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3. 1. 11. 19:24

 

전에는 사진속의 이미지처럼 투명한 플라스틱 병에 들어있는 검정색 알약 모양의 러쉬 치약을 사서 사용했었는데, 이번에 러쉬 매장에 가니 납작한 통에 담겨져있어서 납작통에 담긴것 두통을 샀다.  (투병한 병모양 패키지가 더 좋아보인다).

 

영국기업 러쉬는 한국에도 매장이 들어와있고, 어차피 수입품이므로 가격대도 한국이나 미국매장이나 별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딱히 미국 러쉬매장에서 제품을 구입할 이유가 없는데 이 알약모양의 치약만큼은 한국 러쉬매장에서 취급을 안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알약모양의 치약으로 양치를 하면 상쾌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이것을 좋아했는데, 다 떨어졌길래 한국집 근처 러쉬에 가서 알약치약을 달라니까 그것은 한국 매장에서는 취급을 할 수 없는 품목이라고 점원이 알려주었다. 점원의 설명으로는 러쉬매장에서 판매하는 비누, 샴푸, 목욕비누, 로션과 크림 이런 것들은 상관이 없는데 '치약'종류는 '의약외품'으로 이것을 취급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던가? 뭐 그런 한국만의 특수성으로 한국 매장에서 취급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알약 치약이 맘에 드는 몇가지 이유:

  1. 알약 하나만 꺼내 쓰면 되므로 치약을 짜서 쓰는것에 비해서 '정량' 사용이 가능하다. 
  2. 아무래도 휴대가 간단하다고나 할까? 특히 집이 아닌 직장이나 외부 혹은 여행지에서 알약 모양이 편리하고 간단하게 여겨진다. 
  3. 남들이 눌러 짜는 치약 쓸때 나는 알약형을 쓴다는 것이 어떤 특별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제멋이다. 
  4. 뭐랄까, 양치후에 입안이 더욱 개운한 기분이다. 

 

 

 

이런 심심풀이같은 이유로 집으로 돌아가는 보따리에 러쉬 미국매장에서 산 알약치약을 두통 챙겼다.  러쉬 제품은 사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내가 쓸것은 못 사고 누군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을 때 큰맘먹고 가서 '선물용'으로만 사는 편이다. 러쉬 '치약'은 내가 내게 주는 특별한 선물 같은거다. 하하하. (나는 참 어리석다. 남에게 선물할때 살 수 있는 것을 왜 나를 위해서는 벌벌 떨고 못 사는것인지.)에 사실 뭐, 이런거 안써도 아무거나 싼거 사서 써도 사는데 아무 지장없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1. 11. 19:08

미국의 그로서리점 약품 선반에 널려있는 수면보조제들

 

나이 먹으면 거의 모든 영역에서 '몸이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데, 나의 경우 '수면'도 노화 현상중 한가지이다. 갈수록 수면 시간이 짧아져서 새벽 세시에 깨면 잠들기 힘든 문제도 있고, 한국과 미국을 오갈때 작년까지도 하루이틀 사이에 시차적응이 쉽게 되었는데 올해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시차적응이 안되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수면보조제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약품코너를 기웃대다가 나는 '미궁'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선반에 수면 관련 약이 너무나 많아서 - 도대체 무엇을 골라야 하는것인지 가늠이 안되었던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 다니엘 카네먼이 일찌기 그의 저서 Thinking Fast and Slow 의 도입부에서 바로 이런 문제를 지적한 바가 있다.  상점에서 청바지를 사려고 갔는데 종류가 너무 많아서 헛갈려서 사기가 힘들었다거나, 식품 코너에 전시된 잼이 종류가 너무 많아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망설이다가 사는것을 포기한다거나 하는.  정보나 선택지가 필요이상으로 많을 때 오히려 사람의 판단력에 도움이 안된다는.  그야말로 내가 바로 그 꼴이었다. 수면보조제를 뭘 사야 할까 망설이고 고민하느라 그로서리를 세번째 들른날 마침내 '아무거나' 두가지를 골라서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마침내 고민과 방황끝에 그냥 '아무거나' 고른 두가지가 (1) 타이레놀 피앰 (2) ZzzQuil, back to sleep 이란 것이었다. 잠을 푹 자기위해서 조지타운까지 강변길 따라 걸어갔다 오는 10마일의 워킹을 하고 몸이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잠이 오지 않아 일단 널리 일반인에 알려진 '타이레놀 피앰'(Simply Sleep)을 먹었다. 약을 먹자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잠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도저히 세시간이 지나도록 잠을 이룰수가 없어서 결국 ZzzQuil 을 먹었는데 이 약을 먹자 그야말로 30분이 안되어 잠에 빠져들었고 약 5시간을 푹 잤다. 

 

 

좋았어, 잠을 잤단 말이지.  그래서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 도합 네 밤을 그 ZzzQuil을 먹고 잠을 청했고, 4-5시간을 그 약에 의지해서 잠들수 있었는데 그래서 이 약을 좀더 사다가 한국집에 돌아간 후에도 필요할때 써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 나는 이 약의 '부작용'에 눈뜨게 되었다. 잠을 자기는 잤는데 눈 떠있는 동안 머리가 맑지 않고 멍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냥 멍한거다 온종일. 입맛도 없고, 미릿속은 휴지로 가득 찬것 같고, 속도 울렁거리고, 정상이 아닌거다. 

 

그래서 수면보조제를 끊고, 우짜든동 (어찌 되었건 간에) 수면보조제 없이 자연스러운 수면을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수면제 없이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교수 미국인 동료중에 수면장애 얘기를 하면서 '멜라토닌 없이는 잠 들수가 없어'하고 한숨지은 친구가 있는데, 그 멜라토닌이 정말 안전할까 의구심이 든다. 잠이 안올땐, 정말 몸이 녹초가 되도록 움직여도 잠이 잘 안온다. 오늘밤 나는 그래서 날밤을 새고 앉아있지만, 뭐 낮에 좀 눈을 붙이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  수면보조제는 먹지 않을것이다. 그거 먹으면 잠을 자긴 하는데, 잔것 같지도 않고 머릿속에 휴지뭉치가 들어있는 느낌이 든다. 

 

아무튼 미국은 수면보조제의 왕국 같다. 수면을 돕는다는 약이 참 많이 널려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2. 22. 12:53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주제 관련하여 추천서적을 찾던 중  한국계미국인 작가 Cathy Park Hong의 Minor Feelings: An Asian American Reckoning이 눈에 띄어 아마존 킨들로 내려받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을때까지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내용과 메시지를 가진 책이었다.  (아무래도 이 책을 어떤 '교재'로 선정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내게는 '충격'적이고 그리고 작가와 나를 비교하며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여러가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일단 영문원서를 읽는데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보통사람들 혹은 이민자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미국사회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혹은 '내 자식들과 그 후손들'이 어떤 각오로 살아야 하는지, 이 책이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겠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2. 15. 19:38

미국 영주권자들은 일년에 최소 2개월 이상은 미국에 체류해야 한다. 미국 밖에서의 체류 기간이 일년이상 길어지게 된다면 소정의 '재입국 허가 (2년)'를 받고 나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알려져있다. 미국 밖에서의 체류가 6개월 이상이 되거나 1년가까이 된다면, 미국 입국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지난 수년간 미국집에 드나드는 것이 문제가 된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 미국 입국은 사정이 달랐다. 지난 여름에 나는 한국을 떠날수 없었고, 11개월만에 미국에 입국하게 된 것이다. 최악의 경우, 입국 심사장에서 귀국선을 탈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 '너무 오래' 미국을 떠나 있었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었지만 - 사람에게는 사정이란 것이 있으므로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 정신으로  워싱턴 덜레스 공항 입국 심사관 앞에 섰다. 

 

 

심사관: 너 꽤 오래 미국에서 떠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나: 알고 있다. 나로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 구구절절한 상황 설명 *** 이러한 이유로 나의 미국 입국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많이 좋아져서 마침내 미국의 가족 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내 설명을 들은 심사관은 상자에 내 여권과 그린카드를 담아주면서 저기 저쪽 오피스로 가보라고 안내를 해 주었다. (입국 보류)를 뜻하는 것이지. 예상했어. 그러면 거기 가서 다시 내 상황을 설명하면 되지. 

 

 

입국장에서 입국보류를 당한 사람들이 가게되는 오피스로 향하니 뭐 여러가지 상황으로 그쪽으로 온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20여분 앉아서 대기하니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 입이 거친 심사관: 너 꽤 오래 미국에 오지 않고 있었어. 
  • 얌전한 나: 11개월간 오지 못했어. 왜냐하면 ***** ***** 한 상황 때문이었어. 
  • 입이 거친 심사관: 내가 네 말을 믿을거라고 생각해? (매우 냉소적으로) 너 솔직히 말해봐 미국에 안 살지?
  • 얌전한 나: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적인 사정으로 미국과 한국 두 대륙을 오가며 살고 있어. 그러므로 나는 미국에 살고 있다고 확언해. 나 역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아야 하는 내 인생이 피곤해. 하지만 그것이 내 운명이면 그대로 사는수밖에. 그러니 내 삶을 네식으로 판단하려고 하지는 말아. 나도 11개월간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때 영주권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입국 거부 당하면 하는수 없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온거야. 하지만 나는 설명을 정확히 하고 싶었어. 
  • 입이 거친 심사관: (내가 그 녀석의 입이 거칠다고 말하는 이유 = I don't want to f*** off one's life but I don't think you are living in the U.S. 나는 남의 인생을 *되게 만들 생각은 없지만 네가 미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라는 식으로 F-word 를 써가면서 말했기 때문에 내가 매우 기분이 나빴다. 되게 무례한 녀석이었다.) 너 돈 얼마 갖고 들어왔어?
  • 얌전한 나: 자식들 약혼하는데 선물로 반지 사주려고 *천 달러 갖고 들어왔어. 여기 있어 (봉투 꺼내 보여줌) 
  • 입이거친 심사관: 얼마라고? 정확히 얼마?  (내가 예컨대 3,000 달러라고 하자 그는 뭐라고 3만 달러? 하고 되 물었다. 내가 아니 3,000 달러.  내가 또박또박 대꾸하자, 그는 약간 후퇴하며, '뭐라고 삼만 달러가 아니고 삼천이라고? 우물우물') 그래서 내가 또박또박 말해줬다. '일인당 만달러 이하면 세관 신고도 할 필요가 없어. 뭐가 문제지? 아들  둘이 약혼하면 부모가 큼직한 선물을 하는것이 한국인의 문화야.' 
  • 입이 거친 심사관: 나도 이런 일로 네 삶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 다음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한국체류를 하게 되면 미국 입국에 문제가 생길거야. 이번에는 통과시켜주지만 다음에는 힘들거야. 
  • 얌전한 나: 나도 알고 있어. 이번에도 입국을 못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어. 네가 나를 통과시켜준다니 참 고마워. 나로서도 자식들 곁으로 돌아올수 없어서 고통스러웠어. 
  • 입이거친 심사관: 그래 앞으로 조심해. 잘가.
  • 얌전한 나: 고마워 메리크리스마스!

 

 

 

 

사실 지난 여름에 사정상 미국으로 가지도 못하고, 게다가 영주권 연장 신청한 것도 소식도 없고 그런 상황속에서 -- 나는 이제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자유롭게' 살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영주권 유지하겠다고 미국에 드나들기도 귀챦고 영주권은 필요하면 다시 만들면 되는 것이고 뭐 그런 입장이었다. 올 겨울에도 내가 미국에 올수 있을지도 분명치 않았다. 나는 거의 모든것을 '포기'하고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식 없어서 포기했던 영주권 연장 승인이 이루어져 새 영주권이 날아왔고, 여름에 발목을 잡았던 문제가 겨울에는 발생하지 않아서 미국으로 올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내 현재의 상황이 정말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흘러가고 있기때문에, 되면 되고 말면 마는거고, 죽으면 죽는거지 겁날게 없다는것이 요즘 나의 생각이고 태도이다.  이런 되면 되고 말면 마는 태도에 한가지 더 -- 내 삶을 유지하는 '기운'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의지'이다.  내 삶이 정말 한치앞도 내다보기 힘들게 하루하루 흘러가기 때문에 나로서는 하나님께 의지해서 사는 것 외에 답이 없다. 하나님께 의지할수밖에 없는 이 캄캄한 하루하루 속에서 나는 구석에 물린 쥐가 사자를 물듯 - 겁날게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입국 심사관 앞에서 내가 기죽지 않고 초연하고 당당하게 대꾸할 수 있었던 이유.  '입국 안시켜도 그만이야. 영주권이고 뭐고 다 불살라버리고 그냥 살면 돼' - 이런 초연함. 이걸 그 녀석이 어쩌겠는가...

 

 

 

 

이번에 적법한 법위내에서 내가 저축한 현금을 많이 갖고 왔다.  미국 드나들기도 귀챦아서 정말로 영주권이고 뭐고 다 물려버리고 미국 돌아다니는 대신에 해외여행이나 돌아다닐까 그런 생각으로 - 자식들에게 큰 선물을 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참고로 개인당 일만달러 미만까지는 세관신고 안하고 적법하게 갖고 입국할 수 있다.) 그것도 나에게는 큰 돈이지만, 정말 부자들에게는 샤넬가방 하나 값이나 될까?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죽고 살릴만한 큰 금액이기도 하다. 무사히 입국하여 자식들 품에 안기니 안락하고 기쁘다. 잘생긴 미남고양이 토마스와, 못생긴 주제에 건방을 떨어서 더 귀여운 까만 고양이 '흑둥이'가 밤새 곁에서 자고 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 

 

 

* 피치 못할 사정으로 6개월 이상 혹은 1년 이상 미국에 체류하지 못한 영주권자가 미국으로 되돌아갈때 - 이것이 처음 발생한 경우라면 쫄지 마시고 피치 못할 상황에 대하여 조리있게 설명할 준비를 하시고 미국 입국을 하시면 될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입국이 힘들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도 사전에 이런 문제에 밝은 친구로부터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움직였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2. 13. 22:25

 

 

 

CPR =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심폐소생술

AED = Automatic External Defebrillator 자동심장충격기 

Heimlich Method = 하임리히법

 

며칠전에 심폐소생술, 자동심장충격기 사용 방법, 하임리히 방법등 긴급구호관련 세가지 방법을 약 세시간에 걸쳐서 교육받았다. 2015년에 미국 레드크로스에서 교육 받을때는 50달러 넘는 돈을 내야했는데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양질의 교육의 무료로 받았으니 참 우리나라 좋은나라이다.

 

사진에 보이는 CPR 연습용 더미 (dummy, 사람 모형)는 2015년에 미국 버지니아에서 교육 받을때는 그냥 '더미'에 불과했는데 그 사이에 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 우리가 제대로 정확하게 눌러눠야만 머리까지 불이 들어오게 만들어져서, 우리가 이걸 제대로 하는지 안하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놀라운 기술이다!!! 감동 받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응급처지 교육이 얼마나 좋아졌냐하면 - 이 교육에 참가한 모든 교육생들이 이 '더미'를 가지고 연습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냥 보여주기만 하고 구경만 하다가 나올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걸 참가자 모두에게 시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원래 교육은 그래야 하는거니까. (옛날에,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하던 시절 나의 남편은 체육시간에 수영을 배웠는데 - 수영장은 꿈도 못꿨고, 학교 계단에 줄지어 서서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서 허공에 팔을 저으며 수영하는 동작을 하고 그것으로 수영시험을 쳤다고 한다. 하하하하. 허공에서 팔을 저으며 수영시험을 치른 위대한 시대가 있었다. VR의 선구자들이었다고나 할까.)

 

AED할때 기억해야 할 것: 내가 쓰러진 사람을 봤다면 - 다가가서 의식이 있는지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면서 어깨를 톡톡쳐서 의식을 확인하고 의식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근처의 사람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어서 119에 신고하세요!"  다른 한사람을 지목하여 "어서 AED를 갖고 오세요" 하고 외친후 곧바로 CPR을 실행하며 119가 오거나 전화로 119의 지시를 듣는다. AED가 오면  패드 하나는 오른쪽 위에, 하나는 왼쪽 아래에 붙이고 전원 연결 -- 기계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한다. 무조건 기계가 하라는대로 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죽어라고 CPR을 한다. (사람을 지목하여 지시해야 하는 이유는 '방관자 효과'를 막기 위해서이다. 누군가를 지목해야 그 사람이 움직인다.)

 

 

하임리히는 특히 민간인들도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하임리히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대체로 구급대원이 도착할 즈음이면 하임리히가 소용이 없는 - 곧바로 CPR로 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치 아래에서 안아 올리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이 교육이 의무사항은 아니었고, 원하는 사람이 가서 듣는 것이었는데 -- 내가 생각할때 이 교육은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민방위훈련 하듯이, 이런 훈련은 전국민이 받아서 기본적인 것을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원래 취미가 '배우기'라서 교육이란 교육은 모조리 받는 편이다. 만약에 내 학생이 수업중에 쓰러지면 내가 얼른 상황을 이끌어야 하니까. 

 

***

 

이 교육은 내가 속해있는 지역사회(?)의 '직원'들이 주요 교육대상이었던 듯 싶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분'들이 교육장에 많이 계셨고, 나같이 '자유롭게' 온 사람은 소수였다. 그러니까 어떤 분들에게는 이것이 '필수교육'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직원'들 속에는 어떤 (뭐라고 하지?) 위계가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이 교육 현장에는 국장급 직원이 있는가하면 과장급, 일반, 혹은 경비직이나 청소용역직에 이르기까지 그 직장의 거의 모든 직급의 사람들이 모였던 것 같다. 나는 그들 조직에 속하지 않으므로 눈치 볼 것 없이 아무데나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되었지만, 그 직장의 고위직은 맨 앞에, 그 다음줄, 그 다음줄, 이런 식으로 직급이 보였다.  그런데, CPR 더미에 심폐소생술을 하는 시간에, 그 직원들에 속하지 않는 우리들은  '소방대원'의 지시대로 차례차례 무대에 올라가서 신나에 연습을 하고 자유롭게 내려오는데 -- 어떤 분들이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하셨다. "내가 올라가도 될랑가? 언제 올라가지?"  내가 연습을 하고 내 코트를 벗어놓은 내자리로 오니, 그 내자리에 어떤 아주머니께서 엉거주춤 앉아서 무대쪽을 바라보며 마치 나의 도움을 구하는듯 혼잣말을 하셨다. "지금 나가세요. 저 앞에 서계시다가 앞사람 마치면 하시면 돼요!" 내가 말을 하니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계셨다. "자 절 따라 오세요." 내가 아주머니를 이끌고 더미 앞까지 갔다. 소방대원이 아주머니에게 손짓하여 더미 앞에 앉게 하였다. 

 

 

아주머니는 아주 힘이 좋으셨다. 머리끝까지 불이 들어오게 - 요령껏 심폐소생술을 하셨다. 참 잘하셨다.  (나는 그게 힘들었고, 소방대원 선생님이 이렇게 해보라고 조언도 하고 했다).  아주머니가 연습을 마치고 뒷줄의 자리로 올라가시면서 내 곁을 스쳤는데 내가 "잘하시네요. 저는 어렵던데 참 잘하셨어요" 했더니 내 어깨를 툭 치면서 "그게 참 보는것하고 달러. 해보니까 훨씬 잘 알것어" 하면서 웃으셨다. 

 

 

내가 존댓말을 하고, 그 아주머니께서는 내게 친근하게 반말을 하셨지만 - 어쩌면 우리는 동갑내기이거나 혹은 내가 더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원래 고생한 사람들이 일찍 늙고, 멋 좀 부리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덜 늙는다.  그 순간 만큼은 우리는 '절친'이었다. 나중에 스쳐도 기억도 못하겠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발견한 것은 -- 어떤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대개 당당하게 행동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없어하고 쩔쩔맨다.  그러니까, 응급처지 교육장에 들어섰을때, 그 곳에서는 모두 교육생일 뿐이다. 소방대원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지시대로 연습을 하는 교육생일 뿐이다. 그런데 그자리에서 나는 자유롭고 당당한데, 자유롭고 당당하지 못한 분들도 보였다. 옛날에, 내가 시골집에서 서울 집으로 올라왔을때, 나는 내집에 내가 왔는데도 '눈치'를 보았다. 내 부모, 내 형제들과 함께 살게되었는데 '눈치'를 보았다. 나는 내집에서 당당하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도 당당하지 못했고, 내 친부모 형제의 집에서도 당당하지 못했다. 어딘가 나는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는 찌끄래기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눈치를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눈치'를 볼때 그것을 쉽게 감지하는 편이다. 

 

내가 교육장에서 당당했던 이유는, 나도 늘 그런 곳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므로 거기가 그냥 내 교실 같아서였다. 앞에 국장님이 앉았건, 사무총장님이 앉았건 나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사실 나의 대화채널은 그들의 상관인 '대표'님이기 때문에... 그런데 연습을 하기위해 무대에 오를 차례를 기다리던 '아주머니'의 입장은 나와 달랐다. 아주머니는 아마도 청소용역을 하시거나 뭐 층층시하 였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며 혹시 자신이 실수하는게 아닐까 상황을 살펴야 했을거다. 바로 그런 '눈치'가 느껴졌기 때문에 내가 손을 잡고 더미까지 인도했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2. 9. 07:18

 

2022년 12월 8일.  날짜를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은 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헌혈을 한 날이다. 전날 밤에 불현듯 생각이 나서 웹으로 헌혈에 대하여 검색해보고, 근처 가까운 '헌혈할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검색해보고 '헌혈의 집'이 공식 명칭임을 배우고, 그야말로 '쓰레빠' 끌고 슬슬 걸어가도 5분 거리 안에 - 동네 편의점보다 더 가까운 곳에 '헌혈의 집'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바로 아침 10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가서 바로 하고 왔다. 

 

 

https://www.bloodinfo.net/main.do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오늘의 혈액보유량 (2022.12.09 기준) 전체5.7일

www.bloodinfo.net

 

헌혈에 뜻을 품었다면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서 제공하는 헌혈관련 정보를 살피고, 그 외에도 그냥 웹으로 몇가지 '후기'나 궁금한 사항을 검색해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  '레드커넥트'라는 앱을 다운받으라는 조언을 발견하고 나도 '레드커넥트' 앱을 다운받아서 전자문진도 사전에 마쳤다.  (헌혈의집 현장에 도착해도 전자문진 부쓰가 여러개 있어서 그냥 거기서 해도 되는데, 레드커넥트 앱이 내 손안에 있으면 편리하므로 앱을 추천한다). 

 

이 앱으로 헌혈 예약도 가능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예약을 하려고 했더니 '내일' 날짜부터만 예약이 가능했다. 예약없이 그냥 가기로 했다. 

 

 

 

 

 

 

 

아침에 문도 열기 전에 입구에 도착하니 안쪽에서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 곧바로 나를 안내하여 실내로 들어갔다.  예약인가 일반인가 묻고 '일반' 대기표를 뽑아 주었다. 그래도 내가 일찍 도착하여 1번이다. (내가 원래 기다리는거 싫어하고 성질이 급해서, 어딜 가건 꼭두새벽부터 가고 대체로 거의 1번 대기표를 받는다. 평소에 남보다 5분 먼저 서두르면 50분을 절약할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서 안내문도 읽어보고, 지시에 따라서 물도 몇 컵 마시고.  문진실로 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혈압 재고, 기초적인 문진을 다시 하는데, 헌혈전에 물을 충분히 마셨는가 확인한다.  아침에 밥도 잘 먹었는지 묻는다.  사실 나는 병원에서 채혈 검사할때, 종합검진을 위해서 피 뽑을때 대개 전날 밤부터 금식을 한다거나 최소 2시간 전부터 금식을 한다거나 이런 것에 익숙해 있어서 - 헌혈 할때도 피를 맑게 하기 위하여 밥을 안먹고 그냥 멀건 채소국만 따뜻하게 먹고 갔는데 - 기왕이면 깨끗한 피를 주고 싶어서 - 그 얘기를 했더니 문진 하던 간호사분이 웃으셨다. 그냥 밥 잘 먹고 오라고 한다. 간밤에 잠은 잘 잤는지, 아픈데는 없는지, 피로하지는 않은지 이런 일반적인 것을 묻는데 '피로하지 않으세요?' 하고 묻길래 내가 웃으면서 말해줬다, "제 나이쯤 되면 밤에 푹자고 아침에 일어나도 피곤하다고 느껴져요. 늘 피곤하죠. 하하하." 

 

치과 진료대같이 생긴 의자에 누워서 피를 320ml 뽑았다. 약 7분쯤 걸린것 같다. 피가 피주머니로 흘러가는 동안 그 피주머니를 보면서 가슴이 찡해진다. 사람마다 헌혈을 하게 되는 계기가 다 다를 것이다. 그냥 학교에서 단체로 하는 바람에 어떨결에 시작한 사람도 있을수 있고, 각기 계기가 다른데 -- 나의 경우는 내가 봄 여름 신촌살이를 하는 동안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긴급 수혈을 여러차례 받았던 것이 가장 큰 계기일 것이다. 그는 수혈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여러차례 '시커먼 피주머니'가 그에게 공급되었고, 시체같은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현장에서 목도하곤 했다. 피가 그냥 바로 생명 그 자체였다. 피가 그렇게 거룩한 것인지 그때 배웠다. 

 

내가 헌혈을 결심한다고 헌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헌혈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행운아'들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건강 문제로 헌혈을 해주고 싶어도 절대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다. 나 역시 아주 오랫동안 내가 헌혈을 하면 안되는 사람인줄 알고 살아왔다. 그래서 '어차피 나는 헌혈 할수도 없고' 해서 헌혈에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관심 가지면 뭣 하는가?  그런데 9월 10월 두달에 걸쳐서 나는 굉장히 세밀한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 특히 '헌혈'을 염두에 두고 의사선생님과 이런 저런 검사를 하며  우리끼리 긴밀한 대화를 주고 받은 결과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내가 헌혈을 하면 안되는 '조건'이 전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현재 사라지고 없다는 '신묘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신묘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불을 받으셨군요,'  '옛날에 오진을 받으셨군요' 등등 다양한 해석을 내 놓는데 나는 '하나님의 깜찍하신 손길'로 보는 편이다. 수십년간 오진이 되풀이 될수도 있는가? CT까지 찍으면서 심각하게 보던 그 모든 진단들이 모두 오진이었을까?  어쨌거나 나의 주치의께서 '헌혈 마음껏 하십시오'라고 선언을 해 주셨으므로 나는 헌혈을 하러 간거다. 

 

그러니까,

1) 헌혈은 거룩한 일이다.

2) 이세상에는 헌혈을 하고 싶어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 처한 선량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3) 헌혈 할 수 있는 조건의 몸을 갖고 있다면 감사 할 일이다. 

 

헌혈을 하고 나니 자동으로 앱에 헌혈 기록이 등재가 되고, 현장에서 스티커형 헌혈증서도 한장 준다. 첫 헌혈자에게는 이런저런 기념품도 준다.  레드커넥트 앱을 열어보니 헌혈 기록과 함께 다음에 헌혈 가능한 날짜까지 표시가 된다. 나같이 전혈 (그냥 피)을 제공한 사람은 2개월을 기다려야 헌혈이 가능하다 (1년 5회로 제한되어 있다). 전혈이 아니라 '혈장'과 같은 피의 일부 구성성분만 제공한 경우에는 2주 후에 다시 헌혈이 가능하다. 

 

위에 적은대로 누구나 다 헌혈을 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 헌혈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유행병 지역을 다녀왔다거나, 수술을 했다거나, 어떤 특정 약물을 처방받았다거나 이런 저런 경우에 일시적으로 헌혈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사전에 상세히 체크를 하여 내가 헌혈이 가능한가 살펴야 한다. 가령 나의 경우 내년 2월 2일에 다시 헌혈이 가능하지만 만약에 내가 해외를 다녀오고 뭐 감기약을 먹고 이런다면 그것도 고려하여 헌혈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상세한 사항은 웹에서 확인 가능하다) 

 

나의 계획은, 내 상황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한국은 만 69세로 한정되어있다, 나중에 변경될지도 모르지만), 헌혈이 허락되는한 나는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고 싶다. 

 

 

헌혈 마치고 약 15분간 쉬었다가 나오는데 간호사가 '어지럽지 않은지' '몸에 이상은 없는지' 다시 묻는다. 나는 '헌혈을 했다는 기쁨' 때문인지 오히려 몸과 머리가 가뿐하게 여겨지고 가슴에서 기쁨이 솟아서 상태가 아주 좋았다. 그리고 곧바로 '고기'집에 가서 스테이크를 300그램쯤 구워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아주 신나게 먹고 왔다. 하하하. 정기적으로 헌혈을 한다면 헌혈날이 내가 고기 왕창 먹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드러누워 피를 뽑는 아주 짧은 동안에 떠오른 아이디어인데 - 내년 봄학기에 내가 가르치는 'Research Writing' 수업의 여러가지 연구 주제중에 'Blood Donation' 을 포함시켜야겠다. 내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생활주변이나 사회생활 속에서 어떤 연구주제를 정하여 한학기간 관련 논문도 읽고, 연구 계획을 세우고, 연구활동을 하고, 형식을 갖춘 작은 논문을 써내야 한다. 학생들이 직접 헌혈의 집을 방문하여 헌혈도 해보고, 한국의 헌혈체계나 문제점등을 문헌과 실무자 인터뷰를 통하여 직접 알아보고, 헌혈캠페인까지 직접 실행해보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포스터를 제작하여 세상에 알리는 것 까지. 여러가지 토픽중에 이것도 포함시키기로 결정한다. 학생들은 이 작업을 통해서 연구방법론과 연구 글쓰기만 익히는게 아니라 몸과 머리를 바쳐 사회에 기여하고, 큰 기쁨을 얻게 될 지도 모른다. (희망사항)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1. 30. 17:49

에스겔 34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3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5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6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7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
 
 
수요일 아침에는 동료들과 작은 기도회를 진행하는데, 오늘 기도회 장소에 일찍 도착하여 사람들을 기다리며 무심코 펼친 성경책에서 '무시무시한'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성경책 통독을 여러차례 하였으므로 분명코 이 부분을 여러차례 읽고 지나쳤겠으나, 오늘 나는 이 부분을 난생 처음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눈으로 읽되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이것은 성경속에 실린 '위정자의 길' 가르침이구나.  크거나 작거나간에 어떤 집단의 리더가 되었을때 반드시 살펴야 하는 덕목이구나 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1. 30. 16:01

 

인천 송도에 있는 '아트센터인천'은 별명이 '케네디센터'다. 그냥 내가 그렇게 부른다. 매클레인에 살때, 케네디센터까지 걸어가기도 했던 -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공연장이었다. 그래서 케네디센터 무대에 올리는 참 좋은 각종 공연들을 비교적 싼 값에 (그냥 일찌감치 제일 싼 표를 사면 좋은 공연을 부담이 적은 가격에 볼 수 있다) 마음껏 즐길수 있었다.  집 근처 운하로 이어지는 산책로에 나갈때는 '포토맥'에 간다고 말한다. 포토맥강변을 걷듯 운하 주변 공원을 걷는다는 뜻이다.  미국에 가면 '여기는 한국 어디 같다'고 말하며 한국과 닮은 구석을 찾아내듯, 한국에 오면 여기는 플로리다 혹은 버지니아 어디같다는 식으로 미국에서 정들었던 장소들과 닮은 곳을 찾아낸다.  그래서 '아트센터인천'은 내게는 '케네디센터'다.  이 두 공연장의 유일한 공통점은, 케네디센터 베란다에서 포토맥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것 처럼, 아트센터 인천에서는 베란다에서 인천바다를 내다볼 수 있다.

 

김정원의 낭만가도 9월 콘서트가 참 달콤하고 좋았기때문에 11월 콘서트도 오늘 다녀왔다. '애환'이라는 주제처럼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무겁고 우울하게 여겨지는' 음악들이 연주되었는데 - 무겁고 어두웠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라디오에서 그 음악이 나오면 나는 '무거워서' 그냥 채널을 돌렸을테지만, 음악당에서 연주자들이 정성스레 연주하여 들려주는 음악은 채널을 돌릴 필요도 없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게 여겨졌다. '이 음악은 집에서 찾아 듣기 힘든, 음악당에서만 들을수 있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찾아듣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딘가 아름다운. (그래서 연주자들이 도전해보는 그런 곡이 아닐까?)

 

오늘 음악회에 오점을 남긴것은 음악회를 마무리하는 김정원씨의 '이야기'였다. 그는 그가 오늘 연주한 곡을 연습하는 내내 너무너무 힘이 들었고 우울했다고, 너무 힘들었다고, 또 누군가 손가락을 다쳤다고 그래서 연주를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고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 '연습할땐 누구나 다 힘든게 아닐까? 더우기 어두운 음악이니 더 힘들었을것을 짐작은 하지만 , 그걸 지금 관객들한테 얘기 해야만 해?' 이런 투덜거림이 내게서도 흘러나왔다.  내가 공감능력이 부족해서 남의 애환에 공감을 못하는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나의 문제는 내가 공감능력이 너무 넘쳐서 다른 사람이 힘든것만 봐도 내가 힘이 빠지고, 내가 더 못견디겠다는거다.  누군가가 힘들다고 하면 나는 더 기운이 빠진다.  그런데 내가 음악회에서 음악을 들으며 위로를 받고 기운을 차리고 싶어 거기 간건데 거기서도 연주자님 힘들었다는 말에 힘을 빼야 하는가? 그런 신세한탄은 관객한테 하지 말고 연주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해야 하는것 아닌가?

 

대중음악가들을 생각해보았다. 유명 트롯 가수가 부친상을 당했어도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거나 뭐 그런 사례들. 그분들이 무대에서 부친상 당했다고 울기라도 하던가?  아니지. 그분들은 프로페셔널들이니까 자신의 상황과 무대를 분리할 줄 안다. 광대는 슬퍼도 웃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대 매너이니까.  김정원씨, 우리가 아끼는 음악가이지만 - 자신이 무대에 서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무대에서 신세한탄이나 힘들었다는 말씀을 생략해주길. 보는 사람이 피곤해진다. 

 

그래서 나의 결론: 나는 철저하게 무대매너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다. 징징거리지 않겠다는 것이지 뭐.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1. 27. 01:31

봄-여름-가을: 누군가에게 등떠밀리듯 어쩌다 맡게 된 '평생교육' 프로그램 일년분 과정을 모두 마쳤다.  홀가분해야 하는데, 꼭 그렇지가 않은것이 내년에 내가 이것을 계속해야 할 지, 내려놓고 손털고 가뿐하게 살아야 할지 갈팡질팡 하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일년 가까이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내며, 수업을 하고, 학생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리고 연구하여 발표까지 하러 돌아다니면서 어찌어찌 나도 '평생교육전문가' 반열에 오른 듯한 상황인데, 일년 과정을 모두 마치며 'So what?' 질문에 대하여 갈피가 잡히는 듯 하다.

 

"So what?" (그래서 뭐? 어쨌다구?). 대학이 제공하는 무료 평생교육프로그램을 열심히 이수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학생에게 이 프로그램은 어떤 의미인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것을 묻는 것이다. 

 

그 너머의 방향을 제시할 수 없다면 - 그저 '취미'로 배우고 흘러가다가 그만두고 마는거라면 -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다. 그 시간에 술이나 마시고 방구석에서 우울증을 키우기보다는 바람쐬러 나가서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들이 제공하는 무료 교양 교육이라도 받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인가?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방향은 대략 세가지이다:

 

1) 취미로라도 이런저런 교양을 쌓은것 자체가 안하는 것보다는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냥 거기까지).

 

2) 교양으로 공부를 하다보니 방향이 잡혀서 - 그 방향으로 쭈욱 가보기로 했다 (축하드린다. 방향을 찾으셨다니 감사하다. 공부가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았나보다).

 

3) 공부와 행동을 병행하기로 했다 - 이제부터는 공부와 함께 '자원봉사'를 체계적으로 해 보겠다 (축하드린다. 맹목적인 교양 수업에의 탐닉보다는 뭔가 행동하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년에 이 프로젝트를 키워나가게 된다면 2)번과 3)번 관련 과목들을 개설해 나가서 궁극적으로 수강생들이 삶의 어떤 방향을 잡아나가실수 있게 도움을 드리고 싶다. 체계적으로 공부를 더 하게 되거나, 혹은 좀더 의미있는 삶의 장면으로 걸어들어가거나.  공부가 그냥 교실에서만 끝난다면 그 공부가 삶과 연결이 안된다면 ... 나는 그런 '공부'의 현장에 있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도 나의 편견일지 모른다. 인정).

 

 

 

그런데 한편 이런 것들이 모두 부질없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건 내가 좀 지쳐서 그럴지도 모른다. 다 내려놓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무작정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이 무엇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 설마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평생교육'인건가? 알수가 없다.

 

https://www.incheon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2203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1. 18. 11:40

11월의 서해바다

 

아이폰 사진기 파노라믹뷰로 찍음. 멀리 송도와 인천대교.

 

날씨가 하도 좋아서 - 쌓이고 밀린 일을 내버려둔채 섬에 가서 썰물 소리를 한참 듣고 돌아옴. 천국의 하루였음.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1. 16. 18:07

수인선 소래 철길-다리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소래포구와 어시장, 2022년 11월 16일 오후

 

점심시간에 근처 농수산물 시장에 가서 채소와 과일을 사 차에 싣고, 배가 고파서 (농수산물 시장에는 변변한 식당이 없다) 소래포구로 향했다.  원래는 소래어시장에서 생선구이백반을 먹을 계획이었는데, 마침 주차장 앞에 '초당두부' 식당이 보이길래 그리 들어가 아주 맛있는 초당두부를 배부르게 먹었다.  배가 부르니 장보는 것도 다 귀챦아져서 새우과 굴만 사가지고 눈부신 햇살아래 산책이나 슬슬 하다가 돌아왔다.

 

지난 시월에 나는 11월 중순의 햇살속을 내가 한가로이 산책할거라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내 상황은 굉장히 암담했다.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을 지나고 있었다.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이렇게 가볍게 빠져나오리라고는 상상도, 예측도 그 무엇도 할 수 없을정도로 내 상황은 암담했었는데 - 지금은 햇살 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다. 

 

오, 나의 하나님. 내 하나님 없이 나는 단 하루도 살아 있기 힘들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하루하루 기적 속을 걷듯이 놀라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고통가운데서 더 선명하게 잘 보인다, 마치 어둠이 깊어야 빛을 더 크게 자각하듯이).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1. 15. 12:31

내 연구실 한쪽 벽에는 어린이들과 그 가족들 사진이 많이 빽빽이 붙어있다.  이 사진들은 에디오피아, 캄보디아, 우간다, 그리고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 내게 우편으로 온 것들이다.  외국의 어린이들은 한해에 한두번씩 근황을 알리고,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 '증명 사진'을 보내주는데 국내의 어린이는 단 한장의 사진 외에 오년가까이 성장 기록이 오지 않고 있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추측하는 편이다. 

 

 

모두 '모어린이재단'을 통해 결연된 아동들이다. 국내의 어린이는 선천성 장애와 질환을 갖고 태어나서 이따금 수술도 해야 하는 소녀이다. 이 재단에서는 그 소녀를 나와 결연시키기에 앞서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를 연결시켜도 괜챦은지 내게 물었다. 내가 누군가를 돕는데 그 어린이가 소년인지 소녀인지 장애가 있는지 천재인지 그것이 중요할까? 그런데, 어떤 후원자에게는 그런 것도 문제가 되길래 내게 묻는 것이겠지? 어쨌거나 나는 매달 일정액이 내 월급에서 나갈뿐 딱히 후원하는 아동과 살뜰하게 관계를 맺을거라는 상상도 안했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정말로 5년여 동안 나는 국내 어디선가에서 자라고 있을 그 어린이를 위해서 별도로 선물을 준비한다거나 편지를 쓴다거나 하지 않았다. 이따금 어린이 재단에서 후원어린이에게 편지를 전달하거나 선물을 전달할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나는 그냥 지나치고 있다. (그냥 내가 바빠서, 여력이 없어서, 딱 거기까지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에디오피아, 캄보니다. 우간다의 어린이들은 가끔가다 - 일년에 한 두차례 - 최근 사진과 성장 소식을 보내준다.  (그런데 왜 국내 어린이 소식은 안보내주는걸까? 동일한 어린이재단인데 해외 아동과 국내아동에 대한 관리 방법이 다른 모양이다.)  그래서 내 연구실 한쪽 벽이 그 어린이들의 성장사진으로 채워지고 있다.  사람들이 내 연구실에 들어와서 그 사진들에 관심을 표하면 -- 언젠가 내가 비행기타고 가서 만나보게 될 친구들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편이다. 

 

 

 

가끔 기분이 저조하고 우울할때는, 어린이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잘 외워지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읽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 아 내 월급에서 이 어린이들에게 일부가 흘러가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내 삶은 의미가 있어. 내가 버는 돈도 조금은 의미가 있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런 생각들이 내게 위로가 되고 나의 영혼을 순화시킨다. 내가 까마득히 먼 어느 나라의 아주 예쁜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상상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느날 TV에서 탤런트 김혜자씨가 벌어들이는 돈의 대부분이 어느 단체를 통해 외국의 어린이들에게 흘러간다는 방송을 보면서 그래서 그 노인 여배우가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얘기를 보면서 그의 삶이 거룩하게 여겨졌었다. 물론 액수를 비교하기는 힘들정도로 나의 기부금은 먼지만큼 미미하지만 - 우리 삶을 거룩하게 하는 요소를 나 역시 먼지만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재단에서 후원결연된 어린이의 사진을 보내주면서 이들이 명시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 어린이의 사진을 개인 소셜미디어 같은데 올려서 친구들과 공유하거나 퍼뜨리지 말아달라는 내용이다. 후원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자랑을 할수는 있지만 - 그 자랑에 어린이의 사진을 포함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지침에 따라서 나는 그 어린이들의 사진을 원본그대로 벽에 붙여놓고 본다. 혹은 내 연구실을 찾은 사람들이 관심을 표하고 물으면 그냥 '언젠가 내가 찾아가서 만나보게 될 친구들'이라고 소개하고 지나친다. 누군가 - '나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돼?'하고 물으면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걸 시작하면 어떤 '상'을 받는지 얘기해준다. 그 '상'이란 - 내가 세계의 어느 구석의 어떤 귀한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거룩함, 안도감, 기쁨을 뜻한다.  통장에서 나가는 액수보다 그 '상'이 훨씬 크다. 

 

그런이유로, 내 포스팅에 나의 어린 친구들의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1. 1. 08:47

아래 글을 적은 것이 2021년 6월 15일.

 

그리고 영주권 연장 신청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카드를 발급한 것이 2022년 10월 14일. 장장 16개월만에 새로운 영주권을 발급 받았다. 코로나 여파로 모든 서류 심사 과정이 느려지긴 했어도, 영주권이 사실상 유효기간이 지난후 10개월 만에 재발급이 이루어진 것이다.  음, 하도 연락이 없어서 '그래 맘대로 해라, 신경도 안쓴다' 하고 있었더니 USCIS에서 이메일로 '발급'을 알리는 연락이 왔고, 그리고 주소지로 새로운 디자인의 새로운 10년을 여는 신분증이 날아왔다. 

 

그 사이에 일신상에도 사연이 있었다. 일단 2021년 6월에 재발급 신청할때 사용했던 '주소'지가 그 사이에 두번 변동이 있었다. 최근 몇개월 전에도 주소지 변경을 해야 했는데 - '혹시 주소 바뀌면서 주소지가 막 뒤엉키면서 내 영주권 배달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주소지가  급작스럽게 자주 바뀌는것도 재발급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이런 염려도 있었다. 

 

주소지 (1) 재발급 신청시 내가 거주하던 주소지 (2021년 6월) 

주소지 (2) 잠시 이사했던 인근 아파트 (2022년 1월) 

주소지 (3) 집을 사면서 영구적으로 사용하게 된 주소지 (2022년 6월) 

 

 

 

자 이렇게  주소지가 급변했다.  그래서 실제로 USCIS에서 이메일이 날아올때 이들의 메시지는 - '네가 최근에 주소지를 변경했는데, 우리는 변경 이전의 주소지로 네 카드를 보냈다. 혹시 중간에 분실되면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아서 재발급을 받도록 해라 (읽기도 싫다, 재발급 신청을 또 해야 한다니!!!) -- 그런데 우리가 트래킹 번호 (우편 추적 번호)를 줄테니 네가 잘 찾아봐라, 영 안오면 분실신구하고 재발급. 블라블라. 

 

 

보내준 트래킹 번호로 추적을 해보니 카드는 (2)번 주소지로 착착 가고 있다가 거기서 빨간불이 켜지고 (Forwarded) 라는 메시지가 뜬다. 다른 주소지로 이전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일주일만에 (3)번 주소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미국 우편서비스는 돌쇠와 같은 신뢰감을 준다.  미국 우편서비스는 비록 조금 느리지만 우리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 만세!

 

자 새 카드를 가지고, 이제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우리가 세례받은 교회에 가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리라...이런 상상을 해본다.

 

 

 

 

 

2022년 11월 1일. 

 

 

----------------------------------------------

 

 

 

내가 갖고 있는 영주권의 만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벌써 10년이 흘렀다. 푸르던 청춘이 머리 희끗한 아주머니로 변하던 사이에 10년이 흘렀다.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하여, 이걸 어떻게 하는거지? 고민을 조금 하다가 구글링으로 대충 자료 살피고, 뭐 그냥 하기로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Hjri7iiEgE&t=616s 

온라인 정보 중에서 내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 정보이다. 이 정보를 올려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정말, 오후에 '영주권 만료일이 언제지?'하고 들여다보다가, 앗 지금 갱신 신청할수 있는거네! 문득 깨닫고 - 구글링 좀 하고, 착수하고 한시간쯤 걸려서  - 착수 -완료하였다. (파일링 비와 지문비 합하여 540달러를 온라인으로 지불했고 영수증도 받았다.)  

음, 이민국 일처리가 십년사이에 굉장히 친절해지고 신속해졌다는 느낌.  그 전에는 변호사님이 처리해주었으므로 내가 그 절차를 잘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교는 불가능하다. 전자정보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니까 온라인으로 처리되는 일들은 참 간단하고 신속하게 진행되는것 같다.

 

내가 이 작업을 위해서 위에 링크된 정보와, 또다른 분의 설명 이렇게 두가지 유튜브 정보를 리뷰했는데, 또다른 분의 설명과 위의 설명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또다른 분의 정보가 약 6개월 전의 정보.  그런데 6개월사이에 프로세스는 더욱 간단하고 쉬워진 모양이다.  내가 6개월 전에 갱신신청을 해야 했다면 나는 첨부서류를 몇가지 더 장만했어야 했을것이다.  이번에 신청하면서 내가 별도로 첨부한 서류는 - 그냥 내 그린카드 앞뒷면을 전화기로 사진 찍어서 첨부한것.  그것이 전부였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하느님만이 아실일이고, 나는 흘러가는대로 살면 된다.  내가 지금 이나이 먹도록 살면서 발견하게 된 것은 - 무슨 일이 일어나건 결과가 어찌되건 우리는 그저 흘러간다는 것이다. 전전긍긍 할것도 없고, 잔머리 쓸것도 없고, 그냥 굵직굵직하게 -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면 된다. 

 

2주 전에 동료교수들과 기도회 할때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있었다. "I decided to be happy. Simple."  무슨 얘기였냐면 - 나는 진급이나 높은 자리 혹은 더 큰 명예나 재산 이런것을 탐하지 않고, 지금 받는 월급,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그것이 지상최고의 행복이라고 믿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것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하신 가장 최고의 것들이라고 그냥 믿어버리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노력을 기울여 무엇을 했을때 - 그것이 잘 되건 안되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어버리면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  그러니까 - 나는 그냥 행복하기로 결정했다. 

 

 

https://americanart.tistory.com/3138   -- 며칠후 영수증 및 접수증이 날아왔다. 일사천리 신속하게 일이 진행되는 듯하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9. 29. 13:50

백남준 아트센터 2층 세미나실

 

지난 여름에 기획한대로 일전에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필드트립을 다녀왔다.  지금 나는 내년에 진행할 여러가지 필드트립을 기획하고 있다. 캠퍼스에서 버스로 두시간 이내에 닿을만한 위치에 있는 '국제적'인 규모와 명성을 지닌 전시장이나 역사성, 사회성을 가진 장소를 주로 물색하고 있는데 미술관, 공연장, NGO 등 다양한 장소들에 대한 목록을 키워나가고 있다.  내가 추진하는 필드트립은  가서 '구경'하고 오는 식이 아니고 - 가서 경험하고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돌아오는 수업이다. 

 

 

필드트립외에도 교양을 갖춘 시민들의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줄 각종 이벤트도 역시 기획하고 있다. 그 중에는 회화수업과 전시회를 잇고, 합창수업과 합창발표도 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으면 어느날 누군가 '상담할게 있어요'하고 기획서를 들고 나타난다. 그 분은 순수하게 인생 오래 산 내게 인간적으로 자신의 진로 고민을 나누고 상담하러 온 것인데 그의 고민을 듣다 말고 나는 무릎을 친다. "그 기획서 여기 놓고 가세요. 그리고 수업 준비하세요."  그렇다, 내가 생각을 하면 - 그 분야의 전문가가 내게 온다.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만 한 일에 대하여 그런 현상들이 벌어진다.  내 연구실은 '꿈의 공작소'가 되어가고 있다, 요즈음. 

 

 

오늘 새벽기도 하다가 문득 이러한 현상에 눈뜨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냥 하루하루 지내다가 오늘 새벽기도 시간에 문득 '아하!' 하면서 깨달아졌다는 것이다. 

 

 

옛날에 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냥 이런저런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이것저것 찾아 다녔다. 전시회장을 늘 돌아다니고, 연주회장에 정기적으로 다녔다.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애인만나러 가듯 돌아다녔다. 내가 즐기던 일들은 돈도 안되고 그리 해가 되지도 않는 심심풀이 즐거운 일 들이었다.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글을 써서 여기저기 발표를 했고, 그 모든 일들이 돈은 안되지만 내가 심심풀이로 할만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교육프로그램 기획자가 된 나는 내 머리에서 떠오르는 모든 프로그램들을 실행할수 있다. 나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탄생시키고, 필요한 경비는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술가가 '돈걱정 없이 예술'만 한다면 얼마나 행운인가. 지금 나는 돈걱정 없이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실행시키고 있다. 내 머릿속의 꿈들이 현실이 된다. 

 

 

 

필드트립에 버스를 렌트하여 학생들을 편안히 모시고 가고, 정성껏 준비된 고급스러운 점심식사를 미술관 정원 풀밭에서 귀족처럼 즐기고, 큐레이터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교육을 받고, 이런 모든 과정에 대하여 학생들은 내게 매우 고마워했다. 내가 봐도 참 고마운 융숭한 대접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께 얘기했다, "제돈 나가나요? 여러분들께서 내신 세금으로 운영되는거니까, 스스로 뿌듯하시면 되지요.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고, 여러분들이 세금을 잘 내주시고 그래서 이런 교육프로그램이 운영되는겁니다. 저야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저도 사례비 받고 하는 일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한가지 '미션'이 있다. 뭐 좋은 교육을 제공한다는 것이야 말할것도 없고 특히 내가 신경쓰는 것은 학생들이 '나는 사랑을 흠뻑 받고 있다. 나는 학생으로서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 나는 아주 귀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실감하게 만드는 교육 분위기 이다. '사랑을 흠뻑 받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하며, 공부에 집중도 잘 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내가 경험을 통해서 그냥 터득한 것이다. 내가 경험한 것을 그대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공부 잘하고 많이 하면 뭣하나? 사랑이 결핍되어 있으면 다 소용없고 부질없다. 학생들이 사랑을 흠뻑 배부르게 받아먹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공부는 그것으로 사명을 다 한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 내가 새벽에 깨달은 것이 뭐냐하면 - 나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나에대한 계획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분이 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만드시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어느날 내게 '사람들을 위한 아주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해라. 내가 너의 꿈을 구체화 할 수 있게 조력자들을 보낼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오늘 문득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현재 나의 형편은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하루, 하루, 하루를 살 뿐이다. '내일'에 대하여 나는 아무것도 장담 할 수 없다. 내가 내년도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그저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가을학기를 무사히 마칠지 그것 역시 미지수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채로 '오늘'을 살면서 '내일'계획을 세워 놓는다. 내일이 오지 않아도 내일의 계획은 수립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매일 매일 하나님께 의지할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나는 오늘 살다 내일 죽어도 그만이다. 그런 각오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나의 하나님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려는 걸까? 나는 하나님의 계획이 궁금해진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8. 29. 12:50

채널 돌리다 '스타다큐'라는 프로그램에 내가 아는 방송인이 나오면 - 그 사람 요즘 뭣하고 사는가? 궁금해져서 발길을 멈추곤 한다.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이 나오면 옛 친구처럼 반갑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스타가 나오건 간에 이 프로그램에는 어떤 공식이 있다. 단지 이 프로그램 뿐만이 아니다. 인간극장도 그러하고 하여간에 일반인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그 사람의 일상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는 '설정'이 한가지 있다. '멀리 있는 무덤'에가서 성묘를 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한 개인이 특별히 조명이 될 때, 그 개인들이 꼭 보여주고 싶어하는 곳이 먼저 떠나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나 영감님, 마나님 뭐 이런 가족의 묘지이다. 그 묘지에 시청자들을 끌고 가서 그 무덤앞에서 절을 하고 술잔을 뿌리는 것을 보여야  직성이 풀린다고나 할까?  내가 미국에서 이십년가까이 살면서 미국 테레비를 이잡듯이 뒤지며 봤어도, 어떤 사람 다큐멘터리에 자기 조상 산소에 끌고 가는 사람 별로 못  봤다.  유독 한국인들은 가족의 산소에 시청자들을 초대하는것을 즐기며, 그것을 어떤 성스러운 의무라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그러니까, 이런 심정인것 같다 - '내가 테레비에도 나올 정도로 뭔가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을때, 이 사건에 대하여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그 무덤속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뭐, 나도 뭔가 내 삶에 의미있는 일이 발생했을때 나도 우리 조상님 산소에 갈 생각부터 한다. 최근에 승진을 했는데, 아직 산소에 가지를 못해서 금주중에라도 가려고 벼르고 있긴 하다.  한국인들의 '성묘' 문화는 유네스코에 등재할 문화가 아닐런지. ㅋㅋㅋ.

 

근데, 연예인들 조상 산소...그것 좀 생략하면 안될까? 테레비보다가 그런 장면 나오는 분위기가 되면, 그 때 나는 채널을 돌린다.  뭐 내가 남의 조상 산소까지 들여다볼 정도로 정감이 있고 푸근한 인간이 아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8. 16. 09:27

https://www.youtube.com/channel/UC3HYdJ4f0UjB_8ezgtMWk8w

 

MOON haewon JAZZ

Jazz Vocalist

www.youtube.com

지난 금요일 (2022.8. 12) 저녁에 아트센터인천에서 열린 문해원 재즈 콘서트에 다녀왔다. 

 

나의 일상이 너무 일이 많고, 기운은 없고, 일박이일로 어디를 놀러갈 여건도 안되고 뭔가 특별한 휴식이 필요해서 별 생각없이 바람을 쐬러 나갔다. 

 

음악은 좋았다. 노래도 잘 불렀다. 바닷가에 지어진 음악당도 좋았다. 

 

그런데 '피로'와 '나가고 싶다'는 기분이 몇차례 들기도 했다.  그냥 건조하게 그 이유를 적어보겠다.

 

1) 물고기비늘같은 의상의 커다란 비늘들이 무대조명을 반사하면서 - 맨 앞줄에 앉은 내 눈을 막 찔러대서 가수를 쳐다볼수가 없었다.눈이 아팠다. 가수가 노래부르는 내내 나는 눈을 감거나 사선으로 무대 구석을 바라봐야 했다.   무대생활을 십년 넘게 했으면 객석에 앉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게 아닐까? 관객의 눈을 찌르는 무대의상이라니. 

 

2) 신세한탄: 글쎄 이것이 한국의 가수들의 '컨서트' 문화인지 아닌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내가 컨서트에 간것은 '음악'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는데 무대위의 가수가 '말이 너무 많았다.'  뭐 눈도 부셔서 바라볼수도 없는데 ...말을 하는데...그럼 그 말의 내용이 밝고 편안하고 즐거웠다면 좋았을 것 같다.  노래 한곡 소개하면서 '이곡은 제가 일본에서...제가...매니저도 없이..그 화살을 다 맞고...괴롭더라구요....'  '제 선배님께서 돌아가셨는데....꿈에...선배님이....'  사실 그의 이야기가 늘어지고 있을때 그냥 나가고 싶었다.  맨앞 맨 가운데 자리라서 차마 나갈수가 없었다.  내가 재즈 컨서트에 쉬러 간건데 거기서 가수의 신세한탄이나 꿈자리 뒤숭숭한 얘기나 들어주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저 가수가 이런 컨서트홀에서 개인 이름을 걸고 컨서트를 할 정도면 업계에서는 그래도 프로페셔널이 아닐까? 그런데 왜 저런 이야기를 지루한줄 모르고 늘어 놓고 있는 것일까? 그의 팬들은 그의 '토크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 모이는걸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걸까?  나는 지금도 가수가 이상한것인지 그걸 이상하게 보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잘 알수가 없다. 원래 개인 재즈콘서트 분위기가 저런 것인지.

 

어쨌거나 그래서 내가 생각을 정리해봤는데, 내가 '무대'나 '강단'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때, 나는 절대로 개인의 뒤숭숭한 개인사나 울적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되겠다.  평소에도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 주의를 하긴 하는데, 그래도 더욱 주의를 해야겠다.  

 

노래를 참 잘 하시던데, 관객의 시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의상이나, 재즈 콘서트를 '재미없는 토크 콘서트'로 만들어버리는 무대매너를 개선하시면 더 좋은 무대를 만드실수 있을 것이다. 

함께 연주하신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 연주자분들 연주 훌륭했다.  (말없이 이분들의 개인 연주 시간을 좀더 늘렸다면 좋았을것 같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8. 11. 10:38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연령적으로 내 또래인 감독이라서일까 - 배경 노래인 정훈희의 '안개' 와 무심코 지나가는 '트윈폴리오'라는 송창식-윤형주 듀엣의 이름등 노스탤지어 대사와 색감이 나를 푹 잠기게 했다. 원래 유명한 그의 미장센이 특히 이번 영화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비야,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내게 가져다줘' 라고 번역된 그녀의 진짜 말은 '심장'이 아니고 '마음'이었다고 그녀가 정정하고 -이와 비슷한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 소통의 '애매함'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언어학 적인 측면에서 분석해도 꽤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어쩌면 언어학자는 언어학자대로, 철학자들은 철학자들대로,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자들대로, 영화비평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자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이 영화를 들여다보며 곰씹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냥 심심풀이로 '상받았다니 가서 봐줘야지. 우울한 영화 같던데, 기운이나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갔다가 - 영화에 깊이 깊이 푹 잠겨 있다가 나왔다.  송창식과 정훈희가 영화의 화룡점정이었다고 해도 되려나. 이들의 노래가 없었다면 영화의 완결미가 없었을것 같다.

 

 

박찬욱 감독 - 이것이 그의 영화의 '정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앞으로도 그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겠지만, 이 영화 만큼의 깊이와 울림이 있는 작품을 또 탄생시킬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보는 내내 김승옥씨의 '무진기행'을 떠올렸다. 김승옥씨가 이영화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전혀 다른 스토리인데 어딘가 쌍둥이처럼 닮아 보인다는 말이지. 

 

사랑에 대한 놀라운, 뜻밖의,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해석.  아...영화가 극장에서 내려지기 전에 또 가서 보고 싶어진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8. 8. 12:57

아주 오랫만에 메가박스에서 연달아 이틀에 걸쳐 영화 '탑건, 메브릭'과 한국영화 '비상선언'을 보았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두 영화 모두 '비행기' 소재의 작품들이었다. 

 

 

'탑건'은 보는 내내 눈이 시원하고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느낌이 지배해서, 영화 관람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상선언'은 조조할인으로 봤고, 역시 불만은 없다. 탑건이 시원한 맛에 봤다면 '비상선언'에는 어딘가 블랙코미디 같은 사회비판적인 구석도 있어서, 그리고 뭐 재난 스릴러이므로 아슬아슬 속이 타면서도 - 한국식 신파조가 있는것으로 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주겠지 했다.  송강호, 이병헌이 나오는 영화이니 믿고 봐도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이름을 잘 모르지만 정말 빛나는 조연들도 나와줘서 나로서는 만족한다. 

 

 

 

'탑건'은 내게는 - 나와 동갑쟁이인 탐크루즈가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맛이 있었던 '노스텔지어' 영화 였고, '비상선언'은 장거리 비행 여행을 자주 하는 내게는 꽤나 실감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비행기를 탈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사고로 죽게되면...'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한다.  뭐 죽으면 죽는거지...

 

 

나는 매일 - 오늘이 마지막인것처럼 산다. 아, 이렇게 사는거 참 힘든 일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들이 이렇게 살지 않을까?

 

 

 

Posted by Lee Eunmee
NamJunePaik2022. 8. 4. 04:35

 

백남준 아트센터 필드트립을 정하여 공고를 하였다. 

 

 

"광클릭 전쟁이 날것 같아요. 저처럼 서툰 사람은 등록도 못 할것 같아요" - 어느 학생이 말씀하셨다.   "주말이 아니고 평일로 잡혀서, 직장 다니시는 분은 참여가 힘드시겠네요" 라고 내가 염려를 하자 직장 때문에 늘 조금씩 지각하면서도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과정을 이수하고 계시는 청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월차 써야죠. 놓칠 수는없죠."  중국어문학 과정 종강식에 축하하러 갔을때 학생들이 보여준 반응.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뜨거운 반응이다.  

 

책임감을 막중하게 느끼고 - 현장 답사를 나갔는데, 현장에 도착하여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한국에서 활동한지 6년이 넘어가는데 왜 여태 여기 올 생각을 안했던고?" 나스스로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홍보가 미흡했던것 아닐까? 아니면 관계자들이 '사람이 너무 많이 올까봐 홍보를 일부러 안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상상도 하게 된다. 그 정도로 백남준 아트센터는 아트센터 자체의 기능 외에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그곳에  운전해서 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 '위치 (location)'이 월등하다.

 

 

  •  아트센터 건물과 외형 디자인이 독특하고 아름답다. 건물은 네모로 각이 져 있는데, 건물을 둘러싼 작은 돌맹이들이 길과 담을 곡선으로 흐른다.  그 곡선의 돌길과 담이 곡선의 (끝이 없어 보이는) 숲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을때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일단 하이웨이를 타고 가면 막힘없이 목적지까지 갈수 있다. 
  • 바로 이웃에, 잠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경기도 어린이 박물관과 경기도 박물관이 있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구상을 한걸까?  서초동 예술의 전당처럼, 경기도 박물관들의 클러스터 라고 할만하다.)

 

 

 

백남준 아트의 영감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것도 적어선 안될것 같다. 그냥 머릿/가슴속에 간직을 해야지.  적으려면 이 휘저어진 생각들이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하다. 

 

 

 

 

어제 오전에 잠깐 다녀왔는데, 잠을 설치고 있다.  눈앞에 백남준의 작품들이 오락가락한다.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잔잔한 행복감이 떠나지 않는다.  마치 마약에 취한듯 잠깐 바람쐬고 구경한 예술에 취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은 '백남준이 오래 사는집'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나도 오래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혼자서라도 미국미술사 공부를 한 보람을 느낀다.  혼자서 공부해서 전문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는 가늠이 되고 전문가를 찾아 갈 줄은 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런 깜짝 놀랄만한 '아트 필드트립'을 기획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획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트가 된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아트가 둥둥떠다니니까). 기획을 하면 - 나머지는 교육은 전문가에게 부탁을 드리면 된다.

 

고단한 삶 속에서 잠신 '반짝'하고 행복했던 날.  나는 오랫동안, 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살아 숨쉬고 있지만, 나는 이미 죽은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신촌에서 지내는 동안.  백남준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화면들이 내게 말했다 - 너는 살아있어.  그래 나는 아직 살아있다. 백남준 아저씨 땡큐!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7. 14. 09:30

내가 미국미술을 개인 프로젝트로 정하여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더라? 2009년쯤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십 몇년이 흘렀고, 나의 미국미술 탐구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중지된것처럼 보인다. 전에는 빠삭하게 외우고 남들에게 설명할수 있던 것들도 지금은 '나도 기억이 안나고, 처음부터 알지도 못했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가을에 나는 백남준을 만나러 간다.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 아트홀이 있고, 나는 학생들을 이끌고 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나는 백남준에 대한 강의를 하려한다. 물론 아트홀에 학예사들이 있으니 전문적인 강의는 그분들이 맡으시겠지만 -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나 역시 준비를 하기로 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슬슬, 그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하고 강의 자료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나는 '예술'에 대하여 논할 정도로 전문가가 아니다. 잘 안다. 나는 예술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백남준의 신화를 얘기하게 될 것이다. 한국땅에서 태어나 어느 시점에 세계를 뒤 흔든 예술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미국인이 된 그의 작품에 숨어있던 한국인 유전자의 코드들을. 그를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 혼자 공부한 것이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어.  이 수업을 위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미국의 미술관들을 쏘다니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계획을 세우셨던 것인지 가끔 궁금해지기도 한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