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18. 10. 5. 11:42


영화, 라디오스타 마지막 장면



아주 짧은 거리이지만, 비 오는 아침 노란 우산을 펼쳐들고 일부러 먼길로 돌아서 빗물을 자박자박 밟으며 출근하는 길은 즐겁다.  조금 멀어도 좋으리라 비가 오는 날엔.


휴대전화를 '이메일 확인'용으로 주로 사용하는 나는 '전화 씹는X'으로 이미 찍혀 있다. 내 휴대전화는 항상 '무음' 처리 되어 있어 절대 벨소리가 나지 않는다. 나는 극장에 가도 공연장에 가도 교회에 가도 '교양인' 행세를 할 수 있다. 내 전화기는 절대 소리를 내지 않으니까.  이것은 어떤 면에서 '전화기' 용도만 제외하면 제법 활발하게 사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냥 '스마트 통신기'정도로 불리워야 하는건지도.


그래도, 이것이 전화기인 이유는 -- 내가 절대, 절대 씹지 않고 24시간 아무때나 벨이 울림과 동시에 전화를 받는 존재가 이 세상에 딱 한명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을지라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나는 그의 전화라면 곧바로 받는다. 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가 전화기와 연동되어 있어서 전화기 소리가 나지 않아도 손목에 진동이 오고 있으므로 꽤 효과적이다. 


일단 녀석의 전화라는 것이 확인이 됨과 동시에 내 심장 박동이 갑자기 커지고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아드레날린 그것의 수치가 휙 올라가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목소리만은 '강같은 평화'를 가장하여 '그레고리안 챈트'를 읊조리는 수사들같이 고요하게 전화를 받는다. "잘 지냈니?"


그의 전화는 대체로 Emergency Call 이라고 할만하다.  나는 그의 인생의 911.  그는 숨이 막혀 죽기 직전이라는 태도로 내게 급박한 사정을 풀어 놓는다. 숨 넘어가게 생긴 그의 사연을,  꽁치를 굽듯 여기저기 꾹꾹 눌러주고, 꼬리쪽을 슬쩍 들춰보고, 뒤집어보고, 살이 익었나 찔러보기도 하고, 일부를 젓가락 끝으로 잘라내어 간은 잘 뱄는지 맛을 보기도 하고 그렇게 입체적으로 들어주고 피드백을 해준다. 


대체로 꽁치를 굽듯 그와 전화상담을 해주는 나의 행로는

    1. 그으래? 어쩌다가?
    2. 너 힘들겠구나...
    3. 아, 저쪽도 그것때문에 화가 날만하구나.
    4. 그래도 네가 되게 신경질 나겠다.
    5. 그런데, 아무래도 너도 실수를 했으니 일단 사과는 해야 하는게 아닐까?
    6. 벌써 사과 했다고? 그런데도 지랄이라구? 저런 저런. 왜 지랄일까?
    7. 아 그에게도 그런 사정이 있다구?  그래도 그놈 미친 놈아닐까?
    8. 네가 너무 딱하다.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걸까?
    9. 나쁜새끼는 아니라구? 내가 보기엔 그 인간이 미친놈에 나쁜새끼 같구나
    10. 절대 아니라구?
    11. 아 흥분하지 말라구? 내가 흥분하지 않게 생겼니? 내가 그냥 당장 달려가서 아주 박살을 내버려야겠다. 
    12. 뭐? 네가 어떻게 잘 해보겠다구?  잘 해볼것 없다. 당장 끝장을 내자!!!!!!! 너도 다 때려쳐!!!!!
    13. 뭐? 진정하라구?  알았어. 이번엔 그냥 내가 참고 넘어가지.
    14. 그래 사실 그 사람도 지금쯤 되게 챙피하고 미안해서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하고 있을지도 몰라.
    15. 그래, 그 사람이 본래 좋은 사람이야. 아마 무슨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가보지. 그건 그 사람의 문제야. 너는 크게 신경쓸것 없어. 
    16. 그렇지. 너도 그런 작은 일에 구애받지 말고, 체육관에 가서 수영이라도 좀 해보지 그래. 그러면 좋은 생각이 날거야. 틀림없어. 이럴땐 물에 첨벙 들어가서 노는게 좋아. 기분이 좋아질거야. 
    17. 너를 위해서 내가 매일 기도하고 있어. 너는 하느님의 자식이란다. 그걸 잊지마.

이런식의 대화가 어쩌다 한번일수도 있고, 하루걸러 한차례 일수도 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음의 평화를 얻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에너지가 빠져나가서 맥이 빠진다.  물론 그도, '내가 당장 달려가서 박살을 내버리겠다고'말할때, 그렇다고해서 당장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 건너로 내가 쳐들어갈수 있는 입장이 아니란 것을 잘 알것이다.  하지만 그는 늘 이런 나의 '분기탱천'의 대사에서 위안을 받는듯한 분위기이다.  내가 슈퍼맨이라도 된다면 가능할 일이다. 


나는 가끔 이 녀석 때문에 '상담심리학' 공부라도 해야 하나 골똘히 고민을 하기도 한다.  나를 '상담가'로 써먹고 있으니 내가 프로페셔널이 되어줘야 하는게 아닐까?  선무당이 사람 잡을수 있으니까 말이지.  내가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내게  무슨 (별것도 아닌것이 자명한, 결국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 것인데) 문제가 생겼을때 나는 달려가서 하소연 할 존재가 없었다. 나는 그냥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제들을 직면하고 해결하고 살아왔다.  지금은 하느님이 계시니까 걱정이 없는데, 그 전에는 모든 문제를 나혼자 직면하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그는 나라는 '조커' 혹은 '찬스'를 아주 유효적절하게 사용해먹고 있는듯 하다.  녀석에게 나는 위 사진 속의 영원한 안성기다. 나에게도 안성기가 필요하지만 없으면 할 수 없는거지.  누군가의 안성기라도 되어주면 그만이지. 나에게도 안성기가 필요하다구!!!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는 꾸준히 나라는 '챤스패' 혹은 '조커'를 잘 써먹을것이다.  내가 죽고나면 그는 어떤 패를 쓰게 될까?  하느님을 찾아보지 그러셔?


앗! 이것은 2008년 8월 29일 워싱턴디씨 Freer Gallery에 안성기오빠가 오셔가지구!

성기오빠도 이제는 많이 늙으셨겠지. 나도 그만큼 늙었으니 쌤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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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