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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소용없다. 딸이 좋다"라는 말이 나는 싫다

Lee Eunmee 2023. 12. 10. 23:22

 

토요일에 친정에 들러서 엄마를 모시고 미장원에 들렀다. 파마한지 오래된 짧은 커트머리의 엄마가 초라해보여서 파마를 해드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거동하기도 힘들고 하니까, 언제부턴가 파마를 안하셨다. 그냥 귀챦고 힘들어서이다.  그래서 내가 모시고 가서 머리를 라면처럼 보글보글 파마를 하기로 한거다. 노인들은 그렇게 파마를 하면 훨씬 씽씽해보이고 한결 젊어보이신다.  

 

나는 파마기 없는 짧은 커트머리의 백발의 노인 모습이 슬프다. 왜냐하면,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들 헤어스타일이 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짧게 깎은 커트머리.  위생에 가장 편리할 것이다. 단지 그러한 이유로 요양원에 계시는 분들 머리는 다 똑같다.  엄마는 자기 집에서 살고 있는데 벌써부터 요양원 헤어스타일이 될 필요는 없다. 나는 엄마가 요양원에 가시는 일이 없어 자기가 살던 집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시기를 희망하고 있다. 사람의 일은 그러나 장담할수 없다. 단지 소망할 뿐이고 - 하나님께서 나의 소망을 알고 계시니...뭐 알아서 해주시겠지.

 

엄마를 모시고 미장원에 가니 수년간 그자리를 지카는 '노인 전문' 미장원 원장님 (그곳은 너무 작고 초라해서, 젊은이들은 찾지 않고 주로 파파 할머니들이 찾으신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노인전문 미장원이라고 부른다) 은 딸보다도 더 살갑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본래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사람처럼 노인을 공경하고 친절하다.  그 원장님이 나를 반기며 그러신다, "아이구, 늙어봐 아들 다 소용없어. 딸이 최고지. 따님이니까 이렇게 파마도 해드린다고 하는거지."  나 듣기 좋으라는 칭찬의 말씀이다.

 

내가 엄마를 모시고 어딜가나, 사람들은 듣기좋은 칭찬의 말처럼 "아들 다 소용없어. 엄마는 딸이 있어야 해. 저것 좀 봐. 딸이 있으니까 저렇게 엄마를 모시고 다니지..." 이런다.

 

그런데, 나는 문득 그 소리가 참 듣기가 싫어진다. 

 

 

늙으면 아들 다 소용없고 딸이 최고라는 그 말씀속에 들어있는 속뜻은 이런거다 -- 아들 높이 받쳐서 잘 키우고, 딸은 아무렇게나 대충 막 키워도 나중에 효도하는건 그 막키운 딸이다.  나는 나에 대해서 함부로 대했던, 나의 존엄성에 신경쓰지 않고 대충 키웠던 내 부모님에 대해서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성장한 사람이다.  돌아보면 비교적 유복하게, 평범하고 훌륭하신 부모님 슬하에서 큰 고생 안하고 잘 자랐으므로 불평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되지만 - 그런 가운데에서도 아들과 딸 사이에 차별을 했던 것 역시 사실이어서 나는 그 차별에 분노하면서 성장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나는 불평해서는 안되는 유복한 사람이지만, 남매들 사이에 경험한 '차별'에 대해서도 선명한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차별'의 기억이 이따금 나를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몰고간다. 

 

그래서 남들이 '딸이 좋지'라고 말을 할때, 나는 속으로 혼자서 말한다, 나를 식모 새끼처럼 키워놓고, 이제 나이 먹으니까 여전히 만만해서 나를 종년처럼 부려먹기가 좋지?  말 안해도 알아서 척척 챙겨주니까 부려먹기 참 만만하지?  -- 이렇게 속으로 분노하고나서 못난 나의 모습에 내가 실망한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못되 처먹은 인간인 것인가? 

 

'딸이 좋다'라는 말 속에 들은 그 불쾌한 함의 -- 비록 미천하나 나중에 나에게 도움이 될 비천한 존재. 

 

나는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내게 딸이 없음을.  늘그막에 종년처럼 부려먹을 딸이 내게 없는것이 참 다행이다. 왜냐하면, 나는 딸을 종년처럼 부려먹고 싶지 않은데, 만약에 내게 딸이 있다면 결국 나는 늙어서 그에게 의지하게 될테니까. 그의 부담이 되고 말테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없어서 다행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딸아. 나는 네가 이 세상에 - 내 곁으로 오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너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너를 슬프게 하고 싶지도 않고, 너를 화나게 하고 싶지도 않은데 내가 그걸 지킬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네가 내 곁에 오지 않은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딸아,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딸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준다.

 

내 두 아들은 내게 무심하다. 엄마가 너무나 씩씩하게 잘 살아내고 있으므로 그 자식들은 태평하다.  나는 내게 무심한 두 아들에 대하여 아무런 불만이 없다.  내 걱정 말고 너네나 잘 살아라.  내가 죽을때까지 그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나는 하나님만 의지할거다. 그러고 싶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살다가 천국으로 가야 할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