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8.12.31 여덟 마리의 덤불 고양이
  2. 2018.12.29 눈먼 고양이의 새로운 친구들
  3. 2018.12.07 인생이 주는 선물
  4. 2018.12.04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2)
Diary/Life2018.12.31 11:52


버지니아 집에 도착하여 나흘간 관찰한 바로는, 현재 우리집을 '급식소'로 인지하고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고양이는 모두 여덟 마리이다. (밤사이에 여우나 어메리칸 라쿤이 왔다 갈 것이다.)


그 여덟 마리에 대하여, 아니 이곳을 다녀간 고양이들에 대하여  내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정리를 해보자.


어미고양이 (고양이 종족의 조상): 이 고양이는 내가 이 집에 오던 해에 처음 발견했을때에는 태어난지 1년도 안되는 작은 고양이었다. 흰 샴고양이와 오누이처럼 둘이 붙어다니는걸 가끔 지켜봤다.  어느날 심심해서 뒷문 밖에 고양이 먹이를 놓아주자 가끔 아무도 모르게 와서 밥을 먹고 갔다. 처음에는 밥을 놓아주고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먹고 가서, 늘 빈 밥그릇에 밥을 채워주기만 했다.  2014년 어느 초가을 저녁에 그 낯익은 고양이가 새끼 두마리를 데리고 와서 밥을 먹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새 어미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고양이는 새끼 두마리를 배불리 먹인후에는 달빛 아래에서 놀다가 사라지곤 했는데, 두마리 새끼중에 한 놈은 참 못생긴 놈이었고, 또 한놈은 참 예뻤다. 가을이 깊어졌을때, 어미고양이가 늘 새끼를 몰고 가는 덤불 입구에 가서 살펴보니 새끼고양이 한마리가 덤불속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런데, 눈에 문제가 있어보였다. 감염이 된 것 같았다. (태어날때 정상이었는데 감염된걸까?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걸까?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막대기 끝에 맛있는 먹이를 꼬치처럼 꽂아서 덤불 안으로 살살 들여미니까, 경계를 하면서도 그 음식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먹이를 얌전히 받아먹었다.  그때부터 온갖 종류의 맛있는 고양이 먹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생 닭가슴살도 사다가 잘게 썰어 던져주기도 하고. 제발 먹고 살기만 하라고. 그해 겨울을 지내면서 우리집 뒷마당은 어미와 두 아기들의 보호소가 되었다. 추운 겨울, 새벽이면 애들이 추위에 얼어죽지나 않았는지 잠에서 깨자마자 내다보았고, 우유를 따뜻하게 데우고 진수성찬을 차려서 뒷마당에 내다 주었다. 어미고양이와 남매처럼 사이좋은 샴고양이, 그리고 새끼 두마리와 함께 그 겨울을 보냈다. 그 해 겨울은 내게도 혹독한 겨울이었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가능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백수'였다.  고양이들보다 내 가슴이 더 추웠을지도 모르지만, 고양이를 돌보는 재미로 우울증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샴고양이는 어미의 남편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다정한 친구들이었다. 미끈하게 잘생긴 샴고양이는 후에 다른 수컷들의 등살에 고통을 겪다가 어디론가 영영 사라졌다. 고양이 수컷들은 어느날 사라진다. 


2014년 가을에 첫배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는 2015년 봄에 두배째 새끼 다섯마리를 낳아서 잘 키우다가 여름 무렵에 모두 잃어버렸다. 내가 그 새끼들과 놀던 동영상도 남아있는데, 내가 추측하기에 여우가 한마리 한마리 잡아 먹었을것이다. 여우가 늘 고양이들의 덤불 근처를 기웃거렸다. 나는 새끼 고양이가 한마리 한마리 없어질때마다 가슴이 무너졌다.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말고도 울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야생 고양이로 태어나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소리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다니! 하면서 울었다. 


2015년 가을에 어미는 세번째 새끼들을 낳았다. 몇마리를 낳았는지 모르지만 두마리를 데리고 나타났다. 새카만 고양이. 우리가 '장군'이라고 부르던, 흑표범을 닮은 크고 미끈한 검정고양이가 아범일 것이다. 그 후에 어미는 중성화 되었다. 그 후로 어미 고양이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못난이 피터: 어미고양이의 첫 새끼. 나는 처음에 이 새끼 고양이를 보고 '어머나 세상에 저렇게 못생긴 고양이는 처음봐!' 했다. 정말 못생긴 고양이였다. 나는 어미고양이의 두 새끼에게 '사도 바울'과 '베드로/피터'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눈이 먼 아기 고양이를 응원하기 위해서 -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던 사도바울님의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 형제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준 것이다. 피터는 호기심이 많아서, 내가 물고기 낚시 장난감 막대기로 살살 유혹하자 야금야금 우리집 거실로 들어왔다. 조금씩 조금씩.  결국 겨울사이에 피터는 우리집 거실을 드나드는 하이브리드 고양이 (야생이지만 인간과도 교제하는)로 성장했다.  피터. 피터는 나중에는 이따금 내 침대에서 자고 나갔다. 야생 고양이가 내 침대에 진드기나 독을 옮긴대도 개의치 않았다. 난 그런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하이브리드 (반 야생) 사람이다. 피터는 2017년 여름에 내가 버지니아에 돌아왔을때까지도 이곳에 살아서 나를 반겼는데, 어느날 사라졌다.  어디론가 갔을것이다. 


눈먼 사도바울님: 어미고양이의 첫 새끼. 나는 이 고양이때문에 많이 한숨 짓고 많이 울고, 이 고양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대하여 많이 사색하고 깨닫게 되었다. 이 고양이는 진정한 야생 상태에서는 생존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 눈먼 고양이가 유아기에 실명을 하거나 처음부터 뭔가 문제를 안고 태어났거나 간에 무사히 성장하여 네번의 혹한을 견디고 건강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곁에 어미와 형제들, 그리고 선량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에는 내가 이 고양이 가족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온 동네 사람이 모두 후원자였다고 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고양이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으며, 눈먼 고양이가 비틀거리며 이동하는 것이 보이면 모두들 멀리 길을 돌아가거나 비켜주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응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 해 겨울을 보낸 일이 영화 장면처럼 회상이 된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던 겨울날, 고양이들은 덤불에서 나올수가 없었다.  나는 눈이 녹기를 기다리며 덤불만 주시했고,  덤불가에서 고양이들이 이쪽을 향하여 오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고 안도 했다. 눈에 덮여 죽었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들은 눈이 녹기를 기다려 어기적어기적 눈위를 걸어 우리집으로 먹이를 먹으러 왔다.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나는 낡아서 버리려고 했던 커다란 후라이판을 고양이 가족의 먹이 그릇으로 사용했는데, 새벽이면 그 후라이판에 우유를 데우고, 마른 고양이 사료를 넣고, 그리고 캔도 따서 넣어 주었다.  그러면 후라이판에서 김이 설설 났는데, 밤새 추위에 지쳐있던 아기 고양이들은 덤빌듯이 다가와 추위와 허기를 녹였고, 어미는 새끼들이 배불리 먹고 난 후에야 겸손한 표정으로 다가와 마저 먹이를 먹었다.  어미는 늘 새끼들이 배를 채운후에야 마지못해 와서 먹는듯한 표정이었다. 어미고양이의 헌신은 눈물겨웠다. 가끔 나는 생닭다리나 가슴살을 이들에게 던져 먹이기도 했는데, 내가 먹이를 줄 때면 일부러 막대기로 후라이판을 탱탱탱탱 종치듯이 때렸다.  '파블로프의 개실험'처럼 탱탱탱 울리는 소리가 밥주는 소리임을 기억하게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내가 먹이를 주고 탱탱치면서 "나비야, 나비야! 밥먹어라!" 하고 외치면,  덤불에서 고양이들이 삐죽삐죽 얼굴을 내밀고는 냉큼 달려왔다.  고양이들은 분명히 내 목소리도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먹이를 먹이는 것 외에도 나는 대나무 막대기 끝에 내가 바느질하여 만든 '황금물고기'를 실에 꿰어 매달아 그것으로 고양이들에게 오락을 제공했다. 어린 피터는 특히 나와 이 놀이 하기를 좋아했다. 피터와 내가 친해진 이유는 먹이 외에도 이 장난감 때문이었다.  이 장난감으로 고양이들을 거실로 살살 유혹하는 것이 나의 특기이다.  피터는 하늘을 나르듯 휙휙 날랐다, 이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눈 먼 고양이 사도바울 역시 이 장난감을 좋아했다. 눈먼 고양이는 어떻게 하늘을 휙휙 나르는 낚싯대 물고기를 잡을까?  사도바울을 위해서 내가 고안해 낸 것은 낚싯대의 황금물고기를 잔디위로 살짝 살짝 부딪치거나 살짝 끄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물고기가 잔디에 부딪치거나 끌리는 소리를 탐색하여 이 장난을 즐겼다. 사도 바울은 어찌나 영특한지 단지 발소리만으로 다람쥐를 쫒아서 달리고, 그 다람쥐가 소나무 위로 올라가 버리면 소나무 아래에서 다람쥐가 도망간 윗쪽을 쳐다보며 30분도 넘게 기다리고 앉아있기도 했다.  그는 마치 눈을 뜬 고양이처럼 그대로 행동했다. 



봉숙이: 봉숙이는 2014년 겨울이나 2015년 어느날 어린 고양이일때 나타났다. 어미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짝퉁이'라고 부르던 큰 고양이와 나타난것 같은데 그 '짝퉁이'는 봉숙이를 제 새끼처럼 위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는 미스테리인채로 남았다.  봉숙이는 어미도 없고, 눈치꾸러기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피터'를 따라다녔다.  피터를 자신의 의지처로 삼은것 같았다. 피터가 나의 꾀임에 넘어가서 우리집 거실로 들어오면 '봉숙이'도 피터오빠를 따라서 들어왔다. 피터는 분명 숫놈이었는데, 피터가 우리집 소파에 앉아 쉬고 있으면 봉숙이도 냉큼 피터 오빠의 품에 가서 피터의 젖을 빨았다.  피터의 젖을 빨았다고... 어쨌거나 숫놈도 젖꼭지는 있는 모양이었다. 피터는 조금 귀챦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봉숙이를 물리치지는 않았다.  피터는 뭐랄까 '쿨가이'였다. 늘 쿨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살가운데는 없었지만, 그래도 봉숙이에게는 엄마, 아빠 노릇을 해 준것같았다.  왜 봉숙이 이름이 봉숙이가 되었는가하면 -- 하필 그당시에 '장미여관'인가 하는 사람들의 '야 봉숙아 꿀발랐으났드나, 나도 함 먹어보자' 이런 얄궂은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그 '봉숙이' 이름이 코믹해서 봉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 것이다.  봉숙이도 몇해를 뒷 숲에서 살다가 피터와 비숫한 시기에 사라졌다.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고, 차례차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짝퉁이: 짝퉁이는 2014년 겨울에 나타난 것으로 기억한다.  왜 짝퉁이냐하면, 북미의 흔한 회색고양이 (회색 줄무늬 고양이)인 '어미고양이'와 너무나 흡사하게 생겨서 처음에는 구별을 잘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얼굴을 익히고 어미고양이와 구별할수 있게 되었을때 그녀의 이름을 '짝퉁이'라고 짓게 되었다. 어미고양이의 짝퉁이라는 뜻이니, 당사자는 억울할수도 있겠다.  본디 짝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지금 생각하니 미안해진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12.29 00:30

버지니아 집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점검한 사항은, 집 뒤 덤불에 사는 고양이들 점호였다. 마침 햇볕 따사한 겨울 날씨. 고양이들이 덤불에 쌓인 낙옆 침대에 몸을 누이고 해바라기를 하며 쉬고 있었다. 


눈처럼 흰 고양이 한마리.  러시아 고양이 푸틴녀석의 새끼일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십대의 아직 덜 여문 자태. 다리를 살짝 저는 검정 흰색 알록이 고양이 한마리. 역시 늦은 봄에 태어난 녀석일 것이다.  나의 눈먼 고양이 사도 바울님은 어딨는가?  덤불 근처에서 '사도 바울! 사도 바울!' 부르며 고양이들에게 다가가니, 푸틴의 새끼와 알록이는 낯선이를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쪽으로 가면서 연신 나를 주시하는데; 덤불에서 털이 긴 꽤 비싼 고양이로 보이는 (고귀한 귀족 고양이) 어느 고양이와 서로 몸을 포개고 있던 나의 사도바울이 감은 눈 너머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다른 고양이들은 저만치 가는데, 나의 사도바울은 그자리에 가만히 누운채 머리만 갸웃갸웃한다. 네가 내 목소리를 알아 보는구나. 네가 내 발자욱 소리를 기억하고, 너를 부르는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그래서 경계를 풀고 누운채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구나. 네가 나 없는 동안 친구들을 사귀고 잘 지내고 있었구나. 


나의 눈 먼 고양이 사도바울에게는 도무지 길고양이로 보이지 않는 고귀한 혈통의 친구들이 새로 생겼고, 서로에게 기댄체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씨가 상냥하여, 어미가 새로 새끼를 낳으면 동생들을 제 새끼처럼 돌보며 데리고 다니곤 했는데 (눈먼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들을 이끌고 내 집 뒷마당으로 나타나곤 했지... 먹이 먹는 장소 교육), 어미가 더이상 새끼를 낳지 못하게 된 이후로 (길고양이 중성화작전), 자신도 새끼를 낳을수 없는 처지가 되었어도, 여전히 어디선가에서 중성화 되지 않은 암컷들이 새끼를 낳았고, 사도바울은 기꺼이 새 생명들의 언니, 보모가 되어 줬으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얼마나 신비로우신가.  나의 눈먼 고양이는 이 마을에서 5년째, 다치지 않고, 사람에게 괄시당하지 않으며, 선량한 이웃 사람들의 무언의 보호 속에서 다른 고양이들과 어울려서 잘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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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12.07 13:30




건강검진을 하니 혈압을 슬슬 조심해야 할 나이라고 한다. 평소보다 조금 높을 뿐인데 혈압을 조심하라니.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보다. 골치가 아픈 일이 많으니까, 혈압이 상승하는거 아닐까?

어제는 학생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한다고 해서, 캠퍼스 강당에서 하는 것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 연주를 보러/들으러 갔다. 


소품 몇가지를 대학생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했는데,  마스카니의 까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제목을 알건 모르건 대체로 다들 들어보고 좋아하는 이 곡이 흘러나왔다.  막내 아들의 학예발표회에 간 엄마의 심정으로 학생이 연주하는 것을 들여다보다가, 사람을 잊고 음악에 잠시 스며들어갔다.  


천연 환각제같은 음악에 잠시 취해 있다가 다시 나와서, 무대를 바라보며, 은은한 무대 조명 아래에서 몰입하여 연주하는 그 막내둥이 학생을 보면서 문득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보았거나, 깨달았으리라. 


나는 그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저 학생의 엄마나 아빠가 와서 이 광경을 봤다면 참 흐뭇했겠다. 그들이 잘 보살펴서 키워낸 아들이 무대위에서 광채에 휩싸여 첼로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면 참 좋았겠다.  내가 그 빛을 대신 보는구나. 



오케스트라 연주나 혹은 청중을 몰입하게 하는 연주장에서, 가끔 '내가 없어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지휘자 주변의 빛 속에 휩싸여 있거나, 단원들의 악기들이 움직이는 공기속에 떠도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음악소리가 되어 공기중에 떠도는 느낌.  깨어나면 여전히 무거운 육신을 가진 존재로 돌아오지만.  그런 찰나의 환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주회장에 가는 것이 아닐까?



이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때마다, 나는 무대위에서 신중한 표정으로 연주를 하다가 음이탈을 했는지 어색하게 생긋 웃고마는 아름다운 한 소년-청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가 광채에 휩싸여 무대에 있던 것을 나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의 일상은 지리하거나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아닐것이나, 그는 살면서 가끔 가끔 그렇게 반짝하고 빛날 것이다.  아마 나도 반짝일때가 있겠지. 누군가의 시선에 그 반짝임이 잡힐때도 있겠지. 아마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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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12.04 12:03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 나온 한 장면이 나를 아주 잠깐 '혼란'에 빠뜨렸다.  


하바리 출신의 재벌 막내 아들을 정부 요직에 있는 하바리 출신의 인사들이 초청해 놓고 새파랗게 젊은 재벌 막내가 나타나자 한참 나이 많은 '선배님'들이 일제히 기역자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한다. "더 숙여 임마!" 이런 대사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재벌'이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이고 정부 관리들은 그의 하수인처럼 보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리둥절, 처연했다. 



저...저...게 이 세상의 진짜 모습인걸까?



물론 허구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저게 진짜 모습인걸까?' 할 필요는 없다. 허구니까.  하지만 그게 정말 허구인가? 재벌과 밝게 미소짓던 여자 대통령, 그 여자 대통령을 탄핵하고 그자리에 오른 남자 대통령 역시 그 재벌과 밝게 미소짓지 않던가. 그것은 현실이지. 그 재벌은 무슨 짓을 해도 '솜방망이' 처벌을 이겨내고 늘 빙긋 웃는다.  내가 본 현실과 영화속의 장면이 왜 그렇게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가?



그...그..그러니까...내가 여태 그걸 몰랐을 뿐, 세상은 저런것이었나보다.



내가 내 오십여 인생을 돌아보니, 극단적으로 가난하지도 않았고, 떵떵거리는 부자인적도 없고, 성실하게 평생 월급쟁이로 남들만큼 노력하고, 남들만큼 고민하면서 굶어죽지 않고, 도태되지 않고 도란도란 살면서,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재벌 따위 남의 일이니 신경 안써도 되었고, 재벌이 크게 부럽지도 않았고 (어차피 부러워한다고 될일도 아니니 마음 접었고), 내 인생 재벌과 상관없이 충분히 잘 살아내고 있다는 상상 속에서 살아온 것 으로 보인다. 재벌이 내 앞에 있어도 내가 고개 숙이고 허리 숙이고 인사 해야 할 이유도 없고, 너는 너 나는 나 상관없는 존재였을 뿐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삶 역시 저들의 '마수' 안에서 요리되고 기획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태 멍청하게 살아온게 아닌가 슬슬 회의가 든다. 



좋아. 니네들은 너희들의 게임의 규칙에 충실하게 살아라. 나는 다행히 큰 화를 당하지 않고 눈치껏 소시민으로, 방관자로, 치사하게, 비굴하게, 양심껏, 적당히 회유되고, 적당히 굴복하면서 연명해왔다. 



그런데 말야.  이제 내가 오십이 넘었거든.  별로 가진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을것으로 보이지도 않아요. 지금 가진것만으로도 그냥 대충 먹고 살면 근근히 남한테 손 안벌리고 살다 죽을수 있을것도 같거든.  정 안되면 바닷가에 가서 조개 줍고 굴 따고, 미역 따서 쌀밥에 국 끓여 먹다 죽어도 우짜든동 살아 낼 수 있을것 같거든.  그런 계산이 서자, 평생 비굴하고 소심하게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하면서 사회 정의보다는 방관자로 돈 한푼이라도 알뜰하게 절약하고 챙기면서 살아온 내 앞에 다른 계산이 서기 시작한다.



내가 여태, 이 세상에서, 크게 손해보지 않고, 연탄가스에 크게 시달리지도 않고, 고시원 생활도 한번 해 본적 없이 떵떵거리고 잘 살아왔는데, 그것은 내 덕분이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아서, 내가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산 결과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나도 '사람'처럼 살고 싶어진단 말이지.  사람처럼 살고 싶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한번쯤은 나도 모든 것 내려놓고 '사람'으로 살다가 가야 하는거쟎아. 딱 한번 만이라도 '사람'의 행동을 하고 싶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많이 살았어. 편히 잘 살았어. 남들이 고통을 겪을 때 내 잇속만 챙기며 잘 살아냈어.  그러니 이제 한번쯤은, 딱 한번만이라도 '사람'의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이제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  오늘 살다 내일 죽어도 '사람'으로 죽겠어. 



나이 먹은 아줌마는 무서운게 없어지면서, 슬슬, 탈바꿈을 하고 싶어진다. 먹을 만큼 먹었고, 살만큼 살았어. 나는 평생 충분히 비굴했고 충분히 비정했으며 충분히 무책임했고 충분이 제 밥벌이에 급급했어. 마이 무따. 고마하자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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