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Column2011. 11. 23. 20:52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04740

내가 태어나 성장한 용인의 고향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일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 마을 사람들은 저녁이면 남포나 호롱에 불을 밝혔고, 불을 때서 밥을 짓고, 쇠죽을 끓이며 살았다. 이곳이 집성촌이었으므로, 마을 사람 대개가 일가붙이였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내게 ‘시누님, 우리 아기씨’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우리 바로 윗집에는 우리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이 마을에 시집와서 평생 자매처럼 지낸 할머니가 살았다. ‘응굴’에서 시집와서 ‘응굴댁’인 그 할머니는 어쩌다 댁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날이면, 새벽이거나 저녁이거나, ‘언제나’ 미역국 한 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우리 집 안채로 달려와서 할머니를 찾았다. “정렬이 할무니, 오늘 우리 막내 생일이라 고기 좀 넣고 미역국을 끓였어유. 이것 맛이나 보시라고.” 할머니가 어느 날 그 미역국의 사연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해, 만삭으로 돌아다니던 응굴댁이 며칠 보이지 않아 올라가 들여다보니, 며칠 굶은 산모는 혼자 애를 낳아 제 손으로 탯줄을 끊어 애를 안고 누워있는데, 먹을 것이 없어 다 죽어가는 얼굴이라. 내가 얼른 미역 한 꼬리를 갖다가 국을 끓이고, 쌀을 퍼다 쌀밥을 지어 뜨거운 국물에 먹이니 산모가 그제서야 살아나더라. 그 후로는 저이가 수 십 년을 미역국만 끓이면 이렇게 한 그릇 떠갖고 내려온다.” 지금은 내 할머니도, 응굴댁 할머니도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두 분은 천국에서도 서로 오가며 미역국을 나누실 것이다.

 1984년 겨울, 휴가를 나온 박 상병은 이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충치로 고생이었지만, 변변한 치과 치료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부대에서도 고통을 호소하면 진통제나 처방해 주는 정도였다. 너무나 괴로웠던 박상병은, 집 근처, 어느 치과에 들어섰다. 그는 무작정 충치 치료를 부탁하며, 자신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설명했다.

휴가 며칠간 그는 치과에 드나들며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충치 치료를 받았다. 휴가가 끝나갈 무렵 서둘러 치료를 마친 치과의사가 박상병에게 말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게. 내게 치료비 갚을 생각은 하지 말고, 나중에 어려운 사람 보이거든 도와주게.” 지금은 중년이 된 그 사람은, 가끔 그 치과 의사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진다. 이따금 듣는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도 모두 운다. 박 상병이었던 그 사람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나의 큰 시동생이다.
 
6년 전, 플로리다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개미에게 발가락을 물렸는데, 물린지 30분도 안되어 얼굴과 몸이 붓고, 현기증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갑자기 죽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놀란 나의 아이들이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어느 한국인 아저씨 댁이었다. 아이들은 무작정 그 댁 문을 두드리고 “우리 엄마가 죽어요!” 하고 알렸고, 아이들의 설명을 들은 그는 한달음에 우리 집으로 왔다. 그의 손에 알러지 치료제가 한 뭉치 들려 있었다.

그는 약 한 움큼을 내게 먹이고, 급성 알러지 현상으로 보이니 이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면 계속 약을 먹고, 차도가 보이지 않으면 응급차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개미 독으로 죽은 사람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처치 약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기다려 내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 생명을 살렸고 졸지에 고아가 될뻔한 내 아이들과 가족을 살렸다. 그분은 자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지금 기억할까?

 내일은 ‘땡스기빙 데이 (Thanksgiving Day)’. 우리 주위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 내가 오늘 온전히 살아 있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베풂이 있어 가능한 것이리라.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내가 잊고 지내던 고마우신 분들께, 예쁜 꽃 카드라도 정성껏 만들어 부쳐드리리라 하고 다짐을 해본다.


2011,11,23 (수)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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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응굴댁 할머니와 관련된 에피소드 한가지 추가:

그 응굴댁 할머니는 평생동안 우리집을 자기집처럼 임의롭게 드나드셨는데,  웃기는 일이 뭔가하면, 우리집에서 기르는 개들이 응굴댁 할머니만 대문에 들어서면 으르렁대고 짖어댔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사랑채에 있는 바깥대문 앞 나뭇광이 침실이었다. 거기 짚을 쌓아주면 포근한 짚에서 지낼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놈들이 대문 앞을 지키고 살면서 응굴댁 할머니만 나타나면 사납게 으르렁댔다.  그러면 응굴댁 할머니는 개의 목줄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개를 피해서 지나곤 했다.

우리집 개들은 대대로, 서울 식구가 어쩌다가 나타나도 좋아서 퍽펄 뛰곤 했다.  그러니까 일년에 서너차례 내가 나타나도 나를 보면 좋아서 이리뛰고 저리 뛰면서 나를 핥고 난리를 떨었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는 일년에 몇차례 나타났다 사라지는 '손님'이고, 응굴댁 할머니는 늘 그곳을 드다느는 식구같은 존재이건만.  개는 '내식구'와 '남의식구'를 정확히 구별해서 행동했다.

우리집 개들은 어떻게 그렇게 어쩌다 한번 오는 식구들을 알아서 반기고, 아웃사촌들을 '남'으로 규정을 하게 된 것일까?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