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1. 6. 17. 14:19

 

내가 여름을 보내는 버지니아 시골 마을. 주변이 목장 지대로 둘러싸여 있어 집앞에 실개천이 흐르는데 나는 이 개울가를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한다. 

 

요즘 개울가를 뒤덮고 피어있는 아주 자그마한 파란 꽃들.  꽃들을 들여다보며 '이것이 혹시 물망초 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웹검색을 하여 대조해보니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 '물망초'이다.  기쁘다. '날잊지 말아요, 내 맘에 맺힌 그대여' 노래속의 그 물망초가 이것이었구나!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되어 이제야 '물망초' 꽃을 시냇가에서 발견하다. 

 

 

 

 

 

사람에게는 '암묵적 (implicit)' 지식 혹은 기억이란 것이 있다. 모르지만 아는것.  그것이 암묵적 기억이다.  

 

가령 이 물망초꽃처럼 - 나는 평생 '이것이 물망초다'라고 내 눈으로 알고 본 적이 없다. 그저 노래로 듣고, 시냇가에 피는 꽃이라는 정도의 정보만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무엇이 물망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이 자잔한 파란 꽃이 무리지어 피어난 것을 보고 '저것이 물망초가 아닐까' 추측을 한 배경에는 나도 설명하기 어려운 '기억장치'들이 있는 것이다. (전에 책이나 혹은 티브이나 인터넷에서 이 물망초를 봤을 것이다.)

 

20여년전에 내가 플로리다에서 생활을 시작했을때, 어느날 산책길에 '로드킬' (road kill) 교통사고로 죽은 동물의 시체를 발견했다. 난생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양서류, 악어같이 생기고, 등이 둥글고, 도마백 같이도 생겼고. 미국 남부에서나 사는 (한국에서는 아예 서식하지 않는) 그 동물의 사체를 들여다보며 나는 문득 종알거렸다 - 이게 '아마딜로'인건가?   나는 내 입으로 '아마딜로'라고 말을 하면서도 도무지 내 입에서 왜 '아마딜로'라는 말이 나온 것인지 알수 없었다. '아마딜로'라는 말 자체도 내 머릿속에 있었던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그런데, 웹검색으로 아마딜로를 찾아보니 정말 그 동물 그림이 나오더라.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컬러학습대백과'나 '동물의 시간' 그런데서 아마도 나는 아마딜로를 여러차례 봤을것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암묵적 기억'이다.

 

역시 20여년 전 플로리다에서 살때의 일이다. 어느날 욕실 캐비닛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쥐 같은것이 내는 소리였다. 캐비닛에 쥐가 있나보다. 그런데 어딘가 함정에 빠진 쥐가 발버둥치는 것 같은 그런 소리이다.  캐비닛 문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괴상한 외계 생명체'가 들어있었는데 날개짓을 하는것도 같고, 내 평생 한번도 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외계생명체'였다.  내 등뒤에 숨어서 관찰하던 당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내 아들들도 아무런 생각이 안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기괴한 장면의 중심에 선채로 (내가 아이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자리에서 도망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였기 때문에 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박쥐 인가봐...."

내가 평생에 박쥐를 본적이 있었는가? 물론 없었다.  그리고 박쥐라면 암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혹은 밤하늘을 갈짓자로 날아다니는 것이여야 한다. 그런데 박쥐가 왜 내 욕실 캐비닛에 들어 있겠는가?   말도 안된다....하지만...그래도 이것은 혹시 박쥐가 아닐까?

 

일단 '박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웹을 뒤져 박쥐를 찾아냈고 - 바로 그 괴생명체가 '박쥐'임이 밝혀졌다.  그날, 그리고 그 며칠 후, 우리는 여러마리의 박쥐들을 생포하여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박쥐가 화장실의 환기구를 타고 실내로 들어와 캐비닛 안에 들어온 후에 퇴로를 찾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었다.  아, 밖으로 박쥐를 살려서 내보냈는데도 그 중에 몇놈은 고집스럽게 우리집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집으로의 침투를 시도했는데 참 괴이한 일이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 한국에서는 박쥐가 '복'을 가져오는 길한 짐승이라는 것이고 - 그래서 그 괴이쩍은 상항에 대하여 '우리집에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려나봐'하고 아이들을 달랬다.  (영 기분이 나빴으니까.)  그렇게 기괴한 박쥐와의 조우 이후로 나는 박쥐를 잘 식별한다. 플로디아에서 버지니아로 이주한 후에도 저녁 산책길에 술취한듯 갈짓자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발견하면 그것이 '새'가 아니라 '박쥐'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까 생전 본적도 없고, 절대 그 자리에서 발견할거라고 예상할수 없는 - 전혀 연결이 안되는 생명체를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내게 '박쥐'라는 답을 준 것은 바로 그 '암묵적' 기억이다. 

 

나는 우리아들에겐 걸어다니는 '클래식 음악 사전'이다.  아들이 뭔가 흥얼거리며 "엄마 이 곡이 뭐죠?"하고 물으면 나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내 입에서 나오는 내 말소리를 듣는다.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정답일 때가 많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종알거린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런 기억력이 그다지 신통하지 않지만.)

 

이름모르는 꽃을 발견하고 '이것이 물망초인가봐' 추측한 내가 신통해서 '암묵적 기억'에 대해서 헛소리를 해 봤다.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