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면 오른편에는 초상화 갤러리가 시작되면서  장군시절의 조지 워싱턴이 서 있고요 (거기서 오른편으로 향하면 초상화 갤러리로 가는 것이고), 그 자리에 서서 왼쪽을 보면 이런 통로가 보입니다.  이 사진은 조지 워싱턴 초상화를 보다가 카메라를 왼편으로 돌려서 찍은 것입니다. 

 

자 머리위로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이라는 표시가 보이지요.  통로 가운데에 미니어쳐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고요, 그 뒤로 중앙에 새 그림이 붙어있습니다.  새 그림 뒤로 통로를 따라 가다 보면 저 뒤에 어두운 색조의 커튼이 드리워진 작은 방이 보이지요? 그 커튼이 있는 방에 풍경화가 한점 있습니다.  알버트 비어슈타드의 초대형 풍경화인데요.  이 통로를 따라서 전시실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곳을 따라 이동하다보면 미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미술사를 눈으로 훑을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 미국 미술사 전체를 보여주는 전시장 입구의 중앙을 장식하는 것이 John James Audubon 의 독수리 그림입니다.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Washington Sea Eagle c. 1836-39

Oil on Canvas

John James Audubon 1785-1851

Born Les Cayes, Haiti, Died New York City (아이티 출생, 뉴욕에서 사망)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미국에서 존 제임스 오드본 (1785-1851) 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Audubon 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미국의 아무 책방에나 가보면 아주 간단한 손바닥만한 책에서부터 두꺼운 하드커버 양장본 책에 이르기까지 '새 관찰'관련 책에 Audubon Society 라는 이름이 박히지 않은 책이 별로 없거든요.  Audubon 이 뭔지 알수 없으나 Audubon Society 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National Audubon Society 라는 이름에 등장하는 Audubon 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오늘 짧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북미 지역에서 '새 그림' 그린 사람 - 하면 그냥 자동으로 오드본을 떠올려도 될 정도로 오드본은 '새'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남미의 아이티 (Haiti)에 발생한 지진으로 아이티나 한국이나 시끌시끌한데요, 존 제임스 오드본은 그 아이티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시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지였지요.  존 제임스 오드본의 아버지는 이 아이티에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프랑스 출신의 선장이었는데요, 그와 아이티 원주민 여인과의 사이에서 존 제임스 오드본이 태어났습니다. 오드본의 생모는 출산 6개월 후에 사망하고, 오드본은 프랑스 낭트의 본가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사생아였죠.) 프랑스의 본가에서 기다리던 프랑스인 어머니와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고, 그는 비교적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어린시절을 보냈던것 같습니다. 그는 주로 들로 산으로 나 돌아다니며 자연 관찰 하는 일을 즐기며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18세 되던 1803년 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의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오드본을 미국으로 보냅니다.  (징집 기피이군요).   그는 필라델피아 인근에 있던 아버지의 농장에서 살다가 이웃 처녀와 결혼을 합니다.  비록 혼혈 사생아로 태어나긴 했으나 부유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사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1819년 그가 파산을 하여 알거지가 되자, 그는 미시시피 강 연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새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합니다. 북미의 모든 새를 다 그리겠다는 포부였지요. 중간에 그가 그린 새 그림을 모두 유실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지만, 그의 노력은 영국의 Ryoal Society in London 에서 인정을 받았고 1827년부터 1838년 사이에 북미의 새 435장을 출판해 냈습니다.   1840년대 초반부터는 북미의 포유류를 모두 그리겠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51년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는 그의 아들인 Victor Gifford Audubon 과 John Woodhouse Audubon 에 의해 완성 됩니다.

 

오드본의 새 그림의 특징은, 한정된 면 안에 새를 거의 실물 크기로 재현해 냈다는 것입니다.  새를 최대한 사실에 부합되도록 정확히, 생생하게 그려내기 위해서 오드번이 기울인 노력은,  한종류의 새를 다치지 않게 여러마리 사냥하여 그 새를 여러가지 각도로 핀으로 고정시켜놓고 스케치를 했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한장의 새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그는 여러마리의 동일한 종류의 새를 희생시켜야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치밀한 관찰을 통해 그려진 그의 새 그림은 아직까지도 북미 지역의 새들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고요, 그의 이러한 철저한 관찰정신을 높이 사서 National Audubon Society (http://www.audubon.org/) 에서도 그의 이름을 기렸고요, 관련단체에서 새 관찰 관련 안내서들도 많이 나옵니다.

 

 

아이티의 지진 사태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하필 이렇게 불행한 일로 인해 요즘 아이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요.  아이티에서 태어난 사람중에 미국의 대표적인 '새 그림 화가'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페이지를 만들어 봤습니다.  프랑스와 아이티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사생아 존 제임스 오드본.  그는 미국이 자랑하는 '새 그림 화가'로 성장하여 아직까지도 그의 독보적 미술세계와 시대를 앞서간 자연 관찰정신이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지요. 

 

혹시 나중에 책방에서 '북미의 새들, 오드본 소사이어티' 뭐 이런 책 표지를 발견하시면, 아이티에서 태어난 한 혼혈 소년을 떠올리시기를.

 

 

 

 

 

 

National Audubon Society Field Guide to North American Birds--E: Eastern Region - Revised Edition

 

 

 

 

National Audubon Society Field Guide to North American Birds--E: Eastern Region - Revised Edition

 

 

 

 

2010년 2월 6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Thomas Jefferson, oil on wood c. 1821

3대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Gilbert Stuart (1755-1828)

2010년 1월 20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길버트 스튜어트의 토마스 제퍼슨 원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2달러 지폐

 

 

 

 

일찌기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조슈아 존슨 Joshua Johnson  (1763-1832)

 

http://americanart.textcube.com/289  미국의 초기 일반인 초상화

페이지에서 미국의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57 페이지에서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이야기를 하면서 Gilbert Stuart (길버트 스튜어트 1755-1828) 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했으므로, 그에 대한 간단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길버트 스튜어트에 대한 이야기 전에 잠깐만 저 위의 조슈아 존슨 (1763-1832)과 길버트 스튜어트 (1755-1828)의 생몰년대에 주목해주시겠습니까?

 

길버트 스튜어트가 8년쯤 먼저 태어나긴 했는데요, 대략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던 두 사람입니다.  조쥬아 존슨은 자유민이 된 흑인 노예 출신이었고, 그러므로 그림 공부란것을 전문적으로 해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길버트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와 영국등지에서 제대로 미술 수업을 받은 사람입니다.  존슨은 스스로 그림을 익히다가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초상화를 그려주는 '민간 초상화가'였고,  스튜어트는 주로 미국의 상류층 (심지어 대통령)의 주문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서 떵떵거리고 살다 간 화가입니다. 

 

워싱턴의 National Gallery of Art (국립 미술관)의 미국미술 관련 갤러리에 가 보면요, 길버트 스튜어트가 제작한 대형 초상화들이며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들이 으리으리하게 진열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으리으리한 초상화 갤러리가 재미가 없어서 쓱! 휙! 보고, 갤러리 풍경조차 사진에 안담고 휙! 나가버리곤 했는데요.  길버트 스튜어트 관련 자료를 찾다보면, 그의 주요 작품들을 많이 볼수 있는 미술관 명단의 상위에 '국립미술관'이 있지요. 여기에 그의 주요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거죠 (물론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도 주요 미술관중의 하나 입니다.).  뭐 한시대에 미국의 대통령급만 (초대부터 6대까지 무려 여섯명의 미국 대통령 초상화를 그가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던 초상화가이니, 재주도 좋았을테고 명성도 높았을터이지요.

 

그런데요, 그보다는 뭐 눈에 잘 안띄지만요, 또다른 갤러리로 이동하면, 그쪽에, 스스로 그림을 익혀서 민간 초상화 업자로 돌아다니던 조슈아 존슨의 초상화 작품들도 번듯번듯하게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쩐지 제 발길은 거기서 맴맴 도는 형상이지요. 나는 왜, 서툰 민화 앞에서 맴맴도는것일까?  왜 잘 그려진 근사한 그림 앞을 쌩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일까?   저는 가끔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데, 저 자신도 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길버트 스튜어트의 그림은 제게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죠슈아 존슨의 초상화에는 뭔가 저를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한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미술사가들이나 미술관의 큐레이터들 역시 조슈아 존슨의 그림을 '걸어 놓을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를 한다는 것이지요.  걸릴만 하니까 걸린거고, 매력이 있으니까 제 발길을 잡아 끄는 것이겠지요.

 

길버트 스튜어트는 (1755-1828)는 로드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방앗간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가서 미술 수업을 받다가 귀국하는데 1775년에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건너가서 12년을 보냅니다.  영국에서 그는 Benjamin West (미국, 풍경화가) 등과 미술 수업을 받는데 이미 영국에서 그는 화가적 소질을 인정 받지요.  그런데 그는 그림재주는 있었으나 돈을 흥청망청 쓰는 버릇 때문에 파산을 맞이하고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1793년에 미국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1796년에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신세가 활짝 피게 된 것이지요.

 

아래 작품이, 꽤나 걸작이라고 하는데요, 화집에 보면 왜 이것이 걸작인지 설명도 구구한데, 사실 저는 이 그림에 특별한 관심도 없거니와, 왜 이것이 걸작인지에 대한 구구한 설명에 대해서도 관심이 안 생깁니다.  그래서, 재미가 안나서 못 쓰겠어요... 뭐 딱히 제 식으로 평가하자면, 이 부인이 머리에 쓴 모자의 레이스 주름이나 리본 혹은 모자의 주름부분이 아름답게 그려진것 같고요, 비단 옷감의 하일라이트 처리가 잘 되어서 비단이 스치는 고운 소리가 나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일단 쳐다보는 저 부인의 시선이 별로 제 맘에 안들어요...  맘에 안드니까, 재미가 없지요. (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 그래도 걸작이라고 하니까 독자들께서 눈요기라도 하시라고 사진을 올립니다.

 

그런데요,  장군시절의 조지 워싱턴을 그렸던 찰스 필은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인이었쟎아요.  길버트 스튜어트는 독립전쟁당시에 영국으로 '피난'을 가서 (말하자면) 적국인 '영국'에서 지내다가, 돈 떨어져서 미국으로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손으로 미국의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리고 떵떵거리고 살다 갔다하니, 뭐랄까, 기분이 명쾌하지가 않습니다. 저, 이 사람 별로 안좋아요.

 

 

 

아무래도, 길버트 스튜어트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조지 워싱턴이나 토마스 제퍼슨이나 죄다 '뽀샤시' 합성처리한 것 같아보여서... 아 당시의 사람들도 실물보다는 더 '환하고 부드럽고 보기 좋은' 초상화를 원했겠지요.  저 역시 누군가 제 초상화를 그린다면 얼굴의 주름도 좀 지워주시고, 뺨도 밝게 채색해주시고 뭐 그런걸 희망할것 같아요.  진실은 참혹하고, 뽀샤시만이 살 길 인거죠 헤헤헤.

 

 

 

아, 나가려다 말고,  미국출신 화가중에 John Singer Sargent  (존 싱어 싸전트)가 있는데요,  이 사람을 미국화가라고 불러야 할지 미국출신 화가라고 불어야 할지 애매합니다.  좀더 딴소리를 하자면, 미국 출신 화가중에 그를 '미국화가'라고 할지 '미국 출신 화가'라고 할지 애매한 사람들이 세사람이 있는데요

 1. John McNeill Whistler (휘슬러)

 2. Mary Cassatt (커셋)

 3. John Singer Sargetn (싸전트)

이렇습니다.

 

휘슬러는 미국태생인데 영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기사작위도 갖고 있습니다. 미국 태생, 영국으로 귀화한 화가를 우리는 미국화가로 불러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커셋은 미국인으로 태어나 성장했는데 유럽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가 유럽에서 죽었습니다.  존 싱어 싸전트는 미국인 부모님 슬하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에서 태어났고 유럽에서 성장했고, 유럽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호적상 미국인이었지만 삶의 근거지가 유럽이었습니다. 그런데 싸전트는 특이해요. 영국에서 기자작위를 주겠다고 영국인으로 등록을 하라고 할때 이를 거절합니다. 자신은 미국인이기때문에 영국의 기사작위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지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호적상 미국인이었던 싸전트는 결국 죽을때까지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킵니다.

 

자 우리는 이 사람들을 미국화가라고 해야 할까요 유럽화가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이 문제는 차차 의논하기로 하고요, 그 존 싱어 싸전트가 남긴 초상화가 아주 많습니다. 제가 보니까 유럽 화가들이요, 주로 부자들의 커미션(청탁)으로 초상화나 뭐 주문한 그림같은거 그려주고 그거 팔아서 연명을 했던것 같습니다.  부자들의 주문을 많이 받는 화가는 부유하게 살면서 조수까지 두고 '사장님' 노릇 하는거고 이런 주문 못받는 화가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 살다가, 나중에 죽은 다음에나 운좋으면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거고.  그런데 싸전트는 부자들의 초상화 주문을 많이 받은 화가였습니다. 그림이 좋으니까요.  그래서 싸전트도 초상화를 많이 그리긴 했는데, 그는 초상화 작업을 '너무 너무 너무' 싫어했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것을 뚜쟁이질(pimp)에 비유를 할 정도로 싫어했대요.  아주 지긋지긋해 했대요.  헤헤헤.

 

제가 뒤늦게 존 싱어 싸전트를 좋아하게 된 경위가 여기에 있지요

(1) 어? 기사작위를 주겠다는데도,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고국 미국을 버리지 않았다고?  사람 심지가 강하네...

(2) 어?  초상화질을 뚜쟁이질에 비유할 정도로 지긋지긋해 했다고?  그럼 그렇지. 초상화라는게 사실...그게..그렇지...(끄덕끄덕)

 

헤헤헤. 싸전트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하기로 하고요.  오죽 길버트 스튜어트 얘기를 쓰기가 싫었으면 엠한 딴소리로 페이지을 채울까요...

 

 

Mrs. Richard Yates, oil on canvas, 1793-1794

2010년 1월 20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2010년 2월 6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21. 09:51

National Gallery of Art 국립 미술관

 

말하자면, 오늘은 Museum Day (박물관 소풍날)이라고 할 만 합니다.  아침에 스미소니안 캐슬의 사무실에  인터뷰가 있었거든요.  인터뷰 끝내고, 놀았지요.

 

우선 지난 토요일에 갔었던 National Gallery of Art 에 갔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고 싶던 것들을 제대로 다 못봤으니까. 전 보고 싶은 것을 못보면 꿈에도 아른거리고,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서...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세상에는 내가 보고싶으나 볼수 없는 것들이 참 많다. 이 세상에는 내가 보고싶으나 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내가 가슴에 한이 맺힌 채로 죽을 것이다...  나는 결국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 스러운 인생 살고 있으니까,  볼 수 있는것들은 가서 보기로 하자.  가서 보기로 하자. 가슴에 자꾸만 한을 쌓지 말자.]  그러니까, 어차피 나간김에 또 간거죠.

 

흠, 국립 미술관이 '홀랑' 뒤집어진 분위기 입니다. 익숙하던 것들이 엉뚱한 곳에 배치되어 있어 영 어색한데다가,  전에 내가 가서 보았던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그림 전시장이 싹 없어지고, 지금 공사중. 아이고 아이고. 보고싶은 내 그림들. 아이고. 곧 새단장을 하고 나타나길 바라는 수 밖에요.

 

National Gallery of Art, 2010년 1월 20일 촬영

휘슬러의 작품들이 모여있는 갤러리에서 도슨트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뭐 세계 명화들, 로댕의 작품들, 골고루 실컷 보고, 서관과 동관 사이의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히 점심도 사 먹고요. 음, 책도 샀어요.  무슨 무슨 'ism (이즘)'들에 관한 정보를 총망라해 놓은 책이군요. 하하. 미술 사조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인데요. 한가지 실수. 책의 편집자가 영국인이고 영국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는 사람이라서,  미술사조에 대한 설명의 영국 미술 중심으로 하는겁니다.  예컨대 제가 미국의 social realism 에 관해서 요즘 쓰고 있쟎아요.  혹시나 싶어서 social realism 쪽을 찾아보니, 영국 미술사 쪽에서 설명을 해 놓은겁니다. 아차 싶었죠.  책 구입 영수증 갖고 있으니까, 카페테리아 옆의 책방에서 반납하고 다른 책 고를수도 있었지만,  기왕에 내 손에 들어온거, 제 안목을 넓히는 뜻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난 너무 미국 미술에 몰두해 있는 나머지, 세계 미술사의 흐름에 무감각해질수도 있어. 그러면 미국미술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안돼. 미국미술은 세계 미술의 일부이니까 말이지.) 

 

 

새로 장만한 책

 

 

점심으로 먹은 스트로베리 나폴레온과 커피. 국립미술관 서관과 동관을 잇는 지하 통로에 위치한 카페테리아. 삼각뿔 모양의 유리 천창으로 흘러들어오는 빛과 폭포. (왼편 구석쪽에 책방의 끝자락이 조금 보입니다.)

 

 

 

국립 미술관 동관 (East Building)은 현대미술관입니다.  제가 호레이스 피핀 페이지를 완결하려고 하는데요, 이 장면을 꼭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쟁쟁한 세계의 20세기 초 현대식 미술품으로 가득찬 동관 전시실에 당당하게 걸려있는, 딱 한점이지만 위풍당당한, 딱 한점이라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현저히 작아서 더욱 기품있어보이는 피핀의 작품입니다. 보세요. 국립미술관이 자랑하는 마티스 갤러리 입구쪽에, 그리고 잭슨 폴락, 로스코, 뉴만등이 기다리는 갤러리 초입에 걸려있는 그림입니다.  피핀이 동관 현대미술이 심장부 같은 지점에 오두마니 걸려있는겁니다.

 

관객들은 이 그림이 무엇인지, 왜 이것이 여기 걸려있는지 잘 알지 못하지요. 오직 '피핀'을 아는 사람만 그 의미를 아는거죠.  심지어 매일 이자리를 지키는 미술관 경비 아저씨 (흑인 경비아저씨)도 이걸 잘 몰라요.  오늘 제가 서서 그림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흑인 경비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걸더라구요. 그래서 피핀에 대해서 그에게 설명해줬죠.  "이 사람 마흔이 넘도록 자신이 화가인줄도 몰랐고, 아무도 신경도 안썼다. 이 사람이 화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을때, 쟁쟁하던 당대의 화가들이 - 나도 저렇게 그릴수 있다면! 하면서 한탄을 할 정도였다. 이 작품이 괜히 여기 있는게 아니다..." 

 

 

일층의 프랑스 소품 갤러리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보석같은 작품들을 실컷 구경했습니다. (사진 편집하다가 에러가 자꾸 발생해서, 오늘은 포기.  다음에, 몇가지 보여드리지요. 오늘 왜 자꾸만 에러가 나는지 모르겠어요.)

 

 

 

 

동관 입구로 나와서 슬슬 자연사 박물관 방향으로 가는길이죠.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이 국립미술관 서관 (현대 이전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는 곳) 건물입니다.  워싱턴 마뉴먼트 오른편으로 둥근 지붕 보이는 곳이 자연사 박물관이지요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

 

 

 

 

 

국립 미술관 조각공원

 

그런데 국립미술관 서관과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 사이에는 '국립 미술관 조각공원'이 있어요.  오늘 사실 그 조각공원에 일부러 들렀는데요. 개념 미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So Lewitt 의 조각작품이 거기 있거든요. 사진 찍었죠.  나중에 Sol Lewitt 소개할때, 그때 보여드릴게요.

 

조각공원에 2009년 하반기에 새로운 조각물이 들어왔나봐요. 근래에 새로 발견한 조각이거든요. 이 나무요. 스테인레스 나무에요.  지난 토요일에는 이 나무에 새 한마리가 앉아있는것도 봤거든요. 저새는 조각인가 아닌가? 궁금해서 한참 쳐다보고 있으니까 휙 날아가더라구요. 오늘은 새가 앉아있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제목하고 작가, 나중에 적어 넣을게요.)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

 

... 자연사 박물관 입니다.  박물관 입구 오른쪽에는 화석이 된, 바위같은 나무덩어리가 있구요, 왼편에는 줄무늬 철 바위가 있지요. 내 상상력으로는 다다르기 힘든 아주 오랜 세월의 역사를 보여주는 두가지, 천연 조형물들이라고 할만한데요 ...  그런데, 내 속에도 그렇게 아주 아주 아주 오래된 '유전자'가 있겠지요. 그 세월보다 더 오래된 유전자가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는거쟎아요...

 

여기는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입니다. 

 

 

 

 

 

 

 

스미소니안 캐슬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에서 정면으로 건너다보는 스미소니안 캐슬 (인포메이션 센터) 입니다.  아침에 저곳 2층에서 스미소니안 직원을 만나 인터뷰를 했었지요....

 

 

 

 

Freer Gallery 프리어 갤러리

 

아시아권 예술품을 전시하는 스미소니안 프리어 갤러리에도 들렀습니다. 제가 일전에 이곳에 전시된 듀잉의 작품들을 소개한 적이 있지요.  이곳은 휘슬러의 작품 전시장입니다.  국립 미술관에서도 휘슬러 작품들을 사진기에 담았고, 이곳에서도 휘슬러의 작품들을 빠짐없이 사진기에 담았지요.  조만간 휘슬러 이야기를 쓰게 되겠지요?

 

 

 

스미소니안 메트로 역

 

그리고, 스미소니안 메트로 스테이션에서 메트로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저기 보이는 초록색 둥근 지붕의 건물. 저기가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 입니다. 음...제가 좋아하는 곳이지요...

 

 

오늘, 미술관에서, 경비 아저씨들이 한가하고 심심하니까,  (하하) 저한테 말걸고, 얘기해주고 그래서  그들만이 알고 있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듣고 그랬는데요... 가령, 잭슨 폴락의 No 1 (1번) 에 '바퀴벌레' '딱정벌레'가 화석처럼 물감을 뒤집어 쓰고 굳어버린채로 있는것을  경비 아저씨님이 몸소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보여주셨지요. 하하. 원래 담배꽁초도 붙어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안보인다며 "찾으러 들면 이상하게 안보이다가, 아무 생각 없을땐 잘보이더라" 하면서 혼자 한탄.  잭슨 폴락 작품에 바퀴벌레 붙은 화석, 사진 찍어왔거든요.  헤헤. 나중에 정리해서 보여드릴게요.  오늘, 이상하게 자꾸 에러가 나서 사진 정리를 잘 못하겠어요.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17. 09:12

 

흐리고 포근한 겨울, 토요일 아침.

국립 미술관으로 소풍을 갑니다.

 

 

 

 

 

 

워싱턴 마뉴먼트 앞에 차를 세워놓고, 씩씩하게 걸어서 갑니다.

가는 길에 조각공원 연못에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나도 작년엔 여기서 스케이트를 탔었지...)

멀리, 중앙에 보이는 허시혼 현대 미술관, 그리고 그 앞에 리히텐쉬타인의 '리본같이 생긴' 노란 조각작품도 보입니다.

 

 

 

 

 

 

 

 

 

걷다가 지쳐서,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카페테리아에서 도시락을 먹습니다. 유부초밥과 뜨거운 차한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오늘의 목표 지점은 '현대미술'이 모여있는 국립 미술관 동쪽 빌딩.  서쪽 빌딩 입구로 들어간후 지하 통로를 통해 동관으로 가는데요. 이곳은 빛의 길 입니다. 지하 통로입니다.  SF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지요.

 

 

 

 

 

 

 

몇가지 현대미술 특별 기획전이 있어서 보러 왔는데,  아쉽게도, 특별전 작품들은 모두 '사진 촬영 금지'라서 눈으로만 구경을 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칼더의 대형 모빌이 반깁니다.  멀리 벽에 보이는 색종이같이 조각조각 붙어있는 것은 Kelly 의 작품입니다.

 

 

 

 

 

몇달만에 가본 것인데, 연말 사이에 미술관 전체 전시장이 대대적으로 새로 조직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서관에 있던 것들이 동관으로 이동했고, 변화가 심하군요. 심지어 이곳에 몇해동안 들락거린 도슨트 조차 이렇게 확 바뀐줄 몰랐다며 정신없어 합니다. (몇해동안 조용하더니 어떤 변화를 모색하는듯 하군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실인데요 (서관에 있던것들이 동관으로 대거 이동). 중앙에 보이는 큰 그림이 모네의 그림이지요. 

 

 

 

 

 

인상파 그림 이어집니다. 오른편에 보이는 것이 모네이고요.  저 안쪽에 보이는 작품들은 세잔느.

 

 

 

 

 

 

제가 좋아하는 영국의 표현주의 작가 작품인데요.  왜 이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는가하면,

   열정이 끓어 넘쳐서, 액자 안에 얌전히 있을수 없어서, 액자 전체를 그림판으로 활용한, 그 파격이 매력적이라 그렇습니다.  이글이글 끓는 난로속의 조개탄 같기도 하고,  수박 같기도 한, 전체적으로 열정적인 분위기가 힘차고 좋습니다.

 

 

 

 

 

벽면 전체, 통유리창. 그 유리창 밖의 워싱턴 디씨 풍경,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이겠지요.

 

 

 

 

 

 

 

 

 

Sol Levit 이라는 개념미술의 창시자가 있거든요. 그 작가의 벽화 작품입니다.  제가 이 작가를 소개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한데요. 때가 되면 짠짜잔~  하고 소개해드리지요.

 

 

 

 

 

 

자, 앤디 와홀과, 리히텐스타인과 로젠퀴스트가 있군요.

 

 

 

 

 

 

아, 드디어 국립미술관 소장의 Horace Pippin 을 만났습니다!~  제가 호레이스 피핀의 페이지를 진작 만들어 놓고도 마무리를 못한 이유가, 이 작품을 제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거든요.  이걸 꼭 본후에 마무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작품을 마티스 전시실 옆에서 발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지요...선구적인 20세기 현대미술 속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호레이스 피핀! 오, 저는 이 전시장을 기획한 큐레이터님을 무조건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왼쪽부터 클라인, 스틸, 잭슨폴락 두점이 보입니다.

 

 

 

 

 

 

마티스 색종이 오려서 만든 작품 전시실 입구입니다. 마티스의 싸인도 근사해보이지요? 마티스의 명랑한 색감을 좋아합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요.  오늘, 덕분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워싱턴 디씨,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동관 (East Building) 에서

 

2010년 1월 16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10. 1. 10. 22:07

 

델라웨어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288) 의 전문 안내인 (docent) 에게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미국이 영국이나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서 출발하여 1776년 독립선언을 하고 신생국으로 성장해 나가쟎아요.  그러니까 그 당시 미국의 문화는 척박했지요.  그야말로 근본은 유럽땅이고, 이들은 식민지의 주민들이니까요.  이 식민지에서 살던 부유층은 자녀들을 유럽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고,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미국땅에서 어떻게든 자력으로 살아나가야 했는데요, 유럽에서 교육받지도 못하고, 미국 내에서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도 못한, 스스로 기술을 연마한 '미술가'들도 있었겠지요. 

 

제가 소개한적이 있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활동했던 조슈아 존슨 (Joshua Johnson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역시 독학으로 그림을 익힌 초상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속의 아이들이 어쩐지 '어른의 이목구비'를 하고 있는 '대갈장군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서툴게 혼자 익힌 그림이므로 아이들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비례는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수 없었던 것이지요.  초기의 초상화가가 조슈아 존슨 뿐만은 아니었고요, 화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채 그냥 집안의 가보로 전해내려오던 초상화들도 많았지요.  그래서 미술관을 산책하다보면 미국 건국 초기의 민간 초상화중에서 '작자미상' 작품이 종종 보입니다.  서툴고, 어설픈.

 

델라웨어 미술관 전문 안내인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당시 (식민지시절과 건국 초기 당시)에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초상화 주문을 받았대요.  그래서 이들을 Tinker (땜쟁이)에 비유를 하더군요. 옛날에 제가 어릴때는 정말 솥단지 깨진고 그런것 땜질해주는 '땜쟁이'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냄비나 솥단지를 수리해줬거든요. 미국에서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초상화쟁이(?)들이 이집저집 다니며 초상화를 주문받을때, 이들이 주문받아 그린것은 오직 '얼굴과 머리통'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뭐 오늘날의 포토샵과 비슷하다고 할만한데요, 미리 화판에 몸과 배경을 다 그려가지고 다니는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신사가 초상화를 주문하면 '신사몸통'을 미리 그려놓은 화판을 꺼내어 거기다가 그 주문한 신사의 얼굴만 그려 넣는 겁니다. 결혼한 여자가 주문을 하면 결혼한 여자의 몸이 그려진 화판에다가 역시 주문자의 얼굴만 그려 넣고요, 아이의 초상화를 주문받으면, 아이의 몸통이 그려진 화판에다가 주문한 아이의 얼굴만 더 그리는겁니다.  그러니까 머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이미 기성품을 만들어서 가지고 다녔다는 것이지요.  사람 몸이야 사회적 신분에 따라서 의상만 다를뿐 비슷비슷 하니까 그냥 대충 몸과 배경을 완성해놓고, 거기다가 사람 얼굴만 비슷하게 맞춰서 그리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릴적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구식' 결혼식을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 친정집 마당에서 전통식으로 혼례를 치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 결혼 기념 사진은 우리가 폐백드릴때 맞춰 입는 그 전통복장의 흑백 사진입니다.  어머니는 또래 친구들중에서 '흰 웨딩드레스'을 입고 결혼 사진을 찍은 것을 무척 부러워하셨습니다. 엄마 소원이 그 흰 서양식 드레스를 입어보는 것이었지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때였나, 아직도 우리집이 셋방살이를 할때였는데,  어느날 우리집에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뒤집어 쓴 우리 엄니와, 양복을 입은 우리 아버지의 웨딩사진 액자'가 하나 생겼습니다.  어린 저는 잘 몰랐지만, 그당시에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아무거나 맘에드는 사진을 주면 그 사진을 서양식 웨딩 사진에 합성을 하여 액자를 만들어다 주는 서비스를 하는 사진쟁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엄마는 그렇게해서라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갖고 싶었었겠지요.  뭐, 얼굴은 우리 엄마, 우리 아빠이니까, 철없는 우리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신기해했습니다. 분명 우리 엄마, 우리 아빠이니까요.   하지만, 그날 저녁에 우리 엄니는 완고한 우리 아버지한테 무섭게 '야단'을 맞았죠 뭐. 하하하.  "결혼식을 번듯하게 잘 해놓고, 뭐가 답답해서 이따위 남의 몸뚱이에 얼굴을 붙여놓고 좋아하는건가. 이게 도대체 뭔가?  (뭐 애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기타등등)" 하하하. 

 

엄마는 단지...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이 한장 갖고 싶었을 뿐인데...

 

아무튼 그 사진은 그 이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민간 초상화쟁이들이 그런식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러 가가호호 돌아다녔다고 하는군요. 물론 이런식의 초상화일망정...가난뱅이는 아예 엄두도 못냈을것이고, 먹고살만한 부유층에서나 가질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따로따로 초상화를 주문할경우, 여자는 왼쪽을 보고있을것이고, 남자는 오른편을 보고 있겠지요. 몸뚱아리는 이미 기성품으로 만들어져있고, 거기에 얼굴만 새로 그렸겠지요.

 

 

 

 

덧붙여서. 미국의 국부로 알려진 조지 워싱턴. 이 사람 초상화도 여기저기 많이 있거든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작가로는 길버트 스튜어트가 가장 유명한데요, 그런데 길버트 스튜어트의 조지워싱턴 초상화 원본은 세가지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그 세가지를 '카피'한 것이라고 합니다. 

 

 

Anna Walraven (애나 워레븐)  c. 1850

작자 미상, Oil on Board

2010년 1월 9일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 소녀의 초상화 배경으로 테이블에 책이 널려있쟎아요. 저것은 그 소녀의 집안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뭐 일단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집안이라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책도 귀했으니까, 집에 책이 저렇게 널려있다는 것은 먹고살만하고 교육도 잘 받았다는 뜻이겠지요. :)

 

이 델라웨어의 소녀 애나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초기 '은판 사진' (daguerreotype - '다기어리어'는 프랑스의 사진술 발명가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입니다. 이 사진은 미국에서 1845년과 1855년 사이에 유행을 했고, 지금 남아있는 은판 사진들이 대개 그당시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이 작자미상이고 연대를 알수 없지만, 소녀가 들고 있는 은판사진을 보면, 그림의 제작년대가 대략 어느정도라고 짐작할만 한것이지요. 이 사진이 초기 은판사진임을 알수 있는 단서는, 당시 은판사진이 대개 이러한 프레임에 담겨 있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도상학'이라는 학문이 있고, '서양화 읽는법' 이라는 책도 한국에 소개된것이 있고, 미국의 미술책 코너에 가 봐도 여러권 발견할수 있는데요. 그림속에 그려진 대상들을 조합해서 그림을 해석해 나가는 것인데요.  가령 비너스가 보고있는 '거울'은 헛된 허상을 의미한다던가, 해골은 '메멘토 모리' 포도는 '풍요와 다산' '개'는 충성 뭐 이런식으로 풀어가는 것인데요.  이런 '상징적 의미'외에도 그림에 나타나는 어떤 역사적 단서를 통해 그림의 배경을 이해하는 방법도 있지요.  그래서, 심심할때 그림을 들여다보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것처럼 재미있기도 해요.  아마 그래서 제가 그림 들여다보는 것을 싫증을 안내고 계속하는 것이겠지요.

 

 

 

 

 

 

2010년 1월 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Ashcan School2010. 1. 7. 02:52

 

The White Ballet (흰 발레) 1904

Oil on Canvas

Everett Shinn (1876-1953)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혹은 Ashcan School)중 한 사람인 Everett Shinn (이브릿 신: 1876-1953) 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갈때마다 지나치면서 눈길을 제대로 줘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얼핏 보니까 '드가' 그림 같더라구요.  '드가 그림인가?' 생각하고 가서 들여다보면 엉뚱한 이름이 걸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드가 흉내낸 그림이군...' 이러고 그냥 지나치고 마는거죠.  뭐 발레 그림을 드가만 그렸을까마는,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발레 그림은 죄다 프랑스의 화가 드가 (Degas) 작품 같은거죠.  발레를 다른 사람이 그리면 드가를 모방한것 같다는 소리나 듣는거죠.  이래서, 뭔가 먼저 잡아서 시작한 사람이 이기는겁니다. 헤헤. (그런것 같죠?)  뭔가 소재를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한가지를 파들어가면,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 되는거죠.  우리가 드가와 발레를 떼어놀수 없게 되는거죠.

 

아무튼 이 그림은 드가의 그림이 아니고 Everett Shinn 의 그림입니다.

 

만약에 제가 '미국미술을 공부하겠다'고 작정하고 차근차근 미국의 화가들을 찾아보는  취미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은 영원히 저의 무시를 당하고 지나갔을겁니다. (가짜 드가그림이라는 딱지를 안고).

 

 

 

 

Everett Shinn (1876-1953) 은 The Eight 화가들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고 하지요. 그리고 뭐 젊은나이에 잦은 이혼으로 '유명'해진 면도 있는것 같습니다. 프랑스를 여행하며 당시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고요.  제 안목으로는 '드가'의 소재를 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신문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한 경력도 있습니다. (당시의 사실주의 화가들 대부분이 신문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생계를 해결하였으므로 짐작 할 만한 일입니다.)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복도 전시장에 걸린 그림을 순서대로 보면

1. 왼쪽벽 - Henri,  맞은편 (오른쪽벽) - Everett Shinn

2. 왼쪽벽 - Rockwell Kent,  맞은편 (오른쪽) - Glackens

3. 왼쪽벽 - George Luks ....

 

이런 순서로 걸려 있는데요.  이곳에 The Eight 을 위시한 당시의 사실주의 화가들 작품이 차례대로 전시되었다고 할만하지요.   미술관에 전시물을 설치할때, 전시 기획자는 나름대로 어떤 '논리'를 가지고 그림을 설치했을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렇게 모아놓은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Everett Shinn 의 작품을 제가 자주 보지 못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려고 합니다.  Everett Shinn 에 대하여 기억할 만한 사항은

 1. The Eight 의 최연소 멤버였다는 점

 2. 따라서 다른 The Eight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뉴욕, 도시의 대중의 삶, 역동적인 장면을 잡아내어 그렸다는 것

 3. 유럽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이정도가 될것 같습니다.

 

다음에 그의 다른 작품을 '사냥'하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하기로 하겠습니다.

 

2010년 1월 6일 RedFox

 

 

 

Backstage Scean (무대 뒤) 1900

Watercolor and Charcoal on Paper mounted on the Board (종이위에 수채와 목탄화)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1900년 작품이니까 Everett Shinn (1876-1953)이 스물네살 청년시절에 그린 그림입니다.  위에 소개한  발레 그림은 1904년 작품이고요.  두 작품 모두 그가 20대때 그린 것이군요.  두가지 작품의 공통점은,  모두 '극장' 풍경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이브릿 신이 무대예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극장 인테리어 작업도 했고,  나중에는 영화 감독도 했다고 합니다. 극장예술을 비롯, 예술의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였군요.

 

2010년 1월 18일 업데이트

 

Posted by Lee Eunmee
Museums2010. 1. 4. 09:18

 

 

 

http://americanart.si.edu/luce/ : 공식 홈페이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루스센터 (Luce Foundation Center)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홀에 들어가면 1층, 2층, 3층의 공간이 있는데, 1층에는 교육실 회의실, 그리고 관객을 위한 테이블들이 놓여있고요, 계단을 따라서 2층 3층을 올라가면 그곳에 '미술품 창고'가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주로 '회화'쪽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이 소장하는  미술의 전분야에 해당되는 작품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데요, 이곳은 말하자면, 전시장과 창고 두가지 기능을 하는 곳입니다. 창고처럼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명품들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해가 바뀌면 이곳에 있던 작품들이 본래 전시장의 넓은 공간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전시장에 있던 작품이 이쪽에 와서 쉬기도 하지요. 저는 실제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주 전시장에서 루스센터 전시실로 옮겨온 것을 목격한적도 있지요. 그러니까, 이곳에 있다고 '별볼일 없는' 작품도 아니랍니다.  가령 조슈아 존슨의 페이지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에 소개된 소녀의 초상화도 이 루스센터 진열장 안에 있지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을 어쩌다 관광하는 차원에서 짧게 지나치는 분들이라면, 여기까지 기웃거릴 시간이 없겠지만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을 볼 여유가 있거나, 이곳을 자주 찾을수 있는 거리에 계시는 분들은 루스 센터도 잊지 말고 찾아보시길.  이곳의 좁다란 통로를 돌면서 숨어있는 작품들을 구경하다보면 '보물찾기'를 하는듯한 긴장감도 느껴지고요, 혼자 있어도 재미가 쏠쏠하여 시간가는줄 모릅니다.  나만의 숨겨진 놀이터에 들어선 기분이 들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그리고 이곳에 걸작들이 숨어있으니까).

 

 

 

 

 

 

 

 

 

 

 

 

 

 

아, (위) 가운데의 사나이 얼굴 그림, 그것이 벤샨의 작품이고요

 

 

 

왼편의 두부부의 초상화가 George Bellows 의 그림이랍니다.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 추가로 내용을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지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2010년 1월 3일 몹시 추운날  redfox.

 

Posted by Lee Eunmee

19세기 미국미술: 토마스 콜 과 허드슨강 미술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3  이전 페이지에서 토마스 콜의 '인생' 시리즈를 살펴 봤습니다.

 

 

19세기 미국 미술가인 Thomas Cole (1801-1848. 토마스 콜)은 미국의 풍경화가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그의 이름 옆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합니다. 오하이오에 정착했던 그는 후에 펜실베니아 미술 학교를 거쳐서 1825년에는 뉴욕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당시에 미국의 지식인들이나 꿈을 가진 화가들이 거쳤던 노선이기도 하지요. 펜실베니아를 거쳐 뉴욕으로 가는 노선.

 

당시 뉴욕주의 허드슨 밸리 (Hudson Valley)라는 지역이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이름이 있었고 그래서 토마스 콜을 위시한 '미술학도'들이 이곳에서 풍경화를 그리거나 익혔습니다.  미국 건국 초기의 미술이라야 '초상화' 아니면 '풍경화'였다고 할만하지요.  후에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허드슨 밸리의 Catskill 에서 결혼하여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콜을 위시하여 허드슨강 기슭에서 풍경화 작업을 하거나, 토마스 콜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국 풍경화가들을 일컬어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 칭하게 됩니다.

 

허드슨강 미술가들은, 대개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미국의 풍경들을 그렸고 (말하자면 진경산수라고 할만하죠),  때로는 이상화된 풍경들도 그렸습니다. 이 허드슨 미술가들에 의해 '거대한 미국의 풍경'들이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되기도 했고요.

 

허드슨강 미술가들중에 널리 알려진, 제가 장차 페이지를 열어 소개를 하고자 하는 화가들은

 1.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슈타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 Frederic Edwin Church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3. Thomas Moran (토마스 모란)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등인데요.

 

이 주요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장차 허드슨강 미술가들 특징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토마스 콜의 풍경화, 그 속에 담긴 우화들

 

 

토마스 콜은 풍경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풍경화속에 성서적 우화들을 담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은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인데요.  '노아의 홍수 뒤에 차분해진 물결'로 해석이 됩니다.  Deluge 는 홍수, 범람을 의미하는 어휘인데, 성서에서 the Deluge 라고 하면 노아의 홍수를 가리킵니다.  "After me, the deluge!"  나 이후에 홍수가 오건 말건 상관없다는 뜻이지요. 나 살아생전에만 무사하면 된다 이거죠. 좀 무책임한 발상이죠. (내가 알게 뭐람).

 

그림의 제목만 보면 토마스 콜은 성서에 담긴 노아의 홍수, 그 이후의 평화를 그린것으로 풀이됩니다만, 또다른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미술관의 그림 안내지에 담긴 내용을 옮기자면, 토마스 콜은 이 그림을 통해 신생국가 미국을 찬양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민자였던 토마스 콜 자신의 삶의 관점을 보여준것은 아니었을까요?)

 

노아의 홍수가 뜻하는 것은 묵은것의 청산, 죄악과 오류의 청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지요. 신생국 아메리카가 유럽의 영향권에서 독립을 하는것 역시 새로운 시작일수 있고, 유럽에서 이민 온 토마스 콜에게도 미국에서의 삶은 새로운 시작일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깊고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여 저 멀리 노오랗게 햇살이 비치는 평화의 바다로, 신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사진 사이즈를 줄여놔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사진 두번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사진 하단의 중앙의 바위 옆에 보시면 희끄무레한 조그만 것이 보이실겁니다. 해골바가지 입니다.  해골바가지.  이 해골바가지는 왜 그려넣은 것일까요?

 

 

노아의 홍수 이후, 새로운 에덴을 향하여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1829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서양 그림을 감상하실때, 서양 그림에 '해골바가지'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라를 막론하고 유럽 화가들은 '해골'을 그려넣기를 즐겼습니다. 이를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할 생명들이라는 것을 기억함) 이라는 용어로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Memento (Remember, 기억하라), Mori (mortal,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리따운 여인이 한손을 해골에 얹고 있는 그림은 어떤 식의 해석이 가능할까요?  인간은 유한하고, 처녀의 아름다움도 유한하다는 메시지이지요.  책상위에 모래시계와 해골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지지요. 시간은 흘러가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그림에 담긴 해골은 어떤 상징을 담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 죽을거다?  뭐 그보다는.... 어떤 것의 종말을 상징할수도 있지요.  구시대는 끝났다. 이 해골을 넘어서서 저 평화로운 신천지로 나아간다는 뜻일수 있지요. 신세계 미국은 New Eden 새로운 에덴동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콜에게.

 

2003년 겨울에 (아 벌써 아주 오래전의 일이구나, 어제 같은데...) 뉴올리안즈에 간적이 있습니다. 태풍 카트리나가 강타하기 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던 곳이었지요. 뉴올리언즈 시가지에 타로 점쟁이 할머니가 앉아있길래, 난생처음으로 길거리에서 타로점을 쳐봤습니다.  아, 제 일기에 그당시 사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그때 제가 고른 패중에 '해골'이 그려진 패가 있었거든요. 크리스마스 휴가로 간 여행이라 '신년운세'를 본것인데, 뭐 해골 패가 나왔던겁니다.  그런데 점쟁이 할머니가 제 패를 들여다보더니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음'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넌 새해에 큰 행운을 맞이할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고통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잘 해내길 바란다. (히히, 점쟁이가 아닌 나 라도 그런 설명은 하겠다) 아 뭐 점쾌가 하도 안좋아서 나를 위로하려고 이러시나 했지요.

 

 

 

2003년 12월 뉴올리언즈의 타로 점쟁이 할머니와 나.

 

그런데, 그 이듬해에 저로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왔지요. 아주 힘든 시험도 쳤고,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섰지요.  죽음은 곧 탄생이다. 새로운 탄생이다.  점쟁이 할머니의 아름다운 설명이 고마웠죠. 결국 인생 이리저리 해석하기 나름인데...

 

아, 예, 그래서 토마스 콜의 그림에 담긴 저 해골은, 죽음,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구시대, 구습의 죽음, 신생국가의 새로운 에덴동산을 희구하는.

 

 

 

아래의 두편의 그림들은 십자가의 순례라는 타이틀의, 기독교 우화 연작의 일부로 보입니다. 그가 1848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작품들이 1847년 1848년에 그려진 것이고보면 이것들이 토마스 콜의 최후의 작품들이었던것 같은데요. 그 자신이 생의 마지막에 다다랗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시작은 끝과 통하고, 끝은 새로운 시작과 닿아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요즈음, 묵은것들을 털어 내시고, 또 새로운 종말을 향해 여행을 떠나야할 때이지요.  올해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수 없으나, 길을 떠나보는거죠.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십자가의 순례, 그 여행의 끝 (십자가와 세상이라는 연작 시리즈를 위한 준비화)

(Study for the series; The Cross and the World) 1846-1848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about 1847)

십자가의 순례,그 여행의 끝.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날,  아름다운 한 해였노라...라고 술회 할수 있기를.

 

2010년 1월 3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National Gallery of Art (워싱턴, 국립 미술관)의 미국미술전시장.

2009년 9월 11일 촬영

(사진들을 두번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실수 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기가 되면 삶에 대해서 이것저것 사색을 할 기회가 많지요.  우리는 인생을 봄-여름-가을-겨울에 비유 하기도 하는데요.  나는 지금 인생의 어디쯤에 있는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요. 옛날 어르신들 말씀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것에는 차례가 있어도, 돌아갈땐 차례가 없대요.  먼저 태어났다고 먼저 죽고, 나중 태어났다고 나중 죽고 그러는게 아니라는거죠.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각자 언제 죽을지 우리는 예측할수 없고, 어쩌면 운명 지어진대로 살아나가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미국화가 Thomas Cole (1801-1848)의 걸작중에 워싱턴 디씨의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미국미술 구역에 전시된 The Voyage of Life (인생의 항해길)이라는 연작품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들어 노년을 맞이하여 돌아갈때까지를 네편의 그림에 담아 놓은 것인데요.

 

각기

 1. The Voyage of Life: Childhood (어린시절)

 2. The Voyage of Life: Youth (청년시절)

 3. The Voyage of Life: Manhood (성년시절)

 4. The Voyage of Life: Old Age (노년기)

 

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네편의 작품을 차례차례 '전체크기'와 '부분화'를  함께 올려보겠습니다.  차례차례 그림을 보시면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림에 사람하나하고 또 다른 존재가 반드시 나옵니다)과 주변 풍경을 살펴보세요.  그러면 저절로 한가지 이야기가 나오게 되겠지요.  어린 꼬마들도 그림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겁니다. 저처럼 중년의 나이가 되거나 저보다 인생을 더 오래 사신 분들이 이 연작을 보면, 생각이 많아지지요.

 

사실 이 연작을 처음 본것은 2005년에 워싱턴을 처음 방문했을때였는데요.  아 벌써 그후로 5년이 더 흐른것이군요.  국립미술관에 갈때마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서 늘 비슷한, 그러나 양상이 조금 다른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아 5년전에 처음 이 작품을 발견하고는 - 국악인 김영임씨의 '회심곡'을 틀어놓으면 잘 어울리겠다 생각을 했었지요.  회심곡....  (서양판 회심곡이지요뭐...)

 

토마스 콜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요. 그림에 대한 이야기도 차차 하기로 하고요. 지금은 그냥, 그림들을 즐기시지요.... 할얘기가 아주 많은것도 같고, 뭐 따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것도 같고요.

 

 

 

 

어린시절

 

 

 

왼편, 동굴과 같은 어두운 곳으로부터 금빛 찬란한 배 한척이 나오고, 어린 아기가 타고 있지요. 아기의 뒷편에 천사같은 존재가 서서 배를 인도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강가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했고요.  먼 하늘은 장미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어린시절은 이렇게 느릿하고 명랑하게 흐르는 시간과, 신비감으로 가득차 있었지요.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갔어요. 제가 기억하는 인생 최초의 '먼 모험 여행'은 다섯살때, 이웃집의 나보다 한살 더 많았던 사내아이와 어른 걸음으로 20분쯤 가면 닿게 되는, 동네 초등학교까지의 길이었습니다.  그 학교에 나보다 대여섯살 많았던 고모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아침메 밥먹고나서 할일이 없고 심심했던 저는 이웃집 유순이와 함께 모의를 한거죠.

 

우리도 학교에 가보자. 유순아 너 학교가는길 알어?

응 알어. (유순이는 나보다 한살이나 더 많았고, 세상에 대해서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요)

학교에 가서 고모를 만나자.

그러자.

 

유순이의 부모님은 유순이가 어딜 돌아다니건 걱정을 하지 않았고 (유순이는 씩씩하고 똑똑하니까),  나의 부모님은 멀리 서울에 있었던거죠. 아무도 내가 어딜 돌아다니건 신경쓰지 않았던거고, 나는 나름대로 거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오전의 태양아래, 우리 동네 경계를 넘어서 한없이, 한없이 먼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우리집 마당에서서 돌아보면 보이는 마을의 집과, 산과, 개울과, 개울건너 앞마을의 집들뿐이었는데, 그 경계를 넘어서서, 내가 모르는 세상을 향해 유순이는 나를 이끌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계절이 가을이었던걸까요?  내가 마을을 벗어나서, 모르는 길을 걸으며 겁이 나서 칭칭대니까, 겨우 나보다 한살 더 많았던 유순이가 길가 밭에서 '무'를 하나 뽑아다가 이빨로 그 무 껍질을 벗겨서 우선 제가 몇입 먹고 나에게 주었지요. 이거 먹어라. 달다. 울지마. 내가 학교가는길 알어.

 

나는 정말, 온종일, 온종일, 영원처럼 오래오래 걸어서 초등학교에 도착했던것 같습니다.  학교 마당 구석에서 기가 죽어서 얌전히 있으려니, 마침 쉬는시간이었던지, 아니면 체육시간이었던지 양갈래로 길게 머리를 땋은, 까만 바지차림의 우리 막내고모가 학교 마당에 나왔다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달려왔지요.  "야! 니가 여기를 어떻게 왔니! 하하하. 여기를 왔구나!"  우리 막내고모는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했지요. (그래봤자, 우리 고모도 뭐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겠군요).

 

그날의 햇살이 생각납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햇살. 그 먼 여행. 그 멀고도 긴 하루.

 

우리의 시간은 느릿하게 반짝이며 흘러갔고, 세상은 신기함으로 가득차 있었지요.

 

 

 

 

제 학부시절 전공이 영어영문학이다보니, 운좋게도 대학시절에 영문학의 '기초 과정'들을 착실히 이수할수 있었는데요.  2학년이 되어 전공과목으로 처음 이수한 것이 '영시'였습니다. 중세 베오울프 맛보기를 거쳐 주로 낭만주의 영시를 강독했지요.  워즈워드의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어린시절의 기억을 통해 영생불멸을 깨닫고 부르는 노래)라는 시가 있는데요, 워즈워드는 어린 아이를 '보는자 Seer' '자연의 철학자 Philosopher'에 비유하여 인간이 태어날때부터 갖는 예지력, 천재성을 노래하지요.  인간이 천국에서 지상에 올때 천국의 광휘와 지혜를 갖고 오는데, 이승에서 살면서 그런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 빛이 돌려지지 않는다해도 서러워 말지니, 차라리 그 속깊이 간직된 빛을...' 이런 구절도 이 시의 일부이고요.

 

사실 이 '인생의 항로' 그림은 워즈워드의 '영생불사'시와 잘 어울리지요. (참고: http://www.bartleby.com/145/ww331.html )

 

전체 11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시인데 첫 두연만 읽으면서 음미해볼까요

 

 

                           http://www.bartleby.com/145/ww331.html )  

 

                    I

          THERE was a time when meadow, grove, and stream,
          The earth, and every common sight,
                    To me did seem
                  Apparelled in celestial light,
          The glory and the freshness of a dream.
          It is not now as it hath been of yore;--
                  Turn wheresoe'er I may,
                    By night or day,
          The things which I have seen I now can see no more.

 

풀밭, 언덕, 그리고 개울이

대지가, 그리고 일상의 평범한 것들이

천상의 빛에 둘러싸여 있는것처럼 보이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지.

그 시절의

빛나던 꿈과 그 꿈의 신선함은

이제 보이지 않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밤낮으로 보던 것들을

이제는 더이상 볼수 없어라

 


                                   II

                  The Rainbow comes and goes,
                  And lovely is the Rose,
                  The Moon doth with delight
            Look round her when the heavens are bare,
                  Waters on a starry night
                  Are beautiful and fair;
              The sunshine is a glorious birth;
              But yet I know, where'er I go,
          That there hath past away a glory from the earth.

 

무지개는 왔다가 사라지고

장미는 아름답구나

하늘이 개이면

달은 기쁨에차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별이 빛나는 밤

개울들은 아름답고도 고와라

햇살은 영광스런 탄생이라네

하지만 이제는 안다네

내가 어디엘 가도

그 광휘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다네

 

(번역; RedFox)

 

 

시인 워즈워드가 1803년에서 1806년사이에 쓴 시입니다.  나이가 들어 어린시절을 회고해보니 어린시절에는 모든것이 신기함, 빛으로 가득했었는데, 이제는 사물은 그대로 있어도 그 빛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지요... 워즈워드는 시를 풀어가면서 어린시절, 어린아이, 자연에 대한 '천국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그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냅니다.  그리고나서 그러면, 이제 그런것을 잃은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뭐 그런 이야기도 마지막에 나오는데요.  결론은 '기억'이죠.  우리에겐 회상할수 있는 능력이 아직 남아있고, 회상의 능력을 토대로 삶을 깊게 들여다볼수 있다는 위로를 하지요.

 

이 그림은 토마스콜 (1801-1849) 이 39세인 1840년에 그린것입니다. 그 8년후에 화가는 이른나이에 천국으로 가버렸는데요, 토마스콜의 성년기 작품입니다. 청년이 이런 그림들을 그리기는 어려울것 같고요. 당시에 나이 마흔이면 스스로도 자신의 '성년'으로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어린시절, 비가오면 폭우처럼, 눈이 오면 폭설처럼 여겨지던 시절, 세상은 놀라움으로 가득차있었지요.


 

 

 

청년시절

 

 

 

자, 이제 청년시절에 이르렀습니다.  멀린 (그림 왼편 상단) 하늘에 희게 빛나는 성이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 ).  청년은 여태까지 호위해주던 수호천사 따위 안중에 없다는 듯 그 하늘의 성을 향합니다. 수호천사는 배에서 내려 강 기슭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군요.

 

우리에게 저 하늘의 성은 무엇이었을까요?

 

희망과 기대에 찬 미래였을까요?

고시를 통과하여 출세를 해보겠다는 야망이었을까요?

군사정권을 몰아내고 진정한 민주화를 실현시키겠다는 이상 이었을까요?

남북통일이었나요?

아름다운 농장을 일구고 싶었나요?

착한 애인을 만나서 공중정원같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싶었나요?

먼나라로 유학을 하여 나도 알수없는 어떤 사람이 되어 살고 싶다는 것이었을까요?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던 시절 저의 꿈은 아마도 그것이었던것 같습니다. 멀리 떠나고 싶었고, 유학을 가고 싶었고, 현실은 멀리 떠나는것도 유학을 가는것도 불가능하다며 빙글거리며 발목을 잡았던것 같아요.) 아무튼 우리는 떠나고 싶어하죠. 부모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죠.

 

그런데 그 공중의 성으로 향한 물가에는 험준한 산이 기다리고 있고요, 그 물길을 계속따라가면, (수호천사 뒤로 보이는 협곡을 보십시오) 알수없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지요.

 

 

 

 

 

 

 

 

 

성년시절

 

 

저는 지금 '성년시절'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제가 판단을 해야하고, 저의 판단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내 삶보다는 내주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야하고, 고비고비마다 이것이 나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지 아닌지도 판단을 해야 합니다. 시간은 격류처럼 흐릅니다.

 

지난 연말에 오랫만에 지인을 만났는데, 그분이 "바쁘시죠?"하고 늘 인사로 묻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아이고, 한해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신이 없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냥 한해가 갔는데, 뭐 아무것도 한것이 없어요..."하고 대꾸를 했지요.  그분 말씀이, "나이만큼 세월의 속도가 빨라져요. 30대는 시속 30마일, 40대는 40마일이에요... 속도 초월하지 마시고 천천히 가세요."  그러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후딱후딱 지나간대요. 그 말씀이 맞는듯하여, 이것이 나만 느끼는 속도가 아니구나, 모두들 비슷하게 느끼는구나 했습니다. (그러면 또 위안이 되지요. 모두들 나와 비슷한거구나,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자, 아까 청춘시절의 강물을 따라 흘렀을때 맞닥뜨리게 되는 협곡의 정체가 여기서 드러나죠. 물살을 미친듯이 빠르게 흐르고, 배는 급물살과 바위사이를 통과해야만 하지요. 미친것은 물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죠. 미치겠는거죠.

 

 

 

 

 

그런데, 저 어두운 하늘구석에 희게 빛나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까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내버렸던 나의 수호천사인걸까요?  괴로움속을 서성일때, 단테를 돌봤던 베아트리체인걸까요?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있었는데, 지금 나에겐 무엇이, 누가 있을까?

 

 

 

 

미친 세월을, 급 물살을 견디며 바위틈을 통과해야 할때, 우리는 신앙을 가진사람이건 아니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토마스 콜은 기독교 바이블의 이야기를 많이 그린 화가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지처가 필요하죠.  대상이 누구이건간에 간절히 간절히 어떤 염원을 품게 되겠지요. 그러한 염원이 없이는 이런 물살을 타고 넘기가 힘이 들지요. 혹은 이 물살을 맞기 싫으니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을 할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 바위의 협곡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요? 저 너머에 대양이 보입니다. 그렇죠?

 

 

 

 

 

노년시절

 

 

자 이제 협곡을 통과하여 물결 잔잔한 바다에 다다랗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몸도 늙고 지쳤습니다. 성년시절까지는 뱃머리 장식이 붙어있더니, 이제 뱃머리 장식도 사라지고 없군요. 사람도, 배도 늙고 지치고 망가졌습니다. 망가진 뱃머리 장식대신에, 노인을 이끄는 빛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멀리에서 그를 맞이하는 또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어서 오라고 손짓 하고 있지요?

 

이렇게 우리의 삶은 '하루'와 같고, 하루는 '일생'과 같기도 합니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 마치 평생을 다시 시작하듯 그렇게 하루를 맞이하고, 마치 평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잠이 든다면 좋을것도 같습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살면서 힘이 들고 괴로울때, 그 물살너머에 평화로운 바다가 기다리고 있음을 상상하면 그런대로 다시 힘을 얻을수 있을것도 같고요.

 

저도 아직 노년을 살아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노년이 평화롭기를,  지상의 노인들이 평화로우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아, 토마스콜은 47세로 마감을 했는데요, 그는 노년이 오기전 지상에서 사라진것처럼 보이네요. (아니, 노년이 나이와 상관이 있는것은 아니지요. 혹자는 평생 청춘으로 혹자는 일찌감치 노년으로 살아갈지도 모르지요.)

 

 

 

 

 

 

 

 

 

세상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겪는 일들속에서 어떤 섭리를 발견하고자 노력한다면,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럭저럭 세상을 견뎌나갈수 있을것도 같군요.  사랑할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으며, 얻건 잃건 그 사이에 우리 삶의 강물은 흘러 흘러 가는 것이지요.

 

          The Clouds that gather round the setting sun
          Do take a sober colouring from an eye
          That hath kept watch o'er man's mortality;
          Another race hath been, and other palms are won.
          Thanks to the human heart by which we live,
          Thanks to its tenderness, its joys, and fears,
          To me the meanest flower that blows can give
          Thoughts that do often lie too deep for tears.
                                                        

지는 해의 주위로 모여드는 구름은

인간의 유한성을 지켜본 시선으로부터

근엄한 빛을 앗아간다

또하나의 경주는 끝났다. 월계관들이 주어졌다.

우리가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심성이 있어

그 심성의 부드러움과, 유쾌함과 두려움이 있어

아무리 보잘것없이 피어나는 꽃이라 할지라도

눈물조차 흘릴수 없도록 깊은 상념을 내게 선사할수 있게 되는 것이라.

 

(영생불사, 마지막 부분)

 

 

 

 

 

 

강물을 보러 나가고 싶은데, 날이 꽁꽁 얼어서 나갈수가 없어, 마음속의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늘 평안하시길. (협곡을 흐를때조차).

 

2010년 1월 3일 (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2010. 1. 1. 13:26

자화상 (1928)

목탄, 콘테, 연필, 종이

49.1 x 64.3 cm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2009년 12월 29일 촬영

 

 

 

미국 1930년대 지역주의 (Regionalism)의 대표적인 세명의 화가중의 하나인 존 스튜어트 커리 (John Steuart Curry 1897-1946)는 미 중서부 캔자스 주의 부유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의 부모님들이 대학교육을 마치고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정도였으니까, 고학력의 부유한 집안이었음을 짐작해 볼수 있겠습니다. 그는 어릴때부터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미술 개인 교습을 받을수 있었고, 시카고 미술학교를 거쳐서, 펜실베니아의 제네바 컬리지에서도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한때 그는 Boy's Life 를 위시한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한 화가들이 참 많아요. 사실주의 화가들은 대개 일러스트레이션을 생업의 수단으로 거쳐갔을 것으로 짐작 됩니다.)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1926년에 파리로 건너가 일년간 유럽의 미술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는 특히 꾸르베와 도미에, 티티안과 루벤스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벤스의 경우, 어릴때 그의 집에 루벤스의 그림 복제품이 장식되어 있어 그것을 보고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뉴욕과 커넥티컷에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32년에는 아내 클라라가 사망합니다.  그 자신 역시 위스컨신 주립대에서 미술 교수로 재직하던 중 48세인 1946년에 심장마비로 요절을 하게 되는데요, 일찌기 부인을 잃고, 요절을 한 화가라서 그런지  그의 작품을 소장하는 미술관들이 많지 않군요. (웹에서 그의 작품들을 검색해보면 '아 참 좋다!'라고 감탄할 만한 그림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제가 가능하면 제 눈으로 본 작품만을 이야기하기로 정했기 때문에,...아쉽지만...음...)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미드웨스트의 농촌과 풍습, 그리고 가축들이 소재가 되었거나, 사회성 강한 주제, 반전 의식도 발견 됩니다. 중부에서 벌어진 흑인 학대나 린치에 대한 고발성 강한 작품들도 있고, 당시 중서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를 했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의 고향 캔자스나 다른 중서부 지방 사람들은 존 커리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가 그린 중서부의 삶의 모습이 어쩐지 자신들을 우스개로 만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지요. 가령, 캔자스에서 흑인 린치하는 것을 그려내면, 뉴욕의 관객들은 그 작품을 보면서 감탄을 하겠지만, 캔자스 사람들은 '우리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타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괘씸하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래서 존 커리는 최후까지도 고향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향 캔자스가 아닌 위스콘신주에서 사망했어요.)

 

아이아스의 이중성

 

 

 

Ajax (1936-37) 아이아스

Oil on Canvas

122.5 x 92 cm

 

Ajax 라는 이 그림은 일견 평화로운 초원의 황소 한마리 그림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자주 지나치곤 했지만, 이 평화로운 그림이 왜 여기 걸려있는지, 왜 이 그림이 박물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제게는 그냥 너무나 평화로워서 개성없고 지루한 그림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래서 늘 '무심코' 지나치다가 하필 이 그림의 작가가 John Stuart Curry 라서 (마침 그의 작품세계를 공부하던 중이라서) 관심을 갖고 들여다 보게 되었지요.  (모르면 봐도 모릅니다. 관심이 생겨서 들여다보면 뭔가 보이기 시작하는거죠).

 

그런데 그림 옆에 붙어있는 작품 설명을 보니, 이 그림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지루한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그림에 달린 '제목'과  그림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 때문입니다.

 

제목 Ajaz (아이아스)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입니다.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던 그리스 장군중에 아이아스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리스의 명장 아킬레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품을 사이에 두고 오딧세우스와 아이아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결국 아킬레스의 유품은 오딧세우스에게 넘어가고, 아이아스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미쳐버려서 들판의 양떼를 오딧세우스와 그 부하들이라고 생각하고 몰살을 시켜버립니다.  그리고는 정신이 돌아온후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자살을 하고 말지요. 

 

그러면 '아이아스' 이야기와 이 한가로운 초원의 황소 한마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이 소가 아이아스란 말인가요?  그래서 뭐?  궁금증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요, 미술관 복도에 있는 이 그림 바로 옆에 아래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Dust Bowl (흙먼지 폭풍)입니다.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경제적인 난국을 겪고 있었는데, 미국의 중부에서는 엎친데 겹친 격으로 평원지대를 뒤엎는 흙먼지 바람과 한파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날이 건조해지니 흙먼지가 폭풍처럼 평원을 뒤덮고, 날은 더욱 가물어지고. 푸르던 평야가 하루 아침에 흙먼지로 뒤덮이며 사막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1930년대에 이런 현상이 여러차례 중서부를 강타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Dust Bowl 1933

Oil on Canvas

Alexandere Hogue

 

 

바로 이렇게 피폐해진 중서부 평야지대의 삶의 모습을 이 한장의 그림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경제도 안좋고, 흙먼지 바람으로 농작물은 말라죽고, 죽어라죽어라 하는거죠. 미국인들에게 1930년대는 도시나 농촌이나 참혹했던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저위의 '아이아스'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수 있게 됩니다. 아이아스는 (1936-7)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중서부 평원지대가 '사막'처럼 변화하는 것을 지켜본 화가는 신화속의 미친영웅 '아이아스'를 떠올렸나봅니다. 아이아스는 영웅이기도 했고, 미쳐 날뛰며 자기편 영웅들을 죽이려다가 가축들을 몰살시킨 인물입니다.  화가에게 미드웨스트의 평원은 평화롭고 순한 한마리 황소처럼 사람들에게 곡물과 풍요를 선사하기도 하지만, 그 소가 미쳐날뛰면 주위 모든이들을 해치게 됩니다. 흙먼지로 뒤덮여 사막처럼 변해버린 평원은 미쳐 날뛰는 아이아스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그러면 아이아스가 미쳐날뛰지 않게 사전에 달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작가는 아이아스의 비유를 들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저는 또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똑같은 그림이 1930년대가 아닌 2000년대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저 순한 소를 화나게 하면 안되지요. 소가 평화롭게 살수 있도록 하는것이 우리 자신을 돕는 길일 것입니다. 이것은 제 생각이고요, 각자 자신의 해답을 찾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런데 토마스 하트 벤튼의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252/trackback/ ) 아킬로스와 헤라클레스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벤튼의 벽화를 소개한 바 있지요.  중부에 30년대에 강타한 흙먼지와 한발 사태를 보면 미조리강의 개발의 역사적 의미를 짐작할수 있게 됩니다. 반복적인 흙먼지와 가뭄으로 황폐해져가는 평원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었던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1937년에 그려진 커리의 Ajax에 등장했던 소가, 십년후 벤튼의 그림에서 '강의신'으로 새롭게 그려진것 같기도 하지요?  :)  음, 이 그림들이 이렇게도 연결이 되는군요... 

 

 

 

 

존 브라운은 광인인가 의인인가?

 

 

아래 그림은 원화가 아니고요, 제가 하퍼스 페리에 갔을때 존 브라운 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실제 벽화 크기의 카피본을 사진 촬영한 것입니다. 제목은 The Tragic Prelude (비극적 서곡).  이 그림의 원본은 캔자스 Statehouse의 벽화라고 합니다. 벽화와 똑같은 크기의 카피본이 존 브라운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고요.

 

 

존 브라운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해방을 부르짖으며 정부군과 전쟁을 벌였던 사나이 입니다. 백인 입니다. 그는 종교적 신념에 불타서 흑인 노예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것인데요, 결국 하퍼스 페리에서 붙잡혀 사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당시의 지식인들, 가령 콩코드 출신의 Emerson 이나 Thoreau 와 같은 초절주의 철학자들은 존 브라운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는데요, 미국 역사에서 그에대한 평가는 '광인'과 '의인'사이에서 갈팡질팡 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노예해방을 위해 노력한 것은 가상하나, 그 방법이 적법하지 않았으므로 마냥 영웅으로 치켜주기가 위험한 것이지요.  이건 뭐 무장봉기, 폭동과도 같았으므로 이를 '영웅시'할 경우 국가의 법체계가 위협을 받게 되겠지요.  존 브라운에 대해서 제가 상세히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더이상 논할경우 제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커지므로 존 브라운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접겠습니다.

 

존 브라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떠하건, 존 스튜어트 커리에게 존 브라운은 영웅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손에 성경을, 한손에 장총을 들고 서서 호령하는 존 브라운의 모습은 마치 제가 어릴때 본 영화 '십계'속의 '모세' 할아버지를 연상케 합니다. :)  존 브라운이 혁명적으로 노예해방을 진두지휘하며 돌아다닌 구역이 캔자스, 미소리, 버지니아주였던 고로 캔자스주에서 그를 기념하는 벽화 작업을 했던 모양입니다.

 

 

 

The Tragic Prelude (1938-1940)

Kansas Statehouse 벽화

실제 벽화는 아니고,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하퍼스 페리에 있는 존 브라운 기념관 벽에 있던 복제 사진을 촬영 (2009년 11월 15일)

참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176

 

 

 

 

 

 

 

 

반전인가 전쟁 옹호인가?

 

 

 

Our Good Earth (1942) 우리들의 위대한 대지

Water Color on Illustration Board

27.9 x 34 cm

2009년 12월 2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2차 대전 당시 '전쟁기금 모금'을 위한 홍보용 그림을 주문 받았을때 우리들의 커리가 그린 전쟁 홍보를 위한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한 농부가 밀밭 가운데에 우뚝 서있고, 한손에는 밀대를 한웅큼 쥐고 있고, 그의 곁에 소녀와 소년이 있습니다. 그의 왼손이 소년의 오른손을 꼭 쥐고 있군요.  농사를 짓는 일도 전쟁을 돕는데 아주 중요하다는 메시지라고 하는데요.  제가 스미소니안에서 발견한 이 작은 그림은 "Our Good Earth - Keep it Ours (우리들의 위대한 대지 - 우리의 땅을 지키자!)" 이런 선전문구를 새긴 포스터의 밑그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그림이 전쟁 지지를 위한 그림이었는지,  우리가 정말 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니라 '농사짓는일'이라는 메시지인지 헛갈리는 구석도 있습니다. 왜 제가 헛갈려하는가하면 여러 화집에서 발견한 또다른 그림 때문인데요.

 

Parade to War (1938)

 

미술사책을 들여다보면 존 스튜어트 커리와 관련된 장에서 주로 소개 되는 작품이 이 그림 입니다. 출전 행진 (Parade to War). 저는 실재 그림을 본 바 없고, 화집에서 본 것이 전부인데요. 전쟁터로 나가기 위한 군사들의 행진 장면입니다. 구경하는 아이들은 신이나서 달음질치는데, 흰 테이프들의휘날리는 가운데 줄을 서서 행진하는 군인들은 모두 유령같아 보입니다. 해골들이 옷을 입고 행진하는것처럼 보입니다.  그림 왼편의 어느 여인이 기도하듯 입을 가린채 걸어가는데, 마치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절망하는 어머니 같습니다.  이 그림은 유령의 도시 풍경 같기도 합니다. 1938년에 그려진 그림이라는데, 이 당시에 한국에서도 식민지땅의 조선인들이 조선의 청년들과 장년 남성들이 학도병으로, 징용으로 이렇게 끌려가 죽음을 맞이 했을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여성들도 정신대로 끌려갔지요.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반전' 그림입니다. 1938년에 이런 반전 메시지가 분명한 그림을 그린 존 커리가, 1942년에 전쟁 홍보용 그림을 위탁 받았을때, 그려 낸 그림이 '우리들의 위대한 대지' 그림입니다. 존 커리가 정말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전쟁 홍보였을까요?  ...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존 스튜어트 커리는

1. 미드웨스트 농촌 농민, 서민의 풍경을 그렸으며

2.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렸고

3. 공공벽화작업도 활발히 하였으며

4. 신화와 역사의 만남을 시도했고

5. 일러스트레이션, 벽화, 일반 회화등 다양한 장르의 활동을 했음을 짐작할만하며

6. 반전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존 스튜어트 커리, 이 화가는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매력적인 작품들을 많이 갖고 있는데요, 제가 직접 눈으로 본 작품이 많지 않아 대략 이쯤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상으로 미국의 지역주의 3대 화가로 알려진 Grant Wood, Thomas Hart Benton 그리고 John Steuart Curry 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다음엔 어디로 가나...과거로 갈까요 아니면 미래로 갈까요... 랄랄~

 

 

 

2009년 12월 31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2010. 1. 1. 02:14

미국의 1930년대 지역주의 (Regionalism) 3대 화가중 한명으로 알려진 토마스 하트 벤튼 (Thomas Hart Benton 1889-1971)은  Grant Wood 와 John Curry 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미드웨스트 (미조리 주)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하원의원, 숙부가 상원의원이었다니 유복한 정치인 집안의 귀공자였던 것 같습니다.  1907년 시카고 미술학교 (Chicago Institute of Art)에서 미술 수업을 한 후에 1909년 프랑스로 건너가 줄리엥 아카데미에서 미술 수업을 계속합니다.  미술 수업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소속으로 근무를 하고 1920년에 뉴욕으로 돌아가 미술 활동을 펼치면서, 당시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현대 추상미술을 등진채 사실주의 미술을 펼쳐 나갑니다.  설에 의하면 초기에 그는 추상미술 작업을 했지만, 도통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후에 그는 고향인 미조리주로 돌아가 신화와 사실주의가 만나는 미술 작업을 계속하게 됩니다.

 

자화상 (1927)

 

이 자화상은 벤튼이 아내와 자신을 직접 그린것입니다. 매사추세츠주의 South Beach 에 있는 작은 섬이었는데 이 한적한 곳에서 미술작업을 하면서 그가 잠시 관심을 보였던 현대 추상예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사실주의적 작업으로 완전히 옮겨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이 단순하면서 그만큼 '힘'이 느껴지지요. (남자가 좀,뭐랄까, 마초적인 인상을 주지만...뭐...내 남자도 아닌데, 멋대로 살게 내버려두지요..귀여운 마초랄까...) 그가 뉴욕을 기반으로 20여년간 활동하는 동안 그는 매년 여름마다 이 Matha's Vineyard 라는 휴양지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화상 (아내 리타와 함께) 1922

National Portrait Gallery, Smithsonian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은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 박물관과 함께 있습니다.

동일한 장소의 일부를 국립미술관으로 일부를 초상화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Chillmark and Matha's Vineyard (마사의포도원섬과 칠마크 마을)

 

 

1920년부터 1975년 그가 사망할때까지, 벤튼과 그의 아내는 여름이면 매사추세츠 남쪽의 Matha's Vineyard (마사의 포도원)이라는 이름의 섬에 있는 Chillmark (칠마크) 마을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아래의 그림 두장은 바로 그곳의 사람들과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People of Chilmark (Figure Composition) 칠마크 사람들 (인물구성) 1920

Oil on Canvas

2009년 12월 스미소니안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Matha's Vineyard (마사의 포도원) c.1925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디씨의 코코란 갤러리에서 촬영

 

 

File:Martha's Vineyard map.png

http://en.wikipedia.org/wiki/File:Martha%27s_Vineyard_map.png

 

 

 

농장 길

 

 

그는 Art Student League of New York 와 Kansas City Art Institute 등지에서 미술 교육을 하였습니다. 그가 키운 제자중에 훗날 스승을 능가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이룩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흩뿌리기'의 대가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입니다.  잭슨 폴락의 초기 작품중에 토마스 밴튼의 그림과 분위기가 비슷한 것이 발견됩니다.  토마스 벤튼이 유럽에서 현대 추상미술 사조의 영향을 입고 와서 추상화 작업을 하다가 집어치고 사실주의 작품들로 그의 그림을 완성시켰다면,  잭슨 폴락은 그러한 '스승'의 영향아래 사실주의적 미술로 시작을 하여 '어마어마하고 혼미하기까지 한' 자신만의 세상을 완성시킨후 지구를 떠났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을 돌고 도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늘아래 새로운것은 없지만, 또한, 하늘아래 반복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늘 기존의 무엇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죽고, 그 바탕위에 또 새로운것이 태어나는 것이지요.

 

 

 

 

 

 

Plantation Road  (농장 길) 1944-45

Oil and Tempera on Canvas mounted on Plywood

2009년 11월 6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잭슨 폴락의 그림

 

 

밀밭: 황금의 이상사회

 

 

 

Wheat (밀) 1967

53.3 x 50.8 cm (가로세로)

Oil on Wood

 

 

이 '밀밭' 작품이 걸려있는 전시장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아래의 사진에서) 폴락의 대형 벽화가 걸려있는 전시장, 그 벽화 왼편 으로 구석에 아주 자그마한 그림 하나가 걸려있지요. 그러니까 벽화와 창문 사이에 걸려있는 껌딱지 같이 작은 그림이요. 그것이 바로 이 '밀밭' 그림입니다. 그가 1971년에 사망했으니까, 그가 78세에 그린, 거의 말기의 작품이라고 할만한데요.  한세상 전투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취하여 공공미술적 벽화 작업도 하고, 뚜렷한 자기 주관을 펼치면서 살았던, 지역주의 화가의 기수로 알려진 이 화가가 '노년'이 되어, 78세의 나이에 그린 그림임을 감안하고 보시면 그림에서 뭔가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낼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림 하단에 보시면, (시골에서 농사지은분들 이 그림 보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특히, 벼 베고 그러신 분들), 낫으로 베어낸 밀의 밑둥이 고르게 남아있습니다. 기계로 베었는지 높이가 일정합니다. 사람이 낫으로 베면 밑둥 높이가 들쭉날쭉 하지요. 그리고 그 밑둥 사이로 밀싹이 새로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한 세대가 가면 또 한세대가 솟아 나오지요.

 

밀대를 보겠습니다. 밀은 한웅큼씩 무리를 지어 고르게 자라났습니다. 간혹 부러져 기울어진 밀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조금씩 무리를 지어서 비슷한 크기로 자라고 비슷하게 열매를 맺었습니다. 밀대 너머로 끝없이 반복되는 밀의 고랑이 보입니다.  이 그림은 매우 사실적으로,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면서도, 사실 너머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항웅큼씩 모여서, 서로 의자하여 서 있는 밀들은 그 자체로 인간 사회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크거나 작거나간에 서로 무리를 지어서 살아갑니다. 우리 가족 이웃에 이웃의 가족이 있고, 우리 마을 이웃에 이웃마을이 있으며, 우리학교 이웃에 이웃학교가 있고, 우리 나라 이웃에 이웃나라가 있습니다.  무리무리는 서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서 있지요. 키도 비슷하고 생육조건도 비슷하고. 이것이 벤튼이 이상화했던 사회주의의 풍경이었을것 같습니다. 서로 평등하게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우면서 사는 인간사회. 한세대가 사라지면 새로운 세대가 다시 희망처럼 자라나는 사회. 그리고 끝없이 이어질 인간의 역사. 혹은 생명의 역사. 노년의 벤튼이 꿈꾼 인간 사회가 이런 황금 밀밭의 풍경은 아니었을지...

 

이 그림을 보자니, 엘리노어 파전의 '보리와 임금님'이라는 동화가 생각납니다. 우리 나라에는 '보리와 임금님'으로 번역 소개가 되었지만, 사실 원작에서는 밀밭 이었지요... (http://www.gulnara.net/main.php?pcd=6.7.&_vpg=view&uid=95) 제가 참 좋아하던 동화였는데, 지금도 이 동화를 찾아서 읽으면 공연히 눈물이 납니다.  어릴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사람을 잘 안변합니다. 왜 눈물이 나냐하면, 너무 아름다워서. 밀밭은, 여우가 어린왕자와 함께 있을때도 나오지요. 앞으로 황금물결치는 밀밭을 보면 네 머리카락이 생각날거라고 여우가 종알거지요.  가수 문정선이 노래한 옛날 노래가 있습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이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이야기가 걷잡을수 없이 딴길로 새고 있습니다...)

 

한세상 씩씩하고 전투적으로 살아낸 노 화가가 그린 말기의 작품이 너무나도 절제되어있고 사색적이라서, 이것이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다가오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던 것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황금 밀밭같이 풍요롭고 평등한, 인간의 세상. 저도 꿈꿔봅니다. 밀알은 각자 개성껏, 그러나 서로 의자하여, 미래의 싹을 간직한채, 영원히 살아남을겁니다. 하나의 밀알이 썩지 아니하면, 썩으면... 아아 성서적 은유인지도 모르겠군요.

 

이상으로 벤튼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은 존 커리를 기대해주시길.

 

2009년 12월 31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2010. 1. 1. 00:50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 2층 전시실. Thomas Hart Benton (1889-1971)의 벽화가 걸려 있는 곳입니다 (오른쪽 벽).  2009년의 마지막 날, 그리고 2010년을 시작하는 이 시간을 헤라클레스와 아킬로스의 신화 이야기를 하면서 보내도 좋을 것 같아서 선정해 봤습니다.  길이가 7미터 가까이 되고 그림의 높이는 대략 160 센티 (여성들 보통 키 정도 되겠군요) 되는 그림입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고, 건강하고 힘찬 벽화인데요.

 

이 그림의 제목은 '헤라클레스'와 '애킬로스'입니다. 캔자스 시티의 한 백화점을 장식한 벽화였다고 합니다.

 

 

 

Archelous and Hercules  (1947)

671x159.6 cm (길이 6.7 미터x 높이 1.6 미터)

Tempera and Oil on Canvas mounted on Plywood.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림의 중심이 되는 것은 커다란 황소의 뿔을 쥐려고 대적하는 사나이. 황소는 정확히 적을 노려보고 있는데 사나이는 등을 보이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으나, 그의 팔과 등의 근육이 이 남자의 표정을 읽게 해 줍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천하 장사로 알려져 있지요. 아킬로스는 '강'의 신이라고 합니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강의신 아에킬로스가 헤라클레스와 싸우던 장면을 이야기 해 주는데요, 헤라클레스와 씨름하다가 뱀으로 변하기도 하고, 황소로 변하기도 했는데 도무지 헤라클레스를 이기지 못했다고 술회 합니다. 헤라클레스가 '강의 신'과 대적하여 이겼다는 신화는 '자연'과 인간이 대적하여 인간이 자연을 '극복'한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해주지요 (참고로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영웅입니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황소로 변한 강의 신 아킬로스의 한쪽 뿔을 뽑아서 상대를 제압했다고 합니다. 그 뿔은 서양 문화에서 '풍요'의 상징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지만, 쇠뿔 자체는 큰 상징적 의미가 없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소로 둔갑한 강의 신의 뿔을 뽑아냈다는 말은 강이 제공해주는 풍요를 얻어 냈다는 상징을 갖게 됩니다.)

 

   *  참고로, 영문 표현중에 Take the bull by the horns 가 있지요. 쇠 뿔을  단단히 잡아라. 소와 씨름하려면 소와 정면으로 서서 소의 두 뿔을 단단히 잡아야 하죠. 결국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서양에서도 '소'가 그리스 신화때부터 존재하던 짐승이었으므로 소와 관련된 우화나 속담이 많군요. (영어선생 제버릇 개 못줍니다. 꼭 티를 내죠 ^^)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강의신 아킬로스는 황소이고, 이 황소와 대적하는 사람들 (여러사람이 그 황소를 잡기 위해 그림속에 등장하지요)이 헤라클레스가 되겠는데요, 벤튼은 이 그림으로 무엇을 전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미조리주에서 공공건설의 일환으로 미주리강 개발 사업이 진행된 적이 있습니다. 평원지대에 가뭄이 들어 흙먼지가 날리면 농작물들이 말라죽고 땅이 불모지가 되는가하면 반대로 홍수의 피해를 겪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군부대가 동원되어 댐도 만들고 수로도 만들고 둑도 쌓는 등의 강 개발이 사회주의사상을 가졌었고, 공공미술 벽화작업이 활발했던 벤튼에게 영감을 주었던것 같습니다.  신화속에서처럼 인간이 강을  길들여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했겠지요. 

 

 

 

 

 

저 옆에 여성 두명과 소년 하나가 앉아있거나 서 있는 흰 구조물이 보이시지요?  뿔이죠. 쇠뿔.  그 쇠뿔에서 과일과 곡식이 흘러 넘치고 있지요. 강을 잘 운영할때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풍요이지요.  그러고보면 여성이 들고 있는 빨간마후라도 뿔 모양이고요, 소년이 들고 있는 나발도 뿔 모양입니다.  (또 여기서 상상력을 발휘해보니, 여성신체의 여성기관중에 '나팔관'이라는 기관도 있지요. 그 나팔관도 뿔 모양이지요...여성의 돌출된 두개의 유방도 두개의 돌출된 뿔처럼 보입니다. 이쯤되면 세상 만물이 뿔처럼 보인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지요...하하하....)

 

 

 

 

 

소와 씨름하는 사나이들이 있는가하면,  한쪽에서는 수확을 하는 농민, 멀리 농장에서 '영농기계화'의 상징같은 농기계도 보입니다. 강을 잘 다스렸을때 우리에게 다가올 풍요를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러고보면, 사나이가 황소와 씨름하는 것을 중심으로, 그림의 왼편은 '황소와의 씨름'에, 그림의 오른편은 '다가올 풍요'가 그려진 것 같습니다.

 

 

 

 

자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저와 함께 시선을 이동시키는 겁니다.) 여기 그려진 사과를 보십시오. 사과며 다른 과일의 형태가 어떤가요?  사과가 오목볼록거울에 비쳐진듯 꾸불구불 하지요? 구불구불~~ 처음부터 사나이들의 등근육이며 모든것이 구불텅구불텅 구불구불 휘어졌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심지어 사과마저 어디론가 빨려들어갈듯 휘어져 있습니다.  왜 이 그림속의 대상들은 빨려들어갈듯 휘어져 있는것처럼 보일까요?  왜 벤튼은 대상을 이런식으로 휘어지게 그렸을까요?

 

 

 

 

왜 모든것이 휘어져보이나?

 

벤튼은 살아있는 것들이 에너지가 넘쳐서 움직인다고 믿었던 걸까요? 사나이들의 등근육이나 소의 근육처럼 가시적인 '삶의 근육'뿐 아니라, '생의 에너지'가 갖는 움직임을 정체를 파악했던 것일까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근육'을 부여한 것일까요?  아, 마치 숨은그림 찾기 하듯, 뿔처럼 보이는 당근 무더기가 보이는군요.

 

 

 

소의 눈이 보이십니까? Bull's eye 이지요. Bull's eys 라고 하면, '과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소의눈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소 곁에 또 있군요. 나무 둥치의 둥근 나이테도 소의눈을 연상시키고, 남자가 벗어놓은 모자역시 뿔을 닮은 소의 눈처럼 보입니다.

 

그림 전체에 흐르는 휘어짐, 구부러짐은 삶에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같이 보이기도 하고, 그대로 휘어저 굽이쳐 흐르는 생명의 상징인 강물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씨름이 있습니다.

 

지난 2009년은 제게는 죽음의 강을 건너듯 아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기쁨도 컸고, 슬픔도 컸으며, 과장된 절망감이나 우울감사이로도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주었습니다. 다가오는 한해동안 제가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줄을 서있고, 그것들을 하나 하나 해결하다보면 한 해가 또 지나갈 것 같습니다.  소와 씨름하듯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소와 씨름할 더 많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생의 에너지가 남아있는 그 날까지 씨름은 계속 될것입니다. 

 

쇠뿔을 거머쥐고 '돌아온 헤라클레스'처럼 환하게 웃는 그런 날이 올테니까요.

 

복된 2010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p.s. 헤라클레스는 소의 뿔을 하나만 뽑았습니다. 두개 다 뽑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얻고 하나는 양보하는 것이지요. 서로 화합하는 방법입니다.  불핀치의 그리스 신화에서 뿔을 뽑힌 강의신 아에킬로스는 헤라클레스를 원망하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힘센 영웅인지 이야기를 합니다.  이들은 서로 반목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참고: http://classiclit.about.com/library/bl-etexts/tbulfinch/bl-tbulfinch-age-23-achelous.htm  불핀치의 신화중 아켈로스와 헤라클레스

 

 

2009년 12월 31일 RedFox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
Books2009. 12. 30. 08:19

 

Smithsonian Q & A: American Art and Artists: The Ultimate Question & Answer Book

 

 

 

오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서점에서 발견한 책. 

 

살펴보니 미국미술을 '시기'별로 중요사항을 요약 정리를 해놓아서, 내가 자료를 정비하거나 내용을 정리할때 참고하기에 좋아 보였다. (때로는 아주 간략하게 씌어진 안내서가 지도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내가 여태까지 정리 해 온 내용과 비교해보기도 했는데, 내가 꽤 심도있게 내용 정리를 해 놓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소 주제별로 정리가 되어있어서, 자동차에 놓고 오가면서 어딘가에서 멀거니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야 할때, 혹은 변소에 놓아두었다가 그냥 멀거니 앉아있는 시간에, 애매한 자투리 시간에 읽기에 알맞다.

 

아마존에서 할인해서 파는데, 미술관 매장에서 정가 다 주고 샀지만, 전혀 억울하지 않다. 착한 책이다.

 

2009년 12월 29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2009. 12. 29. 11:12

아이오와에서 나고 자란 화가 Grant Wood (1891-1942)는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토마스 벤튼, 존 커리와 더불어 지역주의의 중심적인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22세부터 25세까지 (1913-1916) 일리노이주의 시카고 미술 학교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야간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그 이전까지는 목각, 금속, 보석 공예등 각종 공예시술을 연마하였습니다.  미술 수업을 마친후 1920년대에 그는 파리, 이탈리아, 독일등 유럽을 네차례 여행하였습니다. 그는 특히나 뮌헨에서 당시 유행하던 신 사실주의적 경향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또한 고대 신화나 성경의 이야기들을 당대의 세팅으로 재 해석하는 풍속화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터전인 아이오와로 돌아온 후에 그는 그의 그림속에 이를 펼치게 됩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당시에 미국의 주류 화가들이 뉴욕에 모여들어 활동을 하거나 혹은 유럽으로 미술 수업을 하러 떠났다가 유럽에 정착을 하거나, 혹은 유럽에서 돌아와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던데 비해서, 그랜트 우드는 그의 터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 유럽에서 서서히 활발해져가던 추상미술 사조를 거부하고 사실주의적 기법을 고집했다는 것입니다.

 

 

 

 

 

The Midnight Ride of Paul Revere (폴 레버의 한밤의 질주) 1931

76.2 x 101.6 cm

Oil on Masonite

2008년 7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촬영 (똑딱이 시절의 사진 -.-)

 

 

 

 

우드가 미술가로서 처음으로 대중들의 시선을 끌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30년에 그의 American Gothic 이 시카고 미술학교 주최 경쟁에서 메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시카고 미술학교의 소장품으로 팔려가는 영예까지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1931년에 "The Ride of Paul Revere (폴 레버의 한밤의 질주)"를 완성시킵니다.  폴 레버는 미국 독립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인데요, 1775년 영국군이 공격 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밤새 말을 달렸다고 합니다.

 

 

둥글게 휘어지고 달빛이 비치는듯 (비현실적으로) 환한 길위를, 교회 앞을, 말을 탄 사람이 가고 있지요. 말을 탄 사람의 자세를 보면 그는 오른쪽에서 달려와 왼쪽을 향해 가고 있는듯 합니다. 화면에는 그가 여태까지 달려왔던 그 먼길이 구불구불 보이지요.  그리고 화면 왼쪽으로도 역시 구불구불한, 그가 가야할 먼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역시나 (앞서의 페이지에서 풍경화를 이야기 할때 언급했던대로) 언덕이나 나무는 둥글둥글하고, 사람이 지은 예배당이나 집들은 각이 지고 딱딱해 보입니다.  우리는 마치 레고로 마을 하나를 만들어서 바닥에 놓고 위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으로 이 풍경화를 보게 됩니다. 역시나 우리는 마치 전능한 관찰자처럼 공중 어딘가에서 이 풍경을 보는 입장이 되지요.

 

그런데요, 여태까지 온 길과, 앞으로 가야할 길을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랜트 우드가 즐겨 그렸던 들판 풍경과 패턴이 일치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랜트 우드의 들판을 보면 아주 작게 보이는 사람이 끝도 안보이는 평원을 느릿느릿 갈아엎는 장면이나 이와 유사한 장면이 종종 등장 합니다.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과, 그리고 앞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시간. 여태까지 흘린 땀과, 앞으로 흘려야 할 땀.  "저걸 언제나 다 매나?" 이런 한숨이 나올법도 한데, 그랜트 우드의 그림에서는 이런 '한숨'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우리는 말을 타고 달리는 사나이의 얼굴도 분간할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가 밤새 잘 달려낼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구요? 그의 앞에 펼쳐져있는 저 구불구불한 길을 보십시오. 저 둥글게 이어지는 길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위험'이나 '죽음'따위를 근심할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의 앞에 '죽음'이 기다린다 하여도 기수는 태평하게, 나직하게, 느릿느릿 노래를 부르며 그 죽음을 맞이 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무엇에서 그런 느낌을 받나요?  구불구불한 저 길에서요. 구불구불 흐르는 개울과 구불구불한 저 언덕이 그런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길을 환하게 비쳐주는 것은 하늘의 달일지도 모르고요, 혹은 그의 안녕을 바라는, 그를 응원하는 우리들의 시선일지도 모르고요, 그랜트 우드 자신이 그의 영웅 폴 레버에게 보내는 빛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이 그림은 사실주의적이면서도 꽤나 몽환적이죠.  사실주의와 '신화적 신비'가 만나면 이런 그림이 탄생하겠지요.

 

 

 

아래 작품은 그랜트 우드가 작업한 Sinclair Lewis 의 Main Street 라는 작품의 일러스트레이션 입니다.  마을 공동 우물인 펌프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그 펌프로 물을 뜨러 오간 사람들의 발자욱이 만든 길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만보면 눈위에 난 발자국도 있는데요. 어린아이의 발자욱일까요 아니면 강아지의 발자욱일까요? 이 장면을 보면 옛날에 제가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때,  네가구가 살던 무허가 판잣집의 가장 작은 방에서 우리집 여섯식구가 살았는데, 저녁이 되면 그 집에 살던 네가구의 주부들이 그 손바닥만한 마당의 가운데에 있던 수돗가에 나와서 서로 코를 맞대고 쌀을 씻고, 채소를 씻고 그랬어요. 겨울에는 그 수돗가가 수챗물로 꽝꽝 얼었는데, 그 꽝꽝언 얼음판 위를 지나 '변소'에 가야 했지요. 어린 마음에 변소도 무섭고, 변소에 가는 길도 무섭고, 변소에서 나와서 미끄러 떨어질까봐 그것도 무서웠고, 여러모로 심난했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하필 그 시절이 떠오르고 마는군요.

 

 

 

Village Slums 1937

Charcoal, Pencil and Chalk on Paperboard (종이판에 목탄, 연필, 분필)

2009년9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설에 의하면 그랜트 우드는 이 매이슨 교회에 다녔다고도 하고, 동성애자였다고 소개하는 미술사책도 있군요. 이 메이슨은 미국에서는 꽤나 애국적인 단체로 알려져 있지요. 벤자민 프랭클린도 소속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뭐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이 조직과 관계가 있다는 '설'도 돌고 그러지요. 저는 이 메이슨 단체의 정체성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전에 살던 곳 가까이에도 온통 하얗게 칠해진 메이슨 단체 건물이 있었는데, 도무지 뭘 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인지 메이슨 관련, 소설같은 황당한 이야기들도 돌아다니곤 하지요. (프리메이슨은, 제가 전에도 자료를 찾아보곤 했는데, 도대체 정체를 잘 모르겠어요. 제가 좀더 공부를 해서 내용을 보충하기로 하지요. 누가 잘 아시면 가르쳐주세요. ^^). 아래의 그림은 그 메이슨 교회에 모여서 사중창을 부르는 남자들 이군요.

 

 

Shrine Quartet 1939

Lithograph

2009년 9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아, 그랜트 우드가 왜  농부나 들판을 그릴때, 조망하는 듯한, 내려다보는 듯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그림을 그렸을까...지금 생각해보니, 농업에 대한 그의 경험이 '피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랜트 우드는 분명 농부의 아들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나이 열살에 농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이오와의 Cedar Rapids 라는 곳으로 이주를 하는데 그때부터 그랜트 우드는 농업하고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대요.  그러니까 어린시절 열살까지 시골에서 성장한 것이 전부이고, 그가 실제로 농사를 지은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 졸업할때까지 밭에서 일하고,뭐 허드레 농사일을 해봐서 아는데요.  정말 농사일을 한 사람이 농사장면을 그릴때는 그것이 꽤 현실적이지요. (아, 우리 엄마의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서 올려보고 싶군요.) 정말 농사를 생활화한 사람이 농사 그림을 그릴때는 주변 환경을 훨씬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풀잎, 흙, 풍경. 호미들고 김을 매다 올려다보는 하늘, 마을. 이런 시각으로 화면이 채워지지요.  그런데, 농사를 직접 짓지 않고, 남이 농사짓는것을 '구경'만 하는 사람은 그렇게 '구경꾼'의 입장에서 농사 풍경을 그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랜트 우드의 풍경은 그래서 대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각도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농사를 짓지 않는 그의 입장이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을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미술 비평에서 이런 논의까지는 아직 안 나왔겠죠? 제가 짧게라도 써서 발표를 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헤헤헤.)

 

 

평생 그의 미술 활동의 본거지인 아이오와를 지켰던 그랜트 우드는 그의 집에서 간암으로 51세의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납니다. 영원속으로 간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우화'와도 같은 '신화'와도 같은 그림들이 우리곁에 남아있습니다.

 

이상으로 미국의 지역주의의 대표라 할만한 그랜트 우드 페이지를 마치겠습니다.

 

redfox 2009 년 12월 28일

 

 

Posted by Lee Eunmee
Realism2009. 12. 29. 08:18

July Fifteenth 1938

Lithograph

2009년 9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아이오와의 화가 그랜트 우드

 

 

제가 미국 워싱턴과 뉴욕을 위시한 동부의 큼직한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간신히 찾아낸 아래의 리토그라피 작품이 전부 입니다.  검색을 해보면 워싱턴의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이 아름다운 우드의 풍경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일반 관객에 공개 된 것은 한점도 없습니다.

 

(참고로, 미술관 자료를 검색해보면 Currently on View,  Currently Not on View 이렇게 표시가 나옵니다.  현재 볼수 있다 없다 알려주는 것이지요. 자료화가 잘 된 곳은 이런 표시가 나오고, 자료화가 안 된 곳에서는 무슨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지도 불분명 합니다. 심지어 자료화가 잘 된 곳으로 정평이 난 스미소니안 미술관에서도, 제가 가서 보고 찍어온 작품이 소장품 명단에 실려 있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웹에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 자료 몇점을 빌려 왔습니다.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가 어떤 것인지 꼭, 꼭,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넌 미술관에서도 못봤다면서 그걸 어떻게 알지? 묻고 싶으시죠...  제가 심심풀이로 하는 짓이 책방에서 비싼 화집 들여다보는 일이거든요.  화집에서 발견한 명품을 보러 미술관으로 가기도 하고, 미술관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그림들을 화집에서 찾아보고 설명을 읽기도 하고요.)

 

 

그랜트 우드는 미국 중서부의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하다가 거기서 죽은 '진정한' 아이오와의 화가 입니다.  미국지도에서 아이오와를 찾아보면,  미국 가장 중심부에 네브라스카가 있고요, 그 동쪽에, 네브라스카와 일리노이 사이에 아이오와가 있습니다.

 

 

꿈의 구장

 

 

'아이오와' 하면 생각나는 것은?  만약에 미국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개 '옥수수밭!'이라고 대꾸 할 겁니다. 중부 평야지대인 이곳은 그야말로 '가도 가도 가도 가도'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어? 가봤어?  묻고 싶으시죠... ) 제가 아이오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옛날에, 옛날에, 제가 미국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한국에서 봤던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한창 미남 배우 명단을 진두지휘하던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Field of Dreams (한국 제목, 꿈의 구장, 1989). 그 영화의 배경이 아이오와 평원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케빈 코스트너) 그의 옥수수밭에서 바람소리같은 어떤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 남자는 별로 경영실적도 없어 망해가는 옥수수밭을 파헤치고, 그곳에 '야구장'을 만듭니다.  야구장이 생기자, 옥수수밭에서 야구선수들이 나와요. 왕년의 유명했던, 그러나 지금은 죽었거나 혹은 업종변경하고, 꿈을 포기한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야구장에 모여듭니다.  아, 꿈의구장 영화가 나온것이 벌써 20년이 지나는 것이군요.  그러면, 내가 그 영화를 본지도 20년 가까이 되었다는 뜻이군요.  아아...

 

 

 

꿈의 구장 영화 덕분에, 저에게는 아이오와의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과 그 하늘과, 바람소리가 아주 생생하게 각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옥수수밭에 찾아가면 내 잃어버린 꿈도 되찾을수 있을까?  이런 상상까지 하고야 마는 것이지요. (영화 아직 안보셨다면, 지금 보셔도 여전히  감동이 유효할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 될 만하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사랑과 이별, 그리고 쓸쓸함에 대하여

 

그리고나서, 또다시 아이오와를 만난것은,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에서였습니다. 사실 원작 소설의 사상 초유의 히트를 쳤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번역 소개가 되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라디오 에프앰 틀어놓고 음악듣다보면, 연극인이면서 라디오 방송 진행도 했던 '손숙'씨가 그 차분하고 이지적인 목소리로 촉촉하게 깔면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읽어보셨나요?..." 뭐 이런 광고도 해대고 그랬습니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뭐 아무튼 연인들이 사랑의 선물로 주는 아이템중의 하나였다니까요.  심지어는 매우 완고하고 구식이며 남성중심주의적인 부산 사나이 우리 형부도 이 책을 우리 언니에게 선물 할 정도였으니까요. 부부가 이걸 같이 읽고 울고 짜고 장난이 아니었댑니다. 하하하.

 

저는요, 그제나 지금이나, 잘난척하는 경향이 심해서, 남들이 다 근사하다고 그러면 괜히 아니꼬와서 쳐다보지도 않았지요. (헤헤헤). 쳇, 대중문화라니...하면서 속으로 빈정거리고 있었겠지요.  그러다 어느날 누군가가 이 잘난척하는 저를 위해 글쎄 교보문고에서 '수입원서'를 사다 준 겁니다. 참.. 내... 그래가지고, 매우 잘난척을 하면서 그 얇다란 영문소설책을 읽고야 만것이지요. 꼬부랑 글씨로 읽자하니 골치가 아파서 뭐 크게 감동을 받은것 같지도 않아요.  1995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님이 직접 메가폰을 잡으시고 주연까지 도맡으셨는데, 저는 그로부터 한 5년쯤 후에 비디오로 이 영화를 본것 같아요.  (소설에 별 감흥이 없었으므로 영화도 찾아다니며 볼 열정이 없었지요.)

 

 

 

 

제가 이 소설을, 혹은 영화를 인상깊게 봤던 아니건 간에, 그때의 이미지는 남아 있어요. 어떤 이미지냐하면, 이탈리아계 이민자 여성 프란체스카가 미국의 중부, 온종일 걸어가도 끝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평원지대의 농가의 아낙네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할까.  온가족이 모두 사랑해주지만, 행복한 아내이며 엄마이지만, 이 여자의 일상은 얼마나 지루하고 그리고....쓸쓸하고...그럴까...  프란체스카의 그 막막한 고립감에 공감을 했던 것이지요.  어쩌다 삶이 주는 축복 혹은 기회처럼 불꽃같은 정열을 불태우고 난후, 불꽃놀이가 끝난 밤하늘을 바라보듯 남겨진 그여자의 여생은 또 얼마나 쓸쓸했을까 뭐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 그랬죠.  그 메디슨 카운티는, 그리고 그 다리들은 아이오와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아직 미국땅도 밟아본 적이 없던 제게 아이오와는 이렇게 영화와 소설속의 '끝없는 초록 평야' 그리고'막막함'으로 다가왔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어느날 화집을 통해 아이오와 출신의, 평생 아이오와에서 살다 죽었다는 그랜트 우드를 발견했을때, 머릿속에 갖고 있던 이미지들과 그랜트 우드가 전해주는 이미지들을 뒤섞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랜트 우드는 제 곁에 다가왔습니다.

 

 

 

 

추억, 잊혀진 평원의 나라

 

 

 

제가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http://americanart.textcube.com/166 ) 책을 읽은 것도, 빌 브라이슨이 워낙에 재미있는 글쟁이이기도 하지만, 아이오와주 태생이었던 그가 회상하는 아이오와의 삶이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빌 브라이슨은 현재 아이오와의 주도인 드 모인 태생이고, 드 모인과 그 변두리의 삶을 그려나갔지만, 그가 전하는 중서부 사람들의 정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요.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어요. "중서부에는 뉴스가 없다. 그러므로 중서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미국의 역사를 봐도 그렇고 뉴스의 발원지가 되는 곳은 극히 한정적입니다. 미국의 동부 몇개 지역, 그리고 서부 캘리포니아 대도시.  그 외에 미국의 중부에 대해서 얼만큼 아시나요? 사실 우리가 상상하거나 인지하는 '미국'은 뉴욕, 워싱턴, 텍사스 목장,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뭐 그런 곳입니다. 미국 역사의 현장은 대개 동부에 몰려있고, 명문 대학들도 동부에 몰려있고... 그에 비해 미드웨스트는 그저 '옥수수밭'이나 '콩밭'으로 기억되는 그런 곳이지요.  (여담이지만, 제가 2년여전에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로 왔을때, 버지니아의 학교에 전학한 저희 아이들이 학교에서 들은 농담: "플로리다에도 학교가 있어?" 헤헤헤 워싱턴이나 버지니아의 아이들에게 플로리다는 디즈니랜드의 나라, 돌고래의 나라, 사철 비치에서 놀수 있는 휴양지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학교가 있고 학생이 있다는 상상이 안된다는거죠.)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A Memoir

 

그렇게 잊혀진 평원의 나라.  가도가도 옥수수밭 뿐인 나라. 그런나라에서 우리의 그랜트 우드는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하가다가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미술가들은 모두 유럽 유학을 거쳐 뉴욕으로 몰려들던 시기에 미드웨스트에 짱박혀서 옹고집으로 미드웨스트의 풍경을 그린 화가 그랜트는 확실히 좀 독보적인 존재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지역주의를 논할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가장 주목해서 그랜트 우드를 이야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과 우주가 평원에서 만나다 Star Trek 2009

 

 

지난 봄에 Star Trek 2009년판이 극장에서 개봉했지요. 보셨나요? (재밌는데...)

 

그 영화 볼때요, 자세히 보시면, 아버지 없이 성장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뭐 활개치고 돌아다니면서 우울감을 달래는데요, 그때, 이정표에 IOWA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소년은 막막한 IOWA 평원에서 '우주 기지'를 발견해요.  실제로 아이오와에서 찍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영화에 IOWA 라는 찌그러진 이정표가 보이지요.

 

왜 하필 아이오와?  저야 모르죠. 스타트렉의 광팬이 아니라서요. 원작 소설이나 극에도 그런 설정이 있었는지 알수 없지요.  하지만, 아이오와가 뭐 꼭 동떨어어진 설정은 아니지요.  미국에서 UFO 봤다는 사람들 있고, UFO를 불러내겠다는 사람들 모임도 있고 그렇쟎아요.  그리고, 끝없는 초원에 이상한 무늬 만들고 그러는 사람들 있쟎아요. 아이오와가 평야지대이고 목초나 옥수수, 콩 이런거 한없이 펼쳐진 곳이라서 이 평원에 커다란 고무래 같은것을 끌고 돌아다니며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든다음에, 외계인이 만들고 갔다고 뻥(?)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지요.  :)  아이오와는 '우주기지'로서 아주 적당한 지역이지요.

 

그런데요, 우주가 별건가요...우리도 '우주인' 이쟎아요. 지구도 우주의 일부고, 우리도 우주의 일부이고. 우리는 영원속에 존재하는거죠.

 

 

 

그랜트 우드의 풍경속에는 '영원한 시간'이 존재한다...

 

 

아래의 이미지들은   제가 웹에서 빌려온 작품들 인데요.  이 글의 머리에 제가 사진 찍어온 작품과 아래의 풍경화들을 보시면서 이들에게 공히 보이는 어떤 특징들을 찾아 볼까요?  작품들을 찬찬히 보시지요.

 

 

 

 

Stone City 1930 (스톤 시)

 

 

Sprign Turning 1936 (봄이 오네)

 

 

Fall Plowing (가을의 쟁기질)

 

위의 풍경화들에게서 공히 보이는 요소들은

 

 1. 둥근, 곡선의 언던과 평야가 끝없이 겹쳐져 있어, 이런 평야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죠.

 

 2. 시선은 어떤가요?  작가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것 같은가요?  작가는 이 풍경을 아주 높은 산위나 고층건물 위에서 혹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러니까 이 구도는 현실적인 구도는 아니죠.  환상의 구도이지요.  (이를 영어로는 bird eye view 라고 합니다.)

 

 3. 나무들도 대개 둥글둥글 하고요 길도 곡선으로 흐르고 개울도 곡선으로 흘러요

 

 4. 그러면 곡선이 아니고 직선이거나 예각인것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구도입니다. 건물, 다리,  인간이 밭을 갈아놓는 형태 이러한 '인위적'인 것들은 직선이거나 예각이지요.

 

 5. 마찬가지로 '자연'과 '사람이 품을 들여서 일군' 농장이 공존합니다.

 

 6. 풍경속에 있는 사람은 굉장히, 굉장히 작아요.  온통 초록색인 Spring Turning 이라는 작품을 보셔요. 거기 보면 희게 보이는 것이 사람이 가축을 몰아 밭을 가는 모습인데요, 그 사람과 그 사람이 갈아야하는 밭의 크기를 비교해보셔요.  "저 밭을 언제 다 갈아, 엉엉엉" 한숨이 나오죠. 울음을 터뜨려도 이해해요. :)  하지만,  이 풍경화속에 슬픔이나 고통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태평하게 펼쳐져있고, 깨알같이 작은 인간은 그 태평한 땅을 영원히 영원히 갈아엎고 농사를 짓는 것이지요.  세상은 넓고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지만, 사람 역시 서두르지 않고 영원속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가다보면 밭은 갈리고, 씨앗은 뿌려지고, 옥수수는 익을것이며, 콩은 깍지를 터뜨리며 깔깔댈것입니다.

 

아 저는 사실,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를 화집에서 들여다볼때면 네덜란드의 풍속화가로 알려진 브르겔 (브르헬)의 아키로스의 추락 같은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림의 주제나 시사하는 바는 다르지만,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밭을 가는 브르겔 그림속의 농부와 그 구불구불한 밭의 모양이 그랜트 우드의 풍경과 많이 닮았거든요.  조망하는 듯한 작가의 시각도 똑같지요.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 (Grapes of Wrath)를 통해 묘사한 당대의 농부들의 현실은 비참한 수준이었는데요, 그랜트 우드는 이러한 시대적인 풍경과는 동떨어진채 위에 보이는 영원히 지속될것 같은 '낙원'의 풍경을 중서부의 풍경이라고 그려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류의 향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돌아갈수 없는 낙원, 영원히 돌아갈수 없는 고향.  그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랜트 우드의 '우화'와도 같은 풍경화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를 좋아하는 저 역시...

 

그리움때문에... 지금은 근사한 서울 근교 아파트 촌으로 변해버려 그 흔적조차 찾을수 없는 제 고향집과 우리 할아버지가 평생 갈고 씨를 뿌린 우리집 논, 밭, 과수원이, 우리집 앞 개울이, 그 고향마을이 어른이 된 후에 보면 작고 보잘것 없었지만, 어린 시절, 몸도 작고, 세상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그 고향마을은 끝도 보이지 않는 평원이었으며, 온종일 걸어도 그 끝에 닿을 수 없는 왕국이었지요.  제 추억속에도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그리움이, 인종과 언어와 사회적 배경을 초월하여 어떤 그림에 함께 다가가게 만들지요. 그렇게 우드의 풍경화 속의 시간은 영원에 맞닿아 있는 것이지요.

 

 

내 카메라에 담아온 그랜트 우드의 우주

 

 

 

 

 

2009년 12월 2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2009. 12. 29. 01:10

우스개이지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뭘까요?  워싱턴 디씨의 '백악관 White House'이겠지요.

그러면 미국에서 두번째로 유명한 집은 어디에 있는 무슨 집일까요?

 

 

American Gothic (1930)

Grant Wood

74.3 x 62.4 cm.

Oil on Beaverboard

어느해 팔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뮤지엄에서 촬영

위의 사진 상태가 하도 딱해서, 그냥 웹에서 다른 이미지를 얻어왔습니다. 자세히 보실수 있을겁니다.

 

 

 

(정답) 미국에서 두번째로 유명한 집은, 아이오와 (Iowa)주에 있는 이 집이라고 합니다.

 

File:2007-06-04-Gothic House.jpg

http://en.wikipedia.org/wiki/American_Gothic_House

 

 

아이오와 주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집인데요.  이 집이 1930년 Grant Wood가 발표한 American Gothic 의 실제 배경이 되어 주었던 집입니다. 창문모양하며, 일치하죠?  이 그림으로 그랜트 우드는 1930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그리고 그의 그림역시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팔려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 가시면 이 그림을 보실수 있습니다.

 

여자 모델은 Nan 이라는 이름의 그랜트 우드의 동생이었고, 남자 모델은 동네 치과의사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랜트가 훗날 간암으로 사망했을때 그의 전 재산이 이 여자분 Nan 에게 넘겨졌고, 그후에 그의 작품들이 모두 아이오와의 한 미술관에 기증되고 맙니다.  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합니다.  아버지와 노처녀 딸일것이라는 설도 있고, 노총각 노처녀로 늙어가는 오누이로 보인다는 설도 있고.  여성은 좀 뚱해보이고, 남성은 메마르고 고집스러워 보이지요.

 

 

이 '어메리칸 고딕'은 미국인들이 알고 있는 세계 3대 걸작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나머지 둘은?  모나리자의 미소, 그리고 휘슬러의 엄마 라는 작품인데요. :) 휘슬러의 엄마라는 작품은 영화 Bean (1997)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요. 아직 안보셨으면 한 번 보셔도... 아무튼, 그정도로 이 아메리칸 고딕 이라는 작품이 유명합니다.  미국인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 그림은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공존합니다. 교회의 첨탑을 연상시키는 수직의 뾰족한 지붕과 창문 모양, 남자가 들고 있는 날카로운 삼지창, 금테안경을 낀 장년의 성마른듯한 표정의 사나이. 남자가 입고 있는 검은 웃저고리와 그 안에 받쳐입은 흰 셔츠는 고집센, 성직자 같은 이미지를 줍니다. 그가 입고 있는 낡고 주름진 바지와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삼지창이 그를 중부의 농부라는 것을 일깨워주지요.

 

남자 옆에 딸인지 누이동생인지 혹은 아내인지 알수 없는채로 서있는 여자의 눈빛이나 굳게 닫은 입매가 무뚝뚝하고 꾸밈없으며, 도통 사교성이라고는 없어 보입니다. 역시 입고 있는 검정 드레스나, 흰 옷깃, 그리고 단정하게 매달고 있는 브로치는 이 여인에게 빈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느슨한 앞치마가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며, 그녀의 황금빛 동그란 머리통의 윤곽이  그 뒤의 고딕식 지붕의 예리함을 누그러뜨려 줍니다. 역시나 여자의 머리통과 비슷하게 동글동글한 배경 숲이 예각의 지붕과 퉁명스러운 사람들의 표정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의 표정이나 고딕양식을 연상시키는 건물을 통해 그랜트우드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미국 중서부 평원지대에서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건한 삶이라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성자와 같이 경건하게 흙을 파고 경작하며 살아가는 미국 농민의 삶. 이것이야 말로 미국인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또다른 편에서는 그랜트 우드가 정말로 의도했던 것은 이런 삶에 대한 냉소적 풍자였다고도 합니다.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미국인들의 도덕적 우월감 따위를 신랄하게 비꼬는 그림이라는 것이지요.  어느쪽 해석이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시나요?

 

이 아메리칸 고딕은 미국의 정치인들이 선거전에서 이미지를 빌려다 쓰기도 했고, 유명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타이틀로도 사용되었으며, 유명 애니메이션에 출연하기도 합니다. 구글에서 American Gothic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다양한 변형들이 '무수하게' 나와줍니다. 작품의 예술성을 떠나서 이 작품은 '제목'과 '분위기'와 어느정도의 '행운'이 겹쳐서 미국의 '아이콘'이 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2009년 12월 2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Realism2009. 12. 29. 00:00

 

 

미국 사실주의 속의 지역주의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이전 페이지에서 미국미술사에 나타나는 '사실주의' 흐름을 제가 대충 정리한 바 있습니다. (공부를 해 가면서 내용을 조금씩 손을 보게 되는군요. 잘 못 알고 있던 것은 바로잡고... 첨가도 하고..)

 

그 표를 다시 갖다 놓고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표가 제가 대충 잡은 윤곽인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search/?search=ashcan  Ashcan 에 속했던 화가들을 소개한 적이 있쟎아요. 이분들이 미국 사실주의의 원조들이었다 할 만 합니다. 이들중에 Social Realist 로 분류가 될만한 화가도 있고, 아닌경우도 있고.  가령 Sloan 은 사회주의적 잡지 편집에도 관계했지만, 스스로는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기도 했지요.  본격적인 사회 사실주의 화가로는 벤 샨 같은 작가들이 있지요. (벤샨은, 제가 꽤 흥미를 가진 화가 이기 때문에 오히려 페이지 정리하기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번에는 지역주의 (Regionalism) 작가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삼총사'와 같은 작가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930년대에 탄생하는 '지역주의 (Regionalism)'의 주요 작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 Grant Wood (1892-1942)

 * Thomas Hart Benton (1889-1975)

 * John Steuart Curry (1897-1946)

 

그러니까...가령...아주 유치한 미술 문제를 낸다고 가정해봅니다.

 

다음 화가들중에서 미국의 지역주의 화가가 아닌 사람은?

(1) 그랜드 우드 (2) 토마스 벤튼 (3) 조지아 오키프  (4) 존 커리

 

이런 문제가 나오면 답은 (3)번을 찍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

 

 

지역주의의 탄생과 허상

 

 

 

그러면, 이 regionalism 이라고 명명된 지역주의는 어떤 배경에서 탄생 한 것일까요? 미술비평책마다 대동소이하거나 백과사전식의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대략 '교과서'처럼 알려진 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우선 지역주의가 1930년대에 탄생하는데, 대공황과 맞물려 있지요.  그래서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 시키고자 하는 미술 운동이 일어났고, 유럽 일변도의 미술판에 저항하여 소외되어 있었던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서, 신토불이의 미술이 탄생한거다 이런 내용이죠.  아 저역시 최근까지 이런 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지역주의의 탄생에 대한 또다른 설명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내용을 조금 정리하겠습니다.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by Robert Hughes 책 내용을 대충 요약해서 옮기겠습니다.

 

 

1933년에, 캔자스 출신으로 뉴욕에서 미술거래상으로 활동하던 Maynard Walker 라는 사람이 캔자스 시티에서 35점의 그림을 걸어놓고 "American Painting Since Whistler 휘슬러이래의 미국 회화" 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엽니다.  전시회에 참가했던 화가들 중에 Thomas Hart Benton, John Steuart Curry, Grant Wood 가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벤턴은 뉴욕에서 활동중이었고,  우드역시 이미 American Gothic 이라는 불후의 명작(?)으로 큰 상을 거머쥔 후였고, 커리역시 '휘트니 미술관'이 이미 그의 작품을 여러점 사들인 후였습니다.  나름대로 이미 미술계에서 어느정도 알려진 인물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세사람은 피차 서로 본적도 없고,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뭐 Regionalism 같은 것도 생각도 못해냈겠지요.

 

그런데 전시회를 기획했던 Walker 가 Art Digest 라는 잡지에 이 전시소식을 전하면서 "real American art...which really springs from American soil and seeks to interpret American life (진정한 미국 미술...미국의 토양에서 태어나서 미국의 삶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이런 선전을 했다고 합니다.  뭐 사실 당시 비평가들이나 콜렉터들은 이 전시회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데, 워커가 제작한 카타로그가 Time 지의 중서부 담당자의 눈에 띄어서, 그것이 뉴욕의 본사로 보내집니다. 뉴욕 본사를 지키고 있던 타임지의 설립자 Henry Luce 는 미술 애호가였는데 이 별것도 아닌 소식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그리고는...난리가 난거죠...  이제 진정한 미국의 세기 (The American Century) 가 돌아왔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거죠.

 

그리하여 1934년 12월 24일판 타임지의 커버를 벤턴의 초상화가 장식하고, 커리, 우드, 그리고 Charles Burchfield, Reginald Marsh 등의 그림이 소개가 됩니다. 흙냄새 물씬 풍기는 중서부 출신의 작가들이 불러일으킨,  진정한 미국화의 탄생! 지역주의가 이런식으로 탄생을 한거죠.

 

헌데 Robert Hughes 의 설명으로는 이런식의 미국의 Regionalism 은 사실과는 상관없는 '허구'라는 것이지요.  가령 벤튼, 커리, 우드가 지역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널리 선전이 되었지만, 벤튼과 우드는 피차 서로 일면식도 없었고, 지역주의 화가로 알려진 화가들중에 정말 '중서부'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한 화가는 그랜트 우드 뿐이라는 것이지요.  커리는 커넥티컷에서 활동했고, 벤튼의 스튜디오는 뉴욕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이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이 '지역주의'라는 어떤 판타지가 미국의 대중들에게 비현실적인 향수와 꿈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경제 대공황으로 도시와 농촌등 전 지역이 고통을 겪고 있을때, 그랜트 우드가 보여준 풍경화는 '잃어버린 낙원'이었지요.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를 1939년에 발표하면서, 몰락한 미국 농민들의 참상을 여실히 서술한 바 있는데, 이에 비해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는 '몽환적'이기 까지 합니다.

 

후에 벤튼은 이 허구성이 강한 지역주의 운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을 합니다. " 이미 각본은 씌어졌고, 우리를 위한 무대장치는 만들어졌다. 그랜트 우드는 전형적인 아이오와 소읍 사람이 되었고, 존 커리는 전형적인 캔자스의 농부가 되었으며, 그리고 나는 중서부 (미조리조)의 촌뜨기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 역할을 받아들였다."

 

예. 미국의 지역주의 운동이 대충 이러한 얼개로 탄생하였고, 미국미술사에서 나름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주의 삼인방에 대한 소개는 Wood, Benton, Curry 순으로 페이지를 열어나가겠습니다.

 

2009년 12월 28일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8. 04:53

토마스 윌머 듀잉

 

 

토마스 윌머 듀잉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 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톤 태생의 화가 입니다.  1876년부터 1879년까지 (그의 나이 25세부터 29세까지) 파리와 뮌헨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Society of American Painters 그룹에 속하여 잡지 편집인이었던 Richard Watson Gilder의 살롱을 중심으로한 뉴욕 문화계에 어울리게 됩니다.  길더는 당시의 유명한 미술가, 작가, 재벌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이들과 '황금시대 Gilded Age'를 펼쳐 나갑니다.  미국미술사에서 '황금시대'는 말하자면 '돈'과 '예술'의 만남이었다고 할 만 하지요.

 

이곳에서 듀잉은 건축가이며 디자이너이기도 했던 Stanford White 와 친교를 맺게되는데 이들간의 돈독한 우정은 스탠포드 화이트가 죽을때까지 (1905년) 이어집니다. 스탠포드 화이트는 살해되었지요. 듀잉의 상심이 컸다고 합니다.  제가 듀잉 관련 페이지에 소개해드렸던 그의 작품들, 그 작품들이 '액자' 디자인은 모두 스탠포드 화이트의 작품입니다.

 

Gilder 의 살롱에서 듀잉은 그의 평생 아내가 되는 Maria Oakey (1845-1927)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듀잉보다 여섯살 연상이군요.  마리아 역시 화가였습니다. 마리아는 John La Farge 와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듀잉에게 화면을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조정해보라는 조언을 합니다.  듀잉이 Tonalist 로 나아간데는 아내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이지요.

 

1890년부터 듀잉은 뉴 햄프셔의 스튜디오에 머무르며 초록색 계열의 이상화된 자연속의 여성들을 창조해냅니다. 1897년 그는 Society of American Painters 에서 탈퇴하여 Ten American Painters 모임에 합류하여 20여년간 이들과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The Ten (미국 인상주의 화가들) 뒤에 서있는 사람들중에서 오른쪽에서 두번째 콧수염 신사가 듀잉

Seated, left to right:

(1) Edward Simmons,  (2) Willard L. Metcalf, (3) Childe Hassam, (4) J. Alden Weir, (5) Robert Reid
Standing, left to right:

(6) William Merritt Chase, (7) Frank W. Benson, (8) Edmund C. Tarbell, (9) Thomas Wilmer Dewing, (10) Joseph Rodefer De Camp

 

그리고 1905년부터는 그간의 야외 풍경에서 벗어나 실내 중심의 작품 활동을 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실내는 부드럽게 채색되고, 색조(tone)가 통일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은 하나 혹은 둘이 간결한, 대부분이 생략된 공간에 존재합니다.  남자를 찾아보기 힘든 그의 그림에서 여성 인물들은 손으로 다가가 잡을수 없는 거리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그리고 고요하게 존재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인물들의 숨소리나 체온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마치 숨쉬는 풀잎들처럼 그들은 존재합니다.

 

듀잉은 미국의 인상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10인회의 회원이었으므로 미국 인상파 화가로 분류가 되기도 하지만,  좀더 국소적으로는 Tonalist (색조주의자) 군에 속합니다. Tonalism (색조주의)는 1880년경부터 1915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출신의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릴때 보였던 양상인데 George Inness 와 James McNeill Whister 가 그 대표적인 화가들입니다.  듀잉역시 화면의 전반적인 색조로서 화면의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공을 들였지요.  이 색조주의는 미국에서 인상파 화풍이 우세해지면서 그 명맥을 잃게 됩니다.

 

듀잉은 미술가로서는 매우 행운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술사에서 '당대'의 인정을 받고 영예를 누리다가 죽어서도 여전히 대가로 인정받은 화가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하게 살다가 인정도 못받고 죽은후에 사후에 인정받아 그림값만 하늘 높을줄 모르고 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하였고, 우리나라의 박수근 선생 역시 미군부대에서 양키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노동'으로 간신히 연명할수 있었으며...  그런데 듀잉은 일찌감치 뉴욕의 보험업자였던 John Galletly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철도차량 사업가였던 Freer (워싱턴의 프리어 갤러리를 기증한 사람)의 열렬한 애정과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립니다.  결국 Galletly 가 수집했던 작품들은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그리고 프리어가 수집한 작품들은 스미소니안 프리어 갤러리로 옮겨지게 됩니다.

 

 

초록 안개의 꿈

 

http://americanart.textcube.com/234 페이지에서 우리는 몇장의 그림을 보고 듀잉 작품세계의 어떤 특징을 꼽아본 적이 있습니다.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옮겨 보겠습니다.

 

(1) 그림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들입니다.  남자 안보이지요?  :)  '여름'과 '낭송'에서는 각각의 화면에 두명의 주인공들이 들어있습니다.  세폭 병풍같이 생긴 작품 속에는 한폭마다 한명의 여자가 그려져 있지요.

 

(2) 모두 유화이군요.

 

(3) 배경이 모두 초록색 계열이지요.

 

(4) 그리고 배경이 모두 '자연'입니다.  인공적인 '건물' 같은것은 안보이지요?

 

(5) 안개가 낀듯 화면들이 대개 '아슴프레'하지요?  사진사가 사진 실력이 없긴 하지만, 원래 작품이 이래요. 촛점이 어긋난것처럼 아슴푸레한 것이 이 세작품의 공통점입니다.

 

(6)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팔은 가늘고 하체는 무척 길죠.  '이상화'된 여성의 체형인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단지 '몇 편'의 작품만으로도 듀잉의 이런 특징들을 발견해 낼수 있었는데요.  듀잉의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뭐가 새로 추가가 되었을까요?

 

(1) 그림하고는 상관이 없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의 '액자'가 모두 통일되어 있지요. 그것이 워싱턴에 있건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 있건 액자는 동일한 사람의 작품입니다. 그와 막역한 친구이기도 했던 건축가, 디자이너 Stanford White 가 디자인 한 것입니다.

 

(2) 일정한 색조를 유지하면서 그 색감 자체가 그림의 '주제'였다는 점에서 듀잉 활동당시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던 James McNeill Whistler (제임스 맥닐 휘슬러), George Inness (조지 이네스)의 Tonalism 을 그의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3) 그가 후에 십인회에 가입하게 되는데, 십인회의 주요 멤버들이 미국미술사에서 '미국 인상파 화가들'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4) 1905년 이후에는 실내에서 여인들이 악기를 들고 있는, 실내 중심의 그림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제가 소개드린 작품들을 찬찬히 보시면, 이 블로그에 소개된 작품들 만으로도 듀잉의 활동이 '야외'에서 '실내'로 옮겨가게 된 것을 파악할수 있습니다.

 

(5) 당시에 미국이나 유럽 화가들을 사로 잡았던 '일본화' '일본화풍'이 듀잉에게도 영향을 끼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6) 그는 당대에 '부자들의 후원'을 듬뿍 받은 운좋은 화가였지요. 그는 산업의 폭발적 발전으로 신흥대국이 된 미국의 재벌들의 '돈'과 유럽등지에서 예술 공부를 하고 돌아온 미국의 예술가들이 어울려 이뤄낸 '황금시대'의 아이였고, 수혜자였던 것이지요.  금박으로 떡칠을 하여 백악관에 기증한 스타인 피아노의 장식이나, 디트로이트 재벌 프리어의 실내 장식이나 장식용 그림을 제작해내면서, 그는 예술을 위해 배를 곯거나 화구를 사기위해 막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아름다운' 세월을 보낼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하여, 듀잉의 그림에서 우리는

'안개속을 걷는듯한 상쾌하고 촉촉한,'

'몽환적인,'

'어디선가 아름다운 멜로디가 들려오는 듯한,'

'사람의 숨소리나 땀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선녀들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가볍게 춤을 추는'

'연두색 물감이 이러저리 스며들다 내 영혼에까지도 스며들듯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프리어 갤러리의 듀잉 전시실에 가면 호흡도 고요해지고, 마음도 잠시 편안해집니다.

 

 

영혼의 부재

 

그렇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들이, 왜 미국 미술사 책에서, 미국 미술 비평 앤솔로지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듀잉의 이름이 세계적인 화가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미국 미술의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맴돌다 마는 것일까요?

 

이전페이지에서 저는 이를 간단히 '페이소스 (pathos)가 안보인다'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듀잉의 색조는 우리 영혼에까지도 스며들것같이 부드럽고 습기가 있으며 정제되어 있지만, 그토록이나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듀잉의 여인들에게서 우리는 영혼을 느낄수 없습니다. 사람의 숨소리나 땀냄새가 나지 않으므로 관객인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천상에만 존재하는 주인공들 곁에 우리는 다가갈수 없습니다.  다가갈수 없으므로 공감이 불가능해집니다.  저들은 관객인 나와 공감하지 않습니다. 나의 고통을 들어주지도 않고, 나의 신음소리를 듣지도 못합니다.  나는 그림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런 재미있는 설이 있는데요. 백화점 판매직원이 '너무나도 아름다우면' 오히려 매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수 있다고 하지요.  내가 물건 사는 사람이고 판매원은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너무 근사하고 잘생기면 오히려 손님인 내가 의기소침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잘난 판매원은 오히려 물건을 잘 못 판대요. (믿거나 말거나). 

 

듀잉의 그림속에는 '관객 (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 모두 포함)'들이 동감하거나 공감할 삶의 고통이 보지지 않습니다. 부조리함이나 비뚤어짐, 망가짐 같은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극복해야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팔자 늘어진 어떤 사람들이 식후에 페퍼민트 한잔으로 느끼함을 지우려하듯, 딱 고만큼의 아름다움만이 존재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리고 지워지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화가 듀잉의 몫인것 같습니다.

 

듀잉이 만약에 물감을 사기위해 막노동을 해야 했거나,  캔바스를 새로 장만할수 없어 그림위에 또다시 그림을 그려야 했던 상황속에서 고민하고 고통을 겪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선녀들은 우리에게 좀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줬을지도 모릅니다.  (미술가는 배부르면 안돼? 꼭 고생하다 죽어야 미술이 완성돼? 이렇게 반문하고 싶으시죠?  영화 누리면서 떵떵거리다가 세상 하직한 대가들도 여럿 있죠.  듀잉의 예술은 거기까지도 미치지 못했겠지요.)

 

저는 듀잉의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편안하고 좋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페이지를 여섯개씩이나 만들면서 상세하게 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동시에 안타까움도 느낀다는 것이지요...  안개처럼 희미하게 사라지고 만 그의 예술세계가 안타까운 것이지요.

 

인생은...고통스럽지만...고통을 견디면...나는 조금 더 사람 냄새를 풍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이유 같은것을 이렇게라도 찾게 되는군요.) 나를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수 없다해도, 죽는 순간까지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지요 뭐...

 

2009년 12월 27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 박물관, 듀잉의 작품 전시실 입니다. 2009년 7월 13일에 촬영한 것들인데요. 보시다시피...사진상태가 여엉 '아니올시다' 입니다. DSLR 갖고 다니기 전에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대충대충 찍었던 사진들이라서.  (조만간 다시 들러서 작품사진들을 담아 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에 전시되고 있는 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피아노사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백악관에 기증할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인데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재임시 (1903) 듀잉이 '장식'을 담당한 것입니다.  이 피아노는 스타인웨이가 제작한 피아노중에서 십만번째 작품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도 이 피아노를 연주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피아노는 태프트, 윌슨, 하딩, 쿠어리지, 후버,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임기까지 백악관에 있었다고 합니다.

 

 

 

흰 바탕에 금박으로 장식을 하고, 뚜껑 안쪽에 열명의 고운 아가씨들이 있는데요, 맨 왼편의 아가씨는 의자에 앉아있고, 나머지 아홉명은 원무를 추듯 서있는데요. 스타인웨이가 듀잉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America Receiving the Nine Muses (아홉명의 뮤즈들을 맞이하는 아메리카)라는 고전적 주제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홉명의 뮤즈는 제우스와 네모신 (Mnemosyne) 의 아홉명의 딸들을 가리키는데 예술의 상징으로 서양 고전물에 많이 등장하지요.  듀잉은 뮤즈들을 그리면서 미국 건국 초기의 여성들의 옷차림을 한 여인들을 그려넣음으로써 서양 고전화에서 살찍 비껴갔다고 합니다. 뮤즈를 그리더라도 미국식으로 그리겠다는 자존감의 표현이었는지 알수 없으나 이를 애국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평자도 있습니다.

 

 

 

 

 

 

 

 

아래 작품은 In the Garden, 정원에서 (1892년) 작품입니다.

 

 

 

 

 

2009년 7월 13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redfox.

 

 

Posted by Lee Eunmee
American Art History Sketch2009. 12. 27. 23:59

 

프리어 갤러리의 듀잉과 타이론 전시실.  왼편에 있는 작품들이 듀잉. 오른쪽 벽에 걸린 작품들이 타이론의 풍경화들입니다.

 

듀잉의 작품, 왼쪽부터 (1) The Four Sylvan Sounds, (2) Before Sunrise, (3) After Sunset, (4) The Blue Dress 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대강 전시실이 이러한 분위기이고,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의 실제 크기가 이정도 된다는 '감'을 독자들께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진에 찍힌 전시물외에도 입구쪽에, 그리고 다른 전시실에 작품들이 있으므로, 제가 프리어에서 '사냥해온' 작품들을 차례차례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깡그리' 찍어왔습니다 ^^)  <--- 이 돌쇠식 열정~ (아이참...사진 기술을 좀 익혀야 하는데...제가 게을러서요...전 아무래도 선생님이 필요해요...게으른 사람들에게는 '교실'이나 '선생님'이 동기가 되지요.  이 대충주의를 버려야 하는데...

 

 

 

이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은 디트로이트에 기반한 독신 사업가 프리어씨가 디트로이트 외곽에 저택을 지으면서 실내 장식을 목적으로 주문한 것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File:Charles Lang Freer House.jpg

디트로이트시에 1887년 세워진 프리어씨의 저택

 

이 집이 지어진 19세기 말 (1887년)은 미국이 남북전쟁 (Civol War, 1861-1865)을 넘어서서 산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황금 시대를 구가하던 때 입니다. 그래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시기를 황금시대 (Gilded Age)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이 Gilded Age 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미국의 '진정한 소설가, 이야기꾼' 마크 트웨인 (Mark Twain)이 처음 소개한 표현입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와 록펠러,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와 그리고 철도용 기차 사업가였던 프리어등 모두 당대의 재벌들이었지요. 이 신흥 산업국가 미국의 재벌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걸신들린듯) 유럽의 명품들이나 아시아의 명품들을 사냥하고 포획하고 서로 자랑하는 것으로 삶의 기쁨을 누렸던 듯 합니다.  (제 표현이 너무 냉소적으로 느껴지신다면...죄송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뭐 돈갖고 해볼거 다해보고 더이상 할게 없어서 이런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돈이 있어야 문화고 뭐고 있는거니까. 특히, 문화는 돈이 없으면 끝장이 나고 맙니다... )  저야 그저 부자들의 이런 취미 덕분에 그거 헐값에 구경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으므로 불평의 여지가 없지요~ ~   앗참, 2009년 8월에 코넥티컷주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저택을 구경했는데요, 이 아저씨도 집안을 무슨 '중세 사원'처럼 금박으로 장식을 했더라구요.  아주 금칠갑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마크트웨인에게 실망을 하고 돌아서고 말았지요.)

 

 

그래서 이렇게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미국인들이 20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1930년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림으로 가지요.  =)

 

'화환 Garland'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도대체 어디에 화환이 있다는거야?"하고 나름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제목입니다. 여자의 왼손끝에 뭔가 희미한것이 보이실텐데요. 아주 작고 희미한 꽃줄입니다. 그 꽃줄을 시계차듯이 손목에 감지요. 그 보일락말락한 희미한 꽃줄을 그림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미술사가들은 Thomas Wilmer Dewing (1851-1938)이 1920년 이후에는 그림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전하기도 하는데요 (그러고보니 1920년대와 그 이후에 제작된 그림이 안보이는군요. 안그렸다는 뜻인가봐요)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1916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그의 말기작에 해당된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프리어씨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니고 후에 프리어씨가 사들인 것입니다.

 

여인이 앉아있는 의자나 테이블의 다리가 아주 가늘고 간결하지요? 테이블위의 도자기의 딱딱함과 반지르르함이 간결한 화면과 조화를 이룹니다. 여성의 자세나 표정도 '조각상'처럼 정제되어 있고 '고요'합니다. 오직 살아있는 생명체는 여성의 손에 들린 꽃줄 뿐인것 같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그러나 화면의 정 중앙에 배치한 꽃줄이 화면 전체에 고요한 '생기'를 불러일으키는듯 해 보입니다.

 

 

The Garland (화환) c. 191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이 피아노라는 작품은 1891년 프리어가 듀잉에게서 사들인 최초의 작품입니다. 듀잉이 작업하던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발견하여 사들였다고 합니다. 당시에 프리어는 그가 새로지은집의 치장에 열중해 있었고, 실내 일부를 듀잉이 맡아서 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듀잉이 실내장식을 맡은 방에 듀잉의 작품을 걸은 것이지요 (아 돈있는 사람들은 이러고 노는군요 헤헤헤.  난 돈 없으니까, 내가 실내장식 하고, 내가 내 그림 걸고 그러면 되는거지요 하하하.  우리는 셋방에 살아도 재벌과 다를게 없습니다. 내가 내 공간을 장식하고 내 작품을 그려 붙이고, 내가 나를 부려먹고, 내가 나의 명령을 받고, 뭐 혼자서 다 하면 됩니다.)

 

화면이 여전히 간결하죠?  절제되어있고, 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림을 보고, 음, 편안하고 좋구나 이러면 되겠지요. 그래서 듀잉의 그림은 어릴때 침을 흘리며 들여다보던 아슴프레한 요정들의 세계 그림 같아요. 그냥 보면 좋은거죠. 편안하고, 아늑하고...

 

The Piano (피아노) 1891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네가지 숲의 소리'는 듀잉이 뉴햄프셔주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 것입니다. 뉴햄프셔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일부입니다. 저도 지난 여름 (2009년 8월)에 뉴햄프셔주의 농가 (시인 Robert Frost 가 살았던 농장)를 가본적이 있는데요, 뉴잉글랜드의 여름의 숲의 정경이 바로 이 그림속에 스며있다고 할 만 하지요. 그림을 제작하던 당시 듀잉이 프리어와 주고받은 편지에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I wish you could be here taking in this cool fresh air filled with bird notes and scents of flowers... 당신이 이곳에 와서 새들의 노래와 꽃향기 가득한 이 차고 상쾌한 공기를 마실수 있다면 좋을텐데요."

 

 

저는 듀잉의 이와같은 서술이 '사실'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뉴잉글랜드 지방까지 갈것도 없이 제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 워싱턴 지역만해도 강변의 숲길이나 호숫가 숲으로 가면 바로 이런 몽환적인 초록색의 숲에 몸을 잠기게 됩니다. 특히나 이른 봄, 겨울나뭇가지에 새순이 돋기 시작할때부터 녹음이 우거질때까지, 매일 매일 나가서 숲길을 걷다보면 그 연초록이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색조의 변화가 서서히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워싱턴에서 듀잉을 발견하고, 그 이듬해 봄 내내 숲길을 산책하면서 제가 깨달았던것 - "아하, 듀잉의 그림은 근원지가 미국이었구나. 그는 환상의 세계가 아닌, 그가 눈으로 본 아름다운 세상을 화폭에 옮긴것이구나."  물론,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주인공 여성들은 모두 환상의 세계에 살법한 뮤즈들처럼 보이지만, 그의 작품들의 배경은 뉴잉글랜드 지방의 초록색 풍경이었던 것이지요.

 

 

이 네폭 병풍은 듀잉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1895년 듀잉은 파리에서 작업하고 있던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화실에서 일본화와, 휘슬러가 작업하던 일본풍 작품들을 발견하고 일본화 기법에 감탄을 하게 되지요. 듀잉이 이 네폭 작품 작업을 하던 당시에 프리어 역시 여러점의 일본 병풍작품들을 사들이고, '일본화'의 영향이 듀잉의 그림세계에도 스며들었다 할만하지요.

 

 

 

The Four Sylvan Sounds (네가지 숲의 소리) 1896-97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Before Sunrise 작품 작업을 하고 있을때 듀잉은 일본을 방문중이던 프리어로부터 일본화를 한묶음 전달 받습니다. 그리고 일본화의 매력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Kitakawa Utamaro 의 작품들에 열광하였고, 그의 작품에도 일본식 등불이 등장하게 됩니다. Before Sunrise 화면 뒷쪽의 작은 여자가 들고 있는 것이 일본식 랜턴입니다. 심지어 그는 이 작품을 Dedicated to Utamaro (우타마로에 헌정함)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군요.  그리고 그의 작품을 거는 방에 우타마로의 작품도 함께 전시를 하여 두 작품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타마로의 작품을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 (이제부터 18금) 흠...켁...춘화 작품도 엄청시리 많십니다...ㅋㅋ.  아무튼, 앞으로도 여러차례 논의가 되겠으나 근대에 일본화가 서양미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을 '막대'합니다. (orz)  입맛이 씁쓸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죠 뭐...

 

 

 

 

 

Before Sunrise (해뜨기 전) 1894-9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갤러리에서 촬영

 

 

 

 

After Sunset 은 Before Sunrise 와 같은 크기의 그림입니다. 해뜨기전에 붉게 물든 하늘이 보였는데, 해가 지고 난 후에는 저 숲 가장자리에 기웃이 보이는 것은 저녁달 일까요?  이 작품은 듀잉이 'The Pink Dress'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다음에 보이는 그의 The Blue Dress'와 짝을 이루고 있지요. 분홍 드레스의 아가씨와 푸른 드레스의 아가씨의 포즈가 일치합니다.

 

 

 

After Sunset (해가 진 후) 1892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듀잉은 프리어 저택의 방에 전시된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이 작품을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The Blue Dress (푸른 드레스) 1892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다음에 소개되는 작품들 역시 프리어의 소장품들입니다.  악기를 들고 있거나 연주하는 세명의 아가씨들이 각각 그림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림 속의 악기, 연주는 시각적인 예술과 청각적 예술의 조화를 가능케하지요.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상상속에서 악기의 소리, 울림, 곡조를 듣고 흥얼거리게 됩니다.  참, 예술지상주의적인 작품들이지요.  듀잉의 작품들속에는 인간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것 같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다운 여인들과, 아름다운 악기.

 

이것이 듀잉의 세계입니다.  아마도...듀잉이 미술사가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사람들의 삶의 양태로부터 동떨어진 너무나 예술지상주의적인 듀잉의 미술에 대한 태도가 아마도 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슈'가 없쟎아요.  부자들의 눈을 기쁘게 하는 장식물로 적당했을뿐...  한마디로, 그에게는 페이소스 (pathos)가 없었다는거죠.

 

(계속...)

 

 

 

Girl with Lute (류트와 소녀) 1904-1905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Lady Playing the Violincello (바이올린 첼로를 연주하는 숙녀) ca. 1908

Oil on Wood Panel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An Artist (예술가) ca. 190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프리어 갤러리에서 촬영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