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18. 9. 28. 11:42



여름에 장만한 내 맥북을, 한 번 샀으니 향후 5년 이상 사용할 것인데, 그냥 들고 다니다 보니 벌써 미세한 스크래치가 보인다.  전에 사용하던 것은 내가 직접 바느질하여 퀼트 슬리브를 만들어 입혀주고 위해주었는데 (그래서 아직도 멀쩡하다), 이번 것은 벌써 몇달 째 방치. 지금은 바느질 할 여유가 없지. 왜냐하면 왕눈이가 없으니까.   찾고 있던 가죽 슬리브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못샀지. 



며칠전에 내가 찾던 가죽 슬리브가 굉장히 싼 값에 나왔다.  기다리던 때가 왔노라. 조금전에 택배기사님이 전해주고 가셨다. 통가죽이라 생각보다 좀 더 두툼한데 (나는 슬림하면서 튼튼한 가죽을 기대하긴 했지) 그래도 이것을 입혀 주니 이제 안심이 된다. 



사실, 열받는 것을 막기위해 전용 거치대도 주문을 했는데, 아직도 안 오고 있다. 그래서 전용거치대가 올때까지는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책이 나의 맥북 프로 전용 거치대이다.  나는 이 금강경을 하루에 딱 한 챕터씩만 본다. 금강경은 한꺼번에 후루룩 보는 경이 아니라, 하루에 한가지 가르침을 읽고, 사색하고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치대가 올때까지만.  



이 맥북커버는 쓸수록 더욱 맘에 든다. 

http://item.gmarket.co.kr/Item?goodscode=1458663742

탄탄하고 슬림하다. 게다가 맥북을 꺼내서 사용할때는 이것 자체가 '마우스패드'가 되어준다.  이것만 들고 다닐때에도, 가방에 넣어도 탄탄하고 슬림한 느낌이 아주 매력적이다.  가죽슬리브 참 많이 검색했는데, 값이 ㅣ터무니 없이 비싸거나, 디자인이 너저분하다거나.  이것이 내 맘에 드는 이유는 (1) 가죽슬리브로서 가격이 과하지 않고, (2) 디자인이 딱, 정확하게,  내 취향에 일치한다는 것이다.  군더더기 다 빼고 꼭 필요한 기능만.  


참으로 마음에 들어서 미국에 있는 챨리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다 줘야지 생각하고 있다. 미국에서 맥북용 가죽 슬리브 사려면, 여기서 산것보다 비싸지... (그래서 내가 안사고 그냥 갖고 왔는데...)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26. 14:52

눈먼 고양이 폴 : 2015년 4월 사진




내가 '사도 바울(Paul)'이라고 이름 붙이고 '폴'이라고 부르는 눈 먼 고양이.  이 고양이는 어느 가을날 내가 덤불에서 녀석을 발견했을때, 아기 고양이였는데, 눈을 반쯤 감고 앉아 있었는데, 반쯤 뜬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에서 진물과 피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멀쩡하게 태어났는데 뭔가 감염이 되어서 눈을 멀게 된 것 같았다.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야생고양이 가족에게 내가 해 준 것은 그냥 밥을 챙겨 주는 것 뿐이었다.  앞에 눈 감고 있는 고양이가 '폴', 그리고 저만치 뒷모습만 보이는 고양이가 '피터 (베드로)' 말하자면 기독교를 일으킨 양대산맥 '베드로'와 '사도바울' 두 성자를 기념하는 이름들이다. 


이 눈먼 고양이가  저기 보이는 덤불에서 태어나 5년을 살도록, 가끔 다른 거친 고양이의 공격 대상이 되어 고통도 겪지만 '사람들'중 어느 누구하나 이 고양이에게 장난으로라도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버지니아의 내 이웃들을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이웃들중 아무도 아무도 이 고양이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 눈먼 고양이는 사람이 다니는 길을 사람처럼 다니기도 한다.


고양이 피터는 지난해에 어디론가 자신의 영토를 찾아 떠나버렸고, 폴은 아무래도 시각장애가 있다보니 집 근처를 떠나지 않고 여일하게 살고 있다.  폴은 어미고양이가 계절이 바뀔때마다 새끼들을 낳으면, 새로 생긴 '동생들'을 극진히 위했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를 두배 더 낳고 중성화가 되었는데, 어미가 새끼를 낳으면 돌보는 것은 폴이었다.  동생들도 폴을 무척 따랐다. 그리고나서 그들이 성묘가 되면 그들은 폴의 곁을 떠나갔고 폴은 혼자가 되었다. 요즘 폴은 거의 혼자 시간을 보낸다. 가끔 어미고양이와 만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혼자 나타나서 밥을 먹고 혼자 자신의 처소로 간다. 


그런데, 큰애가 폴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준다.


http://americanart.tistory.com/2778  


링크된 페이지에 소개한 '푸틴'녀석 (러시아산 하얗고 체격 큰 고양이), 이 녀석이 말하자면 동네 깡패이고, 우리 폴을 무척 괴롭히는 녀석인데 요즘 폴이 하얀 아기고양이들을 여러마리 이끌고 밥을 먹으러 온다고 한다.  물론 숫놈인데다 중성화된 폴이 새끼를 낳았을리는 없고, 어디선가에서 아기고양이를 발견하고 스스로 이들의 '보모'를 자처한 모양이다.  폴이 마치 어미고양이처럼 새끼고양이들에게 '밥 배급소'인 우리집 뒷마당으로 이끌고 오는 교육을 하고 있고, 새끼 고양이들은 배가 고프면 덤불근처에서 우리집만을 주시하고 있으면서도 좀체로 다가오지 않다가, 어디론가 가서 '폴'언니를 앞장세워가지고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는다고 한다.  (사진에서 수국화분 옆의 투명한 물그릇, 그것이 고양이와 새를 위한 물그릇이다).  아기고양이들이 이 물그릇 근처에 놓여진 먹이를 맛있게 먹고는 '폴'언니 근처에서 놀다가 덤불로 돌아간다고 한다.  어미는 누구인지 모르나 애비 녀석은 필시 그 '푸틴'녀석이라고 큰애가 전한다.


마음씨가 비단결인 우리 사도바울이 요즘 아기들의 보모가 되어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더듬 더듬 기억에 의지하여 우리집에 밥을 먹으러 오는것이 전부인 이 고양이의 가슴에 '사랑'이란 것이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 남의 새끼들을 돌보다니, 생명이란 참 신기하다. 



너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어서 기쁜거겠지? 그 아이들이 다 자라면 너를 떠나거나 혹은 너를 왕따시키며 괴롭힐지라도, 그래도 지금 당장 너는 사랑을 할 수 있어서 지금 기쁜거지?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24. 14:56


I believe I can fly

I believe I can touch the sky

I think about it every night and day (Night and day)

Spread my wings and fly away

I believe I can soar

I see me running through that open door

I believe I can fly

I believe I can fly

I believe I can fly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23. 15:06





사대성인의 가르침은 질문 답변이 중심이었다.

 

보통 인류의 4대 성인(4 great thinkers)을 꼽을때석가모니(기원전 624-544 추정), 공자(기원전 551-479),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 예수(기원전 4년 – 기원후 약 30년 추정)를 꼽는다.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조이며공자(기원전 551-479)는 유교를 낳았고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예수는 기독교의 탄생을 가져왔다

 

이 위대한 분들이 종교나 사상철학의 모태가 된 것 외에도 공통점이 있으니 이들 모두 선생님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인 불경은 부처의 설법을 제자와 후세들이 최선을 다해서 꼼꼼히 감수하여 남긴 기록이다대개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로 시작되는데 제자들이 와서 질문을 한 것에 대하여 석가모니가 논리와 논리를 뛰어 넘는 설법을 한 것을 정리하여 후세에 남긴 것이다문답 형식이었다는 것이다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역시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들과 공자가 주고 받은 문답 (Question and Answer)’이 중심축으로 대개 자왈 (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로 시작된다.



서양철학의 토대가 되는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문답법,’ ‘산파법등이 알려져 있는데 그가 질문을 통하여 한계단 한계단 논리를 구축해 나가는 방법이 서양의 과학적 사고체계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탄생을 불러온 예수 역시 제자들 사이에서 스승으로 통했으며 4복음서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에 기록된 그의 생애를 보면 그 역시 질문과 답변을 통하여 제자들과 세상과 소통을 계속해 나갔다




 

여기서문답법’ 혹은 ‘Socratic question 소크라테스식 질문으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실제 질문 예를 국가론 (The Republic플라톤이 기록함)에서 발췌하여 살펴보자. (국가론 1권 3정의 Justice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쿠스의 대화의 일부를 영문 대화형식으로 일부 편집하였다. 조금 간략한 예를 제시하기 위하여 필자가 일부 생략한 부분도 있다.)

 

아래 발췌부분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무엇이고 정의로운 통치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문답과 예를 통해 이끌어낸다소크라테스의 상대자는 --‘하다가 상대의 논리에 말려들어갔음을 깨닫게 되는데깨달음이 거기서 중단되면 안타까운 일이다.자신의 논리의 오류나 새로운 논점을 발견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계단을 오르듯 한걸음 한걸음, 목표지점을 향하여 가는 소크라테스식 질문법

 

 

SocratesIt will be better that I should ask you a question: Is the physician, taken in that strict sense of which you are speaking, a healer of the sick or a maker of money? 

            Simple question: Is the physician a healer of the sick or a maker of money?

소크라테스: 내가 자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낫겠네. 의사는, 자네가 말하는 식으로 엄정하게 보자면,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사람인가 돈 버는 사람인가?



ThrasymachusA healer of the sick.

트라시마쿠스: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사람이지.


SocratesAnd the pilot, is he a captain of sailors or a mere sailor? 

            Simple question: Is he a captain or sailors or a mere sailor?

소크라테스: 그러면,배의 조종사는 선원들의 대장인가 아니면 그냥 선원인가?


ThrasymachusA captain of sailors. 

트라시마쿠스: 선원들의 대장이지.




SocratesThe circumstance that he sails in the ship is not to be taken into account; neither is he to be called a sailor; the name pilot by which he is distinguished has nothing to do with sailing, but is significant of his skill and of his authority over the sailors. 

배의 조종사가 배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으며 그를 선원이라고 부르지도 않지. ‘조종사라는 특정의 이름은 배에서 일한다는 것보다는 그의 전문적인 기술과 다른 선원들에 대한 통솔권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ThrasymachusVery true.

트라시마쿠스: 당연하지.


SocratesNow,  every art has an interest?

소크라테스: , 모든 기술(art)’은 부합하는 목표가 있지. 


ThrasymachusCertainly. 

트라시마쿠스: 그렇지.



SocratesFor which the art has to consider and provide?

소크라테스: 그 목표에 대하여 그 기술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지?


ThrasymachusYes, that is the aim of art.

트라시마쿠스: 그래,그것이 기술의 목표지. 


SocratesAnd the interest of any art is the perfection of it --this and nothing else?

소크라테스: 그리고 어떤 기술이건 기술은 완성, 다른 무엇이 아닌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ThrasymachusWhat do you mean? 

트라시마쿠스: 무슨 뜻인가?



SocratesThe body may be ill and require to be cured, and has therefore interests to which the art of medicine ministers; and this is the origin and intention of medicine, as you will acknowledge. Am I not right? 

소크라테스: 사람의 몸이 아파서 치료를 받아야 할 수가 있고, 이런 상황이야말로  자네도 알다시피 의료기술의 근본적인 목표가 실현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내 말이 맞나?



ThrasymachusQuite right. 

트라시마쿠스: 물론 그렇지.


SocratesThen medicine does not consider the interest of medicine, but the interest of the body?

소크라테스: 그러면,의술은 의술 자체가 그 목표는 아니고, 인체가 그 목표가 되겠지?

 


ThrasymachusTrue. 

트라시마쿠스: 사실이네.

 


SocratesNor does the art of horsemanship consider the interests of the art of horsemanship, but the interests of the horse; neither do any other arts care for themselves, for they have no needs; they care only for that which is the subject of their art? 

소크라테스: 마찬가지로,승마기술 역시 승마기술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기술도 기술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지. 왜냐하면 기술 그 자체가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는 않으니까. 어떤 기술은 그 기술이 사용되는 대상을 중요시 하는 것이지. 

 

ThrasymachusTrue.

트라시마쿠스: 사실이네.



SocratesBut surely, Thrasymachus, the arts are the superiors and rulers of their own subjects?

소크라테스: 그런데,여보게, 확실히 기술이야말로 그들이 대상으로 하는 것에 대하여 우월자이며 지배자가 아닌가?



Thrasymachus: (To this he assented with a good deal of reluctance.)

트라시마쿠스: (어딘가 내키지 않지만 어정쩡하게 동의함) 


SocratesThen no science or art considers or enjoins the interest of the stronger or superior, but only the interest of the subject and weaker?

소크라테스: 그러면,과학이나 기술은 힘있는 자나 높은 직위에 있는 자의 이익을 고려하거나 요구하기보다는  오직 기술의 혜택을 받는 자나 혹은 약자를 목표 한다는 말인가?



Thrasymachus: (He made an attempt to contest this proposition also, but finally acquiesced.) 

트라시마쿠스: (이런 전제에 반대하려 시도했으나, 결국 수긍한다)



SocratesThen, no physician, in so far as he is a physician, considers his own good in what he prescribes, but the good of his patient; for the true physician is also a ruler having the human body as a subject, and is not a mere money-maker; that has been admitted?

소크라테스: 그렇다면,어떤 의사라도, 그가 의사인 한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가 아니라 환자의 이익을 위해서 처치하는 것이지. 참된 의사는 사람의 몸에 관한 한 그가 지배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는 단순한 돈 버는 사람이 아닌 것이지. 동의하나?



ThrasymachusYes.

트라시마쿠스: 그렇네.



SocratesAnd the pilot likewise, in the strict sense of the term, is a ruler of sailors and not a mere sailor?

소크라테스: 그리고 배의 조종사도 마찬가지로, 그 말을 엄밀하게 적용하면 단순한 선원이 아니라 선원들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지?


Thrasymachus: That has been admitted. 

트라시마쿠스: 동의하네.



SocratesAnd such a pilot and ruler will provide and prescribe for the interest of the sailor who is under him, and not for his own or the ruler's interest?

소크라테스: 그러면 그러한 지도자는 자기 자신이나 지배자의 이익보다는 자신이 통솔하는 선원들의 이익에 맞게 처방해주고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겠지?



Thrasymachus( reluctant ) Yes.

트라시마쿠스: (마지못해)그렇네



SocratesThen there is no one in any rule who, in so far as he is a ruler, considers or enjoins what is for his own interest, but always what is for the interest of his subject or suitable to his art.

소크라테스: 그러면 어떤 경우에도, 그가 지배자라면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며, 늘 그가 가진 기술의 수혜자들,  그가 지배하는 사람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신경 쓰고 명령하겠지.

 


소크라테스의 질문중

 1) 직접질문형 문장은 빨간색으로

 2) 평서문에 의문부호를 달아, 말끝을 올려서 질문형식을 취한 것은 밑줄을 그어 표시하였다. 

 

 





짧고 소박한 구원자 예수의 질문법



예수 역시 제자들과 문답을 통해 천국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의 질문들을 몇가지 추려 보았다그런데사복음서를 통틀어서 예수께서 던졌던 질문중에 가장 강력한 질문은 그가 부활하여 베드로 곁에 나타났을때 던졌던 세번의 질문이었다고 본다예수는 베드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세번 연거푸 물었다.

 

         “Do you love me?”

         “Do you love me?”

         “Do you love me?”

 

질문의 맥락은 이러하다이미 널리 알려진바 대로예수가 체포되기 직전 최후의 만찬에서 앞으로 닥칠 고난에 대하여 예수가 이야기 할 때 그의 수제자인 베드로 (Peter)가 자기는 절대 스승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을 한다그렇지만 예수가 끌려가 고통을 겪는 현장에서 그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정했고예수가 이를 물끄러미 지켜봤다는 설도 있다.예수와 베드로가 그 때 눈이 마주쳤다는 설도 있다어쨌거나그렇게 배신을 했는데 처형당하여 매장까지 마친 스승이 부활하여 돌아오셨다니 베드로는 한편으로는 뛸듯이 기뻤겠지만,한편으로는 너무나 자신이 부끄러워 감히 스승 앞에 머리를 들고 서 있을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상처난 마음을 스승은 달래주고 싶었을 것이다.그리하여 베드로가 스승을 난 모르오난 모르오나는 모르는 사람이오하고 세번 부정했던 것을 씻어주기 위해“Do you love me?” “Do you love me?” “Do you love me?” 묻고 그의 죄를 씻어주고그에게 더 큰 사명을 맡긴 것이다

 

예수의 “Do you love me? (나를 사랑해?)”하는 질문은 자기 중심적인 질문이 아니었다.이타적인 질문이었으며 상대방을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질문이기도 했다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간단하고 쉬우며 명료하고 위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아래의 질문 문형 들은 특별히 해석을 붙이지 않아도 영어 그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이 평이하다. 맥락을 찾아 읽어보면 이렇게 소박하고 평이한 질문에 어떤 깊은 뜻이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1.   Why are you anxious about clothes? (Matt 6:28)

ü  왜 옷에 신경을 쓰느냐?


2.   Why are you so afraid? (Matt 8:26)

ü  왜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뭐가 그리 무섭냐?)


  1. Why do you harbor evil thoughts? (Matt 9:4)

ü 왜 나쁜 생각을 품느냐?

  1. Do you believe I can do this? (Matt 9:28)

ü 넌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1. What did you go out to the desert to see? (Matt 11:8)

ü 넌 사막에 나가서 무엇을 보려고 한것이냐?

  1. To what shall I compare this generation? (Matt 11:6)

ü 이 세대(사람들을무엇과 비교하랴?

  1. Who is my mother? Who are my brothers? (Matt 12:48)

ü 내 어머니가 누구냐내 형제들이 누구더란 말이냐?

  1. Why did you doubt? (Matt 14:31)

ü 왜 의심했느냐? (왜 믿지 않았느냐?)

  1. And why do you break the commandments of God for the sake of your tradition? (Matt 15:3)

ü 그리고 왜 너(너희)는 전통을 빌미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1. How many loaves do you have? (Matt 15:34)

ü 빵을 몇개를 갖고 있느냐?

  1. Do you not yet understand? (Matt 16:8)

ü 아직도 이해를 못하느냐? (Don’t you understand, yet?)

  1.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Matt 16:15)

ü 그렇지만 너는 나를 누구라고 말 하려느냐?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1. Why do you ask me about what is good? (Matt 19:16)

ü 왜 내게 무엇이 좋은지 묻는거냐?

  1. Can you drink the cup that I am going to drink? (Matt 20:22)

ü 내가 장차 마실 그 잔을 네가 마실 수 있느냐?

  1.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Matt 20:32)

ü 너를 위하여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느냐?

  1. Why are you testing me? (Matt 22:18)

ü 왜 나를 시험하고 있느냐?

  1. Could you not watch for me one brief hour? (Matt 26:40)

ü 단 한시간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단 말이냐?

  1.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Matt 27:46)

ü 나의 신이시여나의 신이시여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1. Why are you thinking such things in your heart? (Mark 2:8)

ü 왜 마음속에서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느냐?

  1. Who has touched my clothes? (Mark 5:30)

ü 누가 내 옷을 건드렸느냐?

  1. Why this commotion and weeping? (Mark 5:39)

ü 왜 이렇게 소동을 피우며 우는거냐?

  1. Why does this generation seek a sign? (Mark 8:12)

ü 이 세대는 왜 싸인 (표시)’을 구하는가?

  1.  [To the Blind man] Do you see anything? (Mark 8:23)

ü 시각장애인을 향하여 – 뭔가 보이는가?

  1. Salt is good, but what if salt becomes flat? (Mark 9:50)

ü 소금은 좋은 것이다하지만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면?

  1. What did Moses command you? (Mark 10:3)

ü 모세가 너(너희들)에게 무엇을 명했는가?

  1. Do you see these great buildings? They will all be thrown down. (Mark 13:2)

ü 너는 이 큰 건물들이 보이는가이 건물들은 무너질 것이다

  1. Simon, are you asleep? (Mark 14:37)

ü 시몬아잠들었느냐?

  1. Why were you looking for me? (Luke 2:49)

ü 너는 왜 나를 찾고 있었느냐?

  1. Where is your faith? (Luke 8:25)

ü 네 믿음이 어딨는거냐?

  1. Who touched me? (Luke 8:45)

ü 누가 나를 건드렸느냐?

  1. Why do you not judge for yourself what is right? (Luke 12:57)

ü 너는 왜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지 않는 것이냐?

  1. For who is greater, the one seated a table or the one who serves? (Luke 22:27)

ü 식탁에 앉은 이와 음식 수발을 드는 이중에서 누가 더 훌륭하냐?

  1. Why are you sleeping? (Luke 22:46)

ü 왜 자고있느냐?

  1. Have you anything here to eat? (Luke 24:41)

ü 여기 아무거라도 먹을만한 것이 있느냐?

  1. What are you looking for? (John 1:38)

ü 뭘 찾고 있느냐?

  1. Do you want to be well? (John 5:6)

ü 네가 낫고자 하는가? (건강을 회복하고 싶은가?)

  1. If you do not believe Moses’ writings how will you believe me? (John 5:47)

ü 네가 모세가 적은 것도 믿지 않는다면 나를 어떻게 믿겠는가?

  1. Where can we buy enough food for them to eat? (John 6:5)

ü 어디서 저들을 먹일 충분한 음식을 살 수 있겠는가?

  1. Does this (teaching of the Eucharist) shock you? (John 6:61)

ü (성찬의 가르침이것이 놀라운가?

  1. Do you also want to leave me? (John 6:67)

ü 너 또한 나를 떠나고 싶은가?

  1. Why are you trying to kill me? (John 7:19)

ü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가?

  1. Woman where are they, has no one condemned you? (John 8:10)

ü 여인아그들은 어디 있는가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않은 것이냐?

  1. Do you believe this? (John 11:26)

ü 네가 이것을 믿느냐

  1. Do you realize what I have done for you? (John 13:12)

ü 내가 네게 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겠느냐? (발 씻긴 의미를 물음)

  1. Whom are you looking for? (John 18:4)

ü 너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





첨언, 4대 성인의 '문답식교육'을 소개하면서 실제 모델 사례를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말씀에서만 취하고 석가모니와 공자의 예를 영문으로 소개하지 않은 이유는,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말씀이 영어권에서 영어 사용자들의 사고체계와 언어에 영향을 크게 미친데 비해서 석가모니와 공자의 말씀을 영역하거나 영어식 문화로 설명하는것에 제약을 느끼기 때문이다. (후에 시간 여유가 된다면, 논어와 불경 영문본을 구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23. 11:01



인천 송도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다가 아랫도리를 내리고 비뇨기를 드러내고 오줌발을 날리는 조형물을 발견.  요즘은 작은 사내아이들도 길에서 고추 내밀고 오줌 누지 않는다. 그런 세상이 아니다. 


이 조형물이 거기 있어 마땅한 것이라면, 바바리맨이 성기 드러내는 것도 별 문제가 안 될 것이다. 바바리맨이 바지내리고 성기 드러내고 히죽거리는거 보는 일이나, 조형물에서 오줌 줄기 쏘아대는 애들 고추 보는 것이나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게 왜 불쾌한가?" 물을 수 있다.


나는 불쾌하다. 



국제도시에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올텐데, 이런거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한국이라고 상상할까봐 겁난다.  유럽의 유명도시에 가도 고추 내밀고 오줌 누는 조형물이 많은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면 말해주겠다. 유럽에서 하니까 한국에서도 해도 된다는 발상이 기이하다. 뭐, 아들 못낳는 여자들 와서 그 애 고추라도 주무르면 아들이라도 낳게 하는 신통한 기운이라도 있는가?  아주 그냥 남근석이라도 세워놓지 그러셔 그 옆에 섹스박물관도 개장하고.   딱 그  수준인것 같다. 



어릴때부터 이런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박수받는 문화권에서 남자들이 페니스 아무렇게나 막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문화가 길러지는 것 아닌가? 딱히 '남근숭배'라고 입에 담아 말하기도 피곤하다.  인천시는 이 조형물을 없애야 한다. 만들기는 국제적인 경제 자유구역이라고 만들어놓고, 설치 작품은 70년대 변두리 극장의 조형물 수준인것인가?


당장 치우고,  '위안부 소녀상'이라도 그 자리에 설치 함이 마땅하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22. 15:47


영화관에 가 본지도 몇달이 되는 것 같아서, 내 인생 꽤 팍팍하게 돌아가네 싶어서 이른 아침 (7:50 a.m.)  조조할인가로 보러 갔다. 극장에 한 열명쯤 온것 같다.  나는 절약정신이 몸에 밴 사람이고, 사람 많은데 가는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라 영화는 조조할인으로 본다. 값도 싸고 사람도 없고. 


정가 다 주고 보기엔 좀 아까울것 같고, 딱 조조할인가로 보기에 마땅한 영화가 아닐까? 아니면, 그냥 기다렸다가 온라인에 풀리거나 TV에서 해 줄때 봐도 될만한.



우선, '이거다' 하는게 없달까.  나는 사실 머리가 무거워서 '코믹'하고 '가벼운,' -- 명당을 차지하기 위한 사대부들의 코믹한 전쟁 뭐 그런것을 기대했는데, 미리 코믹 영화가 아닌 것은 알았고, 그러면 뭔가 메시지가 있는건가 기대했는데 그것도 딱히 두드러지지 않고.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옛날 재미없는 테레비 사극 분위기. 



조승우는 어딘가 체급이 불은듯...얼굴이 투덕투덕 살집이 있어 보여서 그의 예리한 맛이 좀 떨어지고 (사실 조승우한테 내심 어떤 기대를 하고, 조승우 보러 간건데), 다른 분들도 자신의 전작을 못 벗어나는 뻔한 연기.  다들 잘 하시는 분들이지만 특별한 것은 없어서, 그냥 진부한 사극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추석에 온가족이 볼만한 영화로 겨냥하고 출시된 것 같은데 과연 성공을 거둘지는 애매하다. 간신히 본전치기 하면 다행일것이다. 


머리 무거울 땐 코믹한 영화가 딱인데, 볼만한 것이 없다.



그래도 한가지 영화 보다가 눈을 빛낸 내용은 -- 2대의 천제를 배출할 명당이 충남 '덕산'에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덕산'이라면 '윤봉길'의사의 고향땅이며 그의 기념관이 있으며 그의 터전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그 아름다운 땅이 아닌가!  그 덕산에서 큰 호랑이가 나오셨단 말이지!  그래서 불현듯, 아 덕산 땅에 가봐야해 올가을엔... 그 생각을 잠시 했다.  덕산에서 윤봉길 의사가 배출 되셨단 말이다.  결론은, 조조할인 영화 돈값은 했다는 것이다.  올가을이 가기전에 덕산에 한번은 갈 것이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20. 18:36



지난 9월 18일부터 오늘 20일까지 우리나라 문재인 대통령과 그 일행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측의 환대를 받고 백두산 구경을 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지난 봄에 판문점에서 경계선을 넘나들던 장면같은 '감격'은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남북문제에 어떤 해결점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뉴스를 드문드문 보았다.


그런데, 뉴스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18일 도착하여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공식석상에서 인사를 하거나 기념사를 할 때, 김정은은 '우리 평양시민들이 정성을 다하여 준비를 하였으니...' 이런 말을  몇차례 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인사에서 '평양 시민들 동포 여러분의 환영에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


김정은은 '우리 조선 인민들 (국민이란 어휘 대신에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가 있을 것이다)'과 같은 어휘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입에서 연거푸 나온 말은 '평양 시민들'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북한에서는 평양 사람만 사람이고, 나머지 지역 인민들은 아마도 '떨거지'나 뭐 2등 시민이나 그런건가부다.' 


우리나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에서 김정은을 맞이했다고 가정할때, 우리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이 진심으로...' 뭐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서울 시민들의 환영...'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영화'인지 '북한에 관한 영화'인지 잘 모르겠는데 언젠가 미국에서 봤던 '북한 배경' 영화에 이런 것이 있었다. 북한의 어느 산골마을에서 '고철'모으기 경쟁이 벌어졌다. (나도 어릴때, 유신시절에 학교에 고철을 갖다 내야 했었다). 고철 모으기에서 1등을 한 학급에게는 포상이 주어지는데, 바로 '평양 수학여행'을 가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온 마을 아이들이 고철 모으느라 난리였다.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는 북한 인민군이었는데, 아들의 고철 수집을 돕기 위해서 탄피를 갖다 주기도 했다.  하여 주인공 소년은 고철 모으기에서 1등을 했고, 소년이 소속한 학급은 '위대하신 영도자'가 제공하는 수학여행 버스를 타고 평양 수학여행에 오르게 되었다. 소년과 소년의 가족은 이 소식에 너무나도 기뻤다. 


하지만, 기대에 부푼 소년에게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너는 평양행 버스에 오를수 없다." 그 이유는 소년의 키가 작아서였다.  학급에서 어딘가 신체 장애가 있는 친구도 제외되었다. 위대한 지도자동지가 계시는 땅에 키가 작거나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이 들어가서 그 신성한 땅을 오염시키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친구들이 버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영화 내용대로라면 평양에는 뽑히고 뽑힌 사지육신 크고 건강하고 용모도 단정하고, 하여튼 선택된 사람들만 들어가 살 수 있는 모양이다. 그들만이 북한의 진정한 주민이고, 나머지는 그냥, 거기 개 돼지처럼 살아가는 인민으로 취급 받는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정은이 '평양시민'만을 앞세우는 광경이 참 괴이쩍게 느껴지긴 했다. 


통일을 위한 길이 간단치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즐겁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19. 13:56


붉은불개미가 항구 시설이 아닌 내륙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미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베나드릴 캡슐을 사서 부치라고 해야 하려나 생각해보게 된다. 붉은 불개미에 물려 알러지 증상을 보일때 나를 살릴수 있는 약이 그것이다.


붉은불개미는 미국의 남부에서는 흔한 개미이다. 플로리다에서 지낼때 두차례 불개미에 물려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 아주 무서운 녀석이다.  물렸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내 경우에 알러지 증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1) 생명의 은인


그냥 공원에서 샌들 신은채 흙길을 조금 걸은 것 뿐인데, 개미에게 물렸나보다. 가렵지. 긁었다. 열이나고, 어지러워지고, 얼굴이 아니 전신이 퉁퉁 부어오르고 눈알도 붓는다는 느낌이 들고, 현기증이 난다. 갑자기 소주 한병을 벌컥벌컥 마셨을때 머리가 띵해지고 팽 도는 현상 -- 그런것이 고강도로 덮친다. 삽시간에 그런 일이 생긴다. 그대로 '이러다 낫겠지' 하고 앉아 있으면 몇 시간 후에는 사망 선고를 받게 될 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들 테니스 레슨 시켜주느라고 테니스장 근처에서 기다리다 발생한 일인데, 현기증을 무릅쓰고 집에까지 운전하여 왔는데, 그 다음부터 숨도 막히고 사태가 심각해졌다. 이 때 내버려뒀으면 나는 죽은거다.  



아이들이 후다닥, 마을에 있는 한국마켓 이사장 댁으로 달려갔다.  무조건 문을 두드리며 "우리 엄마가 이상해요.  우리 엄마가 이상해요!"  마침 그댁 '이사장님'은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은 베테랑 아저씨였다.  이사장님은 아이들에게 설명을 듣고는 곧바로 자기집 약상자에서 베나드릴 캡슐을 몇판 (한판에 여덟알 들어있는거)을 갖고 어둔 저녁길을 달려 오셨다. (그분이 아직도 가게에 앉아 있었다면 나는 죽었을것이다. 마침 그가 일찍 들어와 집에 있었다). 



그는 약 네알을 한꺼번에 먹게 했다. 보통의 경우 두알정도 먹는 항히스타민제인데 그 두배를 한꺼번에 복용하게 했다.  그걸 먹자 빠른 속도로 열기가 내려가고 붓는 것이 멈췄다.  이사장은 "이거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안되는 약이지만, 지금 비상 상황이므로, 두시간 마다 두알씩 먹고, 열이 완전히 내리면 복용을 중단하고 물을 많이 마시라"고 설명을 해 줬다.  그나마 약이 들어서 바로 차도가 보여서 다행이지 약이 안들을 경우 응급차를 바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장은 미국생활 오래 하면서 개미에 물려서 죽은 사람도 봤다는 것이다. (나도 내버려뒀으면 죽었겠지.) 이 사장님 덕분에 나는 안죽고 살았다. 그 후 며칠간 '독한 약 세례를 받은 위장'을 달래느라 고생 좀 했지만, 안죽은게 어디인가. 그리고 나서 석사학위 졸업시험을 쳤었지. 나는 반쯤 혼이 나가 있었는데, 간신히 통과를 했다. 그래서 이사장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2) 베나드릴를 사러 


그 이듬해, Wakulla Springs 라는 아름다운 샘이 솟는 호숫가 습지대 공원에 놀러갔다가 호숫가 모래사장에서 다시 개미에게 물렸다. '따끔'한 느낌이 들어서 보니 이미 붉은 불개미에게 물린 후였다.  '지난 번에 한번 고생을 했으니 내성이 생겨서 괜챦겠지' 막연히 이런 기대를 했다.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애들을 챙겨서 급히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운전하며 가는 도중에 점점 시야가 흐려지고 현기증이 나고, 눈알이 튀어 나올듯 붓는것 같고, 또다시 같은 증상이 몰아쳤다. 지난번보다 진행 속도가 오히려 더 빠른것 같았다.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차를 달려 인근 '월마트'를 찾아내어 세우고, 월마트로 비틀비틀 달려가서 베나드릴을 사 입에 털어넣었다.  저녁바람에 애들과 왕눈이(나의 개)를 데리고 월마트 주차장에서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차를 몰아 조심조심 집으로 돌아왔다.  만약에 베나드릴을 살 수 없었다면 --전화로 911을 부르는것이 최선이었을거다. 



(3) 생살을 파 냈다는 꼬마


그 후에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개미알러지'얘기가 나왔는데, 그 모임에 꼬마 아들을 데려온 아빠가 경험담을 들려줬다. 꼬마의 가녀린 팔에 상처자국이 선명한데 붉은불개미한테 물린 자리가 아물지 않고 자꾸만 문제가 생겨서 그 독소가 침투한 생살을 모두 파내야 했다고.  안 그럴경우 팔을 절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질수 있어서 피치못하게 그리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팔을 절단하거나 쇼크로 죽지 않은것만도 다행이라고 했다.  



물론 이 사례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개미가 물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의 경우 쇼크가 왔고, 꼬마의 경우 피부에 독이 퍼진 것이다.  사람마다 증상이나 경과가 차이가 있을수 있다. 특히 '신토불이'라고 늘 붉은불개미에 노출되어 살아온 토착민들에게는 큰 문제가 안되는데, 나같은 이방인에게는 충분히 위험할 수 있다. 



그 무서운 붉은 불개미가 한국에 안착을 한건가? 알러지 반응이 나타났을때 초기에 항알러지 약을 바로 쓰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것이다. 방치하면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  아무쪼록 방역당국에서 이들을 출국시켜 주시기를 바란다. 아니면, 위험성을 알리는 교육이 필요하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17. 08:46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가 사는 섬마을에는 내가 산책할 수 있는 거리에 서점이 세개나 된다!  교보문고가 한군데, 영풍문고가 두군데에 있다!  그러므로 심심하면, 그냥 '서점'에만 나가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인터넷서점의 약진으로 오프라인 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미국 서점가를 생각하면, 지금 내가 누리는 호사는 보통 호사가 아니다. 서점의 신간코너를 춤을 추듯 이리저리 돌며 새 책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유희인가.  언젠가 이 수북히 쌓인 신간들 속에서 내 책을 발견하리라 상상하는 일도 즐겁다.  옛날에 내 책이 나왔을때, 일부러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내 책이 어디에 진열되었는지 확인하고, 자꾸자꾸 돌아보던 일이 생각난다.  늘 그때의 설레임으로 책방을 찾게 되는데.


그렇게 한가로운 9월 어느날 저녁, 내 눈에 '데미안'이 눈에 띄었다.  데미안이라니. 그런데, 책 서두에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 한마디 때문에 책을 집어 들었다. 


언제였더라? 데미안을 읽은 것이? 중학교 1학년 혹은 2학년?  도대체 그 때 내가 무엇을 읽은 것일까?  도대체 그때 내가 무엇을 이해하고 친구들과 비밀조직원들처럼 "너 데미안 읽었니?" 묻고 서로 아는체를 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 당시에 나의 '데미안' 읽기는 싱클레어와 막스 데미안과의 관계, 혹은 에바 부인과의 기묘한 관계에 한정되어 있었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내용들에 대해서 '신비한 무엇'정도로 지나쳤겠지. 그리고 중학생인 우리들은 서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아프락사스라 한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을 비밀 결사단체의 암호처럼 서로 주고 받았으리라. 


나이 오십이 넘어 그 책을 다시 집어 드니, 책안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카인에 대한 시각, 혹은 '신성'의 문제, 니체 초인철학의 그림자, 세계의 고대 종교및 보편적인 종교들,  하이데거의 '던져진 존재'를 방불케하는 이미지들이 여기저기에 수채화 물감처럼 스며 있다.  이런 담론의 주제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성경을 읽어본적도 없고, 카인이 누군지도 몰랐던 어린 나는 책을 읽고 어떤 상상을 했던 것일까? (헛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중학생들이 이 책을 읽어봤자라는 말은 아니다. 책은, 소설은 자기 수준만큼 이해하면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읽으면 좋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그런 무엇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내가 그걸 안단 말인가.

어쩌면 나도 찾고 또 계속 찾아야겠지.

여러해를,

그리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하겠지.

어쩌면 나도 하나의 목표에 이르겠지만

그것은 악하고, 위험하고, 무서운 목표일지도 모른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Page 129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Page 172



이 책이 지금도 내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내가 아직도 나를, 혹은 나의 운명을 찾아 내지 못했기 때문인데 문득 윤동주의 '길'과 오버랩 되기도 한다.


내가 어릴땐, 청년일땐 몰랐다, 어른이 되어도 우리의 '헤멤'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어릴때 나는 내 아버지나 내 엄마 혹은 주위의 어른들, 학교의 교수님들은 삶에 대한 어떤 확고한 답을 이미 갖고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들은 어른처럼 보였다. 그들은 이미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교육을 많이 받았건 적게 받았건,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답'을 갖게 되는건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혹시 인생을 낭비한 것은 아닌가, 내가 엉뚱한 곳에서 헤메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회의가 시시때때로 몰려온다. 그것은 '내가 재산을 얼마나 모았나. 나는 왜 집한칸 없이 떠도나'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것은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정말 제대로 이 생을 살아내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감이 자꾸 든다는 것이지. 


그런이유로 '데미안'은 아직도 유효하다. 내 고민을 그대로 책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작가가 이 세상에 있었으며, 그러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서 비슷한 책을 읽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제법 위로가 된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을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남학생들은 모르겠고, 내 또래 여학생들 중에서 그래도 '책'좀 읽는다는 주위의 친구들은 대개는 '헤르만 헷세'에 미쳐지내던 시절이 반드시 있었다. 우리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너 000 읽었니?'였다. 그건 비밀결사단체의 암호 같은 것이라서 그것을 읽었다고 고개를 끄덕일때만 어쩐지 정말 친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혜화동의 고등학교에 다닐때, 내가 존경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를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바로 그 '데미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 친구를 정말로 존경했다.  그 친구는 나보다 키도 크고, 인물도 시원하고,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잘 치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 명작들을 이미 읽은 후였고, 공부도 나보다 잘했고, 그림도 나보다 잘 그렸고, 글짓기도 나보다 잘했다.  나는 산문을 좀더 잘썼고, 그 친구는 시를 잘 지었다.  심지어 스포츠에도 뛰어났다.  그런데다 별로 말도 없고, 쳐다볼땐 눈빛이 깊고 그윽했다.  중성적인 매력까지 있었다. 도대체 못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지나치는 말로 소설 무엇, 무엇, 무엇 말할때마다 나는 놓치지 않고 그것들을 찾아 읽었다. 나도 책벌레 소리 들었는데, 그 친구에 비하면 내 독서력이가난하기 그지없던 형편이라서, 학교 도서관에 자주 책을 빌리러 가야했다. (물론 그 친구의 눈에 띄지 않게 책을 읽었다. 하하).  나는 그 친구를 존경했다. 진심으로. 



그렇지만, 내게 먼저 다가온 것은 그 친구였다. 나는 나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별로 없어서 늘 '관망자' '구경꾼' 정도에 머물러 있던 편이었고, 사람에게 다가가기보다는 멀리서 관망하는 편이었기때문에 그냥 내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그가 내게 먼저 다가왔다. 다른 평범한 친구들처럼 방과후에 함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함께 같은 방향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거나 그런 짓을 얼마간 했다.  내가 중간에 내리고 내 친구는 그 버스의 종점까지 가면 되었다.  우리는 별로 말도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 이해하고 있었다. 내 친구는 여일하게 나를 대했고 어느날 나는 내 친구에게서 도망을 쳤다. 평범한 친구 관계는 두달도 못 갔을 것이다. 나는 도망쳤다. 방과후에 함께 하교하기 위해 내 친구가 기다릴때 나는 다른 길로 가버렸고,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불에 데인듯 피했다.  나는 내 친구를 여전히 존경하고 그를 신뢰하고, 언제든지 내가 힘들땐 저 친구가 나타나서 나를 위로해 줄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내 친구를 피해다녔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내 친구가 나를 찾아와 뭔가 말을 하자고 할 때도 나는 골난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몇번인가 내 친구는 나를 찾았고 깊은 한숨을 지으며 딱하다는 듯이 나를 들여다보다가 자리를 뜨곤 했다. 나중에 내 친구는 멀리서 웃어주기만 했고, 나도 멀리서 웃었다.  그래도 그는 나를 잊지 않았다는 듯 학년이 바뀌어 서로 다른 반으로 흩어진 후에도 갑자기 달려와 삶은 밤 몇개를 내 책상에 놓아주고 가거나, 내가 대학입시 공부에 몰두 해 있을때는 라면 부스러기 같은것을 갖다 주고 휙 가기도 했다. 나는 온순하게 그것들을 받아 먹었다. 우리들은 연결되어 있었다. 내 친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을 되짚어 내가 왜 그렇게 맹렬하게 내 친구에게서 벗어나려 했는지 생각해보면, 내 친구와 내가 너무나 '닮은 꼴'이어서 였던것 같다.  내 친구와 나는 일단 외모에서 많이 닮았다. 물론 나보다 키고 크고 나보다 빼어난 외모였지만, 내 친구와 나는 서로 거울을 보는 기분이 들곤 했다. 물론 내 친구가 모든 면에서 훨씬 좋은 사람이고, 고양된 영혼의 소유자이긴 했으나, 우리는 아주 기묘하게 서로 닮아있었는데, 내 친구는 그래서 내게 친화적이었던 것 같고, 나는 그래서 아주 멀리 멀리 달아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나는 내게서 달아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멀리 멀리. ) 


내친구의 싯귀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참 아름다운 시였다. 내 친구는 나보다 성적도 월등히 좋았으므로 선망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내 친구가 대학원생일때 딱 한번 그의 학교 조교실에서 그를 만났다. 내 친구는 여전히 고등학교때처럼 농구를 즐겼는데,  대학에서도 장대같이 큰 남학생들과 어울려 농구를 한다고 했다.  그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화장도 섹시하게 하고, 그리고 대학원 조교실에서 후배 남학생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여왕, 혹은 여신처럼 보였다.  혹은 아직도 내가 옛날에 존경하던 친구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가끔 그 친구 생각을 한다. 애써 찾지는 않는데, 아마도 때가 되면 어딘가에서 나타날것 같기 때문이다. 




아, 그 친구 때문에 나는 헤르만 헤세의 거의 모든 작품을 다 읽었는데, 지금 그의 저서 목록을 훑어보면, 도대체 내가 그 책들을 어떻게 읽은 것인지 제목만 생각나고 줄거리는 아예 가물가물하다. 그나마 떠돌이 시인의 삶을 그린 '향수'나 성장기 고통을 그린 '수레바퀴 아래서'는 구체적인 스토리가 떠오르는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내가 읽은 당시에 열광을 했으면서도 지금 그게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쩐지 올 가을 내내 헤르만헤세의 작품들을 하나 하나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16. 12:41


살면서 그냥 막연히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그런 것과 비슷하게 어떤 허기를 느낄때가 있다.  이곳 섬에 와서 3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내가 느낀 허기는 '문화적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번듯한 공연장이 안보였다. (내가 못 찾아낸 것일수도 있다).  



플로리다에서 지낼때는 대학을 중심으로 그리고 주 청사를 중심으로 배고프지 않을 맘큼 다양한 공연이 제공 되었고, 버지니아에서 살 때에는 케네디센터를 비롯, 워싱턴 디씨의 역사적 공연장들이 즐비했으므로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연주자나 악단의 연주를 쉽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서울에 살 때에는 지금은 우중충해보이기까지 하는 세종문화회관을 비롯, 뭐 돈이 없어서 못 갔지 갈데가 없어서 못가지는 않을 정도로 공연장이 많았다. 내 일생에 '사방을 둘러봐도 공연장이 없다'는 막막한 느낌은 최근 3년 가까이 섬에서 지낼때 처음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다, 일전에 버스타고 신촌에 다녀오는 길에 인천시내버스에 붙은 음악회 광고를 발견하고, 그길로 바로 표를 예매해서 가게 된 곳이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이었고, 운좋게도 '라흐마니노프'를 들을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는. 작은 학생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학생에게 "도대체 이 근처 사는 사람들은 공연을 보러 어디로 가니?"하고 물으니 그 역시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아니면 대개는 서울 예술의 전당쪽으로 간다고 한다.  내가 못 찾은게 아니라 그것이 현실 이었구나. 



금요일 저녁, 비가 솔솔 뿌리는 가운데, 전철을 타고 공연장을 찾았다. 일단 건물은 되게 커 보이고, 그 흔한 샹들리에 하나 매달려있지 않은 어딘가 쇠락해가는 듯한 느낌의 인테리어였다. 



금노상씨가 지휘한 무소르그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내가 경험했던 대규모 외국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못지 않은 훌륭한 것이었다. 특히 KBS명곡 프로그램 시그널로 오래 사랑받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라디오가 아닌 생생한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어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교향곡 2번 작품은 CBS FM 저녁 배미향씨 시간에 씨그널로 나오는 멜로디가 들어있는 곡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 멜로디가 흘러나올때, 아 저거구나! 했다. 즐거웠다. 



아쉬운점은 내가 뭐 '막귀'니까 연주는 웬만하면 다 훌륭한데, 어딘가 소리가 무대에서 연주자들 사이에서만 맴도는 인상이었다. 지휘자가 열심히 지휘를 하고 연주자들이 아름답게 연주를 하는데, 그 소리가 객석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자기네들 무대에서만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느낌.  이건, 그러니까 연주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무대와 음향시설의 문제인것으로 보인다.  비유하자면 내 오피스에 좋은 오디오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서 음악소리가 내 온몸의 세포에까지 스며드는 기분이 드는데, 집에가면 조그마한 라디오가 있고, 순간적으로 그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가 마치 꽉막힌 상자속에 소리가 갇혀있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그런 조그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건물 구조적인, 혹은 음향시설의 문제를 제외하면 연주 자체는 케네디센터에서 했을경우 전원 기립박수를 받을만해보였다. 



금노상씨.  지휘자 이름을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나: "금노상..금노상...금수현씨 아들인가?" 

옆에 있던 박선생: "금수현씨 아들은 금난새씨지.

나: "그렇군, 금난새씨가 있었지.  (3초후) 그런데 금노상씨도 금수현씨 아들하면 안되나? 금수현씨가 아들이 하나밖에 없나?

박선생: 설마, 한집안에서 지휘자가 여럿 나오기가 쉬운가?

나: 금씨가 워낙 희귀성이라서 말이지. 금수현씨 아들 아니면 조카? 먼 친척?



연주회 끝나고 구글 뒤져보니 금노상씨도 금수현씨 아드님이라고 한다.  헤헤. 나는 나중에 실업자 되면 시청앞에 돗자리를 깔아도 굶어죽지는 않을거야. 



음악당의 음향시설이 조금 낙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영혼이 목마를때 찾을수 있는 샘으로 가을에 이곳을 몇차례 더 찾을 생각이다. 내가 이 섬에서 예술의 전당을 다녀오려면 하루 품을 다 팔아도 힘든데다, 본래 게으른 인생. 이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내가 새삼 깨달은 것 세가지:


    1. 나는 하느님께 진짜 감사해야 한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대수롭지 않게 향유해오던 문화시설들이 사실은 한국에서 최고였거나, 미국에서 최고였던 시설들이었다. 그것들이 얼마나 굉장한 특혜인지 모르고 그냥 무심코 누리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을 경험하면서 자각하게 되었다. (위대한 인천광역시가 자랑하기에 인천문화예술회관은 어딘가 낙후해 보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2. 인천시민들 정말 착하다. 불평하지 않고,  있는 것을 누릴줄 안다. 이분들에게 좀더 좋은 시설을 제공하면 안될까?
    3. 먹고 사는게 해결되었다면, 이제는 마음의 양식, 문화를 해결해야 한다. 

인천시는 인천시민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줄만한 좋은 음악당도 만들어주시고, 진짜로 인천을 세계의 중심으로 키워주시길. 트리플스트리트 같은 신개념 쇼핑몰도 좋고, 국제 캠퍼스도 좋고, 다 좋은데 서해안 문화의 중심지로 키울 생각은 없으신지. 시드니에 있는 음악당 같은것 인천 바다 가까이에 지어서 서해안 문화의 기념비가 되게 하고, 바다 건너 오는 중국관광객에게도 화장품이나 치맥 같은것만 팔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문화 상품을 팔면 좋을 것이다. 요요마도 랑랑도 죠슈아 벨도  바닷가 공연장에서 연주하게 만들고, 응? 응?  (인천에서도 구석에 처박힌 섬마을 사람의 일성).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14. 09:41



http://www.segye.com/newsView/20180912005483


모 '갑 대기업'이 몇몇 '힘쎈' 대학 출신자에 대해서 입사 지원에 '갑님 우대'를 한 현장이 포착되면서 '갑님'에 포함되지 못하는 지원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는 뉴스가 보인다. 


공무원채용이나 공공기관 직원 채용이라면 모를까 사기업에서 자기네 입맛에 맞는 직원을 맘대로 골라서 뽑겠다는 것이 크게 잘 못 된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가령 내가 집에서 가사를 도와줄 도우미님을 고용하려 하는데, 내가 내 기준에 맞는 사람을 뽑는다고 할 때, 내 이웃이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지 않은가?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라는 개념이 있기는 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그런데 그 CSR개념을 직원고용의 영역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가지고 CSR을 내세워 그들을 비난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그런 개념을 적용을 하면 안된다는 것도 아니다. 인간 각자는 그가 속한 사회에 개별적으로 책임이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이고. 그런데 저 들을 상대로 공자왈 맹자활 아담스미스왈 할 생각없다.  


나는 대단한 대학 출신이 아니다. 공부 할만큼 해서, 내 수준에 맞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 할만큼 하고 그럭저럭 한세상 잘 살아내고 있다. 대단한 대학 출신이 아니라는 열패감(?)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살고 보니까, 별것 아니더라구...


그러니, 입사 지원에서 밀릴 가능성이 큰 안대단한 대학 출신인 내가 이 문제를 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당신들은 '선배'인 나를 따라 이렇게 외쳐도 좋으리라. "니네 맘대로 해라 이 우매한 갑님들아. 나 안 굶어 죽는다." (해석: 님들 뜻대로 하소서 높으신 갑님들이시여. 소생이 혹시라도 굶어 뒈져 님들께 폐를 끼칠까 그것을 저어할따름이옵나이다.)




대단하지 않은 대학을 나오신 분들, 기분 나쁘신가? 그러면, 행동을 하시라.  어떤 행동을 하실 것인가? 자 그 행동 지침을 가르쳐 드리겠다.  


(1) 개인차원에서 최대한 저항한다 

생각을 해보라. 잘 생각을 해보자.  저 스스로 '대단히 유명한 몇몇 대학생' 쪽수가 더 많은가, 아니면 '안대단한 다수의 대학교 학생' 쪽수가 더 많은가?  그 가족들까지 포함해보자. 어느쪽의 머릿수가 더 많은가?  힘의 원천은 여러가지이다. 큰 강을 이루는 샘물과 실개천은 수천가지이다.


아, 아, 아, 당신들은 희망을 가져도 좋다. 비열하게 숨어서 차별하는 저 어리석은 갑님들은 지금 자멸의 길을 가고 있는거니까. (해석: 거룩하게 인재를 선별하시는 지혜로운 갑님들이시여, 작금에 이르러 패망의 노선에 들어서셨으나 설마 한두해에 망하오리까. 고사목의 아름다움이 그대들의 길이오니이다.) 


모던자동차 회사가 그대들을 괄시하는가? 모던자동차를 팔아버려. 절대 사지말라구. 애국자라고 국산브랜드 자동차 타지? 저들은 애국자따위 안중에도 없으니까, 다른차도 많고 외제차 탄다고 매국노가 되는 세상이 아닌기라. 세별 회사가 그대들을 괄시하는가? 세별전화기 사지말고, 세별 전자제품도 사지말고, 그냥 무조건 안쓰는거야. 애국은 일방적인게 아니지. 사회는 상호적인거니까, 애국도 상호적이어야 하거든.  윤봉길의사가 살아계셨으면 - 차별하는 족속부터 일단 혼을 내셨을거니까. 잊지마시라고, 저들이 그대들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기억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회사 망하면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어차피 그 회사는 그대의 직장이 아니셔. 그대를 뽑을 생각도 없는 회사가 망한대도 그대는 어쨌든 굶어죽지는 않을거라구.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리고 국내 경제및 세계경제에 관심이 많으며 정의사회 구현에 관심이 많은 어느 경제 평론가가 있었다. 그는 어느 전화기 잘 만드는 한국산 재벌에 대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표시하며, 저들은 반드시 조정을 거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물었다, "송구하오나, 당신 전화기는 어느 회사 제품인가요?" 물론 그가 극도로 혐오하고 경계하는 그 한국산 재벌회사의 신제품이었다. "그런데, 그들 제품을 사 주면서 그 회사에 대하여 사회정의 실현을 외치시는가요?  물론 보복하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도대체 개인차원에서 그대의 리액션(상응하는 행동)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들은 지금도 떵떵거리고 노동자가 죽어나가거나 말거나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나는 경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 경제정책에 대해서 깜깜하다. 그러나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한다.  나는 먼지만큼도 가치 없는 소비자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내 돈을 너희에게 쓰지는 않겠다는 정도의 리액션은 취한다는 것이지. 


(2) 개인이 자꾸만 떠들어서 옆집도 떠들고 윗집 아랫집 떠든다 (collective voice).


기분이 나쁘면 목소리를 내라.  댓글 조작단이 있건 없건 그건 그들의 문제이고, 선량한 시민들은 그냥 각자 중구난방 목소리를 자꾸 내는거다. 소 잔등의 등에처럼 자꾸 여기저기서 앵앵거리는거다.  등에는 소를 잡아먹을수는 없지만, 소를 움직일수는 있다.  침묵하지 말고 자꾸만 앵앵대는거다. 귀챦아서 소가 꼬리를 흔들고 머리를 흔들고, 자리를 뜰때까지.  그것은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혼자 앵앵거려서 무엇하나? 고민할 것 없다.  시체로 있는것보다는 살아 있다는 것만이라도 보여야 하는거다. 


(3) 입법을 요구한다. (legislative action)


사기업이 제 입맛에 맞는 때깔좋은 인재 뽑아 쓰는것이 위법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우리는 '고용평등에 관한 조항'을 법제화 하는데 힘써야 한다.  고용에 대한 남녀평등은 그것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가 없는가는 차치하고, 입법이 되어 있다. 이제는 학교 간판이나 지역에 대한 차별도 철폐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입법화 해야 한다.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한국의 힘쎈 대학출신, 그 인재들이 아닌 그 이외의 여러대학 출신들을 골고루 등용하는 사기업에 대하여 정책적으로 여러가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업도 연구 될수 있다.  내가 차라리 방통대 법학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좀더 해 보든가 해야지 원, 무식하니 답답하다.


(4) 초대받지 못한 당신 (Live your life)


인정할건 쿨하게 인정하자.  다시 집단적인, 제도적인 논의에서 극히 개인차원의 얘기로 돌아가자.  인정할건 인정하자. 저들이 잔칫상을 차려놓고 사람을 부르는데 미안하게도 당신은 혹은 우리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왜 나는 초대 안해주느냐고 남의 잔치에 떼로 몰려가 난동을 부리는 것은 실례다.  그들은 그들의 잔치를 하게 내버려두자. 그리고 초대받지 못한 우리들은 우리만의 잔치를 하자. 



'초대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다.  놀랍지 않은가? 바로 당신이 주인공일수도 있다는 사실이?  어차피 판이 이렇게 흐르는거, 위에 적시한 방법 외에도 개인차원에서 그냥 얘기나 해보자.  나름 이러한 문제 해결 안으로 박근혜 정부에서는 '중동으로 눈을 돌려라 일자리 많다'는 코멘트도 있었고, 어떤 선생님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남의 가려운 다리를 긁는척 했다.  서울대 학생들이 아프면, 서울대 학생이 아닌 학생들은 곯아 터져 죽는게 이 작금의 한국 사회인거 모르나?  울타리 안에 있는자가 울타리 밖의 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설마, 나는 이런 사탕발림으로 내 자식들같은 청춘들을 속일 생각이 없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냥 좀 더 고생을 해야 할거다. 미안하다 기껏 할 수 있는 말이 좀더 고생이라니.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현재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삼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거친 직업의 숫자는 입 밖에 내어 말하기도 챙피할정도로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끊임없이 굴렀다.  한군데 안정적인 직업이 없이 끝없이 구르는 세월이었다.  한뼘씩 한뼘씩 나아갔고 올라갔다. 큰대학 출신의 인재들과 겨뤄서 승리하여 자리를 차지한 적도 있고, 그들이 거들떠도 안보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일'마저도 열심히 했다.  



언젠가 30대 초반에, 주로 서울대, 연세대, 이대 출신들 인재들이 두툼한 지원서를 제출한 큰 언론사에 나도 지원서를 내어 일 할 기회를 얻는 적이 있다.  나를 채용한 담당 부서장이 내게 대놓고 말해줬다, "우리 부서는 원래 연세대판인데, (해석 -- 대대로 그 부서장은 연세대 출신들이 말아먹고 있었으니 끈끈한 선후배 관계로 서로 믿어주고 밀어주고 행복했다는 얘기다)  당신 지원서가 너무 특별하고 맘에 들어서 이번에 내가 당신을 뽑았다 (해석 -- 너는 시시한 대학 나온 사람인데, 네가 좀 특별해 보이는 것 같아서 실험적으로 너도 우리들 리그에 낑겨 준 것이니 일 잘해서 나를 실망시키지 말기 바란다.)  나는 빙긋 웃었고, 열심히 일했고, 나름 히트작을 많이 내고 나왔다. 



차별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개별적, 조직적 저항을 계속하되, 내 삶에서 나의 하루하루는 '전투' 모우드가 되어야 한다. 주어지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다른 기회를 찾는거다. 언제까지? 죽을때까지. 



당신은 이렇게 물을수 있다.  개 풀뜯어 먹는 소리좀 하지 말라.  어떤 놈은 우리나라 1등 대학나왔다고 큰 회사 들어가서 월급 많이 받으면서 비슷한 배우자 만나서 몇해 안에 강남에 집사고, 외제차 굴리고 애들 최고급 교육 시키면서 나이 먹어갈때, 나는 1등 대학 못나왔다는 이유로 평생 차별당하고, 하루 24시간 일해도 남는게 없고, 자식들도 알바 시켜야 간신히 대학보내는 팔자인데 나한테 노력만 하라는건가? 



노력하기 싫으면 노력하지 말라.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는 사회 시스템은 갖춰져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내 앞에 주어진 자원을 가지고 잘 살아보려는 노력은 계속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내가 50넘어 깨달은 사실.  돈 가진자가 가진 돈 만큼 행복한 것 같지는 않더라구... 그리고 대체로 돈이 좀 적어도 집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소박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더라구.  1등 대학 다니는 학생들도 자살이란것을 하더라구. 1등대학 출신들도 자살이란 것을 하고, 그들 중에도 실업자들이 많더라구. 자, 고생길이 열렸다.  그 길을 의연하게 걸어가면서 좋은 기회가 생기면 갈아타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거다.  한평생 그러고 살다 죽는거다.  그 길에서 동료들과 함께 웃고, 가끔 막걸리파티도 하고, 누가 사글세에서 전세로 옮겼다고 하면 함께 기뻐해주고, 누가 중고자동차라도 샀다고 하면 함께 축하도 해주면서 그렇게 살면 대체로 괜챦은거다.  평생 소시민으로 살다 죽으라는 말이 아니다.  원대한 꿈을 꾸건 작은 꿈을 꾸건 꿈의 싸이즈는 당신의 자유다. 얼마나 노력할지도 당신의 자유다. 얼마나 내가 누리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낼지도 당신의 자유다.  그것이 해결이 안되면, 당신은 30억짜리 집 열채를 강남땅에 가지고 있대도, 우울증으로 세상 끝낼수도 있다. 내 이야기가 배에 기름낀 브르쥬아 아줌마의 헛소리 처럼 들릴수도 있다.  내  큰 아들은 제법 이름있는 대학을 나와 만 3년 가까이 하루 13시간이상 온몸을 써서 일하는 직장에서 화장실 청소부터 물건 나르는 일까지 총체적 막노동을 하며 지내고 있는데, 퇴근하면 허리에 파쓰를 붙이거나 물리치료사 찾아가서 망가진 몸 고치는 것이 유일한 여가생활처럼 보인다. 그가 그 삶을 묵묵히 견디는 이유는, 그것을 인생의 피치못할 과정으로 보고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기간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렇게 된거, 불평해봤자 마음만 고단해지고, 앞날을 향해 오늘 하루 잘 살아내는거다.  음...  '초대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가 있다면 당신이 주인공이다. 바로 당신도 주인공이 될수 있는것이다.  주인공을 위하여 건배. 












'Diary >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 친구를 만나다: 데미안  (0) 2018.09.17
인천시향: 라흐마니노프 (18/9/14)  (0) 2018.09.16
21세기 교육의 지향점 4Cs  (1) 2018.09.13
A Helicopter Mom and Her Daughter  (0) 2018.09.12
그날의 햇살  (0) 2018.09.11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13. 13:04


지난 주말에 책방에서 구입하여 읽은 책, 유발 하라리의 21 Lessons for 21st Century 에서 눈여겨 본 대목을 수업중에 학생들과 토론하였다. 


21세기 교육현장에서 중시되어야 할 네가지 덕목/목표를 전문가들이 제시했는데 모두 C자로 시작되므로 '4Cs'라고 한다. (서양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머릿글자 놀음 하는 것을 좋아한다.)  학생들에게 책 소개를 잠깐하고 '우리가 수업에서 학생으로서, 교수로서 공통적으로 지향해야 하는것이 무엇일까? C씨자로 시작한다. 아무거나 C자로 시작하는 괜챦은 가치를 말해보라'고 제안했다. 


어리둥절해 있는 학생에게 내가 예를 들어준다. 


"For example, what about 'copying'?"


학생들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웃는다. 학생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copy and paste (인터넷 자료 카피해서 내 숙제에 그대로 붙여넣기 -- 전형적인 부정방법, 하버드생들도 위키피디아를 카피 페이스트 한다고 가끔 뉴스에 나온다)를 연상하고 웃는 모양이다.  내 그럴줄 알았어. 하지만..



"Hey, 'copying' is also a good tool of learning or practicing something new.  When you were a little child, when you were learning Korean alphabets or English alphabets, you 'copied' the letters repeatedly.  Copying and imitating, these are also good tools for learning. Fine, but for the 21st century, you are suggested to aim higher than that. What could be higher values and virtues?"




학생들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여기저기서 C로 시작되는 근사한 개념들이 튀어 나온다. 내가 기억하는, 학생들이 던진 어휘들



  1. cause (명분?)
  2. cope (maybe coping skills)
  3. care (누군가를 돌봄)
  4. concentrate
  5. courage
  6. cognitive
  7. challenge


좋은 개념들이지만, 책에 소개된 전문가들이 제시한 목록에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다가 슬슬 정답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내가 가르치는 세 클래스에서 동일한 토론을 했을때, 공통적으로 가장 먼저 튀어나온 개념이 'creativity'였다.  학생들이 아마도 이 어휘를 제일 친숙하게 생각하고, 그럴싸한 가치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것은 네번째이다. 1, 2,3 번이 남았다.  공통적으로 두번째로 언급되는 것이 cooperation이다.  책에는 Collaboration으로 소개되었지만, 학생이 cooperation이라고 말할때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므로 'Bingo' 정답으로 인정을 해 준다. 그것이 세번째 가치이다. 1번과 2번이 남았다.  2번, Communication까지는 그럭저럭 수월하게 나온다.  1번 정답이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이리저리 추측을 하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서, 내가 내 머리를 툭툭 치기도 하고 (머리와 관련이 있다고), 혹은 칠판에 cogito ergo sum 도 적어본다. 교탁위에 올라 앉아 로댕의 생각하는 남자 자세를 취해보기도 한다. 



Curious 라는 단어가 나온다.  Not bad.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결국 누군가가 자신없는 표정으로, 개미소리만하게 중얼거린다, "Critical...."  빙고! 정답. Critical Thinking. 첫번째 덕목 Critical Thinking.



  1. Critical thinking
  2. Communication
  3. Collaboration
  4. Creativity



우리는 분석적,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 대화하고 --> 협력해서 --> (함께) 창조해내는 인재를 키워내야하고, 그런 인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 Critical Thinking 이라는 답을 찾았다해도 이 개념은 다른 것들에 비해서 좀더 추상적이다.  뭐가 critical인걸까? 알듯 모를듯 하다.  학생들을 세명씩 소그룹으로 나눠서 과제를 준다. 셋이 의논을 해서 Critical Thinking 이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라. 준비가 되었으면 칠판에 정의를 적으라.  약 5분의 시간을 주면 각 소그룹에서 나름대로 의논하여 critical thinking의 정의를 문장으로 만들어가지고 앞의 칠판에 차례차례 적는다.  그들이 각자 적은 정의는 각기 차이가 나고, 완벽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들이 정리한 것들을 '모두' 모으면, 그 안에 Critical Thinking이 무엇인지 내용이 모두 들어있다.  다 함께 차례차례 소그룹들이 적은 정의를 리뷰하면서 개념이 좀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다른 작업도 병행한후, 수업을 마칠때 학생 개인별로 4C가 뭔지 말해보라, 너는 이 네가지 스킬중에서 뭣에 강하고 뭣에 약한가. 어느 부분을 보완하고 싶은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자신이 커뮤니케이션 스킬은 좋은데 협력하는 부분이 약하다거나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 학생은 대학시절에 무엇을 더 키워야 할지 스스로 답을 찾은 셈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뭔가하면, 엊그제 대학 새내기가 된 신입생 클래스에서도 이 4C에 대한 정답이 10분 안에 모두 나왔는데, 몇몇 동료 교수한테  개별적으로 동일한 질문을 했을때 4C를 제대로 답한 이가 없었다. 이분들이 학생들보다도 영어도 더 잘하고 아는것도 더 많지...세상도 훨씬 더 오래 살았고... 그런데, 세가지까지는 맞추는데 네가지 모두를 맞추지는 못한다. 아마 누가 나한테 물어봤어도 나도 맞추기 어려웠을걸. 무슨 말씀인가하면, 똑똑한 한사람보다 평범한 여러사람의 지혜가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collaborative 인재를 키워내야 하는거다. 







내 연구실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가끔 학생들이 내 연구실에 들렀다가 이 포스터 사진을 찍어가기도 한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12. 09:03


헌법재판관 후보에 오른 한 법관의 삶이 청문회의 도마위에 올랐다. 이분은 '주민등록증'을 '엄마'가 평생 관리해 오셨고, 자녀의 학업 문제며 주민등록 이전의 문제며, 거의 모든 삶의 디테일을 '엄마'가 관장해 주셨다고 청문회에서 밝혔다. 


내 또래인 이 분의 일생이 놀랍다.  (우리 엄마는 대체 뭐를 한거냐?  저런 엄마도 있구만!  슬슬 이런 생각마저 든다. )


그래서, 과연 이분이 헌법재판소에서 판사로 일 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  세수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물기를 닦으며 생각해보았다.  나는 사실 헌법재판소가 뭐 하는데인지도 잘 모른다. 재판소가 뭔지도 모르는 무지렁이 같은 세월을 살았으므로.  나는 그러니까 파출소나 재판소나 뭐 이런 공공기관에 대해서 '공포심'을 갖고 있는고로 평생 그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병원에도 안가는게 상책이고. 뭐 아무튼 권력자들이 있는 곳이 무섭다. 나는 아주 소심한 소시민이므로.


그래서 아무튼 내가 분류를 해 보았다.

(1) 그는 헌법재판소에서 일 할 자격이 있다

  1. 자격이 있으니까 일단 청문회 자리에 앉아 있는것 아닌가? (아무나 거기 가는가? 나는 가보고 싶어도 불러주는 위정자가 없어서 못 간다. 나 털면 나올거 없는데. 아, 아니야 털면 털리는게 인생. 안가는게 상책이다.)
  2. 결격 사유라고 하는것이 기껏해야 주민등록 주소지를 이리저리 임의로 옮긴 전력이 있는것
  3. 집 살때 실거래 가격과 신고 가격에 차이가 있다는 것, 이러한 결격 사유를 가지고 '자격도 안되는 (뒤지고 살피면 더 더러운) 의원들이 게거품을 물고 그를 물어 뜯는데 이를 통해서 그가 부동산 폭리를 취하거나 그런 것 같지도 않고 (그가 폭리를 취했으면 저 개떼같은 국회의원들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간신간신히 아파트 한채 사거나 팔아본 사람이면 알거다. 실거래 가격과 별도로 부동산 중개인이 "이 경우에는 이정도 신고하시면..."하고 훈수까지 둬 가면서 사실 갑남을녀 대충 경험하는 '위법'이 아닌가.  뭐, 인간적인 정리로 보면 사안이 '경미'하다고 불 수도 있겠다. 

(2) 그는 헌법재판소에서 일 할 자격이 없다.
  1. 때려쳐라, 나가라 이럴수도 있다.
  2. 이럴 수는 있다. 그는 정말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판사로 평생 일해 왔을수 있다.  집안일, 개인 신변따위 모두 ''엄마'에게 맡기고 오직 정의로운 판사가 되는 일에만 전념해 왔을수 있다.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분이 아주 욕심사납게 생기지도 않았고, 나름 반듯한 인상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출중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위인들 중에는 이런 분이 많을 것이다. 집에서 엄마나 부인이나 남편이 모든 것을 다 책임져주고 "너는 가서 일만 잘해라, 그게 애국하는거다" 이렇게, 온 가족이 헌신적으로 그 사람을 도왔을수 있다.  한때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책임지고 총리직까지 거친 어떤 어른은 ATM에서 현금서비스 받을 줄도 몰랐다고 그의 최측근 (사모님)이 증언한 바 있다.  어떤 전문가가 전문영역의 고위직을 수행해 내기 위해서는 '아랫것들'의 일까지 다 살필 여유가 없는 것도 감안할 만 하다. 아인시타인이 제 집 전화번호도 몰랐다는 예를 들어서 이들을 변호하고 싶어진다.  대단하신 분들에게는 대단한 일만 맡기고, 나머지는 아랫것들이 다 알아서 하는 시대분위기에서는 이러한 상황도 가능하다. 이분이 그 사례를 보여 주신 듯 하다.
   그러니까. 이걸 감안하면, 그가 자격이 없다고 말 해서는 안된다.



판단을 하기가 참 애매하다. (내가 자꾸 그 판사님쪽으로 동정적으로 흐른다.)

 
   그런데, 출근하기 위해서 얼굴에 썬크림을 바르다가 문득 생각했다.

한 사람이, 한 전문가가, 자신의 삶의 디테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영역에서만 불편부당하고 합리적으로 일을 잘 해내도 되는 사회라면, 그래도 되는거라면, 우리는 '인간 판사'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 일은 AI 인공지능 판사가 더 잘 해 낼 것이다.  그런 일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더 잘 할거다.  차라리 헌법재판관을 '기계'로 대체하라. 기계가 불편부당하고 합리적으로. 인간적 정리에 치우치지 않고 더 잘 할테니까.


뭐, 아직까지 판사를 대체할 기계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는 문제의 그 판사가 일을 맡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뭐 크게 해 먹은게 있는것 같지도 않고, 그 자리까지 갔을때는 그만한 자격도 쌓았겠지. 올곧고 정의로운 판결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인간적으로 판단할 생각이 없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당신은 기계가 없어서 하는수 없이 충원된 존재에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출세를 위해서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여라" 줄기차게 자식을 내려다보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지시하는 부모를 지칭해서 Helicopter Parent/Mom 이라고 한다.  이아무개 판사님의 어머니는 그 헬리콥터계의 수퍼 히어로 혹은 선구자이셨던 것 같다. (조롱할 생각은 없다... 씁쓸할 뿐이다.)  우리 엄마가 헬리콥터질을 했다고 해도 내가 크게 됐을것 같지도 않고, 저분이 잘 나신것은 부동의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판사님 화이팅 하시고... 나는 나의 삶에 만족할 뿐이다. 



이건 딴 얘긴데, 더스틴 호프만과 스티브 맥퀸이 주연했던 옛날 영화 '빠삐용'에서 이 두죄수가 탈옥을 하기 위해서 산전수전 다 겪고, 마침내 스티브 맥퀸이 '빠삐용' 섬에서 탈출(탈옥)하지 않는가? 더스틴 호프만은 섬에 그냥 남았지 아마.  영화에서 주인공이 꿈을 꾸던가? 어떤 환상속에서 재판을 받는데 주인공은 '무죄'를 강변한다. 그런데, 재판관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데, 그의 죄목은 "인생을 낭비한 죄."   주인공은 수긍하듯 고개를 숙인다. Yesterday's world was a dream like the river that runs through my mind... 법을 잘 모르는 소심하고 비루한 소시민이 보기에 이판사는 큰 죄가 없다. "자기 인생을 자기 인생으로 살아오지 않은 죄" 라면 그도 유죄일지 모른다.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11. 16:23


섬에서 버스를 타고 신촌에 급히 나갔다 돌아왔다.  로터리를 꺾어 돌면 - 앗, 세상이 다 변했어도 '홍익문고'는 그대로이구나!  내가 20대 때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던 30대 때도, 내가 이곳에 없었던 40대 때도 홍익문고는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홍익문고를 지나, 이제 낯선 상점들이 들어찬 그 친숙한 길을 지나 '복성각'은 아직도 있을까? 난데없이 머릿속에 중국집 이름이 떠오르고, 모든 것은 낯설고 나는 마치 상하이의 어느 낯선 거리 구경을 하듯 신촌을 기웃거리며 한눈을 팔며 과거로 걸어 올라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 거리는 내 모습은 어딘가, 중국에서 관광온 중국인 관광객 아주머니 같았을 것이다.)


내가 '굴다리'라고 부르던 그 다리아래 길 마저 예쁘게 포장이 되었고, 정문도, 보도블럭도 모두 새롭다.  한 때, 이곳에서 즐거웠었다.  가을학기에 입학을 하였지. 봄학기까지 마치고 중퇴를 하면서 졸업을 못 한것이 아쉬웠었다. 16:1의 경쟁률을 헤치고 들어간 곳인데, 내가 평생 바라던 꿈의 학교였는데... 나는 졸업 못하고 중도하차하게 된것에 분개했지만, 내게 더 놀라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었다.  더욱 놀랍고 커다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이 자리에 돌아오는데 15년이 걸렸고, 팔팔하던 나는 기운빠진 아주머니가 되어 있다.  그래도... 나의 앞날에 또 어떤 놀라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걸까?




일을 마치고, 대학 정문 앞에서 버스를 잡아 타고 섬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빌딩을 지어 올리는 그 시간동안 나는 어떤 빌딩을 지었는가? 내가 지은 빌딩은 아름다운가? 아니면 대충 얼기설기 지은 부실 건물은 아닌가? 나는 여기서 주저 앉을 것인가?  


토셀리의 세레나데가 흥얼거려지던 아주 짧은 시간, 나는 신촌의 빛 가운데 서 있었다. 


'Diary >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세기 교육의 지향점 4Cs  (1) 2018.09.13
A Helicopter Mom and Her Daughter  (0) 2018.09.12
뭣이 중헌디  (0) 2018.09.09
십일조를 낸다 아니다 내지 않는다  (0) 2018.09.07
Try to remember  (0) 2018.09.04
Posted by Lee Eunmee
Books2018. 9. 10. 09:13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원제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북한의 9/9절이라던 날, 하늘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던 날, 아침 1부 예배를 마치고 모세의 기적을 품고 있는 섬으로 가서 온종일 30년 후의 미래를 위해서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책을 보며 생각을 좀 해 봤다.   


딱히 이 책을 온종일 읽겠다고 섬에 간 것은 아니었는데, 아침에 썰물 시간이라  멀리 펼쳐진 개펄위를 맨발로 징검징검 끝없이 걷다가 텐트로 돌아오는 길에, 그만 어이없게도, 굴밭을 지날때도 다치지 않고 (굴의 군락지를 맨발로 걷는 일은 바다에서 평생 살아오신 분들도 하지 못하게 말리는 일이다. 잘 못 밟는 순간 피가 철철 흐른다.  물론 피를 철철 흘려본적도 있었지...) 영리하게 걸어 나왔는데, 텐트에 거의 다 와서 모래사장의 조개 껍데기에 발을 베었다.  이런 것을 보면 '위험'은 '방심'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칼같은 굴밭도 칼 끝 위를 걷듯 걸으면 가볍게 통과가 되는데, 모래사장의 조개껍질에 발을 다치다니.  방심 -- 그것은 마음의 흐트러짐이다.  내 마음이 왜 흐트러져 있었던 걸까?


그래서, 발을 다쳤기 때문에, 지혈을 하고, 얌전히 온종일 텐트에서 썰물이 밀물로 바뀌고, 바다가 쏴아 쏴아 소리를 내며 차오르는 한 나절, 그리고 해가 기울때까지 책이나 봤다.  21세기에 대한 '점쟁이'의 예언서인가 싶어서 봤는데, 특별할 것은 없었고, 그냥 요즘 많이 나오는 회의론적인, 뭐 대체로 지식인들이 떠들어대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런것, 내가 수업중에 학생들에게 자주 지적하는 것 -- 인터넷에 떠도는 오리무중, 신원불명의 잡지식들은 말 할 나위도 없고, 검증 받은 교재, 논문 조차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말라.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지식은 아무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사람도 아무도 없다. 선생님은 나보다 몇 해 먼저 태어난 사람일 뿐,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찾아내라. 교수인 나를 전적으로 믿지 말라. 나 자신 하루에 수십번씩 넘어지고, 잘못된 생각에 빠지며, 실언을 밥먹듯 하고, 착각도 많이 한다. 의문이 생기면 질문하고, 의심이 가면 일단 자신의 감각을 믿으라. 기대하지 말고 너 스스로 성장하라, 뭐 이런 류의 얘기를 온갖 지식을 동원해서 할 뿐이다. 



  page 393

  4C

    1. critical thinking
    2. communication
    3. collaboration
    4. creativity


그래도 내 생업과 관련된 '교육'의 문제라던가, 몇가지 참고하고 현실에서 적용할만한 제언도 있어서, 책이 책값을 한다고 말할수 있겠다. 한 이틀 정도 시간내서 읽었을때 책 값이나, 시간이 아깝지 않은 정도의 책이다. 수년간 책 꽂이에 꽂아둘 정도의 책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재미있는 현상 한가지는, 책의 말미에 자신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대체로 인생의 갈증을 해소하고 뭐 덕분에 책도 여러권 낼 수 있었다는 '신앙고백' 내지는 '간증' 을 부연했는데, 명상수행의 가치를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새벽기도를 하러 다니는 것도 맥락으로 보면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안믿고의 문제 외에는 형식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는 것이라 그의 수행에 일견 수긍을 하면서도 속으로 픽 웃었다.


대체로, 서양의 '먹물 (지식인)'들이 서양의 사고의 틀 (예컨대, 기독교적 세계관이나 문화)에 신물이 났을때  동쪽의 철학 (불교)에서 답을 찾고 '해탈'이라도 한 양 과장되게 소개하고, 동양의 '먹물'들은 반대로, 동양적 색즉시공에 넌더리가 날 때, 서양적 사고의 틀에서 구원을 찾는 양상이다.  유발 하라리의 경우, 유태인으로 태어난 그의 한계 상황 (유태인들은 그들이 유태인들의 전통 종교를 따르건 벗어나건 그들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어떤 갑갑증을 느끼는 것 같다, 특히 유태인 지식인들은 상충하는 가치체계 속에서 절망하는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평생 거기서 못 벗어난다는 거다)에 대한 탈피책으로, 종교성 자체에 대해서 극렬하게 저항하다가 명상수행으로 안착한 케이스로 보인다. 실컷 '과학적 사고'의 가치와 '검증'하고 '회의'할것 등 '사실'과 '증거'에 기반한 사고를 하라고 게거품을 물고 주문을 외다가 명상수행에서 구원을 얻었다는 대목에서 대체로 독자들이 '뭐냐 이거?' 하겠지만, 원래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신이 아니기때문에, 그가 그렇다고 떠들면 그것또한 수긍해주면 그만이다. 



이 책은 21가지 제언이므로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되며, 챕터별로 관심있는 주제부터 슬슬 선별하여 읽어나가도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화장실에 놓아두고 심심할때 한챕터씩 읽어도 되겠다. 그렇다고 아주 가벼운 책은 아니다. 대학교 1학년이라면 진지하게 들여다 봐야 할 책인데, 내가 나이 50이 넘다보니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봐와서 내게 조금 쉽게 읽힌다고 할 수도 있겠다. 



발을 다쳤으니 바닷물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해질녘에 파도에 들어가고 싶어 '난동'을 부리는 사람. (아래)

어찌보면,  물위를 걷는자를 발견한 '막무가내' '베드로 성자가 '아이고 사부님, 나도 같이 가셈!' 외치고 물위로 달려가는 자세로구나.  내 언젠가 저 물위를 걸으리라.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서해바다, 그 바다 발치에 누워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마를 스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래위에 누워서, 태양이 보내는 자연 광선 속에서 대지와 내가 한 몸이 되어 책을 읽는 기분은, '천국이 이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이보다 더 즐거운 휴식이 또 있을까. 바닷물위에 누워 흔들리는 것 과 같구나.  조금 있으면 예수님 손을 잡고 저 물위를 걸을수도 있겠다.'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  (0) 2020.09.17
눈 기다림  (2) 2019.12.24
자본주의를 구하라 - 로버트 라이시  (0) 2018.08.24
미국,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0) 2018.08.18
나의 삼촌 브루스 리 , 천명관 장편소설  (0) 2013.08.25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9. 05:55


며칠전 새벽 기도를 하고 나오다 교회 현관에 부착된 포스터에 무심코 눈길을 주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 열리는 성소수자 축제 '저지 운동'을 하는 목회자들의 사진과 소속교회, 이름 이런것들이 실려 있었다.  왜 이런 포스터가 교회에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평소에 담임목사님이 '보수적'인 코멘트를 심심치 않게 해서 나를 화딱지 나게 만들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성소수자 축제 저지를 지지하는 제스쳐로 보였다.  만약에 우리 교회 목사님이 그 포스터 안에 들어있다면, 나는 조만간에 '길 잃은 어린양'신세가 되어 예배를 드리러 어디로 가야 하나 심히 고민에 빠지게 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그 포스터에 우리 교회 소속 목사님 사진이 들어있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성소수자가 아니다.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비록 내가 성소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소수자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다수자라고해도 핍박 받기는 매한가지라서, 인생은 쓴뿌리와 같다.  다수자도 핍박 받는다고?  내가 보기엔 그러하다.  잘 알수는 없지만, 지구상의 전체 인구비율을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조금 더 많다고 한다.  하지만 원시사회라면 모를까, 시스템이 갖춰진 인류사회에서 다수인 여성이 힘을 가졌던 시기는 없다. 다수라도 힘이 없으면 역시 핍박의 대상이지. 또, 노인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가지만, 노인은 갈수록 '소수자'로 전락을 하게 될 것이다. 힘이 없으니까.  그리고 나도 계속 살면 노인이 될 것이다.  '소수자'의 문제는 머릿수의 문제는 아니고 '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지구상의 성소수자들의 인권 문제에 내가 뭘 얼마나 알겠는가?  내 일이 아니라서 별로 관심 없다. 그러니 아는척 하기도 싫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나를 해코지 하지 않는다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각자 잘 살면 되겠지. 그러니까 성소수자들이 모여서 뭐를 하거나 말거나 남의 잔치니까 그냥 신경 안쓰고 살아가는 편이다. 


그런데, 보수기독교 단체에서는 남의 잔치에 참 관심이 많은듯하다. 어제 뉴스에는 이 지역에서 개최하려고 했던 성소수자 길거리 행사가 기독교단체의 조직적 방해로 인해서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 십자가를 끌고 예수님 흉내를 내면서 방해한 사람들도 보인다. 거기 십자가는 왜 끌고가니 근데? 네가 예수님이야? 그거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내가 돌이켜보면, 저런 사람들의 수괴들은 아무개 대통령님을 위한 구국 기도회, 조찬기도회 그런 것에도 열심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런 사람들은 권력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약자들을 십자가로 짓밟은일에 앞장선다. 권력자가 뭔가 잘못할때는 --"오직 기도로 이나라를 살리세" 이렇게 외치고,  약자들이 뭉쳐서 뭔가 할 때는 --"오직 기도로 저들을 구하세"가 아니라 몸으로 가서 훼방을 놓고 핍박한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악덕 대기업들이 수괴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현장에 십자가 끌고 가서 성토를 하고, 성소수자들이 축제할때 '아무쪼록 이땅에 두루두루 평화를'위해 기도하는 방법을 취하면. 도저히 그것이 내 생각과 달라 팔 벌려 감싸줄수 없을때, 그냥 두손 오무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안되나? 꼭 가서 훼방을 놓아야 하느님이 기뻐하시나?  왜 위정자나 힘있는 것들이 잘 못할땐 그냥 손 오그리고 기도만 하다가, 겨우 몇명 모여 축제하는 일엔 몸을 던져 훼방을 놓나?  좀 내버려 두라.


다들 몰려갈데가 없어서 심심해서 그리 몰려가는건가? 어디로 몰려갈지 가르쳐줄까? 하느님의 성전을 자기 사업체쯤으로 알고 재벌가 대물림하는 것만 어디서 배워서 그것 흉내내는 명성교회 그런데 가서 좀 깽판좀 치라. 신도들을 성 노리개로 알고 주물러대는 목사들 있는 교회좀 가서 깽판 좀 치라. 일단 교회부터 샅샅이 정화시키고 청소한 다음에, 그 다음에 남의 잔치에 가라.  교회를 똥통을 만들어 놓고 왜 남의 잔치에 감놔라 대추놔라냐구. 그리고 제발 당신들 그 깽판 놀음에 우리 예수님 좀 끌어들이지 말라. 짜증나니깐. 



'Diary >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A Helicopter Mom and Her Daughter  (0) 2018.09.12
그날의 햇살  (0) 2018.09.11
십일조를 낸다 아니다 내지 않는다  (0) 2018.09.07
Try to remember  (0) 2018.09.04
강용석씨, 코미디는 이제 그만, 식상하니까...  (0) 2018.08.28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7. 11:09


나는 몇해 전, 죽을때까지 예수님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임을 작정했고, 가급적이면 일요일 예배에 꼬박꼬박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제법 신통하게 모범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 '십일조'를 진짜로 '십일조'로 낸 적은 한번도 없다.


십일조면 십일조지 진짜가 어딨고 가짜가 어딨는가?


십일조는 원래 내 수입의 1/10을 내는 것이 십일조다.  왜 그렇게 내야 하는데?  구약에 명시되어 있으니깐. 


그러면 뭐가 문제인데?


전에,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가 요즘은 통 교회에 안나간다는 직장 동료와 교회 다니는 얘기를 하는데 그가 내게 물었다, "십일조는 잘 내시죠?"  이에 대한 내 대답은, "그...그것이...글쎄요...낸다고 할 수도 없고, 안낸다고 할 수도 없고..."


나는 내 수입의 1/10을 내가 교회에 바쳐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  뭐, 세금도 많이 뜯기니까, 하느님께서 시키시는대로 내라면 내면 그만인데, 그런데 좀 미심쩍다.  뭐가?  내가 정말로 수입의 1/10 십분지일을 교회에 내면 하느님이 기뻐하실까?  (갸우뚱) 교회 주인아저씨가 기뻐하는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 예수님이 나때문에 돌아가신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예수님이 뭐 내라면 다 내겠지만,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믿는다.  목사는 인간이기때문에 목사를 전적으로 신임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의 교회구조에서, 목사님이 마치 개인사업하듯이 '내 교회'라는 의식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교회 사업이 잘 되면 그 교회 사업을 자식, 손자에게 대물림하는 현상을 자주 목도하기 때문에, 어딘가 교회 주인아저씨에게 삥뜯기기 싫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신도가 십일조 낸것을 사리사욕을 위해 착복하면, 그것은 하느님이 알아서 벌 주실거고, 너는 신자로서 너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거라고.  나는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교회당 주인아저씨의 배를 불리지 않으면 그들은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뭐 타락 시켜놓고 천벌 받으라고 하기보다는, 타락의 여지를 만들지 않는게 착한 일 아닌가?



딱히 현재 문제가 되는 '명성교회'뿐만이 아니다.  어느 교회에 원로 담임목사 (그 교회당 개척해서 크게 일군 주인아저씨)가 있고, 부목사가 있고 그럴경우, 내가 보면 그들의 관계가 착실한 주종관계처럼 보인다.  담임목사는 제왕같고 그가 월급주는 (사실 그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닌데...) 부목사는 그 앞에서 쩔쩔매는 하인이다. 옛날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그랬을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나는 그래서, 어떤 개인이 정서적 Ownership을 갖는 (법적으로 자기것이 아니라해도 정서적으로 이미 자기것이고, 주변 사람들도 대충 그렇게 넘어간다) 그런 조직을 나는 온전히 '하느님의 교회'라고 보지 않는 편이다.  그런 사람을 나는 그냥 '건물 주인아저씨'라고 보는 편이다. 사실 그가 주인도 아니다. 이건 마치 삼성이 이재용것이 아닌데도 이재용이가 주인인것처럼 군림하는 것과 일치한다. 내가 뭣하러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번 돈을 '교회 건물 주인아저씨 행세를 하는' 사람이 타락하는데 갖다 바치는가?  남을 타락시키면 안된다. 하느님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나는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서로 동등하고 당당하길 바란다. 부목사님이 어딘가 쩔쩔매는 자세를 취할때 바라보는 입장에서 유쾌하지 않다. (내 시선이 삐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위계질서가 대단한 조직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목사님들을 언제든지 타락에 빠질수 있는 나약한 인간으로 보고, 그분들을 내 신앙생활의 '조력자'나 '지도자'로 보는 편이지 어떤 신성한 존재로는 보지 않는 편이다. 큰 기대도 없고, 별로 나를 실망시키지도 않는다 (애초에 기대가 별로 없으니까). 가능하면 그분들의 노고를 존중하고 예절바르게 대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십일조를 안바친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매달 일정액을 '십일조'의 이름으로 교회에 언라인 송금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액수이다. 교회라는 하나의 커뮤니티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목사님들의 생계를 위한 월급도 나가야 하고, 선교도 해야하고, 교육도 해야하고, 경비가 들것이 확실하고, 내가 그 교회의 구성원이므로 일정부분 구성원으로서 '회비'를 내는 것이 마땅하다.  딱 그정도를 낸다.  만약에 우리 교회 목사님이나 장로, 권사 이런 분이 내게 "당신, 버는게 이것밖에 안되오? 십일조, 수입의 십분지 일을 내시오!" 이러면 나는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매월 일정액 내는 것을 중지할 생각이다. 그 액수만큼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곳에 보내면 된다.  그렇다고 교회를 옮길 생각도 없다. 내가 하느님과 대화하고 기도하러 교회다니지 뭐 사람 만나러 교회가는게 아니니까. 사람이 싫어도 나는 교회 간다. 



내가 볼때, 명성교회라는 저 괴물을 만든이들은 문제의 목사들뿐만이 아이다. 문제의 애비와 그 자식 외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명성교회를 쓰레기통으로 만드는데 한몫씩 한거다. 왜 저런 인간에게 돈을 쓸어다 바쳐가지고 저런 괴물을 만들어 놓은건가? 저것들이 돈 때문에 저러는거지, 교회가 오막살이에 빚투성이라도 대물림한다고 난리굿을 할까.


아무튼, 나는 내 식으로 내가 정한 - 하느님께 여쭙고 내가 결정한 십일조를 꼬박꼬박 낸다. 


그런데, 어쨌거나, 그 거의 평생을 열심히 교회에 다니다 최근 때려치고 자유주의자가 된 그 사람과 십일조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물었다. "그런데 그 정말로 수입의 십분지일에 해당하는 십일조를 낼때, 그게 세전인가요 아니면 세후인가요?"  Before tax냐 after tax냐 궁금했던거다.  그 과거에 독실한 예수쟁이였다가 지금은 무신론자가 된 그 분은 아주 엄격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Before Tax입니다. 일단 세전 총액에서 십분지일을 계산해서, 그걸 내야 하는겁니다."  그는 무신론자가 되기로 하기 직전까지도 평생 엄중한 Before Tax 십일조를 내 왔다고 한다. 나보고도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면 그렇게 내야 한단다. 헤헤헤. 나의 예수님은 그런거 신경 안쓰시는것 같더라, 뭐. 나는 내가 백수라서 땡전 한푼 안 벌고 놀때도 내가 정한 십일조는 냈다. 나하고 내 하느님과의 관계에 남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아무도 흔들수 없다. 








'Diary >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날의 햇살  (0) 2018.09.11
뭣이 중헌디  (0) 2018.09.09
Try to remember  (0) 2018.09.04
강용석씨, 코미디는 이제 그만, 식상하니까...  (0) 2018.08.28
니체와 달팽이  (0) 2018.06.18
Posted by Lee Eunmee
Diary/Life2018. 9. 4. 14:35



점심시간에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높고 파란 하늘과 먼 바다를 내다보다가, 문득, '아 구월이지!' 했다.  9월이 벌써 와 있었는데 그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달력을 때에 맞춰 넘기면서도 내가 9월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 9월이다.  9월 내내, 하루 하루 눈이 뜰때마다 내가 9월 속에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순간 순간 내가 9월의 햇살 속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9월이니까. 


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