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Column2011. 8. 3. 19:17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236143

“일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 언제였나요?”

 일전에 존경하는 어느 부인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저명한 분의 부인이기도 한 그분은 부군을 내조하며 남들이 누리기 힘든 영예로운 삶의 살아오셨는데, 나의 질문에 아주 소박한 대답을 했다. “학창 시절에, 내 작품이 큰 미술상을 탔는데, 그 때가 내 삶에서 가장 기쁘고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내 생애에서 가장 가슴 뛰던 순간은? 대학시절에 쓴 단편소설로 상을 받았을 때, 그 때 온 세상에서 종소리가 나는 것 같았었다. 그 후에 내가 직업 소설가가 된 것도 아니고, 내가 열망하던 다른 것들을 성취했지만 지금 돌아봐도 그 일은 가슴을 쿵쿵 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나는 똑같은 질문을 나의 독자들께도 던지고 싶다, “일생에서 가슴이 쿵쿵 뛰도록 행복하고 빛나던 순간이 언제였나요?”

 최근에 알렉산드리아의 극장에서 개봉된 한국 영화 ‘써니 (Sunny)’는 이제 중년이 된 사람들에게 우리 일생에서 가슴이 뛰던 한때로 시간여행을 하게 해 준다. 영화 내내 흐르는, 내가 고교생이던 시절 듣던 팝송들, 그리고 과외가 금지된 시절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입시 공부를 하다가 집으로 가던 심야 버스에서 듣던 이종환의 음악 방송.

식구들이 모두 잠이 들어 아무도 대문을 열어주지 않는 날이면 담을 타 넘어가기도 하던 나의 고3 시절. 대학 입시준비한다고 아무도 특별히 신경 써주던 사람도 없던 시절. 뉴스 시작하면 늘 1번으로 출연하던 어떤 사람. 나는 영화 속 소녀들처럼 서클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크게 사고를 치지도 못하고, 평범하고 눈에 안 띄는 고교 시절을 보냈지만, 그러나 영화를 보던 내내 영화 속 소녀들과 함께 춤추고, 웃고, 울고 있었다.

 고교 시절,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잘생긴 남자 선생님 한 분을 점 찍어 놓고 허구 헌 날 그 선생님 생각으로 한숨 지으며 3년을 보내고 말았다. 그 때 그 선생님을 짝사랑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고를 치고 다른 일로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웃는다.

 영화 ‘써니’는 얼핏, 몇 해전에 흥행했던 ‘말죽거리 잔혹사’의 여학생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죽거리의 소년들이 성룡의 쿵후에 미쳐 있었다면, 비슷한 시대 서울 시내 어디쯤의 교복 자율화 여고생들은 나미의 ‘빙글빙글’과 보니앰의 ‘써니’에 맞춰 춤을 추는 것에 열광했다. 말죽거리의 고교생들이 가출, 자퇴, 퇴학의 과정을 거쳐 검정고시 학원에서 청춘의 한 순간을 보냈듯, 써니의 여고생들도 집단 퇴학을 당하고, 이제 중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타났다. 각자 다른 삶의 풍경으로부터.

 중년에게만 추억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팔순을 내다보는 내 어머니가 손자에게 옛날 얘기를 해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식인 나도 모르던 내 엄마의 이야기. “수원에 있는 양재학원에 다니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계집애가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반대를 하시는 거야. 그래서 집 뒤 울타리에 개구멍을 뚫어놓고, 몰래 그리로 내뺐지.” 공부를 하고 싶어 목이 마르던 엄마는, 처녀시절 아버지 몰래 몇 십 리 길을 걸어 공부를 하러 다니던 이야기를 손자에게 하다가 말고 펑펑 우신다. 나도 모르던 엄마의 역사.

엄마에게 가장 가슴 뛰고 눈부시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나는 엄마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한번도 하지 않았던 걸까?

 아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나는 고백한다. 당신들이 내 삶에 와준 것은 분명 축복이고 기쁜 일이다. 그런데 내게는 분명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기쁜 나만의 역사가 있다. 아마 당신들도 그러하겠지. 그러하길 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나에게는 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영화 ‘써니’. 눈부신 여름 날, 온 가족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소풍을 나가는 것도 유쾌하리라. 써니!

***





알렉산드리아 호프만센터의 에이앰씨 극장은  에스컬레이터가 엄청 높다. 무서워서 다리가 후덜덜.  극장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무섭다.

2011.8.2.수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