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18. 12. 4. 12:03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 나온 한 장면이 나를 아주 잠깐 '혼란'에 빠뜨렸다.  


하바리 출신의 재벌 막내 아들을 정부 요직에 있는 하바리 출신의 인사들이 초청해 놓고 새파랗게 젊은 재벌 막내가 나타나자 한참 나이 많은 '선배님'들이 일제히 기역자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한다. "더 숙여 임마!" 이런 대사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재벌'이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이고 정부 관리들은 그의 하수인처럼 보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리둥절, 처연했다. 



저...저...게 이 세상의 진짜 모습인걸까?



물론 허구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저게 진짜 모습인걸까?' 할 필요는 없다. 허구니까.  하지만 그게 정말 허구인가? 재벌과 밝게 미소짓던 여자 대통령, 그 여자 대통령을 탄핵하고 그자리에 오른 남자 대통령 역시 그 재벌과 밝게 미소짓지 않던가. 그것은 현실이지. 그 재벌은 무슨 짓을 해도 '솜방망이' 처벌을 이겨내고 늘 빙긋 웃는다.  내가 본 현실과 영화속의 장면이 왜 그렇게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가?



그...그..그러니까...내가 여태 그걸 몰랐을 뿐, 세상은 저런것이었나보다.



내가 내 오십여 인생을 돌아보니, 극단적으로 가난하지도 않았고, 떵떵거리는 부자인적도 없고, 성실하게 평생 월급쟁이로 남들만큼 노력하고, 남들만큼 고민하면서 굶어죽지 않고, 도태되지 않고 도란도란 살면서,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재벌 따위 남의 일이니 신경 안써도 되었고, 재벌이 크게 부럽지도 않았고 (어차피 부러워한다고 될일도 아니니 마음 접었고), 내 인생 재벌과 상관없이 충분히 잘 살아내고 있다는 상상 속에서 살아온 것 으로 보인다. 재벌이 내 앞에 있어도 내가 고개 숙이고 허리 숙이고 인사 해야 할 이유도 없고, 너는 너 나는 나 상관없는 존재였을 뿐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삶 역시 저들의 '마수' 안에서 요리되고 기획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태 멍청하게 살아온게 아닌가 슬슬 회의가 든다. 



좋아. 니네들은 너희들의 게임의 규칙에 충실하게 살아라. 나는 다행히 큰 화를 당하지 않고 눈치껏 소시민으로, 방관자로, 치사하게, 비굴하게, 양심껏, 적당히 회유되고, 적당히 굴복하면서 연명해왔다. 



그런데 말야.  이제 내가 오십이 넘었거든.  별로 가진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을것으로 보이지도 않아요. 지금 가진것만으로도 그냥 대충 먹고 살면 근근히 남한테 손 안벌리고 살다 죽을수 있을것도 같거든.  정 안되면 바닷가에 가서 조개 줍고 굴 따고, 미역 따서 쌀밥에 국 끓여 먹다 죽어도 우짜든동 살아 낼 수 있을것 같거든.  그런 계산이 서자, 평생 비굴하고 소심하게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하면서 사회 정의보다는 방관자로 돈 한푼이라도 알뜰하게 절약하고 챙기면서 살아온 내 앞에 다른 계산이 서기 시작한다.



내가 여태, 이 세상에서, 크게 손해보지 않고, 연탄가스에 크게 시달리지도 않고, 고시원 생활도 한번 해 본적 없이 떵떵거리고 잘 살아왔는데, 그것은 내 덕분이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아서, 내가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산 결과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나도 '사람'처럼 살고 싶어진단 말이지.  사람처럼 살고 싶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한번쯤은 나도 모든 것 내려놓고 '사람'으로 살다가 가야 하는거쟎아. 딱 한번 만이라도 '사람'의 행동을 하고 싶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많이 살았어. 편히 잘 살았어. 남들이 고통을 겪을 때 내 잇속만 챙기며 잘 살아냈어.  그러니 이제 한번쯤은, 딱 한번만이라도 '사람'의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이제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  오늘 살다 내일 죽어도 '사람'으로 죽겠어. 



나이 먹은 아줌마는 무서운게 없어지면서, 슬슬, 탈바꿈을 하고 싶어진다. 먹을 만큼 먹었고, 살만큼 살았어. 나는 평생 충분히 비굴했고 충분히 비정했으며 충분히 무책임했고 충분이 제 밥벌이에 급급했어. 마이 무따. 고마하자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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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