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 박물관, 듀잉의 작품 전시실 입니다. 2009년 7월 13일에 촬영한 것들인데요. 보시다시피...사진상태가 여엉 '아니올시다' 입니다. DSLR 갖고 다니기 전에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대충대충 찍었던 사진들이라서.  (조만간 다시 들러서 작품사진들을 담아 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 전시되고 있는 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피아노사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백악관에 기증할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인데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재임시 (1903) 듀잉이 '장식'을 담당한 것입니다.  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가 제작한 피아노중에서 십만번째 작품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도 이 피아노를 연주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피아노는 태프트, 윌슨, 하딩, 쿠어리지, 후버,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임기까지 백악관에 있었다고 합니다.

 

 

 

흰 바탕에 금박으로 장식을 하고, 뚜껑 안쪽에 열명의 고운 아가씨들이 있는데요, 맨 왼편의 아가씨는 의자에 앉아있고, 나머지 아홉명은 원무를 추듯 서있는데요. 스타인웨이가 듀잉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America Receiving the Nine Muses (아홉명의 뮤즈들을 맞이하는 아메리카)라는 고전적 주제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홉명의 뮤즈는 제우스와 네모신 (Mnemosyne) 의 아홉명의 딸들을 가리키는데 예술의 상징으로 서양 고전물에 많이 등장하지요.  듀잉은 뮤즈들을 그리면서 미국 건국 초기의 여성들의 옷차림을 한 여인들을 그려넣음으로써 서양 고전화에서 살찍 비껴갔다고 합니다. 뮤즈를 그리더라도 미국식으로 그리겠다는 자존감의 표현이었는지 알수 없으나 이를 애국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평자도 있습니다.

 

 

 

 

 

 

 

 

아래 작품은 In the Garden, 정원에서 (1892년) 작품입니다.

 

 

 

 

 

2009년 7월 13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프리어 갤러리의 듀잉과 타이론 전시실.  왼편에 있는 작품들이 듀잉. 오른쪽 벽에 걸린 작품들이 타이론의 풍경화들입니다.

 

듀잉의 작품, 왼쪽부터 (1) The Four Sylvan Sounds, (2) Before Sunrise, (3) After Sunset, (4) The Blue Dress 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대강 전시실이 이러한 분위기이고,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의 실제 크기가 이정도 된다는 '감'을 독자들께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진에 찍힌 전시물외에도 입구쪽에, 그리고 다른 전시실에 작품들이 있으므로, 제가 프리어에서 '사냥해온' 작품들을 차례차례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깡그리' 찍어왔습니다 ^^)  <--- 이 돌쇠식 열정~ (아이참...사진 기술을 좀 익혀야 하는데...제가 게을러서요...전 아무래도 선생님이 필요해요...게으른 사람들에게는 '교실'이나 '선생님'이 동기가 되지요.  이 대충주의를 버려야 하는데...

 

 

 

이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은 디트로이트에 기반한 독신 사업가 프리어씨가 디트로이트 외곽에 저택을 지으면서 실내 장식을 목적으로 주문한 것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File:Charles Lang Freer House.jpg

디트로이트시에 1887년 세워진 프리어씨의 저택

 

이 집이 지어진 19세기 말 (1887년)은 미국이 남북전쟁 (Civol War, 1861-1865)을 넘어서서 산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황금 시대를 구가하던 때 입니다. 그래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시기를 황금시대 (Gilded Age)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이 Gilded Age 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미국의 '진정한 소설가, 이야기꾼' 마크 트웨인 (Mark Twain)이 처음 소개한 표현입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와 록펠러,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와 그리고 철도용 기차 사업가였던 프리어등 모두 당대의 재벌들이었지요. 이 신흥 산업국가 미국의 재벌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걸신들린듯) 유럽의 명품들이나 아시아의 명품들을 사냥하고 포획하고 서로 자랑하는 것으로 삶의 기쁨을 누렸던 듯 합니다.  (제 표현이 너무 냉소적으로 느껴지신다면...죄송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뭐 돈갖고 해볼거 다해보고 더이상 할게 없어서 이런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돈이 있어야 문화고 뭐고 있는거니까. 특히, 문화는 돈이 없으면 끝장이 나고 맙니다... )  저야 그저 부자들의 이런 취미 덕분에 그거 헐값에 구경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으므로 불평의 여지가 없지요~ ~   앗참, 2009년 8월에 코넥티컷주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저택을 구경했는데요, 이 아저씨도 집안을 무슨 '중세 사원'처럼 금박으로 장식을 했더라구요.  아주 금칠갑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마크트웨인에게 실망을 하고 돌아서고 말았지요.)

 

 

그래서 이렇게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미국인들이 20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1930년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림으로 가지요.  =)

 

'화환 Garland'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도대체 어디에 화환이 있다는거야?"하고 나름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제목입니다. 여자의 왼손끝에 뭔가 희미한것이 보이실텐데요. 아주 작고 희미한 꽃줄입니다. 그 꽃줄을 시계차듯이 손목에 감지요. 그 보일락말락한 희미한 꽃줄을 그림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미술사가들은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이 1920년 이후에는 그림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전하기도 하는데요 (그러고보니 1920년대와 그 이후에 제작된 그림이 안보이는군요. 안그렸다는 뜻인가봐요)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1916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그의 말기작에 해당된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프리어씨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니고 후에 프리어씨가 사들인 것입니다.

 

여인이 앉아있는 의자나 테이블의 다리가 아주 가늘고 간결하지요? 테이블위의 도자기의 딱딱함과 반지르르함이 간결한 화면과 조화를 이룹니다. 여성의 자세나 표정도 '조각상'처럼 정제되어 있고 '고요'합니다. 오직 살아있는 생명체는 여성의 손에 들린 꽃줄 뿐인것 같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그러나 화면의 정 중앙에 배치한 꽃줄이 화면 전체에 고요한 '생기'를 불러일으키는듯 해 보입니다.

 

 

The Garland (화환) c. 191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이 피아노라는 작품은 1891년 프리어가 듀잉에게서 사들인 최초의 작품입니다. 듀잉이 작업하던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발견하여 사들였다고 합니다. 당시에 프리어는 그가 새로지은집의 치장에 열중해 있었고, 실내 일부를 듀잉이 맡아서 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듀잉이 실내장식을 맡은 방에 듀잉의 작품을 걸은 것이지요 (아 돈있는 사람들은 이러고 노는군요 헤헤헤.  난 돈 없으니까, 내가 실내장식 하고, 내가 내 그림 걸고 그러면 되는거지요 하하하.  우리는 셋방에 살아도 재벌과 다를게 없습니다. 내가 내 공간을 장식하고 내 작품을 그려 붙이고, 내가 나를 부려먹고, 내가 나의 명령을 받고, 뭐 혼자서 다 하면 됩니다.)

 

화면이 여전히 간결하죠?  절제되어있고, 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림을 보고, 음, 편안하고 좋구나 이러면 되겠지요. 그래서 듀잉의 그림은 어릴때 침을 흘리며 들여다보던 아슴프레한 요정들의 세계 그림 같아요. 그냥 보면 좋은거죠. 편안하고, 아늑하고...

 

The Piano (피아노) 1891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네가지 숲의 소리'는 듀잉이 뉴햄프셔주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 것입니다. 뉴햄프셔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일부입니다. 저도 지난 여름 (2009년 8월)에 뉴햄프셔주의 농가 (시인 Robert Frost 가 살았던 농장)를 가본적이 있는데요, 뉴잉글랜드의 여름의 숲의 정경이 바로 이 그림속에 스며있다고 할 만 하지요. 그림을 제작하던 당시 듀잉이 프리어와 주고받은 편지에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I wish you could be here taking in this cool fresh air filled with bird notes and scents of flowers... 당신이 이곳에 와서 새들의 노래와 꽃향기 가득한 이 차고 상쾌한 공기를 마실수 있다면 좋을텐데요."

 

 

저는 듀잉의 이와같은 서술이 '사실'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뉴잉글랜드 지방까지 갈것도 없이 제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 워싱턴 지역만해도 강변의 숲길이나 호숫가 숲으로 가면 바로 이런 몽환적인 초록색의 숲에 몸을 잠기게 됩니다. 특히나 이른 봄, 겨울나뭇가지에 새순이 돋기 시작할때부터 녹음이 우거질때까지, 매일 매일 나가서 숲길을 걷다보면 그 연초록이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색조의 변화가 서서히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워싱턴에서 듀잉을 발견하고, 그 이듬해 봄 내내 숲길을 산책하면서 제가 깨달았던것 - "아하, 듀잉의 그림은 근원지가 미국이었구나. 그는 환상의 세계가 아닌, 그가 눈으로 본 아름다운 세상을 화폭에 옮긴것이구나."  물론,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주인공 여성들은 모두 환상의 세계에 살법한 뮤즈들처럼 보이지만, 그의 작품들의 배경은 뉴잉글랜드 지방의 초록색 풍경이었던 것이지요.

 

 

이 네폭 병풍은 듀잉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1895년 듀잉은 파리에서 작업하고 있던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화실에서 일본화와, 휘슬러가 작업하던 일본풍 작품들을 발견하고 일본화 기법에 감탄을 하게 되지요. 듀잉이 이 네폭 작품 작업을 하던 당시에 프리어 역시 여러점의 일본 병풍작품들을 사들이고, '일본화'의 영향이 듀잉의 그림세계에도 스며들었다 할만하지요.

 

 

 

The Four Sylvan Sounds (네가지 숲의 소리) 1896-97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Before Sunrise 작품 작업을 하고 있을때 듀잉은 일본을 방문중이던 프리어로부터 일본화를 한묶음 전달 받습니다. 그리고 일본화의 매력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Kitakawa Utamaro 의 작품들에 열광하였고, 그의 작품에도 일본식 등불이 등장하게 됩니다. Before Sunrise 화면 뒷쪽의 작은 여자가 들고 있는 것이 일본식 랜턴입니다. 심지어 그는 이 작품을 Dedicated to Utamaro (우타마로에 헌정함)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군요.  그리고 그의 작품을 거는 방에 우타마로의 작품도 함께 전시를 하여 두 작품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타마로의 작품을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 (이제부터 18금) 흠...켁...춘화 작품도 엄청시리 많십니다...ㅋㅋ.  아무튼, 앞으로도 여러차례 논의가 되겠으나 근대에 일본화가 서양미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을 '막대'합니다. (orz)  입맛이 씁쓸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죠 뭐...

 

 

 

 

 

Before Sunrise (해뜨기 전) 1894-9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After Sunset 은 Before Sunrise 와 같은 크기의 그림입니다. 해뜨기전에 붉게 물든 하늘이 보였는데, 해가 지고 난 후에는 저 숲 가장자리에 기웃이 보이는 것은 저녁달 일까요?  이 작품은 듀잉이 'The Pink Dress'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다음에 보이는 그의 The Blue Dress'와 짝을 이루고 있지요. 분홍 드레스의 아가씨와 푸른 드레스의 아가씨의 포즈가 일치합니다.

 

 

 

After Sunset (해가 진 후) 1892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듀잉은 프리어 저택의 방에 전시된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이 작품을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The Blue Dress (푸른 드레스) 1892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다음에 소개되는 작품들 역시 프리어의 소장품들입니다.  악기를 들고 있거나 연주하는 세명의 아가씨들이 각각 그림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림 속의 악기, 연주는 시각적인 예술과 청각적 예술의 조화를 가능케하지요.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상상속에서 악기의 소리, 울림, 곡조를 듣고 흥얼거리게 됩니다.  참, 예술지상주의적인 작품들이지요.  듀잉의 작품들속에는 인간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것 같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다운 여인들과, 아름다운 악기.

 

이것이 듀잉의 세계입니다.  아마도...듀잉이 미술사가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사람들의 삶의 양태로부터 동떨어진 너무나 예술지상주의적인 듀잉의 미술에 대한 태도가 아마도 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슈'가 없쟎아요.  부자들의 눈을 기쁘게 하는 장식물로 적당했을뿐...  한마디로, 그에게는 페이소스 (pathos)가 없었다는거죠.

 

(계속...)

 

 

 

Girl with Lute (류트와 소녀) 1904-1905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Lady Playing the Violincello (바이올린 첼로를 연주하는 숙녀) ca. 1908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An Artist (예술가) ca. 190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8:19

 

 

Lady in Black and Rose (검정색과 장미색 드레스를 입은 숙녀) c. 1905-1909

Oil on Panel

44 x 55 cm (가로 세로)

2009년 11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Morning Glories (나팔꽃) c. 1900

Oil and Canvas on Three Panel Boards

183 x 164 cm (세폭 전체 크기)

2009년 11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이전 페이지, 디트로이트 미술관 ( http://americanart.textcube.com/234 )소장 듀잉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논의했던 듀잉 작품의 특징들이 이곳에서도 여전히 발견됩니다.

 

그런데, 이전 페이지에 이어서 뭔가 새로운것을 발견 하셨는지요?

 

음...'액자' 디자인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지요? 일단 금박이고, 액자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액자에 새겨진 무늬들이 일정합니다. 한 사람의 작품처럼 보이지요? 어쩐 일인지 알 수 없으나 듀잉의 작품들을 감싸고 있는 액자들은 모두 '동일범'(?)의 소행처럼 보입니다.

 

이 액자들을 디자인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퀴즈로 남겨 둬 볼까요?)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7:58

 

음, 제가 갖고 있는 토마스 윌머 듀잉의 작품 사진 파일이 많은 편입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다가,  미술관별로 그림 소개를 하고 그리고 전체적인 정리를 하는 것이 이 아름다운 그림들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듀잉의 그림은,  설명보다는, 그냥 그림이 전해주는 '느낌'을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듀잉의 그림속에 어떤 사회, 문화, 정치, 역사적인 '메시지'가 있는것도 아니고  화면가득한 '색채'와 색깔의 각기 다른 깊이 (tone)이 주는 것을 관조하는 것이 그림 감상의 포인트라고 봅니다.

 

습자지에 먹물이 번져가는 것을 지켜보듯, 그냥 편안하게요...  듀잉의 그림중에는 '악기'를 들고 있는 여인들, 혹은 악기 제목의 작품들도 많이 보이는데, 같은 맥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타줄이 퉁 하고 울릴때, 잔잔하고 길게 퍼지는 소리... 딩.....이런 소리는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소리가 스며들죠. 

 

 

Summer (여름) 1893

Oil on Canvas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1일 사진촬영

 

 

 

Classical Figures (고전적 형상) 1898

Oil on Panel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0일 촬영

 

 

 

 

The Recitation (낭송) 1891

Oil on Canvas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2009년 10월 31일 촬영

 

 

 

 

자, 위의 세작품에 보이는 듀잉화의 공통점들을 찾아볼까요?  제가 미술 전문가가 아니고 그저 '교양인' 수준으로 미술품을 '구경'하는 차원이라서, 뭐랄까, 미학적 분석보다는...음...텍스트 분석하듯 하는 점이 있는데, 그냥 미술을 '읽는' 저의 개성이라고 해두지요. 네, 인정합니다. 저 미술가 아닙니다. 미술 비평가도 아닙니다. 저는 텍스트(언어)를 주로 분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텍스트 읽듯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이제 그림을 있는 그대로 그냥 들여다보는겁니다.

 

세 작품의 공통점으로 어떤것이 있을까요?

 

(1) 그림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들입니다.  남자 안보이지요?  :)  '여름'과 '낭송'에서는 각각의 화면에 두명의 주인공들이 들어있습니다.  세폭 병풍같이 생긴 작품 속에는 한폭마다 한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지요.

 

(2) 모두 유화이군요.

 

(3) 배경이 모두 초록색 계열이지요.

 

(4) 그리고 배경이 모두 '자연'입니다.  인공적인 '건물' 같은것은 안보이지요?

 

(5) 안개가 낀듯 화면들이 대개 '아슴프레'하지요?  사진사가 사진 실력이 없긴 하지만, 원래 작품이 이래요. 촛점이 어긋난것처럼 아슴푸레한 것이 이 세작품의 공통점입니다.

 

(6)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팔은 가늘고 하체는 무척 길죠.  '이상화'된 여성의 체형인것처럼 보입니다.

 

 

자 이런 공통점 외에 다른 특징을 혹시 찾아내셨는지요?  찾아내셨으면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

 

이 그림들을 보면 어떤 음악이 떠오르시나요? Secret Garden 의 몽환적인 음악이 잘 어울릴것 같지 않은가요?  (예...제가 꽤 촌스러운 사람이라서...헤헤.)

 

 

 

 

 

다음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2009년 12월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06:32

 

 

 

 

2007년 워싱턴 지역으로 이사온 후에 워싱턴의 각종 국립 미술관들을 들락거리는 동안, 제 눈에 띄면서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화가가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일것입니다.  듀잉의 작품을 자주 대하면서도 제가 관심있게 들여다보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제가 과문한 탓으로 이 작가의 이름이 낯설었고, 따라서 미술사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이름을 알고 있는 미국미술가가 별로 많지도 않았지요)

 

그리고, 제가 듀잉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제끼고' 지나치곤 했던 이유는, 이 작품들이 한편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너무나 '동화적'으로 아름답고, 풍경역시 동화책속의 풍경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져서, 어쩐지 '심각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듀잉의 초록색이 스며든 환상적인 작품들이 전시된 곳을 지나칠때면 저는 혼자서 '푸른 옷소매'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요.  푸른 옷소매 (Green Sleeves)라는 영국의 민요곡은 우리에게도 꽤나 친숙합니다.  많은 음악가들이 이 곡을 연주했고, 노래를 했지요. 유튜브를 검색해봐도 다양한 연주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신비한 민요의 '가사'를 정확히 알고, 노래부를수 있게 된것은 대략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에 클래식 기타를 처음으로 가슴에 안고, 대학에서 클래식기타를 가르치는 음악교수로부터 개인지도를 받기 시작했지요.  그해에, 그러니까, 제가 온갖 경제적 빈곤함을 벗어나 슬슬 용돈벌이를 시작했는데, 그렇게 용돈벌이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첫 월급으로는 뭐 싸구려 동남아산 독일제 오디오세트를 들여놨고, 그 다음으로 클래식 기타를 산 후에 한동네에 살고 있는 선생님을 만나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지요. 카르카시 기타곡집을 연습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부교재로 영화음악곡을..."하고 우물우물 제안을 하니까,  스승께서는, 아무거나 영화음악곡집을 가져 오라고 했지요. 서점에서 영화음악 기타곡집을 하나 샀는데, 그 책에 Green Sleeves 곡과 가사가 들어있었던 겁니다.  (무슨 영화에 나왔던 곡이었을까?)

 

물론 초보자용으로 편곡된 아주 간단한 곡이었기때문에 혼자서 독학으로 그 곡을 마스터했지요. 가사도 함께.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푸른 옷소매는...어떤 이름모를 아가씨가 입고 있었던 드레스의 옷소매가 아마도 초록색이었겠지.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그 아가씨를 '초록색 옷소매'라 부르는것이겠지.  혼자 상상하다보면 생전 가본적도 없는 영국의 초록색 초원과, 안개와, 신비한 물방울과, 뭐 그런 것들이 연상이 되곤 했지요.

 

10년도 전에 익힌 그 기타곡은 지금 손가락이 굳어 기억이 안나는데... (하지만 책을 꺼내서 악보를 보면 다시 칠수 있어요...)  노래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부를수가 있습니다.  정작 Dewing 의 그림속의 여인들은 대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초록색 옷소매는 보이지 않는데, 여인들이 담겨있는 풍경이 온통 초록색이라 이 여인들이 모두 초록 옷소매의 아가씨들처러 보이는데요. 미국미술사에서 토마스 윌머 듀잉의 존재는 '미미'합니다. 미국 미술사책을 여러권 갖고 있는데, 그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책도 있고요, 그의 이름이 등장한대도 수백페이지짜리 책에서 그저 한두줄 정도 입니다.  그렇지만, 워싱턴 디씨나 인근 대도시의 미술관에 가면 듀잉의 작품이 많이 걸려있지요.  아마도 그는 미술품 수집가들이나 대중들에게는 사랑을 받았지만, 미술 비평가들에게는 그리 인정을 못받은 그런 화가였던것 같습니다.

 

노래 '초록 옷소매' (우리나라에서는 푸른 옷소매로 널리 알려진 곳)의 가사는 헨리 8세가 앤 볼린을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화 '천일의앤'으로도 알려져 있는 앤 볼린. 헨리 8세는 앤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교회'를 선포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변덕이 많았던 헨리 8세는 앤 볼린 역시 사형장으로 보내버립니다. 그 앤볼린이 낳은 딸 하나가 살아남아서 엘리자베쓰 1세로 등극하지요.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 미국의 버지니아주는 그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된 이름입니다.

 

 

어쨌거나, 미국의 미술관을 헤메이다가 신비로운 초록색의 풍경속에 선녀같은, 혹은 요정같은 여인들이 긴 드레스 자락을 끌고 날아다니듯, 떠다니듯 서 있는 그림을 발견하신다면,  함께 간 친구에게 자신있게 말해줘도 됩니다. "음...듀잉의 그림이군..."  백발백중이죠. 잘난척 하셔도 됩니다.   :)

 

듀잉 페이지 이어지겠습니다.  december 2009 redfox.

 

 

 

 

 

 

 

 

 

(poss. Henry VIII of England, 1500's.)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For I have loved you well and long,
Delighting in your company.

아아, 내 사랑이여 나를 이렇게도 무참하게 버리다니

그대를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하였건만, 그대와 함께 있는것이 그토록이나 기뻤건만.


Chorus: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

초록색 옷소매는 나의 기쁨, 즐거움이었거늘.  초록색 옷소매는 내 순정, 오직 나만의 연인이었거늘.


Your vows you've broken, like my heart,
Oh, why did you so enrapture me?
Now I remain in a world apart
But my heart remains in captivity.

당신은 약속을 깨뜨려, 내 가슴도 무너졌다네. 오,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사로잡았는가?

나는 무너진 세상에 남겨졌지만 내 심장은 아직도 포로로 잡혀있다네


chorus

I have been ready at your hand,
To grant whatever you would crave,
I have both wagered life and land,
Your love and good-will for to have.

늘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기 위해 당신의 곁을 지켰거늘

당신의 사랑과 호의를 갖기 위해 내 목숨과 영토를 모두 걸었거늘


chorus

If you intend thus to disdain,
It does the more enrapture me,
And even so, I still remain
A lover in captivity.

당신이 나를 물리칠수록 나는 더욱이나 당신에게 빠져드네, 나는 여전히 당신의 포로라네


chorus

My men were clothed all in green,
And they did ever wait on thee;
All this was gallant to be seen,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나의 기사들도 당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 모두 초록색 옷을 입었는데 이토록이나 늠름하여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Thou couldst desire no earthly thing,
but still thou hadst it readily.
Thy music still to play and sing;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그대는 속세의 재물에 관심이 없으나 당신이 원한다면 모두 당신것

당신은 여전히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지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Well, I will pray to God on high,
that thou my constancy mayst see,
And that yet once before I die,
Thou wilt vouchsafe to love me.

신께 기도드리오니 내가 눈을 감기전에 그대가 나를 사랑하게 되기를

 


chorus

Ah, Greensleeves, now farewell, adieu,
To God I pray to prosper thee,
For I am still thy lover true,
Come once again and love me.

 

아, 초록 옷소매의 그대여 지금은 안녕, 안녕.

신께 기도드리오니 당신이 안녕하시길

나는 아직도 당신의 순정한 사랑이오니

내게 다시와 나를 사랑해주시길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2. 27. 04:43

공식 홈페이지: http://www.asia.si.edu/

워싱턴 디씨의 모든 스미소니안계 박물관은 무료 입장입니다.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도 자유롭습니다.

 

 

 

 

프리어 미술관 (Freer Gallery of Art)는 연결되어 있는 쌔클러 미술관 (Sackler Gallery of Art)와 더불어 스미소니안 계열의 국립 박물관들 중에서 '아시아 미술' 전문 전시장입니다.  아래의 지도에서 보면,  붉은색 건물들이 스미소니안 국립 박물관들인데, 맨 아랫쪽 가장 외편의 네모난 건물이 프리어 미술관이고, 그 오른쪽에 직사각형 모양의 쌔클러 미술관 건물이 보입니다.  메트로 스미소니언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워싱턴 디씨의 스미소니안 박물관들중에서 최초로 '기증된' 건물이기도 합니다. 이 박물관 건물과 소장품들을 기증한 사람이 Charles Lang Freer (1854-1919) 라는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소재의 철도차량 사업가 입니다. 이 박물관 건물의 건축비만 당시에 1백만 달러가 들었다고 하는데, 전 경비를 프리어씨가 지불했고, 그가 평생 모은 미국, 아시아의 예술품들도 역시 기증했습니다.

 

 

 

프리어씨에게는 아내나 자식이 없었고, 취미삼아 예술품을 수집하게 되었는데, 후기에 그와 절친했던 미국출신 영국 미술가 James Aboot McNeill Whistler (휘슬러)의 조언에 따라서 아시아권 미술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했습니다. 그는 아시아권 미술품 수집을 위해 중국, 일본, 한국 (당시 조선)도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프리어 미술관에 소장된 아시아권 작품들을 보면, 그 속에 있는 한국의 예술품들은 일단 숫자도 많지 않고, 열세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리 우리나라 미술품이 대단하다고 해도, 몇작품 되지도 않는 청자나 백자가 어느 구석에 전시되어 있는 형편이라,  오히려 이런곳의 한국 전시물을 보고 나면 기분이 저조해지는 편입니다.  

 

 

 

 

 

 

특히나 프리어 미술관을 '미국미술과 아시아 미술 전시장'으로 소개하기도 하는데,  프리어가 '아시아 미술' 전시장임을 표방하면서도 미국미술 전시장이 여러군데에 있고, 이곳을 찾는 관객들이 많은 이유는, 이곳에 19세기말에 활약했던 미국 미술가들 Dewing, Whister, Sargent 등 당대의 걸출했던 작가들의 일련의 작품들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보이는 전시장에는 Dewing (왼편벽) 과 Tyler (오른쪽 벽)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사실 이곳에 걸린 작품들은 프리어씨가 디트로이트 외곽에 지은 저택의 내부를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집을 지으면서 그 집을 장식할 작품들까지 주문제작을 한 듯 합니다.

 

 

 

 

아래는 '공작의 방 Peacock Room'으로 알려진 '방'입니다. 휘슬러가 영국의 어느 돈많은 사람의 주문으로 그 집 식당을 이런 식으로 꾸며 줬다고 하는데요, 뭐 휘슬러가 의뢰인의 부탁을 무시하고 멋대로 꾸몄다가 서로 옥신각신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후에 이 '식당' 내부 전체를 프리어씨가 사들여서 이 식당을 '뜯어'왔다고 하는데요, 최종적으로 프리어 미술관에 안착을 하게 됩니다.

 

 

 

 

이 방이 대단하다고 관객들이 많이들 찾아 오는데요. 제가 보기엔

(1) 우리나라 절집/혹은 무당집에 들어간듯한 느낌이 드는 금박무늬

(2) Princess from the land of porcelain 도자기나라에서 온 공주 그림은 딱 신전의 여신입니다. (이 의상, 일본 의상인가요?) 의상은 일본, 이목구비는 서양 여성입니다. 뭔가 '잡종적'이죠.

(3) 중국식당에 온 기분도 들고요

 

이래저래 '아시아'권의 관객인 제 눈에는 뭐랄까,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인테리어 장식 같구만, 이거 만드느라고 돈 쳐들였을것이고, 이거 사온다고 또 돈 억수 들었을걸요. 아마.

 

(정작 주인공인 아시아 예술품에 대해서는 저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냥 미국미술에만 집중하려고요.)

 

프리어 미술관에 대한 소개는 이쯤으로 맺음하고, Dewing, Whistler, Sargeant 에 대해서는 따로 페이지를 만들어서 소개하겠습니다.

 

 

december 26, 2009.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7. 23:22

소년가장 슬로언

 

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Henri 를 중심으로 모인 Ashcan (애시캔) 그룹과 The Eight (8인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존 슬로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고등학교 동창중에 후에 The Eight 의 멤버가 되는 William Glackens를 만나게 됩니다.

 

1888년 그가 16세 되던해에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슬로언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화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그림을 그리던중 정식으로 야간 미술 과정에 입문하게 되고 후에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Thomas Pollock Anschutz 의 지도를 받게되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Willaim Glackens 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1892년 Robert Henri 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슬로언는 The Philadelphia Press 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며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슬로언의 아내

 

슬로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설'적인데,  그의 아내 Anna Maria 를 술집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01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안나 마리아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만 매춘 경력이 있으며 음주벽이 있고, 아마도 이러한 전력을 거친 여성들이 보일법한 히스테리컬한 우울증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슬로언의 아내에 사랑은 지극정성이었고 한 의사의 제안으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매일 매일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일기를 쓰게 됩니다.  (이런 남자 또 한명 있죠, 삐에르 보나르... 삐에르 보나르는 수십년간 목욕탕에서만 지내는 특수한 병을 가진 여인을 돌보며 한세상을 보냈지요. 삐에르 보나르의 그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목욕하는 여자, 삐에르의 평생의 연인.)  그의 부인은 1943년에 죽고, 슬로언은 이듬해에 새장가를 갔으며 슬로언 자신은 1951년에 운명합니다.

 

슬로언의 사회주의 운동

 

 

1912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잡지 The Masses 에 미술 편집인으로 참가하며 다른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매체인 Call, Coming Nation 지를 위해서도 삽화를 그려줍니다.  특히나 그가 그린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가 지금도 자주 인용되거나 소개되곤 하는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페이지에 Ludlow 학살사건의 이야기가 잠깐 소개된바 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민중의 생존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 슬로언은 '선전 (propaganda)'의 '도구'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긍정하면서도 예술이 '극단적인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만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수 있을텐데...제가 추측하기에, 슬로언은 아마도 그 주위의 '사회주의자'들의 어떤 행동들에 거부감을 가졌을법 합니다.  그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만들기 싫었겠지요.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와 그가 속한 사회주의자의 무리들의 행동 양식이 일치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겁니다.  

 

서민속에 서있던 남자

 

존 프렌치 슬로언의 작품세계는 크게

 

(1) 뉴욕의 풍경

(2) 대중의 삶의 풍경

(3) 잡지,책의 삽화가로서 작업한 세밀한 판화 작품들

 

으로 정리 될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삽화가로 일했으므로 대중 생활 관련 묘사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성향은 이미 십대에서부터 생계형 청년 가장으로 세상에 나아갔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가 즐겨그린 도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가령 도심의 창가에서 빨래를 너는 여인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술집 풍경 역시 그의 삶과 밀착된 풍경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20세기초의 뉴욕의 전철과 천철 주변 풍경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요.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권투선수 그림을 즐겨그린 미국 화가가 누군가? 이런 퀴즈가 나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를 외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술관에서 '뉴욕 고가 기차' 풍경화가 멀리서 보일경우,  당신이 애인과 함께 미술관 구경중이라면 "저기 저 뉴욕 풍경속에 고가 기차 그림이 있는 저 그림 말야...저거 아마 존 슬로언이라는 화가의 그림일거야..." 하고 '아는체'를 해도 크게 실례가 안 될 것입니다.

 

 

 

뉴욕 고가 기차 (Elevated Train: EL)

 

The City from Greenwich Village (1922)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바라본 뉴욕
oil on canvas
overall: 66 x 85.7 cm (26 x 33 3/4 in.)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2009년 9월 촬영

이 그림은 비가 그친 겨울 저녁, 맨하탄 남단에서 바라본 맨하탄의 거리 풍경입니다. 고가기찻길 위로 기차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고 비에젖은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됩니다. 비가 갠것을 눈치채는 이유는 하늘이 부염하게 밝아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는 촉촉히 비에 젖어 있고 골목의 불빛은, 그것이 골목이라서 더욱 밝아 보입니다. 건물 옥상의 물탱크도 보이고, 다리미의 모서리같이 각진 고층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건물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옵니다. 일층의 모든 창문은 손님들을 기다리는듯 환하게 불이 켜져있습니다.  옹기종기 걸어가는 행인도 몇명 보이지요.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은 우리가 마치 몇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 합니다. 액자를 창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창밖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 그림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Six O'clock, Winter (1912) 라는 또다른 고가 기차 (EL) 풍경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사진 파일이 상태가 안좋아서 웹에서 얻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속의 여섯시의 풍경은 오전일까요 오후 일까요? (제가 볼때는 오후 여섯이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  이 작품이 1912년작이고, '그리니치 빌지지에서 바라본 뉴욕'이 1922년 작품이므로, 두 그림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면, 1912년 작품은 고가기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고, 1922년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이지요.

 

 

 

 

http://www.phillipscollection.org/research/american_art/learning/sloan-learning.htm

 

 

 

무료 커피

 

The Coffee Line (1905)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뉴욕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을 발견한 슬로언이 그려낸 겨울 저녁의 풍경입니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있지요. 슬로언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어둡고 긴 행렬을 묘사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The Masses 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비가 들이치는 페리선

 

Wake of the Ferry, No. 1 (1907)

페리선의 물길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지금도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중에 배(Water Taxi)로 강을 건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100여년전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페리선을  그린것은 당시로서는 '엉뚱한' 시선이었을겁니다.  비가 들이키고 물결이 거칠게 일고, 전체적으로 '내가 그 페리선을 탄듯' 심란한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여인도 그래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이 그림은 그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슬로언은 190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는데, 그의 알콜중독자 부인은 이후로도 걸핏하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기위해 이 페리호를 종종 이용했지요. 결국 이 그림속의 여인은 슬로언의 알콜중독자 아내의 뒷모습이었던 것인데요.  1907년에 슬로언이 그의 작업실에서 The Eight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을때 부인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남자 작업장에 여자가 허락도 안받고 나타난거죠, 아마 그렇겠죠.) 술도 몇잔 마셨겠다, 화딱지가 난 슬로언이 그 자리에서 의자를 집어던져가지고 이 그림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그림을 또다시 그리게 되는데 그 (2)번 그림은 필립스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이 (1)번 그림은 슬로언이 (2)번 그림 그린후에 손을 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Beal 2002).  아무래도 이런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페리선의 풍경이 슬로언과 그의 아내의 풍경이었다 싶기도 하지요.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대도시의 뒷골목의 삶의 풍경, 이런 풍경은 Henri 가 주도했던 Ashcan 일당들의 주요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한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1922년 미국 화단의 상황속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미술의 역사는 유럽에 비해서 '일천'할수밖에 없지요. 제가 에드워드 힉스나 조쥬아 존슨과 같은 초기의 '포크 아트' 작가들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소개를 한 이유가 있는데요, 미국은 초기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였고 유럽 문화권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자생의 문화가 없었다고 봐야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제외하면).  그래서...Henri 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탄생 이전의 미국 회화사는 '유럽 베끼기'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차는 미국의 인상주의나 그 이전의 풍광, 초상와 위주의 미술과 미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제가 왜 이들부터 시작을 안하고 풍속화가 잠깐 건드리다가 '사실주의'로 점프를 해버렸는가하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뭐 대략 사이비 유럽미술 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제가 감지하기에 미국의 사실주의 화파들부터, 미국의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슬슬 세워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부터 미국의 풍경이, 미국의 서민이 화면의 중심에 슬슬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로언의 전철 그림과 도심 그림이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어느 외국인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미국 미술을 보는 관점이긴 합니다.)

 

 

 

Yeats at Petitpas'

 

이 그림은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어느 하숙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입니다.  Petitpas 는 프랑스 출신의 두 자매가 경영한 하숙집 이었습니다. 

 

이곳에 영국의 철학자이며 예술가였던 John Butler Yeats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가 머물렀는데, 그는 영문학도들에게 (그리고 교양 차원에서 영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인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의 아버지입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는 69세 되던 해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애시캔'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결국 뉴욕에서 사망하여 뉴욕에 뼈를 묻었지요. 그러고보면, 그의 아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유럽'문화를 이상화 했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말년에 문화 불모지와 같은 뉴욕에 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갔군요.

 

흰 턱수염의 노인이 존 버틀러 예이츠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가 존 슬로언이군요. 음식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하숙집 주인이고요, 그이의 왼쪽에 모자를 쓴 여인이 슬로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이 하숙집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당시 미술,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Yeats at Petitpas' (1910)

Oil on Canvas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2009년 10월 3일 촬영

 

 

 

해부학교실

 

존 슬로언은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Anschutz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하는 안슈츠 선생을 에칭 판화로 묘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Anshutz on Anatomy (1912)

해부학 교실의 안슈츠 선생

Etching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19일 촬영

 

 

 

 

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웹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강단아래에 안슈츠 선생이 서서 강의를 하고 있고,  강단위에 인간 골격이 서있고, 그 옆에 성기만 가린 남자 누드 모델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둘러 앉거나 서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학생들중에 여학생도 보입니다.  아마도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남자 누드 모델이 성기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미국 미술 학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는 누드 모델이 성기를 드러내면 안되었다고 하지요.

 

 

슬로언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보긴 했는데, 막상 제가 가진 작품 사진 파일이 미미하여 그의 미술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소개할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화집이 아닌 '내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라도 슬로언 작품들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잘 갈무리하여 좀더 그에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화집에서 본,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로는 그의 '빨래'관련 그림들인데요. 슬로언이 도심에서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하는 여인들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래서 '빨래' 주제의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것 역시 훗날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52079

 2. Sherry Babbit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Philadelphia, PA.

 3. Graham W. J. Beal (2002) American Beauty: Paintings from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1770-1920. Scala Publishers Ltd. London, UK.

 

 

 

 

2009년 12월 6일 red 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09. 12. 6. 02:41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5. 09:45

http://www.claremontmckenna.edu/hist/jpetropoulos/arrow/holocaust/Franklin_Roosevelt.jpg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1882-1945)은 193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로, 죽을때까지 (1932-1945) 미국대통령직을 유지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일무이하게 4선 까지 이른 사람이며, 미국 대통령들중에서 3선 이상을 한 유일한 사람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로 대통령을 2선까지만 가능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국이 어떤 지도자의 '독재'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2년도 넘는 기간동안 미국을 통치하였는데, 경제 대공황때 그가 취한 경제정책 (소위 뉴 딜 정책으로 알려져 있음)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여러가지 국책사업을 펼치가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정책을 펼쳐서 경제난을 이겨내려 했다는 것은 중고등 학교 사회책이나 세계사책에도 소개되는 내용이다 (나는 중학교때 이런 내용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서는 Social Security (사회복지) 제도가 있는데 이 사회복지법 (social security act)을 최종 승인하고 시행한 대통령이 바로 이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기초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복지'의 초석이 마련되었다고 한다면,  '의료복지'의 초석을 만들고자 하는 이가 현재의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가 미국 역사상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인지...) 

 

 

 

바로 이러한 '국책사업,'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  사회복지 정책등을 이유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사회주의자'라 평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군에 속하는 '최장기 대통령직'을 수행한 대통령이 '사회주의자'라고?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수도 있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대략 간단하게는 사회 통치 시스템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사회주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수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동등하게 통치하는 시스템이 '민주주의'라면,  소수의 '통치집단'이 사회 운영을 관장하고 계획을 세우고 시민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분담시키는것이 '사회주의'적 통치체제라 할수 있다.  경제 구조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굴러가는데, 대개 민주주의적 방식과 자본주의 체제가 서로 궁합이 맞아보이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상통해보이므로 우리가 흔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뒤섞어서 인지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우는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 자유 경제와 자본주의의 꽃으로 알려진 미국땅에서 미국을 부흥시킨 존재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론되고, 하필 그의 정책과 관련하여 그를 '사회주의자라 부른다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는 이것이고 민주주의는 저것이다 라던가, 자본주의는 이것이고 공산주의는 저것이다라는 양분법식 생각에서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루즈벨트는 국가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노력했고,  사회주의적 방식이라  일컬어진 뉴딜정책은 소기의 효과를 발휘했으며, 뉴딜정책의 발판 위에서 미국은 다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 '자본주의'의 꽃을 활짝 피울수 있었던 것이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65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에 걸린 벤샨의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

 

 

 

(미국미술 공부하다 잠시 생각) 2009년 12월 4일 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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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4. 09:58

 

Mrs. Abraham White, Jr. and Daughter Rose c. 1808-1809

Oil on Canvas

64.8 x 76.2 cm

2009년 11월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페이지에서 소개해드린대로 Joshua Johnson (조슈아 존슨 1763-1824) 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태생의 흑백 혼혈 초상화가 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조슈아 존슨은 당대의 미술가였던  Charles Wilson Peale 과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속의 주인공은 이 초상화를 그린 직후에 30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을 했다고 합니다.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반쯤 열려있는 책, 그리고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들딸기는 조쥬아 존슨이 즐겨 그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그림들보다 나중에 그려진 그림이라서 그런지 그림도 좀더 세련되어 보입니다.

 

크라이슬러 미술관 소장품입니다.

 

 

2009년 12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4. 08:43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에드워드 힉스가 꿈꾼 평화의 나라 페이지에서 퀘이커 교도였던 힉스가 즐겨 그린 소재 두가지를 소개한바 있습니다. 한가지는 미국 정착사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왕국' 주제이고, 또 한가지는 성서를 바탕으로 한 '노아의 방주' 주제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인 Norfolk 에 위치한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는 에드워드 힉스의 또다른 역사화를 두 점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Washington at the Delaware  c. 1849

델라웨어의 워싱턴

Oil on Canvas

90.2cmx71.1cm (가로 세로)

 

 

이 그림은 훗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역사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힉스가 독창적으로 창작했다기 보다는 현재 보스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Thomas Sully 의 Passage of the Delaware (1819)  525.8cm x 372.2cm 를 본떠서 그린 것입니다.

 

Thomas Sully 의 그림

 

 

남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린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박물관에 모셔 놓는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힉스가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바 없고, 그자신이 순수 예술가라기보다는 마차를 장식하거나 표지판을 잘 만들어내는 '기술자'였고,  혼자서 익힌 그림 재주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의 그림이 맘에 들때 이를 베껴그리거나 이런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거나 팔면서 살았다는 측면을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풍속화가'로 분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퀘이커 교도들이 '평화주의자'들이므로 전쟁을 거부하고, 그래서 병역도 거부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열렬한 퀘이커 교도였던 에드워드 힉스가 워싱턴의 역사적인 '전쟁'을 즐겨 그렸다고 하는 것이지요.  에드워드 힉스는 워싱턴과 독립군을 '신의 대리인'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의 애국심이 그의 종교관에도 영향을 끼친 것인데,  '호국불교' 정신하고도 비슷하군요 =) .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c.1840-1845

1776년 독립선언

Oil on Canvas

74.3cm x 65.4 cm (가로세로)

 

 

1776년 독립선언을 묘사한 이 그림의 이마에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이라고 새겨진 것이 보입니다.  힉스가 '표시판' 만드는 기술자였다는 대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에드워드 힉스를 '순수 미술'의 차원에서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생활속의 장인'의 측면에서 해석할때 그의 정체성에 생생하게 다가갈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때로 저는 이렇게 서툰 환쟁이들을 좋아합니다. 우리 엄마의 그림과 많이 닮았거든요.)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23. 07:35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미국 사실주의 계보정리 페이지에서 대략  미국 회화에서의 사실주의를  (1) '사회적 사실주의'와 (2) '지역주의적 사실주의'의 두가지 부류로 나눠서 도표를 그려본 바 있습니다.  미국 회화에서 사회적사실주의 (social realism)를 논할때, 반드시 거론되는 사람이나 단체들로는 Henri (헨라이)를 중심으로 한 "Ash Can (쓰레기통)" 화가들, "The Eight (8인회)"등이 반드시 떠오르게 되는데,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Ash Can 이나 The Eight 멤버들이 조금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미국 사실주의 화풍을 논할때 이 두 그룹은 하나의 동일한 그룹으로 간단히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동일한 그룹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구성원들이 비슷한 사회적 안목을 가지고 사회성 있는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Ash Can 학파와 The Eight 구성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Ashcan 혹은 Ash Can 이라고 알려진 이 미술그룹을 우리는 Ashcan School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Robert Henri (로버트 헨라이)를 중심으로 그와 함께 그림 작업을 하거나, 혹은 그에게서 미술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이 헨라이의 영향으로 '사회성'있는 그림을 그리면서 정체성을 만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Henri 의 동료나 제자중에서 애시캔 학파로 알려진 인물들로는 Henri, Glackens, Hopper, Shinn, Sloan, Luks, Bellows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럽 인상파화법의 영향을 받은 미국인상파 그림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뉴욕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의 풍경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니까 ash can - 쓰레기통 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겠지요).

 

The Eight (8인회)는 사실 딱 한번, 1908년 뉴욕의 맥베쓰 갤러리 (Macbeth Gallery)에서 여덟명이 합동 전시회를 한것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이 8인회 전시회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2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http://americanart.textcube.com/281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The Eight Member가 아닌 Ahscan School 멤버였던

  *. George Bellows (1882-1925) 조지 벨로우즈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이상입니다. 이들중 다수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삽화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특히 The Masses 라는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잡지의 편집이나 삽화에 관여한 화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위에 올린 이미지는 John French Sloan 이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로 그린 작품입니다.  1914년 4월 20일에 미국 콜로라도주의 광산에서 광부들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자선가'로 널리 알려진 록펠러 (Rockefeller) 집안이 운영하던 광산이었습니다. 콜로라도 국방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하여 어린이 11명이 포함된 20여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잡지는 이 사건을 표지로 실은 것입니다.  표지 그림이 생경하고 과격해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처참하고 과격했겠지요.  (미국 구경을 하고 돌아간 내 조카아이들의 상상속의 미국사 속에  이런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록펠러는 하늘이 보낸 천사는 아니었겠지요).

 

물론 미국의 사회-사실주의 작가들이 모두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상상하시면 안됩니다.  이 표지화 작업을 한 존 슬로언 역시 '예술지상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성이 담긴 그림을 그리되, 사회적인 이념이 '예술'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지요. 그래서 과격한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부터는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한 편입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이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가운데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 여덟명의 미술가들중에서 슬로언에 관심이 많지만, 일단 이들의 '대장'격인 Robert Henri 부터 간단히 소개하고 그 뒤를 이을 생각입니다.  헨라이는 작품보다는 그가 이끌었던 애시캔, 8인회 때문에 미국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 '석자 (?)'를 박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Henri 는 '헨라이'라고 발음합니다.  Hopper 관련 책에서 읽었는데 그가 자기의 이름을 반드시 '헨라이'로 발음해줄것을 극구 강조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그러니 그의 희망에 따라서 '헨라이'로 소개합니다.  (제 글의 독자들이 막 - 무척 똑똑해지고 교양이 업그레이드 되는 소리가 들립니다 헤헤헤.  미술 관련 글중에 헨라이 이름을 제대로 표기한 한글 페이지 찾아보기가 힘드실걸요. 헤헤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걸어놓은 곳이다.

왼쪽 가까이에서부터: Henri, Kent, Luks 의 그림들이 차례대로 보이고

오른쪽 가까이에서부터: Everett Shinn, William Glackens 가 보인다

저 너머에 Benton 의 그림이 있다...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0. 14. 02:53

 

 

Andrew Wyeth와 Edward Hopper 페이지들을 대략 마무리 짓고 나니,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의 계보가 대략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신생국가 미국의 미술은 유럽의 미술사와는 약간 시기적으로, 성격적으로 차이가 나게 진행되었다.  예컨대 유럽에서 19세기 중반, 후반에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적 색체가 강한, 혹은 사회 비판적인 사실주의 화풍이 휩쓸고나서 '인상파' 화가들이 새로운 작법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오히려 인상파 작법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속에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실주의적 작법이 공존하게 된다.  사회비판적인 사회 사실주의적 화풍은 오히려 미국의 인상파 화풍이 물러나면서 1930년대에 꽃피게 된다.

 

19세기말, 20세기초부터 진행되던 미국의 사실주의는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경제대공황으로 인한 빈민층 증가와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공공미술 프로젝트 등으로 사회성 메시지가 강한 미술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 사회성이 강한 미술의 일부는 '사회주의 사상'과 무관하다고 할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련의 공산주의를 지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미국적 토양위에서 자생한 미술사조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도시빈민의 문제, 혹은 노동의 문제등 사회 문제를 그림으로 옮긴 화가들의 모임중 '애시캔 (Ashcan)' 학파, 이들과 정체성에 차이가 없는 '8인회 (The Eight)'이 유명하다.   이들을 Social Realist (사회 사실주의자)라고 통칭한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역시 공공 미술 프로젝트의 영향권 안에서 '미국의 풍경'을 통해 미국의 '정체성'을 살리자는 취지의 회화운동이 미국의 중서부 화가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을 지역주의자 (Regionalist)라고 부른다. 위의 사회사실주의적 화가들이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었다면,  '미국의 풍경'에 역점을 둔 '지역주의 화가'들은 다소 보수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 Grand Wood, Benton 등이 있다.

 

Edward Hopper 는 사회사실주의의 기수라 할 수 있는 Henri (헨라이-로 발음한다)의 제자였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혹자는 Edward Hopper 를 애쉬캔 (Ashcan) 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에드워드 호퍼 자신이 이런식의 분류를 싫어했다. 호퍼는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상적 그룹에도 속하지 않으며 미술가로서 이런 사상적 색채를 띈다는 것 자체가 유치한 짓이라는 입장을 평생 관철했다.

 

Edward Hopper 보다 한세대 이후에 탄생한 Andrew Wyeth 를 '지역주의자' 무리에 포함시키는 미술사가도 가끔 보인다. 그런데 이또한 무리스러운 노릇이, Wyeth 역시 예술지상주의자인지라 어떤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그림을 연결짓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때문에, 나는 미국의 사실주의 미술가 계보에서 Edward Hopper 와 Andrew Wyeth 를 '외톨이'들로 분류하는 편이다. 나는 외톨이들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내가 미국미술사를 정리하면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앞부분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우선 할 일은, 사회 사실주의자들 중에서 내 맘에 다가오는 (혹은 잘생긴) 화가들을 정리하고, 그리고 지역주의자들을 정리하는 일 일 것이다. (물론 이러다 기분 내키면 식민시절의 풍속화가를 갑자기 소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결: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10. 20:48

 

하숙생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길에

정일란 주지말자 미련일란 주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간다

 

이런 노래가 있다. 제목이 '하숙생'이다. 우리 아버지가 인생 제대하기 전에 말년에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헤어질 무렵이면 이 노래를 부르셨다고 한다. 난 이 노래의 제목이 '인생은 나그네' 혹은 '나그네'인 줄로 알았는데 제목은 노래가사에도 없는 '하숙생'이라고 한다. (하하).

 

하숙생이란 말은 '나그네'라는 말과는 느낌이 사뭇다르다. 왜 다른가하면, 나그네는 그냥 줄창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존재같고, 하숙생은 그래도 어딘가 적을 두고 살다가 때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하숙'을 하다가 또 떠나고 그럴것 같다는 말이지.  어딘가에 적을 두긴 하지만 거기가 자기 집은 아니고 그냥 남의집 한귀퉁이 빌려 살다가 때되면 떠나는 존재. 하숙생들이 먹는 음식은 하숙집이 제공하는 하숙집밥, 집 주변 함바집, 기사식당, 혹은 편의점 주먹밥, 컵라면 뭐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하숙생들은 소지품도 많지 않고, 갖고 있는 옷도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이리저리 하숙을 하며 돌아다니기 때문에 늘 일정량의 물건만을 소지 할 뿐이다.  하숙생은 공동 화장실을 쓰고, 공동 수돗가에 모여서 양치질을 할 것같고, 뭐 그것이 홈, 스위트 홈이 될 수는 없는 어중간한 주거공간을 점유할 것이다.

 

자취생하면 뭐랄까 좀더 건설적이고 독립적이며, 하하, 나만의 어떤 공간 점유가 가능해보인다. 그런데 하숙생은 이도저도 아닌 묘한 상황이란 말이지.

 

 

낯가림이 심한 가겟집 아들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는 뉴욕주의 나이액 (Nyack)에서 태어났다. 대서양에 면해있는 이 도시는 당시 요트를 많이 제작하는 곳으로도 알려져있다. 호퍼의 부모는 중산층 집안의 사람들이었고 나이액에서 상점을 운영했다.  그런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던 호퍼의 아버지는 사업수완이 좋지 못했고,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간 것으로 보인다. 호퍼는 성장하면서 아버지 가게일을 돕거나 경리직 일을 거들기도 했다. 당시 호퍼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가게는 '공산품 가게 (Dry Goods Store)'로 알려져 있다. 꽃이나 야채, 생선과 같은 생생한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주로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동네 가게를 살펴보면 크게 두종류로 나눠지는데 신선한 과일, 우유, 야채, 생선등이 취급되는 '그로서리 (grocery)' 가게가 있는가하면,  이런것을 제외한 물건들, 문구류, 생필품, 의약품,  그리고 이런곳에서 식품을 판다면 공장에서 만들어진 과자, 빵, 썩지않는 음료수 이런 것들을 주로 취급한다.

 

오늘날,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의 도시 빈민 생활문제를 사회학자들이 지적할때, 도심에 사는 빈민들이 '신선한 음식'을 사먹을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신선한 식품을 제공하는 '그로서리'에서는 식품 운송 및 보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점점 대형 회사들이 취급하게 되고, 도심의 작은 상점들은 이런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로서리'를 포기하고 '공산품'만을 취급하게 된다.  그런데 도심의 빈민들은 '자동차'도 없다. 이들이 신선한 야채를 사려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쇼핑을 가야 하는데 드문드문 오는 시내버스에 의지해서 장을 보려면 하루 온종일이 걸리고 만다. 결국 도시 빈민들은 집 근처의 공산품 가게에서 제공하는 빵, 과자, 음료수, 그리고 패스트푸드 전문점에 의지하여 생계를 해결하게 되고, 그 결과 이들의 건강이나 생계는 더욱 악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혹은 우리들이 매일 밥상에서 김치나 다른 야채를 먹을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 신선한 야채를 먹고 싶어도 사먹을수도 없는 도시 빈민들도 많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경제 대국인 미국에서조차.

 

에드워드 호퍼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상점은 바로 이런 '마른 물건'만 판매하는 공산품 가게였다.  웹에서 'Dry Goods Store' 를 검색해보니 1910년 펜실베니아의 어떤 마을의 Dry Goods Store  사진이 나온다. 잠시 빌려다 소개해본다.

 

 

에드워드 호퍼의 소개 책자들을 보면, 비사교적이고 혼자 그림그리기를 즐겨했던 소년 호퍼는 아버지의 가게일을 돕는 것을 매우 따분해 했다고 한다. 나는 소년 에드워드 호퍼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돕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그는 사람도 별로 안오는 상점을 지키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고, 어쩌다 손님이 와서 뭔가 물으면 마지못해 대꾸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소년 호퍼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시 농토를 남의 손에 맡기고 수원으로 이사를 나와서 한길가에 가게를 열고 상회를 운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몇해동안 상점을 착실히 운영하여 한살림을 장만한 후에 다시 귀향을 하셨다. (사업에 재능이 있는 분들이었나보다).  나는 상경한 우리 가족들과 떨어져서 수원의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1년을 보냈는데, 그 당시 나는 '원천상회' 집 아이로 통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몰라도 좋았다. 나는 '원천상회' 아이였으므로.  한길 건너에 우리 상회보다 더 큰 상회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동네 사람들이나 인근의 유원지를 찾는 사람들, 그리고 논 건너 공장에서 일하던 직공들은 우리 상회에 들르기를 좋아했다.  우리 할머니가 사람이 싹싹하고 부지런하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공평하게 싹싹하게 대했으므로 사람들이 우리 할머니를 좋아 했었던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어미 아비에게 버림받은 새새끼처럼 풀이 죽은 꼬마였으므로,  사람들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귀엽다며 내 머리를 건드려도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도망치곤 했었다.  나는 골난 표정으로 동네 골목골목을 쏘다니며 혼자 놀았고,  나는 골목골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고 싹싹하게 인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림자처럼 혼자 떠돌았지만, 자유롭게 사람들이 사는 풍경을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법 어른들도 모르는 비밀스런 풍경을 구경하기도 했었다.  나는 유원지 숲에 데이트를 나온 공작 직공들이 옷을 반쯤 내리고 몸을 부딪치며 아픈듯 흐느끼는 광경을 멀거니 보기도 했고, 풀숲에서 포개져있던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내 눈에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갔고, 나는 판단력도 없이 이상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풍경들을 관찰했다.  

 

가겟방을 지키고 앉아있어야 했던 수줍은 소년 호퍼는 따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길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을, 혹은 가게에서 내다보이는 맞은편 건물이나 가게들의 풍경을 세세하게 관찰 했을 것이다. 진열대에는 평생 썩지 않을 물품들이 말라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마른 물건들로만 이루어진 공산품 가게가 평생 호퍼의 삶을 지배했을 거란 생각을 한다.

 

 

호퍼 삼락 (三樂)

 

맹자 빼갈먹고 가라사대, 선비에게 세가지 기쁨이 뭔고 하니 (1) 부모형제 건강하시고 (2) 세상에 부끄러운 일 좀 덜하고 (3) 남의자식 잘 가르치고 뭐 대략 이러한 것이다. 내가 가만 보니까, 나는 두가지는 되는데 한가지가 안되어서 제대로 된 선비질을 못하고 있다. 부모형제 건강하시고, 남의자식 열심히 가르치고, 대략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되는데 하늘을 우러러 땅을 우러러 여러가지고 부끄러운 것이 많아... 나는 죽어도 군자가 못되겠네...

 

 

호퍼는 위의 내가 적은 '하숙생'같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일단 호퍼는, 나이악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후 뉴욕으로 가서 통신과정으로 미술공부를 좀 하다가, 일러스트레이션 (삽화) 공부 도 하고, 미술학교에 정식 입문하여 당시의 대가인 Thomas Eakens, Henri 와 같은 화가 밑에서 공부하는 과정도 거친다.  (펜실베니아 미술관에서 Eatens 작품을 무더기로 사냥하여 왔으므로 언젠가 그의 페이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궁색한 형편이었지만 예술인들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 머물며 그곳의 분위기를 살피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화단의 인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미술관 구경하고, 뒷골목 구경하고, 혼자 스케치하며 떠돌았다고 한다. 그는 피카소한테도 관심이 없었고,  도통 미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러 들지를 않았다.  그가 당시 파리를 지배하던 인상파 화풍이나 뒤를 잇는 후기인상파의 작풍을 아주 몰라라 하지는 않았으나 이런 흐름을 자신의 그림세계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향은 받았을 수 있으나 그것이 호퍼의 그림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호퍼는 1920년대와 30년대를 지배하던 사실주의의 양대 사조 (1) 지역주의 Regionalism 과 (2)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Social Realism) 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지역주의는 경멸했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다소 공감하나 자신을 그 틀에 가두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파도 좌파도 아닌 '미술파'의 길을, 아니 미술파도 아닌 그저 '호퍼'의 길을 갔을 따름이다.

 

사십대 후반까지 호퍼는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그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삽화가'로 생계를 해결했고, 삽화의 연장으로 작업한 '에칭'판화 작업으로 판화업계의 대가가 되기는 했으나 그 역시 생계의 연장이었다. 그는 미국이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접어들던 싯점부터 오히려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에 등단하여 난생처음으로 차를 사고, 그리고 매사추세츠주의 아름다운 해변 휴양도시인 Cape Cod 에 스튜디오를 장만하여 그의 '문패'를 다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도 하는데 이는 40대 후반의 일들이었다.  그 때까지 그는 그저 가난뱅이 그림쟁이였을 뿐이다.  Cape Cod의 스튜디오 외에 그들이 주로 생활한 곳은 뉴욕의 자그마한 아파트 서민용 아파트.  이곳은 방한칸, 작은 싱크대가 부착된 미니부엌이 달린 스튜디오였는데  그는 죽을 때 까지 공동 화장실, 공동 샤워시설을 사용했다.  따로 작업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두 부부가 살았으므로,  호퍼가 그림 작업을 할때면 방에 분필로 금을 그어놓고 아내 '조'가 금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Gas (1940)

Museum of Modern Art, NY

 

 

인생의 초반 50년 가까이를 가난뱅이로 살았고, 그 후에 명성을 얻고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생활이 풍족한 이후에도 가난뱅이의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검소하게 살았던 호퍼는 주로 세가지 취미 생활에 돈을 썼다고 한다:

 

(1) 책

(2) 여행

(3) 극장

 

 

호퍼 부부는 옷을 사면 다 떨어질때까지 입었고, 호사스런 가재도구를 사 모으는데 취미가 없었다. 호퍼의 아내는 요리 따위를 즐기지도 않았다. 호퍼의 아내가 가장 즐겨 한 요리는  깡통을 따서 깡통에 담긴 음식을 밥상에 차리는 일.  그것으로 요리 끝. 즐거운 인생.  이들은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수십년이 지나도 변치도 않을 깡통음식을 주로 먹었고,  혹은 동네의 싸구려 음식집에서 끼니를 해결 했을 것이며, 이들이 자동차를 끌고 미국의 여기저기를 떠 돌때는 자동차를 세워놓고 아무때나 드나들수 있는 자판기 음식점 (automat), 주유소, 여관의 식당,  길거리 심야 카페등에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우면 되었을 것이다.  심심하면 극장에 가서 사람들 속에 섞여 영화를 봤을 것이고, 집에 오면 각자 상념에 잠겨 자신의 일에 몰두 했을것이다. 

 

 

호퍼의 삼락으로 내가 정리한 책, 여행, 극장 이 세가지 요소는 일관되게 호퍼의 그림 세계에 반영된다.  책읽기, 여행. 극장 구경등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이 모든것은 '관찰자'의 작업이다.  책 읽기는 외부와 내면으로의 여행이고, 여행은 실제 세상에 대한 스치는 관찰이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의 훔쳐보기 욕구를 극대화하여 충족시켜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책읽기, 여행, 영화구경은 비사교적인 사람들이 혼자서 얼마든지 즐길수 있는 놀이이기도 하다. 책읽을때 옆사람하고 종알거릴 필요 없다. 여행할때 혼자 자동차를 끌고 돌아다니다가 주유소에서 개솔린 넣고, 주유소 점방에서 아무거나 사 먹고,  길거리 모텔 아무데서나 하룻밤 자고 다시 떠나는 동안 아무하고도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 영화 볼때 옆사람하고 '회의'하면서 떠들면 주위의 눈총을 받는다. 영화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지만, 우리는 그다지 소통하지 않는다.  호퍼는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관찰하고 이를 내면화하거나 화폭에 담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품 가겟집 아들이었던 호퍼는 평생 공산품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깡통 음식 혹은 자판기 음식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으며 생활하면서, 가겟방 너머, 가게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내다보듯 자동차 유리 너머, 극장 화면너머의 세상을 관찰하고 훔쳐봤으며, 별로 가진것 없이 수십년간 공동화장실을 써야 하는 작은 아파트를 주거지 삼아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다, 가볍게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미국의 풍경을 그린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꼽지만, 그는 그가 경멸했던 '미국적인 그림을 그리자는 지역주의자'도 아니었고, 사회적인 문제를 화폭에 담은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말하자면 Regionalist 도, Social Realist 도 아닌 Hopperist 였던 것이니,  가장 미국적인 풍경을 그렸다는 호퍼의 그림들이 오늘날 미국 국경을 넘어서서 세상 사람들에게 마술적으로 다가간다.  우리가 오늘날 호퍼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미국'이 아니다. 그 속에 '하숙생'과 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나'의 모습 혹은 '우리'의 모습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호퍼가 관찰 한 것은 '미국' 혹은 '미국인'이 아닌, '인간'이었던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9. 05:03

에즈워드 호퍼는 (July 22, 1882 – May 15, 1967) 19세기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까지 85년을 살다간 미국 화가이다. 내가 가급적이면 작가들의 생몰 연대를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들의 활동과 그들이 살다간 지역사, 세계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살다 간 동안 한국에서는 한일합방이 일어나고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광복을 맞고, 그동안 세계사적으로는 세계 1차, 2차 대전이 지나가고, 한국에서는 육이오, 혹은 한국전쟁을 겪고, 419 혁명이 일어나고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우리 아빠 엄마가 결혼을 하고 우리 오빠가 태어나고, 언니가 태어나고...

 

85년을 살다간 이 화가에게 몇차례의 그림 매체의 변화가 있었다. 첫번째로, 그는 밥벌이를 위해 '삽화가'로 활동을 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예 삽화에 중요 도구가 되는 '에칭'기법을 스스로 익혀 '에칭'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고,  미술학교에서 만나 잠시 알던 여학생 Jo와 40대에 다시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수채화를 권유받아 수채화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Jo와 결혼하여 해로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유화작업에 주력하게 된다.

 

마침 내 사진파일에 내가 '사냥'한 (나는 이를 사냥이라 부른다. 어줍지 않은 사진이지만, 내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것들이므로) 작품들이 있어 이 세가지 매체의 작품들을 소개해본다.

 

(1) 삽화와 에칭판화 시절

(2) 수채화 시절

(3) 유화 시절

 

 

*** ***

 

 

(1) 에칭 판화: 1921년 Night Shadows (밤의 그림자).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찍은 사진이다.

 

 

 

 

 

(2) 수채화: White River at Sharon (샤론의 흰 강) 1937년 작품으로 그해 9월 버몬트 (Vermont)주의 친구를 방문했을 때 그 곳의 풍경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유화: 그리고,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국립 미술관, 허시혼 미술관, 코코란 미술관에서 '사냥'한 작품들

 

 

스미소니안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Art) 1층에 2009년에 걸린 호퍼의 작품들. 왼편은 Cape Cod Morning. 오른편은 Ryder's House

 

 

 

 

 

 

 

 

 

국립 미술관에 걸린 Cape Cod Evening.  위에 있는 것은 케이프 코드의 아침.  아래의 작품은 같은 장소의 저녁.

 

 

 

 

코코란 미술관에 걸린 Ground Swell (1939)

 

 

 

 

음...2008년 여름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서 찍은 Night Hawk 가 그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그 때 사진 상태가 비참하다...제대로 찍지 못했다...

 

Cape Cod Morning 이라는 작품으로 그의 작품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다음회에...)

 

 

Posted by Lee Eunmee
Realism/EdwardHopper2009. 10. 9. 02:52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소장, 자화상




Edward Hopper 가 소년 시절에 습작으로 그린 바다 그림을 보면, 바다에 커다란 배가 한척 떠 있는데 그림 구석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Alone, alone, all, all alone,
Alone on a wide wide sea !

홀로, 홀로, 홀로 있다네
이 넓고 넓은 바다에 나 혼자 뿐이라네!

이것을 보고 그 부모님이 기겁을 했다고 하는데, 호퍼는 어릴때 갑자기 키가 훌쩍 커버리는 바람에 주위의 아이들과 동화를 못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혼자 그림이나 끄적이며 소일했다. 그가 어린 시절 그림 구석에 끄적여놓은 이 구절은 Samuel Taylor Coleridge 의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노 수부의 노래) 에 나오는 것이다. 대개 한국 대학의 영어영문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이라면  워즈워드와 쿠어리지의 '낭만주의'를 시작으로 영문학에 입문하게 될 것이다. Coleridge 는 워즈워드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의 문을 열어제낀 시인이었다.



어린시절 쿠어리지의 시를 베껴적던 소년 에드워드가 성인이 되어 즐겨읽던 작가들이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 (Henry David Thoreau)였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 철학자, 문인들이었다. 미국의 초절주의는 영국의 낭만주의 (Romanticism)와 칸트 철학을 배경으로 탄생한 철학으로  에머슨의 자기독립 (Self Reliance) 정신으로 꽃을 피우게 되는데, 에머슨의 Man is his own star (인간은 그 스스로 자신의 별이다) 라는 선언에서 보이는 '자아'를 주체로한 삶의 철학은 근대 미국의 정신적 근간이 되기도 한다.  그가 소년시절 쿠어리지의 시에서 성인이 되어 에머슨이나 써로우로 옮겨간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현상처럼 보인다. 그는 외톨이 소년이었고, 그러나 그는 혼자서 제발로 서기를 겁내지 않았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은 그것이 아무리 밝게 채색되어 있어도 어쩐지 스산하고 쓸쓸하다. 그런데 그 썰렁한 그림앞에 일단 서면 우리는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무언가 음산하고 스산한 바람이 우리 귓가와 뺨을 맴돌면서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잡는다.

에드워드 호퍼는 어린시절 습작에 써갈긴 싯귀처럼 평생, '외톨이'로 살아간 미국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에게는 절친한 친구들도 있었고, 결혼하여 평생 해로한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외톨이'라 부른다. 그는 평생 넓고 넓은 바다를 홀로 떠돌듯 자기만의 그림 세계를 개척해나갔고, 그의 신념을 지키다 여행자처럼 지상에서 사라져버렸으므로.

그런데, 우리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스산함이나 썰렁함, 고립감을 느끼면서도 그의 그림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공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이도 내가 느끼는 쓸쓸함을 느꼈구나. 나도 저이의 쓸쓸함을 느낀다. 우리는 공감한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이런 '공감'. 누군가 슬퍼서 울고 있으면 곁에서 함께 울어주는 것이 위안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쿠어리지의 고립감에 공감했고, 호퍼의 그림을 읽는 사람들은 호퍼의 고립감에 공감한다. 그 순간 만큼은 'alone, alone, all, all alone 이 '무효'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마술적 힘 일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세계,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09. 10. 4. 20:09
PARK_032.jpg

 

위사진은 2008년 5월에 찍었던 것이다. 현재 (2009년 10월)는 빌딩 외관 수리중이므로 철재 골조가 외관을 싸고 있어서 아름다운 건물의 자태를 보기가 힘들다.

 

 

코코란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http://www.corcoran.org/index.asp

 

워싱턴 디씨, 백악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웃에 미국 적십자 건물과, 헌법홀 (Constitution Hall)도 서 있다.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에 닷새동안 개관한다. (월/화요일은 쉰다.)

입장료: 성인 10달러, 학생 8달러.

개관시간은 수, 금, 토, 일 (오전 10시 - 오후 5시)  목요일 (오전 10시 - 오후 9시)

2009년 10월 현재, 건물 지붕및 외관을 수리하고 있으므로 미술관 전관을 개방하지 못하고, 일부 닫힌 구역도 있다.  그러므로 코코란이 자랑하는 콜렉션을 맘껏 보기는 힘들다.

 

http://freefeel.org/wiki/CorcoranGalleryOfArt : 2008년 5월, 코코란이 수리를 시작하기 전에 관람하고 적었던 리뷰.

 

 

 

스미소니안 렌윅 갤러리 (http://americanart.textcube.com/96)에 소개한 바와 같이, 코코란 미술관 (Corcoran Gallery of Art)는 본래 현재의 렌윅 갤러리 건물에서 1874년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이것이 워싱턴 최초의 미술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소장품이 늘어나면서 현재 렌윅 갤러리로 사용되는 본래의 코코란 갤러리에 수용하기가 힘들었고,  그리하여 인근에 프랑스식 네오 르네상스풍의 미술관 전용 빌딩을 짓고 소장품들을 모두 이동시키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찾는 코코란 미술관의 탄생이다. 렌윅 갤러리는 건물 디자인을 한 렌윅씨의 이름을 기념했고, 현재의 코코란 미술관은 설립자인 Corcoran씨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 두 건물 입구의 머리 장식을 보면 모두 DEDICATED TO ART (예술에 바침)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방문하시면 찾아 보시길)

 

렌윅 갤러리 소개 페이지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곳은 백악관에 인접한 미술관으로 유럽의 명품들, 유럽 대가들의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지만, 대개 미국미술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건물 디자인도 아름다워서 역대 미국 대통령 부인들이 귀빈들을 접대할때 이곳을 안내하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건물 전체적인 내부 구조, 특히 입구에 들어섰을때 눈앞에 나타나는 넓직한 중앙 계단과 그 중앙계단을 중심에 두고 양옆으로 전시장이 배치된 풍경은 렌윅 갤러리의 구조와 흡사하다.  이 곳 역시 1층홀, 2층홀에 전시장들이 서 있고,  전시장에서 연결된 건물의 일부는 코코란 미술학교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건물은 코코란 미술관과 코코란 미술학교 두가지를 모두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이곳에서 코코란 미술학교 학생들의 졸업전시회가 열리는 것을 볼 수도 있는데, 역시 젊은 학생들다운 독창적이고 발랄한 전시물들을 보게 된다.

 

1층에는 중앙에 매표소,  오른쪽에 기념품 샵, 중앙 홀의 왼편에 카페테리아가 있다. 그리고 주변으로 갤러리들이 있다. 겉보기보다 내부 공간이 넓고 알차다.  중앙계단을 따라 2층홀로 올라가면 역시 넓직한 홀이 나타나고 홀 주위로 갤러리들이 있다. 국립미술관 규모로 크지는 않지만,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알찬 미술관이라고 할만하다. (2009년 10월 현재에는 지붕수리 공사중이라 미술관의 일부 공간이 폐쇄되어 있어 소장품들을 제대로 다 볼수는 없다. 그러나 이곳은 언제 들러도 아름다운 곳이긴 하다.)

 

 

1층 미국미술 전시장.  계단 몇개씩 올라가며 층층이 액자모양으로 전시실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현재는 근대 미국미술실, 그 다음에는 The Eight (8인회)라는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전시실,  그리고 가장 안쪽, 세번째 방에는 미국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중앙에 서있는 남자가 가리고 있는 것이 메리 커셋 (Mary Cassatt)의 대형 자화상.  그리고 그 너머로 자주색 커튼이 드리워진 홀이 살짝 보이는데, 프랑스 귀족의 홀, 내부 실내장치를 모두 옮겨다가 만든 방이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집은 허물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건물 자재를 뜯어다가 옮겨서 새로 지었다고 하는데, 미국의 거부들이 귀족취미로 프랑스 귀족의 방을 그대로 뜯어다가 뉴욕이나 워싱턴의 저택 일부를 장식했다고 한다.)  오늘 나의 수확은, 화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비롯한 근대 대표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한눈에 살피고, 특히 '팔인회' 멤버들의 작품들을 방 하나에서 모두 살펴볼수 있었다는 것. :-]

 

이 전시장의 작품들은 때가되면 교체되고 다른 소장품들이 걸리게 되므로 늘 항상 거기 있는것은 아니다. (그러니 가끔 가서 살펴봐줘야 ~ ) 갈때마다 새로운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기쁨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늘 거기 있을거라는 기대를 해서도 안된다. 전에는 이 전시실에서 로댕의 작품을 보았었다.

 

 

(사진들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크고 선명한 사진을 원하시면 클릭하세요)

 

 

메리 커셋의 그림. (메리 커셋 역시 미국의 100대 미술가중의 한명으로 언젠가 그녀의 페이지가 씌어질 것이다.  사실 워싱턴을 드나들며 내가 모은 자료중에 메리 커셋 관련 자료가 가장 많다. 뉴욕이나 시카고까지 가서도 메리 커셋의 작품은 꼭 찾아 봤으니까.  처음에는 무작정 그이의 그림이 좋았었고, 그 후에는 좀 시들해졌고, 요즘은 새로운 각도에서 살피고 있다. 역시나, 사랑스런 화가라고 할 만하다.)

 

 

 

 

 

미국의 광대한 풍경을 담은 전시실.  사진에서 왼쪽 작품이 Frederick Church (프레데릭 처치)의 나이아가라,  난로 오른쪽이 Bierstadt (비어슈타트) 의 들소 그림.  코코란 미술학교 졸업생으로부터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여기 이 벤치가 단순하게 다리쉼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이아가라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이 벤치에 앉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벤치에 앉아서 나이아가라 그림을 볼때, 마치 내방 창문 밖으로 나이아가라를 보는 느낌이 들 것이라고.

 

프레데릭 처치와 비어슈타트 (비어스타드)는 초대형 미국의 풍경 그림을 그려서 유럽 화단에 소개한 화가들인데, 아직 사진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에 신생국가 미국의 거대한 풍경화가 유럽사람들을 압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니까, 이런 배경지식을 갖고 그림들을 보면 '대단한것이었군'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이러한 배경지식 없이 내 눈에 처음 들어온 이런 대형 풍경화들은 별로 매력이 없었다.  나는 전자사진과 영상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당시에 굉장했다니까 굉장했나보다 하는 정도.  왜 처치나 비어슈타트의 작품들이 의미가 있는지는, 장차 이들을 소개하는 페이지에서 좀더 상세히 이야기를 해 보겠다.  (<--- 너는 왜 허구헌날 나중에 이야기 하겠다고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냐...)

 

 

 

 

그리고 이곳이, 프랑스 귀족의 집 내부를 뜯어다 붙였다는 홀.  얼핏 이곳의 첫 인상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홀'을 지나칠때와 흡사 했다. 흰 바탕의 벽에 아름다운 꽃무늬 장식. 금박의 장식들, 그리고 대형 창문과 거울의 벽.  마침 토요일이라서 갤러리 측에서 관객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으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주자들이 모여서 슈베르트와 모짜르트의 실내악들을 한시간동안 연주해 주었다.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의 어떤 홀 같은 곳에 앉아서 모짜르트의 음악들을 '생'으로 듣자하니,  "야,귀족놀음도 재미있었겠다. 돈 있으면 재미있는 일들도 많이 일어 날 수 있겠다" 요런 생각도 사사삭 들고~  

 

 

 

 

프랑스식 방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전시장

 

 

그방에 (위 사진에서 왼편에) 놓여있던 시계. 아직도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오후 두시 십분전.

 

 

 

 

이탈리아 작가의 Veiled Nun (베일속의 수녀). 대리석을 조각하여 베일을 뒤집어 쓴 여인의 얼굴을 형상화 한 것인데, 돌을 가지고 베일과 베일속에 비치는 얼굴을 만들어낸 것이 아무리 들여다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중앙 계단을 올라가 2층 홀에서 내려다 본 1층 중앙홀. 카페테리아.

 

 

중앙계단을 장식하는 대리석 상. 날개 달린 남자가 여자를 안고 있는데 꽤 매력적이다. (작가 신상 생략)

 

 

 

위의 날개달린 남자 아랫쪽으로 보이는 중앙계단.  1층 매표소, 그리고 계단을 더 내려가면 보이는 미술관 출입문. (저 문으로 들어오고 저 문으로 나간다)

 

 

 

미술관 건물을 지키는 두마리 사자중에서 왼쪽 사자 (철골로 감싸 놓은 건물 외관이 보인다)

 

 

오른쪽 사자 (아이 귀여워)

 

 

입구 안내판

 

 

입구에서 왼편으로 돌아보면, 사진 중앙에 보이는 역시 보수공사중인 건물이 백악관에서 사용하는 행정 건물, 그리고 멀리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이고 그 앞쪽에 작은 붉은벽돌 건물이 보이는데, 그것이 렌윅 갤러리 (http://americanart.textcube.com/96 ) . 중앙에 보이는 회색 건물 뒷편에 백악관 본관 및 정원이 있다).

 

 

 

 

 

백악관을 끼고, 렌윅 (코코란 미술관의 전신)과 현재의 코코란이 인접해 있으므로 이 두곳은 백악관 안주인들이 지척에 두고 드나들수 있는 보석과도 같은 곳이다.  외관 공사가 언제쯤 완결될지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은 공사 시작하면 2-3년은 기본인것 같던데...)

 

 

*******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만났다.  어쩐 일인지, 이 그림은 호퍼의 '도시' 풍경보다 '환'하고 덜 쓸쓸해보인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는데, 어쩌면 호퍼는 '물'을 그릴때 '행복'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음, 호퍼는 하도 '거인'이라 내가 매일 그의 책을 들여다보면서도 작정하고 쓰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이 거인을 넘어서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하도 유명한 사람이니 오히려 내가 본 작품들만 내가 아는 선에서 정리하고 지나가는 것이 정직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호퍼'를 다 쓰기전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겠다. 일단 호퍼를 넘어서자...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nna Mary Robertson, Moses 할머니의 일생

 

모세 할머니는 1860년에 태어나 1961년에 사망했다. 1세기 한 바퀴를 돌고도 일년을 더 살은 셈이다.  결혼하기 전 이름은 안나 마리 로버트슨 (Anna Mary Robertson)이었고, Moses와 결혼하였으므로 남편의 성을 따라서 Moses 할머니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안나 마리를 씨씨하는 애칭으로 불렀다. 씨씨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 뉴욕주의 시골마을, 평범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이로 태어났다. 당시 농가의 아이들은 집안일을 거드느라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많지 않았다. , 가을에는 들판에 나가서 일을 거들어야 했고, 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어느 겨울날 아빠가 몸이 아파서 며칠간 일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지내게 된 적이 있었다.  아빠는 심심한 나머지 집안의 빈 벽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거실벽에 페인트로 호수의 풍경화를 그려넣었는데, 온가족이 이 그림을 보고 기뻐하였다. 어린 씨씨 역시 아빠의 그림이 좋아보여서 판자에다 숲과 호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대로 이것을 ‘lamb scape’ 라고 불렀다. (영어로 풍경화는 랜스케이프, landscape 인데, 어린아이가 이 단어를 잘 모르니까 lamb scape 라고 말 한 것이다.) 식구들은 씨씨가 램스케이프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깔깔 웃었다고 한다.

 

씨씨는 농가의 소녀들이 그러하듯 엄마가 단풍시럽을 만들거나, 우유로 버터를 만들 때 거들어야 했다. 씨씨는 양초를 만들고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세탁이나 다림질, 바느질 등 집안에서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배웠다. 그리고 열두살이 되던 해에, 다른 농가의 소녀들처럼 씨씨도 남의집 살이를 하기 위해 떠났다. 60년대, 70년대 농가의 소녀들이 서울이나 대도시에 식모아이로 들어간것과 마찬가지 풍경이었으리라.  당시에는 이러한 풍경이 낯설지 않았으므로 씨씨역시 이런 상황을 특별히 슬퍼하지는 않았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 명랑하게 성장했다.  씨씨는 일요일에 주인집 가족들과 다함께 교회당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사람들도 만나고 친구를 사귈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씨씨가 두번째로 옮겨간 집에서는 씨씨가 학교에 다닐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집안 일을 모두 마치고나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어느날 씨씨가 그린 마을 풍경화를 본 선생님이 그 솜씨에 감탄하여 그림을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씨씨에게는 잊을수 없는 기쁜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자신의 그림을 칭찬해주었으므로.

 

 

 

 

이렇게 남의집살이로 일을 하던 씨씨는 1986, 17세 되던 해에 토마스 솔로몬 모세 (Thomas Solomon Moses)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 역시 같은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둘은 결혼하여 버지니아의 섀난도 골짜기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이들은 열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에 다섯명의 아이를 골짜기에 묻어야 했다. (그림: 섀난도 골짜기 Shanandoh Vallery, 1938)

 

 

 

 

 

 

 

 

 

섀난도 골짜기의 농장에서 살던 이들은 다시 뉴욕주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이글 브리지 (Eagle Bridge) 근처에 농장을 장만하여 니보산 (Mr. Nebo)이라고 이름짓고 정착한다이곳에서 씨씨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농부인 남편을 거들면서, 집안 살림을 하면서 부지런하게 살아간다. 어느해에 도배를 하다가 도배지가 다 떨어지자 씨씨는 페인트로 난로 가림판에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가족들이 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녀가 최초로 그린 커다란 그림이었다고 모세 할머니는 술회한적이 있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여 집을 떠나고 난후, 1927 1, 모세 할머니가 67세 되던해에 남편 토마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녀들도, 남편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모세 할머니는 시름을 덜 겸, 털실로 헌 그림을 고치곤 했는데, 시력이 약해지고 류머티즘으로 바느질을 하기 어려워지자 그림붓을 들게 된다. 그렇게 십여년간 모세 할머니는 심심파적으로 싸구려 페인트와 붓을 이용하여 추억속의 풍경들을 그리게 된다. 그의 그림 속에는 링컨 대통령이 저격당하여 조기를 내 걸고 있는 마을이 들어있기도 하고, 새로운 자동차를 타고 소풍가는 가족의 풍경이 그려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뉴잉글랜드 지방 농촌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뉴잉글란드 지방이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이 길어서인지 특히나 눈 쌓인 겨울 풍경이 많이 보인다. 흰눈,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조각보를 만드는 장면도 보이고, 다 함께 단풍시럽을 만드는 장면도 보인다. 이는 모세 할머니가 평생 살아오면서 직접 경험한 삶을 풍경들이었고, 그이의 추억속에 생생하게 흐르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의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1938, 모세 할머니가 78세 되던 해에, 모세 할머니는 자신의 그림을 동네 상점 (Hoosick Falls drugstore)에 진열해 놓았다. 몇푼에라도 팔리면 용돈벌이를 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오랫동안 예정되어온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마침 이 상점을 지나던 뉴욕의 미술품 수집가 루이스 칼더 (Louis Caldor)가 시골 상점에 진열된 모세 할머니의 그림들을 발견하고, 이 그림에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낸 것이다. 그는 당장 상점에 진열된 작품들을 모두 사들여가지고 뉴욕으로 향한다. 처음에 뉴욕 화랑가의 반응은 냉담했다. 알수도 없는 무명, 노인 화가의 그림에 투자해봤자 별 볼일 없을거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무명 미국화가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모세 할머니의 그림 세점을 전시하게 된다. 이어서 1940 (모세 할머니 81) Galerie St. Etienne 에서 모세 할머니의 개인 전시회를 개최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보러왔고, 이들은 모세 할머니의 풍경화속에 담긴 추억을 읽으며 감동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1961년 모세 할머니가 사망할때까지 20여년간, 1,5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내면서, 모세 할머니는 그야말로, ‘국민 할머니로 통하게 된다. 트루만, 아이젠하워, 케네디 대통령이 모세 할머니에게 해마다 신년 카드를 보냈으며, 할머니의 작품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으로 판매되고 혹은 벽지나 직물에 박혀 대량으로 판매되어 나간다. 그녀의 일대기가 드라마가 되어 소개되기도 하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소개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어느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모세 할머니가 살던 시골에서는 그 방송이 잡히지 않아 정작 모세 할머니는 자신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후에 방송 기자가 다큐멘터리 테이프를 가져다가 틀어서 보여줬다고 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신을 본 할머니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무엇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을 만들어 냈는가?

 

미국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예술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편이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을 예술적인 회화로서 취급하기 보다는 풍속화 (folk art, primitive ar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오히려 모세 할머니의 풍속화들이 왜 그 시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지, 그 배경을 주로 논의 하는 편이다.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의 저자 Frances K. Pohl 이나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의 저자 Robert Hughes 는 모세 할머니가 발견 된 시점의 사회적 분위기에 주목한다.

 

모세 할머니가 뉴욕화단의 수집가에게 발견될 즈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공공미술정책의 영향으로,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중서부 출신의 화가 그랜트 우드 (Grant Wood)가 한편에서 미국인의 미국적인 것을 외치며, ‘미국의 풍경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거니와, 뉴딜정책의 공공미술프로젝트에서 요구된 것이 미국의 풍경이기도 했고, 여태까지 유럽문화에 의지하던 미국인들은 우리들만의 것에 서서히 눈을 돌리게 된다.  미국이 자랑하는 미국화가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가 너무나도 미국적인 풍경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등장한 것이 1930년대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경제 대공황이었던 1930년대에 미술가들도 역시 경제적 암흑기를 거치게 되었는데, 에드워드 호퍼는 이때부터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30년대에 서서히 우리 미국인들의 풍경에 눈을 뜨게 되는 미국의 대중들은 2차대전을 거치면서 1945년 전승국이 되어 경제적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자신이 소속한 국가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유럽으로 눈길을 돌리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 우리 할머니들의 것, 우리가 향유하던 것을 향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모세 할머니 외에도 1948년 크리스티나의 세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 청년 앤드루 와이어드가 있었고, 그리고 일관되게 미국의 얼굴, 미국의 풍경들을 밝은 색조로 그려낸 노만 로크웰 (Norman Rockwell)도 있었다.  미술 수업을 받지도 못 한 채로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역시 말년에 미술계에 데뷔한 호레이스 피핀 (Horace Pippin)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발굴해 낸 미국의 작가라고 할 만하다.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가 특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계기를 당시 눈을 뜨게 되는 텔레비전과 대량생산문화에서 찾기도 한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텔레비전은 대중문화 매체의 상징이고, 텔레비전에 소개되는 모세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이가 그려내는 작품의 예술성을 떠나서 그대로 소박한 인간의 승리를 전하는 드라마이기도 했을 것이다. 카드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이의 그림을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 직물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의 그림이 박힌 벽지나 테이블보는 모세 할머니를 더욱 대중에게 다가가게 해 주었다. 그이가 그린 그림들이 예술성이 어떠한지 이미 그것은 대중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모세 할머니는 예술성을 넘어서서, 비평가들의 회의적 시선을 넘어서서 이미 국민 할머니가 되었고, 대통령들이 앞다퉈 악수를 하고 싶어하는 미국 문화의 상징, 그리운 추억의 아이콘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제목: Christmas (1961)

                                                 Oil and Tempera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 풍속화 갤러리 2009년 9월 6일 촬영

 

모세할머니는 나이 80에 미술계에 정식 데뷔했지만 그 후로 20년이 넘도록 국민 할머니로 영예를 누리며 살아갔다. 그가 남긴 그림이 1,500점이 넘는다고 하는데, 꽤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이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그이의 그림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미술관 웹사이트를 뒤져보면 소장품 명단에 몇 편이 올라있지만, 전시장에 내 걸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한 모세 할머니의 작품은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 한 점,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 점, 이렇게 딱 두 점이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은 풍속화 (folk art)’ 갤러리에 걸려있다.  필립스 콜렉션에서도 한번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요즘은 전시되고 있는 작품이 없다. 

 

                                           2009년 7월 3일 촬영

 

 

 

전시장에서 그림을 볼 수 없다 해도 실망 할 필요는 없다. 해마다 달력업자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 열두 장을 담은 달력을 찍어내고, 우리는 일년 내내 그이가 그린, 행복한 그림을 보며 지낼 수 있으니까. 모세 할머니는 그이가 기억하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우리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 우리 이웃집 어르신들, 내 친척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찾아낼 수 있다. 미술 비평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회화사적 작품성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모세 할머니는 비평가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고 명랑하게 그림들을 그려나갔고, 그의 그림들은 지금도 나에게 노래, 행복한 어린 시절의 노래를 선사한다. 이 행복한 보편성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어떤 설명을 해 줄 것인가?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예술은 비평을 초월하는 곳에 있다고.

 

http://www.benningtonmuseum.com/index.aspx  이곳은 모세 할머니를 기념하는 미술관. 뉴잉글랜드 지역 버몬트주에 위치하고 있다. 2009년 8월에 매사추세츠를 방문하면서 이곳을 들러보려고 신경쓰고 있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가 볼 수 없었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는 모세 할머니가 젊은시절 20여년간 살았다는 셰난도 골짜기의 농가집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  소풍삼아 그 언덕에라도 가게 되면 그때 관련 페이지들을 업데이트 하겠다.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2  또다른 일러스트레이터, 여성 화가 Tasha Tudor 이야기.

 

 

참고자료:

 1. Grandma Moses, written and illustrated by Alexandra Wallner

 2.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by Robert Hughes

 3.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by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9. 28. 18:45

그동안 틈틈이 미국사와 미국미술의 발전사를 살폈는데, 이제 어떤 전체적인 '지도'가 필요한 시기인 듯 하다.  중구난방으로 기분 내키는대로 쓰고 있긴 하지만, 이제 골격은 잡아놓고 부분부분 그려나가는 식으로 정리를 하는것이 좋을 것이다. 이 문제로 고민을 좀 하고 있었는데, 뉴왁 미술관 미국미술 관련 페이지에서 대략의 뼈대를 잡을수 있었다.

 

뉴왁 미술관에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이 미술관은 분명히 시대적으로 어떤 개성을 정해놓고 전시품들을 진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립미술관도,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도 시대적인 개념을 정하여 소장품들을 전시하긴 했는데, 뉴왁이 이를 분명히 밝혀서 '안내'를 잘 하고 있다.  내가 읽고 있는 미국미술 안내서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긴 했는데 막상 차례를 살펴봐도 그렇고 '장황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확실한 '지도'를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미술의 흐름이란것이 자대고 줄긋듯 명확히 떨어져주는 개념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내 머릿속에도 장황한 개념만 열거될 뿐, 시대별로 똑 떨어지게 정리가 안된다.

 

아래의 연표를 바탕으로, 이를 응용하며 커다란 전지에 시대별 지도를 그려놓고, 해당 시기에 나를 '매혹'하는 작가들을 포스트잇으로 붙여나가는 식으로, 나만의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면 좋을 듯 하다. (누군지 정리 한번 잘 해 놓았다.)  왜 미술전문가들은 이런 시도를 안하거나 못하는걸까? 너무 아는게 많아서?  그런데 아는게 많아도 주워담지 못하면 그게 또 마냥 허무한거라... 왜 방대한 지식을 담은 책들이 이런 간단한 표 하나를 제시하지도 못하는가?  나는, 일단 누군가가 잘 정리해 놓은 표에 입각해서, 내식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지고, 그 틀안에 작가와 작품을 집어 넣는 식으로 모자이크 하여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겠다.

 

 

http://www.newarkmuseum.org/PicturingAmerica.html

1730 to 1900

The American Colonies, 1730 -1776
The Young Republic, 1790 -1860
Romantic Portraits for Eastern Cities, 1790-1860
Country Portraits, 1790 -1860
The Rise of Landscape Painting, 1825-1880
The Civil War and Its Aftermath, 1860-1900
The Lure of Europe, 1850-1900
The Gilded Age, 1875-1900


1900 to Present

Into the Modern Era, 1900-40
Far From the Modern World, 1900-25
A Modern Art For a Modern World, 1910-30
Faith, Fear and Failure in The Machine Age, 1920-40
In the Wake of the War, 1945-65
Surrealism and Abstract Expressionism, 1930-65
Challenging Conformity, 1955-65
Art Since 1965

 

이 표를 바탕으로 내 표를 만들어내면 된다.  이제 정리가 되었으니까, 두서없는 분류 시스템도 개편을 하고. 정진.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9. 28. 07:39

(그림 클릭하면 커집니다)

 

이 작품은, 미국의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 (Social Realist) 로 알려진 벤 샨 (Ben Shahn)의 '해방 (Liberation)' 이라는 구아시 화 이다.  뉴욕 맨하탄의 '현대 미술과 (Museum of Modern Art)' 소장품으로 마침 운좋게 관람이 가능했다.  미술관에 제공한, 작품 옆의 작은 '이름표'에 나온 정보에 의하면, 이 '해방'이라는 작품은 1945년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면, 이 작품을 읽는/보는 우리는 1945년이라는 해와, '해방'이라는 제목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1945년은 어떤 해인가?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광복의 해'가 된다. 1945년이 단지 한국인들에게만 광복의 해는 아니었다. 2차 대전이 1945년에 끝났을때, 지구상의 여기저기에서 식민지로 신음하던 약소국가들이 '조선'처럼 광복을 맞이하기도 했고,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는 상황 자체가 전쟁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계는 '전쟁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일단 해방을 맞이 한 것이다.

 

그림을 살펴보자. 전쟁의 폐허를 여실히 드러내는 폭격당한 건물이 있고, 그리고 광장에 '뺑뺑이' 기둥이 하나 서있다. 그 뺑뺑이에 아이들 셋이 매달려 있다. 아이들이 뺑뺑이를 타고 있는 배경은 황량하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쌓여있고, 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 듯한 붓의 터치가 느껴진다. 아이들은 창백해 보인다. 명랑하게 웃고 있는 표정도 아니다.

 

이 그림은 우울한가?

절망적인가?

희망적인가?

어떠한가?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건, 해석은 보는 사람의 자유이다.  우리도 작가의 의도로부터 '해방'될 권리는 있으니까.

 

요즘도 뺑뺑이가 있을까?  내가 어릴때, 당시에는 동네에 놀이터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그네나 미끄럼과 같은 '놀이시설'은 오직 학교 운동장에나 가야 구경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파트마다, 골목마다 놀이터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내가 어릴때는 시골에서는 아무데서나 놀면 되었고, 도시에서는 골목에서 놀았다. 학교에 가면 알량하게 서 있는 미끄럼, 그네에는 늘 아이들이 매달려 있어서 그네를 한번 타보기도 쉽지 않았다. 때로, 그네는 수리를 구실로 그냥 묶어 놓기도 했었다. 그리고 뺑뺑이가 있었다.  기둥에 최고리 줄이 몇가닥 매달려 있고, 그 쇠고리 줄을 잡고서 한 방향으로 내쳐 달리다가 발을 공중에 띄우면 원심력에 의해서 몸이 바깥으로, 허공으로 쌩 떳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아! 신나는 뺑뺑이였다!  지금도 학교 운동장에 그 뺑뺑이가 있을까?

 

화집에서 이 그림을 처음 발견 했을때, 나는 '뺑뺑이'를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  우리들은 전국민이 모두 가난했고, 그래서 가난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무수한 가난뱅이 아이들중의 하나였을 뿐.  우리들은 가난한 놀이 시설에도 기죽지 않았다. 우리는 뺑뺑이를 타면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쁨을 맛봤다. 

 

그림속의 아이들이 절망적인가?

우울한가?

 

아, 나는 이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리고 이런 풍경에서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대개 우등생 표시가 붙었지만, 건강상황에는 항상 '영양실조, 빈혈' 이라는 표시가 따라다녔고, '영양실조로 보이니 건강을 신경써주십사' 하는 선생님의 친절한 통신문이 덧붙기도 했었다.  나는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뜨고, 아파보이는 빈민가의 아이였으나, 나는 무럭무럭 자랐고, 새나라의 아이답게 꿈을 꾸며 살지 않았던가?

 

나는 이 그림을 보면 행복하다. 폐허가 된,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무늬는, 아마도 드러나는 벽지이리라. 각기 다른 벽지를 붙이고, 각기 다른 꿈을 갖고 살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다 사라졌고,  그러나 다시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알록달록한 벽은, 어찌보면, 내가 처음 본 서울의 골목골목의 풍경 같기도 하다. 볕이 놓은 날이면, 무허가 골목의 담벼락이나 빨래줄에 내 걸리던 알록달록한 나이롱 이불들.  그 나이롱 이불들은 햇살 아래서 뽀송뽀송 말라갔고, 그날밤 그 집 식구들은 신선한 햇살 냄새가 나는 나이롱 이불을 깔고 덮고 잠이 들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가난은 우리를 파괴하지 못했다. 전쟁도 인간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폭력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수는 있으나 인간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redfox.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