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Column2012. 1. 2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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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는 음력 설날이었다. 아직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은 아들놈을 데리고 장을 봐다가 올해도 가볍게 설 상을 차리고 차례를 지냈다. 본디 ‘설날’의 의미는 ‘조심하는 날’이라고 한다. 밤 껍질을 벗기고 예쁜 각이 지게 쳐내다가 손을 베었지만, 반창고를 감고 마저 하던 일을 하고, 두부를 부치고, 고기적을 굽고, 조촐하게나마 떡국을 끓여 차례상을 차렸다.

 
옛날에 내가 새색시이던 시절, 설 차례를 지내러 시댁에 가니 시어르신들이 “이 집 큰며느리가 왼손잡이”라고 수군거리시는데, 시아버지께서 “우리 새아기도 나를 닮아서 외손잡이네”하며 웃으셨다. 선머슴처럼 사느라 변변한 음식도 만들 줄 모르던 며느리를 들여다보며 “우리 새아기는 밤을 참 곱게도 치네!”하고 칭찬도 해주셨다. 부엌일하기 싫어 밖으로만 돌던 나는 유일하게 젯상의 밤 치는 일을 곧잘 했는데, 친정에서 할아버지께서 밤 치실 때 곁에서 밤 조각 얻어먹으며 눈 동냥으로 배운 실력이었다.

 
시어머니도 안 계신 시집에서, 제사 때가 되면 시아버지는 큰며느리인 나를 데리고 앉아, 홍동백서, 어동육서, 두동미서 등 제사상의 기본 틀을 설명해주셨고 나는 제사 많던 친정에서 구경한 깜냥으로 이런 것들을 금세 배워나갔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제삿날이나 제사 상 차리는 일을 잘 아는 사람은 우리 시아버지 다음으로 나이다. 남편과 그 형제들은 세세한 규범들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는 달력을 보지 않아도 제삿날이 다가오면 정확히 그 음력 날을 맞추곤 한다. 창밖에 개나리가 필 때, 유월 앵두가 열릴 때 이런 식으로 계절 따라 돌아오던 제삿날들이 창 밖 풍경이 바뀌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몇 해전 설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큰 아이가 대학입학 문제로 방황을 하여 집안 분위기가 어둡고, 모두 기운이 없을 때였다. 나는 속이 상해서 설을 지낼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새벽에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남편이 혼자서 서툴게 음식 장만을 하고 있었다. 혼자 음식을 준비하던 남편의 뒷모습이 어찌나 딱해 보였던지! 하는 수 없이 나도 아이들을 깨워서 온 가족이 부랴부랴 차례상을 차리고 다 함께 떡국을 먹었다. 대충 차린 엉성한 차례상이었지만 그날 모처럼 온 가족이 뜨거운 떡국을 먹으며 기운을 차리고 웃을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차례상을 차리는 것이 번거로워도 이를 통해 정작 우리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게 되지 않았는가? 그 후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추석 차례나 설 차례를 챙기게 되었다. 차례를 지내는 것이 의무도 아니고, 그저 즐겁고 고마운 가족만의 대동단결의 자리인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해마다 민속 명절인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차례상’ 차리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다. 차례상 폐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제사나 차례 지내는 것이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도 아니고 수 천 년간 이어진 미풍양속도 아님을 강조하고, 반대편에서는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전통의 아름다움을 주장한다. 나의 입장은 분명하다. “만약에 차례상이 그토록 의미 있고 중요하면, 남이 차려다 바치는 것 받아 먹지만 말고 직접 차려보고 말을 하라.” 자기 자신은 차례상 차리는 것을 주도하거나 거들기는 싫으면서 전통의 아름다움을 역설하는 것은 참 무책임한 태도이다.

 
반대로 여태까지 우리가 간직했던 전통을 무조건 폐기처분 하는 것에도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전통의 틀을 유지하되, 힘들지 않게, 기쁘게, 간단히, 모두 즐겁게 그런 자리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올해도 나는 아무도 봐 줄리 없는 차례상을 차리고 한국의 가족들과 통화를 하며 설날 아침을 보냈다. 세상이 좋아져서 화상통화도 가능한 시대라 태평양의 이쪽저쪽에서 설날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을 직접 볼 수도 있어서 그나마 위로가 된다. 어느 집 맏며느리로 몸은 비록 태평양 건너에 있지만, 그래도 그 집 차례는 내가 지내 준다는 자부심 역시 내가 이역에서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올해도 설 차례를 지냈다. 올해도 한국의 시아버지께 세배도 못 드리고 설날이 지나갔다.


2012,1,25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