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2. 12. 22. 12:53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주제 관련하여 추천서적을 찾던 중  한국계미국인 작가 Cathy Park Hong의 Minor Feelings: An Asian American Reckoning이 눈에 띄어 아마존 킨들로 내려받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을때까지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내용과 메시지를 가진 책이었다.  (아무래도 이 책을 어떤 '교재'로 선정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내게는 '충격'적이고 그리고 작가와 나를 비교하며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여러가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일단 영문원서를 읽는데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보통사람들 혹은 이민자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미국사회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혹은 '내 자식들과 그 후손들'이 어떤 각오로 살아야 하는지, 이 책이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겠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2. 15. 19:38

미국 영주권자들은 일년에 최소 2개월 이상은 미국에 체류해야 한다. 미국 밖에서의 체류 기간이 일년이상 길어지게 된다면 소정의 '재입국 허가 (2년)'를 받고 나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알려져있다. 미국 밖에서의 체류가 6개월 이상이 되거나 1년가까이 된다면, 미국 입국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지난 수년간 미국집에 드나드는 것이 문제가 된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 미국 입국은 사정이 달랐다. 지난 여름에 나는 한국을 떠날수 없었고, 11개월만에 미국에 입국하게 된 것이다. 최악의 경우, 입국 심사장에서 귀국선을 탈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 '너무 오래' 미국을 떠나 있었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었지만 - 사람에게는 사정이란 것이 있으므로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 정신으로  워싱턴 덜레스 공항 입국 심사관 앞에 섰다. 

 

 

심사관: 너 꽤 오래 미국에서 떠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나: 알고 있다. 나로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 구구절절한 상황 설명 *** 이러한 이유로 나의 미국 입국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많이 좋아져서 마침내 미국의 가족 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내 설명을 들은 심사관은 상자에 내 여권과 그린카드를 담아주면서 저기 저쪽 오피스로 가보라고 안내를 해 주었다. (입국 보류)를 뜻하는 것이지. 예상했어. 그러면 거기 가서 다시 내 상황을 설명하면 되지. 

 

 

입국장에서 입국보류를 당한 사람들이 가게되는 오피스로 향하니 뭐 여러가지 상황으로 그쪽으로 온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20여분 앉아서 대기하니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 입이 거친 심사관: 너 꽤 오래 미국에 오지 않고 있었어. 
  • 얌전한 나: 11개월간 오지 못했어. 왜냐하면 ***** ***** 한 상황 때문이었어. 
  • 입이 거친 심사관: 내가 네 말을 믿을거라고 생각해? (매우 냉소적으로) 너 솔직히 말해봐 미국에 안 살지?
  • 얌전한 나: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적인 사정으로 미국과 한국 두 대륙을 오가며 살고 있어. 그러므로 나는 미국에 살고 있다고 확언해. 나 역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아야 하는 내 인생이 피곤해. 하지만 그것이 내 운명이면 그대로 사는수밖에. 그러니 내 삶을 네식으로 판단하려고 하지는 말아. 나도 11개월간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때 영주권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입국 거부 당하면 하는수 없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온거야. 하지만 나는 설명을 정확히 하고 싶었어. 
  • 입이 거친 심사관: (내가 그 녀석의 입이 거칠다고 말하는 이유 = I don't want to f*** off one's life but I don't think you are living in the U.S. 나는 남의 인생을 *되게 만들 생각은 없지만 네가 미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라는 식으로 F-word 를 써가면서 말했기 때문에 내가 매우 기분이 나빴다. 되게 무례한 녀석이었다.) 너 돈 얼마 갖고 들어왔어?
  • 얌전한 나: 자식들 약혼하는데 선물로 반지 사주려고 *천 달러 갖고 들어왔어. 여기 있어 (봉투 꺼내 보여줌) 
  • 입이거친 심사관: 얼마라고? 정확히 얼마?  (내가 예컨대 3,000 달러라고 하자 그는 뭐라고 3만 달러? 하고 되 물었다. 내가 아니 3,000 달러.  내가 또박또박 대꾸하자, 그는 약간 후퇴하며, '뭐라고 삼만 달러가 아니고 삼천이라고? 우물우물') 그래서 내가 또박또박 말해줬다. '일인당 만달러 이하면 세관 신고도 할 필요가 없어. 뭐가 문제지? 아들  둘이 약혼하면 부모가 큼직한 선물을 하는것이 한국인의 문화야.' 
  • 입이 거친 심사관: 나도 이런 일로 네 삶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 다음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한국체류를 하게 되면 미국 입국에 문제가 생길거야. 이번에는 통과시켜주지만 다음에는 힘들거야. 
  • 얌전한 나: 나도 알고 있어. 이번에도 입국을 못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어. 네가 나를 통과시켜준다니 참 고마워. 나로서도 자식들 곁으로 돌아올수 없어서 고통스러웠어. 
  • 입이거친 심사관: 그래 앞으로 조심해. 잘가.
  • 얌전한 나: 고마워 메리크리스마스!

 

 

 

 

사실 지난 여름에 사정상 미국으로 가지도 못하고, 게다가 영주권 연장 신청한 것도 소식도 없고 그런 상황속에서 -- 나는 이제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자유롭게' 살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영주권 유지하겠다고 미국에 드나들기도 귀챦고 영주권은 필요하면 다시 만들면 되는 것이고 뭐 그런 입장이었다. 올 겨울에도 내가 미국에 올수 있을지도 분명치 않았다. 나는 거의 모든것을 '포기'하고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식 없어서 포기했던 영주권 연장 승인이 이루어져 새 영주권이 날아왔고, 여름에 발목을 잡았던 문제가 겨울에는 발생하지 않아서 미국으로 올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내 현재의 상황이 정말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흘러가고 있기때문에, 되면 되고 말면 마는거고, 죽으면 죽는거지 겁날게 없다는것이 요즘 나의 생각이고 태도이다.  이런 되면 되고 말면 마는 태도에 한가지 더 -- 내 삶을 유지하는 '기운'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의지'이다.  내 삶이 정말 한치앞도 내다보기 힘들게 하루하루 흘러가기 때문에 나로서는 하나님께 의지해서 사는 것 외에 답이 없다. 하나님께 의지할수밖에 없는 이 캄캄한 하루하루 속에서 나는 구석에 물린 쥐가 사자를 물듯 - 겁날게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입국 심사관 앞에서 내가 기죽지 않고 초연하고 당당하게 대꾸할 수 있었던 이유.  '입국 안시켜도 그만이야. 영주권이고 뭐고 다 불살라버리고 그냥 살면 돼' - 이런 초연함. 이걸 그 녀석이 어쩌겠는가...

 

 

 

 

이번에 적법한 법위내에서 내가 저축한 현금을 많이 갖고 왔다.  미국 드나들기도 귀챦아서 정말로 영주권이고 뭐고 다 물려버리고 미국 돌아다니는 대신에 해외여행이나 돌아다닐까 그런 생각으로 - 자식들에게 큰 선물을 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참고로 개인당 일만달러 미만까지는 세관신고 안하고 적법하게 갖고 입국할 수 있다.) 그것도 나에게는 큰 돈이지만, 정말 부자들에게는 샤넬가방 하나 값이나 될까?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죽고 살릴만한 큰 금액이기도 하다. 무사히 입국하여 자식들 품에 안기니 안락하고 기쁘다. 잘생긴 미남고양이 토마스와, 못생긴 주제에 건방을 떨어서 더 귀여운 까만 고양이 '흑둥이'가 밤새 곁에서 자고 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 

 

 

* 피치 못할 사정으로 6개월 이상 혹은 1년 이상 미국에 체류하지 못한 영주권자가 미국으로 되돌아갈때 - 이것이 처음 발생한 경우라면 쫄지 마시고 피치 못할 상황에 대하여 조리있게 설명할 준비를 하시고 미국 입국을 하시면 될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입국이 힘들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도 사전에 이런 문제에 밝은 친구로부터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움직였다.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2. 13. 22:25

 

 

 

CPR =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심폐소생술

AED = Automatic External Defebrillator 자동심장충격기 

Heimlich Method = 하임리히법

 

며칠전에 심폐소생술, 자동심장충격기 사용 방법, 하임리히 방법등 긴급구호관련 세가지 방법을 약 세시간에 걸쳐서 교육받았다. 2015년에 미국 레드크로스에서 교육 받을때는 50달러 넘는 돈을 내야했는데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양질의 교육의 무료로 받았으니 참 우리나라 좋은나라이다.

 

사진에 보이는 CPR 연습용 더미 (dummy, 사람 모형)는 2015년에 미국 버지니아에서 교육 받을때는 그냥 '더미'에 불과했는데 그 사이에 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 우리가 제대로 정확하게 눌러눠야만 머리까지 불이 들어오게 만들어져서, 우리가 이걸 제대로 하는지 안하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놀라운 기술이다!!! 감동 받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응급처지 교육이 얼마나 좋아졌냐하면 - 이 교육에 참가한 모든 교육생들이 이 '더미'를 가지고 연습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냥 보여주기만 하고 구경만 하다가 나올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걸 참가자 모두에게 시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원래 교육은 그래야 하는거니까. (옛날에,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하던 시절 나의 남편은 체육시간에 수영을 배웠는데 - 수영장은 꿈도 못꿨고, 학교 계단에 줄지어 서서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서 허공에 팔을 저으며 수영하는 동작을 하고 그것으로 수영시험을 쳤다고 한다. 하하하하. 허공에서 팔을 저으며 수영시험을 치른 위대한 시대가 있었다. VR의 선구자들이었다고나 할까.)

 

AED할때 기억해야 할 것: 내가 쓰러진 사람을 봤다면 - 다가가서 의식이 있는지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면서 어깨를 톡톡쳐서 의식을 확인하고 의식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근처의 사람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어서 119에 신고하세요!"  다른 한사람을 지목하여 "어서 AED를 갖고 오세요" 하고 외친후 곧바로 CPR을 실행하며 119가 오거나 전화로 119의 지시를 듣는다. AED가 오면  패드 하나는 오른쪽 위에, 하나는 왼쪽 아래에 붙이고 전원 연결 -- 기계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한다. 무조건 기계가 하라는대로 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죽어라고 CPR을 한다. (사람을 지목하여 지시해야 하는 이유는 '방관자 효과'를 막기 위해서이다. 누군가를 지목해야 그 사람이 움직인다.)

 

 

하임리히는 특히 민간인들도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하임리히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대체로 구급대원이 도착할 즈음이면 하임리히가 소용이 없는 - 곧바로 CPR로 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치 아래에서 안아 올리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이 교육이 의무사항은 아니었고, 원하는 사람이 가서 듣는 것이었는데 -- 내가 생각할때 이 교육은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민방위훈련 하듯이, 이런 훈련은 전국민이 받아서 기본적인 것을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원래 취미가 '배우기'라서 교육이란 교육은 모조리 받는 편이다. 만약에 내 학생이 수업중에 쓰러지면 내가 얼른 상황을 이끌어야 하니까. 

 

***

 

이 교육은 내가 속해있는 지역사회(?)의 '직원'들이 주요 교육대상이었던 듯 싶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분'들이 교육장에 많이 계셨고, 나같이 '자유롭게' 온 사람은 소수였다. 그러니까 어떤 분들에게는 이것이 '필수교육'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직원'들 속에는 어떤 (뭐라고 하지?) 위계가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이 교육 현장에는 국장급 직원이 있는가하면 과장급, 일반, 혹은 경비직이나 청소용역직에 이르기까지 그 직장의 거의 모든 직급의 사람들이 모였던 것 같다. 나는 그들 조직에 속하지 않으므로 눈치 볼 것 없이 아무데나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되었지만, 그 직장의 고위직은 맨 앞에, 그 다음줄, 그 다음줄, 이런 식으로 직급이 보였다.  그런데, CPR 더미에 심폐소생술을 하는 시간에, 그 직원들에 속하지 않는 우리들은  '소방대원'의 지시대로 차례차례 무대에 올라가서 신나에 연습을 하고 자유롭게 내려오는데 -- 어떤 분들이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하셨다. "내가 올라가도 될랑가? 언제 올라가지?"  내가 연습을 하고 내 코트를 벗어놓은 내자리로 오니, 그 내자리에 어떤 아주머니께서 엉거주춤 앉아서 무대쪽을 바라보며 마치 나의 도움을 구하는듯 혼잣말을 하셨다. "지금 나가세요. 저 앞에 서계시다가 앞사람 마치면 하시면 돼요!" 내가 말을 하니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계셨다. "자 절 따라 오세요." 내가 아주머니를 이끌고 더미 앞까지 갔다. 소방대원이 아주머니에게 손짓하여 더미 앞에 앉게 하였다. 

 

 

아주머니는 아주 힘이 좋으셨다. 머리끝까지 불이 들어오게 - 요령껏 심폐소생술을 하셨다. 참 잘하셨다.  (나는 그게 힘들었고, 소방대원 선생님이 이렇게 해보라고 조언도 하고 했다).  아주머니가 연습을 마치고 뒷줄의 자리로 올라가시면서 내 곁을 스쳤는데 내가 "잘하시네요. 저는 어렵던데 참 잘하셨어요" 했더니 내 어깨를 툭 치면서 "그게 참 보는것하고 달러. 해보니까 훨씬 잘 알것어" 하면서 웃으셨다. 

 

 

내가 존댓말을 하고, 그 아주머니께서는 내게 친근하게 반말을 하셨지만 - 어쩌면 우리는 동갑내기이거나 혹은 내가 더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원래 고생한 사람들이 일찍 늙고, 멋 좀 부리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덜 늙는다.  그 순간 만큼은 우리는 '절친'이었다. 나중에 스쳐도 기억도 못하겠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발견한 것은 -- 어떤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대개 당당하게 행동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없어하고 쩔쩔맨다.  그러니까, 응급처지 교육장에 들어섰을때, 그 곳에서는 모두 교육생일 뿐이다. 소방대원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지시대로 연습을 하는 교육생일 뿐이다. 그런데 그자리에서 나는 자유롭고 당당한데, 자유롭고 당당하지 못한 분들도 보였다. 옛날에, 내가 시골집에서 서울 집으로 올라왔을때, 나는 내집에 내가 왔는데도 '눈치'를 보았다. 내 부모, 내 형제들과 함께 살게되었는데 '눈치'를 보았다. 나는 내집에서 당당하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도 당당하지 못했고, 내 친부모 형제의 집에서도 당당하지 못했다. 어딘가 나는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는 찌끄래기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눈치를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눈치'를 볼때 그것을 쉽게 감지하는 편이다. 

 

내가 교육장에서 당당했던 이유는, 나도 늘 그런 곳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므로 거기가 그냥 내 교실 같아서였다. 앞에 국장님이 앉았건, 사무총장님이 앉았건 나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사실 나의 대화채널은 그들의 상관인 '대표'님이기 때문에... 그런데 연습을 하기위해 무대에 오를 차례를 기다리던 '아주머니'의 입장은 나와 달랐다. 아주머니는 아마도 청소용역을 하시거나 뭐 층층시하 였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며 혹시 자신이 실수하는게 아닐까 상황을 살펴야 했을거다. 바로 그런 '눈치'가 느껴졌기 때문에 내가 손을 잡고 더미까지 인도했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Lee Eunmee
카테고리 없음2022. 12. 9. 07:18

 

2022년 12월 8일.  날짜를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은 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헌혈을 한 날이다. 전날 밤에 불현듯 생각이 나서 웹으로 헌혈에 대하여 검색해보고, 근처 가까운 '헌혈할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검색해보고 '헌혈의 집'이 공식 명칭임을 배우고, 그야말로 '쓰레빠' 끌고 슬슬 걸어가도 5분 거리 안에 - 동네 편의점보다 더 가까운 곳에 '헌혈의 집'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바로 아침 10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가서 바로 하고 왔다. 

 

 

https://www.bloodinfo.net/main.do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오늘의 혈액보유량 (2022.12.09 기준) 전체5.7일

www.bloodinfo.net

 

헌혈에 뜻을 품었다면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서 제공하는 헌혈관련 정보를 살피고, 그 외에도 그냥 웹으로 몇가지 '후기'나 궁금한 사항을 검색해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  '레드커넥트'라는 앱을 다운받으라는 조언을 발견하고 나도 '레드커넥트' 앱을 다운받아서 전자문진도 사전에 마쳤다.  (헌혈의집 현장에 도착해도 전자문진 부쓰가 여러개 있어서 그냥 거기서 해도 되는데, 레드커넥트 앱이 내 손안에 있으면 편리하므로 앱을 추천한다). 

 

이 앱으로 헌혈 예약도 가능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예약을 하려고 했더니 '내일' 날짜부터만 예약이 가능했다. 예약없이 그냥 가기로 했다. 

 

 

 

 

 

 

 

아침에 문도 열기 전에 입구에 도착하니 안쪽에서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 곧바로 나를 안내하여 실내로 들어갔다.  예약인가 일반인가 묻고 '일반' 대기표를 뽑아 주었다. 그래도 내가 일찍 도착하여 1번이다. (내가 원래 기다리는거 싫어하고 성질이 급해서, 어딜 가건 꼭두새벽부터 가고 대체로 거의 1번 대기표를 받는다. 평소에 남보다 5분 먼저 서두르면 50분을 절약할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서 안내문도 읽어보고, 지시에 따라서 물도 몇 컵 마시고.  문진실로 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혈압 재고, 기초적인 문진을 다시 하는데, 헌혈전에 물을 충분히 마셨는가 확인한다.  아침에 밥도 잘 먹었는지 묻는다.  사실 나는 병원에서 채혈 검사할때, 종합검진을 위해서 피 뽑을때 대개 전날 밤부터 금식을 한다거나 최소 2시간 전부터 금식을 한다거나 이런 것에 익숙해 있어서 - 헌혈 할때도 피를 맑게 하기 위하여 밥을 안먹고 그냥 멀건 채소국만 따뜻하게 먹고 갔는데 - 기왕이면 깨끗한 피를 주고 싶어서 - 그 얘기를 했더니 문진 하던 간호사분이 웃으셨다. 그냥 밥 잘 먹고 오라고 한다. 간밤에 잠은 잘 잤는지, 아픈데는 없는지, 피로하지는 않은지 이런 일반적인 것을 묻는데 '피로하지 않으세요?' 하고 묻길래 내가 웃으면서 말해줬다, "제 나이쯤 되면 밤에 푹자고 아침에 일어나도 피곤하다고 느껴져요. 늘 피곤하죠. 하하하." 

 

치과 진료대같이 생긴 의자에 누워서 피를 320ml 뽑았다. 약 7분쯤 걸린것 같다. 피가 피주머니로 흘러가는 동안 그 피주머니를 보면서 가슴이 찡해진다. 사람마다 헌혈을 하게 되는 계기가 다 다를 것이다. 그냥 학교에서 단체로 하는 바람에 어떨결에 시작한 사람도 있을수 있고, 각기 계기가 다른데 -- 나의 경우는 내가 봄 여름 신촌살이를 하는 동안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긴급 수혈을 여러차례 받았던 것이 가장 큰 계기일 것이다. 그는 수혈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여러차례 '시커먼 피주머니'가 그에게 공급되었고, 시체같은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현장에서 목도하곤 했다. 피가 그냥 바로 생명 그 자체였다. 피가 그렇게 거룩한 것인지 그때 배웠다. 

 

내가 헌혈을 결심한다고 헌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헌혈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행운아'들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건강 문제로 헌혈을 해주고 싶어도 절대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다. 나 역시 아주 오랫동안 내가 헌혈을 하면 안되는 사람인줄 알고 살아왔다. 그래서 '어차피 나는 헌혈 할수도 없고' 해서 헌혈에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관심 가지면 뭣 하는가?  그런데 9월 10월 두달에 걸쳐서 나는 굉장히 세밀한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 특히 '헌혈'을 염두에 두고 의사선생님과 이런 저런 검사를 하며  우리끼리 긴밀한 대화를 주고 받은 결과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내가 헌혈을 하면 안되는 '조건'이 전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현재 사라지고 없다는 '신묘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신묘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불을 받으셨군요,'  '옛날에 오진을 받으셨군요' 등등 다양한 해석을 내 놓는데 나는 '하나님의 깜찍하신 손길'로 보는 편이다. 수십년간 오진이 되풀이 될수도 있는가? CT까지 찍으면서 심각하게 보던 그 모든 진단들이 모두 오진이었을까?  어쨌거나 나의 주치의께서 '헌혈 마음껏 하십시오'라고 선언을 해 주셨으므로 나는 헌혈을 하러 간거다. 

 

그러니까,

1) 헌혈은 거룩한 일이다.

2) 이세상에는 헌혈을 하고 싶어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 처한 선량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3) 헌혈 할 수 있는 조건의 몸을 갖고 있다면 감사 할 일이다. 

 

헌혈을 하고 나니 자동으로 앱에 헌혈 기록이 등재가 되고, 현장에서 스티커형 헌혈증서도 한장 준다. 첫 헌혈자에게는 이런저런 기념품도 준다.  레드커넥트 앱을 열어보니 헌혈 기록과 함께 다음에 헌혈 가능한 날짜까지 표시가 된다. 나같이 전혈 (그냥 피)을 제공한 사람은 2개월을 기다려야 헌혈이 가능하다 (1년 5회로 제한되어 있다). 전혈이 아니라 '혈장'과 같은 피의 일부 구성성분만 제공한 경우에는 2주 후에 다시 헌혈이 가능하다. 

 

위에 적은대로 누구나 다 헌혈을 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 헌혈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유행병 지역을 다녀왔다거나, 수술을 했다거나, 어떤 특정 약물을 처방받았다거나 이런 저런 경우에 일시적으로 헌혈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사전에 상세히 체크를 하여 내가 헌혈이 가능한가 살펴야 한다. 가령 나의 경우 내년 2월 2일에 다시 헌혈이 가능하지만 만약에 내가 해외를 다녀오고 뭐 감기약을 먹고 이런다면 그것도 고려하여 헌혈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상세한 사항은 웹에서 확인 가능하다) 

 

나의 계획은, 내 상황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한국은 만 69세로 한정되어있다, 나중에 변경될지도 모르지만), 헌혈이 허락되는한 나는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고 싶다. 

 

 

헌혈 마치고 약 15분간 쉬었다가 나오는데 간호사가 '어지럽지 않은지' '몸에 이상은 없는지' 다시 묻는다. 나는 '헌혈을 했다는 기쁨' 때문인지 오히려 몸과 머리가 가뿐하게 여겨지고 가슴에서 기쁨이 솟아서 상태가 아주 좋았다. 그리고 곧바로 '고기'집에 가서 스테이크를 300그램쯤 구워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아주 신나게 먹고 왔다. 하하하. 정기적으로 헌혈을 한다면 헌혈날이 내가 고기 왕창 먹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드러누워 피를 뽑는 아주 짧은 동안에 떠오른 아이디어인데 - 내년 봄학기에 내가 가르치는 'Research Writing' 수업의 여러가지 연구 주제중에 'Blood Donation' 을 포함시켜야겠다. 내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생활주변이나 사회생활 속에서 어떤 연구주제를 정하여 한학기간 관련 논문도 읽고, 연구 계획을 세우고, 연구활동을 하고, 형식을 갖춘 작은 논문을 써내야 한다. 학생들이 직접 헌혈의 집을 방문하여 헌혈도 해보고, 한국의 헌혈체계나 문제점등을 문헌과 실무자 인터뷰를 통하여 직접 알아보고, 헌혈캠페인까지 직접 실행해보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포스터를 제작하여 세상에 알리는 것 까지. 여러가지 토픽중에 이것도 포함시키기로 결정한다. 학생들은 이 작업을 통해서 연구방법론과 연구 글쓰기만 익히는게 아니라 몸과 머리를 바쳐 사회에 기여하고, 큰 기쁨을 얻게 될 지도 모른다. (희망사항)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