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etch2020. 11. 20. 09:45

조태수 선생의 서예 작품을 웹에서 빌려옴. 

 

이따금 졸업생들이나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대학원 진학 지도를 해 줄 때가 있다.  모 교수가 학생을 한 명 부탁한다고 보냈다.  대학원 진학 지도를 할 때는 일단 본인이 희망하는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학업계획서 (Statement of Purpose)' 를 써 와야 나를 만날 수 있다.  본인이 모두 다 알아서 한 후에 내 도움을 받으라는 취지이다.  하룻강아지-애도 아니고 내가 제 에미 애비도 아닌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서 밥상 차려주면 그 자식은 대학공부 뭣하러 했는가.  본인이 다 알아서 하고 주위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 

 

한 학생이 학업계획서를 작성하고 나를 만나기를 청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 짐작은 했지만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공부하는 과목중에 대학원 진학준비 과목은 없었으니까 서툰것은 당연하다.  나는 세상사람들이 모두 선호한다는 미국의 모 대학 박사과정 진학을 위해 누군가 쓴 박사학위 과정 SOP 샘플과 그 학생이 쓴 샘플을 나란히 놓고 첫 문장만 비교를 해 보라고 했다. 

 

최고대학의 박사과정을 신청한 사람의 첫 문장에는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에 지원하며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가 짧고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우리 학생의 첫문장은 -- 말하자면 (그냥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 저는 전남 함안의 중농집안의 둘째 딸/아들로 태어나 모 대학을 마치는 동안 자상하신 부모님의 보살핌과 교수님들 품에서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던중 어느날 홀연히 공부를 조금 더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비교를 시킨후 학생에게 물었다. 

 

"너, 내가 너와 대화를 하는데 두가지 방법이 있어.  첫번째 방법은 - 나는 영어로 너와 대화를 하면서 미국인들이 피드백 주듯이 너에게 피드백을 줄거야. 두번째 방법은 - 나와 한국어로 대화를 하면서 한국인들이 피드백 주듯이 할거야. 너는 둘중에 무엇을 원하니?"

 

학생: "....모르겠는데요....그게 어떻게 다른데요?" (어리둥절)

 

네가 미국식을 선택하면 - 나는 굉장히 부드럽고 친절한 표현을 쓸 것이고, 너는 아주 편안할거야. 위로와 용기를 받겠지. 그리고 너는 확신에 찰거야. 나와의 시간이 행복할거야. 너는 나를 좋아하게 되겠지.  그리고 너의 지원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하기가 어렵겠지. 

 

네가 한국식을 선택하면 - 너는 갑자기 가슴에 막 화살이 날아와서 팍팍 박히는 듯한 고통을 느낄거야. 급작스러운 우울 모우드에 들어가거나 다시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 질지도 모르지. 너는 아마 두번다시 나를 보고 싶지 않아질거야.  그래도 너는 뭔가 손에 쥐는것이 있게 될거야.  지원 결과에 대해서 너 스스로 예측이 가능해 질거야.

 

학생: "...한국식으로 살-살- 해주시면 안될까요? (빙긋)"

 

"글쎄...한국식으로 달콤하게 너를 기쁘게 해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단다.  영어식으로 할때는 나는 미국인의 탈을 쓰고 달달한 사람이 되어 네가 물에 떠내려가거나 말거나 너를 위해 박수쳐주고 응원해주고 하겠지. 너는 내가 뭐라고 말한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거고, 나는 알바 아니라고 모든것을 하늘에 맡기고 말겠지.  나이쓰하고 쿨하게 말이다.  한국식으로 하면 바로 칼을 들고 환부를 쿡쿡 찔러서 잘나내고 썰어내고, 파내고, 아주 난장판이 될거야.  무척 아프지.  한국식으로 살-살-은 없어. 나하고는 그게 안돼. 왜냐하면 나는 살-살 하는 재주가 없거든."

 

 

 

그래서 결국 그와 나는 한국식으로 막 '칼바람'이 부는 피드백 시간을 가졌다. 한 40분쯤 면담을 마치고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떠났다.  나는 바쁘니까 그 일을 새카맣게 잊고 있었는데 한달여 만에 그에게서 다시 면담 요청이 왔다. 

 

SOP를 다 뜯어고쳐서 다시 쓰고 영어과 최고참 교수 (미국인)에게 부탁하여 그의 리뷰도 한번 거쳤다고 이실직고 했다. 마침 나와도 잘 통하는 교수라서 "오! 그 교수가 한번 리뷰한 글이라면 - 내 수고가 덜어지겠구나! 땡큐!" 외쳤다.  이제 나를 만날 준비가 된것 같아 면담을 신청한다는거다. 

 

줌으로 만났는데, 그의 일성은 이러했다:

 

"아이고, 지난번에 하도 두둘겨 맞아서 제가 많은 반성을 하고요, 다 뜯어 고쳤고요. 그리고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대로 요즘 컴퓨터 프로그래밍 자격증 공부하러 다니고 있어요. 필기시험은 통과했고요... 그런데 교수님 한국에서 받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자격증이 미국에서도 통할까요?"

 

야, 야, 이눔아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만국 공용어일진대 (내가 프로그래밍을 안배웠어도 그정도는 안다), 네가 그걸 다룰수 있기만 하면 되는거지 자격증이 한국산인지 미국산인지가 뭐가 중요해!!! 너는 배운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미국인 고참 교수가 리뷰해주면 SOP가 완벽할줄 알았겠지? 천만에 말씀이다. 미국인 교수들은 그냥 쓰르륵 읽어보고 문맥이 이상한것만 슬쩍 코멘트를 할 뿐 거의 손을 대지 않는 편이다. 말이 되건 안되건 저자의 고유성을 최대한 지켜주려한다.  한국인 (나의) 스타일은 - 문제점들을 샅샅이 지적하여 학생이 말끔한 한채의 집을 짓도록 만들어낸다. 

 

내가 지금 어느 졸업을 앞둔 학생의 이야기를 늘어놓는/기록에 남기는 이유는 녀석이 나를 흐뭇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따끔한 지적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 정말로 내가 지적질을 한대로 처음부터 다시 '집을 지었다.'  게다가 기왕에 대학원 준비에 잔소리를 하는김에 "다가오는 시대는, 아니 이미 다가온 시대는 빅데이터의 시대이고 알로리듬의 시대라서 네가 어떤 전공을 하건간에 기본적인 컴퓨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코딩도 좀 배우고 너 스스로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능력이 되면 대학원에서 너는 프로그램 전체를 회를 쳐서 날름날름 먹을수도 있게 되는거다.  입학허가가 문제가 아니라 너를 모셔가러 들거다"  뭐 이런 노랫가락을 읊었는데 이 친구가 그 문제를 심각하게 듣고 - 행동으로 옮기고 새로운 도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참, 이렇게 내 말을 곧이 곧대로 알아듣고/믿고 실천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내 자식도 내 말을 안듣는 이 판국에.)

 

그 친구는 몇달 후에 입학신청서를 제출하기 직전에 다시한번 나의 리뷰를 받기로 하고, 그 사이에 몇가지 자격증을 지원서에 추가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줌에서 떠났다.  미리미리 알아서 준비를 하고,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여 리뷰를 받고, 장차 도움이 될 기술을 미리 익혀놓는 성미이니 그 학생은 전투적으로 자기 삶을 잘 개척해 나갈 것이다.  흐뭇하다. 

 

추신: 그런데, 사실 막 칼춤을 추는 나도, 남의 비평이 무섭다. 나도 아주 나약하고 겁많고 소심한 사람이라 남의 평가를 회피한다. 그러니 나의 무지막지한 평가를 소나기 맞듯 다 맞아내는 그 선수가 대단한 선수이긴 하다. 대단한 젊은이이다. 

 

 

 

'Sket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료 독감백신 접종 (Free Flu Shot)이라니...  (0) 2020.12.27
구세군 자선냄비: 두명의 일꾼  (0) 2020.12.22
창문을 달았습니다  (0) 2020.11.12
희망  (0) 2020.11.10
Power of Kakao Talk Class Channel: Real Time Collaboration  (0) 2020.03.13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