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3. 2. 27. 15:27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 시작(詩作) 7, 1955. 10.)

 

위의 시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시 전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 학교에서 해마다 '가을 축제'를 개최했고, 각종 전시회가 열렸는데 미술 선생님의 추천으로 나는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시화전에 제출하였다.

 

내 인생 처음이지 마지막인 '시화전 작품'은 이렇게 탄생했다.  도화지 전지에 위의 시를 검정색 포스터칼라 물감으로 띄어쓰기도 없이 그냥 글자만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집에서 밀가루 거를때 사용하는 '체'를 이용하여 물감을 뿌리는 작업을 하였다. 여러가지 물감을 브러쉬과 체를 이용하여 뿌리기 (스프레이) 작업을 하면 물감이 안개처럼 내려 앉는다.  다양한 색감의 물감을 이런 방식으로 자꾸 자꾸 덧 입혀주다보면 뭔가 안개속에 새겨진 시 같은 느낌이 난다.  내가 이것을 어디서 배운것은 아니고, 혼자 앉아서 이런 저런 장난을 하다가 문득 '영감'이 발동하여 예술적인 작업을 했던 것인데 - 이 작품을 미술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시더니 "좋은데...여기에 물감을 좀 더 뿌려서 완성시키면 좋겠다."  그래서 선생님의 조언대로 그날 저녁에 또 몇시간 물감 뿌리기를 덧 입혀서 액자를 해서 제출했다.  

 

 

 

가을축제를 마치고 전시했던 작품을 집으로 갖고 와서 아무데나 처박아 뒀는데 우리집에는 진짜 유명한 화가 선생님의 그림이나, 뭐 진짜 그림 (돈이 되는 작품) 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따위 나의 습작 '따위'는 변소에도 걸릴 자격이 없는 하잘것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집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 내 '변소에도 걸릴 자격이 없어 보이던' 내 시화 작품이 우리집 현관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나로서는 놀랄만한 '사건'이었는데 - 왜냐하면 이'따위' 것을 우리 식구중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을거라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내 시화 작품을 현관에 걸은 사람은 우리 '엄마'였다.  엄마에게 내 시화 작품이 특별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우리집의 '분위기'가 그 시화작품에 대해서 뭐라고 평을 하는 그런 집구석은 아니었다. 그게 거기 걸려있으면 그냥 걸려있는거다. 아무도 그것이 좋네 마네 평을 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그게 거기 걸려서 뜨아하고 놀라웠다는 것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 아무도 그것을 떼어버리지 않아서, 우리집이 이사를 할 때까지 그 시화는 영원처럼 거기 걸려있었다는 것이다.

 

수십년이 지나서 (40년도 넘게 지나서) - 라디오의 음악방송에서 박인희 (가수, DJ, 박인환씨의 누이동생)씨가 낭송하는 '목마와 숙녀'를 들으며 고교시절 내가 만들었던 시화 작품을 떠올리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시는 고등학교 시화전에 걸면 안되는 것어다!'  내가 가만히 듣다 보니까, '한잔의 술을 마시고'  '술병이 쓰러지는..' '한잔의 술을...' '내 쓰러진 술병' 이런 '술타령'이 들어간 시를 고등학교 시화전에 내가 낼 생각을 했다니!  그것을 미술 선생님이 보시고 추천을 하셨다니!  그것을 우리집 현관에 걸었다니! (하하하하하하하 깔깔깔)   

 

 

우리집은 사실 '술'에 대하여 꽤나 관대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밥상머리에서 할아버지의 '반주'를 누가 딸아 드리는가로 형제들끼리 서로 경쟁을 할 정도로 술과 가까웠고,  할아버지는 초등생 어린 손자손녀들에게도 집에서 빚은 포도주+소주를 "너도 한번 먹어봐라"하고 권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시시철철이 생신 잔치며 여러가지 잔치마다 각종 술이 흘러넘쳤고, 여름에 막걸리 사오라는 심부름을 우리는 좋아했는데, 막걸리 사오는 길에 그걸 조금씩 맛볼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술의 제국에서 태어났으며 바쿠스의 후예로 성장했다고 해야 하려나. 그런고로 고등학교 때 '한잔의 술을 마시고'의 문제성을 자각할 수 없었던 것인데 - 그런데 미술선생님 역시 - 시화전을 준비하던 국어 선생님 역시 - 모두가 그런 것에서 문제성 따위를 인지 하지 못하는 사회 문화적 분위기 였던 모양이다.  지금 제법 철이 들어, 교육자의 입장에서 이 일을 돌아보니 그 당시의 이 사회가 술에 대하여 꽤나 관대했던 모양이다.  지금 그것을 '문제'로 보는 나는 술에 대하여 마냥 관대할수가 없어진 모양이다.

 

지금도 나는 생선회나 생선 매우탕 이런 것들 앞에서는 '아 소주 한잔이 있어야 하는데....'하고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술의 효용에 대하여 무조건 배타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술'에 대하여 나는 과거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고등학생들의 시화전에 '술'이 자유롭게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는 회의적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선생님이 술에 취한채 복도에서 쓰레빠로 여학생의 얼굴이며 아무데나 갈겨서 얼굴에 쓰레빠 자국이 벌겆게 부풀어 올라도, 원래 그래도 되는줄 알았었다.   영어 선생님이 영어 70점 이하 학생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손으로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내 손이 아프게 너희를 때린다. 이것은 사랑의 싸다구다'라 말씀하시면 그게 그런것인줄 알았었다.  선생님이 책상에 앉아서 자습시켜놓고 담배를 피워도 그래도 되는 것인줄 알았다.  선생님이 여름 체육복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앉아있는 내 허벅지를 만지거나 꼬집어도 으례 그래도 되는 것인줄 알았다.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은 안되는 일들이다. 그때는 그것이 잘 못 된 일인줄 몰랐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척 잘못된 일임을 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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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 박목월 선생의 '나그네' (1946, 상아탑)도 유려한 시이긴 하지만 과연 그것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었어야 했는가?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아무튼 우리들은 '술'에 대하여 꽤나 관대하거나 술의 위험성에 대하여 '둔감'하거나 했던것 같다. 나는 이 시를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것을 외워야 했던 세대이다. 현재 (2023) 기준으로 우리는 '술'에 대해서 좀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2. 22. 20:21

 

오늘은 일찍 퇴근하는 것을 포기하고, 반드시 해 치워야 하는 일에 몰두하기로 결심하고 [KBS 세상의 모든 음악]을 틀어놓고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조직에서 나만이 할 수있는, 내가 안하면 안 굴러가는 시스템이 있는데, 오늘 그것을 완성해놓고 퇴근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제때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까.

 

무슨 '미생' 드라마에 나오는 상사 말단 직원처럼 책상앞에 앉아서 머리를 쓰고 있다. 내 싸인으로 인턴을 열명이상  채용을 하는 판인데 나는 늘 내가 말단직원 신세다. 내가 일찌기 Servant Leadership 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뭐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엄마 리더십' 혹은 '며느리 리더십'이라고나 할까. 그냥 내가 다 책임지는 판이다. (내 리더십에 문제가 있어...)

 

그렇게 일에 파묻혀 있는데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을 한 청년 한명이 들어온다. 내 학생이다. 아니 몇년전에 내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대학 신입생때 내 수업을 들었고, (몇년전에 블로그 어딘가에도 썼던 것 같은데) 그는 심심하면 내 연구실 문에 머리를 디밀고 인사를 하거나 그냥 일없이 들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넉살좋게 하다 가곤 했다. 뭐 무슨 학교 써클을 만든다길래 내가 지도교수 노릇도 일년넘게 해준것 같다. 몇년간의 코로나 시절은 거의 모든 인간적 유대를 망가뜨린 것 같다. 3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학생들 이름을 잊었고, 학생들 얼굴을 몰랐다.  오히려 코로나 이전에 가르쳤던 학생들 이름이나 얼굴은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고, 코로나 시절의 학생들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 '줌'으로 만난 얼굴들은 휘발성이 강하다. 학기가 끝나자 마자 휘발되듯 기억에서 사라지고, 이름도 사라진다. 

 

어느날 이 친구가 내 연구실에 머리를 디밀었을때 - 나는 놀랍게도 이 친구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아! 너! 너! 아직 살아있었어? 졸업 안했어?"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군대'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복학생'이 되어 많이 초췌해진 표정으로 내 앞에 다시 섰다. 고민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그렇지 대학 신입생 시절에야 만사가 신이 났었지. 인생 즐거웠지. 그런데 군대를 다녀오고 보니 이제 슬슬 졸업이후의 생이 걱정이 되고 - 한마디로 철이 드셨군.  그의 고민 많은 표정이 오히려 듬직해보였다. 자네가 이제 인생에 대해서 들여다보기 시작하셨군. 

 

겨울방학 이전에 심각하게 상담을 좀 하고 싶다고 찾아 왔길래 두시간 넘게 그와 차를 내려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었다. 그리고 물론 나는 그것을 까맣게 잊었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얘기 할때는 그 얘기에 집중해서 정말 온힘을 다해서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그와 헤어져 돌아서면 아무 기억도 안한다. 그와 만났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나는 그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별로 기억나는게 없다. 이것이 나의 사람 만나는 패턴이다. 나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그 사람과 나눈 대화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다. 글 읽은것은 기억을 잘 하지만 - 이야기 나눈 것에 대해서는 뭐랄까 휘발성이 강하다고나 할까. 늙어간다는 증거다. 기억이 약해지는 것 같다. 옛날일이 더 선명하다니깐.) 그런데 그가 오늘 저녁에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을 다시 들이 밀었다. 정말로 그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하게 여겨졌다.

 

"어! 어! 너 *** 아무개지?" 하고 내가 자신없게 물으니 그렇단다. 다행이다 그의 이름을 제대로 맞췄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개강을 했고, 친구들과 저녁먹으러 나가다가 내 연구실에 불이 켜져 있어서 그냥 들러봤다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내가 노예처럼 일하는 중인데... 겨울 방학동안 자기가 뭘 했는지 '보고'를 드리러 왔다고 한다. "왜? 뭐 했는데?"  지난번에 나와 상담할때, 내가 그에게 '방학 끝나고 나한테 와서 뭐 했는지 보고해'라고 했단다. 그래서 보고하러 왔단다.  방학동안에 이것저것 해서 무슨 자격증도 땄고, 또 다른 - 미국가서 써먹을 자격증 시험을 지금 공부하는 중인데 곧 딸거란다. 장하네!  그런데 그걸 내가 따라고 코치를 했단다. 정말? 내가?  뭐 아버지도 기뻐하시고, 자기 자신도 뭔가 희망이 보인다고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들렀단다.  지금은 내가 너무 바쁘고 피곤하니까, 다음주에 오라고 했다. 다음주면 내가 좀 여유가 생길테니까 그 때 차도 마시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자고. 

 

친구들과 저녁먹으러 나가는 길이었고, 친구들이 복도 끝에서 기다리니 자기도 오늘은 그만 갈건데, 다음주에 꼭 다시 오겠단다.  그는 달처럼 환한 표정이었다. 더이상 초췌하거나 의기소침 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 꿈과 기대가 가득차 올라서 그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한 말을 기억도 못하는데, 저 친구는 내가 했던 말에 의지하여 스스로 뭔가 탐색하고, 행동하고, 성취하고, 그리고 내게 돌아왔구나, 나의 확인을 받고 또 방향을 잡기 위해서.  나는 언덕위의 '나무' 같은 거구나. 나무는 아무 말도 안해도 - 누군가는 그 나무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가끔 그 언덕위의 나무를 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지.  멀어지는 나무를 이따금 돌아보며. 

 

그래서 그 달처럼 환한 얼굴의 청년 덕분에 - 나도 내 존재의 어떤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앞으로도 주욱 이자리를 지키겠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고향 언덕의 나무 한그루'로 당분간 여기 더 있어도 되겠구나.  아무런 영예나 보상이 따르지 않아도 - 저 달처럼 환한 얼굴이 나의 영예이고 보상일지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2. 21. 12:42

옛날에, 나 때문에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적이 있다.  집안의 황제, 그의 말 한마디면 그것이 '헌법'보다 상위 개념의 법이었던 시절이었는데 - 그런 아버지가 나 때문에 가출을 감행하셨다.

 

사연은 이렇다. 사람들 말로는 '사주'가 안맞으면 그럴수 있다고 하는데 -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컸다. 4남매중에서 나는 어딘가 늘 개밥의 도토리였다. 어머니는 원만한 분으로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 이상하게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고 가능한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썼으며, 동시에 그의 아주 착한 딸이 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나는 분명 아버지의 자식이었는데 - 그렇지만 나는 어딘가 남의자식처럼 여겨졌다.  나의 거의 모든 행동은 아버지의 '지적질'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나는 아버지의 눈앞에 안나타나는게 상책이었고, 그래도 아버지 사랑을 받고 싶어서 새벽에 골목에 뛰어가서 '아버지 전용 우유' 한병 사오기, 아버지 구두를 반짝반짝 닦아 놓기 등을 스스로 찾아서 했지만 -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이나 칭찬 한마디도 들은 기억이 없다.  그냥 나는 아버지의 지적질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관심밖의 인생이었다.  주위 친척들은 이런 현상에 대하여 '사주가 안맞어서 그래' 정도로 해석하려 했다.

 

어쨌거나 나는 스스로 '아버지에게 더부살이 하는 인생. 어서 이곳을 벗어나서 내 인생 내가 개척해야 하는 인생' 정도로 나를 규정하고 가능한 그의 눈에 안띄며 나의 독립을 나날만을 기다리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늘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돈 벌 궁리를 하며 살았다. (대학때 과외 아르바이트로 월급쟁이들보다 돈을 더 잘 벌었다). 

 

늘 이런식이었는데, 대학교 3학년때  -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아버지가 갑자기 내게 폭발하셨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겠지.  내가 아버지 눈길을 슬슬 피하며 살아온것처럼 아버지도 나에 대하여 스스로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계셨겠지.  서로 설명을 안하고 못한 것들이 켜켜이 쌓여갔겠지. 어쨌거나 기억도 안나는 별것도 아닌 일로 폭발을 하신 아버지는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빗자루로 패셨다.  (아버지가 뭐 폭력적인 분은 아니셨다. 자식들 중 아무도 때리신 적이 없다. ) 그런데 그날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가 힘드셨던 듯, 방을 쓰는 빗자루를 가져다가 '눈부신 여대생이었을 나'를 개패듯 패셨다. 나를 개패듯 패다니.  어디에 나가서도 남한테 험담 한번 들을일 없이 차돌같이 살아온 나를 개패듯 패다니.  나는 너무나 놀라서 정말 오줌까지 줄줄 쌌다. 정말 나도 놀랐다. 그 참담함 이라니...

 

그리고는 아버지가 그 길로 집을 나가셨다. (하하하). 

 

엄마가 뭐라고 하셨더라 - 그 착한 아버지가 그렇게 패면 '아버지 잘못했어요' 해야 하는데 내가 입다물고 맞고만 있었으니 내가 '나쁜 년'이었다는거다.  그렇게 패는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아닌지 지금이라면 내가 논리적으로 따져보겠지만 - 어쨌거나 그 상황속에서 나는 '그 착한 아버지를 그렇게까지 만든 아주 나쁜년'의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어떤 착하다고 알려진 이웃 남자가 나를 죽이면 나는 '그 착한 이웃남자로 하여금 살인을 하게 만든 나쁜년'이 되는걸까? 하하하.  쳐 맞은 나는 집을 안 나가고 때린 그는 집을 나가서 - 결국 나만 더 나쁜년이 되고만 이상한 상황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길로 남해인가 거제도인가 어디 멀리 '내고향 남쪽바다' 같이 먼 파란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 친구가 교장선생님을 한다는 어느 바닷가 학교의 교장사택으로 가셔서 며칠을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파란 바다가 내다 보이는 창가, 연구실의 내 책상에 앉아서 심심파적으로 옛날 일을 생각하며 킥킥대고 있다. 인생은 희극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한데, 나는 가능한 코메디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웃자는거다. 뭐든 웃고 넘어가는거다.)  

 

나는 나를 때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가 돌아올때까지 '아버지를 궁지에 몰은 나쁜년'의 죄목을 이마에 붙이고 죄인처럼 고개숙이고 숨도 못쉬고 지냈다.  아버지의 귀가는 내게 가장 큰 선물이었다. 

 

 ****

 

확실히 나는 이제 '낡은 시대의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요즘 20대 30대 사람들의 행태를 잘 이해를 못하겠다.  내가 그래도 20대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 내가 너무 낡아서, 내가 과연 그들을 가르칠 자격이 되는건지 가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나는 요즘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교도소에 있다. 아버지도 어쩌면 나때문에 교도소로 갈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집안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나는 이마에 나의 슬픔을 써 붙이고 엎드려 있을것 같다. 뭔가 근신을 할 것 같다. 물론 나는 그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고 세상이 이상해서 그런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가 우리 집안을 망신주기 위하여 일을 벌인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항변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걸까?  누군가가 혹은 어떤 거대조직이 의도를 가지고 우리가족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럴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각도로, 여러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 

 

언젠가 각분야의 교수들과 식사자리에서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진적이 있었다 : "그 왜, 정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쟎아요. 예컨대 미국의 저명한 목사가 성매매를 상습적으로 하다가 걸렸다거나, 혹은 모범 예술가나 시인으로 존경받던 인사가 증거가 확실한 '미투'의 본보기가 되어서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거나 - 이렇게 상상만해도 살 방도를 찾기가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들이나 그런 경우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이니까 계속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면 이런 분들은 어떻게 문제 상황을 견디고, 통과하고, 재기 할수 있는걸까요? 저는 그게 정말 궁금해요." 

 

그런데 나의 이 심각한 질문에 대하여 나와는 다른 분야에서 교수를 하는 분들의 대답이 - 나로서는 뜻 밖이었다.  그분들에게는 내 질문이 그다지 어렵거나 심각하지 않은것 같았다. "아이고, 그런 사람들 많아요..."로 시작해서 - 대체로 나오는 답은 '아무개는 지금 어디서 뭐하고, 아무개는 뭐하고..' 뭐 한때 망신살을 겪고 지금은 더욱 잘 나간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도 깨닫게 되었다 - 설령 어떤 부끄럽거나 억울하거나, 혹은 억울하고도 부끄러운 복잡한 상황이 닥쳐도, 그 시간을 슬기롭게 견디면 살아갈 방도는 다 있는거구나! 

 

그분들은 너무나 슬기롭고 지혜롭고 전문가적인 분들이라서 내게는 '너라면 어떻게 그 난관을 헤쳐갈래?'하고 묻지 않았다. 역시 나는 좀 아둔해서 슬기로운 분들께 별로 도움이 안된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숨거나 사라지거나 할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신분세탁' (부끄러운 일로 폭망한 후에 다시 재기하는) 방법이라면 -- 만약에 사회적으로 부활하고 영예로운 길로 다시 들어서기를 갈망한다면 -- 최소한의 선행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아둔한 머리로 생각하는 방법이라면 - 의사라면 의사가 귀한 곳에 자원해 가서 2-3년 의료 봉사에만 몰두한다. 본심이 아니라해도 그런 행동을 보여준다.  행동하다보면 본심이 되기도 할것이다. 행동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마음을 마음이 행동을 낳으므로.  의사도 아무것도 아니어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런데 가서 2-3년 그냥 고개 숙이고 봉사활동만 하는거다. 그러다보면 세상의 눈길이 순해지고 - 너도 살아야지 어쩌겠어 하며 그를 다시 품으로 받게 될 것이다.  뭐 이런 '몸'으로 자신의 과오를 어떻게든 씻으려는 움직임이라도 보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그런데, 이것은 아주 아둔한 방법일것이다. 요즘은 이보다 훨씬 화려하고 즐거운 방식으로 어려움에 대처할 것이다. 나는 아주 낡아빠진 사람인것이다.

 

내가 '예수쟁이'가 된 것에 대하여 '안도'할때가 종종 있다.  내가 크리스챤이 된것에 대하여 안도하는 순간은 - 예수님 덕분에 근원적으로 구원받았다는 그런 면 보다는, 최소한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시시각각 자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예수쟁이라면 - 우덜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우덜이 '죄많은 인생'이란 것에 동의한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나는 떳떳할 수 없다. 어떤 순간에도 나는 다른 사람을 멋대로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 내가 죄인인 마당에, 뭘 어쩐다는 말인가.  불의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고 행동 할 때에도 우덜은 기억해야 한다 '나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악과 싸우는 순간에도 내가 죄인임을 잊지 않고, 몸을 낮추어 더욱 열심히 악과 싸워야 하는 것인데.  어쨌거나 나는 한평생 아둔하게 살았으며 이제 완전 한물 간 아둔패기이다. 도대체 세상 돌아가는 것이 기묘해 보인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2. 20. 22:22

2월 6일에 로제타스톤 중국어 기초를 시작해서 6주분량의 생기초과정을 2주에 마쳤다. 대략 한 과정을 마치면 나머지 단계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가늠이나 예측이 가능하다. 대략 로제타스톤의 중국어 프로그램 1/3을 마쳤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평가를 하자면 - 로제타스톤 중국어 프로그램 18주 과정을 모두 마쳐도 뭐 중국어를 유창하게 한다거나 그런것은 추호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로제타스톤의 다른 언어 프로그램도 비슷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나는 뭘 배웠는가? 사실 나는 니하오, 니하오마의 차이, 짜이지엔, 4성조를 어떻게 차이나게 발음할것인가 정도를 희미하게 파악하는 수준이다.  듣고 - 문제에 대한 답은 눈치껏 잘 때려잡지만 말을 수월하게 하지는 못한다. 당연한거지.  눈치는 꽤 발달해서 답 맞추는 것은 귀신같이 잘 골라낸다.  듣고 눈치로 때려잡기는 귀신이고, 읽기는 원래 한문을 잘 하는 편이라 겁날게 없고, 입에서 말이 잘 안나오는게 문제인데, 원래 입 떼기가 어려운거다. 

 

그러면 나는 만족하나? 이만큼도 만족한다. 그래도 로제타스톤 중국어 전코스의 1/3을 마친 결과 '어렴풋이 어휘 공부를 좀더 해야하고, 기초회화는 그냥 외워버려야겠다는 것과, 중국드라마 채널로 중국 드라마를 볼때 제법 내 귀에 잡히는 어휘들이 많아져서 나 스스로 흥분을 하고 있으며 그러니까 대충 중국어 공부를 어떻게 하면 될지 가늠이 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머지 2/3도 공부를 마친 후에 개인교습을 받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최소한 가갸거겨 정도는 공부를 하고나서 개인지도를 받건 학원 수업을 듣건 해야 하는게 아닌가. 

 

기초 한자실력이 내가 좀 되니까 - 중국어 어휘 배우기는 수월하다. 예컨대 춘-하-추-동 과 같은 사계절도 발음이 무척 비슷하다. 모친 부친도 무친 푸친 뭐 이런식이고.  뭐 이런 대강의 틀에 대해서 눈을 떴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머지도 마저하고, 또 방법을 찾아봐야지.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2. 15. 13:49

 

 

일전에 소래 어시장에 들렀다. '열기구이백반' 생각이 나서, '여수오동도'라는 생선구이집에 가서 열기구이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어릴때 시장에서 그 빨간 물고기를 '겐따로'라는 일본말로 불렀던 것 같은데 동일한 어종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 행복한 식사를 하고, 생선이나 몇가지 사가자고 생선전을 돌다가 '자반고등어' 한 손하고 뭐 이럭저럭 고르는데, 내 눈에 뻗뻗하게 얼어 자빠져있는 동태더미가 눈에 띄었다. 앗! 잊고 있었는데, 저것이 동태이지!   어릴때부터 엄마가 시장에 심부름을 보낼때 대체적으로 꼭 사오라고 주문하던 것이 그 '동태'가 아니었던가.  콩나물, 두부, 동태는 늘 시장가서 사오는 것들이었다. 

 

그 동태를 정말 오랫만에 어시장에서 발견한 것인데 - 갑자기 엄마 심부름으로 동네 골목 시장으로 향하던 그 장면과, 시장 상인들 모습, 뭐 그 속에 존재감없이 있는 내 모습까지 한꺼번에 기억이 몰려오면서 - 마치 초등학교 골목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달콤하고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약간 몽환적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저 동태는 얼마에요?' 물었더니 '만원'이란다.  동태가 귀하다더니 정말 비싸구나 만원이나 하는구나 하면서도 나는 귀하신 동태를 - 그 어린시절의 추억의 값으로 사기로 했다.  그래서 달라고 했더니 어물전 사장님이 동태 한무더기 (세마리)를 모두 가져다가 턱턱 잘라 손질을 하기 시작한다? 그 세마리 모두 합쳐서 만원이라는 거였다. "이 세마리를 다 주신다고요? 이거 전부에 만원이라고요?" 내가 놀라서 물으니 그렇단다. 

 

결국 동태 한무더기를 사다가 우리 두 식구가 동태탕 한끼 끓여먹을 양으로 봉지봉지 담아서 냉동실에 담아놓고, 쏠쏠이 꺼내먹는 중이다. 동태가 귀해졌다지만, 그래도 동태가 다른 것에 비해서 싸네 - 역시 좋은 친구네 하면서.

 

동태한테 "야, 너 오랜만이다 반갑다!"라고 말을 거는 나는 정말 '옛날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꼭 서러운 것만은 아니다. 추억이 아주 많아지고, 옛추억이 금빛으로 빛나니까.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2. 13. 12:12

 

지난해 12월 8일 1차 헌혈에 이어 2개월이 지나고 - 미국에 다녀온지도 1개월이 지났으므로 헌혈 가능한 날짜가 되었기 때문에 [레드커넥트] 앱으로 예약을 하고 오전에 송도 메가박스 윗층에 있는 헌혈센터에 가서 헌혈을 하고 왔다.

 

 

헌혈을 하러 가면 일단 개별적으로 문진을 하는데 피를 뽑아서 간단히 뭔가 점검을 하고 (나는 뭐 무슨 수치가 높아서 건강하고 좋단다) 혈압을 재고, 혈액형을 묻고 뭐 대충 그런것을 한다.  지난번에 '전혈 (그냥 피)'을 기증했는데 - 이번에는 '혈장혈소판 수혈'을 선택했었다.  예약할때는 '혈장혈소판 수혈'로 선택을 하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상담하시는 분이 "일단 아이를 낳으신 여성분은 혈소판 기증은 안되고요 -- 혈장 기증을 하시는것인데요 -- 시간이 많이 걸리고요, 힘드실것이고요 --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희가 절실히 필요한 것은 '전혈 (그냥 피)'이에요. 그게 많이 부족해요."  뭐 전혈 기증을 해주면 도움이 많이 되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러죠 뭐. 전혈로 갑시다' 했다. 

 

 

 

사실 내가 '혈장혈소판 기증'을 선택했던 것은 - 대체로 단골 헌혈기증자 님들 리뷰나 기타 정보를 보면 '혈장혈소판 헌혈'이 '전혈' 헌혈에 비해서 비교적 몸에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피에서 필요한 요소만 걸러내고 나머지는 다시 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스템을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고 (그것도 공부이니까) - 그리고 내가 지난번에 '노구'를 이끌고 생피를 뽑고 나서 며칠후에 끙끙 앓았었다. 몸살도 겹치고 해서 십만원짜리 수액을 맞아가면서 일을 했었다.  그래서 그 때 내가 너무 무리했나 싶어서 부분수혈(혈장혈소판)쪽으로 가려고 했던 것인데 - 생피가 모자란다니 내 피를 주기로 했다.  나는 또 기운없고 뭐 몸살기 있으면 가서 영양수액 꽂고, 스테이크 큰거 하나 썰어먹고 말지 뭐. 하하.

 

 

전혈 320밀리 정도는 한 15분이면 뽑는것 같았다. 금세 끝난다. 피 뽑는동안 '헌혈자들에게 주는 선물' 목록을 보여주며 뭘 갖고 싶은지 선택하라고 한다. 제빵점 선물권이나 문화상품권이나 대체로 '만원' 상당의 기념품들이 주어지는 것 같고, 또 다른 선택으로는 그냥 '지역 고교생 장학금'을 선택하면 일정금액이 장학금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서 그걸 선택했다. 기왕에 내 피를 누군가에게 줄때는 뭐든지 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는게 더 기분이 좋으니까.

 

헌혈을 하면 좋은 점:

1. 피가 급히 필요한 어떤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나는 내 가족이 수혈받고 살아나는 것을 목도 했기 때문에, 이 의미가 아주 생생하다)

 

2. 내가 그래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거의 '마약'수준으로 좋아진다. 매우 행복하다. ㅎㅎㅎ (사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헌혈을 하는게 아닐까 추측한다)

 

3. 평소에 내가 먹는 음식이나 내 건강상태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편이다. 다음에 건강하고 신선한 피를 주고 싶은 욕심에.  결국 내 건강을 더욱 잘 돌보게 된다. 

 

 

헌혈을 하고 싶어도 지병이나 유전적 요인이나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다. (나도 내가 헌혈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포자기하고 오랫동안 지내왔었으므로 그분들의 애환을 잘 안다). 헌혈을 할 수 있는 몸이라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일이다. 헌혈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나 감사한지.

 

 

이제 내 몸상태를 예의주시하다가 여차하면 갈빗집이나 스테이크집으로 곧바로 가는거다. 그래도 기운이 없으면 내과에 가서 칠만원짜리 영양수액이나 하나 맞는거지. 그래도 헌혈은 즐겁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2. 10. 10:32

로제타스톤에서 '전과목 평생 수강권'을 판매하길래 - 국내에서 가장 싸게 살수 있는 곳을 검색하여 대략 18만원정도에 수강권을 샀다. (다나와 이런데 검색하면 되는것 같다).  

 

 

등급은 기초-중급-고급으로 편성되어 있고, 각단계별로 6주 (1주 5일) 분량이니까, 초-중-고 과정 수업자료를 모두 거치는데 18주가 걸린다고 보면 되는데 - 보시다시피 5일만에 한 3주 분량을 하면, 뭐 종일 앉아서 이것만 파고 있으면 뭐 금세 마칠수도 있겠다. (여기서 마친다는 것은 자료를 그냥 다 거친다는 것이지 정말로 중국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뜻은 아닐것이다.)

 

 

(언어교육 전문가로서 살펴볼때) 이 교재의 내용 구성은 다분히 '어린 아이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비슷하게 설계해 놓았다. 일체 설명도 무엇도 없이, 주어지는 수업자료를 따라가다보면 '감'이 잡히고 '추측'을 통해서 '문법'을 파악해 가게 된다.  우리가 '한문교육'을 받은 세대라서 '문자 읽고 쓰기'는 거저 먹는 수준이고, 대략 문자를 알기 때문에 '어휘'도 '가늠'이 가능하다. 뭐 설명이 없다보니, 추측하고 그러느라 에너지를 써야 해서 가끔은 '교과서 봐 가면서 설명 들어가면서 휙휙 진도 빼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내 계획은 - 일단 이 프로그램 안에 설계된 학습 진도를 끝까지 다 해 보고 - 그러면 뭔가 중국어에 대한 감이 잡히겠지 - 그 후에 다른 학습지나 학습 방법을 찾아보려 한다. 지금 현재로는 '심심풀이'로 '게임하듯' 하는 수준인데 그냥 게임한다고 생각하면 재미있다. 진도 빼는 재미도 있고.  (중국어 교재를 다 마친후에는 일본어, 스페인어도 동일한 방법으로 게임하듯 대략 맛보기를 해 볼까 생각하게 된다.)

 

 

'열쇠'를 중국어로는 '요시'라고 한다.  '요시'라는 중국어가 우리말에 '열쇠'로 자리잡은게 아닐까? (우리말 열쇠의 어원이 중국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해 봤다.  어쨌거나 - 스트레스 없이 - 의무감 없이 - 게임하듯 즐기는 중국어 공부가 재미있다. (얼마나 학습 효과가 클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심심파적이니까).

 

 

 

그래도 '월량다이삐야오 워더신' (달이 내 마음을 비추네) 이 노래도 막힘없이 쓰고 노래부를수 있게 달달 외웠기 때문에 - 그 노래에 나왔던 어휘나 표현이 나오면 무척 반갑다. 뭐 외국어는 결국 내가 그 언어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가 - 그게 문제다. (나의 학습 스타일은 결국 내가 그 외국어와 얼마나 시간을 많이 보냈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 '월량' 노래에서 '니치칸이칸 니치샹이샹' (니가 봐 봐, 내가 생각을 좀 해 봐봐) 뭐 이런 가사가 있는데, 워싱턴에서 중국인에게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 내 눈을 가리키고 그의 눈의 가리키며 '니치칸 이칸' 이라고 했더니 막 웃더라. 그리고나서 그 내 말이 그 중국인들 사이에서 아주 재미있는  '유행어'가 되었다고 한다. 하하하. (중국어도 못하는 내가 그 말을 너무 유창하게 했던거다.하하하. 음, 나는 노래나 시를 외우는걸 좋아해서 - 외국어도 노래로 배우는게 재미있다.) 

 

 

* https://www.lingohut.com/ko/l61/%EC%A4%91%EA%B5%AD%EC%96%B4-%EB%B0%B0%EC%9A%B0%EA%B8%B0

 

무료 중국어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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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 공부를 보강하기위해서 검색하다가 이곳의 자료로 보충수업을 하기로 했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2. 2. 12:01

 

지난해에 내가 기획하고 이끌었던 '성인 평생교육 프로그램'이 성공적이었던 관계로 올해에는 작년보다 프로그램 예산이 두배로 늘어날 것 같다 (방금 프로포절 작성을 마쳤다). 

프로포절 쓰기는 간단치 않다. 내가 2주가량 명절도, 주말도 없이 이 일에만 매달려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 제안서를 마치는 날, 우리 팀원이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난해에 우리대학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파견되어서 수업 보조 역할을 했던 분들이 여러분 계시는데, 그 분들중에서 특히 열심히 활동 하셨던 분이 한 명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내 입장에서 한두번 스친 사람은 전혀 기억을 못하는 편인데 - 게다가 마스크를 쓰고 지냈으므로 사람을 구별하고 기억하는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  그 한 사람 만큼은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늘 부지런히 움직이고, 내가 나타날때마다 '일사후퇴때 사고로 헤어졌던 형제를 다시 상봉한 듯 반갑게 다가와 환대를 하던 분이었으며, 행사때 초청하지 않아도 가족까지 대동하고 나타나서 열렬히 행사를 지원하던 분이었다. 이 분들은 우리 학교 예산이 아니라, 본부에서 별도 예산으로 파견하여 관리하던 수업 보조 인력에 해당되는 분들이었다. 

 

올해 사업제안서를 꾸리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예산 절감 차원에서 본부에서 파견하는 수업 보조 인력 프로그램이 취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수업보조로 일하시던 다수의 시민들이 극히 제한적이나마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이분들은 수고비는 얼마 받지 않았지만, 시민의 평생학습 프로그램에 자신들도 어떤 기여를 한다는 사명감과 보람감으로 이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있는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제안서 작성하는 마지막 날, 그 열심히 활동하던 분이 우리 팀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우리 팀원과 수업관련 소소한 통화를 하셨으리라 그래서 그쪽으로 연락을 취하셨으리라. (나는 전화를 아예 꺼놓고 사는 사람이라, 학교 교직원 외에는 아무도 나와 통화 할 수 없다.) 일상적인 안부와 덕담이 이어지고, 그분이 '일거리를 잃었다'는 소식을 전하시며 - 대학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이 참 좋았는데 그 일을 잃었다. 무급이라도 좋으니 자원봉사로라도 계속해서 일하고 싶은데 그런 일자리가 없을까? 이런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고 한다.  '저희가 그분을 파트타이머로, 시간제 알바로 채용해도 될까요?' 팀원은 내게 물었고, 나는 답했다 'Why not? Go ahead!' (물론 되죠. 합시다!)   우리도 예산을 짜는 가운데 보조 인력이 여기저기 필요하고, 대체로 학생들에게 이런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학생들이 일하는 경험을 쌓을수 있도록 하는데, 그 일부를 그 시민에게 제공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난해에 그분이 수업에서 하던 일들을 계속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 보았다. 

 

 

그 분이 우리의 계획을 듣고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우리도 기쁘다. 

 

내가 이분의 사례에서 배운것이 뭔가하면 :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기쁘게 열심히 해도, 그 일자리가 사라지는 불운이 닥칠수도 있다. 그게 인생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해 해도 상황이 참 불친절하게 돌아갈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불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연락을 취하거나 문을 두드리다보면 예기치 않았던 기회가 만들어지거나, 예기치 않았던 응원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이 분은 평소에 열심히 활동하셨기 때문에 사람 분별 못하고 기억력도 안좋은 나도 기억할 정도였고 - 그런 열성이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3. 2. 2. 11:30

     입춘立春이면  

 

 

     박노해

 

 

     입춘이면 몸을 앓는다

     잔설 깔린 산처럼 모로 누워

     은미한 떨림을 듣는다

 

     먼 데서 바람이 바뀌어 불고

     눈발이 눈물로 녹아내리고

     언 겨울 품에서 무언가 나오고

 

     산 것과 죽은 것이

     창호지처럼 얇구나

 

     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씨앗처럼

     아픈 몸 웅크려 햇빛 쪼이며

     오늘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좋았다

 

     언 발로 걸어오는 봄 기척

     은미한 발자국 소리 들으며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입춘立春이면

      신작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수록 詩 49p

 

 

 

별로 특징도 없고 구태의연하기까지하다고 평생 생각했던 내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지 박노해 시인이 내게 알려주었다. 내 이름이 너무나도 신비로운 의미로 이 시에 반복되는 것이다!  내 이름 정말 근사하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