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Life2018. 11. 20. 17:14


미국의 중등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은 글쓰기 과제를 할 때 어떤 '포맷'을 유지하도록 교육 받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주로 MLA (Modern Language Association) 스타일을 영어(그들의 국어)시간에 익히고, 대학에 들어가면 전공 분야에 따라서 각기 다른 스타일을 사용하게 되는데, 문학, 창작 쪽에서는 MLA, 과학 분야에서는 APA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그리고 사회학이나 역사학 쪽에서는 Chicago 스타일을 대체로 사용한다. 


내가 하는 수업중에는 각기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이 세가지 스타일을 학생들이 제대로 맞춰서 사용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의 글을 써내도록 하는 과정도 포함된다. 내 학생들은 내가 이 헷갈리는 괴물같은 '스타일'들에 대해서 바른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밤사이에 학생에게서 '글쓰기 관련해서 급히 상담할 것'이 있으니 아침에 뵐 수 있느냐는 이메일이 와 있었다. OK 답을 보냈더니, 이른 아침에 두명의 학생이 나타났다. 이들이 머뭇대면서 제기하는 문제:



학생:  "저번에 수업에서 시카고 스타일 글쓰기 배웠쟎아요...." 

나: 응, 전에 한번씩 훑었지. 자료는 언라인 자료실에 다 올려 놓아서 언제든지 볼 수 있쟎아. 뭐, 이해 안되는게 있나?

학생: 그런데....교수님이 시카고 스타일 샘플로 주신 자료가 암만봐도 이상해요...

나: 그래?

학생: (프린트된 자료를 내보이며) 이 샘플은 시카고 스타일 샘플이 아니라 APA스타일 샘플같아요 (우물우물)

나: (휙 보고) 어! 이건 APA인데! 내가 이걸 시카고 샘플이라고 그랬어? 자료실에 그렇게 올렸어? 아이고, 내가 실수했네!

학생: (우물쭈물) 아니요. 교수님이 아니고요, 우리 교수님이 (우물우물)...


몇번의 질문을 거쳐서 파악한 내용은, 전공 교수께서 텀 페이퍼 과제를 내주면서 '시카고 스타일'로 쓰라고 지시를 했고, 학생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샘플 에세이까지 자료실에 올려 주셨는데, 두 학생이 함께 공부하며 아무리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것은 시카고 스타일 샘플이 아니더란 것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워가지고, 밤에 둘이 공부하다가 -- 낼 아침에 글쓰기 선생, 그여자 (--> 나)한테 가서 확인을 해보기로. 


전공학과 교수님이 엉뚱한 자료를 올려주셔서 학생들이 혼란에 빠진것이군. 


그래서 내가 학생들에게 설명을 해 줬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도 수업중에 단어를 틀리게 적는다거나 엉뚱한 소리하고 그러지 않는가.  교수들이 머리가 핑핑돌게 힘든 사람들이야. 수업만 하고 노는게 아니라 할 일이 아주 많아요. 그러다보면 실수를 할 때도 있지. 이것은 교수님이 좋은 자료 올려준다고, 안해도 될 일을 하시면서 실수를 하신거지.  그러니 자네들이 좀 이해를 해 줘야 하네.  내가 APA 샘플과 Chicago 샘플을 프린트 해서 자네들이 사용할 것과, 그 교수님이 사용할 것을 줄테니, 그 교수님께는 나를 만났다는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올려주신 자료에 착오가 있는것 같습니다. 이것이 맞는것이 아닌지요 묻고, 이것을 드리게나.  교수님이 좀 당황스럽고 미안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착오를 바로잡을수 있는거니까.  자네들의 꼼꼼하고 세심함이 다른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전공 교수께도 도움을 드리는 것이고.  어차피 학문의 장에서는 교수 학생이 서로 도우면서 가는거라네.  나한테 다녀왔다는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그러면 추후에 내가 아주 난처해지니까), 둘이 가서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짓기를 바라네. 문제를 지적했다고 화를 내거나 삐질 교수님이 아니시니 안심하고 가서 말씀을 드리게. 건투를 비네. 


학생들이 굉장히 수줍음이 많고, 말을 우물우물하는데 공부는 정말 열심히 한다. 그러니 그 밝은 눈에 착오가 보였겠지.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용기를 내어 교수의 착오를 매너있고 세련되게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이다. 


나도 수업중에 학생들이 의문이나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 학생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그를 인정해준다. 원리는 간단하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수업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 그렇지만 가끔 나도 실수를 하는데, 내 실수를 내가 인정하면 된다. 내 실수 때문에 학생들이 나를 거부하면 거부 당하는거고, 무시하면 무시 당하는거다. 나는 솔직하게 살면 된다. 내 능력밖의 일을 한다 싶으면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보면 되는거고. 이제부터 죽을때까지 나는 '가짜'로 살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모습 그대로. 허위나 위선을 최소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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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ee Eunmee