희망이 없는 곳에 뭔가 절망적으로 희망의 물을 붓고 있는 애매한 상황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가 눈 먼 고양이 폴에서 속삭였던 독백에서 내가 갖고 있는 난감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냥 잘 살아있기만 하면 돼. 뭔가 위대한 일을 하지 않아도, 어른이 안되어도, 일꾼이 되지 않아도, 지능이 낮아서 뭔가 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이 되지 않아도,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네가 살아 있어서 세상이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모든 생명이 그러할 것이다. 


살아있어 주기만 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이 내게 가장 큰 기쁨이다. 


내가 난감해 하고 있는 신체적/지적 장애인에 대하여,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노인 인구에 대해서, 그 외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힘없는 이웃들에 대하여 나는 '해답'을 구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인생에 해답이란 없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을 뿐이다. 건설적이고 실용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어떤 '해답'을 찾기보다는 '현재' 태양아래에서 살아 숨쉬며 나와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나눠 쓰는 내 이웃에 대하여 나는 예의를 갖추고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하다못해 웃어주면 된다. 그러니까 절망 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하는 존재이므로 이미 절망을 안고 태어났으므로 그 이상의 절망은 옥상옥. 무의미할 뿐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 있음을 서로 축하해주면 된다.  어차피 우리는 다 죽는다. 잘난 사람이나 못 난 사람이나.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고학력자나 저학력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이는 없다.  슬퍼할 일도 없다. 게임은 공정하다. 기뻐할 일이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9. 1. 17. 01:22


나는 대체로 방관자로 살아왔다. 정의와 개인의 안위 사이에서 늘 개인의 안위 쪽을 선택했다. 불편함과 편안함 사이에서 늘 편안함을 선택했다. 한푼이라도 이익이 되는 것과 손해를 보면서도 다른이를 돕는것 사이에서 한푼의 이익을 선택해 왔다. 



나는 비겁했으며, 겁에 질려 있었고, 도망가거나 회피하는데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음악선생님이 방송실에서 나를 포옹 했을 때에도 도망을 쳤으며, 동일한 선생님이 내 친구를 내 앞에서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내 친구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를 때에도 나 혼자 살겠다고 벌벌 떨면서 도망을 쳤다.  나는 내게 행해지는 악덕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방식으로 악덕에 협조했고 악덕과 공생하려 애썼다.  나는 한번도 정의로운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나는 또다시 그러한 유구한 악덕의 물줄기 앞에 서 있고, 다행스러운(?)점은 피해자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모른척 지나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도움을 청했을때 나의 가장 현명한 선택은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으로 '바이스탠더 bystander, 방관자'가 되어서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다. 



입에 발린 말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정말 나쁜 놈이구나. 그런 놈은 가만 놔두면 안돼.(끝)"

"저런, 정말 몸쓸 일을 겪었구나. 그러니 남자들은 믿으면 안돼. 여지를 주면 안돼. 네가 조심해야지 어쩌겠니 (한숨)"

"여자가 얼마나 단정치 못하면 그러겠니. 네가 좀더 처신을 잘 해야지. (비난)"

"할수 없지. 세상이 그렇단다. 법이라는게 우리편이 아니야. 입 다물고 다 잊어버려. (미래지향적 판단)" 



내가 알고 있는 선생님들이, 이웃의 나이들은 성인 여성들이 대체로 이렇게 코치를 했다. 수업시간에 여자 선생님들도 이런식으로 우리들을 가르쳤다. 미투 운동이 활발한 21세기의 오늘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신문에 방송에 크게 떠든다고 상황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판단력은 크게 진보하지 않는다. 숨기고 은폐하고 덮고 지나가고 아무일도 없었던듯 침묵하라고 회유하거나 강요한다. 



이제 나는 이런 사회정의와 규약에 협조할 생각이 없다. 나는 내 식대로 문제를 풀어 갈 것이다. 어쩌면 형편없고 치졸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면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다. 나는 말하고, 연대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이끌어 낼 것이다. 물론 치사하게 SNS나 언론에 불어버리는 식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할수 있으니까. 그것보다는 좀더 규칙을 지키며 저항하되, 저항을 계속 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저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양순하게 협조하면서 스스로를 '이만 하면 됐다. 나는 모범시민이다'라고 추켜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단 한번만이라도, 살면서 단 한번만이라도 나는 정의의 편에 서서, 휘어지고 망가진 것을 곧바로 펴고 고쳐놓고 싶다. 일회성이라고 해도.  죽을때, 딱 한번이라도 나는 정의로웠다고 회고하고 싶다. 죽을때 말이다. 나는 엉망진창의 인생을 대충대충 멋대로 비겁하게 살아왔지만 딱 한번은 정의로웠다고 회고하고 싶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