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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s Search for Meaning, Victor Frankl

Lee Eunmee 2024. 1. 29. 01:34

 

어릴때 (대학시절에) -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한글 번역서로 요즘 '먹방 선수'들이 한꺼번에 라면을 열다섯봉지씩 먹어치우듯이  그렇게 그냥 속도전을 하듯 방학동안에 하루에 한두권씩 책을 읽어 '치우던'시절 한번 읽고 지나갔던 책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 책을 읽으며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냥 이야기가 너무 끔찍하고, 그냥 대체로 끔찍하고 괴로운 '안네 프랑크의 일기'류의 무엇으로 대충 읽고 지나간 듯 하다.  그러니까 중학교 때 사회선생님의 스토리텔링으로 '안네의 일기'를 발견하여 - 그 책을 무슨 사서삼경처럼 모시고 읽었던 시절이 있었고, 이에 대한 역작용으로 머리가 굵어진 후 부터는 '이차대전과 유태인들 고통겪은 이야기'에 대하여 그냥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후로도 내내 그런 기분이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함과, 유태인들의 고통과, 그들이 역사의 다른 장에서 펼치는 '만행'에 대한 삐딱한 시각이 여전한 가운데 - 얼마전 이 책이 눈에 들어왔고, 이제서야 왜 이 책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고 읽는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으니 -- 나에게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세월'과 '경험'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물론 내가 저자와 같이 끔찍한 고통을 겪지는 않았으므로, 여전히 그가 말하는 것의 심연까지 닿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지금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이해하고, 공감한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그대로 (내가 여전히 사색하고 있는 하박국 3장 17-19)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금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를 지옥에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거룩한 책'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에 소개된 '죽음의 수용소'와 같은 극한 상황의 경험치가 필요했을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죽음의 수용소를 전전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2022년에 내가 처했던 상황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수용소와 다를바가 없었던 위급한 병동. 그 안을 돌아다니던 친절하거나 불친절했던 감시자들, 친위대원들, 늘 기웃대고 있던 죽음. 5분단위로 전해지던 코드블루.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  내가 유일하게 상황을 컨트롤 할 수 있었던 것은 - 성경책을 펼치고 시편을 필사하거나 조용히 기도하는 일이었다.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을때는 찬송가를 불렀다.  다른 사람이 있을때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방해를 하면 안되므로.  조금 여유가 생기면 '수용소'가 마련해준 기도실에 가서 한시간쯤 기도를 드렸다.  '병동'과 '수용소'가 참 흡사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발견했다. 

 

이 책의 저자가 기술한 것을 보면 -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현명하게 상황에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넘어서는 무엇이 간절히 필요하던 시기에 나는 죽음을 넘어서는 존재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위로 받았고, 내가 왜 하박국의 노래에 매달려 있는지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삶을 들여다보면 -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빠져나가기 힘든' 수용소를 살고 있는 셈이다. 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것인가. 저자는 고통의 이야기를 하며 스피노자의 윤리학 일부를 소개하는데 (대략 내 말로 설명하자면 )-- '고통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때, 고통이 삶의 의미로 다가온다, 곧 우리는 고통의 심연에서 벗어난다는 것인데 -- 이는 불교에서도 역시 동일한 가르침이 있고, 나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수용소'에 있을때 받았던 것같다.  그 당시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지금도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다. 

 

 

이 책에 소개되는 '테헤란의 죽음' 이야기는 작가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어느 부잣집의 머슴이 어느날 '저승사자'를 맞닥뜨렸다. 깜짝 놀란 모슴은 부자 주인에게 저승사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테헤란으로 도망가려하니 말 한필을 달라고 한다.  부자는 머슴을 살리기 위하여 가지고 있던 말중에서 가장 빠른 말을 그에게 주고 빨리 도망가게 해준다.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머슴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승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왜 우리 머슴을 놀라게 한거요? 하고 주인이 묻자 저승사자가 답했다, "놀래키려고 한것은 아니고, 내가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직 여기 있길래 내가 그만 깜짝 놀랐지 말입니다."  결국 머슴은 사력을 다하여 예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거다.  그러니 우리는 '운명'을 회피하려고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황'에 대하여 회피의 가능성이 없을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는 말하고 싶어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속수무책일때 (가령, 갑자기 죽을병 선고를 받았을때, 갑자기 사고로 인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재난을 겪고 있을때, 구약의 욥과 같이 모든것을 잃고 괴로움에 빠졌을때, 그 재난에는 내 잘못도, 합리적인 원인도 그 무엇도 없을때. 내가 속수무책일때)  그때, 나의 자세에 대하여 - 저자는 바로 그때 삶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방향을 잡으라는 조언을 하고 있다, 그의 경험에 의거하여.  그는 운좋게 살아남았지만, 설령 가스실에 끌려가 죽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중에도 성자들이 있었고, 선한 사람들이 있었고, 악당들이 있었다.  살아남을 운명이라 살아남았듯, 죽을 운명이라 죽었을 뿐이다. 그 운명에 어떤 설명을 기대해선 안된다.  이런 면에서 '운명'과 '우연'은 동일한 뜻으로 보인다.  그저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회피하건 환영하건 일은 무심하게 일어난다. 이 때 이것을 대하는 나의 자세만큼은 내가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수용소에 끌려와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어가면서 한 소녀가 창밖에 간신히 보이는 밤나뭇가지를 매일 내다보는데 소녀는 나뭇가지가 말을 거는 듯한 상상에 빠진다, 나무는 이렇게 말한다고, "나 여기 있어. 나 여기있어. 나는 영원한 생명이야. 그러니까 너도 괜챦아." -- 언젠가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저자의 뜻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삶이 고통스러운가? 이 책이 어떤 위로나 혹은 해법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