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 '이재명은 안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집은 경상도나 전라도하고 별로 인연이 없는 대대손손 용인 사람들이었다. 용인에서 순박하게 농사나 짓고 사는 씨족 공동체 마을. 거기가 내 고향이다. 온동네 사람이 다 일가친척이고, 가끔 보이는 타성받이 (성씨가 다른 사람들)들은 사이좋은 이웃으로 존재했지만, 그러나 일가붙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가갸거겨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타성받이'라는 말을 알았고, 우리 일가붙이와 일가붙이가 아닌 사람들을 구별할수 있었다. 용인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순박한 농민들은 대체로 진보도 보수도 아닌체로 - 꼭 구분을 해야 한다면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성장한 나는 자동으로 그들의 '반대'쪽을 향했을 것이다. '저 사람들이 이유없이 나를 푸대접하므로 나는 저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기 힘들다. 저 사람들이 이유없이 나를 푸대접하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은 옳지 않다. 저 사람들이 누군가를 푸대접한다면 나는 푸대접 받는 사람들 편에 서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일가붙이들이 '타성받이'라고 일컫는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에게도 꼬박꼬박 공손하게 인사를 했고, 그래서 그 타성받이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내가 공손히 인사를 할 때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이뻐해주셨다. 하여튼 나는 내 주위의 어른들이 누군가에 대하여 편가르기를 할 때 바로 심정적으로 (말없이) 주위어른들의 반대편에 섰다. (난 당신들과 반대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나를 푸대접하므로.) 만약에 그분들이 나를 '여자'라는 이유로 푸대접하지 않고 '남자'하고 똑같이 대우하며 키웠다면 아마도 나도 그분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자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김대중'을 계속 지지했다. 주위 어른들이 '김대중은 아니지...' 했으므로. 그들은 수십년간 '김대중은 아니지'라고 말했고, 나는 (속으로) '그러면 나는 김대중이지' 했다. 결국 온갖 푸대접을 견딘 끝에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을때 나는 뿌듯했다.
'김대중'에 대해서는 두가지 추억이 있다.
김대중의 추억 1
1986년, 나는 그로부터 Job Offer 를 받은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김대중이 동교동에 있을때였다. 어느날 "미쓰리, 나하고 동교동에 가봐야겠어. 선생님께서 영어 잘하는 비서가 필요하신데, 미쓰리가 적격이야" 하고 사장이 제안했다. 그는 후에 국회 사무처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그런데 그 비서 자리가 오기전에 김대중씨와 내가 한번 스친적이 있다. 어느날 사무실로 온 전화를 받았는데, 그 전화는 사장만 받는 특수 전화였다. 그런데 아무도 없고 전화벨이 자꾸 울리길래 내가 받았다.
* 미쓰리 (나): 여보세요
* 저쪽: 어...김*랑이 바꿔.
* 미쓰리 (나): 사장님 자리에 안계십니다.
* 저쪽: 그래? 어. 그런데 전화받는 사람은 누구야?
* 미쓰리 (나): 저 여기 직원인데요. 그런데 왜 자꾸 반말하세요?
*저쪽: 뭐? 너 누구냐?
*미쓰리 (나): 계속 반말이시네. 저 여기 직원입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 저쪽: 허허. 알았다. (전화끊음)
그 이후로 사장은 별말이 없었다. 그리고 親切 (친절)을 유려한 붓글씨로 내게 써 주었다. 하하하. 그런데 며칠후 사장이 나에게 김대중씨 집으로 가자는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속담이 이 사건에 해당되는 것이리라. 갓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 뵈는거 없이 오만방자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원래 '비서'따위는 꿈을 꾼 적이 없었다. 내가 비서가 어울리기나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해 가을 나는 독일회사에 비서로 들어가며 희희낙락했다). 어쨌거나, 알았다고 하고 집에 가서 밥먹으면서 지나가는 말로 얘기를 했다, "김대중씨가 영어 잘하는 비서가 필요하대요. 우리 사장이 그분하고 절친인데 저를 추천했어요. 내일 가보려고요." 이 말에 우리 아버지가 눈썹을 세우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씀하셨다 -"기집애가 뭐 할려고 정치판에 끼어든다는거야. 그것도 김대중이 비서? 미쳤어? 집어치워!"
그래서, 나도 정치인 개인비서질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안가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 전화로 왜 반말하냐고 딱딱거리던 초년병 '여자아이'를 밉게 보지 않고 비서로 면접을 보려했던 그분의 인품이 놀랍기도 하다. 내가 인물이 꽃같이 이쁘기를 한가, 목소리가 아나운서처럼 하늘하늘 하기를 한가, 싹싹하고 나긋나긋하기를 한가, 그렇다고 SKY 대학을 나왔나. 그냥 영어좀 잘 한다는거 외엔 볼것도 없는 평범하기 짝이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집에 가지 않았고 그렇게 흘러갔다. 아무튼 대통령 후보로 그가 나올때마다 나는 그를 꾹꾹 눌렀다.
김대중의 추억 2
2007년 가을 (1986년에서 21년이 지났구나). 퇴임 대통령이었던 그가 워싱턴 디씨를 방문했다. 무슨 평화, 햇볕정책 관련 행사에 초대받아서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뭔가 연설도 하고. 그때 나도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로 이사한 후였으므로 노벨평화상 받는 전임 대통령과 그 부인을 구경하러, 민간인으로 행사장에 갔다. 행사장에서 이희호 여사와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냥 기념사진 찍고 싶다고 하니까 순순히 응해주셨다.). 그곁을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박지원씨가 지키고 서 있었는데 내가 감사하다고 인사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 김대중씨 존경한다고, 집에 아이들도 있는데 못 데려와서 안타깝다고 인사를 하니까, 눈이 초롱초롱하고 눈치가 빠른 박지원씨가 옆에서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연락을 주셨다. 윌라드 호텔로 애들 데리고 와서 김대중씨 부부와 사진을 찍으라고. 그래서 그 다음날 윌라드에 온 가족이 가서 김대중씨 부부와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사진 어디있지?...)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씨가 애들에게 덕담을 해주셨다. 뭐 그게 전부다. 이런 일은 그분들의 일상의 의무중 하나였으므로 그분들은 기억을 못 하실것이다. 게다가 이미 천국 가셨으니 상관도 없는 일이다. 기억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내가 중학교에 갈때 그는 공장으로 갔기 때문에
내가 지금 김대중의 추억을 꺼내는 이유는 - 이재명 때문이다. 이재명은 1963년 12월생이다. (구글에서 프로필 뒤져보면 나온다). 나보다 한살 위다. 내가 1963년생들 틈에 끼어 학교에 다녔으므로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때 그도 경상도 시골 구석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갔을거다. 내가 집에서 푸대접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나는 부모의 보호아래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려움없이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이재명은 가난한 집 형제많은집 일원으로 -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때 공장으로 갔을것이다. 그것 때문이다. 내가 중학생 교복을 입고 후리지아 향기를 맡으며 중학교 교실로 들어설때 그는 공장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향했다는것, 그 것 때문이다. 그가 공장 프레스공으로 일하다가 한쪽 팔을 다쳤다는것 그 것 때문이다. 나는 심정적으로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어릴때 동네 어른들은 '김대중은 안돼'라고 하던 소리를 나는 다시 듣고 있다. 이제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재명은 안돼.' 왜 안되는데? 나는 묻지 않는다. 어릴때도 나는 묻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만 다짐하고 다짐했을 뿐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어. 누구는 안된다는 것은 비논리야. 당신들의 비논리에 나 역시 비논리로 답할 뿐이다. 나는 공장으로 간 소년을 응원하고 싶을 뿐이야. 다른 것은 없어. 공장으로 간 소년에게 내가 빚을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겐 이런 기억이 있다. 어릴때 시골에서 함께 자란 '갑순(가명)'이란 친구가 있었다. 언니하고 동갑쟁이였다. 언니가 중학교에 들어갈때, 그 초봄의 시린 날, 갑순이 어머니가 갑순이를 데리고 서울의 우리집에 들르셨다. 그 아줌마가 입었던 외출복은 우리 엄마가 입다가 준 헌옷이었다. 그 옷을 입고 갑순이를 끌고 그 아줌마가 서울에 온 이유는 - 미아삼거리의 약국집에 갑순이를 '식모'로 취직시키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갑순이와 그 어머니가 언니와 내가 함께 쓰던 방에서 잠을 잤는데 - 자다가 머리맡의 '자리끼 (냉수)'가 엎질러졌다. 잠버릇이 사나운 내가 버둥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난 아주머니가 그 물 엎지러진 것을 보시고 "내가 안그랬다, 내가 안그랬다.."하고 자꾸 그 말을 했다. 아무도 물 엎질러진 것에 대하여 크게 신경쓰지 않는데 아주머니는 자꾸만 변명하듯 그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게 미안했다. 밥을 먹고 학교로 향하는게 미안했다. 식모살이 간다는 갑순이를 놓아둔채 언니도 나도 학교로 향하면서 - 학교 가는 나 자신이 미안했다.
나는, 남들이 학교 다닐때 공장에서 일을 했던 그 소년이 높은 자리에 가는 것에 대하여 '입지전'적이고 '개천에서 난 용'이야기이고 뭐 이래저래 힘없고 가난하고 희망없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청소년들이나 보통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거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것 때문이다. 난 원래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똑똑한 사람에 대해서 점수를 많이 쳐주는 편이다. 내가 남편과 결혼한 이유도 그가 지지리 가난한 집 청년가장이었기 때문이다. 딸린 식구들 주렁주렁하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쌓였는데 그 작은 체구에 그 책임을 다 지고 눈이 초롱초롱하길래 응원해주고 싶어서 결혼했다. 덕분에 지긋지긋하게 고생했지만 그만큼 사랑도 받았고 대접도 받았다. 내가 부유한 집 아들하고 결혼했다면 그 집에서 나 유학하는거 봐줬을까? 하지만 가난했던 내 남편이 목숨을 걸고 나를 유학시켜주었다. 나는 그래서 그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난뱅이 출신 인재들을 여전히 응원한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다. 내 취향이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재명은 안된다'고 말하면 말 할 수록 나는 속으로 외친다. 당신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나는 이재명을 응원할수밖에 없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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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돈 좋아한다. 부자 좋아한다. 부자 되고싶다. 부자들하고 놀고 싶다. :-) 그런데, 자수성가한 부자들을 더 좋아한다. 고생고생해서 부자된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 그들에게는 '스토리'가 있다. 물려받은 부자들에게는 '스토리'가 없다. 그래서 그런거다. '스토리'가 있어야 재미있는거니까. 지도자도 '스토리'가 있어야 재미있다. 당신에게 어떤 스토리가 있는가? 당신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내게 매력이 있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